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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책장-여유당*與猶堂에서 / 구애영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그대의 표정을 보네

 

파도소리 스며있는 머리말 속살을 타고

 

첫 장을 지나는 노을

 

갈채로 펼쳐지네

 

오래도록 서 있었을 배다리 뗏목 위로

 

저문 하늘을 업고 떠나는 새떼를 향해

 

별들도 산란을 하네

 

넘어가는 책장들

 

갈잎은 결을 세우려 마음을 다스리는가

 

안개의 궤적을 뚫고 스러지는 이슬안고

 

목민의 아슬한 경계

 

은빛 적신 판권이었네

 

*다산 정약용 생가




[당선소감] 시조의 길, 늘 처음 걷는 듯 설레고 가슴 벅차


그날, 눈이 내렸습니다. 당선의 소식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연서였습니다. “어멈아, 산 사람은 묵어야 살지야, 우리!” 눈을 감으실 때까지 서숙미음을 드셨던 어머니! 당신의 똥 싼 기저귀를 안 보이려고 거식증으로 생을 마치신 친정어머니! 두 분의 어머니에게 이 기쁨의 밥을 올리렵니다. 지난여름 유라시아 문화포럼으로 연해주에서 발해의 시원(始原), 솔빈강을 바라보았습니다.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깊고 잔잔하게 펼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 물줄기가 시조의 36구 정제된 가락의 도저함으로 나를 달뜨게 했습니다. 걷고 걸어도 이 길은 늘 내게 처음 걷는 길처럼 설레고 가슴 벅찹니다.

 

서투르고 느린 저를 그 사유하는 시조의 길로 이끌어 주시고 지금까지 지도해 주신 이지엽 교수님께 가슴 깊이 감사드립니다. 명지전문대 문창과 교수님들, 시민대 하린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시와 길동인들, 급우들, 여러 문우님들 격려해 주시고 힘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또 저희 사랑하는 가족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납니다. 야간 수업을 마치고 자정이 되어서야 집으로 갑니다. 길섶에서 만난 바람과 별들, 비오리 가족들, 갈잎의 향기도 모두 저의 친절한 친구였지요. 부족한 글을 흰 눈밭에 새겨 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서울신문사에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우리 시조의 품격에 자긍심을 가지고 더 겸허히 공부하여 좋은 작품 쓰겠습니다.

 

1947년 전남 목포 출생 목포 정명여고 교육행정직 정년퇴임 현재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재학 중




[심사평] 감각적 은유와 언어의 새로운 조형에 가산점


새 아침의 언어는 왜 햇살처럼 밝고 싱싱한 푸르름인가. 오랜 밤을 지나왔기 때문이리라. 우리의 모국어가 낳은 시조가 해를 거듭할수록 뻗쳐오르고 있음은 저 깊은 역사를 꿰뚫고 솟아나는 이 땅의 시의 원천인 까닭이다.

 

시의 위기를 말하고 있는 이때에 시조의 날을 벼르는 손길들이 쉬지 않고 있음을 응모 작품들에서 읽을 수 있어 반가웠다. 몇 번을 걸러서 당선권에 오른 작품들은 저마다의 글감과 말 꾸밈이 잘 익어서 밀어내기에 어려움을 겪었다.

 

, 혹은 상형문자’(장은해)는 시조를 다루는 능숙함이 빛났으나 길 없는 만행의 길” “내출혈하는 저녁놀같은 타성의 표현이, ‘낮은 별자리’(조경섭)해떨어진 숲속의 단출한 상차림등의 구수한 입담이 돋보였으나 사람 얘기가 빠진 자연 묘사만이, ‘지지대에서 머뭇거리다’(용창선)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는 사부곡인데 3수로는 속내를 다 못 그린 것이, ‘다시 완경’(오은주)은 꽃을 여자의 알레고리로 형상화했는데 낱말을 다섯 번씩 써야 했는지? 이런 점들이 지적되었음을 알린다.

 

당선작 바람의 책장-여유당에서’(구애영)는 다산 정약용의 생가에 가서 그 생애와 드높은 학덕의 온축(蘊蓄)을 감각적 은유로 풀어 가는 능숙함과 사실(史實)에 얽매이지 않고 새롭게 조형하는 어법이 가산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그대의 표정을 보네로 첫 수 초장을 산뜻하게 깨치더니 목민의 아슬한 경계/ 은빛 적신 판권이었네로 끝 수 종장을 닫는 결구 또한 흠집이 없다. 누구는 시조의 글감이 왜 옛것이어야만 하느냐고 물을지 모르나 옛것을 낡은 것으로 버려 두지 않고 새것으로 만들어 오늘의 삶에 빛을 씌우는 일이 문학, 예술의 몫이 아닌가. 사뭇 무거운 주제를 새 문법으로 각자(刻字)해 내는 기량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심사위원 : 문인수, 이근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