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중국 북송 


정화통보(政和通寶) 

(1111 ~ 1117년)



  중국에는 다양한 화폐가 만들어졌다. 전 세계 화폐를 모두 합친 것보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화폐의 양이 많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니 중국 화폐가 얼마나 다양한지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화폐를 발행해왔다. 오래된 역사와 넓은 영토만큼, 중국의 화폐의 종류는 다양하다. 이번에 소개할 수집품은 중국 북송 시대에 만들어진 ‘정화통보’이다.




  정화통보는 송 휘종 때, 발행되었다. 


  송 휘종에 대한 설명은 아래 ‘중국역대인명사전’의 내용으로 대신한다.


  조길(趙佶). 북송의 제8대 황제. 신종(神宗)의 아들이다. 소성(紹聖) 3년(1096) 단왕(端王)에 봉해졌다. 원부(元符) 3년(1100) 형인 제7대 황제 철종(哲宗)이 병사하자 즉위했다. 정치는 채경(蔡京) 등 총신(寵臣)들에게 떠맡기고, 자신은 태평 시대를 맞아 궁정과 정원 등을 조영(造營)하여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한편으로 문화재를 수집 보호하고 서화원(書畵院)을 설치해서 궁정서화가를 양성하여, 문화사상 선화 시대(宣和時代)라는 한 시기를 연출했다. 시문(詩文)과 서화에 뛰어났고, 특히 그림은 전문가의 경지에 달하여 풍류천자(風流天子)라는 칭호를 얻었다.


  정화(政和) 5년(1115) 북만주(北滿洲)에서 여진족(女眞族)이 요(遼)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금나라를 세웠을 때, 동관(童貫)의 진언을 받아들여 금나라와 동맹하여 요나라를 협공하고, 국초(國初) 이래의 염원이던 연운십륙주(燕雲十六州)를 수복하려고 꾀했지만, 선화(宣和) 7년(1125) 금나라 군사의 진입(進入)을 초래했다. 흠종(欽宗)에게 양위(讓位)하고 스스로 도군황제(道君皇帝)가 되어 책임을 모면하려고 했지만, 재차 침공한 금나라 군사에 의해 국도 개봉(開封)이 함락되고, 흠종 기타의 황족, 후비(后妃) 등과 함께 금나라 군대에 잡힘으로써 북송의 멸망을 가져왔다. 이것이 정강(靖康)의 변(變)이다. 북만주의 오국성(五國城, 黑龍江省 依蘭縣)의 배소(配所)에서 병사했다. 23년 동안 재위했고, 글씨를 잘 써 수금체(瘦金體)로 불렸다. 『천자문권(千字文卷)』이 전한다. 그림도 잘 그려 「부용금관(芙蓉錦鸛)」이 있다. 시사(詩詞)에도 능해 『선화궁사(宣和宮詞)』 등이 있다.



  중국 엽전들은 거의 연호를 쓰고 있는데, 정화통보가 만들어진 시기의 연호가 ‘정화’다. 정화라는 연호는 1111년부터 1118년, 총 8년 동안 사용되었고, 엽전의 발행은 1117년까지 이루어졌다.


  짧은 발행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정화통보는 현재 꽤 많은 양이 남아있다. 중국은 넓은 영토만큼, 엄청난 양의 화폐를 만든 것이다. 우리나라 고려시대 유적지나 무덤에서도 중국 엽전이 발견되곤 한다. 이는 중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실제로 화폐로 통용 되었다기보다 재물을 축척하거나 기념품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 속 정화통보는 상태가 매우 양호한 것으로 출토품(땅 속에서 발견된 것)이 아닌전래전(사람의 손과 손을 거쳐 땅 위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인다.

 

  많은 수집가들이 중국 엽전특히 송나라 때 만들어진 엽전에 열광하는 이유는 바로 서체 때문이다사진 속 정화통보의 서체는 진서로 매우 아름다운 서체를 자랑하고 있다예서와 전서체도 있는데 한자 때문인지 엽전이 매우 아름답다.



  중국 엽전은 비교적 값이 저렴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저 엽전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엽전이 발행된 시기와 내력을 아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정화통보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수집광(狅)' 카테고리의 다른 글

1666년 스웨덴 주화  (2) 2014.10.05
키르기스스탄 가죽 목걸이  (0) 2014.10.01
북한 1전 주화  (1) 2014.09.27
시내버스 토큰 1탄  (3) 2014.09.25
바누아투(Vanuatu) 10바투(VATU)  (2) 2014.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