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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생일 축하해 / 안지은

 

걷던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인데, 신기하지

낯선 골목에 당신의 얼굴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니

네게선 물이 자란다, 언제 내게서 그런 표정을 거둘거니

누군가가 대신 읽어준 편지는 예언서에 가까웠지

막다른 골목길에서 나의 감정을 선언하니

벽이 조금씩 자라나고, 그 때에

당신은 살아있구나, 눈치 챘지

문장의 바깥에 서서

당신은 긴 시간동안 사람이었지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언젠가 손을 맞잡았던 적이 있지, 짧게

우리라고 불릴 시간은 딱 그만큼이어서

나에겐 기도가 세수야

당신을 미워하는 건 참 쉬운 일이지

오래 마주보고 있기엔 당신의 눈동자는 너무나 투명해

표정은 쉽게 미끄러지고

벽을 등지고 걸으면 내 등이 보이는 오늘

누구랄 것 없이 녹아 흘러내리지만

언제나 당신은 젖지 않지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당신의 종교가 되길 바랄게

기일 축하해,





<당선소감>


 불면에 시달린 날들 이제 푹 자고 싶어요

 

 극심한 불면증이었다. 열대야를 기르는 나날. 지옥에는 다 자란 내가 있다고 믿으며 매일을 버텼다. 내게 죄를 부여하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하루에 삼켜야 할 알약이 늘어나는 만큼 내가 소화해야 할 내일이 쌓였다. 하루 열두 시간 노동을 해야 서울살이가 가능했다. 퇴근길 버스는 늘 기분 나쁠 정도로 따뜻하고, 나는 언제나 잠깐의 사람. 버스에서 내리면 가야 할 집은 있지만 정착할 수 있는 집은 없는 사람. 나는 꿈에서조차 잠이 든 척을 했다.

 이런 제게 깊은 잠을 잘 수 있도록 손을 뻗어주신 정호승, 문정희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려요. 명지대학교 김석환·이재명 교수님, 품에 넘치도록 저를 꼬옥 안아주시는 신수정 교수님, 다정한 편혜영 교수님, 감사합니다. 늘 저를 예뻐해 주시는 남진우 선생님, 부족한 제 언어에 힘을 실어 주시고 다듬어 주셨어요. 영원한 나의 캡틴, 이영주 선생님께는 언어라는 틀에 차마 다 담아내지 못할 마음뿐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게 마음 써주신 천수호, 박상수 선생님께도 감사 인사 올립니다.

 빛나는 순간에 항상 함께해준 윤수, 지윤, 주혜, 은혜, 예솔. 나의 꽃들. 앞으로도 함께하자. 나의 안식처 희정 언니, 애틋한 선화. 계속 글 쓰자. 오래오래 축하해준 태우 오빠, 고마워. 보고 싶은 민용 오빠, 인영, 보배 언니. 지원, 유경, 지애, 양정. 너희를 떠올리면 내 마음은 이미 대구야. 나보다 더 기뻐해준 지향, 보람 언니 고마워요. 건강하자, 지수. 내 대학생활의 즐거움, 흑풍. 제 시의 처음을 읽어준 선희, 혜민, 은희 언니. 용준 오빠. 명지대 시모임, 이미 나에겐 최고의 시인들. 그리고 내 영혼의 쌍둥이 우선. 내가 심해로 가라앉을 때 넌 내 산소통이었어.

 엄마, 기철. 당신들은 나의 원동력. 내가 시를 쓰는 이유. 나의 수호천사 이모, 고마워. 이모부도. 할머니, 고모,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당신들의 기도 덕분에 제가 숨을 쉽니다.

 마지막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제야 답합니다. 사랑해요.


◎ 약력

▶ 1992년 8월 6일 서울 출생

▶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4학년 재학 중


<심사평>


 소통의 詩… 삶· 죽음에 대한 역설적 인식 돋보여

 

 최종심까지 올라온 16명의 시 50여 편을 읽고 느낀 공통점은 '소통로를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시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두루뭉수리여서 쓴 사람 혼자만 읽고 서랍 속에 넣어두어야 할 시를 읽게 되는 고통은 무척 컸다.

 "이전의 이후의 반물질과/ 무기체의 감각/ 물렁뼈에 속하는 밤/ 귀, 귀(鬼), 현실/ 가느다랗게 흐트러져가는 형상에 대한/ 신뢰는 얼마나 대단한가."(이현정 '벽에 걸어놓은 외투는 살아 있다' 부분)

 한 예에 불과하지만 최종심에 오른 시는 대부분 시 스스로 독자의 이해를 거부한다. 현란한 기교가 난무하고 몰이해를 바탕으로 한 산문성이 두드러진다. 시의 심장이 은유라면 그 은유의 심장이 피를 흘리다 멈춘 듯하다. 다양성이 미덕인 시대에 그 다양성을 긍정한다 해도 지나칠 정도로 관념적이다. 마치 관념의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이는 서정과 구체에 뿌리를 내린 비관념적 소통의 시는 이미 낡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시는 낡았든 새롭든 소통의 통로를 통해 써야 한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흐르지 않는 꽉 막힌 수도관을 통해서는 물 단 한 잔도 받아 마실 수 없다. 그동안 한국 시단은 뒤틀린 추상과 관념의 언어로 구축된 불통의 시를 새로움이란 이름으로 지나치게 관용하거나 방치해왔다. 행과 연 구분을 하지 않아도 되는 필연성이 결여된 산문 형태의 시와 관념적 불통의 시가 한국 현대시의 미래라고 여기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오늘의 현상은 한국 현대시가 어떤 한계에 다다른 부정적 현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구어체로 이루어진 당선작 안지은의 〈생일 축하해〉는 당선작이 될 만큼 작품으로서 우수성이 탁월했다기보다는 소통 가능한 시가 그래도 이 시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생일 축하해〉는 삶과 죽음을 동질 관계로 인식한 바탕에서 쓴 시다. 산 자가 죽은 자를 일상의 순간에 만나 깊은 애증의 대화를 나눈다. 죽음이란 "걷던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이라는, 기일이 생일이고 생일이 바로 기일이라는 이 역설적 인식은 죽음을 도외시하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종심에서 논의 대상이 된 작품은 박은지의 〈공유지〉, 박진경의 〈다이빙〉, 이종호의 〈작은 방〉, 이현정의 〈북극점 한 바퀴〉 등이다. 이 작품들에 대해서는 시는 언어로 이루어지며 그 언어가 지닌 구체의 본질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심사위원 : 정호승, 문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