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당선작>

 

태엽 / 김경주


등장인물


장씨 65세 (시계 수리기술자)

장씨 아들 (29세)

여인1

여인2(휠체어)

손님1

손님2

경찰

간호원

건물주

 


시간 현재 11월. 저물 무렵.


공간 낡은 건물상가 시계 수리점 내부.


 

무대 3평 남짓한 공간에 캐비닛이 한 개 놓여있고 여기저기 시계 수리공구들이 보인다. 한쪽 테이블에 고장난 탁상용 시계들이며 회중벽시계가 놓여 있다. 반대편 테이블에 앉아 장씨와 장씨 아들이 한쪽 눈에 확대경을 눈에 착용한 채 작은 핀셋을 들고 현미경 글라스 위에 놓인 시계 부품을 조립하고 있다.



 

1


장씨 : 보여?


장씨아들 : 안보여.


장씨 : 잘 봐.


장씨아들 : 눈 아파.


장씨 : 하단에 아기 손톱만한 진자보이지?


장씨아들 : 톱니바퀴?


장씨 : 응


장씨아들 : 작다. 몇 미리야?


장씨 : 2 미리. 보여?


장씨아들 : 응. 보여.


장씨 : 심장이 뛰지?


장씨아들 : 딸깍 딸깍 뛴다.


장씨 : 그 진자의 진동이 한번 톱니로 전달되는데 1초가 걸려.


300년 동안 이어진 원리야.


장씨 : 다들 참 애쓴다.


 


확대경을 빼내고 눈을 비비는 장씨아들.


장씨는 여전히 확대경으로 시계수리에 집중하고 있다.


 


장씨아들 : 그만 할래. 피곤해.


장씨 : 이리 와봐. 신기한 거 보여줄게.


장씨아들 : 눈이 시려. 못하겠어.


장씨 : 이게 투르비옹이라는 스위스 기술이야. 지구중력의 오차를 고정시켜 주는 부품이지. 다이아몬드 보이지? 이거 무브먼트가 좋은 명품 시계야.


장씨아들 : 오늘 고칠 수 있겠어?


장씨 : 마음만 먹으면.


장씨아들 : 나 그거 하루만 차고 나가면 안 될까?


장씨 : 손님거야.


장씨아들 : 빌어먹을. 그만 둘래.




장씨 확대경을 벗고 핀셋을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장씨 : 일 미리 라도 오차나면 시계는 못 살아나.


장씨아들 : 난 오차가 너무 많은 놈이라 글렀어. 아빨 하나도 안 닮았잖아.


장씨 : 연습하면 돼.


장씨아들 : 나가야 해. 돈 좀 줘.


장씨 : 내가 돈이 어딨어.


장씨아들 : 여기 정리하자. 재개발된다잖아. 시계 수리해서 얼마나 번다고.


장씨 : 기술 있으면 굶어죽지는 않아.


장씨아들 : 지겹지 않아?


장씨 : 뭐가?


장씨아들 : 죽은 시계 뜯었다가 고치는 거.


장씨 : 그만해. 제 엄말 닮아서 잔소리 하곤.


장씨아들 : 그럼 말 좀 들어.


장씨 : 눈 멀 때까진 앉아서 해야지. 갈 곳도 없어.


장씨아들 : 가족보다 평생 시계부품하고만 정들었어.


장씨 : 내 나이에 정붙이고 살만한 거 있으면 괜찮은 삶이야.


장씨아들 : 정리하고 피자집 같은 거 하자. 내가 배달할게.


장씨 : 배달일 더 못하겠다며?


장씨아들 : 그건 남의 가게니까 그렇지. 우리 집이면 잘해.


 


장씨 스탠드를 켜고 다시 확대경을 착용하고 시계를 수리한다.


 


장씨아들 : 요즘은 대량생산으로 다 하잖아. 부품도 기계가 대신 갈아주고.


장씨 : 하지만 아직 사람 손으로 갈아야 더 정교해.


장씨아들 : 그 놈의 손버릇.


장씨 : 중학교부터 해온 거야.


장씨아들 : 난 중학교 때 동네슈퍼에서 처음 시계를 훔쳤어.


장씨 : 손버릇 안 좋다고 엄마한테 혼났잖아.


장씨아들 : 피가 어디 가?


 


손님1등장


 


손님1 : 여기 시계 수리하는 곳 맡죠? 간판 불이 꺼져서 놀랐어요.


장씨아들 : 시계수리점 맞아요. 전기세 아끼려고 잠시 꺼둔 거예요.


손님1 : 아 네… 저기 (시계를 내놓으며)


이 시계 좀 살려주세요. 3대째 내려오는 유산인데 저한테 너무 소중한 녀석입니다. 함께 산 시간이 얼마인데... 도저히 버릴 수가 없어서요. 꼭 좀 부탁드릴게요.


 


장씨아들 장씨에게 시계를 건넨다. 확대경으로 시계를 살핀다


 


장씨 : 살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일주일 후에 데려가세요.


손님1 : 꼭 좀 살려주세요.


 


손님1퇴장. 장씨 다시 확대경을 착용하고 테이블에 앉아 수리를 한다.


 


장씨아들 : 정말 살릴 수 있어?


장씨 : 살려달라고 하잖아. 살려야지.


장씨아들 : 다시 살려 놓으면 그렇게 좋아?


장씨 : 너 정말 이거 배울 생각 없어?


장씨아들 : 그만해. 엄마한테까지 시켰으면 됐지. 난 못해.


장씨 : 엄마 이야긴 왜 나와?


장씨아들 : 난 엄마처럼 시계부품이나 조립하다가 심장마비로 여기서 쓰러지긴 싫어.


장씨 : 네 엄마가 시계 만지는 일 좋다고 해서 가르쳐 준거야.


장씨아들 : 웃겨. 생계가 어려우니까 같이 뛰어든 거지.


장씨 : 네 엄만 새로운 시계를 만지면 심장이 뛴다고 했어.


장씨아들 : 평생 못 차볼 시계니까 그랬지.


장씨 : 엄마와 난 이 부품처럼 단단했다.


장씨아들 : 한쪽이 마모되는지도 모르고 함께 돌기만 했지.


장씨 : 그만해. 일해야 해. 집중 안되잖아.


장씨아들 : 그립기는 해?


장씨 : 청진기가 어디 있더라?


 


장씨 아들 테이블 서랍에서 청진기를 꺼내준다.


 


장씨 : 네 엄만 이 청진기로 시계 숨소리 듣는 거 좋아했어. 아기처럼 귓속에 시계가 옹알옹알 잔소릴 낸다며 좋아했지.


장씨아들 : 타임머신이라도 만들 기세군. 기일도 안 챙기면서.


장씨 : 잔소리 하나는 제 엄마와 부품이 같네.


장씨아들 : 잔소리 없는 시계는 죽은 거라며?


 


웃는 둘.


 


장씨아들 : 나 며칠 어디 좀 다녀올 거야. 러시아 좀 다녀오려고.


장씨 : 러시아? 거긴 왜?


장씨아들 : 누굴 소개 받았어. 거긴 할게 많나봐.


장씨 : 춥잖아.


장씨아들 : 시계 초침도 금방 얼어붙는데.


장씨 : 심장에 안 좋아.


장씨아들 : 고장 나면 아빠가 다시 한번 부품 갈아주면 되겠네.


장씨 : 다녀오면 이거 정 좀 붙여봐.


장씨아들 : 오토바이 정비기술 배울 거야. 난 그게 맞아.


장씨 : 밥 챙겨먹어. 밥은 한번 시간 놓치면 다시 그때 밥은 못 먹는 거야.


장씨아들 : 후회는 언제해도 늦는 거고 시작은 언제해도 늦지 않아요.


장씨 : 녀석…


장씨아들 : 다녀올게


장씨 : 그래.


 


장씨 아들 퇴장


 


장씨 : 벌써 문 닫을 시간이군.


 


장씨 잠시 확대경을 벗고 서랍에서 소주병과 잔을 꺼내 마신다.


여인등장. 공간을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주춤거린다.


 


장씨 : 어떻게 오셨어요? 이제 막 마감하려고 했는데...


여인 : 찾으러 왔어요. 오래 시간이 걸렸지만요.


장씨 : 맡겨두고 안 찾아가신 분들 많아요. 기다려 보세요.


 


장씨 테이블 서랍에서 손목시계 꾸러미를 꺼내 펼쳐놓는다.


 


여인 : 하나도 안 변했네요. 모든 게 그대로에요.


장씨 : 오래되었죠. 요즘은 부품은 잘 안 만들고 주로 수리만 해요.


여인 : 부인은 안 보이시네요?


장씨 : 몇 년 전 먼저 갔어요.


여인 : 죄송해요. 그것도 모르고.


장씨 : 어떻게 생겼죠? 너무 오래된 것들은 기억이 잘 안나요.


여인 : 그게 아니고… 그게…


장씨 : 전 손님 물건 손대는 사람 아니에요. 영수증은 갖고 오셨나요?


여인 : 영수증이요? 그런 거 없는데…


장씨 : 저한테 맡기셨다면 분명 있을 거예요.


 


장씨 일어나서 여기저기 뒤적인다.


 


여인 : 시계가 아니라…


장씨 : …


여인 : 여기 아직 있을 줄은 몰랐어요.


장씨 :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여인 : 죄송해요. 이제 와서 제가 이러는 거 이해가 안 가실 거예요.


저도 많이 고민하다가…


장씨 : 다들 맡긴 걸 잊어버리고 살잖아요. 괜찮아요.


여인 : 너무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왔어요.


장씨 : 그 마음 알아요. 걱정 말아요. 저한테 맡겼다면 꼭 다시 보게 될 거예요. 잠시만요.


 


장씨 뒤로 돌아서 캐비닛에 오래된 부품상자를 들고 온다.


 


여인 : 우리 아기요. 제 아기요.


 


장씨 멈칫하다가 상자를 내려놓고 테이블에 앉는다. 여인도 맞은편에 의자를 당겨 앉는다.


 


장씨 :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여인 : 아기요. 여기 놓고 간 제 태엽…


장씨 :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여인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여인 :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전 그러고 싶어요.


장씨 : 시간이 많이 흘렀어요.


여인 : 30년이 걸렸죠.


장씨 : 그 아이는 이제 우리 아들이에요.


여인 : 그동안 잘 키워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장씨 : 한 번도 다른 사람 자식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여인 : 제가 다시 데려가도록 해주세요.


장씨 : 여긴 맡긴 물건 아무 때나 찾아가는 전당포가 아니에요. 돌아가세요.


 


일어나서 물건들을 정리하는 장씨.



여인 : 절 원망하시고 욕하셔도 좋아요. 지금까지 저도 저를 증오해왔으니까.


장씨 : 그 아이는 당신에게 버림받은 거 몰라요.


여인 : 아직 말 안하셨어요?


장씨 : 당신이라면 말할 수 있나요?


여인 : 제가 데리고 살면서 두 배 잘할게요. 잃어버린 시간만큼.


장씨 : 당신이 데려가면 전 이제 혼자에요.


여인 : 그 마음 알아요. 미안해요.


 


장씨 일어나서 부품상자를 캐비닛에 넣는다.


 


장씨 : 저희에게 맡기셨잖아요. 모르는 편이 나을 거예요.


여인 : 고장 난 시계를 잠시 맡아주셨다고 생각해주세요.


장씨 : 당신이 두고 간 건 시계가 아니라 시간이에요. 그건 저 혼자 만들 수 없는 거구요.


 


여인 가방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장씨 : 이게 뭔가요?


여인 : 제가 맡긴 시간에 대한 제 작은 성의에요.


장씨 : 돈은 필요 없어요.


여인 : 다이아에요. 시간이 흘러도 가치가 변하지 않죠.


장씨 : 제겐 필요 없어요. 가져가세요.


여인 : 받아주세요. 제겐 악몽 같은 시간들이었어요.


장씨 : 이제 악몽은 제가 꿀 것 같군요. 당신이라는 사람… 왜 내 시간에 갑자기 끼어든 거예요?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왜!


 


장씨 테이블의 공구들을 쓸어버린다. 놀라서 물러나는 여인.


 


장씨 : 가요! 그 아인 여기 없어. 당신이 버린 아기는 여기 없다고.


여인 : 죄송해요. 평생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저도 어미라…


 


장씨 테이블에 소주병을 들고 앉는다. 술을 따라 마신다.


 


장씨 : 시계 수리해야 해요. 나가주세요.


여인 : 이제 잃어버리지 않을 거예요.


 


여인 일어나서 나가려고 한다.


 


장씨 : 우리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소?


여인 : 여기만 시간이 그대로 멈추어 있었어요.


 


사이


 


장씨 : 아이를 안아본 기억이 남아는 있나요?


여인 : 그럼요. 제가 나누어준 심장을 가졌잖아요. 못 만나지만… 늘 이어져 있다고 생각했어요.


장씨 : 그렇게 아픈 아이를 왜 버렸어요?


여인 : 고장난 태엽을 다시 살려 주셨잖아요.


 


 


사라지는 여인.


우두커니 술을 마시는 장씨.


 


2


 


병실. 오후.


 


벽시계. 침대가 놓여 있다.


 


장씨는 바닥에 대야를 놓고 수건에 물을 적셔 휠체어에 앉은 여인의 머리를 감겨주고 있다. 여인은 창 밖을 보며 침을 흘리고 있다.


 


 


장씨 : 여보. 얼마 전에 가게로 한 여자가 찾아왔어. 오래 전에 맡긴 물건을 찾으러 왔더라고. 근데 내줄 수가 없었어. 함께 있는 동안 정이 붙었거든. 당신도 알잖아. 고장 난 부품을 갈아주고 태엽을 다시 감아주고 먼지를 닦아주면서 정이 드는 게 내 일이잖아. 고것도 그랬지. 특별한 시계를 만지면 가슴이 뛰는 순간이 있잖아. 어떻게든 내 손으로 다시 살려보려고 했지. 다른데서 고장이 나서 내게 왔지만 난 숨소리를 다시 넣어주고 입속과 귓속의 먼지를 닦아냈지. 그리곤 다시 녀석의 심장 박동에 귀를 기울였어. 당신 기억나? 그 심장이 다시 째깍째깍 살아나던 날. 당신은 일어나면 아침마다 녀석의 심장에 귀를 대고 숨소리를 듣곤 했잖아. 심장 박동이 자기하고 이어져 있는 것 같다고 좋아했잖아. 이제 품고만 있으면 된다고 믿었는데… 맡긴 걸 다시 찾아간대.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장씨 휠체어의 여인의 머리를 마른 수건으로 닦아주고 머리를 빗질해준다. 여인은 여전히 창 밖을 보며 침을 흘리고 있다.


 


장씨 : 여보 요즘 어떻게 지냈어? 내 말만 늘어놓았네. 그 여자가 다이아를 내놓더라고. 그동안 물건을 고생해서 맡아주었다고 말이야. 사실 나 그거 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 흔들리더라. 여보… 난 두려워. 하지만 부끄럽진 않아.


 


간호사 등장


 


간호사 : 할아버지. 또 오셨네요. 처제 분에 대한 애정이 애틋한가 봐요. (휠체어 여인에게) 할머니! 형부가 머리 감겨주니까 좋으시죠? (침을 닦아주며) 언니가 하늘나라에서 참 좋아하겠다. 이렇게 든든한 형부가 와서 머리도 감겨 주고 사는 이야기도 들려주고. 언니랑 꼭 닮은 쌍둥이 동생이라서 우리 할머니 볼 때마다 형부가 더 언니를 못 잊나보다.


 


간호사 휠체어 여인의 혈압을 체크하고 여인의 겨드랑이를 들고 체온계를 넣는다.


 


간호원 : 반대 쪽 겨드랑이 좀 들어주실래요? 내복 좀 갈아입혀 드리려고요.


 


장씨 : 겨드랑이를 들어 옷 입히는 걸 도와준다.


 


간호원 : 할아버지 이제 공연한 수고 마세요.


장씨 : 수고는 무슨.


간호원 : 저희 있으니까 그만 오세요.


장씨 : 벽시계가 죽었네요.


간호원 : 그러게요. 저 녀석 건전지가 또 나갔나? 매번 고장이라니까.


장씨 : 제가 시계 수리를 하는데 가져가서 살려놓을게요.


간호원 : 오래되어서 이번에 버리고 새로 갈아야 할 것 같아요.


장씨 : 아닙니다. 제가 살릴 수 있어요.


 


장씨 벽시계를 뜯어서 퇴장한다.



3


 


시계 수리점. 밤



장씨 스위치를 켜고 가게 문을 연다.


누군가 다녀간 듯 등 뒤로 캐비닛이 거칠게 열 려있고 여기저기 공구와 물건들이 뒤집어진 채 바닥에 흩어져 있다.


 


 


장씨 : 강이야… 우리 강이 왔다 갔구나. 녀석 인기척을 많이도 남겼네.


 


장씨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테이블에 앉아 스탠드를 켜놓고 병원에서 가져온 벽시계를 수리하기 시작한다.


 


손님2 버럭 문을 열고 등장한다.


 


 


손님2 : 당신이 주인 맞아?


장씨 : 네. 제가 주인입니다.


 


손님2 : 주머니에서 자신의 시계를 꺼내 테이블에 툭 던지고 장씨의 멱살을 잡는다.


 


손님2 :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장씨 : 소 손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거 좀 놓고 말하세요.


손님2 : 내 시계 어디 있어?


장씨 : 찾아가셨잖아요. 제발 이것 좀 놓고 말씀하세요.


 


손님2 멱살을 놓아준다.


 


손님2 : 시계수리해서 팔려고 내놓았더니 짝퉁이라잖아.


장씨 : 짝퉁이라니요. 제가 수리해 놓을 땐 정상이었어요.


손님2 : 점원 어디 있어? 그 녀석에게 받았어.


장씨 : 지금 여기 없어요.


손님2 : 그거 다이아몬드가 몇 개 박힌 줄 알아? 그걸 슬쩍 하려고?


장씨 : 그 아이가 그럴 리가 없어요. 제 아들입니다.


손님2 : 손모가지를 분질러 놓겠어.


장씨 : 제 아들은 도둑놈이 아니에요.


손님2 : 내가 가만히 당할 줄 알았어?


장씨 : 손님. 죄송합니다. 그 어린 녀석이 잠시 명품에 눈이 멀었나봅니다. 제가 당장 다시 찾아드릴게요.


손님2 : 당장 그 녀석 잡아와!


 


장씨 무릎을 꿇고 빈다.


 


장씨 : 제가 모두 책임지고 새 시계로 보상해 드릴게요.


손님2 : 당신이 보상한다고? 그게 얼마인지 알기나 해?


장씨 :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손님2 : 5000만 원이야.


장씨 : 네? 5000천만 원이요?


손님2 : 여기 보증서. 거기 시리얼 넘버 있어. 다이아몬드 정확히 200개 박힌 걸로. 세 볼 거야. 자식 콩밥 먹이기 싫으면 알아서 해.


 


침묵


 


장씨 : 일주일만 시간 주세요.


손님2 : 약속 지켜. 일주일이야.


장씨 : 네 약속 꼭 지킬게요.


손님2 : 세상에 인심이 아무리 흉해도 그렇지 맡긴 걸 훔쳐가는 법이 어디 있나? 재수 없어.


장씨 : 죄송합니다.


 


손님2 보증서를 바닥에 툭 던지고 퇴장하는 손님2.


바닥의 보증서를 펼쳐보는 장씨.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문다.


건물주 등장.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물건을 보고 당황한다.


 


건물주 : 장씨. 무슨 일 있었어?


장씨 : 아니야.


건물주 : 정리 정돈 안 되는가 못 견디는 사람이 이게 다 뭐야?


장씨 : 누가 좀 다녀갔어.


 


장씨 테이블에 앉는다. 건물주도 의자를 당겨 앉는다.


 


장씨 : 어쩐 일이야?


건물주 : 세가 석 달 째 밀렸어. 사정알지만 나도 어려워.


장씨 : 미안해. 마련해볼게.


건물주 : 이제 고집 그만 피우고 가게 놓자. 버텨봐야 뾰족한 수도 없잖아.


장씨 : 비울게.


건물주 : 정말? 앞으로 뭐하려고? 생각해봤어?


장씨 : 보증금이나 만들어줘.


건물주 : 그래. 그래야지. 근데 이 시계수리점 전세 5000 가지고 뭘 하려고?


장씨 : 급히 쓸 데가 있어.


건물주 : 아들은 안보이네.


장씨 : 러시아 갔어.


건물주 : 거긴 왜?


장씨 :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야.


건물주 : 실없긴. 그 녀석 앞으론 뭐한데?


장씨 : 내 기술 배우기로 했어.


건물주 : 잘도 배우겠다. 네 피가 아니잖아.


장씨 : 그런 말 말어.


 


미소 짓는 둘. 건물 주 책상 위의 소주병을 한 모금한다.


장씨가 병을 빼앗아 잔을 놓고 따라준다. 자신의 잔에도 한잔 따른다.


 


건물주 : 캬! 추강아! 이 못난 장추강아!


장씨 : 왜?


건물주 : 요즘도 너 처제한테 가서 마누라 대역 삼고 있니?


장씨 : 쌍둥이니까 이어져 있을 거야. 마누라라고 생각하면 말도 붙이고 좋아.


처제도 가끔 웃어준다고.


건물주 : 치매 걸린 처제한테? 아무리 쌍둥이라지만 겉만 똑같이 생겼다고 그게 네 마누라야? 이제 그만해. 듣는 처제도 힘들 거야. 병원에서 소문도 안 좋아.


장씨 : 가족이 정신 나갔다고 돌보지도 않잖아.


건물주 : 화상아 네 마누라 살아있을 때나 좀 잘하지.


장씨 : 아픈 애 몸에 자기 태엽 넣어주고 가 버렸어.


건물주 : 그러게 심장이 안 좋은 아이를 왜 데려와서…


장씨 : 아이와 아내는 이어져 있어.


건물주 : 그런다고 달라지는 게 있어?


장씨 : 달라지는 거 없어.


건물주 : 그럼 왜 이러는데… 이제 놔줘야지.


장씨 : 내가 뭘 놓아야 하는데?


건물주 : 시간이지. 네가 좋아하는 시간.


 


장씨 술잔을 따라 마신다.


 


건물주 : 장강이는 장추강이 피가 아니고, 고소연이 동생 고소백은 네 마누라가 아니야. 네 마음대로 사용할 순 없는 거야. 평생 시간 속만 들여다보니까 시간이 다 네 편인 줄 알았어?


장씨 : 그러게. 구석에 박혀서 죽은 시간을 살리다보니 내 시간이 다 가버렸어.


건물주 : 아이 씨. 기분 이상해진다. 밥은 먹었어? 술이나 한잔 하러가자.


장씨 : 나중에. 오늘은 시계들 밥 줘야해.


건물주 : 어서 일어나.


장씨 : 일해야 한다니까.


건물주 : 고집불통 영감. 평생 죽은 시계만 고칠 거야?


장씨 : 고치는 거 아니야. 살리는 거지.


건물주 : 잘났다. 갈게.


장씨 : 그래 가봐.


 


건물주 나가려다가


 


건물주 : 근데 아까부터 바깥에 웬 여자가 서성거리고 있던데...


장씨 : 아는 여자야.


건물주 : 기다리는 눈치던데…


장씨 : 좀만 기다려 달라고 해줘.


건물주 : 그려. 전하지.



건물주 퇴장한다.



장씨 : (속으로)그래 시간은 다 내 편인 줄 알았다. (헛웃음) 부품만 갈아주면 언제까지라도 갈 줄 알았어. 평생 시간을 돌보았으니까.


 


경찰 장씨 아들과 등장한다.


 


장씨 : 아니 무슨 일이세요? 강이야 너 왜 그래?


경찰 : 명품 시계 장물을 현금으로 바꾸려다가 붙잡혔어요.


현장검증을 하려고 왔어요. 여기서 훔친 거 맞지?


 


장씨 아들 고개를 숙이고 있다


 


장씨 : 이 아이가 훔치다니요?


경찰 : 가게에서 훔쳤다고 진술했어요.


장씨 : 그 시계는 제가 준거에요.


경찰 : 네?


장씨 : 외국에 나간다고 해서 제가 선물해 준겁니다.


경찰 : 알리바이가 확실해야 해요.


장씨 : 경찰 선생님께 솔직하게 말해드려.


장씨아들 : 다이아몬드를 갖고 싶었어요.


경찰 : 빈 가게에 들어와서 가게 시계 훔친 거라고 했잖아?


장씨아들 : 전 하자는 대로 했어요.


장씨 : 선생님. 다그치지 마세요. 어린애잖아요.


경찰 : 물건을 왜 팔려고 한 거야?


장씨 : 러시아에 가야 하니까요. 다이아몬드가 200개나 박혀있거든요.


경찰 : 거짓말 하면 곤란해. 눈금 하나도.


장씨 : 얘는 심장이 안 좋아서 거짓말 못해요.


경찰 : 그럼 저녁 7시부터 12시까지 그 시간에 뭐했니?


장씨 : 그때 저랑 여기 있었어요.


경찰 : 함께 있었다고요?


장씨 : 제 기술을 이어받고 있어요.


경찰 : 자세히 설명해봐.


장씨 : 어서 이리 와. 그날 했던 것을 보여드리자.


장씨아들 : 네에. 네…


 


장씨와 장씨 아들 테이블에 나란히 앉는다.


바닥에 쓰러진 현미경을 세우고 확대경을 집어 눈에 착용하고


시계수리를 하는 동작을 하기 시작한다.


 


 


장씨 : 전 그때 이 녀석에게 스위스의 시계장인 필립 뒤포르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어요. (장씨 아들의 옆구리를 찌르며) 필립 뒤포르는 1992년 세계 최초로 매 시간 자명종이 울리는 시계를 발명했지. 그 시계의 이름은 이중성이야. 본인이 직접 부품을 제작하고 조립해서 그랑드엔 쁘띠뜨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렸단다. 그 시계 장인은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가졌지. 그는 영원히 남게 되는 시계를 만들고 싶어했어. 그가 만든 ‘별들의 소용돌이’라는 시계는 우주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는 시계지. 강이야! 내부 장치의 영구달력을 내가 뭐라고 했지?


 


장씨아들 : 퍼페추어 캘린더.


장씨 : 소리로 시간을 알 수 있는 기술 장치는?


장씨아들 : 미니트리피터.


장씨 : 크로노그라프 문자판 위의 표시는?


장씨아들 : 타코미터!


장씨 : 똑똑해. 내 아들.


 


장씨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경찰 : 그만. 좋습니다.


장씨 : 부자지간에 궁합이 잘 맞죠?


경찰 : 두 사람이 그 시간에 함께 있었던 걸로 믿을게요. 똑 같은 시계가 도난 당했다고 어제 신고가 들어왔어요.



경찰 퇴장하려 한다.


 


장씨 : 김 군 고맙네.


경찰 : 손버릇 정들면 못 고쳐요. 잘 타이르세요.



경찰 퇴장한다.


 


장씨 아들 고개를 들어 확대경을 벗는다.


장씨는 다시 확대경을 착용하고 시계를 바라보고 있다.


 


장씨아들 : 아빠 갔잖아.


장씨 : 그냥 잠시 이렇게 좀 있자.


장씨아들 : …


장씨 : 여길 좀 봐라.


장씨아들 : 눈 아파.


장씨 : 한번만 다시 써봐.


 


장씨 아들 확대경을 쓴다.


 


장씨 : 여긴 소우주가 있어. 난 귀동냥 눈동냥으로 아주 단순한 진실을 배워갔다. 내 손에서 수백 개의 시계가 멈추었다가 살아나곤 하는걸 보면서 살아왔으니까.


장씨아들 : 아빠 나 여기 떠나고 싶어. 미안해.


장씨 : 네가 아기였을 때 난 손가락 두 개로 네 심장에 가만히 손을 대 보았어.


(혼잣말로) 그땐 정말 몰랐어.


장씨아들 : 엄마한테 갔었어. 다시 못 볼까봐.


장씨 : (혼잣말로) 사는 건 살아온 만큼 사라진다는 사실을.


장씨아들 : 젠장. 조용히 떠나려고 했는데… 일이 꼬였어.


 


사이


 


장씨 : 시계 속에 부품이 몇 개나 들어간다고 했지?


장씨아들 : 200개에서 500개.


장씨 : 그 부품들이 한 곳으로 들어가서 하는 일이 뭐라고 생각해?


장씨아들 : 시간을 가게 해요.


장씨 : 아니 그거 말고.


장씨아들 : 초침, 분침. 시침이 가족이 되는 거야.


장씨 : 인기척이 되는 거야. 사람과 함께 인기척이 되는 거지.


장씨아들 : 어려워. (침묵) 아빠 나 고백할 게 있어.


장씨 : 말하지 마. 여기 있는 공구들도 다 사연이 있으니까.


 


똑똑.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



장씨아들 : 누가 온 것 같아.


장씨 : 잠시만 고개들지 마.


장씨아들 : 계속 문을 두드리는데?


장씨 : 잠시만 잠시면 돼.


장씨아들 : 그래. 이렇게 있을게.


 


장씨 : 여길 봐. 보여?


장씨아들 : 보여.


장씨 : 시계를 수리하다가 내부 장치에 지문을 많이 묻히면 그 부분만 부품이 녹이 슬게 돼. 그래서 내부를 수리할 때엔 오래된 먼지를 닦아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지문이 묻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장씨아들 : 먼지도 지워야 되지만 지문도 지워야 한다는 거지?


장씨 : 응 만졌던 지문을 다 지워 주어야 새것처럼 보여.


장씨아들 : 새것처럼.


장씨 : 새것처럼.


장씨아들 : 내가 닦아볼게.


장씨 : 응. 해봐.


 


작은 핀셋에 달린 먼지 봉으로 시계내부를 닦아내는 장씨아들


 


장씨 : 지문 다 지웠네. 새 것 같다.


장씨아들 : 잘 한 거야?


장씨 : 잘했어.


장씨아들 : 아빠 닮아 손버릇 쓸 만하지?


장씨 : 놀이터에서 너 어릴 때 버려진 병아리 안고 데려온 거 기억해?


장씨아들 : 응.


장씨 : 그게 손버릇이야.


장씨아들 : 아빠…


장씨 : 왜?


장씨아들 : 태엽이 감겼다가 풀렸다가 하는 힘으로 시간은 가는 거지?


장씨 : 응. 태엽이 감겼다가 다시 풀리는 힘으로.


장씨 : (혼잣말로) 그래 그 말 잊지 마. (큰소리로) 너 이름이 뭐냐?


장씨아들 : 장이강!. 장추강의 아들. 장이강.


장씨 : 씩씩해.


 


침묵


 


장씨아들 : 나 러시아 간다.


장씨 : 그래 다녀와.


장씨아들 : 한동안 못 올지도 몰라.


장씨 : 난 여기 있을 거야.


장씨아들 : 가게 계속 하고 있을 거지?


장씨 : 응. 해야지.


장씨아들 : 돌아오면 알려줘.


장씨 : 뭘?


장씨아들 : 인기척.


장씨 : 정말?


장씨아들 : 응.


장씨 : 이제 계단에서 이슬 맞고 있지 마. 몸 차가워지니까.


장씨아들 : 여기 있는 시계들이 내는 잔소리 그립겠다.


장씨 : 이제 나가봐. 누가 널 찾나봐.


장씨아들 : 응. 오늘 약속시간이야. 그분이 데려온댔어.


장씨 : (혼잣말로) 당신 멀리 있는 거 알아. 그래도 돌아와 줘요.


장씨아들 : 나만한 명품이 없대.


장씨 : 엄마가 저 문으로 널 안고 들어왔어


장씨아들 : 보고 싶을 거야. 아빠도 엄마도.


 


장씨 아들 확대경을 벗고 문을 열어준다. 여인1이 서 있다.


 


장씨아들 오셨어요? 아주머니!


여인1 : 태엽아!


 


여인 장씨 아들을 끌어안는다.


장씨 아들과 여인1 퇴장.


장씨는 확대경으로 시계부품을 본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다.


 


긴 정적


(시계 바늘 움직이는 소리만 들린다)


 


손님1 등장.


 


 


손님1 : 저 지난번 맡긴 시계 찾으러 왔는데요. 살았나요?


장씨 : 네 살려놓았습니다.


 


장씨 일어나서 맡긴 시계를 돌려준다. 품에 안고 기뻐하는 손님1


 


손님1 : 감사합니다. 다시 살아났네요.


장씨 : 심장소리 들어보세요.


손님1 : 뛰어요. 뜁니다.


 


 


퇴장하는 손님1


장씨 퇴장하는 손님을 한참 바라본다.


 


바닥에 있는 병실의 벽시계를 테이블로 올린다.


확대경을 착용하고 앉아 다시 시계를 수리하기 시작한다.





<당선소감>

 

눈 기다리는 악어처럼 살고… 채식주의자 악어를 쓰겠다

 

지난 10년 동안 내가 바꾼 것은 에쎄 순, 말버러 레드, 러키스트라이크, 살렘, 더 원이다.

바꾸지 않은 것이 있다면 롱코트, 엉덩이 근육, 리버풀, 아스널, 피터 아츠 등이 있다. 내겐 숲에 숨겨 놓은 우주복도 없다. 연방에서 내 뇌파를 조사하러 온 적도 없다. 감정노동이나 급강하 훈련도 받아 보았지만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것 딱 한 가지가 있다면 뒤로 하는 거다. 아플 것 같다.

원고 독촉을 받을 때 내 일 아니려니 생각하고 잘 잔다는 작가들의 말에는 매력이 있다. 나는 골치 아픈 일은 일단 자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번 자면 내가 쓰레기라고 생각될 때까지 잔다. 나 역시 당신들처럼 끼어들기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깜빡이 좀 켜고 들어오는 세상이 왔으면 한다. 

지금 나는 식은 호떡 속의 차가운 꿀처럼 달콤하다. 호떡 속의 꿀은 꿀이 호떡 속에 끼어들기를 한 것인가? 꿀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호떡이 된 것인가? 이쪽에서 볼 때 독도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시와 극이 내게 그런 것 같다. 돌아보면 물장구치는 것도 내겐 일이었다. 지금껏 그랬듯이 눈을 기다리는 악어처럼 살 것이고 채식주의자가 된 악어를 쓸 것이다. 

내 헬스장 로커 번호는 321번이고 비밀번호는 1358이다.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면 세상도 잊지 않을 테니까. 우주복은 언제나 집에 있다. 이래저래 고마운 사람들이 좀 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 소규모 낭독 모임 펭귄라임클럽, STUDIO PENGUIN RHYME. 티양, 소울, 류이, 리안, 한민국, 이현우, 염한규, jake levein, YIRI CAFE, 하림. 양양. 무중력타이핑 멤버들. 그리고 몇 개의 내 아름다운 탁아소들.



◎ 약력

▶ 1976년 광주 출생

▶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극창작과(대본 및 작사 전공) 전문사




<심사평>

 

부서진 삶 복원 스토리 탄탄… 극 구조도 명료

 

올해도 응모작을 통해 다양한 목소리를 만날 수 있었다. 아쉽게도 그 가운데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작품은 많지 않았다. 물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며 독창이란 기실 모방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가 제 눈과 손으로 직접 톺아보고 더듬으며 대상과 만나는 순간, 그 순간에 움직인 마음의 흔적은 유일하다. 형식적 기교나 잔재주가 아닌 진정한 뜻의 독창성은 이러한 흔적의 유무에 있다. 실제의 삶에 다가서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관념의 놀이에만 빠지거나 희곡을 희곡으로만 배워서 쓰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네 작품을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인간의 기분’과 ‘창’은 우화의 형식을 지닌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하고자 하는 말이 분명해서 좋은데,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분명해서 도식과 상투에 머문 듯한 느낌이 없지 않다. 또한 우화적 세계로서 갖추어야 할 논리와 개연성을 아직 단단히 세우지 못했다. ‘마파람에 돌아오다’는 글쓰기가 탄탄하며 인물들의 성격과 상태를 잘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렇다 할 극적 사건이 없어 이야기가 시작에서 멈춘 듯해 아쉽다.

‘태엽’은 시계수리공의 일과 삶을 통해 부서진 삶을 복원하고자 하는 갈망을 사실적이면서도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야기가 비교적 탄탄하며 극의 구조 또한 명료하면서도 단조롭지 않다. 인물들의 성격이 다소 정적이고 평면적인 점, 지나친 감상이 리얼리티를 떨어뜨리는 점 등은 아쉬웠으나 진중하게 대상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와 시선이 앞날을 기대하게 한다는 데에 심사위원들은 의견을 모았다.

심사 김철리·배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