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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세탁실 / 황승옥

 

편집자 주―작품 원문의 일부 비속어를 신문 

게재에 한해 부호(○,×)로 처리했습니다.



가을, 맑은 날, 아침. 무대는 외진 숲 속에 있는 군부대의 3층 세탁실이다. 세탁실은 물기 한 방울 없이 깔끔하다. 문짝이 없는 대변기 칸이 하나 있다. 구형 세탁기와 신형 세탁기가 한 대씩 놓여 있다. 뒤쪽 벽면엔 창문이 여러 개 있다. 창문 밖으론 울창한 숲이 보인다. 창문은 닫혀 있다. 일병 큰 한수와 이병 기준은 빨래를 널고 있다. 탈수가 된 군복을 쫙 펴서 가지런히 빨래 줄에 널고 빨랫집게로 고정한다. 일병 큰 한수는 군용 긴팔 티셔츠를 체육복 바지 안으로 집어넣었고 운동화를 신었다. 이병 기준은 군복을 입었고 군화를 신었다.

신형 세탁기는 소음 없이 돌아간다. 구형 세탁기는 탈수가 시작되나 싶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고 곧 멈춘다. 기준이 재빨리 가서 버튼을 이것저것 눌러본다. 삑― 삑― 소리만 날 뿐 작동하지 않는다.

큰 한수 : 내가….

기준 (빠르게) 예 알겠습니다.

큰 한수가 구형 세탁기의 콘센트를 뺐다가 다시 꽂는다.

큰 한수 : 다시….

기준이 버튼을 눌러보지만 작동하지 않는다.

기준 작동이 안 됩니다.

큰 한수 : 응 오래 됐으니까….

기준 고장 신고합니까?

큰 한수 : 내가… 선임이 하는 게 나으니까…. (살짝 웃음) 내가 고장낸 줄 알겠다.

기준 아닙니다.

큰 한수 : 괜찮아….

큰 한수가 구형 세탁기 속의 군복을 꺼낸다. 젖어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군복.

큰 한수 : 망했다.

기준 제가 짜겠습니다.

큰 한수 : 같이 해, 둘이서 하면 빠르잖아.

기준 수병님은 격실 가서 눈 좀 붙이시지 말입니다. 야간 당직 서시면 이십사시간 동안 한 숨도 못 주무시지 않습니까?

큰 한수 : 새벽에 한 시간쯤 잤어.

기준 그래도… 지금 안 자면 저녁에 또 일어나야 하시지 말입니다.

큰 한수 : (군복 하나를 들어서) 끝에 잡아.

기준 예 알겠습니다.(군복 끝을 잡는다)

큰 한수 : 내가 오른쪽으로 돌릴게 넌 왼쪽으로… 하나 둘 셋.

두 사람, 같은 방향으로 돌린다. 기준, 웃는다.

큰 한수 : ○발! 니 선임 죽었는데 웃음이 나와!?

기준 주의하겠습니다!

큰 한수 :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금방 잊어버리고 웃고… 사람이야 짐승이야….

기준 주의하겠습니다!

큰 한수 : 내가 오른쪽, 넌 왼쪽. 헷갈린다. (군복 양끝을 잡고) 오른쪽 왼쪽, 나는 오른쪽이고 너한테서 왼쪽이면… 내가 같은 방향으로 명령을 내렸구나.

기준 제가 센스 있게 저한테서 오른쪽으로 돌렸어야 했습니다.

큰 한수 : 내가 너한테 왼쪽으로 돌리라고 말했으면 되잖아. 너는 선임 명령에 따른 거뿐인데. 아… 너… 대근 수병님 모르지?

기준 제가 전입오기 하루 전에 세탁실 창문에서 뛰어내렸다고 들었습니다.

큰 한수 : 미안.

기준 아닙니다.

큰 한수 : 나는 니가 아는 줄 알고 웃나 싶어서….

큰 한수, 구형 세탁기 안의 빨래를 모두 꺼낸다. 두 사람, 빨래의 물기를 짜면서 대화한다.

큰 한수 : 둘이 하면 금방 끝나겠다.

기준 예 그렇습니다.

큰 한수 : 아참 축하해.

기준 (빠르게) 알아보겠습니다.

큰 한수 : 당직 시험 만점 받았다면서.

기준 감사합니다.

큰 한수 : 오늘부터 실무배치구나.

기준 긴장됩니다.

큰 한수 : 넌 똑똑하니까 금방 익숙해질거야.

기준 저는 진심으로 말씀드리지만 수병님을 만나서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학과 선배들한테 들은 건 정말이지 군대는 어디를 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하단 겁니다. 며칠 전만 해도 제가 자고 있는 걸 깨워주셨지 않습니까? 몇 번씩이나….

큰 한수 : 날 만나서 좋아?

기준 : 예 그렇습니다.

큰 한수 : (멱살을 잡으며) ○발 너 나 놀려?

기준 예? 아닙니다.

큰 한수 : 내가 뭐가 좋아?

기준 마음이 따뜻하시니까….

큰 한수 : (벽으로 밀며) 이게!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기어 오르냐!? ○발 이젠 신병까지 기어올라!? 닦이고 싶어!? ×대가리 발기할 때까지 닦아줄까?

기준 주의하겠습니다!

큰 한수, 기준을 놓아주고 군복을 잡는다. 두 사람, 빨래 물기를 짠다.

큰 한수 : 들키면 안돼, 내가 깨워주는 거….

기준 예 알겠습니다.

큰 한수 : 미안….

기준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큰 한수 : ×까, 넌 이해 못해.

(사이)

두 사람, 말없이 빨래 물기를 짠다.

큰 한수 : 나 얼마 전에 준호 수병님한테 닦였잖아.

기준 그것도 저 때문에….

큰 한수 : 아니야, 옛날에 비하면 요즘은 천국이야. 진짜야, 여긴 천국이라니까.

기준 애초에 제가 준호 수병님 군화를 닦고 다른 자리에 뒀다가….

큰 한수 : 내가 확인 안 하고 나갔으니까… 하필 그날 안경을 안 쓰고 나갔거든… 덕분에 준호 수병님 딸딸이 신고 달리다가 대장님한테….

큰 한수, 재빨리 주위를 둘러본다. (사이)

큰 한수 : 휴가 잘렸대, 준호 수병님.

기준 아….

큰 한수 : 닦일만 했지?

기준 예….

큰 한수 : 나 같아도 닦았을 거야. 그래도 오늘 새벽엔 세 대만 맞아서 행복해.

(긴 사이)

큰 한수 : (신나게) 오랜만에 닦이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 원래는 (문이 없는 대변기 칸을 보며) 문이 달려 있으니까 좁잖아. 그 안에 세 명씩 들어가서 처맞고 있으면 숨도 못 쉬겠거든. 주먹이 날아온다 싶으면 눈 딱 감아버리잖아. 어제는 신기하더라… 뻥 뚫려 있으니까 국한 병장님 탁구 치는 뒷모습이 보이는 거야. 이래도 되나? 그런 거 있지? 이래도 될까?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자살한 대근 수병님이 문짝에 내 얼굴 낙서해 놓은 거 알지?

(사이)

기준 예.

큰 한수 : 커다란 ×대가리에 눈 코 입 그려 놓은 거 너도 봤어?

(사이)

큰 한수 : ○발년이 대답 안 해?

기준 봤습니다.

큰 한수 : 나 닮았어?

기준 안 닮았습니다.

큰 한수 : 그래? 대근 수병님 그림 잘 그리지? 미대 나오셨거든.

기준 예.

큰 한수 : 만화가가 꿈이라고 하셨었는데 아쉽다. 군대 이야기 그리실 때 나도 등장한다고 하셨었는데. 나같은 놈이 있어야 사람들이 볼 맛이 난다고. 내가 죽었어야 되는데 왜 대근 수병님이 죽었을까? 넌 어떻게 생각해? 누가 죽는 게 맞다고 생각해? 솔직하게 말해 봐

기준 여기서 아무도 죽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큰 한수 : ×까고 있네 ○발년아 내가 그딴 걸 몰라서 물어!? 너도 내가 전문대라고 무시하냐!?

기준 아닙니다.

큰 한수 : 내가 피해자였고 대근 수병님이 가해자였는데 이제 대근 수병님이 피해자가 됐고 내가 가해자가 됐어. 넌 법대잖아. 난 전문대라서 잘 모르겠으니까 물어보는 거야.

(사이)

기준 저는 잘….

큰 한수 : 나는 수백 번 수천 번을 생각해도 내가 죽는 게 맞는 거 같아.

기준 그렇지 않습니다.

큰 한수 : 난 너무 억울해… 내가 대근 수병님을 죽인 거 같잖아. 우리 흡연실 가서 담배 한 대 피우면서 마저 얘기할까?

기준 예.

큰 한수 : (해맑게) 엄마가 마일드 세븐 한 보루 택배로 보내줬다.

기준 예.

큰 한수 : 이따가 너도 한 갑 줄게. 선임들도 한 갑씩 돌려야지.

기준 저한테 동전 있습니다. 커피 한 잔 하시지 말입니다.

큰 한수 : 아니야 나한테도….

큰 한수,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동전을 떨어뜨린다. 상병 한수가 세탁실로 들어온다. 각이 살아있는 셈브레이(푸른 셔츠), 당가리(바지), 반짝거리는 구두, 금색으로 반짝이는 벨트의 버클. 의류대를 어깨에 메고 있다. 상병 한수는 키가 작지만 몸이 탄탄하다. 큰 한수는 동전을 줍느라 정신이 없다. 기준도 동전을 줍다가 상병 한수를 보고 경례한다.

기준 (큰 소리로) 필승!

큰 한수, 상병 한수를 멍하니 쳐다본다. 상병 한수가 무릎을 구부려서 동전을 줍는다. 그동안 두 사람은 멈춰 있다.

한수 (동전을 건네며) 여기.

큰 한수 : 감사합니다.

(사이)

한수 (기준을 보며) 누구야?

기준 예 이병 기준!!

한수 시끄러워 얼간이 새끼가. 야간 당직병들 자고 있잖아.

기준 주의하겠습니다.

큰 한수 : 영창 다녀오신 거 축하드립니다.

(사이)

한수 넌 여전하구나. (기준에게) 야.

기준 예 이병 기준.

한수 기준? 이름이 기준이야?

기준 예 그렇습니다.

한수 그럼 니가 이 시각 이후로 우리 부대의 기준이 되는 거네? 앞으로 니 말과 행동을 내 기준으로 삼을게.

기준 예 알겠습니다.

한수 니 생각엔 큰 한수가 날 엿 먹이려고 저러는 거 같냐, 아니면 진심으로 영창 갔다온 걸 축하해서 저러는 거 같냐?

(사이)

한수 찐따새끼가 뒤질라고 머리 굴리면 닦인다. 셋 둘 하나.

기준 진심으로 축하드린다고 생각합니다.

한수 맞어, 큰 한수는 진심으로 축하하는 거야. 오줌 마렵다.

상병 한수, 의류대를 놓고 문이 없는 대변기로 가서 오줌을 눈다.

큰 한수 : 정리해놓습니까?

한수 내가 할게.

큰 한수 : 제가 하겠습니다.

한수 어허.

상병 한수, 오줌을 누고 나온다.

한수 문짝은 결국 떼버렸나봐?

기준 예 그렇습니다.

한수 에이 씨.

작은 한수, 기준의 배를 발로 찬다. 켁켁거리는 기준.

한수 얘는 뭘 안다고 끼어들어? 뭐해? 뭐하냐? 자냐? 소등해줘?

기준이 일어난다.

한수 앞으로 한수랑 나랑 말할 때 니 숨소리라도 들리면 뒤진다. (큰 한수에게) 낙서가 안 지워졌냐?

큰 한수 : 예 그렇습니다.

한수 페인트로 그렸으니까… 커터칼로 긁기도 했고… ×대가리 그린 건 좀 심했나?

큰 한수 : 아닙니다.

한수 제일 불쌍한 건 대근이지, 군생활 평생 닦이다가 끝나니까…. 내가 죽었어야 되나?

큰 한수 : 아닙니다.

한수 넌 누가 제일 죽었으면 했어?

큰 한수 : 수병님입니다.

한수 나?

큰 한수 : 예 그렇습니다.

한수 그렇구나…. 그런데 왜 날 안 찍어내고 대근이를 찍어냈어?

큰 한수 : 수병님이 무서웠습니다.

한수 솔직하구나… 진작에 솔직했으면… 아닌가….

큰 한수 : 식사하셨습니까?

한수 어?

큰 한수 : 제가 라면 끓여드리겠습니다.

한수 내가 끓여 먹을게.

큰 한수 : (동시에) 제가….

한수 (동시에) 내가….

(사이)

한수 글씨 이쁘더라. 니가 보낸 편지, 심심해서 계속 읽었다. 영창에선 할 일이 없거든.

큰 한수 : 그렇습니까?

한수 너밖에 편지 안 썼다. 웃기지?

큰 한수 : 예….

한수 오늘 비번이냐?

큰 한수 : 방금 올당직 썼습니다.

한수 쉬어야지.

큰 한수 : 수병님 죽지 마십시오.

한수 누가 누구한테! …너나 죽지마 새끼야.

(사이) 이병 은수 들어온다. 군복을 입고 슬리퍼를 신었다. 손에 차 키를 달랑거리며 들어온다.

은수 (밝게) 나랑 드라이브~ 갈~ 사람.

은수는 뒤돌아 서 있는 상병 한수를 보지 못한다.

은수 막내!

기준 예 이병 기준.

은수 드라이브 갔다 오자.

기준 예 알겠습니다.

큰 한수 : 나랑 가자.

은수 에이 수병님이랑 제가 왜 갑니까? 파트너 선택은 운전병 권한이지 말입니다. 문짝 갖고 오는 거라서 금방 옵니다. 그런데 왠 셈당? 셈브레이 당가리를 여기서 입을 입은….

은수가 상병 한수를 알아차린다

은수 (놀라서 크게) 필승!

한수 잘 지냈냐?

은수 예 그렇습니다!

한수 너 병장된 줄 알았다.

은수 아닙니다!

한수 큰 한수랑 가기 싫냐?

은수 아닙니다!

한수 아까는 가기 싫다며?

은수 예 그렇습니다.

한수 왜 거짓말해?

은수 제가 큰 한수 수병에게 개기다가 걸려서 변명할 말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수 또?

은수 제가 이병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다가 들켜서 걱정이 됐습니다.

한수 그럼 닦여야지.

은수 예 그렇습니다.

한수 오늘 저녁 뭐냐?

은수 예?

한수 오늘 저녁 몰라?

(사이)

한수 (기준에게) 오늘 저녁?

기준 짜장밥입니다.

한수 (은수에게) 이병은 반찬 외우고 다녀야지.

은수 예 그렇습니다.

한수 큰 한수한테 왜 개겨?

은수 다시는 개기지 않겠습니다.

상병 한수, 은수의 군복 뒷덜미를 잡고 사방으로 흔들며 대변기 칸 안으로 끌고 간다.

한수 딸딸이 착화.

은수가 번개 같은 속도로 슬리퍼를 벗어서 상병 한수에게 준다. 상병 한수가 슬리퍼로 은수의 머리를 때린다. 수십 대를 때린다.

한수 변기통에 머리 빨아줄까?

은수 아닙니다.

한수 한수야 어쩔까?

(사이)

큰 한수 : 놓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상병 한수, 은수에게 귓속말을 한다. 은수,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다.

은수 큰 한수 수병님 함께 드라이브 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큰 한수 : 응.

은수 감사합니다! 필승 수고하십시오!

큰 한수 : 필승 수고하십시오!

은수와 큰 한수 세탁실을 나간다

한수 한수야.

큰 한수는 멈칫하더니 상병 한수를 바라본다

한수 너 여기서 엔카 박을 거야?

큰 한수 전… 전출 신청했습니다. 티오가 안 나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병님 마세 피십니까?

한수 마세? 담배?

큰 한수 : 예 그렇습니다. 엄마가 택배를 보내줬습니다. (담배를 꺼내서 작은 한수에게 주며) 비닐만 뜯었습니다.

한수 (받으며) 아… 죄책감 느끼지 마. 니가 죽인 거 아니야. 지가 뛰어내린 건데.

(사이)

큰 한수 : (절도 있게 경례하며) 필승 수고하십시오!

은수 필승 수고하십시오!

은수와 큰 한수 나간다. 신형 세탁기에서 우아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세탁기 소리 탈수가 끝났습니다. 깨끗이닦인 빨래를 밀폐된 통 안에서 꺼내어 주십시오.

한수 전봇대야?

기준, 재빠르게 움직인다. 신형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낸다.

한수 (바닥에 널려 있는 젖은 군복을 보며) 이것들은 왜 물이 뚝뚝 떨어져?

기준 (큰소리로) 구형 세탁기가 고장났습니다!!

한수 시끄러워! 하긴 이제 버릴 때 됐지. 이용가치 없어지면 버려지는 건 쫄따구나 세탁기나….

기준, 마른 빨래를 꺼내고 젖은 빨래를신형 세탁기에 넣는다. 상병 한수, 멍하니 보더니 기준의 어깨를 발로 밀어 차버린다. 기준, 넘어져 있다. 기준, 멍한 표정.

한수 얼레? 원위치 안 하냐?

기준 예?

한수 (어이없게) 예? 너 누구세요?

기준 예 이병 기준.

한수 골 때리네… 선임 하나 죽으니까 이병들이 난리가 났구나. 일어나.

기준 예.

한수 차렷하지 마. 나 봐. 나랑 눈 마주쳐. 그대로 있어.

(긴 사이)

한수 손 없냐? 이티처럼 손가락만 달렸어? 버튼만 누를래?

기준 손 있습니다!

한수 그럼 뭐야, 개새끼야!! 신병 ×밥 새끼가 벌써부터 편한 거만 찾어. 선임 죽으니까 좋아?

기준 아닙니다.

상병 한수,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려고 하지만 열리지 않는다

한수 이건 뭐야?

기준 수병들이 뛰어내리지 못하게 간부님이 못을 박았습니다.

상병 한수, 세탁실을 나간다. 곧 장도리를 들고 들어온다. 장도리로 창문에 박혀있던 못을 모조리 뽑는다. 창문 하나를 열고는 창문턱으로 올라가서 걸터앉는다.

한수 나도 죽었으면 좋겠지?

기준 아닙니다.

한수 너 피노키오냐?

기준 잘 못 들었습니다?

한수 피노키오 몰라!?

기준 아닙니다.

한수 알겠다는 거야 모르겠단 거야?

기준 피노키오 알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는 목각인형입니다. 저는 피노키오가 아닙니다.

한수 그런데 왜 내가 죽는 거 안 보고 싶다고 말해?

기준 정말 보기 싫습니다.

한수 거짓말이야. 신병 때는 선임들 다 죽었으면 좋은 게 진실이야. 그래 안 그래? 대답해 셋 둘 하나.

기준 예 그렇습니다.

한수 너 진짜 피노키오구나. 아니면 박쥐 새끼거나. 너처럼 말이 그렇게 빨리 바뀌는 새끼는 처음 봤다. 머리 굴리다가 지 살 길 찾아서 도망친 게 거기냐? 너보다 전문대가 낫다. 걔는 거짓말은 안 하거든. (창문턱에서 내려오며) 담배나 한 대 피자.

상병 한수,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기준의 입에 담배를 물려주고 불을 붙여 준다.

한수 펴. 긴장 풀어. 전봇대야? 담배 펴.

기준 예.

한수 바닥에 털어.

기준 예.

한수 축구 잘하냐?

기준 잘합니다.

한수 오케이 내일부터 나랑 같이 공이나 차자.

기준 예.

한수 ×대가리 옆에서 잘 봐, 자살할 수도 있어.

기준 ×대가리 말씀입니까?

한수 전문대 니 맞선임.

기준 아아.

한수 아아? 아아? 아아아?

기준 주의하겠습니다.

한수 (담배를 물고 젖은 군복의 끝을 잡고) 뭐 해?

기준 (담배를 비벼 끄고) 예!

두 사람, 군복의 양끝을 잡는다.

한수 내가 오른쪽, 너도 오른쪽이다. 하나 둘 셋.

두 사람, 군복의 물기를 쫙 짠다.

한수 한 번 더, 하나 둘 셋. (물기를 짠다) 라스트, 원 투 쓰리. (물기를 짠다) 오케이!

기준, 빨래를 빨랫줄에 걸려고 한다

한수 그냥 걸어놔. 이따가 한 번에 거는 게 일이 편해.

기준 예 알겠습니다.

두 사람, 말없이 손발을 맞춰서 빨래의 물기를 짠다. 군복을 모두 말린다.

한수 일하니까 상쾌하지?

기준 예.

한수 ○발 똥 마렵다. ×됐네. 똥 싸고 있을 테니까 휴지 대기시켜.

기준 점호 시간에 대장님 화장실 특별 점검 있습니다. 물기 제거 완료하고 잠금장치 걸었습니다.

상병 한수, 문이 뻥 뚫린 대변기에 앉는다.

한수 전봇대.

기준 예 이병 기준.

한수 앞에 좀 가려라.

기준 예? 예!

기준, 전봇대처럼 상병 한수의 앞에 서서 그의 몸을 가린다. 상병 한수, 끙끙거리며 똥을 눈다.

한수 (힘을 주며) 너 그거 아냐? 여긴 밖에서 죄 많이 지은 놈들이 죗값을 치르러 오는 곳이야. 너도 죄를 지었냐?

기준 예 그렇습니다.

한수 얼마나?

기준 남들만큼 죄를 짓고 살았던 거 같습니다.

상병 한수, 젖먹던 힘을 다해서 끙끙거리며 똥을 눈다. 물을 내린다. 상병 한수, 나와서 바지를 추스른다.

한수 (기준을 똑바로 보고) 너도 남들만큼 죄를 지었다?

기준 예.

한수 그럼 남들만큼 닦여야겠다.

(사이)

한수 여기서 나한테 ×나 닦이면 깨끗해질 거야. 빨래 끝! 세탁실에서 탈색될 때까지 닦여서 죄를 씻어 내야지. 안 그래?

기준 예.

한수 너 요즘 잠은 잘 자냐?

기준 예.

한수 기특하고 다행이다. 그럼 큰 한수가 왜 큰 한순줄 아냐?

기준 성기가 커서 큰 한수라고 들었습니다.

한수 별로 안 크지? 샤워할 때 봤잖아.

기준 예.

한수 한수가 닦일 때 ×이 커졌어, 그때부터 큰 한수야. ×라 웃기지?

기준 예.

한수 이 ○발 새끼가, 야 ○발 새끼.

기준 예 이병 기준.

한수 내가 ○발 새끼 불렀지 기준이 불렀어? 어이 ○발 새끼.

기준 예 이병 ○발 새끼.

한수 큰 한수가 닦이다가 × 커진 게 웃겨?

기준 주의하겠습니다.

한수 왜 웃겨?

기준 무의식적으로 대답이 나왔습니다.

한수 이번에 무의식으로 도망쳤냐? 그럼 니 무의식을 알 수 있을 때까지 내가 기다릴까? 왜 웃겨?

기준 안 웃깁니다.

한수 너도 나나 대근이처럼 큰 한수 ×대가리 낙서하면서 낄낄거릴거야?

기준 아닙니다.

한수 너 전공 뭐야?

기준 법입니다

한수 오오.

(사이)

한수 나는 피노키오나 박쥐가 법대 다니는 줄은 몰랐다.

한수 좋아, 왜 대근이가 죽었냐? 왜 장교나 지휘관들 중엔 자살한 사람이 없냐? 법적으로 그건 어떻게 생각해? 왜 나보다도 ×밥인 대근이가 대표로 죽었냐? 왜 책임과 죄책감을 가장 쫄따구가 대표로 느끼냐? 헌법엔 그런 거 없어? 니가 모르는 거야 헌법에 없는 거야?

(사이)

한수 공부 왜 했냐?

(사이)

한수 이쁜 여자 따먹을라고 공부했냐?

기준 아닙니다.

한수 그럼 누가 처벌받아야 돼?

(사이)

한수 우리가 악마야?

기준 아닙니다.

한수 그럼 법적으로 우린 뭐야?

(사이)

한수 어디 가서 닦였다고 징징거리다 걸리면 개닦일 줄 알어. 아주 빨랫줄에 널어 줄 거야. 여기 있는 새끼들은 이게 일상이었어.

탁구공이 라켓에 부딪히는 소리 들린다. 점점 가까이서 들려온다. 병장 국한, 한 손에 라켓과 탁구공을 들고 세탁실로 들어온다. 반바지에 깔깔이를 걸쳤다.

기준 필승!

국한 고생했다.

(사이)

국한 전문대 봤냐?

한수 예.

국한 ×나 빡쳤겠네.

(사이)

국한 탁구 칠래?

한수 내일 치지 말입니다.

국한 그래? 엘리뜨.

기준 예 이병 기준.

국한 오늘도 영어 과외 되냐?

기준 오늘부터 야간 당직입니다.

국한 그래?

기준 예.

국한 (상병 한수에게) 너도 막내한테 영어 과외 받어. 지방대 나와서 쪽팔려서 어떡하냐? 소개팅도 비슷한 종자끼리만 들어오고. 이대 같은 우수한 종자들이랑 만나야 최상품을 생산하지. 썩은 사과끼리 만나면 썩은 사과밖에 더 나와? 너도 이 기회에 포장지나 싹 갈아.

한수 천천히….

국한 저녁에 치킨 시켜 먹을까?

(사이)

국한 전철역에 안마 새로 생겼더라. 월급타면…. (나가다가 뒤돌아서) 난 니가 의리 있는 놈인 줄 진작 알았어 고맙다. 위로 줄줄이 엮이면 나라는 누가 지키냐? …나중에 월급타면 안마 쏠게.

상병 준호, 세탁실로 들어온다. 상병 한수를 보고는 달려들어서 와락 껴안고 울음을 터뜨린다.

국한 언제까지 분위기 축축 처지게… 여기가 초상집이야 군대야? 일들 안 해?

국한, 세탁실을 나간다. 준호가 대근의 유서를 꺼내서 상병 한수에게 준다. 상병 한수, 말없이 읽는다.

한수 "미안하다." 큰 한수한테 쓴 거네.

준호 전문대 개새끼가 대근이를 싸이코로 몰고 가서 그런 건데 왜 대근이가 죄책감을 가집니까? 거저 먹는 새끼 닦은 건데. 수병님이 가장 잘 아시잖습니까? 대근이가 언제 담배 빵을 손에다 지졌습니까? 미친 새끼가 지 살자고 없는 말을 지어내고.

한수 큰 한수가 거짓말했다고 실토했어. 거짓말 안 했으면 아무도 관심 안 가져 줬을 거라고 진술했대.

준호 수사관들은 전문대 새끼가 대근이 감싸주려고 일부러 거짓 증언한 거라고 말했습니다. 끝까지 가해자 감싸주려던 착한 놈이라고 개새끼가!!

한수 니가 큰 한수 손바닥 밟아서 그런 거라며?

준호 그 개새끼! 끝까지 구라!! 저는 그 새끼가 일을 건성으로 하길래 힘 좀 주라고 발만 살짝 갖다 댔습니다 정말입니다!! 고무장갑 안 끼고 철수세미를 잡은 게 병신이지. 그 상태로 온 힘으로 문질러서 손바닥 빵꾸 뚫린 거 언젠가 절 엿 먹일 때 쓰려고 한 겁니다.

하사 상욱, 세탁실로 들어온다. 눈부신 하얀 정복을 입었다. 반짝이는 백구두와 금색 견장이 눈에 띈다.

기준 필승!

상욱 이따가 대장님 특별 점검 있는 거 몰라!? 빨래 다 치워.

기준 아직 안 말랐습니다.

상욱 신형 세탁기 건조 기능 있잖아.

기준, 빨래를 걷어서 신형 세탁기 안에 넣는다. 신형 세탁기를 작동시킨다. 경쾌한 알림음이 들린다.

상욱 담배 냄새!? 누구야?

한수 상병 한수.

(사이)

상욱 니가 한수야?

한수 예.

상욱 마음 고생 많았다, 너는 나쁜 생각하지 말고, 너희가 잘못한 거 아니니까….

한수 (말을 자르며) 그럼 누가 잘못한 겁니까?

상욱 뭐? 여러 사람이 잘못한 거지. 누구 하나 빠짐없이 책임이 있어.

한수 그렇습니까?

상욱 준호야 장도리 가져와서 창문 하나만 잠깐 열어… 뭐야? 왜 창문이 열려 있어? (창가를 보며) 못이 다 빠져 있잖아?

한수 제가 답답해서 열었습니다. 점검 전까지 원상복구 시키겠습니다.

상욱 음… (전화를 걸며) 문짝은? 다 왔어? 빨리 와! (한수에게) 넌 고생했으니까 이번 주는 푹 쉬고 당직은 다음 주부터 들어가자. (바닥을 보며) 담배꽁초! 이거 빨리 치우고.

기준, 담배꽁초를 치운다.

상욱 정확히 삼십 분 있다가 점검하러 온다.

한수 군생활 원투데이합니까? 걱정 마십쇼.

상욱, 나간다

기준 필승 수고하십시오.

한수 몇 살이야?

준호 저보다도 어립니다. (비웃으며) 저 새끼도 전문댑니다. 무식해도 꽉 막힌 놈은 아니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한수 (의류대를 어깨에 메고) 밥 안 먹을 거니까 깨우지 마.

준호 예.

한수 한숨 자고 나서 얘기하자. (기준을 보며) 젖먹이 데리고 놀아줬더니 피곤하다.

준호 안녕히 주무십쇼.

한수 큰 한수 닦지 마라, 싫으면 그냥 투명인간 취급해.

준호 예.

한수 수고.

기준 안녕히 주무십쇼!!

상병 한수, 세탁실을 나간다

준호 (망치를 잡고는) 망치 하나 더 가져와.

기준, 밖으로 나간다. 그동안 준호는 눈물을 힘껏 닦는다. 준호는 창문을 닫고 창틀에 못을 박는다. 기준, 망치를 가져온다.

기준 여기 있습니다.

준호 ○발 미치겠네. 너도 전문대야? 자리 잡고 박아!

기준 예 알겠습니다!

두 사람, 말없이 못을 박는다

준호 (일하며) 너도 대근이가 큰 한수 그린 거 봤지?

기준 (일하며) 예 그렇습니다.

준호 전문대 닮았지?

기준 예….

준호 큰 한수도 잘 그렸다고 인정했어. 같이 웃었단 말이야. 대근이가 미대를 나왔거든. 그 새끼 만화 그리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여기서 있었던 일들 만화로 그릴 거라고. ○발 새끼 지가 뭘 잘못했다고…. 야.

기준 예 이병 기준.

준호 전문대 요즘 어떠냐?

기준 괜찮습니다.

준호 아까 같이 있었지?

기준 예 그렇습니다.

준호 무슨 얘기했어?

기준 별 얘기 안 했습니다.

준호 이 새끼가 약 빨았냐? 전문대랑 같이 다니더니 너도 전염됐냐? 니가 판단하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기준 예!

(사이)

기준 오랜만에 닦이니까 정신이 번쩍 든다고 했습니다.

준호 진짜?

기준 예 그렇습니다.

준호 마조히즘인가? ○발 오싹하네. 그 새끼 닦일 때 발기했거든. 진짜 변태 아냐?

기준 설마 말입니다.

준호 그래서 일을 그따위로 하나? 처 맞으려고? 너랑 있을 땐 어때? 일 잘 해?

기준 잘 합니다.

준호 근데 우리랑 있을 땐 왜 그래? 갈수록 싸이코네. 사람 뛰어내리게 만들고 히히 웃고 다니고… 또 무슨 얘기했어?

기준 어….

준호 내 얘기 안 해? 어제 내가 닦았잖아, 휴가 짤렸다고. ○발 니 생각에는 내가 참아야 했다고 생각하냐? 난 그 새끼만 보면 소름이 돋아. 내 동기 억울하게 죽여놓고 자기만 편한 데로 도망치겠다고 바로 전출 신고했잖아. 너 같으면 안 닦겠냐?

기준 저라면….

(사이)

기준 저도 휴가 짤리면 못 참을 거 같습니다.

준호 당연하지!! 옛날 같았으면 일주일 동안 잠도 못 잤어.

준호 한수 상병이 예전에 얼마나 무서웠다고. 차라리 그렇게 악마처럼 할걸 봐준다고 살살 닦으니까…, 대근이는 진짜 닦기 싫어했었어. 대근이가 전문대 관리한다고 얼마나 마음 고생했는데. 대근이가 처음에 자기는 닦는 거까진 못 하겠다고 했다가 한수 수병한테 ×나 닦였어. 너만 깨끗하냐고 누군 좋아서 이러냐고…. 전문대 개새끼는 ×도 모르니까 대근이를 대표로 소원 수리하고…. ×나 이기적인 새끼….

기준 세 대만 맞아서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준호 뭐?

(사이)

기준 세 대만 맞아서 행복하다고.

준호 뭐라는 거야 병신아. 됐고 너 전문대 이상한 낌새 보이면 바로 보고해라.

기준 예.

준호 아 ○발! 나도 닦는 게 아니었는데! 또 찌르는 거 아냐!? 휴가 짤린 거 때문에 폭발해 버려서…. 장애자 새끼가 왜 내 군화를 신고 가?

(사이)

준호 넌 맞선임 잘못 만난 죄밖에 없어.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걸로도 큰 죄가 된다고….

일병 큰 한수와 이병 은수가 문짝을 들고 세탁실로 들어온다

기준 필승!

큰 한수 : (손을 놓고 경례) 필승!

큰 한수가 문짝을 떨어뜨려서 은수의 발이 문짝에 찍힌다.

은수 아우 씨!! 아야….

은수가 한쪽 발을 들고 팔짝거리며 뛰어다닌다

큰 한수 : 괜찮아?

은수 아우… 봐야지 말입니다.

은수, 양말을 벗고 발을 확인한다.

큰 한수 : 괜찮아?

은수 예.

준호 (기준에게) 따라와.

기준 예 알겠습니다.

준호, 기준과 함께 문짝을 대변기 칸에 연결한다.

큰 한수 : 제가 하겠습니다.

큰 한수, 준호 옆에 바짝 붙어 서 있다. 준호는 큰 한수를 투명인간처럼 대한다. 큰 한수, 옆에서 멀뚱멀뚱 서 있다.

은수 (큰 한수에게) 수병님, 저 발 아픕니다. 반창고나 뭐 연고 좀 갖다 주시지 말입니다.

큰 한수 : 응. 준호 수병님 저 반창고 좀 가지고 와도 되겠습니까?

(사이)

큰 한수 :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필승 수고하십시오.

기준 필승 수고하십시오.

큰 한수가 세탁실을 나간다

준호 기준이.

기준 예 이병 기준.

준호 전문대한테 경례하지 마.

(사이)

준호 못 들었냐?

기준 잘 못 들었습니다?

준호 전문대 닮았냐? 서울대가 왜 이래? 전문대한테 앞으로 경례하지 말라고.

기준 경례 말입니까?

준호 말도 너무 받아주지 마. 저 새끼 놀 사람 없으니까 계속 너한테 앵기는 거 아냐? 근데 저 새끼 당직이었잖아. 당직 땐 처 졸다가 쉬는 시간엔 깨 있어?

은수 저 새끼 스카치테이프 가져오는 거 아니겠지 말입니다.

준호 너 엿 먹이려고 문짝도 일부러 떨어뜨린 거야.

은수 에이 그런 머리 있는 놈 아닙니다.

준호 저 새끼는 대가리 ×나 굴리는 새끼야. 다 보여서 문제지. 마조히즘 새끼.

은수 그게 뭡니까?

준호 맞으면서 쾌감을 느끼는 거. 야 아까 뭐라고 했다고?

기준 아까… 세 대만 맞아서 행복하다고….

은수 진짜? 맞아서 행복하다고? 뭐지?

준호 ○발 정신병자를 군대에 보내서 여러 사람 힘들게 하고 있어. 저 새끼 부모도 정신병자 아냐?

은수 (기준에게) 너도 참 불쌍하다. 맞선임이 전문대라서. 나 같으면 자살했을 거야.

준호 (망치로 바닥을 꽝 찍으며) 야!

은수 예 이병 은수.

(사이)

준호 아가리 함부로 놀리지 마. 창밖으로 던져 버린다.

은수 주의하겠습니다.

큰 한수가 세탁실로 들어온다.

큰 한수 : 필승!

은수 왜 빈손입니까?

큰 한수 약통이 어디 있더라?

(사이)

은수 : (다리를 절뚝거리며) 반창고 붙이고 오겠습니다. 필승 수고하십시오.

기준 필승 수고하십시오.

은수, 세탁실을 나간다. 준호와 기준, 문짝을 연결한다.

큰 한수 : 제가 하겠습니다.

준호는 말없이 문짝을 연결한다. 큰 한수는 말없이 멀뚱멀뚱 서 있다. 문짝 연결이 끝났다.

큰 한수 : 수고하셨습니다.

준호 (기준에게) 담배 피고 오자.

기준 예 알겠습니다.

큰 한수 : 수병님.

준호, 멈춘다.

큰 한수 : (마일드 세븐을 꺼내서) 이거… 저희 어머니께서 택배로 보내주셨습니다.

준호 그래서?

큰 한수 : 수병님 드리겠습니다.

준호 엄마한테 담배 심부름도 시키냐?

준호, 담배를 받지 않고 큰 한수를 세워두고 나간다. 기준과 큰 한수만 남는다.

기준 수병님 안 가십니까?

큰 한수 : 엄마한테 양담배 보내달라고 하면 안 돼?

기준 흡연실….

큰 한수 : 난 수병님들한테 한 갑씩 돌리면서 친해지고 싶었는데….

기준 같이 흡연실로 가셔서….

큰 한수 : 같이 어디로…?

기준 예…?

준호 : 목소리 엘리트!

기준 예 이병 기준!! 그럼….

큰 한수 : 나랑 대근 수병님 중에 누가 죽는 게 맞는 거야?

(사이)

준호 : 목소리 야!!

기준 : 예 이병 기준!!

큰 한수 : 구형 세탁기 고장 났다.

기준 : 잘 못 들었습니다?

(사이)

기준 (소곤거리며) 수병님, 금방 오겠습니다. (매우 작게) 필승 수고하십시오.

기준, 뛰어서 세탁실을 나간다.

큰 한수, 우두커니 서 있다가 창가로 다가간다.

바닥의 장도리를 주워서 창문틀에 박힌 못을 모조리 뽑는다.

성내지 않고 매일 반복된 일을 하는 사람처럼 천천히 못을 뽑는다.

마침, 신형 세탁기의 건조가 끝났다. 우아한 노래가 들리다가 '건조가 끝났습니다 깨끗이 닦인 빨래를 밀폐된 통 안에서 꺼내어 주십시오.'기계의 알림 소리, 반복해서 들린다.

큰 한수, 열린 창문턱에 기대어 아래를 바라본다. <막>





<당선소감>

 

'한수' 있었기에 세상으로 나온 作品

 

'세탁실'은 한수라는 친구가 없었다면 쓰지 못했다. '오늘은 세 대만 맞아서 행복해.' 키가 큰 한수가 나에게 했던 말이다. 한수 얼굴의 곰보 자국과 슬며시 웃는 미소, 물기 한 방울 없던 세탁실, 창밖에선 아침의 햇살이 내리쬐고 산새들이 지저귀던 그해 여름을 잊을 순 없다. '세탁실'을 쓴 후엔 펑펑 울어버렸다. 귓가에 목소리들이 들렸고 받아 적었다. 난 간신히 판만 깔아줬을 뿐이다. 처음 나를 중심에 두지 않고 쓸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나를 잃어버리고 싶다. 걷고 걸으며 찍히는 발걸음에 나란 조각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갔으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나의 동료가 되어 주었으면. 그리하여 나를 잃어버렸으면.

기술과 형태를 가르쳐주었던 선생님에게, 깊이와 정신을 만나게 해주었던 선생님에게, '세탁실'을 좁은 군부대에서 벗어나 세상에 드러나게 해준 심사위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눈물의 렌즈를 통해서 하늘나라가 보인다는 함석헌의 가르침을 새기며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이 생을 견뎌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당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 약력

▶ 1986년 울산 출생

▶ 중앙대 연극학과 졸
▶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MFA 재학 중
▶ 연극 '벗님들' 작·연출



<심사평>

 

뛰어난 현실감과 연극적 구성력이 인상적

 

100편 가까운 응모작을 두루 살펴보니 희곡을 쓰려는 지망생들의 열의가 새삼 뜨겁게 느껴진다. 그런데 그 열의가 희곡 문학에 대한, 연극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동반하고 있는지 회의가 드는 작품이 많았다. 심사하는 처지에서, 연극을 업으로 삼고 있는 처지에서는 다소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황승욱의 '세탁실'과 허경도의 '기만의 성' 등 수작 두 편을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기만의 성'은 지하철에서 흔히 발생하는 관음적 성희롱을 매개로 하여 사과할 줄 모르는 현대인들의 세태와, 사건 무마를 위해 형식적인 사과를 강요하는 문화를 적절하게 교직하며 오늘의 사회상을 희극적으로 비판한다. '세탁실'은 한 관심 병사의 자살을 두고 남은 병사들이 트라우마에 대응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조차 계급에 따른 폭력의 사슬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죽은 병사를 자살에 이르게 한 원인 제공자가 창가에 기대어 밑을 내려다보며 끝나는 종결, 오픈 엔딩이 특히 인상적이다. 그 역시 자살을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명쾌한 대답 없이 두 가능성을 다 열어둔 처리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가해자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은 논의 끝에 상황 설정, 언어 감각, 구성력 등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인 '세탁실'을 당선작으로 뽑기로 합의했다. 최근 몇 년간 '이만큼 리얼리티와 연극적 구성력을 보인 작품이 있었나' 싶을 만큼 작품은 탁월했다.


심사 김윤철, 이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