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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노인과 바닥 / 김주원

 

>> 등장인물 

노인(77) 

소년(12)-아역이 아닌 성인 배우가 연기할 경우 의상으로 소년다움을 표현

노인의 아들(50세) 

노인의 며느리(40대 후반) 

노인의 중년 시절 목소리와 친구 목소리-1인 다역 가능


무대 


불이 켜지면 단출한 방이 보인다. 정면 벽면에 가족사진이 비스듬하게 걸려 있다. 노인 부부의 중년 시절 모습으로 가운데에 12살 아들이 있다. 아들의 모습은 극 중 소년과 일치. 구석에 오래된 소형 냉장고. 그 옆에 환경미화원들이 사용하는 커다란 빗자루와 쓰레받기가 기대어 놓여 있다. 우산 통에 우산이 하나 꽂혀 있다. 가난한 분위기보다 가구가 없는 느낌으로 표현. 


정면을 보며 방바닥에 앉아 두 손으로 낚싯대를 잡고 있는 노인. 낚싯바늘에 미끼도 없다. 배우가 손으로 낚싯대를 들고 연기에 집중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니 낚싯대를 받칠 수 있는 탁자가 있어도 무방하다. 낚싯줄은 힘없이 바닥에 축 늘어져 있다. 노인은 사뭇 진지하다. 


시간 비 오는 밤 

노인의 방 

빗소리 점점 거세지는가 싶더니 천둥소리.

노인: (폭우 소리에 주위를 돌아보며) 꼭 그놈 울음소리 같군.

낚싯대를 잡고 다시 집중하며, 

노인: 놈은 모를 게야. 이 늙은이가 여기서 자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개나리 진달래 핀 봄에 오려나. 햇살 따뜻한 여름이려나. 낙엽 뚝뚝 떨어지는 가을, 하얀 눈 푹푹 날리는 겨울에 올까. 근데 딱 오늘 같은 날이었군. 비 오는 이런 밤에 누가 와도 모르지. 아무렴, 누구 하나 죽어도 모를 날씨야. 

빗소리 잠잠해지고 똑똑, 노크 소리. 

소년 목소리: 저예요. 또 문밖에 왔어요.

노인: 비 맞을라. 얼른 들어오너라. 

소년 목소리: 전 이 정도 비바람엔 끄떡없는걸요.

노인: 다행이다. 아까 그놈은 울부짖더구나.

소년 목소리: 전 안 울어요. 약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노인: 사람이 약하기만 한 건 아니란다.

소년 목소리: 때에 따라 날씨처럼 바뀌죠.

노인: 어서 그놈이 와야 할 텐데. 

소년 목소리: 또 그놈을 기다리나요? 

노인: 그래. 아무래도 오늘은 놈이 올 것 같다.

소년 목소리: 도대체 언제 저랑 함께 가실 거예요?

노인: 얘야, 난 그놈을 기다려야 한다. 만나야 해.

소년 목소리: 그럼, 전 그놈이 올 때까지 기다려요?

노인: 바쁘면 먼저 가려무나. 

소년 목소리: 그럴 수 없으니 문제죠. 

노인: 늙은이가 된 후부터 그놈을 기다려 왔지.

소년 목소리: (웃으며) 늙은이요? 언제 늙은이가 되셨는데요.

노인: 기다리면서부터. 여기 이렇게 낚싯대 앞에서.

낚싯대를 쥔 노인의 손이 슬쩍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물고기 입질이 온 듯.

노인: 쉿. 

소년 목소리: 왔나요? 그놈이? 

노인 일어나 낚싯대를 쥐고 크게 좌우로 휘청댄다. 큰 물고기 움직임에 따라가듯이.

노인: 그런 것 같구나. 

노인 어떻게든 낚싯대를 끌어 올리려고 한다.

빗소리 거세지고 노인 팽팽한 힘겨루기를 하다 낚싯대를 놓치며 뒤로 넘어진다.

암전 

무대 불 켜지고, 노인 허탈하게 앉아 있다.

곧 방문 열리고 소년 들어온다. 

노인: 그놈이 아니었어. 

소년: 저 왔어요. 

노인: 오늘도 보여 줄 게 없구나. 

소년: 할아버지만 있음 돼요. 

노인: 오늘도 오지 않으려나 보다. 그놈이 아니었어.

소년: 대신 이렇게 제가 왔잖아요. 

노인: 하지만 방금 엄청난 놈을 놓쳤다. (일어나 두 팔을 크게 벌리며)

적어도 이만 한 놈이었는데. 아니 훨씬 클 거다.

소년: 저도 알고 보면 엄청난 놈인데. 알면 깜짝 놀랄걸요? (낚싯대를 주워 와 굽히며) 와우 굉장한 놈이었나 봐요. 휘어졌어요. 할아버지 허리처럼.

노인: 어쩔 수 없어. 시간이 쾅쾅 밟고 가는데 별 수 있나.

소년: (한 손에 낚싯대를 들고) 다시 보세요. 멀쩡해요.

노인: 내 허리도 멀쩡하다. 이 바닥에서 낚시하는 덴 지장 없지. 얘야, 그걸 이리 다오.

소년, 낚싯대를 노인에게 건네며 그 옆에 앉는다.

노인, 정면을 바라보며 다시 낚시를 하고

소년: 다시 기다리는 건가요? 

노인: 그놈은 온다. 

소년: 놈이 알까요. 할아버지가 이렇게 기다리는데.

노인: 그냥 기다려야 하는 거야. 서두르면 안 돼.

소년: 알아요. 저도. 그래서 밤마다 그냥 여기 앉아 있잖아요.

노인: 놈은 온다. 꼭 와. 오늘 밤이 가기 전에.

소년: 어휴,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저도 빨리 할아버지와 여길 떠나고 싶거든요.

노인: 아까 놈이 울었단다. 창에 찔린 것마냥 고통스런 비명이었다. 결국 여기로 올 수밖에 없어. 살기 위해서 나를 찾아올 게다. 

소년: 죽기 위해서가 아니고요? 

노인: 죽을 거면 저렇게 비명도 지르지 않았어. 계속 나한테 신호를 보내는 거야. 놈은 알아. 내가 자기를 살려 줄 불빛이라는 걸.

소년: 과연 그럴까요. 

노인: 그런 장면이 꿈에 나왔어. 요즘 매일 그놈 꿈을 꾼다. 그놈은 피를 철철 흘리며 나를 찾아와. 붉은 피는 보이는데 그놈 모습은 희미하지.

소년: 치, 할아버지는 바로 옆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빗줄기 소리 다시 들리고, 낚싯대가 꿈틀거린다.

소년: 어? 그놈인가요? 

노인: 이놈은…, 이놈은! 

노인 일어나서 낚싯대를 끌어 올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빗줄기 소리 점점 거세지고 노인은 낚싯대를 붙잡고 버둥댄다.

소년: 도울게요. 

노인: 아니다! 

소년: 제 허리는 멀쩡해요. 제 팔 힘은 어마어마하죠. 한 손으로 그놈도 때려눕힐 수도 있어요. 

노인: 얘야, 비켜라. 이건 나와 놈과의 일이다.

소년 뒤로 조금씩 물러나며 퇴장 

무대 조명, 낚싯대와 사투를 벌이는 노인만 비추는 가운데 빗줄기 소리 점점 거세진다. 방문 두드리는 소리 들리고, 문 열리며 며느리 등장한다. 며느리 노인을 보고 놀라며 조심스레 주변을 맴돈다. 

노인이 낚싯대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며느리가 한 손으로 잡는다. 노인 비로소 며느리 바라보고 빗줄기 소리는 점점 약해지며 꺼짐.

며느리: (낚싯대를 뺏어 뒤에 들고) 아버님도 제정신이 아니군요.

노인: (정신 차려 며느리 바라보며) 누구신지….

며느리: 저를 못 알아보시겠어요? 상태가 더 악화되셨군요.

저예요. 아직까지 아버님 아들하고 이혼 안 하고 같이 사는 여자.

노인: 그래, 내 아들 결혼식 때 봤구나. 20년 만인가.

며느리: 10년 만이에요. 아버님. 

노인: 아하, 그래 오랜만이구나. 

며느리: 전혀 반가운 표정이 아니시네요.

노인: 아니다. 네가 올 줄 몰라서 당황스럽긴 하다. 하지만 방금 그보다 더 당황스러운 일이 일어나서 그래. 

며느리: 무슨 일이죠? 지금 저희 집안 돌아가는 것보다 더 당황스런 일이 있겠어요?

노인: 아깝게 놓쳤어. 네가 들어오는 바람에 그놈이 달아났다.

며느리: (히스테릭하게) 어딜 가나 제 탓! 아버님도 제 탓이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올걸 그랬어요. 아버님마저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노인: 네 탓이라고는 안 했다. 

며느리: 방금 제가 와서 잘못됐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요. 저는 잘못됐어요. 그런데 제가 뭘 잘못했나요? 

며느리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한다.

노인, 한 손으로 며느리의 어깨를 다독여 준다.

노인: 얘야, 잘 왔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기다렸단다.

며느리: (고개 들며) 저를요? 

노인: 그놈을 가장 기다렸지. 하지만 네가 와도 좋구나. 여기에 너무 오랫동안 사람이 오지 않았어. 

며느리: 맞아요. 그 애는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있어요.

노인: 그 애라니. 내 아들 말이냐. 그 애가 혼자 있니?

며느리: 아니, 아버님 손자요. 그이는 애가 아니잖아요.

노인: 나한테는 애로만 보이는구나. 그 애가 안 온 지 꽤 됐지.

(가족사진을 보며) 저 사진을 찍을 때 참 좋았다. 그때는 몰랐지.

저 때 그 애가 몇 살인 줄 아니? 

며느리: 아버님의 그 애가 사진 속에서 몇 살인지, 그런 게 뭐가 중요하죠?

노인: 열두 살이란다. 저 때 저 애를 데리고 바다 여행을 그렇게 다녔다.

며느리: 과거잖아요. 중요한 건 현재라고요.

노인: 현재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게냐? 

며느리: 문제투성이죠. 아버님도 저도. 아버님의 손자까지도.

그 애는 잘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뭐하는지 아세요?

대학 실패하고 방에서 게임만 해요. 

노인: 나도 방에서 낚시만 한다. 

며느리: 아버님은 노인이잖아요. 그 앤 팔팔하다고요.

노인: 기다려 봐라. 다 때가 올 게다. 

그 애도 기다리고 있을 게야. 자, 낚싯대를 다오.

지금 나는 낚시를 해야 할 때야. 

며느리: (낚싯대를 더 뒤로 감추며) 그럴 때가 아닐 텐데요.

노인: 넌 모를 게다. 내가 여기서 얼마나 오래 낚싯대를 붙잡고 있었는지.

얼마나 애타게 그놈을 기다려 왔는지. 어서 낚싯대를 다오.

며느리: 그보다 허리는 어떠세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오년 전 새벽 청소하다 빙판길에 미끄러지셨다면서요. 

노인: 참 일찍 묻는구나. 

며느리: 저도 정신없었어요. 그 애는 저하고 한마디도 말을 안 해요.

전 혼자 상담받으러 다니느라 힘들었어요. 노력할 만큼 했다고요!

노인: 내 허리는 좋다. 낚시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아.

며느리: 솔직히 망가졌잖아요. 그 후로 일을 못 하시죠.

노인: 낚시는 할 수 있다. 낚시하며 기다리는 일도 할 수 있지.

며느리: 그런 건 일이 아니에요. 돈이 나와야 일이죠.

지금 집에 일하는 사람이 없어요. 다들 불량품이 됐다고요.

그래도 아버님은 멀쩡하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제정신이 아니실 줄이야.

노인: 나는 멀쩡하다. 낚싯대를 다오. 

며느리: 제발 그만하세요. 

노인: 내 집이야. 뭐든 할 수 있다. 내 맘대로.

며느리: 하지만 명의는 그이 앞으로 되어 있잖아요.

확인하고 오는 길이에요. 

노인: 그래서 낚시를 하지 말라는 거냐?

이 집은 내가 청소해서 겨우 마련한 거야. 그 애 앞으로 해 놓은 것도 나다.

며느리: 이런 곳에 아버님을 방치할 수 없어요.

노인: 방치라니, 여기서 난 일을 하고 있다.

며느리: 무슨 일요? 

노인: 그놈을 기다리는 일. 

오늘처럼 비바람이 불었다가 잔잔해지면 심장이 뛴다.

이 나이에 심장이 뛰다니. 두근두근 누가 북을 치는 것마냥.

이게 다 그놈 때문이야. 

얘야(귓속말하듯 가까이) 이 바닥 아래에 깊은 바다가 있어요.

(정면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넓기도 하단다.

며느리: 정신 차리세요. 우리는 바닥에 있어요. 아버님!

빗소리 들리는 가운데 노인 천천히 바닥에 누우며

노인: 그날도 비가 왔어. 밤이었다. 새벽이었나. 뭐 늙은이 혼자 있는데 밤인지 새벽인지가 뭐가 중요하겠어. 이러고 바닥에 귀를 대고 있는데 들리는 게야. 그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나지막하게) 왜에 왜에 왜에 로오옵 로오옵 로오옵 다아다아다아. (천천히 일어나며) 뭐지. 빗소리를 뚫고 깊은 데서 신음처럼 올라오는 이 소리는 뭘까. 다음 날 바닥에 귀를 대고 있으니 파도소리가 들렸어. 이 바닥 깊은 곳에 바다가 있는 게야. 그놈은 거기에서 혼자서 울고 있던 거고. 상상이 안 가지? 나도 허리 다치기 전에는 몰랐단다. 

며느리: 그때는 새벽부터 이 일 저 일 나가셨잖아요. 깊이 주무셨을 텐데.

노인: 그래, 일을 안 나가고 바닥에 누워 있으니 들리더구나.

며느리: 다 일을 못해서 생긴 병이에요.

노인: 병이 아니다. 

며느리: 그이는 병에 걸렸어요. 

노인: 뭐라고? 

며느리: 네, 아버님 아들이 병에 걸렸어요. 보증까지 서더니 결국 사기당했어요.

백세시대라는데 인생의 절반까지 모은 재산을 날렸어요.

노인: 그 애는 어디에 있니. 

며느리: 사기꾼 잡겠다고 전국을 이리저리 다녔죠. 올 초에 빈손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바닥에 누워 헛소리를 해요. 

노인: 그 애도 바닥에서 바다를 발견한 거니?

며느리: 뭘 깨달았다고 하더군요. 그이는 제정신이 아니에요. 3년 전, 회사 정리해고 명단에 그이가 포함됐죠. 처음부터 제가 그 친구 조심하라고 했어요. 그런데도 돈을 빌려주고 순진하게 낚인 거예요. 친구가 아니라 사기꾼이죠. 그래도 걱정 마세요. 이 집은 안전하니까요. 

노인: 마침내, 너희에게 이걸 줄 때가 왔구나.

며느리: 이제 말이 통하네요. 아버님. 그래서 십년 만에 아버님을 찾아온 거예요.

노인 냉장고에서 오래된 책을 한 권 꺼내 가져온다.

책 제목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노인: 헤밍웨이란 작자가 쓴 노인과 바다란다. 이걸 읽으면 견딜 수 있다. 내가 그랬거든. 

며느리: 작자가 아니라 작가예요. 아버님은 제정신이 아니시네요.

노인: 난 멀쩡하다. 봐, 낚시도 하잖니. 아직 귀도 멀쩡해서 저 밑바닥에 있는 바닷소리도 듣는다. 

며느리: 방금 책을 냉장고에서 꺼내셨잖아요!

노인: 이건 내 꿈이었다. 꿈은 싱싱해야 하니까. 상하면 안 되지.

(책 냄새를 맡으며) 다행히 아직은 괜찮구나.

(책을 들어 휘리릭 넘겨 보이며) 자 바다가 보이지?

며느리: 우린 바닥에 있다니까요! 

노인: 네 나이 때 길바닥 청소를 하다가 주웠지. 성탄절 새벽이었다. 버릴 수 없었어.

바다, 라는 두 글자 때문이었다. 

젊어서는 배를 타고 멀리 나가고 싶었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지. 바닥이 날 잡아 끌었으니까. 가족이 먹고살 만해지면 바다에 나가려고 했는데…. 어느 날 눈 떠 보니 나는 노인이 되어 바닥에 누워 있더구나. 하지만 이 바닥 깊은 곳에 바다가 있을 줄이야. 자, 어서 낚싯대를 다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진다. 

노인: (천장을 두리번거리며) 그놈이 올 것 같아. 그놈이 오기에 딱 좋은 날씨군. 자, 빨리 그걸 달라니까. 

며느리: 아뇨. 그이도 아버님도 치료가 필요해요.

노인: 병원은 필요 없다. 

며느리: 병원이 아니에요. 주변에 푸른 나무들이 있을 거예요.

공기도 상쾌할 거예요. 무엇보다 아버님은 혼자가 아닐 거구요.

이런 낚시는 거기서도 맘껏 할 수 있어요. 그러려면 이 집을 팔아야 해요.

천둥소리! 

며느리 깜짝 놀란 틈을 타 노인 낚싯대를 뺏어 온다. 대신 며느리 품에 책을 안겨 주며

노인: 자, 이걸 그 애한테 전해다오. 

며느리: (책을 한 손에 들고 어이없어하며) 우리가 봐야 할 건 이런 게 아니에요. 이 집이 필요해요. 현실을 똑바로 보세요. 

며느리 퇴장. 문밖에다 책을 홱 버린다.

노인 정면 보며 낚시를 한다. 

빗소리 점점 줄어들며 똑똑 노크 소리 들리고

소년 목소리: 들어가도 돼요? 

노인: 또 비가 오는구나. 추울 테니 어서 들어오너라.

소년 목소리: 추위 따위가 제 일을 방해하지는 못해요.

그리고 전 추위 같은 건 아무렇지 않아요.

노인: 젊었을 땐 나도 그랬지. 너만 한 아들이 있었을 때 말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두렵지 않았어. 아들이 쑥쑥 크고 있었으니까.

가진 게 없는 이들에겐 견디는 힘이 필요하지.

어느 날 바닥 청소를 하다가 허리가 아파 고갤 들었을 때 알았나.

아들은 이미 지 애비 키를 훌쩍 뛰어넘어 있었어.

그리고 내 몸에서 젊음이 빠져나갔더구나.

소년: 아 참, 누가 이겼어요? 

노인: 모르겠다. 며느리하고 나 둘뿐이라서.

우리 둘 중 누가 이겼다고 할 수 있겠니.

소년, 문 열고 들어와 노인의 옆에 앉는다.

소년: 아이 참, 그놈하고 한 판 승부 말이에요.

노인: 안 왔다. 

소년: 아까 왔다고 했잖아요. 

노인: 그놈은 늘 올락 말락 한 곳에 있지.

그리고 난 그놈과 승부를 하려는 게 아니야.

소년: 그럼요? 

노인: 그냥 만나고 싶구나. 놈을 억지로 여기 데려올 수는 없어.

정말 올 마음이 있다면 놈 스스로 낚싯줄에 걸려들 거야.

그럼 난 힘들이지 않고 들어 올리기만 하면 돼.

소년: 그놈이 올까요? 오늘이 가기 전에.

노인: 올 거야. 

소년: 할아버지는 왜 그놈을 기다리죠?

노인: 그게 내 일이란다. 마음이 끌리는 일.

소년: 어서 그놈이 왔으면 좋겠어요. 

노인: 너도 그놈이 보고 싶니? 

소년: 전 그놈을 기다리는 할아버지를 기다려요.

노인: 오늘은 특별한 날이구나. 

오랫동안 낚싯대를 들고 있었지만, 이런 날은 처음이야.

하루에 두 명이나 여길 왔어. 그중 한 명이 가족이라니.

소년: 오랫동안 가족이 안 왔군요. 

노인: 한때 내 가족은 셋이었다. 아내와 아들이 함께 있을 때.

까마득한 일이야. 

소년, 일어나 벽면 뒷면에 비스듬하게 걸린 가족사진을 본다.

소년: 아들이 엄마를 닮았네요. 

노인: 깊은 데는 날 더 닮았지. 사람 말을 잘 믿는 거. 저 애가 친구한테 돈을 빌려줬다더군. 친구 사정이 딱했던 모양이지. 나도 그랬던 적이 있어. 그때 돈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가끔 이럴 때 답답하지. 바닥에서 뭔가를 끌어 올리고 싶은데 아무것도 안 걸리는 게야. 

소년: 도와드릴까요? 

노인: 네가 말이냐? 

소년: 비키라고 안 하시면. 

소년, 양반다리로 앉은 다음, 자연스레 노인의 머리를 제 다리에 눕힌다.

노인, 소년의 다리를 베고 옆으로 누운 모습.

소년: 자, 눈을 감아 보세요. 기억이 떠오를 거예요. 영화의 되감기 장면처럼.

노인:(눈 감고) 그래, 그때 친구 놈 말을 끔찍하게 믿었지. 아니 믿고 말고 할 게 없었어. 당장 어린 아들이 수술을 해야 한다는데, 어쩌겠어. 친구 놈은 내가 적금 타는 걸 알고 있었거든. 퇴직금을 받는 대로 준다고 했는데.

소년: 못 받았나요? 

노인: 안 받았지. 

소년: 사람들은 돈이라면 다 좋아하지 않나요? 돈 싫어하는 사람 못 봤어요. 자식이 돈 때문에 집에 불 질러서 부모가 한날한시에 죽는 경우도 많아요. 부모가 돈 타려고 어린 자식을 보내는 경우도 있고요. 근데 왜 그 돈을 안 받았나요?

노인:(침울한 목소리로) 그 돈을 내가…어찌 받나. (사이) 친구 놈이 영영 떠났어. 차 사고로. 아들을 따라간 게야. 아들이 수술 도중에 먼저 갔거든.

무대 어두워지고, 

허공에서 40대 중반 노인과 친구 목소리 들린다.

노인 목소리: (40대 중반) 자네 아들 수술, 이번에는 성공할 거야. (사이) 돈 꼭 돌려줘야 하네. 

친구 목소리: 고맙네. 내일모레 퇴직금 들어오니까 걱정 말고. 내가 무슨 일을 해서라도 줄 테니까. 

노인: 그건 친구 목숨 값이었어. 뒤늦게 친구의 편지를 받고 알았지. 그 친구가 저세상으로 갔다고 하니, 아내가 깜빡했다며 등기 우편을 하나 내밀더군. 편지에 사망 보험금 수령인을 나로 해 놨다고 쓰여 있더군. 더 일찍 읽었더라면….

소년: 뭐가 달라졌을까요. 

노인: 아내에게 화를 내지 않았겠지. 그때부터 아내의 뇌에 고드름이 생긴 것 같아. 내 머리에 흰머리가 군데군데 쌓일 때 아내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지. 아내의 뇌에 녹지 않을 고드름이 크게 자리 잡았거든. 아내의 종양은 고드름 모양이었어. 아내는 고통스러워했어. 아내가 떠났을 때 난 이렇게 말했어. 축하해, 여보.

노인, 태아처럼 몸을 웅크려 본다. 소년, 낚싯대를 바닥에 내려놓고 노인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노인: 왜 나만 이러고 있지. 친구도 아내도 떠났는데.

소년, 노인을 일으켜 앉히며 

소년: 할아버지, 눈 뜨세요. 

노인, 눈 뜨고 낚싯대를 잡는다. 

소년: 지금은 아들과 둘이 남은 건가요?

노인: 나 혼자란다. 그놈이 오기 전까지.

소년: 저도 끼워 주세요. 그럼 다시 셋이 되잖아요.

노인: 너는 가족이 아니잖니. 

소년: 그럼, 그놈은 할아버지와 가족인가요?

노인: 모르겠구나. 오래전에 이 바닥에서 그놈의 숨소리를 들었다.

놈은 심해에서 혼자 버티고 있었지. 그 소리를 계속 들으며, 고통스러웠어. 여기 가슴이 아팠다. 왜 나도 아플까. 저 밑바닥에서 놈을 끌어 올리기로 했지. 그때부터 놈은 남이 아니었다. 

소년: 그놈이 올 때까지 할아버지는 여기를 안 떠나겠네요.

노인: 올 거야, 놈은. 

소년: 네,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벌써 밤 열한 시예요.

노인: 이 방에는 시계가 없단다. 빛과 어둠만 드나들 뿐이지.

소년: 그래도 저는 알아요. 전 남들과 다르다니까요.

노인: 쉿! 

빗소리 들리기 시작하고. 입질이 온 듯 노인 낚싯대 쥔 손을 움직인다.

소년: 빗소리예요. 

노인: 저 밑바닥에서 뭐가 이리로 왔어. 얘야, 봐라. 이 줄의 움직임을.

(낚싯대 움직임을 크게 하며) 

노인 일어나 낚싯대를 크게 움직이며 버둥거린다. 큰 물고기를 끌어 올리는 듯.

소년: 도와드려요? 

노인: 아니다. 

소년: 이번에도 놓치면 어쩌시려고…. 

노인: 정말 그놈 같구나! 

소년: 전 정말 힘이 세다니까요. 숨을 들이마시면 (관객석을 쭉 가리키며) 여기 있는 영혼까지 죄다 빨아들일 수 있는데. 

노인: 얘야, 부탁이다. 뒤로 물러나 있으렴.

무대 불 꺼졌다 켜졌다 하는 도중에 파도 소리, 거센 빗소리 들린다. 바다 한가운데서 혼자 큰 물고기를 잡아 올리려는 듯이 노인 무대 위에서 사투를 벌인다. 점점 폭우 소리 정점을 향해 가다 절정에서 무대 불과 소리 동시에 꺼짐. 그와 동시에 소년 퇴장하고 문이 열리고 아들 던져진 듯 노인 옆에 등장. 아들은 책 ‘노인과 바다’를 가슴에 끌어안고 있다. 

무대 불 켜지고 

쓰러진 노인 옆에 아들이 앉아 있다. 

이 와중에도 노인은 손에 낚싯대를 쥐고 있다.

아들: (노인을 부축해 앉히며) 아버지, 왜 바닥에 쓰러져 계세요.

노인: (두 손으로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어디서 온 게냐. 얼굴이 상했구나.

아들: (고개를 돌리며)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어요. (관객 중 한 명을 가리키며) 저 자 보이세요? 저 사람이 아까부터 저를 쫓아다니고 있어요.

노인: 안 보인다. 내 눈엔 너밖에 안 보인다.

아들: 아버지, 작게 말씀하세요. (빗자루를 가리키며) 여기에 도청 장치가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혹시 누가 오면 절대 문 열어 주지 마세요.

여기 들이면 안 돼요. 높은 곳에서 아버지를 잡으러 올 수 있어요.

노인: 높은 곳에서 왜 나 같은 늙은이를.

아들: (비밀을 말하듯이 은밀하게) 그들은 사람이 아니니까요.

우리 같은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잡으러 오는 일당이죠.

노인: (아들의 품에서 책을 꺼내 들고) 이건….

아들: 문 앞에 떨어져 있었어요. 일당이 일부러 놓고 간 거죠.

노인: 내 정신이 깜빡깜빡하지만 이건 기억난다. 내가 며느리한테 준 거야.

아들: 아내가 떨어뜨린 건 맞겠죠. 문제는 그걸 조종한 게 그 일당이라는 겁니다.

노인: 잘 이해가 안 가는구나. 

아들: 그럼 알기 쉬운 얘기부터 할게요.

예전에 아버지가 주워 온 책이잖아요. 밤에 아버지는 술 한 잔 마시며 이 책을 읽었죠. 전 그때 아버지가 신기했어요. 책을 읽다니. 그것도 저런 지루한 책을 진지하게. 낯설었어요. 

노인: 난 바다에 가고 싶었다. 꿈이었다. 넓은 바다를 보며 한 가지 일만 하고 싶었지.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그런데 저 책에 나오는 늙은이는 그러고 살더구나. 심심하지 않게 말 걸어 주는 손자 같은 녀석도 있고.

아들: 지금도 그런 삶을 꿈꾸세요? 

노인: 모르겠구나. 

여기서 나도 한 가지 일을 하고 있지. 네가 발길을 끊은 후부터였나.

아들, 침묵 

노인: 여기서 그놈을 기다렸단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아까만 해도 간절했는데. 순식간에 산 정상에서 내려온 것 같으니. 

아들: 잠깐 그놈이라니요? 설마 그놈이 여기에 왔었나요?

아버지 조심하세요. 놈은 아버지를 데리러 왔다구요.

절대로 들여보내지 마세요. 

노인: 그놈은 해가 되지 않아. 어디서 무슨 말을 들은 게야.

아들: 그 사람이 찾아왔다면서요. 

노인: 그놈 말이냐? 

아들: 아니, 이번에는 기찬이 엄마요. 아버님 며느리.

노인: 미안하다. 3년 만에 만나 그런지 아까부터 네 말을 한번에 못 알아듣겠다.

아들: 그 사람 말로는 아버지가 제정신이 아니래요.

노인: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구나. 아주 익숙해. 아마 나한테도 네 아내가 그 말을 수차례 하고 간 모양이다. 

아들: 상처받지 마세요. 저도 매일 들어요.

노인: 얘야, 너야말로 상처받지 마라. 용서하고 기도해라.

아들: (욱 하듯이) 어떤 용서요? 무슨 기도를 하라는 거죠?

저는 된통 당했어요. 평생 모은 돈을 그놈이 들고 튀었다고요.

보통 사람이 할 짓이 아니죠. 아, 사실 그놈은 보통 놈이 아니었어요.

알고 보니 국가정보기관에서 일하는 놈이었죠. 저랑 사업 얘기를 할 때 만년필 머리를 꾹 누르곤 했는데, 실은 그게 녹음기였던 거예요.

노인: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아들: 그걸 들으며 어떻게 하면 저 같은 사람을 속일 수 있을까. 등쳐 먹을 수 있을까. 박사들이 연구를 하는 거예요. 

노인: 국가에서 너한테 사기를 쳤다는 게냐. 왜 하필 너를.

아들: 저도 그게 궁금했어요. 괴로웠죠. 왜 나한테 이 일이 일어났을까.

전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회사가 하라는 대로 했고 세금은 월급에서 꼬박꼬박 빠져나갔죠. 그런데 아들 녀석은 대학에 떨어지고, 친구는 저한테 사기치고. 아내는…… 밤에 제 옆에 오지 않아요. 딜도와 함께 있죠.

노인: 딜도? 그게 높은 사람 이름이냐? 

아들: 아니에요, 아버지. 여기서 딜도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아요.

전 국가에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물론 제 가족에게도요.

노인: 내가 보증하지. 넌 잘못하지 않았어.

아들: 아, 그 말씀은 안 들은 걸로 할게요. 아버지, 절대 보증은 서면 안 돼요.

제가 아들이어도 안 되는 거예요. 

노인: 너는 착한 아이였다. 개근상을 꼬박꼬박 타왔지.

아들: 바로 그게 문제였어요. 전 만만한 사람이었어요. 일부러 저 같은 사람을 찾아내는 거죠. 국가기관에서 사람을 보내 저 같은 서민한테 사기를 치는 거예요. 그렇게 세금을 확보하는 거죠. 

노인: 그럼 서민한테 사기 치는 사람들이…….

아들: 실은 특수 공무원들이죠. 

노인: 아니야. 너는 만만하지 않다. 재수도 하지 않고 대학에 붙었잖니.

아들: 네, 그 점도 문제였어요.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걸. 올 봄까지 전국 바닥을 돌아다녔어요. 경찰에 신고해도 그놈을 잡을 수 없었어요. 그때 알았죠. 모두 한통속이구나. 이 비밀 시스템을 알아 버린 거예요. 순전히 촉으로 말이죠. 그 뒤부터 저한테 감시자가 붙었어요. 제가 이 사실을 터뜨릴까 봐 감시하는 거예요. (노인의 손을 잡으며)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아버지도 조심하셔야 해요.

노인: (아들의 뺨을 한 손으로 어루만지며) 얘야, 너야말로 조심해라.

아들: 우리는 표적이 됐어요. 제가 아버지까지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어요.

일당은 저를 협박하기 위해 아버지를 납치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 아내 말대로 (가까이 귓속말하듯) 일단 요양원에 들어가세요. 시간이 지나면 제가 아버지 꿈을 이루어 드릴게요. 

노인: 내 꿈? 

아들: 바다에 보내 드릴게요. 

노인: 괜찮다. 낚시는 이 바닥에서도 할 수 있다.

아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바닥은 위험해요.

노인, 비로소 낚싯대를 내려놓는다. 다음, 아들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운다. 아들을 안아 주며 

노인: 얘야, 걱정 말아라.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한다. 

무엇도 널 망가뜨리지 못해. 

너는 잘못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게 뭔지 아니?

네가 훌훌 털고 일어나는 거다. 

나는 이 바닥에서 버텨 왔다. 

너도 여기에서 다시 시작해 봐. 

아들, 두 손으로 아버지를 꼭 끌어안는다.

빗소리 들린다. 포옹을 풀고 아들 문 쪽으로 간다. 노인, 아들에게 ‘노인과 바다’ 책을 건넨다. 그 다음 우산 통에서 우산을 꺼내 아들 손에 쥐어 주며

노인: 바닥에서 일어나 보란 듯이 다시 걸어가렴.

그게 그들이 가장 겁내는 일이야. 혼자가 되는 걸 두려워하지 마.

아들 퇴장한다. 

노인, 무대 중앙으로 와서 바닥에 옆으로 눕는다.

봄비처럼 가느다란 빗소리 들리는 가운데,

소년 목소리:(들뜬 목소리로) 할아버지, 할아버지.

노인: 밖에서 나를 기다렸구나. 

소년 목소리: 저 방금 그놈 봤어요. 

그놈이 할아버지 집에서 막 나왔어요. 

노인: 어때 보이든? 많이 아파 보이든? 

소년 목소리: 상처가 크긴 해요. 하지만 바로 죽을 정도는 아니에요.

좀 절뚝거리긴 하겠지만 혼자 살아가는 덴 문제없어요.

노인: 얘야, 네 목소리가 익숙하구나. 많이 들어 본 목소리야.

소년 목소리: 그놈하고 얼굴도 똑같이 생겼는걸요. 가족사진에서 봤어요.

전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로 찾아가거든요.

노인: 그래, 어서 들어오너라. 

소년 목소리: 이제 저랑 함께 가실 거죠?

노인: 그러자꾸나. 근데 이렇게 밤이 깊었는데 어디로 갈까나.

소년 목소리: 바다로 갈까요. 

노인: 그것도 좋지. 

노인, 미소 띤 얼굴로 눈을 감는다. 

암전





<당선소감>


크리스마스 선물 처음 받아 본 아이처럼 달뜨고 기뻐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대상이 어느 날 갑자기 불쑥 제 손을 잡은 느낌입니다. 깜짝 놀랐지만 따뜻했습니다. 제게 당선 소식은 그러했습니다. 12월에 이렇게 따뜻한 소식을 만질 수 있다니. 크리스마스 선물을 처음 받아 본 아이처럼 달뜨고 기쁩니다. 

지금 서울 제 방에서 당선 소감을 쓰고 있습니다. 혼자 방에 있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보고 싶습니다.

만날 수 있는 사람들과 곁에 올 수 없는 사람들까지 떠오릅니다. 어찌 보면 호밀밭의 파수꾼 주인공 홀든 콜필드가 된 심정입니다.

홀로 제주도에서 일하는 엄마, 어젯밤 젊은 모습으로 꿈에 나온 돌아가신 아빠, 잘 자라고 있어서 고마운 조카 서영, 서우, 서율 등 가족이 떠오릅니다. 부족한 제게 문학의 길을 알려 주신 박범신 선생님, 전화번호만 봐도 그리운 신수정 선생님, 저를 가르쳐 주신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님들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좋은 작품으로 인사드리고 싶은 장은수 선생님, 멋지고 따뜻한 김은경 선생님, 희곡을 쓸 수 있게 격려를 해 준 태기수 선생님, 밝은 목소리로 축하해 준 김기혁 선생님 감사합니다. 제 오랜 친구이자 조력자 Y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친구 정은이와 일일이 이름을 적지 못한 지인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기회를 마련해 준 서울신문과 제 글의 손을 잡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 밖에도 많은 분이 떠오릅니다. 그분들의 이름을 하나씩 적어 가며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리운 이름을 모두 부르지 못하겠습니다. 그랬다가는 홀든처럼 모든 인간이 그리워지기 시작할 테니 말입니다. 말하지 않는 대신 부족한 점을 채워 나가며 열심히 쓰겠습니다. 



◎ 약력

▶ 1977년 충남 청양 출생

▶ 명지대 문창과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고양예술고등학교 근무



<심사평>

 

‘인간성 상실의 풍경’ 압축적이고 상징적으로 그려

 

극단적 현실 폭로와 재현 작품들이 줄고 회복과 재생 가능성을 사유하는 작품이 많아졌다. 더불어 극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은유적 상상력과 연극적 형식에 대한 고민도 깊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논의를 거쳐 155편의 응모작 중 4편으로 압축했다.

‘완벽한 하루’는 결혼을 앞둔 동거부부가 맞이하는 하루의 일상을 통해 꿈과 이상은 물론 기본적인 삶조차도 위협받는 젊은 세대의 비애를 로맨틱 코미디의 연극적 틀을 유지하며 설득력 있게 그려 냈다. 그러나 일종의 연극적 환상이 깃든 일상이라 할지라도 다소 작위적인 설정이라는 점이 지적됐다. ‘내 사랑 안나’는 실패한 가족 관계 속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채 살아가는 한 소녀가 자기 삶의 복원을 시도하는 성장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을 응시하는 진정성이 돋보인 반면 객관적 거리를 통해 보편적 이야기로 확장시키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아침의 맛’은 자살을 시도하는 남자와 좀비부자(父子)의 만남이라는 희극적 설정으로 시대의 우울을 포착하고 관계를 전복시키는 연극성이 뛰어났다. 그러나 희곡의 모티브들이 은유와 상징으로 읽힌다는 점에서, ‘좀비’라는 존재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찾기 힘들었다. ‘노인과 바닥’은 한 독거노인의 마지막 하루를 통해 끝없이 추락하는 삶의 조건과 인간성 상실 풍경을 압축적이고 상징적으로 그린 작품으로, 이 세계의 또 다른 이면을 보게 하는 문학성이 돋보였다. 다만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와 구도 및 주제 의식이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이것을 또 다른 문학적 성취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했다. 

마지막까지 ‘아침의 맛’과 ‘노인과 바닥’, 두 작품을 두고 진통을 겪었다. 연극성인가, 문학성인가의 문제는 희곡의 운명과도 같은 오래된 질문일 것이다. 결국 재기 발랄한 연극성은 더 일찍 무대에서 환영받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이 시대의 절망을 좀 더 큰 틀에서 사유하며 형상화한 ‘노인과 바닥’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문학성 짙은 희곡이 감당해야 할 여러 난관을 견디며, 묵묵히 자신만의 연극성을 벼릴 수 있는 작가로 성장하길 바란다.



심사 고연옥, 장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