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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가로수 마네킹 / 강서연

 

란제리도 망사스타킹도 액세서리도 

색 바랜 바바리코트도 한데 뒤엉켜있던 가판대 

가을 정기세일을 마치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마네킹들이 서 있다

가로등 불빛이 훤하게 조명을 비추는 쇼윈도 

은행나무의 옹이가 생식기처럼 열려 있다

저 깊은 생산의 늪에 슬그머니 발을 넣어보는 저녁

어둠이 황급히 제 몸을 재단해 커튼을 친다



첫눈이 내린다

칼바람을 따라가며 천을 박는 발자국들

재봉틀 소리에 맞춰 나무의 몸속에서도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길도 불빛도 사람들도 

왕십리 돼지껍데기집 화덕 위에 불판으로 모여든다

올해의 유행은 몸에 딱 달라붙는 레깅스 패션 

마지막 단추까지 꼼꼼하게 채운 새들은 어디까지 갔을까 

오래 서 있어서 아픈 플라타너스 무릎에 

가만히 손을 얹는 홑겹의 흰 눈발





<당선소감>


 내 詩는 길에서 주웠다

 

 눈이 내린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기다리는 전화는 도무지 올 것 같지 않았으므로 금강변을 따라 시원하게 내달려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행하는 이 없이 혼자 나선 길은 낯설고 두려웠다. 대전 시내를 벗어나 세종시 입구에서부터 엉키기 시작한 길은 영영 풀리지 않는 낡은 노끈 같았다. 추위와 굶주림보다 막막함이 더 외로웠다.

 그런 와중에 울려온 전화벨은 내 삶의 내비게이션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길이 열리고 이정표가 보이기 시작했다. 가야 할 방향을 지침 해놓은 화살표를 따라 나는 이제 힘껏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상처투성이인 내 삶에 고운 새살이 덮이는 것만 같았다. 하늘도 그동안 수고했다고 위로해 주려는 듯 어깨 위로 토닥토닥 함박눈이 쌓였다.

 그제야 강변에 누워 있는 나무와 풀들의 나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들의 벗은 몸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몸에 따뜻한 시의 옷을 입혀야 한다는 소명감이 든다. 이것은 ‘내 시(詩)는 길에서 주웠다’와 같은 말이다.

 자전거로 강변을 달리고 돌아올 때면 주머니 가득 돌멩이, 풀꽃, 바람, 물결, 새소리, 햇살들이 도란도란 담겨 있었다. 작은 풀씨 하나에도 꼼꼼하게 이름을 달아주느라 밤을 지새웠다. 내 이런 수고와 노력을 늘 부추겨 주시고, 생각해보면 참 사람 따뜻한 주병률 선생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사유, 사유, 사유, 통찰, 통찰, 통찰! 귀에 못을 박아주시던 배재대 강희안 교수님께 오늘만큼은 채찍보다 칭찬이 더 듣고 싶은 날이다. 새벽녘까지 불 켜놓은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밝게만 자라준 내 영혼의 노래 같은 세 아이들에게 이 모든 영광을 돌린다. 험난하고 난해한 길일지라도 같이 걷고 있기에 힘이 되는 문우 례, 숙, 정, 헌, 주, 수, 영, 봄, 화, 아, 희 등과 ‘불이문학회’ 회원님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시고 이름 불러주신 영남일보와 이하석 선생님, 곽재구 선생님께 감사의 큰절을 올린다. 더 많이 통찰하고 더 깊이 사유해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외투 같은 시를 써나가리라 다짐해 본다.





<심사평>


 시인의 따뜻한 시각에서 詩 정신의 향기 느껴져

 

 좋은 시란 어떤 시인가. 난해한 화두에 부딪힐 때마다 지나간 1980년대를 떠올린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그 시절은 시에 있어서만은 풍요하기 이를 데 없는 시절이었다. 교사도 목수도 수녀도 철근공도 의사도 버스안내양도 자신의 목소리로 시를 썼고 시집을 펴냈다. 

 사람들은 시를 통해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의 곤궁함을 지워내고자 했고 수십만 부 이상 팔려나가는 시집들이 이어졌다. 세계 문예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현상을 언론은 ‘시의 시대’라 지칭했다.

 무엇이 그 시절의 사람들을 시 속으로 불러들였을까. 시정신이 지닌 향기가 그 답이라 할 것이다. 시는 결핍 많고 외로운 세계의 심장에 켠 따뜻한 등불 같은 존재이다. 가난하지만 결코 가난하다고 말하지 않고 외롭지만 결코 외롭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궁핍한 생명들을 껴안고 따뜻한 지상의 꿈 쪽으로 걸어가게 한다. 익숙함과 타성에 젖은 시간들을 거부하고 평범 속으로 젖어드는 개인의 삶이 지닌 치욕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시 속에서 사람들은 정직하게 자신의 삶을 바라보았고 영혼의 정화가 뒤따랐다. 마음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지성과 일치된 감정 속에서 자아와 세계를 온전히 느끼는 법을 찾은 것이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 중에서 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은 ‘우리들의 언어 치료시간’ ‘이층의 꽃집’ ‘가로수 마네킹’이었다.

 ‘우리들의 언어 치료시간’은 언술의 명료함이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지닌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일관되게 이야기하고 있으나 이를 진술의 형태로 보여주는 것이 흠이었다. 모두 알 수 있는 진술은 시의 긴장을 해치게 된다. 재해석된 평범한 풍경들이 갖는 생명력에 대해 성찰의 시간을 지녀야 할 것이다.

 ‘이층의 꽃집’과 함께 응모한 시편들이 지닌 사유의 깊이는 소중한 것이다. 이층의 꽃집에 있는 화분 하나가 꽃을 피우는 동안 펼쳐지는 이미지의 파편들은 자유연상의 즐거움과 세계에 대한 사랑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모된 시편들 속에 편향된 이국취향의 목소리는 이 응모자가 밟고 있는 땅이 어디인가 하는 의문을 지니게 했다. 이국정서 속에 자신의 고유한 삶의 정서를 새길 수 있다면 평가는 바뀔 것이다 .

 ‘가로수 마네킹’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선자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헐벗은 겨울 가로수들을 따뜻이 응시하고 생명력을 부여하는 모습 속에 시 정신의 향기가 느껴졌다. 첫눈을 맞으며 왕십리 돼지껍데기 집 화덕으로 모여드는 사람들과 오래 서 있어서 아픈 플라타너스의 무릎에 손을 얹는 눈발의 모습은 이 응모자가 지닌 감정의 질감을 느끼게 한다. 자신과 세계의 결핍을 예리하고 따스한 시선으로 응시한 작품들, 심장의 쿨럭임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시편들로 독자의 마음을 훔치는 시인이 되길 바란다.


심사위원 : 곽재구, 이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