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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스웨터 / 황성용

 

  엄마 영정사진을 찍는 날

  일생의 좌중을 한 번에 멈추고 그 안에서 골몰히 앞을 바라보는 한방의 시선, 시장 냄새도 들어간다

  느슨했던 안이 넘어졌는지 엄마의 얼굴이 카메라 앞에서 손님 쪽으로 살짝 기운다

  엄마 스스로 올올이 물 수 있는 어금니 하나로 얼굴을 살짝 들어 올린다 힘들었던 무게는 내리고, 쪼그렸던 다리는 반듯이 편다

  푸르른 날과 무성한 날을 곱해도 영이 되는 적자의 숲에서 내려오지 못해 항상 엄마의 앞치마는 땀으로 젖어 있다 

  비누칠을 해도 빠지지 않을 때 방망이질의 쓰임에 따라 한 방에 끝내려고 사진사는 필요 없는 각도를 버린다 

  버릴 컷을 버려진 시간으로 남아 있을 때 엄마는 살림의 다이어트를 위해 땀방울 하나하나 털실로 꿰매는 절약 스웨터(sweater)

  코가 빠져도 스웨터의 구멍을 버리지 않는 센스, 엄마는 유산의 단추 하나를 남겨둔다

  나는 아침을 먹기 전에 빼빼한 삶의 스웨터로 찍힌 영정사진을 찾으러 간다




  <당선소감>


  그 손들에게도 내 장갑을 드리겠습니다.

 

  적(籍)이 하나 생겼다. 감당할 수 있을까. 밖은 아직도 추운데, 준비해둔 월동 품목은 장갑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격식이다. 초라하게 꾸며지고, 쓸 공간도 적지만 장롱 속에서 또 1년을 기렸던 의지의 표현이다. 눈이 올 것 같은 밖을 자꾸 쳐다본다.

  그 장갑의 기원은 알 수 없다. 본능일 지도 모른다. 집을 수리했던 작년을 봐도 기술자들은 맨손이었다. 화장실 물이 새고, 아래층 원성으로 이어질 때 해법은 수리 밖에 없었다. 수리 업체에서 당당한 개선장군처럼 방문했을 때, 그들의 위세에 밀려난 다섯 손가락들, 어쩌면 열등의 음표로 반주를 해야 할 처지였는지도 모른다. 나약해서 감추고 싶었던 손을 위해 전면으로 등장했던 손가락들 고마워요.

  그곳은 아직도 소멸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움이 되었을까. 손가락을 세어보면 안다. 하나에서 수 백 까지, 그러나 그 노정에는 노모 밖에 없다. 새벽부터 호미를 잡고 곰반부리 풀을 매면서 지킬 여생, 결국 거대한 어머니해일로 몰려올 것이다. 겉치레 없는 그 맨손에 극진한 예의를 보낸다.

  참 맹랑한 애들의 장난이었으리라. 벽면 환경정비 사업으로 벽화를 그려놓았던 곳에 낙서를 했다. 글씨보다 그림에 더 익숙했던 터인지, 사람의 모습을 멋대로 그려놓았다. 괴상망측하게 얼굴이 일그러졌다. 손의 동심이다. 언덕을 뛰어올라 놀이터로 향하는 내비게이션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리 끼어보고 저리 끼어보고 해도 너무 헐렁한 삶, 그 장갑이 어느새 천명(天命)에 있었다. 존재를 알아가는 시기가 된 것이다. 땀을 뻘뻘 흘리고 집으로 돌아와 우물물로 등목을 하시던 부모의 그런 생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새벽바람은 차지만, 트럭에 실려 가는 그 장갑들의 하루는 누추한 구석의 허리를 잡아주느라 밀리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장갑으로 들어갈 리 없는 주먹이다. 그래, 손을 펴보는 거야. 갈대의 흔들림이 없었던 들 어찌 강가의 추억이 생기겠는가. 느긋한 저녁놀을 바라보니, 한 없이 편안해지는 장갑의 배경도 있다.

  적(籍)에 하나 올린다. 무의식적으로 뻗었을 뿐인데 그것이 손이 아니라고 한다. 지금까지는 의심했고, 번뇌했고, 앙탈을 부렸다. 오면서 손 로션은 마르고, 거칠거칠 해졌다. 척박한 곳으로 이르는 길에 누군가 다른 손을 내밀면서 잡아 주었다. 손이 된 장갑이었다.

  필명을 잠깐 빌려준 아내와 큰 딸, 작은 딸 사랑한다. 그리고 내게 따듯한 장갑을 선물해준 심사위원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 1966년 전남 해남 출생
  ● 충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
  ● 2015 미래시학 신인상


  <심사평>


  시적 대상에 대한 애정어린 관찰 돋보여

 

  참된 시인에게 한 세계의 위대함은 그 크기나 부피에 있지 않다. 그들은 현상적으로 볼 때 지극히 사소하거나 쉬 눈에 띄지 않아 지나치기 쉬운 세부적 진실에 더 민감하다. 통상적인 척도로 따질 수 없는 값어치라 할 수 없는 값어치에 주목하는, 아주 작은 움직임 하나에서도 넉넉히 자신만의 세계를 건설할 줄 아는 자가 바로 올바른 의미의 시인이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시적 포즈와 주제의식에도 불구하고 경향각지의 예비시인들이 보내준 800여 편의 투고작들 역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공통적으로 이들이 접근하고자 하는 시의 자리는 결코 화려하거나 거대한 곳이 아니다. 정교하게 구축된 사회체계나 윤리도덕의 그물에 포획되지 않는 작고 소박한 인간적 진실과 가치가 이들이 주목하는 자리였다.

  이러한 투고작들 중에서 최후 심사대상으로 삼은 작품은 ‘달을 품은 마을’(김형미), ‘어머니의 수업’(최류빈), ‘스웨터’(이영예·본명 황성용)이었다. 그리고 이 가운데 먼저 김형미의 ‘달을 품는 마을’은 여타의 투고자들과 달리 80년 5월광주의 원혼들이 묻혀 있는 망월동을 소재로 ‘곧 터질 것 같은 물집처럼 부풀어 오른 집을 등에 지고, 슬픔의 출구를 찾고 있는 한 방울 둥근 고요’로 대변되는 새로운 의미부여와 역사해석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집집마다 아픈 사연’이나 ‘슬프도록 아름답게’ 식의 상투적인 표현 등이 보여주듯이 아직 극복되지 않은 점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최류빈의 ‘어머니의 수업’은 기성의 시에 물들지 않는 시상 전개와 특유의 시적 어법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특히 ‘멈춰, 서, 응시해’(‘고등어 자반’)와 미세한 늦춤과 끊기를 통한 새로운 의미맥락의 형성은 그가 탁월한 언어감각의 소유자라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다만 이미지와 이미지의 간극이 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불분명하거나 ‘분해’나 ‘연민’, ‘인고’나 ‘경외감’ 등 관념어가 돌출 하는 등 좀 더 숙련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심사위원 : 임동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