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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 / 이유운

당신이 또 여름이 왔다고 말하는 것은
축축하게 땀으로 젖은 내 등을
바람으로 깎아놓은 거친 손으로 훑어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손가락 끝이 유독 단단했던 당신의 손톱은 언제나 창백한 회청색이었다
손톱이 왜 파랗지요 하고 물으면
요 안에는 바람이 담겨 있어서 그렇다고 대답하던
당신의 입술에는 뼈가 없었다

당신의 손이 습한 등을 훑으면 와사삭 소름이 돋아서
정말로 당신의 손톱에는 바람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바람으로 나를 만지며…
내 등뼈는 당신 덕에 조약돌처럼 둥글어졌다

그리하여 아주 먼 미래에
누군가 내 등을 만지면
나는 바람으로 깎여 둥글고 부드러운 짐승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먼 미래를 생각하면서
당신의 부푼 무릎 위에 바람의 모양을 그렸다

이제 그 먼 미래가 되어서 바람으로 깎인 나는
이 즈음에는 꼭 당신을 생각한다
바람을 담고 있던 당신의 손톱과
바람의 모양대로 부푼 당신의 무릎

나는 여름이 오면 반드시 당신의 뼈를 떠올리게 되어 있다
내가 만져보지 못한 당신의 뼈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하고


  <당선소감>

   "파도 일렁거리는 모양 보여주는 부표 되고 싶다 "



  어떤 이름들은 저를 다정하게 만듭니다.
  이름에 꽃이 들어간 사람들은 저에게 미워하지 않고도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름에 파도가 들어간 사람들은 저에게 세상을 섬세하게 보는 방법을 알려 주었고, 제가 발음만을 겨우 알고 있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저에게 폭력적이지 않고 무관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그 이름들 사이에서 제가 숨을 쉬는 방법을 글로 쓰는 것 같습니다. 이름들을 쓰고 곱씹으며 즐겁고 괴로울 때마다 제가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글을 쓰는 것은 하나도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그림으로 보고, 음악으로 이해하고, 춤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글은 꼭 그런, 세상과 어우러지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운 좋게도 이번 겨울, 그 어우러짐의 하나의 결이 된 것도 같습니다.
  만약 이 글이 어떤 사람에게라도 흘러가서 그 사람을 일렁이게 만들었다면 제가 성공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그리고 제가 성공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저는, 그리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일렁거림을 느낍니다. 세상에 탈 것이 너무 많아서 생기는 불안이겠죠. 저는 게으르고 변명이 많아서 그 파도 전부를 넘어설 배는 못 되는 것 같습니다.
  대신 그 일렁거리는 모양을 보여주는 부표 정도는 되는 명랑하고 씩씩한 사람이 되어 시를 쓰려고 합니다. 우리가 바다에 뛰어들기 전 위험한 암초와 해구의 깊이를 알려주는 이름이 되고 싶습니다.
  그 이름을 위해 제게 올바른 길을 알려주시는 이규성 선생님, 김선희 선생님, 그리고 이 지 선생님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저와 함께 괴로운 길을 명랑하게 가는 이화여대 철학과 벗들과 자신도 모르는 새에 제 시의 주인공이 되는 제 가족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제게 특별한 이름이 되는 유경, 소연, 건휘, 지호, 혜지, 시온, 환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경인일보와 심사위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글의 시작과 끝을 이렇게 맺습니다. 유운, 쓰고 사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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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바람으로 존재하는 당신에게 보내는 헌사

  해마다 수 천 명의 시인 지망생들이 신춘문예에 응모한다.
  경인일보도 예외는 아니다. 매년 응모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왜 시일까? 시에는 마법적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시의 마법적 기능은 쾌락이고 인식이며 구원이다. 시를 쓰는 일도 감상하는 일도 즐거움이 바탕이다. 즐거움은 쾌락의 다른 말이다.
  시는 사물에 대한 인식, 역사에 대한 인식, 사회에 대한 인식의 깊이를 달라지게 한다. 시적 구원은 우선 시인에게 먼저다. 시인의 구원 이후에 독자의 구원이 온다. 이러한 시의 마법적 기능이 많은 사람들을 시에 빠지게 한다.
  올해의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응모작에는 시의 이와 같은 마법적 기능이 약화된 것을 느낀다. 실험적인 시들이 눈에 뜨지 않았다. 시적 모험은 광기에서 오는 것이고 광기는 쾌락에서 나오는 것인데 지나치게 안정적인 음역과 음색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인식의 깊이가 깊어진 것도 아니었다. 역사적인 사실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시대정신을 추구하거나 사회의 병리현상을 들여다보거나 소외계층을 연민의 눈으로 보려는 노력이 적었다. 사물의 본질을 보려는 응모자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한 사물이나 소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집중력이 부족하거나 불필요한 시적 장치로 산만한 전개에 머무는 응모작들이 많았다. 또한 10대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 응모자의 연령층이 다양해졌다는 것도 특기할만한 일이다.
  그런 속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의 이유운 씨와 '모래시계'의 신진영 씨를 만나게 된 것은 여간 기쁜 일이 아니었다.
  이유운 씨의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는 이 세상에 바람으로 존재하는 당신에게 보내는 헌사다. '바람을 담고 있던 당신의 손톱과/바람의 모양대로 부푼 당신의 무릎'은 이유운 씨의 독창적인 문장이어서 울림이 크다.
  신진영 씨의 '모래시계'는 가혹한 시대를 건너고 있는 젊음을 훼손한 악랄한 물고문을 은유적으로 노래한 작품이다. 첫행 '잘룩한 부분을 지나면서/모래들은 새로운 진술이 된다'부터 무언가 불길하고 심상치 않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와 '모래시계'를 놓고 장시간 논의를 했다. 논의 끝에 이유운 씨를 당선자로 밀기로 합의했다. 한국시단의 거목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아깝게 당선 기회를 놓친 신진영 씨에게도 위로와 격려를 드린다.

심사위원 : 김윤배, 김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