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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골목의 번식 / 김은숙

그발밑을 믿지 마세요 골목의 뒤통수는 백 년이 가도 썩지 않아요
미처 이름을 갖지 못한 태아도 봉지에 버려진 조약돌,
툭툭 발길에 채여요
어둠이 눈감아줬다면 당신은 그것을 바람 빠진 축구공쯤으로 여겼을 거예요
공중화장실에서 태어나자마자 봉지 속으로 꼬깃꼬깃 숨겨진 첫울음,
도심에는 한 방향만 암기한 검은 사각형들이 살아요
정육면체 어둠이 검은 시냇물이 되어 흘러요
밤이면 먹물 같은 골목, 징검다리는 없어요
그 안에 더 이상 비밀을 숨기지 못할 때
종착지는 캄캄한 땅속이거나 고래 뱃속이었어요
뭔가를 산란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 지난밤 그 골목은 비좁았어요
집안 어디쯤에서 폐품이 되기 좋은 질긴 산책로를 발견했나요? 창문 밖 골목 저 끝말이에요
봐! 저기! 저것 좀 봐! 소리친 게 당신이었나요?
노을을 뚫는 검은 새떼의 비행은 사실상 누군가 목을 비틀어서 유기遺棄한 비닐봉투였죠
은밀함을 목 졸라 죽일 때는 낯선 저녁 역광 뒤쪽이 최고예요
역광을 믿지 않았던 고래는, 죽은 봉투를 해파리로 읽었어요
그것들은 간혹 뱃속에서 심장을 갉아 먹다 고래의 사인死因이 되기도 하죠
검정을 죽이고 돌아와, 비닐봉투가 피살되었다는 뉴스특보를 보더라도 웃음 짓는 것이 중요해요 한잔의 블랙커피를 삽으로 파고서 떨리는 증거들을 감쪽같이 묻어버리세요
지난밤에는 어둠을 자백하라고 길고양이들이 나를 포위했어요 묻어버린 시간과 폐기한 말들을 뱉어내라고 난리에요 그렇지만 최후의 단서를 들키지는 않았어요
귀소본능이 없는 것은 발명가가 깨트린 새 소리예요
길게 누운 골목, 졸음의 이마 위로 갓 태어난 개똥을 조심하세요
골목 왼쪽, 삐쩍 마른 나뭇가지 꼭대기에 흙을 잔뜩 묻히고 입을 헤- 벌린
깃발처럼 펄럭이는 검은 농담들, 맞아요
어느 아르바이트생이 20원짜리 비닐봉투 도둑으로 몰린 사건 아시죠?
두께도 없고 입구도 없는 혐의는 아메바보다 지루해요
괜찮아요 밀봉된 태아의 캄캄한 몸과 비명도 따지고 보면 고무장갑과 같은 족속
붉어서 아무도 구별 못 해요
매일 밤 태어난 어둠은 막다른 모퉁이에 검은 무덤을 만들고, 아침이면
기지개 켜는 코스모스가 그것들을 화려하게 변호하죠


  <당선소감>

   "아직 발굴되지 않은 세계를 찾아 천천히, 그러나 불꽃처럼 갈 것"



  누구는 있다 했고, 누구는 없다 했다. 내게 시 쓰기란, 그들이 말하는 있거나 없거나 한 전설을 발굴하는 일이었다. 메마른 종이에 수없이 뭔가를 심고 물을 주었다. 아주 가끔 다른 생각을 했다. 때론 밤을 새웠고, 새벽에도 걸었다. 간혹 뭔가가 보였고 이내 사라졌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시가 무엇인지…. 그러나 길었던 육신의 삶보다 시 안에서 보낸 짧았던 시간이 더 아팠고 반짝였다. 이것은 낯선 영토에서 발굴하는 일종의 고고학 게임이었다.

  내 키가 채송화만 했을 때 교실 뒤쪽에 내 시가 붙여졌다. 첫 경험이었다. 그 후, 세상 저쪽에서 긴 세월이 흘렀고 나는 날것의 생을 건너며 성인이 되어 있었다. 시는 환자와의 대화 속에서, 골방에서, 저녁 산책길에서, 출퇴근길에 수시로 고개 들었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밤마다 한 줄의 문장으로 내게 오셨다. 기적이었다.

  원고를 보내놓고, 습관처럼 책꽂이 속에서 하늘을 꺼냈다. 잔인하게 푸른 형광색 오후에 자주 밑줄을 그었다. 그날 성탄찬양 연습 중에 수화기 저쪽 음성 하나가 나를 잡아당겼다. (학교 안 가겠다던 아이처럼) 난공불락 같았던 시 앞에서 돌아서려 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내 손을 잡고 그 벽과 친해질 수 있다고, 시의 눈을 마주 보라고 응원해주신 김명희 선생님. 내가 언어의 껍질을 깨고 노란 부리를 내밀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신 그 믿음에 깊이 감사드린다. 뜨겁고 따뜻한 은행나무 도반들과 나를 사랑하는 모든 문우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하며, 매일 새벽 기도로 응원해 준 남편(당신의 침묵은 행복한 천둥이었어.)과 가족들, 나의 영원한 고향인 엄마에게도 사랑의 마음을 전한다. 큰 용기가 필요했던 외출에 흔쾌히 문 열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앞으로 치명적인 무게의 적막과 동거하겠지만 그때마다 잘 견디겠다는 다짐을 새기며 허브향 촛불을 켠다. 천천히, 그러나 불꽃처럼 가야겠다.

  ●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상담심리를 공부하고 심리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 서울 송파문인협회 이사, 은행나무문학회, 송파수필작가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심사평>

  "다양한 목격서사 통해 우리 시대 골목론 새롭게 써"

  예심을 거쳐 본심에서 논의된 작품은 10명의 응모작 37편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이들 작품을 숙독한 후 5명의 작품을 놓고 거듭 읽었다. 전체적으로 잘 다듬어진 작품들이 많았다. 그러나 공들인 흔적이 역설적으로 기성품을 보는 것처럼 익숙했고 개성이 없었다. 기존의 시 미학에 갇혀 안정적인 포즈를 취하는 것으로는 결코 신인이 될 수 없다.

  내용적으로는 올 한 해 국내외에 주목할 만한 사회현상들이 있었음에도 그러한 곳에 눈길을 보낸 작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적 충동과 사유에 충실한 작품도 고르기 어려웠다. 이상하다싶을 정도로 개인 서사에 집중하는 시들이 많았는데, 미시적인 시·공간 속에서 사소하다 싶은 세목들을 짚어내는 데 치중하고 있었다. 이런 시들을 읽으며 우선 논의한 내용은 시의 소통 가능성이었다. 요설에 가까운 언어 비틀기나 이미지 왜곡 등이 지적되었고, 익숙한 것을 익숙한 방식으로 나열하는 무딘 언어 감각도 건강하게 소통되기 어렵다는 의견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논의된 작품은 ‘피어라, 숲’ 외 3편, ‘배고픈 이름’ 외 3편, ‘보성 댁 출항기’ 외 2편, ‘간이’ 외 5편, ‘그늘의 곳간’ 외 2편이었다. ‘그늘의 곳간’은 잘 쓴 시였지만, 그 ‘잘’의 의미가 기성의 시 문법에 고루하리만큼 충실하다는 쪽으로 해석되었다. ‘간이’는 외부 세계를 섬세하게 관찰하고 있으나 시적 대상과의 거리 조절에 실패함으로써 산문화되고 말았다. ‘보성 댁 출항기’는 입담이 좋았다. 그러나 입담에 산문성이 더해지면서 아쉬움을 남겼다. ‘배고픈 이름’은 잘 짜였고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도 좋았다. 그러나 아귀가 딱딱 맞아가는 시상 전개가 역설적으로 시를 단순하게 만들고 말았다.

  심사위원들은 ‘피어라, 숲’ 외 3편 가운데 ‘골목의 번식’을 당선작으로 뽑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앞서 언급된 시에 비하면 불안정한 면들이 있지만, 자기 목소리에 충실하다는 점이 계속해서 시를 써나갈 거라는 믿음을 주었다. 특히 ‘골목’에 ‘유기’된 생명체와 그것을 둘러싼 다양한 목격서사를 통해 이 시는 우리 시대의 골목론을 새롭게 써나가고 있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로서 자부심을 갖고 시를 써나가기를 당부한다.

심사위원 : 허영자, 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