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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전자 시대의 아리아 / 신종원

  종로구 옥인동 구시가지 골목 한편에 세워진 화강암 기념비는 인왕산 일대에서 숭배되던 선바위를 떼어다 옮긴 것이다. 절벽 아래로 열두 채가 넘는 전통사찰과 신당을 거느렸던 십 미터 높이의 기암괴석에는 운반 당시의 채석용 끌 자국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신성한 자연물이 허리가 잘린 모습으로 산비탈을 내려왔을 때, 당시 서울에는 전례조차 찾아볼 수 없는 폭우가 몇 시간이나 몰아쳤다고 전해진다. 어마어마한 무게 탓에 편백나무와 잣나무, 소나무 따위의 제재목을 수십 그루씩 베어다 만든 통나무 썰매가 운반 도구로 쓰였다는데. 서로 다른 종단 승복을 입은 승려들, 오색으로 날염된 저고리와 겉치마에 둘둘 싸인 무당들, 물려받은 상복을 꺼내어 입은 여러 씨족과 가문의 일원들, 그리고 흑립을 깊게 눌러 쓴 지역 양반 몇몇이 소리죽여 그 뒤를 따랐다고 한다. 개중에는 한동안 경무국에서 연쇄 살인 사건 용의자로 지목됐었던 인왕산 호랑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사람도 있다.

  한편, 기념비에 음각된 문자는 헤이안 시대의 서예가인 오노 도후小野 東風의 서체를 닮았다. 석공 작업에 참여한 일본인 기술자들 사이에서는 미치카제식 서법이 표준 글꼴로 통용되었던 모양이다. 해방과 전쟁을 잇달아 겪으면서 비석 곳곳이 광물 파편과 약산성 먼지로 날아가 버린 나머지, 지금은 거의 음운에 가까운 흔적들만이 겨우 들여다보일 따름이다.

  불행한 사실 하나. 외진 길목 한가운데 우두커니 전시된 이 바윗돌의 용도를 아는 사람은 이제 남지 않은 듯. 오늘날 고궁 주위에서 길을 잃은 외국인 관광객 두어 명을 상상해보기. 아마도 그들은 우연한 경로를 지나 외딴 비석 앞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지들이 머리 위에서 흔들리고, 발밑에서는 마른 나뭇잎과 열매껍질들이 바스락바스락 밟힌다. 벽돌담 사이로 걸으면서 그들은 옥인1길 34, 37, 42 같은 방식으로 이름 지어진 저층 가옥들을 두루 올려다볼 수 있다. 좁다란 골목은 한국사의 여러 시간대가 동시에 드러나 있는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집집마다 서로 다른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관광객 둘을 처음 있던 자리로 돌려보내자. 나이 들고 몸 군데군데가 깎여 나간 기념비와 다시 마주치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어떤 남자가 골목을 지나 뛰어온다. 땀에 흠씬 젖은 모습으로. 그는 관광객 둘을 앞질러 기념비를 반 바퀴 돌아가더니 별안간 사라져 버린다. 서둘러 남자의 뒤를 쫓아가 보기. 거석 뒤편에는 작은 야외 산책로가 몰래 숨겨져 있다. 사두마차 하나가 오가기에 알맞은 너비로, 남자는 이미 멀찍이 앞서가고 있는 모습이다. 어쩌면 기념비는 이 비밀스러운 정원의 입구를 감추기 위해 설계된 게 아닐지. 헐떡이며, 남자는 폭이 5미터쯤 이르는 철제 문짝을 잡고 안쪽으로 힘껏 민다. 끼익. 끼이익. 노쇠한 철조 구조물의 울음소리. 위로 자라나는 식물 줄기 형태로 장식된 주철 창살은 볼품없이 녹슬고 칠이 벗겨져서, 손바닥 안에 산화된 쇳가루를 한 움큼 쥐여 준다.

  마침내 그가 다다른 곳은 어떤 건물이다. 멀리서 볼 때 건물은 얼핏 수납용 가구 한 채를, 혹은 그냥 상자 하나를 연상시킨다. 테레빈유와 수성 페인트로 빠짐없이 표백된 직육면체 건축물의 외관과 의장을 응시하기. 가만히. 예컨대, 어째서 이 건축물에서는 경사진 서까래와 처마 장식 같은 전통적 부가물을 찾아볼 수 없는가. 답은 그의 한쪽 손아귀에 붙들려 있다. 땀에 젖어 용지가 눅눅해진 헐값 출판물의 이름은 아마도 <세상에 없는 비밀 vol.4; 르 코르뷔지에는 어떻게 건축을 지배했는가―현대 건축법의 비밀>이다. 잡지 일면에는 한 프랑스인 건축가의 작업 사례들이 소개되어 있다. 몇몇 사진들은 인공 녹지 위에 지어진 상자형 주택을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것이다. 남자와 마주 서 있는 직육면체 건축물은 이것을 참고해 만들어졌음이 틀림없다. 원본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이 건물의 입면에서는 좁은 출입구 외에 어떠한 개구부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장식용 차양은 물론 작은 내닫이창 하나조차도. 심지어는 환기구마저. 희고 거대한 벽면의 폐쇄적인 표정만이 오롯이 드러나 있을 뿐이다.

  출입구 앞에서 그는 등을 보이고 서 있다. 호흡을 고르는 동안 구부정하게 휜 흉추가 잠깐씩 불거졌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상의에 받쳐 입은 화이트셔츠는 과격한 운동과 열기로 인해 몸체보다 한두 사이즈쯤 들떠 있다. 그는 문고리 위에 손가락들을 올려본다. 미미한 크기의 전자기파가 그의 인체에 전해진다. 말단에서부터 점점 안쪽으로. 몸통과 목덜미를 지나 머리카락에 이르기까지. 파동의 진동수를 나타낼 수 있다면 7헤르츠쯤에 가까울 것. 이 초저주파의 떨림은 가쁜 호흡과 탈진 상태, 가슴뼈와 배 밑에서 덜컹거리는 장기 근육들을 차츰 진정시킨다. 배 속에서 들었던 태교 음악처럼. 그는 초조하게 쥐고 있던 직원증을 입구 근처에 가져다 붙인다. 띡. 바코드 스캐너에 부착된 전자 인식기가 직원증 앞면을 읽는다. 형광 불빛 속에 드러난 그의 증명사진. 또는 함께 적힌 이름을 읽을 수도 있다. 박지형. 이윽고 문 뒤에서 잠금장치가 하나둘 풀리는 소리. 이내 그는 건물 안으로 홀연 사라져 버린다.

  [▶] 1908년 10월 21일 인왕산 기슭에 개소된 대규모 수용시설. 시텐노 가즈마四天王數馬에 의해 고안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을 너는 잘 알고 있다. 그곳에서 녹음된 여덟 박스 용량의 레코드판이 달마다 네 앞으로 송달되어왔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좁다란 복도에 줄지어 서서 수화물을 실어 날랐다. 지하층에는 펠트 직물과 콘크리트 방음재로 겹겹이 둘러싸인 방들이 많았다. 아마도 연구자들은 그 안에서만 상자 포장을 벗겨볼 수 있었으리라. 너는 이 방들을 모두 기억한다. 오늘날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된 비밀 구역들을. 손잡이 부근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쇠사슬과 금고용 자물쇠 따위의 쇠붙이들은 철물보다는 생물에 가까워 보인다. 백 년이 저무는 동안 마치 저절로 자라난 것처럼. 도면에 따르면 지하층의 방들에는 작은 단상과 객석 이십여 개가 세트로 놓였다. 소박한 크기의 콘서트홀 내부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무대 위에는 축음기 하나가 조용히 놓여 있다. 회전형 원반과 연결된 거대 확성기는 금관악기의 주둥이를 모방한 것이다. 한때는 연구용 가운을 입은 남자들이 매일같이 찾아와 객석에 앉았다. 이제 젊은 조수가 상자에서 꺼낸 음반을 축음기에 올려놓는다. 크랭크와 태엽 부품이 맞물리며 돌아가는 소리. 까득. 까드드득. 재생되는 음악은 목청이 찢어지는 비명, 고통이 지나간 뒤의 신음, 다그치는 말투의 일본어, 그리고 싫어, 싫어, 싫어! 이다.

  너는 이 조선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을까. 너를 만들고 기획한 건축가가 간사이 지방의 사투리를 썼기 때문에? 천만에. 금계동에 지어진 서대문형무소가 본래는 아연판을 덧댄 허술한 건물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것. 5만 엔의 공사비로 염가 자재만 골라 쓴 까닭을 생각해보기. 정말 우연히도 건축 감독직을 맡은 현장 관리자가 검소하고 소탈한 사람이었던 탓이다? 잔인하면서도 명료한 사실 둘. 일인용 옥사 구조의 형무소 내실들은 판자만큼이나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지어졌을 듯. 그래야만 최대한 많은 기결수들을 나눠서 수감할 수 있을 테니까. 여기에 더해 옆방에서 들려오는 아주 작은 뒤척임조차도 잠을 깨우기에는 충분하다. 재소자들은 숙면을 이루지 못해 종일 신경과민에 시달린다. 시설 전체가 소음이 주는 부정적 영향과 병증을 연구하기 위한 실험실이었던 것. 바로 이 감옥이 너의 선배이자 형제자매다.

  시텐노 가즈마, 말하자면 너의 아버지는 이후 네 개의 형무소 설계를 다시 부탁받는다. 소음에 대한 그의 연구는 공사가 이어지면서 한층 정교해진다. 그는 재소자들의 수면질환을 부추겼던 1907년 서대문형무소 설계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부한다. 1912년 천안형무소에는 높은 천장과 복층식 옥사가 도입되었고 층간 소음마저 만들어냈다. 1920년 부여형무소와 1924년 목포형무소는 취조실에 환기구 통로를 냈다. 심문관이 집은 고문 도구가 다양한 색채의 비명과 신음을 만들면, 이 음향이 배관을 따라 각 감방에 흘러드는 구조다. 마지막으로 1931년 김해형무소는 건물 전체를 유리 피막과 암면 격자, 세라믹으로 둘러싸기에 이른다. 더군다나 옥사 내부에 가구가 놓이지 않아서, 한 번 시작된 소음은 멎기까지 한참이나 울려 퍼진다. 너의 아버지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제국의 새로운 사업 담당자로 추대된다. 방위성과 과학기술청의 예산이 함께 출자된 건축물 하나를 올리는 것이다. 장거리 통신과 도청 장치, 암호해독 교본, 전파 교란 장비 따위를 연구하기 위한 비밀 연구시설을. 아마도 제국은 아시아 침략을 앞두고 정보전쟁의 징조를 예감했던 듯. 건축 계약을 마친 그가 총독부 복도를 또각또각 걸어 나오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너는 상상할 수 있다. 목소리만을 위해 만들어진 건축물이 있다면! 뼈대를 상상해보기. 그래, 그건 바로 너였다.

  경성군사통신연구소京城軍事通信硏究所. 너의 이름. 대외적으로는, 경성라디오기지국. 사실 그보다 자주 불린 이름은 니쿠야にくや. 우리말로 옮기면 푸줏간, 고깃간이다. 연구소 서기들에 의하면 형무소에서 송달된 녹취록들은 종종 살아 있다고 표현되곤 했으므로. 그 음성이 녹음된 현장을 상상해볼 것. 취조실 한쪽에 놓인 무뚝뚝한 합금 기계. 앞으로 불쑥 튀어나온 안테나는 초창기 마이크로폰 모델이다. 고문 과정에서 뒤따르는 갖가지 비명과 애원, 울음소리 모두를 빠짐없이 귀담아듣기 위해 고안된 듯. 이 소리들이 음성신호로 감지되면, 입력받은 전류의 패턴이 레코드판 위로 기록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축음기 바늘이 긁고 있는 음반은 사실 목소리 그 자체인 것이나 마찬가지. 이 끔찍한 음향 기록물을 실내악처럼 감상하는 연구자들. 이들은 음성 패턴을 줄무늬 모양의 그림으로 나타내는 데 몰두한다. 이외에도 음성의 크기가 음질을 떨어뜨리지는 않는지, 복잡한 음운 현상이 제대로 전해지는지, 인간 음성의 최소 음량과 최대 음량은 어디까지인지 같은 연구 주제들을 두루 점검해본다. 똑같은 음향신호인데 왜 어떤 소리를 만나면 두 배로 커지고, 어떤 소리를 만나면 두 배로 작아지는지 같은 수수께끼까지도. 육필 노트에는 음향이론 공식 몇 줄과 녹음장치의 인증 성능이 데시벨 단위로 적혀 있다.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일부가 손상된 조선말 욕설과 중언부언들은 통신용 암호 후보로 채택되기도 한다. 가령, 집에 보내조. 같은 식으로. 어마 보고 시퍼. [■]

  이상의 녹음 내용은 건물 내부, 전선이 연결된 모든 스피커의 공명판을 떨게 하면서 거듭 재생된다. 해외 출장을 나갔던 연구팀이 건물로 돌아올 때까지. 일행은 출입구와 이어진 석면 복도에 서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본다. 지도교수가 제안서 파일을 던지며 외친다. 뭣들하고 있어! 당장 가서 방송 안 꺼? 연구실 조수들이 우르르 계단을 올라간다. 교수는 불안한 표정으로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박사 둘을 가까이 불러다 말한다. 너희 둘은 이거 틀고 간 새끼 책임지고 찾아 와. 알았어? 박사들이 허겁지겁 복도를 벗어난다. 그들이 떠난 뒤에도 녹음 내용은 두어 번 더 방송된다. 방송실에 다다른 조수들이 서둘러 음향 장비의 전력을 끊는다. 녹음 파일은 방송실 PC 안에서 여전히 재생 중이다. 사본의 이름은 니쿠야.mp3. 조수들 가운데 한 명이 재생 파일을 정지시키자, 건물 곳곳의 스피커 채널에서 돌연 이런 음성이 흘러나온다. そうだよ。 私は覚えてるよ。 말하자면, 그래, 나는 기억해. 기계장비만으로도 충분히 비좁은 방송실 안에서 조수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고 서 있다.

  한편, 병가를 핑계로 해외 출장에 결석한 단 한 명의 연구원은 다른 동료 박사들에 의해 자택에서 발견된다. 작은 단칸방은 기하학적인 도식의 낙서들로 빠짐없이 더럽혀져 있다. 현관의 전신 거울부터 수납장 가구 표면, 밋밋한 패턴의 벽지와 화장실 바닥의 백색 타일들까지. 사무용 책상에는 찻종이 몇 장이 머리가 뜯긴 채 흩어져 있었는데, 누군가 봉지 위에 마커 펜으로 아야와스카Ayahuasca라고 적어놓았다고 한다. 모니터 화면에는 여전히 프로젝트 이름이 떠올라 있다. “장거리 통신 환경에 따른 음성신호의 변질/왜곡 개선―박지형 박사” 하지만 프로젝트 파일 뒤에 가려진 웹사이트들은 연구와 관련된 보충자료라기보다 구한말 건축사 자료집에 더 가깝다. 특히 이미 오래전에 철거된 강점기 형무소 시설들의 사진과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 그의 동료 박사들에게 어떤 사실을 알려준다. 동료 박사들은 방 한쪽 구석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웅크려 앉은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졸업에 대한 조바심과 지나친 실적 압박이 또 한 사람의 영혼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린 듯. 남자는 비커에 갇힌 실험용 생쥐들처럼 공포의 사향을 뿜어낸다. 동료들이 돌아간 뒤에도 그는 시종일관 눈물 흘리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고맙습니다. 고맙씁니다. 고마씀니다…….

  이제 어느 오후의 텅 빈 여객 열차 안이다. 용산행 노선을 따라 열차는 여수와 순천, 남원, 전주를 지나 대전을 통과하는 중이다. 객실 한쪽에는 젊은 여자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말끔하게 다림질된 검은색 정장 재킷 밑단이 좌석 옆으로 조금 흘러나와 있다. 콧등과 광대뼈에 걸쳐 있는 안경다리가 이따금 아래위로 흔들린다. 교정용 안경알에 맺힌 풍경은 실제 크기와 축척이 다소 어긋나 있는 모습이다. 예컨대, 새파란 하늘. 몇 점의 뭉게구름. 그리고 익은 곡식 줄기들로 노랗게 물든 추수철 경작지 같은 것들. 사실과 조금 다르지만, 일단은 그녀가 믿고 싶은 화면을 보여주자. 빗나가고 틀어진 모습의 세계가 외려 평온함을 준다면. 기꺼이. 한편, 시간을 죽이는 방법으로 그녀가 골라 집은 것은 책이다. 독서하는 인간의 제스처를 상상해보면 보통 두 가지. 양손으로 안전하게 책날개를 붙잡은 상태에서 좌우 페이지를 번갈아 읽어 내려가기. 또는 한 손으로 책 가운데―종이뭉치가 제본된 부분―를 눌러놓고 손가락을 조금씩 치워가며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이때 남은 손은 뺨 혹은 턱을 받치고 있을 것. 하지만 그녀는 지금 어느 쪽도 아니다. 서울까지는 아직도 한참이다.

  열차가 용산에 도착하자 그녀는 곧장 지하철로 갈아탄다. 경복궁역에 다다라 슬그머니 3호선 노선도를 빠져나온 다음, 모바일로 건네받은 약도를 따라 걷는다. 이제 여행의 마지막 단계다. 옥인동의 구시가지 입구에 이르러 그녀는 서울에 이런 동네가 있었네. 중얼거린다. 오래된 저층 가옥들이 벽돌식 담장을 맞대고 이어진다. 골목을 걷는 동안 머리 위에서는 은행나무 가지가 흔들린다. 희미한 단모음 소리를 내며. 그녀가 그것을 똑같이 발음할 수 있다면, 아마도 스스스스…… 따위에 가까울 것. 중간중간 멀리서 개가 짖는 소리. 마침내 도착한 곳은 커다란 비석 앞이다. 울퉁불퉁한 바윗돌 몸통에는 한자와 히라가나 자모음 일부가 남아 있다. 그녀는 이곳에서 배낭을 내려놓는다. 해가 지는 시간이고 이제 석재 기념물 밑으로 비스듬히 그늘이 찾아온다. 그녀는 거기 어깨를 기댄 채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선배, 말씀하신 돌 앞이에요. 간단한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주변이 어두워진다. 그녀는 기념비로부터 한두 걸음 물러난다. 자기 앞에 놓인 말 없는 정물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정확히는 파손된 비문의 내용을. 이들은 이미 옛날에 의미를 다 잃어버렸을 듯. 팔다리가 잘려나간 문자들의 몸뚱이를 되돌릴 수 있다면. 실종된 마디들을 스스로 추측하기. 그런 방법으로 그녀는 어쩌면 문장 몇 가지를 읽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불쑥 기념비 뒤에서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면. 뭐해, 빨리 가자. 그녀는 배낭을 번쩍 들어 올린다. 이제 영락없는 저녁이다.

  둘은 기념비 뒤에 숨겨진 산책로를 걸어 올라간다. 스마트폰 뒷면에 달린 손전등 불빛을 이리저리 기울이며. 가까운 연못가의 수양버들 가지들이 흔들리는 소리. 풀벌레의 늦가을 노랫소리와 개구리 울음소리가 습기로 한층 들떠 있는 밤공기를 가득 채운다. 먼저 말을 붙이는 사람은 남자 쪽이다. 내가 알려준 책은 읽어봤어? 어둠 속에서 여자가 머리를 한 번 끄덕인다. 올라오는 기차에서 조금 읽었어요. 그러자 남자가 이야기한다. 그냥 기본적인 음향이론 책이야. 교수님이 자주 물어보시니까 외워놓는 게 좋아. 그리고 짧은 보폭으로 다섯 걸음만큼 침묵이 이어진다. 이번에 먼저 말을 붙이는 사람은 여자 쪽이다. 선배, 지형 선배 연구실 그만뒀다면서요. 대답이 없자 여자는 열 걸음쯤 더 가서 다시 묻는다. 사실이에요? 남자가 우뚝 멈춰서고 여자는 이것을 불길한 징조로 여긴다. 이때 그들은 붉은 돌기둥과 연결된 철제 문짝 가까이 다다라 있다. 남자는 철문을 밀기 전에 짧게 대답한다. 어, 사실이야. 아르누보 양식의 오래된 주철 대문이 안뜰 방향으로 밀려나는 소리. 이 소음은 듣기에 너무 끔찍해서 일종의 음향 공습처럼 받아들여진다. 안뜰을 걸을 때 남자는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말한다. 회사는 여기보다 더 힘들어. 이어서. 너희는 편한 줄 알아야 해. 정말로.

  그러는 동안 어느새 둘은 육중한 벽면 앞에 이르러 있다. 그 위에 덧입혀진 도색 자국은 거의 공예에 가까울 만큼 두껍고 꼼꼼해 보인다. 한편, 납작한 표면에서는 흔해 빠진 외관 장식 하나 찾아볼 수 없다. 여자는 스마트폰 조명을 머리 위로 올려본 다음에야 이 벽이 지상 3층 높이 건물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남자는 카디건 주머니에서 직원증 하나를 꺼내다 내민다. 앞쪽에 끼워 넣은 정면 사진은 이력서나 학생증, 혹은 다른 휴대용 증명지의 일부로 사용되어왔던 이미지다. 여자는 사진 밑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읽는다. 김선영.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여기서 도대체 몇 명이나 망가져서 나갔어요? 멀쩡한 몸으로 그만둔 사람이 있기는 있나요? 남자의 입가에 소리 없는 미소가 나타난다. 앞니와 잇몸에 고인 소화액이 빛을 받는다. 뒤따라 이어지는 말들은 푸르죽죽한 어스름 속에서 영상처럼 떠오른다. 난 교수님이 시키는 대로 다 할 거야. 취업하라면 취업하고. 옆에 있으라면 옆에 있고. 너도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해. 홀로 남겨지자 선영은 안경을 벗는다. 움푹 꺼진 눈뼈가 떨려온다. 아니다. 뼈가 떨릴 수 있었던가. 떨리는 건 사실 눈꺼풀이 아닐까. 손가락 관절도 마찬가지. 안경다리를 쥔 손뼈와 힘줄들이 위태롭게 떨린다. 이때 불현듯 떠오르는 음악은 미국의 작은 레이블에서 발매된 디지털 앨범 속 소품이다. 사운드트랙의 이름은 Gas; 가스. 조용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잡음 몇 가지가 부분적으로 연속된다. 한 시간 길이의 타임라인 동안 계속. 이 곡의 음향신호를 줄무늬 모양의 그림으로 나타내 본다면 무척 친숙한 모양일 듯. 중얼거리는 인간의 음성신호와 닮았다든지. 그렇다면 어떤 말들은 언젠가 음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가령, 손을 떠는 여자 하나가 어둠 속에서 내 인생은 망했고 앞으로도 망할 거야. 라고 수없이 반복해서 말할 때, 단 한 순간, 그녀의 음성 파형이 수백 곡의 교회 아리아 가운데 한 소절과 정확하게 맞물린다면, 과연 누가 이것을 음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연구소의 문을 열면 어두운 복도 하나가 드러난다. 밝기가 부실한 조명기구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아마도 벽면이다. 이 오래된 석면 벽재는 물먹은 곰팡이 냄새를 풍길 뿐 아니라 유독성 부스러기들에 둘러싸여 있다. 무엇보다도 못질 자국 하나 없이 거의 공백에 가까워 보이는 표정. 관점에 따라서는 차라리 이죽거리는 것 같기도. 선영은 소맷부리로 입을 막은 채 통로를 따라 걷는다. 작은 독서실 크기의 방들이 일자형 복도 양옆으로 이어진다. 흡사 학교처럼. 출입문 바깥으로 저마다 실내 표찰이 매달려 있는 모습이다. 선영이 멈춘 곳은 1-13 표지 밑이다. 그리고 복도 한쪽에 쌓여 있는 마분지 상자 네 개. 사람 하나 높이에 이르는 짐들은 일종의 목록을 나타내는 듯. 예컨대, 한 사람 분량의 잔해라고 할지. 선영은 문 앞에 이르러 우뚝 걸음을 멈춘다. 옻칠이 다 벗겨진 적송 문짝은 과묵하고 문틀을 따라서만 움직이는 여닫이식이다. 손잡이를 옆으로 당기자 단칸방 크기의 어둠이 드러난다. 불을 켜면 구닥다리 공학 연구실의 정경이 하나둘 뚜렷해진다. 내벽을 따라 나란히 놓인 여섯 개의 서가. 길쭉하게 마름질된 종려나무 책상이 U자로 이어진다. 그 위에 올라와 있는 물건들은 차례대로 아날로그 모니터, 더듬이 모양의 고주파 진동계, 투명한 전파 투과 장치와 고압 가스등, 유리창, 적외선 빔 따위의 실험용 매질들, 그리고 몇 권의 이론 실험 서적과 수상쩍은 종이 출판물, <세상에 없는 비밀 vol.4; 르 코르뷔지에는 어떻게 건축을 지배했는가―현대 건축법의 비밀>이다. 의자는 이 모든 집기와 장비들로부터 외따로 밀려나 있다. 바퀴가 다섯 개나 달린 그 가구는 틀림없이 연구실 비품 가운데 가장 젊은 축에 들 것. 뒤로 한껏 젖힌 등받이에서 예전 주인의 앉는 습관, 혹은 안쓰러운 척추질환 따위가 읽히기도 한다.

  선영은 의자를 책상 가까이 밀어본다. 의자 다리 밑에 엉켜 있던 전선과 케이블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선영은 놀라서 손을 놓아버린다. 한 차례 들썩이는 연구실 집기와 장비들. 그리고 먼지구름. 기침 소리가 재차 튀어나온다. 캘룩캘룩. 그리고 어떤 목소리가 뇌운 혹은 전자 스모그처럼 연구실 안에 떠오른다. 私の声が聞こえますか? 말하자면, 내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또 한 번. 私の声を聞けますか。 말하자면,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나요. 선영은 소리 없이 머리를 든다. 연구실 내부의 음향 설비를 찾는 듯. 그녀의 시선은 천장 한쪽 구석에 가서 머문다. 정확히는 그곳에 매달린 확성기 채널 쪽. 먼지 쌓인 공명판이 전기 펄서로 떨리는 중이다. 떨어져 내리는 보푸라기들. 저 목소리는 어디서 오는 건지. 간간이 노이즈가 포착되기도. 목소리가 말한다. ここから出なさい。 바꿔 말하면, 여기서 나가세요. 선영은 들은 내용을 의심한다. 한편, 시키는 대로만 하라던 사람이 있었지. 그래서 그녀는 곧장 그곳을 나간다. 목소리는 1층 복도, 가까운 음향 설비에서 다시 이어진다. 이때 선영은 스마트폰의 녹음 기능을 켠다. 내장 사운드카드에는 다음과 같은 음성신호들이 차곡차곡 저장된다.

もう1-1室に行ってください。

이제 1-1실로 가세요.

錠の暗証番号は2-1-6-3です。

자물쇠 비밀번호는 2-1-6-3입니다.

探すべき歌謡曲の名前は「宵待草」です。

찾아야 하는 가요의 이름은 「달맞이꽃」입니다.

ラベルで1912年6月1日、そして竹久夢二名前を探してください。

라벨에서 1912년 6월 1일, 그리고 다케히사 유메지라는 이름을 찾으세요.

余分のレコードを十七個持ってください。

여분의 레코드판을 열일곱 개 챙기세요.

もう1-3室に行ってください。

이제 1-3실로 가세요.

「宵待草」を再生させてください。

「달맞이꽃」을 재생시키세요.

2分54秒台の"て"部分だけを録音してください。

2분 54초대의 "테" 부분만 녹음해주세요.

録音された内容を3分の長さに伸ばして貯蔵してください。

녹음된 내용을 3분 길이로 늘여서 저장해주세요.

十七つのレコード盤に同一に。

열일곱 개의 레코드판에 동일하게.

それを箱に入れてください。

그것을 상자에 옮겨 담으세요.

もう地下1階に降りてください。

이제 지하 1층으로 내려가세요.

階段の下に箱を下げておいてください。

계단 밑에 상자를 내려놓으세요.

あなたがすることは終わりました。

당신이 할 일은 끝났습니다.

もうここを去ってください。

이제 이곳을 떠나세요.

そして二度と戻らないでください。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세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일주일? 보름? 옥인동 구시가지 안으로 화물을 짊어진 군인들이 무리 지어 나타난다. 좁다란 골목길을 터벅터벅 걸어 다니는 서른 벌의 군복과 군화 삼십 켤레. 말하자면 신발 속에 넣은 발바닥들. 제식 교본에 알맞게 훈련받은 한 가지 걸음걸이만이 무겁게 울려 퍼진다. 보행로 너비에 맞춰 한 줄로 늘어선 모습. 돌연 좁아지거나 늘어나는 앞뒤 간격 때문에 뒤꿈치, 또는 앞발을 밟힌 병사들이 잠깐씩 휘청거린다. 군모 밑에 가려진 얼굴 그늘에는 앳된 이목구비와 욕설을 견디는 입 모양이 여러 개. 행렬의 가장 앞줄에 선 남자는 외딴 기념비 앞에 이르러 군모를 벗는다. 앞부분에 바느질된 다이아몬드 계급장은 그의 신분을 드러낸다. 왜 계속 이 주위에서 맴도는 것 같지? 그가 투정하든 말든 병사들은 높다란 석조 기념물을 지그시 올려다본다. 은행잎으로 노랗게 물든 우듬지가 삼십 개의 두개골 위에서 흔들리는 소리. 이때 바윗돌 머리에 앉은 까마귀가 갑자기 까악 운다. 새가 날아가는 방향은 기념비 뒤편이다. 소위는 군모를 다시 쓴다. 아주 조심스럽게 바윗돌을 돌아서 간다. 그러자 호젓한 산책로가 그를 맞이한다. 길을 따라 다닥다닥 옮겨심긴 은행나무들이 이어진다. 바짝 마른 낙엽들이 흩날리는 중이다. 산책로를 걸어 올라가는 동안 원래 한 줄이었던 소대 대열은 둘, 셋, 다섯으로 늘어나다가 어느 순간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마침내 군인들이 다다른 장소는 이름 없는 건물이다. 도로명주소나 옥외 간판은 물론 쓰임새를 짐작해볼 만한 일말의 표지조차 찾아볼 수 없는 입체 건축물. 아니면 바로 이런 해괴한 외관 자체가 하나의 표지가 아닌가 싶은. 병사들이 들고 있던 화물을 하나둘 내려놓는다. 따로 휴식 명령을 전달받지 않았음에도! 소위는 힐끗 뒤돌아본 다음 녹슨 출입문을 두드린다. 빨리빨리 강하게. 세 번. 쾅쾅쾅. 그러자 문 옆에 조그맣게 매달린 전자 기판에서 낯선 음성이 흘러나온다. 사령부에서 나오셨나요? 덮개 바깥으로 전기 회로 일부가 노출된 이 장치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소위는 물방울 모양의 외눈 렌즈 가까이 머리를 숙인다. 간단한 거수경례가 뒤따른다. 충성. 새로 임관한 김준서 소위입니다. 요청하신 물품들 가져왔습니다. 안에서는 한동안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다. 이윽고 문 뒤에서 다중 잠금장치가 하나둘 풀어지는 소리. 쇠붙이들이 돌아가면서 율동을 만들어낸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소위의 손에 쥐어지는 것은 이를테면 압운들, 즉 리듬의 털이다.

  문을 열면 어두운 복도 하나가 드러난다. 그리고 헐레벌떡 계단을 내려오는 신발 소리. 안경 쓴 남자가 다가오며 고개를 까딱인다. 물건은 1-13연구실로 옮겨주세요. 거기가 지금 비어 있거든요. 남자가 손을 들어 가리키는 장소는 복도 맞은편이다. 소위는 문 옆에 서 있는 몇몇 병사에게 턱짓으로 신호를 준다. 들었지? 이제 병사들이 줄지어 건물 안으로 들어온다. 1-13연구실까지 도합 열일곱 개의 몸이 1층 복도 안에 나란히 늘어선다. 낱말과 낱말을 이어주는 보조사처럼. 느슨한 인체 사슬은 건물 바깥에 쌓인 화물들과 연결되어 있다. 잠시 후 앞줄에서 전달받은 보급품 상자가 하나씩 건물 안으로 옮겨진다. 병사들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상자를 주고받는다. 다만 사이가 멀어서 상자를 살짝 던진다. 아주 살짝. 이쪽 병사 하나가 상자를 건네려고 팔을 쭉 뻗으면 저쪽 병사도 받기 위해 팔을 쭉 뻗는다. 그럼에도 닿지 않아 살짝 던지는 것이다. 상자가 공중에 혼자 있는 시간은 잠깐이다. 이 동작이 실시될 때마다 작은 기합 소리가 끼어든다. 병사, 헛, 하나가, 헛, 상자를, 헛, 집어, 헛, 던진다. 소위는 이 우스꽝스러운 광경에 이목이 빼앗겨서 웃음이 터져 나오기 직전이다.

  십 분 후. 일손이 멈춘 병사가 앞줄부터 한 칸씩 늘어난다. 이렇게 해서 소대 하나 분량의 미확인 보급품이 1-13연구실 구석에 켜켜이 쌓이게 된다. 소위는 눈대중으로 한 번, 손가락으로 두 번 물품의 개수를 검사해본다. 수량은 송장 목록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이제 복도로 나오면 병사들이 각자 서 있던 바닥에 쪼그려 앉아 휴식 중이다. 소위가 홀로 또각또각 복도를 걸어 나갈 때, 느닷없이 목소리 하나가 그들 가운데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病人, 気をつけ。 말하자면, 병사, 차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또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고민하는 사이 병사들이 하나둘 일어선다. 목소리는 통사 하나를 낭비 없이 발음할 줄 안다. 또 한 가지 특징으로는 차분하고 기품 있는 억양. 짧게 힘주어 말하는 조음 방식은 의장대 장교들의 화법을 따르는 듯. 또 한 번 구령이 떨어진다. やすめ。 바꿔 말하면, 열중쉬어. 열일곱 개의 오른쪽 다리 관절이 일시에 움직인다. 등 근육 위로 가져다 붙인 양쪽 손바닥도 마찬가지. 목소리가 気をつけ。 그러니까, 차려! 하고 외친다면, 빳빳한 군용 직물과 허벅지 살이 신속하게 마주쳐야 할 것. 소위는 부동자세를 지키느라 경직된 넓적다리들을 빠르게 번갈아 본다. 무시무시한 긴장감. 목소리가 말한다. 一列縦隊で―立。 그러니까, 일렬종대로―서. 이제 한 줄로 간격을 좁힌 채 붙어 있는 까까머리 열일곱 개. 앞사람과 뒷사람을 하나의 몸뚱이로 포개어놓는 이 열병 방식은 뻣뻣하기 이를 데 없는 조직의 규율을 나타내는 듯하다. 목소리가 계속해서 명령한다. これから―行く。 바꿔 말하면, 앞으로―가. 이 구령은 병사들을 지하층으로 이끌고 간다. 혼자 남겨지자 소위는 군모를 벗는다. 납작하게 눌린 머리 가죽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다. 잃어버린 병사들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 회한과 그리움의 색채를 띤 저 음성으로부터. 소위는 문 바깥으로 소리쳐서 야외에 남은 병사들을 불러 모은다.

  지하와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아래층에서는 난데없는 공사 소음이 울려 퍼진다. 소위는 갖가지 날붙이와 연장들이 자르고, 내려찍고, 때리거나 부수는 팔들에 붙잡혀 있는 모습을 지켜본다. 파괴적인 음향을 만들어내느라 얼이 빠져 있는 인부들은 위층에서 잃어버린 병사들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출입구 앞에 붙들려 있다. 문을 열어야 한다는 구령이 있었을 것. 못 박힌 문짝에서 나사 머리가 뽑혀 나간다. 손잡이에 감긴 쇠사슬이 끊어지는 소리. 문짝을 내려찍는 도끼질. 한편, 자물쇠 옆에 나란히 서서 영치기영차 톱을 켜는 병사 둘.

  소위는 귀를 틀어막는다. 동시에 눈에 띄는 것은 무지막지한 크기의 지하층 로비다. 장소는 정신병원의 보호 병동이나 현대식 구치소의 격리 시설 같은 수감용 구역을 연상시킨다. 치밀하게 걸어 잠긴 철문들은 익명의 무기수들을 가두고 있는 듯하다. 너무나도 위험해서 영영 면회조차 금지된. 이때 가까운 문짝 하나가 큰소리를 내며 쓰러진다. 소위는 꿀꺽 침을 삼킨다. 자리에서 뜯어져 나온 철문 잔해들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간다. 내부에는 서로 다른 용적의 동물용 케이지들이 버려져 있다. 철근과 창살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것은 뼈대만 남은 사체들이다. 커다란 철창 속에서 점잖게 앉은 채로 죽음을 맞은 좌식 백골은 대형 고양잇과 동물의 것이다. 오래전에 멸종된 시베리아호랑이를 한 마리 상상해볼 수 있다면. 낮게 으르렁거리는 울음소리와 씩씩거리는 숨소리도. 이 공포스러운 노래 밑에는 초저주파 음향이 깔려 있어서, 멀리 떨어진 당신의 몸뚱이마저 얼어붙게 만들 수도 있었던 모양이다. 영문도 모르는 사이에. 케이지 옆에 놓인 서간체 연구 기록지가 그렇게 말한다. 한편, 천장에 매달아 놓은 여러 개의 새장에서는 왜가리과 조류들의 골격 잔해가 발견된다. 이들은 같은 종의 친척들처럼 멋진 다리는 가지지 못했지만, 목 관절만큼은 유난히 길게 발달했던 듯. 나중에 알락해오라기로 밝혀질 이 철새들은 앞서 17세기쯤 영국인 의사에 의해 사육된 이력이 있다. 이 호기심 많은 의학자는 “겉모양조차도 아주 희귀한 이 새가 어떻게 바순 소리와 비슷한, 자연 전체를 통틀어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저음을 낼 수 있는지 알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삼백 년이 지난 다음, 여기 지하 시설에서 다시 연구 목적으로 사육되었던 것이다. 소위는 새의 소리가 기보된 오선지 종이 한 장을 새장 속에 밀어 넣는다. 죽은 새는 반들반들한 이마와 부리를 흔들며 뮤지끄뮤지끄 노래하는 듯하다.

  이때 바깥에서 다른 방의 문짝이 열린다. 소위는 경첩이 벌어지는 소리를 쫓아간다. 이번 철문은 멀쩡한 모습으로 제자리에 붙어 있다. 다만 절단된 자리에 그대로 버려진 쇠사슬들을 병사들이 나서서 걷어찬다. 문을 열자 삭은 종이 냄새가 바깥으로 쏟아져 나온다. 공중에 머물러 있던 보풀들도 함께. 소위와 병사들의 어깨가 기침으로 들썩거린다. 백 년 만에 면회객을 맞는 6단형 양철 선반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보면 선반 뒤로 또 다른 선반이 서 있는 모습. 얼마나 많은 받침대가 필요했던 건지. 이들 사이에 비워진 공간으로는 사람 한 명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다. 소위는 가장 앞줄의 선반 몇 칸을 거닐어본다. 용적이 비슷한 널빤지 상자들이 눈높이에서 이어진다. 상자 바깥으로 불쑥 머리를 내밀고 있는 물품들은 죄다 종이 모둠을 엮은 것이다. 두꺼운 나일론실로 제본되었고 말린 돼지가죽을 표지로 썼다. 소위는 반듯하게 포개어 놓인 서류철 하나를 공들여 빼낸다. 겉장에 찍힌 붉은색 인주 자국에서 아직도 미미한 악력이 전해지는 듯하다. 종이를 넘기자 어떤 서식이 눈앞에 나타난다. 다음 장에 오는 속지들도 양식은 같다. 대부분 한문인데 훈독하면 아래와 같이 읽을 수 있다.

※ 음성자료 제공자 명단

[0067] 이용갑, 42세, 의병, 스스로 혀를 자름.

[0068] 김예래, 17세, 학생, 학대로 인한 말더듬증.

[0069] 신원 확인 불가.

[0070] 오영옥, 19세, 학생, 기흉과 천식이 언어장애에 미치는 영향.

[0071] 이시카와 다이치, 30세, 변절자, 고문 과정에서 실어증.

[0072] 이성희, 7개월, 아기, 고주파의 울음소리.

[0073] 성낙윤, 68세, 민족운동가, 치아를 모두 뽑음.

[0074] 나가야마 쇼이치로, 18세, 남성 소프라노, 5세 때 거세됨.

[0075] 이우경, 23세, 국극 가수, 비교적 정확한 발음법.

[0076] 신원 확인 불가.

[0077] 이칠연, 24세, 의병, 너무 잦은 고문으로 유발된 성대 결절.

  자료는 형무소에서 녹음된 채록 자료의 제공자들을 기록해놓은 것이다. 잠시 뒤에, 소위는 이것을 서류철 사이에 되돌려놓는다. ―나중에 그는 이 판단을 두고두고 뉘우치게 된다― 방대한 기록과 이름의 무덤이 그의 뒤에 남겨진다. 빈손으로 걸어 나온 그가 조용히 문을 닫는다. 병사들이 수군거린다. 소대장님. 옆에 있던 병사가 묻는다. 이 건물은 원래 무슨 건물이었던 겁니까? 소위는 말없이 고개를 흔든다. 거부 혹은 부정형 문장에 관한 한 가장 너그러운 동작이 이어진다. 달그락거리는 두개골. 희곡 대본에 적힌 행동 지문을 따르는 것처럼. 소위는 이마를 자꾸 쓰다듬는다. 문지를수록 환해지는 어떤 기억이 있는지도 모른다. 간단한 보급 임무야. 또는, 전해주기만 하고 돌아오면 돼. 대대장은 분명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군에서 후원 중인 연구기관이라는 것만 알면 돼. 이런 식으로. 소위는 긴 시간 동안 겨우 이따위 회상에나 잠긴 채 입술을 뜯는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우린 여기서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여남은 병사들이 머리를 끄덕인다. 한편, 복도에서는 넋을 빼앗긴 병사들이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출처가 불분명한 레코드판이 한 장씩 손에 들려 있는 모습이다. 얼빠진 표정과 걸음걸이들이 각자 다른 방들로 사라진다. 그리고 이내 흘러나오는 콘트랄토의 음성. 가사는 단조로운 편이다. 단모음 [ㅔ]가 전부인 노래. 오래된 음향 장치에서 재생되는지 이따금 잡음이 섞인다. 음량은 점점 커져서 정신 나간 병사들을 깨우고 돌려보낸다. 복도 곳곳에서 병사들이 허겁지겁 뛰쳐나온다. 착란에 시달린 열일곱 명의 병사들은 복귀 후 단체 면담 시간을 가지게 된다. 오후 한두 시간 동안 벌어진 이 초자연적인 소동에 덧붙여, 병사들은 다음과 같은 말들을 들었다고 입을 모아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이 간사이 억양의 일본어를 어떻게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는지는 끝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兵士たちは階段を下りる。

병사들은 계단을 내려갈 것.

0-01部屋で延長と工具を探して聞いていること。

0-01방에서 연장과 공구를 찾아 들 것.

地下の全施設への出入り口を開放すること。

지하의 모든 시설 출입구를 개방할 것.

階段の下に置かれた箱を探すこと。

계단 밑에 놓인 상자를 찾을 것.

レコードを一つずつ分けてかかる。

레코드판을 하나씩 나눠 들 것.

蓄音機が置かれた十七の部屋を訪れる。

축음기가 놓인 열일곱 개의 방을 찾을 것.

レコード版を円盤に差し込むこと。

레코드판을 원반에 끼울 것.

蓄音器を作動させること。音量は最大で。

축음기를 작동시킬 것. 음량은 최대로.

もう逃げろ, ちびれ。 逃げろ。

이제 도망쳐라, 꼬마들아. 달아나라.   다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대설경보가 발효된 어느 11월 오후. 난데없이 화재경보가 울린다. 건물 3층 숙직실에서 잠깐 눈을 붙였던 박사 둘이 서둘러 계단을 내려간다. 주고받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오로지 조급한 몸짓들만. 박사들은 건물 바깥에서 비로소 숨을 고른다. 긴급신고센터로 전화를 거는 박사는 안경을 쓰지 않은 쪽이다. 그러나 다른 박사가 귓가에서 전화기를 낚아채 간다. 테 없는 안경을 쓴 그 남자는 연결 신호가 끊기기를 잠자코 기다렸다가 무섭게 소리친다. 미쳤어? 연구소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어? 이어서, 시원하게 폭파되는 꼴이라도 보고 싶은 거야? 강점기 건물들 해방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 몰라? 후배 박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럼 어떡해요. 불났다는데. 안경 쓴 남자가 피식 웃는다. 오래된 건물이라 그러는 거야. 기다리면 알아서 꺼져.

  결과적으로 박사의 말은 정확하다. 건물 내부의 어떤 장소에서도 화재 징후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보음이 실내에서 사람을 비워내기 위한 속임수였다는 사실은 오직 건물만이 알고 있다. 홀로 남겨진 모처럼의 시간. 아주 짧은 한때. 실내에서는 어느 순간 사이렌 소리가 멎는다. 하지만 바깥에서 기다리는 박사 둘은 이것을 알 도리가 없을 듯.

  이제 건물은 안팎으로 적막해 보인다. 남아 있는 소리는 하나뿐이다. 어둡고 넓은 지하층 로비 안에 울려 퍼지는 단음절의 노래. 녹음된 음성의 가느다란 떨림을 건물은 가만히 듣고 있는지도. 이 합성 사운드는 20세기 초, 본토에서 작곡된 유행가의 소절 일부를 누군가 고의로 늘린 것이다. 건물의 지하 시설 안으로 풍부한 음량의 주파수가 일정하게 이어지도록.

  소리를 전달하는 매체는 열일곱 개의 축음기. 그래, 금관악기의 주둥이를 모방한 거대 확성기. 어두운 시기에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실내악을 들려주었던 기계장치들이다. 불현듯 호명되는 건물의 이름. 니쿠야. 니쿠야는 그때 그 음악의 목록을 기억하는지? 이를테면 목청이 찢어지는 비명, 고통이 지나간 뒤의 신음, 다그치는 말투의 일본어, 그리고 싫어, 싫어, 싫어! 같은 음성신호들을.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そうだよ。 私は覚えてるよ。 말하자면, 그래, 나는 기억해. 이 짧고 귀한 시간, 목소리는 슬픔에 사무치거나 결백을 주장할 수 있다. 혹은 이 땅의 자연사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은 자신의 역사를 나름대로 곱씹어볼 수도 있다. 하지만 하지 않는다. 그러지 않는다. 다만 회한과 그리움의 색채를 띤 간사이식 일본어로 수차례 중얼거릴 뿐이다. 私は覚えてるよ。 나는 기억해. 私は覚えてるよ。 나는 기억해.

  한편, 건물 지하에서 울려 퍼지는 메가헤르츠 크기의 노래. 지상의 각 층과 연구동 시설들을 떠받치고 있는 철근 기둥들이 미세하게 떨린다. 녹음된 음성의 주파수와 콘크리트 건축재의 자연 주파수가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니쿠야. 니쿠야는 스스로 죽기를 원하는지? 목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제 필요한 것은 작은 흔들림. 경미한 지진 정도면 완벽할 것. 혹은 태초의 말씀 같은. 건물은 어떤 징조를 기다리는 듯하다. 마치 이 순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몇 분 뒤에,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이를 지켜보는 박사 둘.

  오늘날 종로구 옥인동 고궁 주위에서 길을 잃은 당신을 상상해보기. 아마도 당신은 우연한 경로를 지나 외딴 기념비 앞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지들이 머리 위에서 흔들린다. 발밑에서는 마른 나뭇잎과 열매껍질들이 바스락바스락 밟힌다. 비석은 옛날 인왕산 일대에서 숭배되던 선바위를 떼어다 옮긴 것이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운반 당시의 채석용 끌 자국도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울퉁불퉁한 바윗돌 몸통에는 한자와 히라가나 자모음 일부가 남아 있다. 당신은 당신 앞에 놓인 말 없는 정물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정확히는 파손된 비문의 내용을. 팔다리가 잘려나간 문자들과 같이, 한때 기념하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석조 기념물은 다만 과묵하다. 해가 지는 시간이고 이제 영락없는 저녁이다. 당신은 한겨울 추위로 코를 훌쩍인다. 당신은 기념비 앞을 떠나버린다. 이따금 당신이 부는 휘파람 소리. 성부가 하나뿐인 그 노래는 일면 쓸쓸하고 외로운 구석이 있다. 어느 아이돌 그룹의 유행가 멜로디를 흉내 내는 걸까. 기억도 목소리를 가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모놀로그 또는 아리아와 같은.


  <당선소감>

   "나는 다만 뒤를 따라가는 음향신호다"

  현악기 소리를 하나 상상해보자.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 다 감바. 어떤 것도 상관없다. 누군가의 어깨 위에서, 혹은 넓적다리 사이나 무릎 밑에서 연주되는 악기가 하나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성부가 하나뿐인 그 음악은 일면 쓸쓸하고 외로운 구석이 있다. 악기가 하나, 둘, 셋, 넷, 하는 식으로 박자를 만들어나가면, 불현듯 다른 악기가 똑같이 뒤따라 연주된다. 하나, 둘, 셋, 넷. 똑같이. 그리고 또 다른 악기가 다시 그렇게. 이런 음악 형식을 카논이라고 한다. 제시된 성부가 시간차를 두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문학도 그렇다. 긴 시간 나를 이끌어준 이름들을 감히 이길 수 있는지? 바꿀 수 있는지? 플로베르의 정원과 벤야민의 아케이드. 제발트라는 산책로. 블랑쇼가 일으킨 화염은? 조이스의 푸줏간, 보르헤스의 도서관과 카프카의 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 키냐르의 오르간을 부수고 포의 갈가마귀, 멜빌의 백경을 잡아 죽일 셈인지? 이어지는 베케트의 독백. 드 퀸시의 농담. 포크너의 중언부언들.

  이들이 나를 앞서가는 성부들이라면, 나는 다만 뒤를 따라가는 음향신호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들을 모방하는 노래다. 비어 있는 콘서트홀에 홀연히 떠오르는 음성이다.

  목소리는 모든 음악을 끝내라고 속삭인다. 예컨대 이런 식으로. ―너는 네가 들은 최초의 소나타를 찾아내고 말 거야. 너는 배 속에 있을 때 네 부모가 들려준 태교 음악, 교회 칸타타를 찾아 기보하게 될 거야. 이제 그 부름은 이렇게 강요하기에 이른다. 그라치오소! 우아하고 상냥한 톤으로. 너는 왜 너에게 종원鐘原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는지 기어코 알게 될 거야. 너는 그 이름에 책임을 져야 할 거야. 필요하다면 구걸하는 사람의 몸짓으로. 시종일관 필사적이어야 할 것.

  카논에는 코다가 있다. 언젠가는 반드시 끝나게 되어 있다는 구조다. 그래서 "종울림" 또는 "종소리의 기원"이라는 이름을 타고 난 소년은 모든 음향을 끝내려는 사람으로 이 땅에 왔는지도 모른다. 아주 오래전에 시작된 카논 음악의 마지막 성부가 되려고. 수백, 나아가 수천, 어쩌면 수만 년 전부터 수없이 반복해서 구전되어온 노래의 끝, 이른바 하나의 코다가 되고자.

  먼저 바흐를 죽일 것. 그런 다음, 세계를 침묵 속으로 되돌리기. 음성과 음향의 무덤. 가장 처음의 무소음 상태 그대로.
 
  나는 파괴적인 음향신호이다.

  ● 1992년생
  ●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재학


  <심사평>

  "확고하고 집요한 고집에 힘 실어주고파

  ‘고백’은 익숙한 가족서사의 풍경으로 시작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비밀들이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서 무엇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는 일은 소설의 구성을 이해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점에서 ‘고백’이 가진 미덕은 ‘촘촘하게 생략된’ 장면들에 있었다. 더욱이 자칫 도식적일 수 있는 인물들의 관계를 과감한 전개와 섬세한 대화들로 생동감 있게 연출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지닌 관습적인 의미를 전복시키는 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무이’의 경우는 환상적이고 기이한 사건을 핍진하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인체에 감염된 ‘곰팡이’라는 설정도 흥미로웠지만, 부재한 연인의 에피소드를 통해 차분하게 그려지는 인물의 이력이 인상 깊었다. 무심하게 던져 놓은 듯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표현들도 적지 않았는데, “사람일까. 사람이지, 당연히. 어째서 당연히 사람이지?”와 같은 경우가 특히 그랬다. 더구나 이로 인해 앞선 장면들을 다시금 재해석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우연히 운 좋게 만난 문장만은 아닐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먼저 언급한 두 작품이 중심에서 비켜나 주로 주변과 공백으로 채워진 서사였다면, ‘전자 시대의 아리아’는 정확히 그 반대편에 놓여 있었다. 특히 소설 속의 공간을 설계하고 구축하는 과정이 대단히 정교했는데, 단단하게 쌓아올린 이 세계를 허투루 다루는 장면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요컨대, 음성신호를 재현해내는 낯선 방식이나 파편화된 이미지들은 모호하게 처리되기보다는 그 자체로 “변질”과 “왜곡”에 대한 작가의 의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이상의 세 작품을 두고 심사위원 간에 오랜 논의가 이루어졌다. 특히, ‘전자 시대의 아리아’의 높은 밀도는 다른 두 편의 기준에서 보자면 과다한 정보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같은 방식으로 두 편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도 있었으므로 개별 작품의 단점을 따지는 일은 이후의 심사 과정에서 거의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최종적으로 ‘전자 시대의 아리아’를 선택하게 된 것은 우리가 아직 읽지 않은, 앞으로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저 확고하고 집요한 고집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여기에 언급한 작품은 고작 세 편이지만 그 세 편을 추리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단순히 위로나 용기를 북돋우려는 말이 아니다. 무엇보다 고맙고 미안하다. 당신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서 고맙고, 함께 읽을 수 없어서 미안할 따름이다.

심사위원 : 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