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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밤의 도서관 / 임수정

  이 남자는 끈질기다. 십여 분째 같은 말을 반복 중이다. 콧등의 안경이 거칠어진 숨소리와 함께 씰룩댄다.

“뭐가 그리 빡빡해? 옛날엔 다 해줬는데.”

“네 선생님, 죄송해요. 반납하지 않은 책이 있어서 대출 안 돼요.”

“이따 갖다 준다고. 그러니까 빌려줘.”

“죄송해요. 그리고 그 책도 기한이 넘어서 반납해도 대출 안 돼요.”

  나는 최대한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이쯤 되면 포기하기 마련이었다. 자격이 정지된 사람들에게 도서 대출을 거절하면 `옛날 사서는 다 해줬는데' 하고 몇 마디 우물거리다 샐쭉해져 나가는 게 보통이었다.

  그는 빌리려던 정글만리 3권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며 나를 노려봤다.

“이봐. 내가 지금 대낮에 책이나 빌리러 왔다고 무시하는 거야?”

  불똥이 예상한 방향으로 튀었다. 평일의 마을 도서관 안, 이곳엔 남자와 나 둘뿐이라는 것도 한 이유였을 것이다. 나는 내 앞의 책을 어루만졌다. 불안한 사람은 쉽게 분노한다.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기 위함이라고 알랭 드 보통은 말했다. 이 남자는 지금 융통성 없는 사서에게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내게 그의 불안을 위로하기 위해 규칙을 무너뜨릴 이유는 하나도 없다. 도서관의 모든 것은 규칙대로다. 책은 청구 기호대로 제자리에 있을 것, 자격이 없는 사람에겐 대출하지 말 것.

  하지만 난 방문하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다. 남자의 말처럼 방문 시간대나 혹은 차린 입성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조금 억울해진 기분으로 한숨을 꾹 누른 뒤 또박또박 말했다.

“죄송합니다. 규정상 대출 안 돼요.”

  남자는 시뻘게진 얼굴로 씩씩대다 책을 내리치듯 내려놓은 후 문 쪽으로 향했다. 사물함형 신발장에서 신발을 찾는 것이 어려운 모양인지 한참 부스럭대다 씨발! 하고 소리를 질렀다.

  미반납자에게 대출을 해주지 않는 건 나의 원칙이었다. 일 년 전 열 평 남짓한 마을 도서관의 사서로 왔을 때 전임자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대출 정지 회원에게도 책을 빌려주라고 했다. 마을 도서관은 동네 장사라는 말과 함께 아는 얼굴과 사소하게라도 싸울 필요 없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하나를 봐주면 더 많은 것을 봐주어야 한다.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 피차 깔끔한 일이었다.

  문득 남자의 대출 목록이 궁금했다. 화면으로 상체를 기울여 글씨를 읽는다. 52세. 그는 육 개월 전 도서관 회원이 되었다. 회원 가입 초기엔 자기계발서를 읽다가 지금은 스님들의 에세이나 심리서, 공인중개사 매뉴얼 같은 실용서를 빌렸다. 최근엔 김훈이나 김영하 같은 중년 남성작가의 소설을 빌리는 일이 많아졌다.

  그는 실직 중일 것이다. 사회로 복귀하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마음을 다스리는 중일 것이다.

  사람들의 대출 목록을 보면 스쳐 가는 욕망과 그를 가로막는 현실이 보였다. 너무 큰 비약이라 해도 할 수 없었다. 아기 엄마들이 여러 권의 육아서 뒤에 수줍게 끼워 넣는 연애소설의 제목은 돌아가고 싶은 지점을 말해주었다.

  은은하게 틀어놓은 클래식 라디오의 볼륨을 살짝 높인다. 하늘색 책장이 가지런한 열 평 남짓한 도서관의 공기가 잦아들었다. 남자가 책을 뒤적이던 서가 앞에 섰다. 오는 사람의 대부분 서가에서 빼내 읽은 책을 반납 카트에 가져다 두지 않고 자신이 뺐다고 생각하는 자리에 대충 끼워두었다. 바쁘지 않은 시간엔 사람이 들고 날 때마다 그들이 머문 서가 앞에 가서 분류가 흐트러졌는지 확인했다. 미생. 청구기호 813.6 윤 74 ㄷ가 제자리를 잃고 저 아래에 꽂혀있었다. 책을 뽑아 제자리에 넣었다.

  다른 책은 제자리에 있을까. 얼굴을 가까이 붙인 채 순서를 확인한다. 눈이 시리다. 책의 작은 분류 기호를 확인하다 보면 어느 순간 깨알 같은 문자들이 엉겼다. 안경을 벗고 시큰거리는 눈을 문질렀다. 주머니의 안약을 흔들어 넣고 잠시 눈을 감는다. 두꺼운 안경을 잠시 벗을 때마다 왠지 머리가 더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예진 눈을 몇 번 깜빡이다 다시 안경을 쓴다. 약을 넣으면 잠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어야 하지만 나는 크게 눈을 뜬 후 서가를 노려보았다. 볼 수 있는 정도를 가늠해보는 것이다.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뒤쪽 벽으로 붙은 후 앞 서가를 바라본다. 흐려졌다 뭉개졌다 하는 책의 제목을 읽으려고 애쓴다. 모양도 색도 다른 제목들이 하나로 뭉친다, 나는 덤덤하게 또 몇 권의 책과 이별한다.

  산동제 넣으셔서 하루 정도 뿌옇게 보이고 빛 번짐 있으세요. 운전하시면 안 돼요.

  의사에게 엄마와 같은 병명으로 실명이 진행 중이라는 얘기를 처음 들었던 날, 간호사는 가려는 날 붙잡고 자잘한 주의사항을 얘기했다. 동공을 크게 하는 약을 넣었으니 하루 정도 주의하라는 것이었다. 시야가 점점 좁아지고 어느 순간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될 사람에게 하루치의 주의사항을 조목조목 설명하는 것이 우스워 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분홍색 카디건과 흰색 바지와 진주 귀걸이와 핸드크림 향기 같은 것이 둥글게 뭉쳐져 왈칵 다가왔다. 향기 때문이었을까. 눈물이 흘렀다.

  찰칵, 문이 열렸다. 나는 대출 데스크로 가서 앉아 보던 책을 펼쳤다. 언젠가 눈앞의 글씨도 보지 못하는 날이 올 터였다. 나는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책을 읽고 싶었다.

  낮의 도서관을 찾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아직 어린이집에 보내지 못하는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는 엄마가 들러 자신은 잡지를 보고 아이는 마룻바닥을 기며 아무 책이나 입으로 빨게 두곤 했다. 우연히 아는 엄마를 만나면 아이가 지난밤 얼마나 자신을 힘들게 했는지 과장을 섞어가며 떠들었다. 그러다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던 아이들이 넘어지기라도 하면 호들갑을 떨었다.

  도서관은 사랑방이에요. 시의 담당자는 마을 도서관의 존재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지만 나는 왜 하고많은 장소 중 도서관이 사랑방이 되어야 하느냐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 대출할 책을 내밀었다. 육아서가 대부분이었다. 요즘은 같은 책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알고 보니 스타 강사의 유튜브에 소개된 책들이었다. `인생은 다 자기 하기 나름'이라고 늘 강조하는 강사는 자신이 권하는 책을 읽으면 인생도 변할 것이라는 주문을 거는 것 같았다.

`낮에 혼내고 밤에 우는 엄마들'이라는 긴 제목의 책을 보고 한 여자가 손뼉을 친다. 이거 완전 내 얘기다. 그들의 공감으로 수다는 다시 시작됐다. 나는 다시 내 앞의 책에 집중했다.

  퉁퉁한 손이 책상 위로 책을 올려놓는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책 표지엔 뱀처럼 요염해 보이는 회색의 넥타이가 그려져 있었다.

“대출이요.”

“네. 카드 주세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여깄어요.”

  김춘구. 이름이 특이해 기억하고 있었다. 둥근 얼굴에 희끗희끗한 머리를 올려 묶은 여자가 웃었다. 꽃무늬 원피스에 흰 카디건이 화사했다. 일주일에 두어 번 들러 바느질이나 소설책을 빌려 가는 여자였다.

“주책없죠. 넷플릭스에서 봤는데 재밌더라고요. 책으로 읽어보려고요.”

  그녀는 묻지도 않은 말을 하며 웃었다. 귀엣머리를 연신 쓸어 올리는 손과 목덜미, 귓불이 붉었다.

  표지가 날긋한 책의 코드를 스캔한 후 그녀에게 밀어주었다.

“대출되셨어요.”

  그녀는 책을 안고 잠시 머뭇댔다.

“선생님은 무슨 책을 그렇게 계속 읽으세요? 재미있으세요?”

  책의 재미를 그녀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선생님, 여기 자원봉사 모집하죠?”

  나는 잠시 망설였다. 전임 사서와 함께 일했던 오래된 봉사자는 나의 원칙을 못 견뎌했다. 왜 도서관에 떡이며 음식을 싸오면 안 되는지, 대출 카드 없는 대출은 안 되는지, 그동안 자연스러웠지만 잘못된 일을 바로잡으려 들자 그녀는 반발했다. 전임 사서가 고생한다며 부풀려주었던 중학생 아이들의 봉사 시간을 바로잡자 그녀는 바로 그만두었다.

  그제 자원봉사 모집 공고를 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요식적인 거였다.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마을 도서관 봉사는 시간을 채우려는 학생들이 일주일에 몇 시간 간단한 청소를 하거나 주말에 반납과 대출 업무를 보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저들끼리 노닥거리느라 정전기포로 머리카락을 밀고 다니는 정도의 청소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반납 책을 서가에 정리하라고 하면 아무 데나 꽂아 넣는 통에 결국 다시 내 손이 닿아야 했다.

“막내가 올해 대학에 갔거든요. 이제 저 할 일은 다 한 거 같아요.”

“네. 우선 간단한 인적 사항이랑 자기소개서 써 오시면 보고 연락드릴게요.”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자기소개서라니.

“네,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여자는 예의 그 웃음으로 인사를 한 후 문을 나섰다.

  점심은 집에서 먹었다. 도서관과 십오 분 정도 거리의 원룸이었다. 간단히 빵과 커피를 마시며 책을 봤다. 집의 벽은 온통 책이었다. 식탁 등과 키가 큰 독서 등을 한 번에 켰다. 창문 앞의 책 무더기 때문에 거실엔 빛이 잘 들지 않았다.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펼쳤다. 중학교 때부터 백 번도 더 읽은 책이었지만 크네히트가 명인의 지위를 버리고 카스탈리엔을 나오는 장면은 언제나 희열을 주었다.

  띠띠. 알람이 울렸다. 점심시간 끝나기 십오 분 전이라는 알람이었다. 정신없이 책에 빠져 있다가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버린 일을 몇 번 겪은 후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정자와 자그만 놀이터가 있는 공원을 지나야 했다. 늘 같은 시간에 나와 앉은 노인이 보였다. 그의 무릎 위 손바닥만 한 라디오에서 간드러진 트로트가 흘러나왔다. 노인은 어울리지 않는 노래를 견디는 듯 두 손으로 지팡이를 꼭 그러쥐고 있었다. 가을의 볕은 작은 먼지에 가리운 듯 부옇게 뭉쳐서 떠다녔다. 안경을 벗고 콧등을 문질렀다. 부연 세상이 하나로 뭉쳐 둥글게 돈다. 광활한 카스탈리엔에서 빠져나와 도서관을 향해 걷는 길에 맥이 빠졌다. 책 속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의 갭은 언제나 나를 흔들었다. 책 속의 활자만큼 세상은 선명하지 않았다.

  학원이 끝나는 시간이 되면 도서관은 아이들로 북적였다. 아이들은 바닥의 탁자에서 숙제하고 학습 만화를 뒤적였다. 여자아이들은 서로의 필통을 열어보며 깔깔대다 가끔 대출 데스크로 와 전화를 쓰겠다고 부탁했다. 도서관이라는 것을 부모에게 알리려는 것이었다. 사이가 좋지 않은 친구가 오면 흘긋거리며 옆 친구와 귓속말을 했다. 남자아이들은 브롤스타즈 카드를 바닥에 펼쳐놓고 누구의 캐릭터가 더 좋은지 떠들었다. 규칙을 강조했지만 아이들은 도통 들어먹지 않았다. 시끄러울 땐 집중하지 않아도 술술 읽히는 가벼운 소설을 읽었다. 그 때 누군가 흰 봉투를 내밀었다.

“선생님.”

  김춘구였다.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자기소개서요. 쓴다고 쓰긴 했는데 이런 건 또 처음이라. 예쁘게 봐주세요.”

  나는 흰 봉투를 보던 책 사이에 끼웠다.

  도서관 문은 일곱 시에 닫았다. 문을 걸어놓고 청소와 반납 책을 정리했다. 마룻바닥엔 아이들이 뜯어먹은 초콜릿 껍질과 게임 카드 봉투가 나뒹굴었다. 청소기를 돌리고 대걸레로 구석구석을 닦아냈다. 서가의 먼지는 삶아 말린 걸레로 닦았다. 꺼끌꺼끌한 걸레로 바닥을 문지른 후 묻어난 먼지를 확인하면 마음이 편해졌다.



  우웅. 책상 위에서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눈을 가까이 대자 김도진이라는 이름 석 자가 보였다, 나는 수신 거부 버튼을 눌렀다. 얼마 전 안과 대기실에서 읽었던 불우한 노교수의 사연이 떠올랐다. 하나뿐인 아들과 아내가 미국 여행 중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기사였다. 한국 비교문학의 권위자인 칠십 후반의 노교수는 충격에 빠졌고 일 년째 대외활동을 중단한 채 집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어 제자들은 안타까워했다. 교수 가족의 행복한 시절의 사진이 비극을 더욱 비극적이게 했다. 책이 사방으로 빼곡한 거실에서 상고머리를 한 어린 아들을 무릎에 앉힌 사진. 말을 탄 아들을 배경으로 고운 한복을 입은 아내의 어깨를 안고 웃는 사진 같은 것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의 남자는 몸에 잘 맞는 양복을 입고 쾌활하게 웃고 있었다.

  아버지.

  나는 그의 사진을 볼 때마다 그와 내가 닮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핸드폰은 한참을 울리다 꺼졌다. 곧 문자가 왔다. 같은 내용의 문자는 지치지도 않고 쌓이는 중이었다.

[잘 지내니? 연락 부탁한다. 상의할 것이 있다.]

“니 아버지한테 가서 살아. 꼭.”

  엄마의 유언이 담긴 쪽지였다. 열여덟 살 딸을 두고 죽는 엄마가 예의로라도 남길 법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엄마는 시인이었지만 자신의 연기에 도취된 배우 같았다. 대학 입학 후 바로 등단한 그녀는 생래의 아름다움에 시인이라는 아우라까지 더해져 환호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서른 살이나 많은 지도 교수의 아이를 가졌다. 나는 가끔 그녀가 나를 낳은 건 평생 원 없는 비탄이나 하려는 의도였다고 생각했다. 나로 인해 엄마의 곡절 많은 삶은 액자에 갇힌 듯 완성되었다. 엄마는 평생 사랑에 빠진 스무 살 여자였다.

“너를 가졌는데 지우라고 외할머니랑 삼촌이 난리잖아. 새벽에 가방 하나만 들고 경주행 시외버스를 탔지. 왜 경주였는지는 몰라. 수학여행 때 가본 거 말고는 없는데. 거기서 꼭꼭 숨어서 배가 부를 때까지 아무도 어쩔 수 없을 때까지 견뎠어. 그리고 니 아버지 집을 찾아갔지. 여름이었는데 벽돌담에 담쟁이 잎사귀가 그득해서 바람에 스륵스륵 소리를 냈어. 초인종을 누르는데 나는 그 사람이 나와야 한다고 수백 번 빌었는데 부인이 나왔어. 비까지 내려야 했는데. 그건 좀 아쉽다. 망토를 입고 갔거든. 테스처럼. 비에 젖어 떨며 모자를 내리면 얼마나 멋졌을까.”

  여름에 무슨 망토. 미쳤어? 내가 이렇게 물으면 엄마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깔깔 웃었다.

  사생아를 가지고 피신했다는 얘길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여자는 정상이 아니다. 부른 배를 안고 교수의 집 초인종을 누르던 그 밤의 이야기를 나는 진저리나도록 들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뱃속 아이가 아니라 시련에 처한 여자였다. 담쟁이덩굴이 가득한 벽에 기대선 시름이 가득한 얼굴로 망토를 입은 아름다운 여자.

  담쟁이덩굴로 말하자면 나도 물릴 정도로 봤다. 열 살 때부터 매달 말일이면 생활비를 타기 위해 나는 그 집에 갔다. 나는 그 집 벽에 매달린 담쟁이로 계절을 가늠했다. 시뻘건 줄기에 뾰족한 눈 같은 순을 내밀면 봄, 어린아이 손 같은 퉁퉁한 잎이 무성히 흔들리면 여름, 자주색 열매가 열리면 가을, 그것은 겨울엔 빨간 금을 긋듯 벽을 기어 다녔다. 엄마는 돈이 부족하지 않았다. 나를 낳았을 때 이미 아버지의 본가에서 큰 집과 평생 먹고 살 만큼의 몫을 받았다고 했다. 내가 겪어야 했던 모멸은 그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아버지의 삶에 작은 균열이라도 내고 싶은 엄마의 오기였다.

  아버지는 서재에서 나를 내다보지 않았고 어쩌다 봐도 별다른 표현을 하지 않았다. 늘 나를 맞은 건 옥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버지의 본처였다. 그녀는 내가 간다는 전화를 받고도 미리 봉투를 준비해두지 않았다. 내 얼굴을 흘긋 본 후 느릿느릿 이 층 계단으로 올라가 오랜 시간 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나는 거실에서 앉지도 못하고 그녀를 기다렸다.

  테니스를 하고 들어오는 아버지의 아들은 나를 보지도 않고 빠르게 위로 올라갔다. 땀으로 젖은 그의 발이 희부연 자국을 마루에 새기며 사라졌다.

  그 집 거실의 온 벽면엔 책이 가득했다. 아버지의 책과 함께 일본 야구 기록집, 테니스 교본, 주부 잡지 등 종류가 다른 책들이 사이좋게 꽂혀 있었다. 그 불규칙한 어울림이 그들의 단란한 생활을 증명했다. 책을 꺼내 볼 용기는 없었다. 제목을 눈이 아프도록 읽어 내렸다.

  다리가 아프다는 느낌마저 잊을 즈음 그녀가 내려와 봉투를 손에 떨어뜨렸다. 나는 그 집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봄날, 담쟁이덩굴의 붉은 순이 벽을 타고 나를 따라왔다. 엄마는 보나 마나 술을 마시고 있을 터였다. 내게 이런 모멸을 겪게 하고도 피해자 행세를 할 그녀를 보기 싫었다. 버스를 타고 시내의 큰 서점에 갔다. 그 집 거실에서 읽지 못한 책을 찾았다. 그리고 봉투의 돈으로 값을 치렀다. 낮이고 밤이고 복수하듯 책을 읽었다. 이해도 되지 않던 책들의 활자가 스스로 일어서 걸어오는 날이 있었다.

  쉬는 날이면 도서관에서 살았다. 사람이 오지 않는 서가 사이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가 녹진한 석양이 드리울 때 아쉽게 책을 덮었다. 엄마는 책을 손에 놓지 않는 나를 활자 중독이라며 은근히 자랑스러워했다. 그 집 자식은 테니스 선수인데. 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나는 한 번도 내 길 위에서 아버지라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건 책에 대한 모독이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은 집을 나선다. 공원 벤치에 앉아 가로등 아래 떠다니는 먼지와 멀리서 들려오는 고등학생 아이들의 웃음기 섞인 괴성을 들었다. 저 멀리 도서관의 검은 윤곽이 보인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캄캄한 건물을 더듬으며 문고리를 찾는다. 차갑고 둥근 문고리에 열쇠를 넣자 팅, 하는 소리와 함께 찰칵 문이 열렸다.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낮의 남자가 밤에 도둑처럼 숨어든 나를 보면 뭐라고 할까.

  어둠 속이지만 오히려 자유롭다. 캐비닛을 열고 작은 스탠드를 꺼낸다. 책상 아래 조그만 빛이 번진다. 반딧불처럼 책상 틈으로 새어 나오는 주황색 불빛을 깔고 나는 바닥으로 드러눕는다. 손으로 바닥을 가볍게 쓸고 불빛에 비춘다. 하얀 먼지가 조금 묻어난다. 매일 저녁 청소를 해도 조금만 지나면 바닥엔 먼지가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그 먼지가 책들이 뿜어내는 숨이라고 생각했다. 눈꺼풀을 내린다. 책의 숨이 내게로 가라앉고 나는 다시 숨을 내뿜는다. 책은 고유의 향기를 가지고 있다. 나는 가슴 깊이 그것을 들이 마신다. 책은 다시 내 숨을 들이킬 것이다. 책과 함께 숨을 쉰다.

  전날 읽던 책을 펼쳤다. 전쟁터에서 이십 년 만에 만난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뺏어 타고 달아난다. 책 속의 사건은 내게 불행의 스펙터클을 예습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불행은 예습한다고 고통이 경감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강렬한 감정, 외로움, 사랑 같은 것들을 복습한다. 활자가 차분히 나를 덮는다. 책 속의 세상은 순정했다. 출구를 찾을 수 있는 미로를 헤매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책이 재미있어요? 라고 묻는 사람들은 모르는 세계. 문득 생각난 김춘구의 자기소개서를 펼쳤다. 흰 종이에 볼펜으로 또박또박 눌러 쓴 둥그런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이름 김춘구

  생년월일 1961년 7월 8일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김춘구입니다. 자기소개서는 처음이라 어떤 말을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경남 창녕여고를 졸업했습니다. 슬하에 1남 1녀가 있어요. 장남은 공무원이고 딸애는 올해 여대에 들어갔어요. 아저씨는 퇴직 후 집에 계셔요. 제가 도서관에서 봉사한다고 하니 점심도 직접 챙겨 드시겠다고 좋아하세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박경리와 박완서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책과 사람을 좋아해 서점을 차리는 게 꿈이었어요. 여러 사람도 만나고 책도 읽으며 즐겁게 봉사하고 싶어요. 도서관에 있고 싶어요.

  도서관에 있고 싶어요.

  궁서체의 글씨가 살아 꿈틀대는 듯했다.

  김춘구는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월요일 열한시에 도서관으로 나왔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나는 얼굴을 조금 펴 웃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종이컵과 커피믹스였다. 나는 재빨리 말했다.

“여기서 이런 거 드심 안 되는데. 책에 쏟을 수가 있어서요.”

“에구, 그렇구나. 죄송해요. 뭐부터 할까요?”

“우선 반납함 책 좀 가져다주시겠어요?”

  나는 도서관 밖 반납함의 열쇠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한아름 책을 안아온 그녀가 혀를 내둘렀다.

“책이 엄청 많네.”

“주말 지나서 그래요.”

  나는 책의 코드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신기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 내 뒤로 가까이 섰다. 가글 냄새가 났다.

“이제 이 책들 다시 꽂으면 되죠?”

  내 옆에 수북이 쌓인 책들을 그녀가 카트에 옮겼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아무렇게나 꽂으면 다시 내 손이 닿아야 했다. 하지만 곧 이 작업이 그녀의 얼굴에서 붉은 생기를 뺏고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내리라고 생각했다.

“제가 어떻게 하는지 보여 드릴게요.”

  나는 문학책 몇 권을 집어 800번대 서가에 멈췄다.

“청구 기호에 따라 정확한 자리에 넣어야 검색 후 쉽게 찾을 수 있어요. 분류기호가 낮은 책부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책을 꽂아요.”

“우와, 그냥 아무렇게나 꽂혀 있는 줄 알았는데 얘들도 다 질서가 있네요. 문학은 800번대… 또….”

“한 번 해보시겠어요? 꼭 정확한 자리에 넣어야 해요.”

  나는 강조했다. 그녀는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그런데 이 분류는 무슨 기준이에요?”

“듀이 십진분류법을 기초로 만든 뭐라고 그랬었는데 저도 배운지 오래되어 기억이 잘 안 나요.”

  기억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동기들은 다 끔찍해하던 분류법을 나는 재미있게 공부했다. 듀이의 분류법은 내게 인류 문화의 발전 과정을 재현한 것으로 느껴졌다. 000은 총류로 어떤 분야에도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의 시작을, 100은 사유를 위한 철학, 200은 신을 위한 종교였다. 300은 인간이 만든 사회, 400은 소통을 위한 언어, 500은 생존을 위한 자연과학, 600은 기술과학이었다. 700은 예술, 800은 문학, 마지막으로 900은 이 모든 것을 기록한 역사로 내게는 온 세상이 도서관 안에 존재했다.

  그녀는 뭔가를 중얼거리며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뒤 정확히 책을 분류해 꽂았다. 나는 이상해진 기분으로 자리에 앉아 읽던 책을 다시 펼쳤다.

  김춘구는 정해진 봉사 시간 외에도 매일매일 도서관에 들렀다. 올 때마다 직접 만든 무언가를 가져와 건넸다. 직접 만들었다는 인절미, 코바늘로 뜬 수세미, 테두리에 수를 놓은 수건 같은 부담스러운 것들을 들고 환하게 웃었다. 거절할 수 없어 하나둘 받은 것들이 점점 몸피를 불리고 있었다.

“김선생, 내가 뭘 가져왔는데….”

  반말은 덤이었다.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나는 안경을 벗고 눈을 문질렀다.

“내가 만들었어요.”

  커다란 나무 쟁반 위에 둥근 숯 조각과 대나무, 보라색 난과 흰 자갈이 우뚝한 부작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지만 어쩔 수 없이 새된 소리를 뱉었다.

“이걸 여기 두라고요?”

“이게 숯이라 천연 가습기예요. 공기도 좋아지고. 관리는 제가 할게요. 어디가 좋을까. 아 여기 중간 책장이 좋겠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책장 위에 얹었다. 나는 눈 뜨고 코 베인 사람처럼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한 무리의 여자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주일에 한번씩 독서 모임이랍시고 수다만 떨다 가는 여자들이었다.

“와 이게 뭐예요. 너무 멋있다.”

  김춘구의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 여자들은 둥근 탁자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눈치를 보느라 시끄럽게 하지는 못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곧 목소리는 높아졌고 그럴 때 나는 클래식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모임은 늘 정해진 시간보다 늦게 시작되었다. 매번 늦는 한 여자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여자가 들어왔다. 갓난쟁이 티를 겨우 벗은 아이를 데려오는 여자였다. 늦은 것이 미안한지 아이를 데려오는 것이 미안한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늘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녀는 아이를 바닥에 뉘어두고 꺼슬한 얼굴을 연신 손으로 쓸며 오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몇 분 만에 아이는 몸을 뒤채다 울음을 터트렸다. 여자는 아이를 업고 도서관 구석에서 연신 아이를 달랬다. 하지만 아이는 더욱 울음소리를 높였다. 여자는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김춘구가 그녀를 만류했다.

“이리 줘봐요. 아이 예뻐라.”

  그녀는 아이를 능숙한 자세로 안고 얼렀다. 엄마와 달리 토실한 아이는 김춘구의 흐르르깍깍 하는 소리에 벙싯벙싯 웃었다. 모임이 끝난 후 아이 엄마는 김춘구에게 연신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 덕분에 오늘 감사해요. 힐링하고 가네요.”

“별말씀을요. 승한이 너무 예쁘네. 자주 오세요.”

“여기 맨날 있으세요?”

“그럼요.”

  김춘구가 환히 웃었다. 그녀는 도서관 서가에 반쯤 기댄 편한 자세로 여자들을 배웅했다. 그녀는 어느새 손에 커피믹스를 탄 종이컵을 들고 있었다.

  서가 구석에서 말라붙은 떡 조각을 발견할 때면 화가 치밀었다. 숯 부작 주변엔 검은 가루가 부슬거렸다. 그녀와 그녀의 물건이 나의 도서관을 흔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책을 보지 않고 김춘구와 수다를 떨었다. 도시락을 싸와 내미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춘구는 내 눈치를 보며 입으로만 안 된다고 거절했다.

“선생님. 반납 책들 자리에 제대로 꽂으셔야 해요.”

  처음과 달리 그녀는 책도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다. 나는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김선생. 꼭 그 자리에 있는 거 보다 그 책 찾다 다른 책 찾아서 읽는 재미가 있지 않겠어?”

  그녀는 매우 수다스러웠다. 집의 강아지, 아들의 상사, 딸의 아르바이트, 남편의 투정을 내게 얘기했다. 나는 반쯤 듣고 흘렸다. 혼자 구석 책상에서 책을 읽던 전의 봉사자가 그리웠다.

“김선생 그런데 눈이 안 좋지? 많이 안 좋은 거야?”

  당황한 내 손이 눈을 가린다는 것이 안경을 가린 모양새가 되었다. 그녀는 눈에 좋다며 블루베리 진액을 내밀었다. 그녀의 선의는 나 외의 사람들을 모두 감동하게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선의가 나를 나무란다고 느껴졌다.

  가을비가 나뭇잎과 함께 떨어져 바닥을 어지럽혔다. 바닥에 납죽 달라붙어 어지러운 그것들은 뭉개지고 포개져 나름의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전화는 점점 집요해졌다. 나는 족족 수신 거부를 눌렀다. 전화번호를 아예 차단해두지 않는 내 안의 어떤 욕구도 같이 경멸했다. 시의 도서관 담당자를 만나고 돌아온 날 김춘구는 도서관 안쪽에서 뛰듯이 걸어와 붉은 얼굴로 속삭였다.

“김선생, 요 앞 공원에 아버님 오셨어.”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네?”

“저번에 김선생 화장실 갔을 때 전화가 하도 울리길래 받았거든. 어떤 여자가 김선생 전화 맞냐고 하고 여기가 어디냐고 묻길래 가르쳐줬어.”

  예상치 못한 일을 겪으면 온몸에 힘이 빠진 듯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책으로 하는 예행연습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도.

  나는 세차게 소리 질렀다.

“미쳤어요?”

  그녀는 예상했다는 듯 입을 앙다물었다. 촉촉해진 눈이 왠지 즐거워 보였다.

“김선생, 나는 자기한테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만날 사람은 만나야 돼. 나중엔 모든 게 다 후회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그냥 걷다가도 가슴이 조여들어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그녀는 내 손을 꼭 부여잡았다. 두툼하고 붉은 손은 뜨거웠다.

“김선생. 얘기를 해야 아는 거야. 사는 건 딱 떨어지는 게 아니야.”

  나는 그녀의 손을 확 뿌리쳤다. 도서관을 뛰어나와 그가 있다는 공원의 반대편으로 뛰듯이 걸었다. 말라서 표창처럼 된 단풍잎이 바람과 달려든다.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앞으로 걸어야 하는 마음이 뒤엉켰다. 재빨리 택시를 잡았다.

“파주 경모공원이요.”

  유리 속 엄마는 환히 웃고 있다. 가져간 장미 다발을 내려놓았다. 구불구불한 머리와 도장 같은 붉은 입술이 아름답다. 나는 안경을 벗고 엄마를 응시한다. 검은 머리와 붉은 입술과 장미향이 부옇고 둥글게 뭉쳐진다. 불행을 완성해 행복하냐고 묻고 싶다.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엄마가 죽었을 때도 울지 않았다. 빈소를 홀로 지키던 내게 아버지는 무심한 얼굴로 그래서 넌 몇 살이냐고 물었다.   나는 서둘러 그곳을 벗어난다. 가져온 장미꽃도 함께였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유치한 숨바꼭질이다.

  새벽의 공원을 가로지른다. 아버지가 앉아서 나를 기다렸을 곳이 어딘지 가늠한다. 여러 벤치를 후보로 삼아 나는 다양한 자세와 모습의 아버지를 앉혔다 일으켜 세우기를 반복한다. 그중 한 곳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본다.

  찬 바람이 분다. 이제 겨울이 올 것이다. 마시지도 못하는 술이 먹고 싶었다. 아파트 쪽의 작은 편의점의 불빛이 보였다. 천천히 걸었다. 문득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몇 걸음 더 앞으로 옮겼다. 김춘구였다. 잠옷에 카디건을 급히 걸친 모습의 그녀는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편의점 문을 나왔다. 조심스레 건물 뒤편의 그늘로 들어가 쪼그려 앉았다. 봉투 안에서 얼음이 든 플라스틱 컵을 꺼내 주위를 살피다 뚜껑을 열고 캔맥주를 콸콸 따라 부었다. 그녀는 손 위로 흐르는 거품을 연신 게걸스럽게 핥았다. 그리고 그것을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꽤 큰 맥주 한 캔을 세 번 정도 나누어 먹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얼음을 와작 씹었다. 손등으로 입을 계속 훔쳤다. 이상한 활기가 돌았다. 그녀의 붉은 얼굴과 강한 가글 냄새가 떠올랐다. 나는 그대로 멈춰서 그녀와 그녀를 가린 어둠을 바라보았다. 남은 얼음을 바닥에 흩뿌리던 그녀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어느 쪽을 바라보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았지만 나는 먼저 몸을 휙 돌렸다.

  다음 날 도서관 책상엔 김춘구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김선생. 아버님껜 김선생이 사정이 있어 못 나온다고 말씀 잘 드렸어.

  김선생. 아버님께선 말씀을 잘 못 하신대. 앓던 병의 후유증이라고 하셨어. 제자라는 여자분이 모시고 왔어.

  뭐라고 말씀을 하시려는 것 같았는데 나는 그 마음은 알겠는데 내용은 모르겠더라고. 글로 몇 자 적어주셨어. 두고 갈게.

  내가 주제넘었어. 미안해. 마음 정리되면 연락해줘요. 김춘구.

  그 아래 삐뚤한 글자가 적힌 종이가 있다. 볼펜으로 꾹꾹 힘주어 쓴 그 글자를 바라본다. 종이를 눈앞으로 가져다 댔다. 드문드문 엄마의 이름과 내 이름이 보였다. 미안하다 같은 글자를 애타게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김춘구는 이제 도서관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남긴 숯 부작을 바라보았다. 숯 조각 사이 난초는 꽃이 진 채로 뿌리만 드리웠다. 붉고 흰 뿌리가 이끼를 움켜쥐고 있었다. 속이 허방인 빈 이끼 위로 드리운 뿌리가 안타까웠다.

“대출이요.”

  뒤돌아보았다. 선뜻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남자는 예전 대출 거절로 소리를 지르며 나갔던 그다. 나는 그가 밀어놓은 책을 보았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공인중개사의 꿈을 접고 우주의 꿈을 꾸는 걸까. 나는 남자가 아직 공인중개사를, 지구의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카드 주세요.”

“여기요.”

“28일까지예요.”

  그는 옆구리에 책을 끼고 성큼성큼 도서관을 걸어나갔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엔 여전히 도서관으로 스며든다. 바닥의 냉기를 견디며 드러눕는다. 책들이 먼지를 떨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그 고운 먼지가 내 위로 가라앉는다. 문득 이 밤의 공기를 김춘구와 함께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는다. 정자에 앉은 한 남자가 보인다. 검은 모자를 쓰고 고개를 숙인 남자의 형태와 색이 벗겨진 갈색 정자와 잿빛 하늘이 둥글게 뭉그러진다. 나는 한발 한발 그에게 다가간다. 그는 말을 하지 못한다. 나는 보지 못한다. 우리의 대화는 어떨 것인가. 나는 그의 무엇이라도 움켜쥐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다.


  <당선소감>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잠시의 울림이라도 전하길"

  이야기를 좋아했다. 어린 시절 엄마 몰래 자를 대고 읽었던 세로줄로 된 연애소설로 시작된 이야기에 대한 욕망이 나를 이끌었다.

  기자 생활 중 모니터로 읽었던 수많은 기사가 이야기로 번졌다.

  진부하지만 소설가가 하는 일은 이야기를 통해 인생의 뒷면을 비추는 것으로 생각한다. 내 이야기가 어느 구석을 비추고 누군가에게 잠시의 울림이라도 전하길 빌며 성실히 노력하겠다.

  `일은 사람이 하고 해결은 시간이 한다'라는 따스한 말로 이끌어주신 이순원 선생님께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아람누리 소설 교실 문우들, 소화모 언니들에게도 고맙다. 인생의 절반을 함께한 봉의 패밀리와 잠 안 자고 글 쓰는 엄마를 신기하게 생각하는 현준과 현성, 늘 격려해준 남편과 시부모님, 아영이와 여주 가족에게 사랑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하늘에 계신 엄마 아빠. 나는 잘 살고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 경기도 고양시(경남 마산 生) 
  ● 한림대 언론학과


  <심사평>

  "세련된 문체·치밀한 구성…인물·사건·배경 완벽

  예심을 거쳐 최종까지 남은 작품은 송혜숙의 `부리', 이은영의 `황지', 임수정의 `밤의 도서관' 3편이었다. 먼저 송혜숙의 `부리'는 인물의 성격이나 묘사력이 돋보이는 일면을 보이기는 했으나 주제나 소재가 진부하고 전체적으로 밀도가 떨어진다는 단점을 간직하고 있었다. 장인정신이 보완된다면 대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인 작가였다. 그러나 당선작으로 밀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적지 않다는 이유로 제외됐다.

  결국 이은영의 `황지'와 임수정의 `밤의 도서관'이 경합을 벌였는데, 이은영의 `황지'는 세련된 문체와 뛰어난 감성, 심리적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역량을 충분히 갖춘 작가임에도, 결말 부분에서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결함이 지적됐다.

  반면에 임수정의 `밤의 도서관'은 세련된 문체와 치밀한 구성, 감각적인 묘사들을 장점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인물, 사건, 배경이 모두 흠잡을 여지가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한마디로 기본기가 튼튼한 작가였다. 시종일관 침착성을 잃지 않고 사건을 기술해 가는 역량도 돋보였다. 당선작으로 뽑기에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많은 독자들께 사랑받는 작가로 대성하기를 기대해 본다.

심사위원 : 전상국, 이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