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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집 / 성민선

  처음 도서관에 간 것은 남편이 해외건설 수주를 위해 출장을 떠났을 때였다. 마침 아이들도 방학을 맞아 어학연수를 떠났으므로 나는 모처럼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집에 혼자 있기가 무료해 무작정 집을 나온 날, 단지 앞 버스 정류장에 도서관이라고 로고가 찍힌 하얀 버스가 보였다. 늦은 밤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고 서 있던 모습이 떠올라 나는 덥석 차에 올랐다. 구경삼아 간 그곳엔 오전 열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직장에서 은퇴한 노인들이거나 아직 이른 나이에 직장을 잃은 사람들처럼 보였다. 간간이 들려오는 기침 소리와 위장기능이 약해져 자꾸 트림을 하는 소리, 부스럭거리며 신문을 넘기거나 크게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까지 때로 그곳은 도서관이 아니라 대합실처럼 부산하고 시끄러웠다. 이층 열람실로 올라가자 공무원 기출문제집, 공인중개사, 토익900완성 같은 책들이 책상 위에 어지럽게 펼쳐 있었다. 나는 서가에서 책을 꺼내 창가에 있는 구석 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엔 이미 한 남자가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낡은 감색 점퍼에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는 그는 초라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모르게 사색적인 면모를 풍겼다.

 점심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우르르 식당으로 몰려들었다. 흰 가운에 검은 장화를 신은 조선족 여자들이 잰 손놀림으로 식판에 음식을 담았고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그곳엔 공원에서 보도블록을 깔거나 인근의 재건축현장에서 일하는 인부들도 있었다.

 나는 줄을 서려다 말고 그곳을 나와 거리를 돌아 다녔다. 갈현동사무소를 지나 수자원공사 쪽으로 걸어가는데 노란색 건물이 휑하니 서 있는 게 보였다. 지난 경제 환란 때 건설사의 부도로 공사가 중단된 병원건물이었다. 시에선 그곳을 살리기 위해 장례식장을 겸한 노인병원을 추진하려 했지만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쳐 벌써 십 년 넘게 폐허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십여 층이 훨씬 넘어 보이는 건물이 잊혀진 유적처럼 우뚝 서 있었다. 윙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따라 나는 무심코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건물은 입구가 봉쇄된 채 주위에 펜스가 쳐 있었다. 어두컴컴한 내부, 유리창 없이 뻥 뚫린 창문들을 나는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지훈아…

 저녁의 어스름 속에서 동생을 부르던 내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토류벽이 붕괴되어 안전사고의 위험이 있으니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이 있었지만 나는 그 뒤로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야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올라갔다. 그 안 어딘가에 동생이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이 다닌 흔적처럼 좁게 난 길을 따라 나는 건물 뒤편으로 다가갔다. 어디선가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놀라 뒷걸음질 치며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텅 빈 건물을 울리며 짖고 있는 개 소리가 점점 크게 내 심장을 조이며 귓전으로 들려왔다.

 그날 이후 나는 계속 거리를 돌아다녔다. 도저히 혼자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과천역과 정부청사 역 사이를 길게 가로지르는 중앙공원엔 양재천이 흐른다. 도시 면적의 구십 퍼센트가 그린벨트로 묶인 이곳은 인구 칠만의 작은 도시이다. 처음 이곳에 둥지를 틀었을 때 남편과 나는 십삼 평 전세부터 시작했다. 갑자기 몰아닥친 경제 한파로 남편 회사가 쓰러지고 어렵게 마련한 집까지 팔아야 했지만, 경제위기가 끝나면서 시작된 건설 붐으로 남편은 재기할 수 있었다. 어려운 시기를 넘긴 후 남편은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동생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동생을 본 것은 온 나라가 경제 환란으로 뒤덮였을 때였다. 저녁이 이슥할 무렵 아무 연락도 없이 찾아온 동생은 몹시 지쳐 보였다. 멀리 떠나는 사람처럼 커다란 가방을 들고 서있던 동생은 개 한 마리를 안고 있었다. 동생에게 따뜻한 밥을 해먹이고 자고 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실업으로 인해 잔뜩 예민해져 있던 남편은 누구도 집에 들이는 걸 원하지 않았다. 나 역시 피폐한 살림살이를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집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데 동생이 나를 보며 말했다.

 누나, 들어가. 매형이 기다리잖아.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자 동생이 데려온 개를 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누나가 좀 맡아줘.

 나는 얼떨결에 개를 받아 안았다. 그 개는 내가 결혼하면서 혼자 남게 된 동생이 주워와 키운 유기견이었다. 여기저기 부스럼이 나고 병색이 완연한 개가 뒤돌아서는 동생을 향해 발버둥을 치며 짖어댔다. 하지만 나는 그 개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그깟 똥개새끼 이제 그만 내다버려. 남편은 집에서 개가 짖는 소리를 견디지 못했다. 나 역시 아이를 키우느라 개까지 돌볼 여력은 없었다. 개가 짖을 때마다 남편은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내뱉었고 나는 숨을 죽인 채 아이를 감싸 안곤 했다. 어느 날 개가 사라진 걸 알았지만 나는 일부러 개를 찾아 나서지는 않았다. 결국 내가 동생을 위해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마지막일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정부청사 앞 잔디마당엔 오늘도 시위대가 모여 있다. 의약분업, 사학법, 연금법 등 주요 이슈가 떠오를 때마다 이곳은 늘 시위대로 붐빈다. 정리해고 철폐하고 민주노조 인정하라. 악질자본 몰아내고 민주노조 사수하자. 현수막의 붉은 글씨가 바람에 흔들린다. 청사와 마주보고 있는 C그룹의 노조는 일 년이 넘도록 농성을 하고 있지만 갈수록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십 년 전에도, 이십 년 전에도 사람들은 지금처럼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런 모습을 대하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 든다. 세상은 이미 변했는데 그들은 여전히 문 밖에서 외롭게 목청을 높이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주로 어울리는 사람들은 교육은 물론 부동산, 패션, 웰빙까지 다양한 정보를 두루 섭렵하고 있다. 한때 그들은 통장을 중심으로 집값을 담합하고 정부의 행정수도 이전 반대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청사의 이전 계획이 발표된 후에도 이곳의 집값은 떨어지지 않았다. 경제위기가 끝날 무렵 남편이 구입한 집은 해마다 올라 지금은 무려 여섯 배나 뛰었다. 처음 렉서스를 샀을 때 남편은 말했다.

 도요타의 최고급 승용차 브랜드야. 상위 일 퍼센트에 속해야만 탈 수 있는 차라고. 빌게이츠도 렉서스를 샀다니까!

 그러고 보면 남편은 변화된 세상에 잘 적응한 케이스였다. 그는 매일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경제신문을 읽고 식사를 하며 씨엔엔이나 비비씨를 듣는다. 외고를 준비하는 딸 역시 남편과 함께 뉴스를 들으며 귀를 단련시킨다. 세계화시대라는 것을 나는 아침마다 거실에서 느끼곤 한다.

   다시 도서관에 간 것은 추위가 제법 기승을 부리며 차갑게 바람이 몰아쳤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그곳에는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신문이나 잡지를 보고 있었다. 나 역시 서가에서 이런 저런 책을 찾아 꺼내 읽곤 했다. 나는 주로 사서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창가의 구석 쪽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 도서관에 갔을 때처럼 그곳엔 낡은 감색점퍼에 헝클어진 머리를 한 남자가 항상 나보다 먼저 와서 책을 읽고 있었다.

   사람들은 보통 육인용 책상의 양 끝자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서 가운데 자리는 대부분 비어 있다가 비교적 늦게 자리가 채워지곤 했다. 그곳은 느지막이 누군가 와서 앉았다가는 그다지 오래 머물지 않고 사라져버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주인이 바뀌는 자리였다. 그곳을 사이에 두고, 그러니까 내 옆에 있는 의자 하나를 건너뛴 자리에서 그는 하루 종일 고개를 숙인 채 등을 구부리고 앉아 책을 읽었다. 오후 두세 시 무렵 졸음이 몰려오는 시간이면 그는 잠깐 자리를 비웠고 다시 돌아올 때는 엷은 담배 냄새가 났다. 가끔 식당에서 그의 얼굴을 마주치곤 했다. 그는 식당 문을 여는 열한 시 쯤 밥을 먹었고 저녁 다섯 시쯤 또 한 차례 식사를 했다. 밥을 먹는 동안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남자들처럼 그는 식사가 끝나면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식당 뒤쪽으로 나있는 문을 통해 그가 혼자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을 나는 가끔 지켜보곤 했다.

 그를 눈여겨본 것은 아마 동생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생이 나를 찾아왔던 날 나는 동생을 보내고 집으로 들어와 어질러진 집안을 치웠다. 남편은 여전히 자기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밤에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나는 바람이나 쐴 겸 쓰레기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근처의 쓰레기통이 꽉 차있어 할 수 없이 놀이터 쪽으로 가는데 저만치 앞에서 동생이 걸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그때까지 동생은 놀이터 벤치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던 걸까. 그때야 비로소 나는 동생이 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바닥에 쓰레기봉투를 팽개친 채 동생을 부르며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동생은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동생이 살아있다면 아마 그의 나이쯤 되었을 것이다. 그를 볼 때마다 나는 빗질을 하지 않아 늘 엉켜있던 동생의 곱슬머리가 떠올랐다. 동생 역시 그 남자처럼 지금 어디에선가 낡은 점퍼를 걸친 채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와 안면을 트게 된 것은 내가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독서회에 가입하고부터였다. 어느 날 열람실을 지나다가 게시판에 독서회원 모집 공고가 나있는 걸 보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신청을 했다. 주말 모임이므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대부분은 중년에 든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었다. 간혹 대학에 몸을 담았다가 은퇴한 사람도 있었고 은자처럼 책읽기에만 정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평범한 생활인들이었다.

그 무리 중에 그가 있었다. 나이도 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어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젊고 초라한 행색을 한 그는 단연 눈에 띄었다. 나는 단박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 역시 나를 알아보는 듯 했지만 서로 아는 체 하지 않았다. 커다란 목소리로 과시하듯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달리 그는 토론시간 내내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늘 그림자처럼 조용히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인기 작가들의 소설이나 수필집을 다루던 독서회에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라는 다소 어려운 텍스트를 읽게 된 것은 그 책이 오랫동안 경제 분야의 베스트셀러였기 때문이었다. 당시엔 글로벌 경제에 관련된 책들이 열풍처럼 서점가를 휩쓸고 있었다.

 렉서스가 금융시장과 컴퓨터기술로 대변되는 현대의 물질적 욕망을 나타낸다면, 올리브나무는 가족이나 민족, 종교, 국가 같은 공동체나 정체성의 욕구를 상징합니다.

 발제자가 운을 띄우자 회원들은 책에서 읽은 내용을 자유롭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대립은 창세기부터 지속되어온 갈등이에요. 카인이 아벨에게 양을 데리고 자기 땅에서 물러가라고 말한 후에 벌어진 영토분쟁이나 자기들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신전을 어디에 지을 것인가를 놓고 싸운 것은 다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죠. 그들은 모두 자기 올리브 밭에 신전이 있기를 바랬어요.



  그러자 누군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가 냉전 이후의 시대를 설명하는 꽤 좋은 상징이라고 말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세상의 반쪽은 세계화 체제 속에서 더 좋은 렉서스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다른 반쪽은 아직도 누가 어느 올리브 나무의 주인인지를 놓고 싸우고 있다는 거였다. 아무튼 우리는 세계화 체제가 본질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형성해나가고 있으며 지구 전체로 볼 때 렉서스의 힘이 올리브나무를 압도하고 있다는 작가의 시각에 대체로 공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올리브나무 때문에 싸우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우리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중동이나 발칸반도의 분쟁을 예로 들며 이야기했다.

 올리브나무에 대한 소유권을 빼앗기면 정치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상대의 지배 아래 놓일 수밖에 없어요. 언제든 돌아가 쉴 수 있는 집과 일터를 빼앗기는 것만큼 사람을 분노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는 조용히 말했지만 다소 화가 나있는 것 같았다. 집을 뺏긴 사람처럼 그 역시 절망을 견디고 있는 지도 몰랐다.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빨갛게 감이 익어가던 고향집의 풍경을 떠올렸다. 처음 그곳으로 이사를 갔을 때 동생은 이제 우리도 집이 생겼다며 좋아서 마당을 뛰어다녔다. 나무 아래로 흰 감꽃이 떨어지는 봄날이면 동생은 아련한 얼굴이 되어 그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거긴 이제 투자가치가 없어.

 고향집을 되찾으려 할 때마다 남편은 내게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개발이 시작돼 값이 오를 대로 오른 곳을 뒤늦게 뭐 하러 사냐는 거였다. 그 후 몇 번 실랑이가 있었지만 남편은 집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나는 고향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전국의 부동산 광풍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오랜만에 찾아간 고향은 한창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여기저기 흙이 파헤쳐진 곳에는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었고 우리가 살았던 집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동생이 사라졌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는 이제 돌아오지 않아요.

 여자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게 귀에 들려온다.

 그는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지만 늘 빈손으로 돌아왔어요. 집을 잃고 제가 쉼터에 가있는 동안 누나에게 가 있겠다고 했는데 돌아오지 않았어요.

 십년 전 동생의 여자가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 후 여자는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남편과 자주 싸웠다. 하루 종일 돈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니던 남편은 밤마다 술을 퍼마시곤 했다. 동생이 나를 찾아왔던 날도 우리는 싸우고 있었다.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자 남편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거실 천장에 걸려있던 샹들리에가 와장창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편의 눈에 핏발서린 분노가 무서워 나는 제대로 신을 신지도 못하고 집을 뛰쳐나왔다. 그때 동생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차마 동생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이고 서있었다. 그러자 동생이 나에게 말했다. 누나, 괜찮아. 들어가. 나도 가야 돼.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날 동생은 고향집에 대해 묻고 싶었을 것이다. 환란 당시 나는 남편의 부도를 막기 위해 동생이 살고 있는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 결국 돌아가신 엄마가 힘들게 마련했던 그 집은 남편의 회사와 함께 날아가고 말았다. 그때 동생은 군대를 제대한 후 취업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시절에는 누구도 쉽게 취직이 되지 않았다. 일자리를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전전했고 티브이에서는 연일 생계를 비관한 사람들이 자살을 했다는 뉴스가 나오곤 했다. 환란이 진정된 후 나는 동생의 행방을 수소문 했지만 둘째를 낳고부터는 잊고 지냈다. 오랜 세월 가슴 속에 묻혀있던 죄책감이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나는 다시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고 몇 차례 신문 광고를 냈다. 하지만 동생에게선 여전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환한 식탁에 둘러앉아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의 모습이 내 의식 속에서 촛불처럼 흔들린다. 오래된 가족사진처럼 그들 사이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내 얼굴이 촛불 속에 창백하게 나타났다가는 이내 꺼져 버린다.

 남편에게선 별다른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이들 역시 자기들의 싸이홈피에 간단한 근황을 영어로 써놓을 뿐 내게 전화를 걸어오지는 않았다. 나는 저녁이면 라디오나 TV를 통해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느 날 레바논에 대한 이야기가 티브이에서 흘러나왔다. 그곳은 남편이 출장 가있는 곳이었다.

 이곳의 기후는 무척 온화한 편입니다. 차를 타고 교외를 지나다보면 차창 밖으로 끝없이 올리브나무가 보여요. 평화로운 풍경이지만 여기서 차로 두 시간만 가면 벤트즈베일입니다. 7월 전쟁 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이지요. 미국이 중동평화회담을 제의하긴 했지만 아직 성사가 불확실합니다.

 나레이터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예전에 보았던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를 떠올렸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 걸어가던 남자의 모습이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펼쳐지던 영화였다. 그러나 전쟁의 상흔이 짙게 배어 있는 화면에는 곳곳에 무덤과 폐허의 흔적이 보였다. 그곳에서 세계 지붕의 역사를 다시 쓴다는 버즈두바이처럼 끝없이 건물을 올리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혼자 남겨진 시간은 더디기만 했다. 텅 빈 골목에 혼자 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단단한 바윗덩어리가 가슴 속에 들어차 있는 것도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남편이나 아이들을 기다린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마음이 조급해졌다. 집 근처의 공원을 산책하기도 하고 동네에 있는 작은 미술관을 구경하기도 하다가 나는 다시 도서관을 찾아갔다.

 그 즈음 나는 거의 매일 늦게까지 도서관에 남아 있었다. 그 날 역시 도서관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다시 열람실로 갔다. 책을 읽는 동안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내렸다. 창밖에는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새까만 어둠 속에 나 혼자 불을 밝힌 채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았다.

 밤 열 시. 종료를 알리는 음악이 울리자 책을 보던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직원들이 부산하게 퇴근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자리엔 책이 펼쳐져 있을 뿐 몇 시간째 그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도서관 앞 공원 벤치에 노숙자가 어깨를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문득 동생 생각이 났다. 어쩌면 동생도 지금 어딘가에서 저런 모습으로 앉아있는 건 아닐까.

 나는 노숙자를 지나 공원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멀리서 달려오던 버스가 인적이 드문 정류장을 그냥 지나쳐갔다. 횡단보도를 건너자 어둠 속에 짓다만 건물이 폐허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 그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에 그의 낡은 감색 점퍼가 드러났다. 빗지 않아 헝클어진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나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일곱 시쯤 자리를 비웠으니 거의 세 시간 동안 그는 저렇게 등을 움츠리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돌아다녔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그의 집이 그를 둘러싼 세계가 말할 수 없이 궁금해졌다.

   그는 병원을 둘러싸고 있는 펜스를 지나 그 옆으로 나 있는 좁은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길가의 나무들이 바람에 서걱대며 흔들렸다. 내 안에서 바람이 불며 몸이 시려왔다. 수많은 나무의 잎들이 일제히 내 안에서 몸을 떨며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내가 따라가는 것도 모른 채 병원 뒤쪽으로 나있는 오솔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술에 취한 것처럼 그는 자꾸 몸을 휘청거렸다. 그의 뒤로 다가가자 비로소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몸에서 희미하게 술 냄새가 났다. 그는 나를 보고 적잖이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슬그머니 폐허로 향하던 발길을 돌렸다. 바람이 차갑게 몰아쳤다. 낡은 점퍼만 걸친 그가 몹시 추워 보였다. 문득 그에게 따뜻한 음식을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내 말에 그는 경계하듯 몸을 움찔하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도서관에서 몇 번 얼굴을 마주치곤 했었는데도 낯선 사람을 대하듯 나를 어려워했다. 술을 마셔서인지 그는 별로 음식 생각이 없다고 했다.

 집이 어디예요?

 큰 길로 나와 걸으며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는 얼마 전까진 이곳에 살았었다고 했다.

 여기요?

 나는 짓다 만 병원 건물을 가리켰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요?

 나는 웃으며 다시 그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내가 사는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신호등 앞에 서자 그 역시 나처럼 걸음을 멈추었다. 초록불이 켜지고 다시 길을 가는데 밤새도록 거리를 걷고 있는 그의 모습이 환영처럼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서자 집집마다 들어와 있는 불빛이 보였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의 불 꺼진 창이 바람에 흔들렸다. 나는 집을 지나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혼자 걷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땅을 보며 걸었다. 속이 불편한지 그는 가슴을 움켜쥐곤 했다.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걸어가던 그가 갑자기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토악질을 했다. 나는 그에게로 가 등을 두드려주었다. 헛구역질을 하며 노란 위액을 토해내던 그가 제대로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말했다.

 괜찮아요. 그냥 집에 들어가세요.

 그 모습을 보자 문득 그를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언젠가 햇빛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가 내 곁을 지나갔을 때, 나는 오랫동안 잊었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지난 시절 날이 어두워지는데도 동생이 돌아오지 않아 밖에 나가 부르면 동생의 대답은 들리지 않고 내 목소리만 빈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곤 했다. 지쳐서 집으로 와 탯돌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으면 대문 밖에서 동생이 어둠을 몰고 나타났다.

   그는 어디를 그렇게 쏘다녔던 걸까. 먼 곳의 흙을 잔뜩 신발에 묻히고 돌아온 동생의 몸에선 지독한 땀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밤늦게 일을 하고 돌아오는 엄마의 몸에서 나는 냄새였다. 식당의 불판에서 지글지글 고기가 익으며 기름이 떨어질 때마다 엄마의 몸에서도 뚝 뚝 땀이 떨어졌을 것이다. 엄마의 냄새를 맡을 때마다 나는 눈물이 땀이 되어 나오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나는 그를 안고 동생의 냄새를, 사무치도록 그리운 엄마의 냄새를 맡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를 혼자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집으로 데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망설이고 있는데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괜찮아요. 그만 들어가세요.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그를 도와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집이 가까워질수록 어둠 속으로 사라진 동생의 모습이 자꾸 어른거렸다. 나는 다시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길 한복판에 서서 멍하니 앞을 쳐다보았다. 그때 맞은 편 계단참에 그가 앉아있는 게 보였다. 그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한 채 아무렇게나 계단에 걸터앉아 있었다. 나는 간신히 그를 일으켜 세워 앞으로 걸어갔다. 모텔의 불빛이 보였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치르고 키를 건네받은 후 침침한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었다. 그를 눕히고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는데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다. 이상하게 목이 메어왔다. 그의 목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준 후 나는 화장실로 가 손을 씻었다. 욕실에서 나오니 그는 벌써 잠이 들어 있었다. 가방을 들고 문가로 가 손잡이를 돌리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지 말아요.

 나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엄마를 잃은 어린 남자아이가 누나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문 앞에 붙박인 채 서있는데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지 말아요.

 내 가슴 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눈에 촉촉이 물기가 어려 있었다. 어쩌면 내 눈에 있는 물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품으로 그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그의 등을 쓸어내리자 엄마의 심장소리를 듣고 안도하는 아이처럼 그는 조용히 내 품에 안겨 있었다. 어쩌면 오랫동안 아무도 그를 안아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그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 동생을 안았을 때처럼 가슴 한 구석이 아려왔다. 그때는 왜 그렇게 모든 것이 서러웠을까. 하루 종일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는 날이면 동생은 코를 훌쩍이며 내게 와 안기곤 했다. 유난히 우풍이 센 방안은 가슴 속까지 한기가 몰아쳤다. 엄마가 죽었을 때 동생은 갓 열 살이었다. 대학에 다녔던 나는 늘 아르바이트를 하느라고 제대로 동생을 챙겨줄 수 없었다. 엄마가 살아있을 때도 엄마는 생계 때문에, 나는 한창 공부를 해야 할 나이여서 동생을 돌보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 야간자습을 끝내고 집으로 오면 동생은 와락 내 품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동생을 따뜻하게 안아준 적이 없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나는 열 살 터울의 동생을, 그것도 아버지가 죽고 나서 한참 후에 태어난 동생을 달갑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가 올 때까지 혼자 놀던 동생의 눈가엔 눈물자국이 말라 있었다. 몸을 씻긴 후 밥을 먹이고 재우려 하면 동생은 말을 듣지 않았다. 엄마를 기다려야 한다는 거였다. 내가 살풋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면 동생은 혼자 방안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일어나 다시 동생을 안고 잠이 들면 잠결에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침이면 엄마는 어느새 밥을 다 차려놓고 우리를 깨웠다. 마흔이 넘어 혼자 동생을 낳았던 엄마는 죽는 순간에도 동생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밖에선 계속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수록 나는 더 세게 그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그를 안고 있으면 사라진 동생이 다시 돌아올 것 같았다. 그러면 더 이상 동생을 생각하며 가슴을 조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밖은 아직도 캄캄한 어둠이었다. 잠이 들었는지 그는 다시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그가 깨지 않도록 그를 눕히고는 조용히 그곳을 나왔다.  

 그날 이후 그는 도서관에 오지 않았다. 나는 그의 빈자리에 한동안 내 책을 올려놓곤 했다. 어느 날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내 책을 치우고 그 자리에 앉았다. 그 사람처럼 낡은 점퍼를 입은 남자가 그곳에 앉기도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이 드러나는 걸 원치 않는 것 같다. 서로 교감을 이루는 순간 삶은 잠시 위로를 받을 뿐 고통을 들키고 나면 그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져버린다.

 오늘도 도서관 앞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온 젊은 엄마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공원 잔디에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는 사람들과 바쁘게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지고 그들이 모두 돌아가면 어디선가 노숙자들이 나타나 딱딱한 벤치에 몸을 눕히고 밤을 보낼 것이다.

 시끄러운 기계 소리와 함께 매캐한 화학약품 냄새가 코 안으로 들어왔다. 도서관 뒤 아파트 건설 현장으로 커다란 레미콘 차량이 들어가고 있었다. 고층아파트의 건물 외벽에 길게 일직선으로 설치된 엘리베이터가 자재를 싣고 쉴 새 없이 오르내렸다. 그 위로 두 대의 타워크레인이 허공에 멈춰선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다. 탑 상부에 걸려있는 빔이 자재를 실은 트롤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아래로 휘어질 것처럼 길게 가로질러 놓여 있다. 한 남자가 자재를 싣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를 태운 엘리베이터가 위를 향해 올라가다가는 툭, 멈춰 섰다. 남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바람에 건물의 상층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건물 표면에 숭숭 뚫린 창은 햇빛이 비치지 않아 검은 구멍처럼 보였다.

 나는 그만 현기증에 그곳을 벗어났다. 갈현동사무소를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자 다시 노란색 건물이 보였다. 진입을 막기 위해 쳐놓은 펜스 위로 드러난 건물이 바람에 부서지듯 신음소리를 냈다. 어두컴컴한 내부, 유리창 없이 뻥 뚫린 창문들을 나는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출입을 금하는 경고문을 지나 나는 그 뒤로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올라갔다.

   건물 뒤편에 콘크리트 옹벽과 토류벽 사이로 토사가 유입되어 있었다. 사람이 다닌 흔적처럼 좁게 나 있는 길을 따라가자 건물 안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왔다. 깨어진 유리창들, 창문 곳곳에 매달린 거미줄, 뼈대처럼 보이는 붉은 갈색의 철골조들 위에 잔뜩 녹이 슬어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 여기저기 쌓여 있는 철근들을 피해 나는 건물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 누군가 있을 것 같았다. 구멍처럼 뚫려있는 엘리베이터 자리를 지나 난간 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통해 나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비닐봉지와 휴지들이 바람에 뒹굴었고 컵라면 용기와 담배꽁초들 사이로 타다 남은 폭죽들이 흩어져 있었다. 어디선가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갔다.

 한 마리 커다란 개가 어슬렁어슬렁 지하로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며 그 뒤를 따라갔다. 햇빛이 비치지 않는 그곳은 무덤처럼 정적에 쌓여 있었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조금씩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가는 햇살이 그 안에 있는 누런 담요를 비추었다. 한쪽 구석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개가 나를 보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짖어댔다. 나는 손을 내밀며 개를 향해 다가갔다. 지난 날 동생의 개가 다시 돌아와 내 앞에서 짖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 털이 뽑혀있고 부스럼이 난 개를 보며 나는 계속 다가갔다. 그러나 개는 내게 금방 달려들기라도 할 것처럼 으르렁거리며 좀처럼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나는 할 수없이 돌아서서 계단을 올라갔다. 그제야 으르렁거리던 개가 잠잠해졌다. 세상이 멈춘 것처럼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석양의 붉은 빛이 희미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 빛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허공을 맴돌던 빛이 돌덩이 같은 벽을 비추었다. 나는 벽 앞에 서서 가만히 그곳을 들여다보았다. 폐허가 된 건물 위로 다시 고향집이 세워지고 있었다. 대문 앞에 서 있는 감나무에 빨갛게 감이 익어갔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퇴락한 추녀 아래 놓여있는 마루 앞의 댓돌 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동생이 앉아 있었다.

 밖에선 계속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렸다.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다시 텅 빈 건물을 울리며 들려왔다. 밖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하루 종일 바깥을 떠돌던 개들이 이곳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당선소감>

   "글쓰기 10년… 배운 것은 '기다림' / 글 쓰며 늙어가다 보면 진짜 작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하기는 하지만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스무 살 무렵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소설을 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글을 쓰는 동안 내가 배운 것이 있다면 '기다림'이다. 나를 비우고 놓아두는 것. 침묵하며 견디는 법. 그러면서 건너가는 것!

 지난 십 년간 나는 두 가지 생각에 골몰해있었다. 연일 올라가는 집값에 대한 두려움과 내 글쓰기에 관한 것.

 첫 번째 생각은 이러다가 자칫 내가 조용히 앉아 글을 쓸 수 있는 작은 공간마저 없어질 거라는 것, 그래서 어쩌면 나는 늘 도서관이나, 공원의 벤치에서, 또는 지인들의 신세를 지며 그렇게 떠돌아다니며 글을 쓰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그리고 내 글쓰기가 과연 의미가 있는 지에 대한 의문.

 첫 번째 생각은 현실적 두려움을 몰고 왔지만, 두 번째 생각은 내게 무력감과 과의(果毅)를 안겨주곤 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가지 생각은 나를 단련시켰고 '집'이라는 소설을 탄생시켰으며 오늘의 행운을 안겨다 주었다.

 글을 쓴지 십년 만에 겨우 등단이라는 걸 했지만 내게 작가의 길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다만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할 뿐. 진짜 작가가 되기 위해선 평생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평생이라고 해봤자 얼마 남지도 않은 시간이지만, 글을 쓰며 늙어가다 보면 나도 진짜 작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 1966년 서울 출생

  ● 이화여대 행정학과 졸업

  ● 서울대 보건대학원 졸업

  ● 2008년 한국소설 신인상 수상

  ● 2010년 5ㆍ18문학상 수상


  <심사평>

  "폐허같은 삶의 상황에서 떠올리는 고향집

세계화 경제시대에 올리브나무로 표상된 고향마을의 집

  이른바 디지털 기능의 세계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러나 이 과학 기능이 아무리 확대되더라도 인간과 자연의 본질은 결코 위축되거나 황폐해질 수 없다.

 피상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성품이 건조해지거나 파편화하는 현상이 있는 듯이 보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인간 본성이 변질되지 않는다. 이러한 원의가 문학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특히 소설은 인간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삼는 특성을 지니므로 문명 현상의 변천에 관계가 깊다. 그러나 소설은 역시 인간 본성의 내적 깊이와 가치를 결코 훼손할 수 없으며 외부 사회의 영향이 물질화할수록 인간으로서의 정신적 가치를 더 잘 지켜 나아가게 된다.

 올해 평화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한 백 수십 편의 소설 속에서 성민선의 단편 「집」은 고급 승용차로 표상된 세계화 경제시대에 대비해 올리브나무로 표상된 고향 마을의 집을 제시한다.

 집의 상실, 무직, 노숙으로 떠도는 육친에 대한 연민과 슬픔이 있다. 외로워도 자신의 불행을 들키면 또 피해서 떠나는 인간적인 결벽들. 이 폐허와 같은 삶의 상황에 그래도 떠올리는 고향집의 환각, 이 일어서는 주제의식을 취해서 당선작으로 정했다.

 전정의 「나의 귀인」은 병원 풍경에서 아픔과 위안을 다룬 문체가 탄력은 있으나 성장소설 차원같은 점이 있다.

 박숙자의 「건너야 할 강」은 이국적 소재를 충실히 다루었으나 사랑과 가정이 양립된 작품 구성에서 통일성이 아쉬웠다.

심사위원 : 구중서, 노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