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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집시, 달을 굽다 / 설은영

  "악!" 맹수가 오른쪽 종아리를 공격했다

  그녀는 김장용 밀폐통을 가져왔다. 삽시간 통 안에 갇힌 개

  통에 든 개를 냉장실에 처넣었다…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놈은 아직 살아 있었다

  새벽 세 시. 은호의 눈이 저절로 떠진다. 그녀는 침대 옆 자투리 바닥에 차렷 자세로 누워 있다. 습관이 들어서 갓 깨어난 사람 같지 않게 정신이 맑다. 이렇게 28개월째 버티는 중이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눈이 매섭게 반짝이고 있다. 은호는 두려움을 다독이며 배를 불룩하게 부풀렸다. 맹수는 기습공격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만큼 배를 부풀려두면 충격이 그리 크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 두울…… 셋!

  침대 난간에서 시동을 걸던 맹수가 허공으로 몸을 날린다. 이어서 '윽!' 하고 배를 움켜쥐는 한 여자. 은호는 내장이 진정될 때까지 배를 쓸어내렸다. 상대는, 곱실거리는 흰털에 15㎏의 우람한 몸집을 자랑하는 푸들이다. 수놈이라 영역표시를 해대는 바람에 청소를 아무리 해도 놈의 지린내가 집안 어딘가에 배어 있다. 선배의 개는 하루에 한 번씩 즐기는 이런 식의 밤놀이를 몹시 좋아한다.

  초반에는 이 엄중한 놀이의 룰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개를 없애자고 선배를 구슬리곤 했던 과거사를 떠올리면 은호는 귀가 붉어질 정도로 창피했다. 집세 한 푼 내지 않는 주제에 말이다. 선배가 합리적이거나 예민한 여자였더라면 은호는 비웃음을 샀을 것이다. 선배는 이 관 속 같은 반지하를 전세 천오백에 살고 있다. 일곱 평짜리 단칸방에 싱글침대와 화장대가 꽉 낀다. 부엌은 따로 없다. 현관에서 방으로 들어오는 통로에 간이 싱크대가 붙어 있다. 그 옆에서 300ℓ짜리 중고 냉장고가 성의껏 돌아간다. 맞은 편 벽에 붙은 화장실은 한 사람만 들어가도 미어터진다. 선배는 동네 사우나를 다니지만 한 푼이 아쉬운 은호는 변기에 앉아 요령껏 씻으며 지낸다.

  한밤중에 노리개의 배를 만족스럽게 가격한 맹수는 다시 침대 위로 뛰어올라 잠을 청했다. 은호는 가만히 일어나 통로로 나왔다. 교활한 개를 만난 이후로 그녀는 볼품없는 인간이 돼버렸다. 누군가 이 사실을 세세하게 알아차린다면 그녀는 아마도 무너질 것이다. 다행히 그럴 일은 없다. 어찌 됐건 개보다는 사람이 더 영리하니까. 은호는 벽에 걸린 가방 속에서 통장을 꺼내 확인했다. 작은 숫자들에 30만원만 더해지면 다음 학기 등록금이 완성될 거였다.

  2학년 여름, 엄마가 갑자기 죽기 전까지는 외삼촌 집에서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농사를 짓던 엄마는 별안간 과로로 쓰러졌다. 은호는 엄마가 살던 월세 보증금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빈손의 고아가 되었다. 삼촌네로 돌아와 보니 은호의 짐이 대문 밖으로 몽땅 쫓겨나 폭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존심을 쪽지크기로 접어 숨기고, 학교 근처에 살고 있는 선배에게 사정을 털어놨다. 엎드려 잠만 자겠다고 고개를 숙이는 은호에게 선배는 내 집처럼 편히 지내라고 했다.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굴었지만 은호에게 그것은 기적이었다. 군식구가 늘어나니 당장에 공과금부터 두 배로 늘어날 터였는데도 선배는 개의치 않았다. 덕분에 은호는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학교에 계속 다닌다.

  석관동의 등굣길은 늘 한산하다. 저만치서 허연 멀대가 손을 흔들고 있다. 근처의 의대에 다니는 경원은 일 년째 은호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는 몇 달 전부터 은호를 집으로 초대하고 싶어 안달이다. 그녀는 호기심이 동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경원은 은호의 손등에 붙은 반창고를 보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개가 아무리 좋아도 그렇게까지 험하게 노느냐며 순진한 잔소리까지 덧붙였다. 반창고가 무심코 떨어지니 맹수가 새겨놓은 끔찍한 흉터가 드러났다. 은호는 경원이 보기 전에 서둘러 반창고를 갈아붙였다.

  이른 아침, 개에게 심하게 물리던 순간 은호는 재빠르게 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출근하는 선배를 평소처럼 배웅했다. 선배를 보내고 나서 개를 바라보니 놈은 2차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이 은호를 무너뜨린 첫 번째 발단이었다. 놈의 횡포는 반지하의 의례와도 같은 것이지만 이날만큼은 견디기 힘들었다. 은호는 밖으로 나가서 선배가 골목을 빠져나갔는지 확실히 점검했다. 그리고 장대를 구해와 침대 밑으로 기어든 개를 수없이 찌르며 괴롭혔다. 그들 간의 룰이 개정되는 순간이었다.

  '누가 됐든 괴롭힐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하자. 공평하지?'

  개는 송곳니를 잔뜩 드러내며 반대의사를 표했다. 은호는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개를 집요하게 괴롭힌 끝에 암묵적인 동의를 받아냈다. 상처 없이 요령껏 때렸으니 선배에게 들킬 염려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당장 오늘 밤이 걱정이었다. 그 영악한 맹수는 틀림없이 사채 이자를 붙여서 복수할 것이다. 그 생각에 사로잡히자 수업에 집중이 안 됐다. 급기야 은호는 오전수업 하나를 제치고 배 작가를 찾아갔다. 그는 시나리오과 복학생으로 8년째 졸업할 생각을 않는 화상에 가난뱅이였다. 왕따로도 유명했지만 정체 모를 자신감으로 입이 늘 살아있었다. 은호는 냉정한 조언이 필요할 때 가끔 그를 찾는다.

  "심장마비로 고이 보내드려. 냉방에 가둬놓고 사흘 정도 방치하면 돼. 입을 테이프로 잘 감아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

  은호는 주먹을 꾹 쥐고 배 작가를 바라봤다. 상황을 겹겹으로 감싸 최대한 돌려 말했는데도 저 인간은 모든 것을 잘도 꿰뚫는다. 그것도 생라면을 꾸득꾸득 씹어 먹으면서.

  "넌 인마 경원이가 로또야. 귀족 놈이 그렇게 안달하는데 답이 안 나와? 이럴 땐 콱 임신부터 하고 보는 거란다. 일단 그 집으로 입성한 후에 나 좀 정부(情夫)로 써주면 안 되겠냐?"

  은호는 불편한 속내를 감추고 적당히 맞장구쳤다. 핸드폰이 정오를 알리자 마음이 바빠졌다.

  다급히 집으로 달려가 보니, 개는 침대 위에 도도하게 엎드려 있었다. 은호는 점심용 초코바를 입에 문 채 고민에 빠졌다. 녀석을 한강에 버리고 올까 생각해봤다. 그러나 선배의 엄마가 개를 없앴을 때 선배는 직장에 휴직서까지 쓰고 놈을 찾아 헤맸다. 시골로 쫓겨났던 개는 결국 보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선배는 그 길로 개를 데리고 독립했다. 역시 배 작가가 현명하다. 평화로운 심장마비가 최선이다. 은호는 서랍에서 장갑을 꺼내 꼈다. 그리고 그 위로 고무장갑을 꼈다. 이 정도면 이빨이 박혀도 큰 상처는 입지 않을 것이다. 개의 곁으로 다가가니 놈은 경멸 섞인 시선으로 무심한 척 연기했다. 은호의 손에 잡힌 후에야 격렬히 저항했지만 이미 늦었다. 은호는 놈을 재빠르게 큰 비닐봉투에 넣어 묶었다. 그리고 그대로 냉장실에 집어넣었다. 며칠째 굶주린 냉장고는 속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소리가 너무 요란해 문을 열어보니 놈이 비닐을 갈기갈기 찢은 후에 냉장고의 내부를 물어뜯고 있었다. 문을 빨리 열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도대체 뜯겨나간 냉장고 내부를 선배에게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은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집을 빠져나와 오후의 일터로 향했다.

  "은호씨가 올해의 호빵 판매왕입니다! 특판을 너무 잘해서, 본사 포상으로 뽀나쓰 삼만 원! 지점장 뽀나쓰도 기대하세요?"

  지점장이 또 시작이다. 마트 일은 그나마 할만 했는데, 저치 때문에 이젠 이 짓도 고역이다.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다. 휴학을 밥 먹듯 해대면 배 작가 꼴이 날 것이다. 내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졸업을 해야 한다. 지점장은 은호만 보면 마트의 자랑거리니 매출이 올랐다느니 소란을 피운다. 하지만 봉급은 늘 제자리다. 그의 변태행각을 알아차린 후부터 은호는 이곳을 탈출하고 싶어 병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사람들 몰래 생활지의 구인란을 읽기에 여념이 없었다. 전전긍긍하던 은호의 눈에 시급 10만 원짜리 통역 아르바이트가 번쩍 들어왔다.

  '영어기초수준, 키 167㎝ 이상 몸무게 50㎏ 미만 참신한 용모의 여성만 연락 바람.'

  은호는 빈 휴게실로 뛰어들어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통화를 마친 은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광고주는 유명 레스토랑 사장이었다. 가게에 국빈급 손님이 많아서 참한 여직원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은호는 내일 오후로 면접 약속을 잡은 후 다시 판매대로 나왔다. 평소에도 잘 흐르지 않는 마트의 시간이 이날따라 갱엿처럼 눌어붙어 꼼짝도 않으려 했다.

  마침내 오후 다섯 시, 호빵을 다 팔고 나니 지점장이 본사에서 나온 보너스 봉투를 내밀었다. 그러더니 탈의실 앞까지 졸졸 따라와 옆에 붙은 남자 탈의실로 들어갔다. 몇 개월째 저랬는데도 은호는 이상한 점을 최근에야 발견했다. 봉투를 열어보니 그가 추가로 주겠다던 보너스는 한 푼도 없었다.

  강남이다. 도저히 내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은호는 반드시 이 일을 따내야 한다. 그녀는 광고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면접을 지금 당장 보고 싶다고 하니 문제없다는 식이다. 그런데 레스토랑이 아닌 갤러리아 백화점 건너편에 있는 승용차 안에서 면접을 본단다. 낌새가 수상하지만 섣불리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시급 10만 원짜리 일이 증발될까 봐 몹시 두려웠다. 은호는 곧바로 114에 전화를 걸어 레스토랑 이름을 댔다. 위치를 알아내 가게로 직접 찾아갈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런 상호는 서울에 없다고, 114 직원이 낭랑한 음성으로 안내했다. 맥이 빠졌다. 마트를 그만둘 수 있다는 희망과 그녀만의 작은 셋방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상호를 잘못 인쇄할 가능성도 있잖은가. 은호는 용기를 내 승용차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러자 호리호리한 남성이 차에서 내렸다. 평범한 인상이었다. 남자는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더니 자신은 운전석으로 올라탔다. 은호는 밖에 선 채로 운전석의 남자와 그 옆의 여성을 살폈다. 둘 다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저희 이상한 사람들 아니에요. 차에 타세요. 내키지 않으면 그냥 돌아가시구요."

  은호는 여자의 부드러운 음성이 조작된 것이 아니길 빌며 차에 올랐다.

  "저희랑 일해서 손해 본 사람은 지금까지 한 명도 없어요. 저도 지금 가게 하나 갖고 있구요. 눈치껏 하면 되니까 긴장 않으셔도 돼요. 은호씨는 스페셜까지는 아니더라도 에이급은 받을 수 있겠네요. 일 년 정도만 해도 유학비가 빠지고도 남을 겁니다. 어때요, 오늘 현장을 한 번 보실래요?"

  잠시 후, 어두워진 길가에 흰색 벤이 나타났다. 그랬더니 아가씨들이 흰불나방처럼 모여들어 벤을 가득 채웠다. 은호와 보조석의 여성도 옮겨 탔다. 벤의 운전자는 인상이 험악했다. 차량은 압구정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그 일대를 맴돌았다. 나방들이 타고 내리고를 반복했다. 좀 못났다 싶은 여자 한 명은 들어가는 술집마다 퇴짜를 맞고 되돌아오곤 했다. 깡마르고 잘 놀게 생긴 여성이 가장 인기 있었다. 은호는 그제야 차량의 정체를 완전히 이해했다. 호흡이 가빠지면서 얼굴에 열이 올랐다. 고급 술집을 전전하던 벤이 다시 백화점 앞으로 나와 정차하자 귀엽게 생긴 소녀가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이내 요란한 손짓으로 메이크업을 시작했다. 보조석의 여자가 그 아이를 두고 스페셜급이라고 했다. 아무리 봐도 중학생 같았으나 본인은 대학생이란다. 일본 손님을 상대하는 호텔용 아가씨라고 못생긴 여자가 설명했다. 화장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소녀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여전히 중학생으로 보였다. 그녀의 고객이 마포의 호텔에 있다고 하니 벤은 그곳까지 달려갔다. 아이가 호텔 안으로 사라지자, 차 안에는 네 사람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담담하려 애쓰는 은호에게 못생긴 여자가 딸기맛 우유를 개봉해 내밀었다. 은호는 한 모금 마셨다. 액체가 잘 삼켜지지 않아 목구멍 중간에 걸린 기분이 들었다. 은호는 지하철 역에 차를 세워달라고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그러자 불길한 기운이 고개를 쳐들어 은호를 바라봤다. 운전석의 남자가 곧장 옆자리 여자와 사인을 주고받았다. 한참을 그러더니 지하철역이 아닌 대로 갓길에 그녀를 내뱉었다. 차가 출발하여 멀어진 것을 확인한 후, 은호는 다급히 목구멍에 걸려 있던 우유를 토해냈다. 그제야 코와 입에서 딸기 향과 단내가 느껴졌다.

  녹초가 되어 동네로 들어서는 길. 모퉁이 약국간판에 있는 십자가에 불이 들어왔다. 늙은 여자약사는 텔레비전을 보며 웃고 있었다. 가로등을 지나쳐 집 앞에 다다르니 선배에게서 문자가 날아들었다.

  '애인이랑 오랜만에 심야영화 보러 간다. 밥상 못 치우고 나왔어. 피곤할 테니 그대로 두고 먼저 자렴.'

  집 안으로 들어서니 앉은뱅이 밥상이 통로를 온통 막고 있었다. 은호는 상을 거둔 후 방바닥을 닦았다. 바닥에 얼룩져 있던 개의 오줌과 여자 둘의 머리카락이 걸레 세 개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온수가 나오는 걸 보니 선배의 애인이 이곳으로 다시 올 모양이다. 더운 공기를 싫어하는 선배는 동장군이나 애인이 방문할 때만 보일러를 트는 특이한 여자다.

  오랜만에 온수목욕을 마친 은호는 선배가 사준 내의를 꺼내 입었다. 밝은색 내의는 어릴 때 입던 빨간 내복을 무색게 할 만큼 고왔다. 촘촘한 누빔에 실크 레이스라니, 요즘 사람들은 내의를 입지 않는다는데 그래도 내복은 저 홀로 열심히 진화하고 있었나 보다. 은호는 전등도 끄지 않은 채 뜨끈한 방에 누워 깜박 잠이 들었다. 그녀는 꿈속에서도 파김치가 되어 쓰러져 자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일어나보니 선배 커플이 좁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런데 남자가 선배의 잠든 젖가슴을 주무르며 은호를 유심히 내려다봤다. 벌겋게 달궈진 남자의 이마, 그 위에 끙끙대며 맺혀있던 굵은 땀방울…… 은호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얼마 전에 겪었던 불쾌한 일이 꿈속에서 자꾸만 반복되고 있었다.

  "악!"

  노리개가 깨어나기만을 벼르던 맹수가 오른쪽 종아리를 공격했다. 방 안이 환하니 이놈이 낮 코스와 혼동한 모양이다. 크림색 내의 위로 피가 스몄다. 피를 보니 은호의 눈에 날이 섰다. 그녀는 방문을 사납게 열고 나가 김장용 밀폐통을 가져왔다.

  삽시간에 통 안에 갇힌 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투명한 케이스 바깥에서 하찮은 인간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은호는 통에 든 개를 냉장실에 처넣었다.

  선배가 이 시간까지 외박하는 건 처음이다. 전화를 해봐야 할까 관두는 것이 나을까. 혹시 결혼 계획이라도 생긴 걸까. 그녀는 캄캄한 방에 앉아, 떠나려는 공간을 붙드는 사람처럼 바닥에 붙인 손바닥에 힘을 모았다. 그리고 전화기를 하염없이 응시했다.

  문득, 방문을 열고 나갔다. 가로등 불빛이 현관문을 뚫고 들어와 좁은 통로에서 차렷 자세로 누워 있었다. 은호는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통 안에서 맹수가 얌전히 엎드려 있었다. 잔뜩 웅크린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손끝으로 통을 툭툭 건드렸다. 반응이 없다. 이번에는 콩콩 두드렸다. 그랬더니 개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어 케이스 앞으로 얼굴을 밀착시켰다. 은호는 앉은 채로 나자빠졌다.

  놈은 아직 살아 있었다. 당황한 은호는 냉장고에서 통을 꺼내 방으로 가져갔다. 다급히 뚜껑을 여니 미동 없던 개가 그제야 오들오들 떨었다. 쉽게 일어나지는 못했다. 은호는 벽에 바싹 붙어서 맹수의 부활을 목격했다. 온몸이 백지장처럼 하얗다. 표백제를 뒤집어쓴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백색이다. 일분 정도 경과하니 개는 천천히 일어나 통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방바닥에 배를 깔고 길게 누웠다. 시간이 지나자 개의 털에 살굿빛이 감돌았다. 그것이 평소의 흰색이다. 십 분쯤 지났을까. 개는 원래대로 돌아와 적에게 송곳니를 드러냈다. 은호는 밀폐통을 들고 현관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리고 세입자들이 재활용품을 버리는 뒤란에 통을 집어던졌다. 그때 선배커플이 나란히 등장했다. 차가운 공기 속으로 소주 냄새가 퍼졌다.

  "일찍 일어났네? 넋 놓고 놀다 보니 동이 텄지 뭐니, 들어가자 춥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선배는 현관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욕실로 사라졌다. 그러는 동안 남자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은호를 바라봤다.

  "여기 잘 곳 없는 거 알잖아요. 집에 가서 주무세요."

  그는 취한 척 비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악몽에서 좀 나가줘요."

  남자가 당황해서 대꾸할 말을 찾고 있을 때, 은호는 그대로 문을 닫고 들어왔다.

  다음 날 오전, 배 작가와 경원이 크게 싸우고 있다는 소리에 은호는 서둘러 학교로 달려갔다. 수업이 없는 날이라서 근처 마트에서 풀타임으로 호빵을 팔던 중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학생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다. 은호가 강의실까지 뛰어갔을 때는 상황이 이미 종료돼 있었다. 그러나 예상을 뒤집고 엉망으로 망가진 쪽은 배 작가였다. 둘 다 건태처럼 생기긴 했지만 다부진 배 작가가 이토록 당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넌 인마 저 새끼랑 결혼해야 돼."

  바닥에 너부러진 배 작가가 기침을 뱉으며 비아냥거렸다. 경원은 풀이 죽은 채 말이 없었다.

  "말본새 보니까 많이 다치지도 않은 모양이네."

  "니가 장학금 타려고 한 교수랑 붙어먹었다고 했더니, 저 독한 놈이 나를 이 지경으로 패는 거야. 이토록 열정적으로 여펜네 편드는 놈은 노벨핫바지상을 줘야 돼! 나쁜 놈 같으니."

  "그러게 왜 헛소문을 퍼뜨려요? 내가 그렇게 비위가 좋은 줄 알아요?"

  "뭐야, 한 교수랑 안 잤어? 에라 한심한 인생아, 그러니까 지연이한테 장학금 뺏겼지. 걔는 확실히 잤을걸?"

  은호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여태 빠짐없이 받았으니 이런 사태는 염두에 둬 본 적도 없었다. 교내에 자신만큼 절박한 사람이 또 있었던가. 은호는 기억 속을 헤집어 지연의 일거수일투족을 허겁지겁 살려냈다. 좀처럼 말이 없는 그녀는 두 살 연하의 동기다. 정보를 캐내려 해도 지연의 무채색 표정뿐 더는 저장된 이미지가 없었다. 장학금이 이런 식으로 날아가는 것인가. 다리에 힘이 풀렸다. 휴대폰을 꺼내 뒤져보니 조교의 부재중 기록이 여러 개 찍혀 있었다.

  "엄마가 팥죽 먹으러 오래……. 동지잖아 오늘……."

  은호는 경원을 멍청하게 바라봤다. 피멍이 든 그의 양손이 야채호빵처럼 부풀고 있었다.

  경원의 집은 주택이라기보다는 갤러리나 미술관에 가까운 건축물이었다. 그런데 경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은호 혼자 아까부터 넓은 홀에서 방치되고 있다. 팥죽 때문에 점심도 거르고 왔건만 주방으로 안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은호는 전면이 유리로 된 창가에 서서 50평 남짓한 정원을 감상했다. 이곳의 겨울나무들은 잎을 다 털어내고도 윤이 반질거리는 뼈대를 한껏 과시하고 있었다. 봄여름가을에는 얼마나 멋질까? 환상에 젖을 무렵 등 뒤로 경원이 다가와 어깨를 건드렸다. 그는 어딘지 주눅이 들어 있었다. 곧이어 젊은 여자가 응접실로 나왔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미인이었다. 경원이 어머니라고 소개하자 은호는 놀랐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그녀는 은호의 인사를 중간에 자르고 제 할 말을 꺼냈다.

  "우리 애는 너무 순진해서 말을 잘 못 알아듣네요. 긴말 않을게요. 아들이 아가씨 얘기할 때부터 좀 알아봤는데 우린 가족이나 친구가 될 인연은 아닌 것 같아요. 알아듣죠?"

  은호는 자신이 능멸당하는 동안 고개를 가슴팍에 처박고 있는 경원에게 모욕감을 느꼈다. 팥죽 한 그릇 얻어먹으러 온 사람에게 웬 헛소리냐고 되받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숨을 고르던 은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경원은 그제야 머리를 들었다. 그는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 길. 하나님께서 해왕성의 냉기를 서울에다 퍼 나르기 시작했다. 얼음 파편이 섞인 바람 때문에 눈과 목구멍이 따가웠다. 그때 문자가 날아들었다.

  '미션 완수하면 나랑 맺은 계약 잊지 말 것. 귀여운 정부에게 용돈 빵빵하게 대줘야 함.'

  은호는 피식 웃어버렸다.

  '경원 엄니랑 한 판 하고 미션 엎어버림. 형, 이젠 제발 헛소리 멈추시길.'

  '이 땅의 시엄마들은 반만 년간 그래 왔음. 삼백 번만 인내하면 결혼에 골인할 것임.'

  '우아하게 사는 게 원래 이렇게 힘든 것임?'

  '예수, 간디, 체게바라, 이순신, 마이클 잭슨 이 중에 우아한 사람 있음? 훌륭한 사람들은 원래 다 번잡하게 사는 것임'

  '이순신은 우아함. 화살 맞은 김에, 나도 오늘 죽어버릴까.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면 안 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액정에 '배작가사이코'가 떴다. 은호는 목을 움츠리며 배터리를 분리시켰다. 강남에서 강북으로 이동하려니 갈 길이 멀다. 경원과 한바탕 씨름하느라 진이 빠졌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의 외도로 신경쇠약증을 앓고 있었다. 우울증 말기라서 위험한 상태라고 했다. 타인에게 모욕을 끼얹을 여유가 있는 정도면 아직 괜찮다고, 은호는 형편껏 위로했다.

  지하철 2호선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는 구간은 유독 혼잡하다. 쌀벌레처럼 우글거리는 이 모든 개체들에게 저마다의 번민이 있겠지. 은호의 머리에서 전신주 소리가 났다. 경원의 어머니는 50대 초반의 나이에도 처녀만큼 고왔다. 미모에 재력까지 갖춘 여자도 남편에게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완벽한 아내를 가졌는데도 가정에 안주하지 못하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도. 외대앞 역에 닿을 무렵 한 남자가 은호에게 뭔가 건네고 사라졌다. 여성전용 대출 서비스 광고지였다. 왜 남성전용 대출서비스는 없는 걸까. 종이를 구기며 은호가 생각했다. 은호에게는 이런 곳에서도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

  지하철 역을 벗어나 편의점으로 흘러든 은호는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동지라니까 두 끼 식사를 한꺼번에 해치우는 만행을 저지르기로 했다. 차가운 김밥을 베어 물며 은호는 배 작가를 생각했다. 그는 가끔 옳은 말을 한다. 예수 같은 성인들에 비하면 자신의 고민이란 그 얼마나 하찮고 시시한가. 은호는 라면국물을 남김없이 마셨다. 750원어치의 온기가 몸속에 퍼졌다가 금세 사라졌다.

  밖으로 나오니, 예수님의 아버지가 은호의 얼굴에 빙하폭포 같은 바람을 한 양동이 퍼부었다. 강남 모자(母子)로 부족해서 천국의 부자에게 연장전으로 당하게 생겼다. 영혼까지도 꽝꽝 얼어 산산이 부서질 것 같은 한파다.

  얼음칼을 든 바람 떼에게 십 분 넘게 얼굴을 베이고 나니 정신이 얼얼했다. 가방을 끌어안고 머리를 최대한 숙인 채 콧물에 침까지 흘리며 걷고 있으려니 누군가 그녀를 감싸 안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들어보니 약국 안이었다.

  "이런 날씨에 외투도 없이 돌아다니면 큰일 날 수 있어."

  예순쯤 됐을까, 백발인데 피부가 너무 깨끗해서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약사다. 그녀는 은호를 난롯가에 앉혔다. 그러더니 밥공기만 한 머그컵에 유자차를 타와 내밀었다. 은호는 그제야 자신이 외투도 없이 돌아다녔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트에서 급하게 나오느라 유니폼을 입은 채였다. 가뜩이나 세련된 경원의 어머니가 이런 자신을 어떻게 봤을까 생각하니 식도에서 뜨끔한 것이 올라왔다. 장학금을 놓친 것이 그토록 충격이었을까. 그렇게 충격 먹은 와중에 선뜻 경원의 초대에 응한 것은 무슨 심보였을까. 머그컵을 감싸 쥐니 낯선 온기가 손바닥 안으로 들어왔다. 은호는 소매에 콧물을 닦고 유자차를 한 모금 마셨다. 소파에 몸을 묻고 난로에 발을 갖다 대니 종아리까지 간질거렸다.

  1년 전 겨울, 은호는 그때도 외투 없이 이 길을 지나쳤다. 더는 학자금대출이 어렵다는 판정을 받은 날이었다. 한파를 뚫고 약국까지 들어선 은호는 수면제 세 통을 요구했었다. 약사는 별다른 질문 없이 수면제를 봉투에 담아주었다. 약값도 받지 않았다. 그대로 향한 곳은 문고리가 항시 풀려 있는 배작가의 고시원이었다. 그는 이틀 후에나 서울로 올라올 예정이었다. 은호는 침대에 앉아서 수면제 두 통을 모두 먹었다. 배가 불러 더는 먹을 수 없었다. 고시원 침대는 반지하에서 몸을 뉘던 공간만큼이나 비좁았다. 눈을 감으니 졸음이 금방 찾아왔다. 맹수가 없는 곳에서 편히 잠들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잠시 후면 부모님이 있는 곳으로 떠날 터였다. 엄마의 반응은 안 봐도 빤했다. '어이구 이년아'를 연발하며 등을 후려칠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기억하실까?'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떠보니 하늘이 하얗다.

  "잘 잤냐? 이거 어디서 났냐?"

  배 작가가 수면제 한 알을 앞니로 갉아먹으며 물었다. 시선은 간호사의 엉덩이에 있었다.

  "이거 독일산 비타민이래. 비싼 거라는데?"

  며칠 후 은호는 배 작가의 지갑을 훔쳐서 약국으로 찾아갔다. 약사는 그때도 지금처럼 난롯가의 소파를 내어주며 유자차를 타왔다. 은호가 지갑을 열며 약값을 묻자 약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은호의 소파 앞으로 스툴을 가져와 앉아 천천히 목도리를 풀며 물었다.

  "죽어보니 어때요?"

  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약사의 목에 있던 큰 흉터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흉한 무늬가 가느다란 목을 둥글게 감고 있었다.

  약사는 작년과 똑같이 행동했다. 난롯가에 아무도 없다는 양 텔레비전을 보며 혼자 웃었다. 그리고 간간이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감기약을 팔았다. 은호는 마치 작년 겨울이 올해로 뛰어넘어와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가슴이 답답해진 은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무서운 기세로 집으로 달려갔다. 뒤란으로 가보니 밀폐통이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통을 주워 들고 곧장 방으로 향했다. 개가 상황을 살피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녀는 맨손으로 개를 낚아챘다. 맹수는 그녀의 손과 팔뚝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었다. 그러나 결국 통 속에 갇혔다. 은호는 통을 냉동실 안에 처넣으며 소리쳤다.

  "둘 중 하나는 이곳을 떠나는 거야!"

  개는 이전과 다르게 사력을 다해 몸부림쳤다. 놈이 괴력을 발휘하니 냉장고가 흔들렸다. 은호는 앙상한 두 손으로 냉장고를 꽉 붙들었다. 창백한 손등 위로 신선한 피가 흘렀다. 십 분쯤 지나자 냉장고는 간헐적인 발작마저 뚝 그쳤다.

  사방이 고요했다.

  선배가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기까지 최소한 네 시간이 남았다. 혈관 속의 피가 얼고도 남을 시간이다. 은호는 라디오를 크게 켜놓고 대청소를 시작했다. 종말을 준비하는 결벽증 환자처럼 장장 네 시간 동안 집안의 바닥과 벽면과 천장까지 수세미로 박박 닦았다. 그렇게 긴 청소를 다 마친 후에야 냉장고 앞에 다시 섰다. 이제 놈의 시체를 잘 녹여서 침대 위에 놔두면 된다. 오늘부로 이 개는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거다. 냉동실 문에 손을 갖다 대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젊은 아버지와 주름진 엄마……백발의 약사……그리고 구두쇠 외삼촌과 수전노 외숙모, 둔하고 순진한 선배, 음흉한 선배 애인, 사이코 배 작가, 천치 같은 경원, 재수 없는 경원의 엄마, 마트의 변태 그리고……한 마리의 괴물……이윽고 냉동실 문을 연 순간, 은호의 입에서 침이 주룩 흘렀다.

  개는 살아 있었다.

  로봇처럼 부자연스러웠지만 냉장고 문을 여는 소리에 고개를 희미하게 움직였다. 은호는 기겁했다. 얼이 빠져, 정신없이 손톱을 물어뜯다가 문득 방으로 달려갔다. 일단 보일러를 손수 켜 물을 데웠다. 그리고 통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통에서 개를 꺼내 변기뚜껑 위에 놓으니 놈은 동상처럼 잠자코 있었다. 개의 몸에 손을 대보았다. 이토록 차가운 짐승이 살아 있다니 너무나 신기했다. 온수를 삼 분쯤 뿌렸을까, 개가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파랗게 질려 있던 개의 몸에 혈색이 연하게 돌았다.

  온수 마사지를 계속 해주니 개가 조금씩 기운을 내 미세하게 으르렁거렸다. 통 안쪽에 맹수의 몸부림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었다. 두꺼운 플라스틱이 벗겨지고 깨져 수많은 틈 사이로 피가 고여 얼어 있었다. 개의 발톱이 많이 상했을 텐데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십 분 정도 지나자 개가 제법 움직였다. 아직 짖을 힘은 없는 모양이었다. 은호는 물을 잠그고 개를 침대로 옮겨 드라이기로 털을 말리기 시작했다. 양팔이 저리도록 한참 말리고 나니 개가 드디어 컹컹 짖었다. 그 순간 현관에서 열쇠소리가 들렸다. 곧 방 안으로 들어선 선배가 푸들을 귀여워 죽겠다는 듯 껴안았다. 영특한 푸들은 주인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은호를 공격해 종아리에 새로운 생채기를 만들었다. 그녀는 청바지 안쪽으로 피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은호는 가방을 들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현관에서 선배의 애인과 마주쳤지만 그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새카만 공원을 가로질러 학교로 올라갔다. 아무도 없는 동아리방은 북극처럼 고요했다. 은호는 그곳을 멀겋게 바라보았다. 알을 갓 깨고 나온 새끼괴물처럼 천연덕스럽게 방 안을 구석구석 살폈다. 그러다 자신의 팔과 손등에 낭자한 상처들을 응시했다. 이토록 붉은 꽃을 깊게 피워낸 이는 누굴까, 거친 꽃술에 혀를 대보니 달큼하고 비렸다. 새끼괴물은 입맛을 다시며 널린 쓰레기를 줍고 쓸기 시작했다. 바닥도 수차례 닦았다. 벽에 어지럽게 붙어 있던 전단지를 모두 떼어 내니 흰 벽이 드러났다.

  은호는 새하얀 냉방에 알몸으로 누웠다. 바닥이 지옥처럼 차가웠다. 그러나 창 밖에 커다란 달이 걸려 있어 배시시 웃음이 났다. 덜덜 떨며 가만 생각해보니 개의 냉장고는 은호보다 한 뼘 정도 키가 작았다. 그녀는 옆으로 누워 허리를 조금 굽혔다. 빙판에 옆구리가 닿으니 새로운 고통이 쳐들어왔다. 그러나 차츰 익숙해졌다. 딱딱거리던 치아도 잠잠해졌다. 실제로 잠잠해졌는지 의식이 몽롱해진 틈을 타서 그렇게 느낀 것인지 불분명했지만 어쨌든 두려워했던 만큼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간격을 두고 울어대던 전화벨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뚝 그쳤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 시간? 겨우 오 분이 지난 건 아니겠지. 이러고 있으려니 냉장고 안은 참으로 무심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헐벗은 그녀의 몸 위로 달빛이 계속 흘러내렸다. 숨을 쉴 때마다 빙하색 수증기가 허공으로 이를 악물고 퍼져 나갔다. 살갗의 허물에는 정체 모를 물기가 수북이 묻어 얼음처럼 반짝였다. 은호는 공중목욕탕에 가서 몸을 푹 불려 때를 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띠링' 전화기에서 달빛과 잘 어울리는 방울 소리가 났다. 선배가 아닌 배작가였다.

  '내일부터 헛소리 안 할 생각이다.'

  쿡, 웃음이 나오는데 아래턱이 덜덜 떨렸다. 웃음까지도 낡은 수레처럼 덜덜거리는 집시의 시간. 새파란 입술의 젊은 집시가 휘파람을 불어보려 애쓰며 옷을 주섬주섬 챙겼다. 해진 그녀의 작은 팬티가 쇳조각처럼 차가웠다. 은호는 옷을 다 입은 후에 동아리방 구석에 있던 버너를 켰다. 버너 위 석쇠에는 까맣게 탄 고기 찌꺼기가 붙어 있었다. 쓰레기통을 버너 옆으로 가져와 그 속의 종이들을 석쇠에 끼워 구웠더니 금방 동났다.

  잔뜩 곱은 손으로 이번에는 가방을 털었다. 땔감으로 쓸 만한 공책과 수첩이 두 권 나왔다. 그리고 두 개의 얇은 봉투가 바닥으로 투둑 떨어졌다. 몇 달 전부터 부적처럼 간직해온 것들이다. 은호는 석쇠를 열어 그 위에 자퇴서를 먼저 올렸다. 봉투는 삼 초도 안 돼 까만 재가 되었다. 이어서 두 번째 봉투가 화형대로 올라갔다. 자퇴서보다 한 겹 정도 더 두꺼운 유서를 마저 굽고 나니, 손가락이 녹기 시작하는지 간질거리며 아렸다. 은호는 허공의 잿가루에 서리를 뿌려대는 창밖의 둥근달을 한참 올려다봤다. 좀 전까지만 해도 날선 은색이었던 달이 조금씩 노랗게 익고 있었다. <끝>

  

<당선소감>

   "이제 겨우 첫발… 열심히 이 길 걷겠다"

  어릴 때부터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이 너무나 좋았다. 혼자 쓰고 지우고 했으니 딱히 칭찬받는 일도 없었건만 그저 좋고 황홀했다. 그래서일까. 학교에 가기도 전부터 막연히 나는 작가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작가는 잔재주나 열망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나는 한참 동안 문학의 언저리를 방황했다. 입으로는 문학이 아니면 안 된다면서도, 몸은 항상 일터에 있었다. 문학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날이 늘어만 갔고, 그래서 안타까웠다. 이제 겨우 첫발을 내밀었을 뿐이다. 갈 길이 멀기만 하다. 문학 하나에만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당분간 계속 죄인처럼 조심스럽게 이 길을 걸을 듯하다. 원고지 속에서 빛을 발할 수 있을 때까지, 정말 열심히 가야겠다.

  좋은 끈기를 물려주신 목포 부모님, 날마다 사랑을 퍼주시는 시어머니, 삐딱한 내 심장을 언제라도 뛰게 만드는, 내가 목격한 예술가 중 가장 열정적이고 아름다운 시아버지, 든든한 도련님과 형제들, 선한 지인들, 그리고 우주에서 제일 중요한 이한얼 감독에게 이 영광을 모두 드린다. 많이 부족한 작품에서 가능성을 읽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큰 감사를 드린다. 지금도 열병을 앓고 있을 동료 문청들에게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힘 잃지 말고 계속 쓰시라고 응원하고 싶다. 당신들의 저린 마음을 보상하기 위해서라도 나 또한 쉼 없이 쓰리라 약속한다.


  ● 1977년 서울 출생

  ● 목포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졸업

  

  <심사평>

  "거침없는 문장으로 세태적 일상 그려

  최종심에서는 '란초아로요치코', '팩토리 걸', '묵묵히 지켜보기', '범우주적으로 위험한 남자에 대한 오해와 진실', '제임스 파커는 이렇게 말했다', '12번째 아우의 착한 삶', '집시, 달을 굽다' 등 7편이 검토 대상이 되었다. 각기 제목만큼이나 다양한 세계를 보여주었다. 더욱이 모두가 나름대로 독창적인 감수성을 발휘하여 새로운 스타일을 얻고자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문학적 개성이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 속에서 길어내야 하는 것이며, 낯선 인상을 주는 외적인 것에 전적으로 기대려 하는 건 위험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까지 남은 두 작품 중에서 '란초아로요치코'는 '문'과 '나무'와 같이 상징성을 지닌 소재들을 통해 글쓴이의 감성적인 사유를 섬세하게 펼쳐나가고 있다. 그러나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 사유가 새로워지거나 깊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일상적인 것들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고, 그로 인해 애초에 글쓴이가 포착하고자 한 삶의 풍경이 제대로 그려지지 못하는 결과에 이르렀다.

  이런 아쉬움이 당선작으로 뽑힌 '집시, 달을 굽다'의 경우에 예외가 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자연스럽고 거침없는 문장을 바탕으로 하여, 세태적인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편 그 밑에 가라앉아 있는 것들을 헤집어 놓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달리 말해, 인간 내면에 도사린 삶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감과 세속적인 리얼리티를 적절히 결합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아직은 완성도가 높다기보다 장차 발전의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높이 샀다는 것도 언급해두고자 한다. 당선자의 더욱 가열찬 정진을 바라 마지않는다.

심사위원 : 최수철, 은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