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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거짓말 연습 / 백수린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여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도착한 지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여름에 집착하는지 금세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꽃이 피고 지기는 했지만 날은 오랫동안 습하고 추웠다. 겨울이 길었던 만큼 여름이 다가오는 속도는 더뎠다. 책상 위에 놓인 우유나 떠먹는 요구르트 같은 것들이 쉽게 부패해갔다. 냉장고가 없는 나는 이틀에 한 번씩 장을 볼 수밖에 없었다. 기숙사에는 대부분 나처럼 곧 떠날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방주인과 말을 섞지 않아도 떠날 사람과 떠나지 않을 사람은 쉽게 구분되었다. 떠날 사람들은 대부분 냉장고를 구입하지 않았다. 대신 대형마트 로고가 찍힌 커다란 장바구니에 식료품들을 담아 매일 저녁 창문 밖으로 매달아 두었다. 해질녘, 창밖에서 바라보면 건물의 창마다 계란이며 버터 따위가 담긴 색색의 장바구니들이 창틈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간혹, 장바구니가 달려 있지 않은 창문은 빈 방이거나 장기투숙자의 방이었다. 냉장고가 없는 이들에게 여름은 불편한 계절이었다. 부패하지 않을 음식들을 골라 사서 재빨리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여름을 기다렸다. 유럽의 여름은, 내가 자라온 곳의 여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책상에 둔 요구르트가 이틀 만에 변질되기 시작했을 때, 내 방에서는 바퀴벌레가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 기숙사에서 가장 싼 K동에 바퀴가 나온다는 것이 그렇게 기이한 일은 아니었는지, 이야기를 들은 프런트의 직원은 내게 아무 말 없이 바퀴 약을 한 봉지 줄 뿐이었다. 그렇지만 바퀴는 아무리 약을 뿌려도 계속 어디선가 나타났고, 나는 밤마다 온몸이 가려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 시계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한국의 시간을 가늠해보는 일이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한국과의 시차는 일곱 시간. 내가 잠들어 있는 시간, 엄마나 그는 하루를 분주히 시작한다는 것이 어쩐지 실감나지 않았다.

  어학연수를 위해 프랑스에 온 지도 여러 달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배운 불어 실력으로는 유학 생활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는 유학원의 조언에 따른 결정이었다. 유학원을 통해 구한 기숙사에는 한국인이 몇몇 있었다. 그렇지만 단기간에 불어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한국인들과 어울리지 않아야 한다는 유학 상담자의 충고에 따라 나는 가능한 한 그 적은 수의 한국인들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불어 실력의 향상을 위해서라면 외국인들과라도 친하게 지냈어야 했는데 딱히 그러지도 않았다. 나는 가능하면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은 채 고요히 지내고 싶었다. 사실, 결혼과 동시에 그만둔 미술을 다시 해보고 싶다며 유학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그런 고요함이 필요해서였다. 더구나 단 4개월만 체류하는 이곳에서 나는 그 무엇과도 깊은 관계를 맺을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파업 때문에 체류 기간은 예상보다 더 늘어날 것만 같았다. 파업은 점점 더 번져갔다. 처음에는 택시들의 파업이더니 그 다음에는 식품점 계산원들의 파업이 있었다. 어떤 날은 한참 동안 버스를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대중교통 수단 노조의 파업이었다. 라디오로 뉴스를 듣고 이해하는 데 아직 미숙한 학생들에게 어학원의 선생은 전국적으로 파업이 왜 일어나고 있는지를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학생들은 파업에 대해 나라 수만큼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파업이 언제 끝날까? 나는 궁금했지만 간혹 만나는 프랑스 사람들은 별로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이 곧 끝나겠지, 따위의 애매모호한 답변을 줄 뿐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그 파업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이었다. 전국의 우체국도 파업에 동참했다. 그래서 내가 진학할 대학에서 보낸 합격 서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내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시간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남아돌았다.

  여름 휴가는 어디로 갑니까?

  내가 다니는 어학원의 선생이 물었다. 고국의 발음과 억양을 아직 다 버리지 못한 반 사람들은 대부분 떠난다고 했다. 더러는 일상이 있는 고국으로, 몇몇은 진학할 학교가 있는 다른 도시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입니까? 선생은 언제나 또박또박, 그리고 느린 속도로 이야기를 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말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답게 그의 문장은 정확하고 간결했다. 누군가가 대답했다. 아니요, 나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곳에서의 삶에 대체로 만족했다. 단조로운 일상이 마음에 들었다. 르블랑 부인의 집을 방문하는 날을 제외하면 나는 주로 구립 도서관의 구석 자리에 앉아 어학원 선생이 내준 숙제를 했다. 르블랑 부인은 어학원에서 내게 주선해준 대화 상대였다. 내가 등록한 어학원은 학생들의 어학 실력 향상을 위해 지원자들에 한하여 대화 상대를 연결시켜 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대화 상대자로 자원하는 프랑스인들은 대부분 말벗이 필요한 노인들이었다. 르블랑 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식들이 모두 출가하고 남편과 사별한 지 오 년 가까이 되어가는 르블랑 부인은 내가 찾아갈 때마다 커다란 거실 한복판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큰 성공을 거둔 미국 드라마라든가 퀴즈쇼 같은 것들을. 내가 찾아가면 부인은 그제야 티브이를 끄고 나와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대화 상대가 되지 못했다. 르블랑 부인은 가는귀를 먹었고, 나는 어법에 맞지 않는 말들을 더듬더듬 할 뿐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서로 뭐라고? 뭐라고요? 만 주고받은 채 정해진 시간을 채웠다. 약속한 기간 동안 지원자가 먼저 그만둬서는 안 된다는 강제 조항이 없었다면 나는 일찌감치 르블랑 부인 만나는 일을 포기했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숙제를 마치고 기숙사로 되돌아왔을 때, 프런트의 직원이 나를 불러 세웠다. 직원의 말은 너무 빨라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 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해야만 했고 그러다 보니 듣는 나도 말하는 그녀도 슬슬 짜증이 났다. 그녀는 말없이 내 앞에 서류를 밀어 놓았다. 다음 학기에도 기숙사에 있으려면 신청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말을 하던 거였나. 나는 서류를 보고서야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다음 학기에는 여기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려다가 관두고 서류를 챙겨 방으로 올라갔다. 역시 예상대로 우편함에는 대학의 입학 허가서가 들어 있지 않았다.

  3층으로 올라서자 기숙사 복도를 따라 간장이 들어간 중국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주로 동양인들에게 배정되는 K동 기숙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중국 학생들이었다. 중국 학생들은 언제나 여럿이 모여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큰소리로 중국어를 주고받는 이들이 상을 차리고, 음식을 볶는 모습을 구경했다. 오랜만에 간장 냄새를 맡으니 식욕이 돌았다.

  그는 간장으로 조린 음식은 무엇이든 좋아했다. 신혼 때, 나는 요리책을 펴놓고 매일같이 감자조림, 연근조림, 우엉조림 같은 것들을 만들며 부엌을 서성였다. 때로는 무를 큼직하게 썰어 넣고 고등어를 조리거나 홍차를 살짝 우려 넣고 소고기 장조림을 만들었다. 내가 특별히 요리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는데도 그는 조림 음식만 있으면 밥을 맛있게 먹었다. 어려서부터 입이 짧은 편이었던 나조차 그가 밥 먹는 모습을 보면 식욕이 났다. 그런 그를 위해 각종 요리책들을 뒤지며 조림 레시피들을 스크랩하기도 했었던 날들. 그는 지금도 어느 식당에 들어가 앉아 고등어조림을 시켜 먹을까. 나는 쓸데없는 상념이 찾아들기 전에 서둘러 복도를 지나쳐 내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어학원 종강을 일주일 앞두고 선생은 학기를 마치면 우리가 보게 될 시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시험을 통과한 학생들에게는 한 달 후 자격증이 발송될 것이라며 배송받을 주소를 적어 내라고도 했다. 아침에 나올 때도 살폈지만 우편함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내가 한 달 후 어디에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떤 주소를 적어내야 하는지 망설여졌다. 너는 이제 역사 공부를 하러 빠리로 가니? 내 옆에 앉아 종종 짝 활동을 함께 하던 이탈리아인이 내게 물어 보았다. 나는 그제야 어학원 수업 중에 역사 공부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나는 옆방의 스테판에게는 영화를 공부할 거라고 말했고 버스 옆자리에 앉았던 노인에게는 향수를 공부하러 왔노라 말하기도 했다.

  이곳에 온 지 몇 달 만에 깨닫게 된 사실은 떠날 것을 아는 사람들은 상대에게 모든 것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떠날 사람들은 보여줄 수 있는 만큼, 아니 보여줘도 되는 만큼, 아니 보여주고 싶은 만큼만을 드러낸 채로 제한된 삶을 살았다.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온 이래 나에게는 거짓말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거짓말이라고 해봐야 대단한 것들은 결코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저 새로 배운 단어를 활용해 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좋아하는 색은 무엇입니까? 빨강입니다. 파랑입니다. 노랑입니다. 상대에게는 결코 해도 되지 않고, 관심도 불러일으키지 않을 사소한 말들. 내 아버지의 직업은 의사입니다. 내 어머니의 직업은 교사입니다, 따위의 어학 교재 속의 문장들. 내게는 여동생이 있습니다. 여동생은 학생입니다. 상대가 결코 확인할 수 없는 거짓말들. 교재 속에서 찾아낸 판에 박힌 문장들로도 나는 사람들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이상의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없다는 점이 내게는 안심이었다.

  엄마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 사실, 거짓말은 엄마의 소통 방식이었다. 엄마의 거짓말은 내가 하는 것들과는 무언가가 달랐다. 거짓말에 생동감이 넘친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엄마는 언제나 거짓말을 했다. 이를테면 엄마는 누구와도 동향이 될 수 있었고,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과부가 되거나 이혼녀가 되거나, 미혼모가 되기도 했다. 나는 거짓말을 일삼는 엄마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와 나 사이에 솔직함이 존재한 순간은 기억 속에 없었다. 내가 떠나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왜 떠나느냐, 결혼생활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언제 돌아올 것이냐 따위의 질문을 엄마는 내게 퍼붓지 않았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아? 내 물음에 엄마는 답했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냐. 어쩐지 서운했다. 차라리 엄마가 내게 모든 것을 물었더라면, 그리고 다그쳤더라면 마음이 좀 더 편하지 않았을까. 엄마를 떠올리자 엄마에게 안부 전화를 너무 오랫동안 걸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사 월 이후, 나는 엄마에게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고 계속 생각했으면서도.

  예정대로 금요일 세 시에 나는 르블랑 부인을 찾았다. 우리의 의무적인 만남도 몇 회 더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부인은 변함없이 어두운 거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우리는 소파에 비스듬하게 마주 보고 앉아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새로운 일은 없니?

  곧 시험을 볼 것입니다.

  시험이라는 말에 르블랑 부인은 오, 시험? 공부는 많이 했니? 라고 물었다. 나는 계속되는 파업 때문에 다음 학기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괴롭다, 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복잡한 문장을 만들 재간이 내게는 없었다. 그래서 대신 짧게 물었다.

  파업은 언제 끝날 것입니까?

  뭐라고?

  언제 파업이 끝납니까?

  뭐라고?

  파업은 언제 끝납니까?



  한숨이 나왔다. 부인의 얼굴에도 약간의 짜증이 묻어났다. 다시 대화가 끊기자 르블랑 부인은 티브이를 켰다. 티브이나 같이 볼래? 나는 그만 일어나겠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쩐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시간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기로 마음을 고쳤다. 울긋불긋한 빛이 스크린을 타고 흘러넘쳤다. 귀가 잘 안 들리는 탓에 부인이 틀어 놓은 티브이의 음량은 거의 최대치에 가까웠다.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시끄러운, 그러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티브이 화면을 바라보다 보니 르블랑 부인에게 한국말로 크게 떠들어대고 싶은 충동이 갑자기 일었다. 사실은, 내가 이렇게 말이 없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당신은 나를 하나도 몰라요. 우리는 그동안 만나왔지만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그러나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퀴즈 프로그램의 끝을 알리는 로고송과 자막이 흘러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티브이 소리에 익숙해진 탓인지 집 밖으로 나서자 세상은 한층 더 조용하게 느껴졌다.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루이 14세의 동상 아래에는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한 곳을 바라보며 서성이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관광 안내소 근처의 꽃집에서 꽃다발을 사들고 광장을 가로질렀다. 머리카락을 잔뜩 세운 한 무리의 십대들은 흥겨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저 멀리 푸르비에르 언덕 위에는 대성당이 빛나고 있었다. 도시 어디에서든 눈에 띄는 성당은 이 도시의 자랑이었다. 푸르비에르에 한 번 가보렴. 르블랑 부인도 내게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는 아직 한 번도 그곳에 찾아가 본 적이 없었다. 아직 해가 다 지지 않은 여름밤이었다. 광장의 한쪽 코너에서 양 볼을 붉게 칠한 삐에로가 꼭두각시 인형을 가지고 인형극을 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무리 속으로 끼어 들어갔다. 쿵짝 쿵짝, 음악소리에 맞추어 인형들은 춤을 추고 있었다. 연기 탓인지 삐에로의 발음은 부정확해서 그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삐에로의 말에 따라 와아아, 손뼉을 치고 웃거나 아아아, 아쉽다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갑자기 꼭두각시 인형 하나가 내 앞까지 걸어 나왔다. 인형이 내게 무엇인가를 물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머뭇대자 사람들은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삐에로가 다시 한 번 복화술로 내게 물었다. 당신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일본에서요. 와, 아주 멀리서 온 손님이군요! 꼭두각시가 내 앞에서 탭댄스라도 추는 듯 경쾌하게 발을 굴렀다. 타닥타닥타닥. 사람들이 벗어 놓은 모자 위로 동전을 던졌다. 나도 동전을 던지려고 주머니를 뒤졌지만 동전은 찾아지지 않았다.

  주말에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

  뭐라고?

  주말에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

  아,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려야지. 너도 주일에 미사를 드리니? 세례는 받았고?

  네?

  세례는 받았냐고.

  ‘세례 받는다’가 무슨 뜻입니까?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불을 끄기만 하면 바퀴벌레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몸 위를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것만 같았다. 불을 켠 채로 누워 선잠을 자야만 했다. 잠결에도 화가 자꾸 치밀어 올랐다. 예정대로라면 열흘 후 이 도시를 떠날 것이었다. 그렇다면 바퀴벌레쯤이야 참아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입학 허가서는 여전히 오지 않았고, 언제까지 이곳에서 허가서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다가 말고 벌떡 일어나 방의 곳곳을 살폈다. 책상 밑에도 옷장 속에도 바퀴벌레는 보이지 않았다. 매트리스를 들어 올려야 할 것 같았지만 그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매트리스 밑 어딘가에서 바퀴벌레가 떼를 지어 기어 다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니 온몸이 참을 수 없게 가려웠다. 나는 기숙사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도시에는 이미 밤이 깊었고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하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기숙사 앞 벤치 쪽으로 터덜터덜 향했다. 들고 나온 휴대전화를 꼭 쥐었다. 전화기의 액정에는 음성 메시지의 도착을 알리는 표시가 며칠 전부터 깜박이고 있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음성 사서함에는 엄마의 여보세요, 소리만 두 번 남아 있었다. 아마 엄마는 외국인의 안내 멘트에 당황했을 것이다.

  나는 집 번호를 천천히 눌렀다. 여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엄마에게 일주일에 한 번쯤 전화를 했었다. 그렇지만 막상 전화를 걸어도 우리는 서로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우리 사이에는 일곱 시간의 시차보다 더 먼 거리가 놓여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 좁혀야 하는지 둘 다 알지 못했다. 엄마는 전화를 걸 때마다 내게 밥은 잘 먹고 지내냐, 같은 말 대신에 애인 삼을 만한 남자는 없냐, 라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벌써 여러 명 생겼노라고 대답했다. 어떤 남자들이야? 엄마의 목소리는 장난꾸러기 여동생처럼 한 톤 높아졌다. 나는 따라다니는 남자들에 대해 지어내어 엄마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야기 속에서는 부엌에서 몇 번 스쳤을 뿐인 옆방의 스테판도,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듣는 영국인 제이슨도 다 내 남자친구가 되었다. 나도 엄마에게 엄마의 애인과는 잘 만나고 있느냐고 물었다. 자못 진지한 말투로 엄마의 연애사에 조언해 주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 잘 지내냐는 질문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잘 지내라는 당부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과 이혼할지도 모른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엄마는 그와의 관계가 회복되고 있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다시 폴더를 닫았다. 액정의 불빛이 사그라져 사방에는 다시 어둠뿐이었다.

  당신의 동네에 원자력 발전소가 들어오려고 합니다. 당신은 찬성합니까, 반대합니까?

  당신은 기업의 고용주입니다. 당신의 직원들에게 며칠의 휴가를 주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까?

  회화 시험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진실을 말하느냐 아니냐가 아니었다. 관건은 유창성이었다. 내가 만들 수 있는 문장이 곧 나의 의견이 되었다. 그것은 때로 나의 신념에 위배되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애초부터 상관없었다. 날은 계속 더워져 유제품 같은 것을 사는 일이 점점 더 망설여졌다. 나는 건조 햄이나 과일, 빵과 잼처럼 실온에 두어도 되는 것들을 위주로 매일 조금씩 장을 봤다. 르블랑 부인과는 침묵의 순간이 더 길어졌고, 그래서 곤혹스러웠다. 그럴 때에도 우편함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파업은 끝날 듯, 끝이 나지 않았다. 타협은 자꾸만 결렬되었다. 택시들이 가로막고, 크게 경적을 울리던 벨꾸르 광장은 언뜻 보기에 한가로웠다. 그러나 여전히 버스들은 정상 운행을 하지 않았고 우체국에 뒤 이어 대학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행정실의 그 누구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프런트의 직원이 빨리 다음 학기 계약 여부를 말하라고 독촉을 해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무작정 학교가 있는 도시로 숙소를 옮겨볼까. 입학 허가서가 없이 나는 내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나는 골목 여기저기를 혼자서 많이 걸어 다녔다. 버스 파업 때문에 웬만한 거리는 걷는 편이 낫기도 했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디서 왔니, 왜 왔니, 무슨 일을 하니? 이곳에 온 이래로 내게 돌아오는 질문은 늘 비슷한 것들뿐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이국의 언어로 할 수 있는 말이 적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표현되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의 부스러기들이 언제나 내 안을 둥둥, 떠다녔다. 그것을 눈치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지칠 때까지 걷다가 멈춘 채 카페나 레스토랑 안에서 웃으며 이야기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있노라면 발아되지 못한 말의 씨앗들이 천천히 내 안에서 번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의 여름 같지 않게 비가 내리는 날도 많았다. 다들 이상기후라고 말했다. 가끔 쏟아지는 비를 보며 한국의 여름을 떠올렸다. 비가 내릴 때마다 사람들은 이게 무슨 여름이냐고 투덜거렸다. 빵집이나 치즈가게 주인들이 휴가를 떠난다며 가게 문을 닫기 시작했다. 도시에는 사람들의 수가 확연히 줄었다. 간혹 구시가지로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으며 지나가기도 했다. 어쩐 일인지 한국인은 눈에 띄지 않았다. 관광객들은 대부분 푸르비에르 성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이 마치 길 잃은 이들을 위한 지표라도 되는 것처럼 사람들은 성당을 기점 삼아 가야 할 길을 정해 뿔뿔이 흩어졌다.

  르블랑 부인과의 마지막 날, 나는 작별의 선물로 초콜릿 케이크를 하나 샀다. 부인 역시 마찬가지 의미였는지 파이를 구워 놓고 있었다. 우리는 식탁 위에 그 두 가지를 모두 펼쳐 놓고 처음으로 서로 마주보고 웃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쾌청했으나 1층인 탓인지, 르블랑 부인의 집은 늘 그렇듯 어두웠다. 부인은 식탁 건너편에 앉아 나를 향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이 죽은 아들의 생일이야.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일까? 나는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오늘. 생일. 죽음. 아들. 내가 이해한 토막의 단어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천천히. 다시 또, 몇몇 단어들이 내 귀에 들렸다. 전쟁. 폭탄. 불길. 아들. 죽었어. 아들을 전쟁 중에 잃었다는 말일까. 아이는 고작 두 살이었지. 세계 2차 대전이었을까. 공습. 폭탄이 투하되고, 불길이 치솟고 사람들은 아우성을 쳤겠지. 아이를 안고, 어딘가로 숨어, 하지만 아이는 죽어버리고, 당신은 오열했을까. 오늘따라 왜 이렇게 부인의 말이 잘 들리지? 스스로 의아해하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부인의 이야기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어느 새 부인에게 들은 몇몇 단어들을 조합해서 내가 익히 들어온 전쟁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극히 상투적인 어떤 장면을.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접시 위에 파이와 케이크를 한 조각씩 담아 주는 부인의 주름진 얼굴 위로 말로 할 수 없는 슬픔이 담담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너네 별거한다며? 유학을 결심하기 전,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입에서 흘러나온 문장이 떠올랐다. 그녀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음식을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볼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누구에게 들었어? 같은 말은 의미가 없었다. 남편이 바람을 폈대.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렇게 전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뭐, 그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결혼하면 언제나 서로에게 무엇에 관해서든 솔직하게 말하자, 고 청혼했던 그는 함께 산 지 삼 년 되던 해에 내게 솔직하게 말했다. 다른 여자와 잤어. 그러므로, 친구들이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뱉는 문장들은 어쩌면 그렇게 상투적이었을까. 한, 두 문장으로 요약한 타인의 삶이 얼마나 진부해질 수 있는가, 를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무수한 시간들이, 기억들이, 몸짓들이, 지극히 통속적인 한 문장으로 완결되었다. 나는 소음 속에서 입을 굳게 닫았다.

  전화를 했어요.

  내 목소리에 이번에는 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한국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당황했을 것이다. 나 역시 당황했으니까. 그러나 한 번 입을 열자 문장들은, 내뱉은 문장이 다음 문장을 부르듯 술술 흘러나왔다. 전화를 했어요. 친정에 머물던 기간까지 합하면 그와 떨어져 산 지 이 년 가까이 되어갈 무렵이었어요. 우리 이혼하자. 내 말에 남편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 끊고 나니까 우습더라고요. 휴대폰 액정에 4월 1일 저녁 5시 반이라고 쓰여 있었거든요. 한국은 만우절이 지나갔겠구나, 하고 깨달으니 뭔가 상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 그 순간, 그는 진실을 말하는 날에, 나는 거짓을 말하는 날에 서 있다는 것이 말이에요.

  나는 말을 마쳤다. 오랜만에 내 가슴에서 빠져나간 말들이 공중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나는 천천히 관찰했다. 내 말이 가닿았는지 부인은 다 알아들었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알아들었을 리가 결코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니, 알았기 때문에 마음이 놓였다. 거울을 보지 않더라도 나는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케이크는 달고, 부드러웠다.

  새벽 일찍 눈이 저절로 떠졌다. 바퀴벌레 때문에 잠을 또 설쳤다. 커튼을 치자 창밖으로 푸르비에르 성당이 어스름하게 보였다. 창밖을 내다보다가 말고 나갈 채비를 했다. 떠나기 전에 한 번쯤은 성당에 가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려가려는데 3층 계단 옆 게시판에 붙은 공고문이 눈에 띄었다. 같은 층에 사는 사람들끼리 모여 남은 재료로 저녁 식사를 해먹자는 내용의 공고문이었다. 그 즈음,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떠나야 했던 대부분의 기숙사생들은 음식 재료를 처치하는 일로 골치 아파했다. 모두 같이 음식을 해먹자는 게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는 모르지만 며칠째 곳곳에 공지가 붙어 있었다. 바깥에서 바라본 새벽의 기숙사는 몇 안 되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창백해 보였다. 창마다 늘어진 색색의 쇼핑백들 때문에 K동 건물은 초라한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보였다. 그 안에서 누군가의 우유는 조금씩 시큼해지고, 누군가는 바퀴벌레 때문에 불을 켠 채 잠을 잘 것이다. 그들에게는 곧 이곳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만이 위안이 될 것이다.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사위는 여전히 어두웠다. 나는 길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언덕 위에서 조명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는 푸르비에르 성당뿐이었다. 성당이 보이는 방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古)도시는 지나치게 적요했다. 내 구두굽이 오래된 돌길 위에 부딪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너무 조용하구나. 낮게 읊조렸다. 침묵의 근원이라도 되는 듯, 이 도시의 좁은 골목들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내가 태어나 자란 도시의 밤을 떠올렸다. 한밤중에도 사방의 공사장 불빛이 번쩍이고 편의점에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는 도시. 이곳을 좋아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아름다운 두 강(江)이 만나는 이 도시는 수천 년 전 푸르비에르 언덕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차츰 언덕 아래로, 강 건너로, 확장되어 가기 시작한 도시를 가로지르다 보면 역사의 시간이 부챗살처럼 펼쳐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시간의 결마다 간직되어 있을 누군가의 이야기들. 그것들이 가진 무거운 울림. 내가 이 도시를 좋아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깊은 침묵뿐인 이 도시에 살아 있는 것은 나뿐인 것 같았다. 새삼 허기가 졌지만 구시가지의 상점들은 모두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케이블카는 여전히 운행되지 않았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기 때문인지 파업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낡은 건물들 틈새로 흙냄새가 났다. 오래전, 비를 피해 비단을 운반하고자 만들었다는 트라불을 따라서 바람이 불어왔다. 자꾸 목이 말랐

  언젠가는 진리의 상징이기도 했을 푸르비에르 성당 앞 조망대에 당도했을 때, 아직 사방은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수업 시간에 선생은 이 성당이 도시를 전염병으로부터 구한 성모마리아에게 헌납된 것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성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때까지 나는 성당이라는 곳에 들어가 본 일이 없었다.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성당에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무엇을 향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것일까, 궁금해하며 그들을 따라 초에 불을 밝혔다. 사람들이 이곳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구원을 빌었겠지, 하고 생각해 보았으나 실감은 나지 않았다. 성당은 일렁이는 촛불이 만들어 내는 빛의 그림자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형형한 빛의 조각들이 그려 놓은 무늬들로 아름다울 뿐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오르간 소리가 들려오더니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빚어내는 울림이 높은 대리석 천장을 공명시켰다. 전혀 들어본 적 없는 그 곡조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천천히 가로지르며 흘러갔다. 물줄기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화음. 그 장엄하고 우아한 화음을 듣다 보니 이 도시에 온 이후 처음으로, 르블랑 부인을 찾아가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푸르비에르는 참 아름답군요.

  기숙사는 음식을 해먹으려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웠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지도 않던 사람들 틈에 끼는 것이 어색했던 나는 그냥 방에 머물렀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뭐해, 얼른 나와서 같이 먹어요. 이탈리아 출신이거나 스페인계로 추정되는 어떤 활달한 여자 아이들이 내 문 앞에서 나를 향해 손짓했다. 가지각색의 피부톤과 머리색을 가진 이들이 기숙사 안에서 북적였다. 몇몇은 벌써 완성된 음식들을 접시에 담아주고 있었다.

  여기서 뭐해. 얼른 가서 음식 받아. 누군가가 내 등을 떠밀었다. 그 힘에 밀려 앞으로 나간 나는 얼떨결에 음식을 받고 말았다. 음식을 받은 우리들은 식탁 의자에 앉거나 싱크대에 기대어 서서 음식을 먹었다. 한 학기 동안 함께 살았으나 이제야 처음 보는 많은 사람들이 통성명을 하고, 천천히 대화를 이어 나갔다.

  우리는 형용사나 부사, 은유나 상징이 제거된 가장 단순한 구조의 문장으로만 의사소통을 했다. 때로 우리는 의미가 불분명한 문장들을 만들었고 아주 자주, 정반대 의미의 어휘를 선택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은 대체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신기한 체험이었다. 사실 우리 중 누구도 상대가 하고자 하는 말을 백 퍼센트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의 말이 온전히 전달된다고 착각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대화는 이어졌다. 최소한의 단어들의 나열과 어조의 높낮이, 그리고 손짓과 눈짓만으로도 충분한 말들이 여기, 이 식사 자리에 있었다. 알고 있는 단어가 한정되어 있었고, 만들 수 있는 문형이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우리는 종종 설명해야만 하는 많은 부분들을 생략하거나 변형시켰다. 우리가 주고받는 말 속에서 고향에 흐르던 실개천은 강물이 되기도 하고, 미처 외우지 못한 팔월이라는 단어는 삼월로 대체되기도 했다. 내가 묘사한 나의 과거 역시 실제의 내 과거와 같지 않았다. 내가 그려내는 내 미래가 그러했듯이.

  한국에서 학생이었어요? 아니요. 애인이 있어요? 없어요. 나는 내가 느끼는 미묘한 감정들을, 사소한 차이들을 결코 제대로 전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여기, 우리의 대화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가 하는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에 진실한 것이 하나라도 존재했다면 그것은 다만 우리가 끊임없이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행위,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왠지 엄마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면 기억할 수 없는 아주 먼 옛날, 거짓말을 내게 처음 가르쳐 준 사람도 엄마였다. 날 때부터 곁에 없던 아버지에 대해 물을 때마다 엄마는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 들려주었다. 이야기 속에서 아버지는 부잣집 막내아들이었다가 먼 바다로 떠나는 선원이었다가 공장에 위장 취업했던 운동권 대학생이었다. 매번 바뀌는 엄마의 거짓말 때문에 나는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래서 아버지는 누구라도 될 수 있었다. 나는 이야기 속 여러 남자들 중에서 먼 나라를 떠돌며 집을 지었다는 사내를 가장 좋아했다. 나는 사춘기를 지나는 동안 종종 이국의 뜨거운 햇볕에 그을린 젊고 탄탄한 사내의 팔뚝이 하얗고 가는 엄마의 허리를 끌어안는 상상을 했다. 네 아버지가 그날 밤 내게 그 먼 곳에서는 모래바람이 분다고 했단다. 그 바람의 이름은 할라스라더구나,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이니. 할라스. 나는 그날 밤, 아버지 옷 어딘가에, 혹은 머리카락 사이에 섞여 온 이국의 모래알로 만들어진 아이였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것은 분명 내 존재를 설명하는 가장 그럴듯한 핑계였다. 엄마는 세계가 그럴듯한 거짓말들에 의해서 견고히 다져질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려 했던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어쩌면 거짓말이야말로 엄마가 나에게 가르쳐 주려 했던 가장 건전한 소통 방식이었는지도.

  파스타를 더 원하니?

  스페인에서 온 아이가 내 빈 접시를 건너다보며 물었다. 나는 배가 터질 듯 불러왔지만 빈 접시를 건넸다. 나는 불은 파스타 면을 입 속으로 밀어 넣으며 엄마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일은 르블랑 부인을 다시 찾아가 봐야지.

  누군가 틀어 놓은 라디오를 타고 파업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파업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가 없다고, 라디오 진행자는 빠르고 단정적인 어조로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런 것과 상관없이 식당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높낮이가 각기 다른 억양과 발음으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한 발, 대화 밖으로 떨어져 나와 그것을 듣다 보니 그들의 대화는 성당에서 들었던 성가곡의 가락처럼 들렸다. 창밖은 완연한 여름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 곡조의 결을 가만가만 짚어보았다. 그리고 그 곡조가 익숙해졌을 때, 고요하게 울리는 그 합창곡에 끼어들기 위해서 나는 굳게 닫고 있던 입술을 살짝 떼었다.

  

<당선소감>

   "인간에 대해 잘 이야기하는 작가 되고파"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당선자 백수린씨(28·사진)는 불문학도 출신이다. 연세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서강대 불문학과 교수인 소설가 최윤의 제자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소설가를 막연하게 꿈꿨지요.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강렬하게 품게 됐어요. 공부도 하고 싶고 소설도 쓰고 싶은 마음에 최윤 선생님을 ‘롤 모델’로 삼게 됐어요.”

  공부와 소설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었지만 정작 대학원 수업을 따라가느라 소설은 거의 쓰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창작에 대한 갈망은 더 커졌고, 지난해 2월 대학원을 졸업한 후 본격적으로 습작에 들어간 끝에 마침내 결실을 이뤘다.

  백씨가 소설을 써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중학교 시절 신경숙의 <외딴방>을 읽으면서다. “소설을 통해 거대 서사에 가려진 개인들을 호출해내고, 개인사를 복원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며 “소설이란 것이 개인이 느끼는 세밀한 감각, 생각, 기억 같은 것들을 통해 우리가 어쩌면 끝내 포착할 수 없을 ‘인간’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줄 무엇인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당선작 ‘거짓말 연습’은 낯선 나라에서 언어적, 사회적으로 소통 불능의 상황에 빠진 여성이 어떻게 외부와 관계를 맺어가는지를 그려냈다. 외부로 향하는 문을 닫아 걸었던 주인공이 거짓말을 소통의 방식으로 택한다는 이야기가 자칫 소통 자체에 대해 회의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작품에서 ‘거짓말’은 외부와 소통하려는 적극적 몸짓에 가깝다. 백씨는 “100% 소통은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더더욱 소통을 하려고 할 수밖에 없다”며 “나의 언어가 상대방에게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서로 소통을 시도할 때 거기에 비로소 의미가 있고 진실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가족들, 저에게 소설가의 자세와 어떤 소설을 써야 할지를 가르쳐주신 최윤 선생님, 그리고 문학에 대한 꿈을 함께 키웠던 동주문학회, 사악문학회 친구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백씨는 “경계에 놓인 이름 없는 존재들에 관심이 많다”며 “그런 존재들에게 이름을 찾아주고 싶고, 인간에 대해 잘 이야기할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백씨가 이인성, 최수철, 최윤 등 불문학 전공자 출신으로 한국 문학을 풍성하게 해줬던 쟁쟁한 작가들의 흐름을 잇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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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마지막 네 편서 하나 고르기 어려웠다

  맨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네 편이었다. 소재와 스타일은 각기 달랐지만, 이야기를 빚어내는 솜씨랄까 수준이 엇비슷해서 그중 하나만을 골라내기란 쉽지 않았다.

  ‘자주’는 벌레들이 기어 나오는 낡은 집, 그리고 뭔가에 의해 소리없이 훼손되고 침범당하는 삶을 암시하는 소설적 장치들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풍부한 상징성을 통해 주제를 좀 더 치밀한 구성으로 엮어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쥐’는 진지하고 의욕적인 주제의식이 일단 돋보였다. 매일 아침 아파트 현관 앞에서 마주치는 쥐를 통해, 가치판단 능력을 상실한 세태, 무의미한 일상에 함몰된 현대인의 타자에 대한 무관심 등을 의욕적으로 묘사했다. 반면 문장의 밀도가 다소 부족했고, 작품 후반부의 느슨함이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서랍’은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솜씨며 이미지들을 엮어내는 감각이 뛰어나, 글쓴이의 만만찮은 내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불행한 현실의 벽에 갇힌 두 인물의 고독을 교차시점으로 밀도 있게 전개해 나간 것, 또 코끼리, 서랍, 입술 같은 상징들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이야기 골격이 단순해서 소통과 만남을 갈망하는 두 인물의 내면을 충분히 드러낼 수 없었던 점이 무척 아쉬웠다.

  당선작인 ‘거짓말 연습’은 무엇보다 시종 호흡을 잃지 않고 안정감 있게 이야기를 끌고 나간 저력이 돋보였다. 말 그리고 소통부재의 현실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자못 의미심장한 주제를 이만큼 차분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회적 소통의 부재를 의미하는 파업, 배달되지 않는 입학허가서를 기다리는 화자의 불안과 막막한 미래, 이국 노인과의 소통불능의 대화. 그 모든 것들은 결국 화자 내면의 또 다른 벽의 실체를 스스로 확인해 나가는 의미 있는 과정이기도 하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앞으로 더욱 멋진 작품을 많이 써주시기 바란다.

심사위원 : 박범신, 임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