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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문 / 정영서

  아내가 나가자마자 거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힌다. 걸쇠가 흔들린다. 도둑이라도 들면 큰일이다. 드라이버를 찾아 걸쇠의 나사를 조인다. 현관에서 방까지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물건들 위로 햇볕이 내리쬔다. 아내가 모든 소리를 쓸어가기라도 한 걸까. 집 안은 태풍의 눈처럼 조용하다. 정적 속으로 소리들이 침투한다. 시계초침 소리, 냉장고 소리, 장롱이 몸을 뒤트는 소리. 점점 드세진 소리들이 바보, 등신이라고 나를 비웃는다. 소리는 소리로 몰아내야 한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컴퓨터를 켠다.

  서둘러 하쿠나마타타 게임을 실행한다. 메인 화면이 열리며 집 안은 다른 소리들로 채워진다. 새 소리, 바람 소리, 풀잎 스치는 소리. 아프리카 초원을 서성이는 얼룩말들을 보며 자연의 소리를 몸 가득히 받아들인다. 하쿠나마타타는 스와힐리어로 '걱정하지 마'라는 뜻이다. 제목이 그래선지 이 게임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게임의 기본설정은 게이머가 포토저널리스트나 동물학자가 되어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찍듯 동물을 관찰하며 고객이 주문한 사진을 찍으면 된다. 내가 이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게이머와 경쟁할 필요가 없고 폭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경쟁이라면 현실에서 경험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베이스캠프로 들어가 노트북을 실행한 뒤 메일을 연다. 일이 들어왔다. 네이처 파워잡지에 실을 산악고릴라 사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미 고릴라 등에 업힌 아기 고릴라 사진이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주문이 붙어 있지만 일을 하게 된 게 즐겁다. 휘파람을 불며 아프리카 필드 가이드에서 고릴라 정보를 모은 뒤 사파리 모드로 들어간다. 차를 빌려 자이르의 비룽가 국립공원으로 향한다. 무리지어 달리는 누(gnou)떼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실제로 사바나 초원을 달리는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룽가 국립공원 비소케 지역에 도착한다.

  고릴라를 찾는 키워드는 '잠자리'와 '배변'이다. 우선 산악고릴라가 자주 나타나는 숲으로 향한다. 하게니아나무 아래 이끼가 우묵하게 눌려있다. 제법 큰 것으로 보아 고릴라가 쉬었던 곳이 분명하다. 그 주변에 떨어져 있는 배설물을 따라간다. 숲을 벗어난 배설물은 무성한 잡풀 사이로 이어진다. 통로까지 생긴 걸 보면 무리 전체가 움직인 게 틀림없다. 조심해서 풀숲을 기어간다. 제인 구달이라도 된 듯 온몸이 짜릿해진다. 갑자기 화면 전체에 붉은 비상등이 켜지며 윙윙 소리가 난다. 동물의 비명과 포효가 동시에 들린다. 잽싸게 뒤돌아 줄행랑을 치지만 소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무조건 옆으로 점프하고 보니 하필이면 가시덤불 숲이다. 곧 눈앞에 도망치는 버펄로와 그 뒤를 쫓는 고릴라가 나타난다. 사진을 찍으려고 보니 카메라가 없다. 어딘가에 떨어트린 모양이다. 그제야 주의사항이 머리를 때린다. 고릴라가 만들어 놓은 길을 버펄로가 따라갔을지 모르니 특히 조심하라고 했었다. 다시 고릴라를 찾아보지만 이미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화면에서 사라져 0과 1의 형태로 게임 데이터 어딘가에 잠복해 있을 것이다. 게임머니를 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아내다. 또 게임 하고 있지? 아내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하다. 눈치를 살피며 달력을 본다. 말일이다. 이달 보험계약실적이 좋지 않은 걸까. 게임만 하지 말고 친구 좀 찾아봐. 아내의 목소리가 뾰족하다. 우물쭈물 대답한다.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잖아. 그렇게 웅얼거리지 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 아내는 송곳 같은 목소리를 내지르고 신호음 뒤로 사라진다. 아내가 이러는 것은 정말로 친구를 찾아보라는 뜻은 아니다. 어느 날 문득 시작된 푸념일 뿐이다.

  나는 2년 전까지 친한 친구가 운영하는 게임회사의 개발팀 팀장이었다. 어느 날 회사에 경찰들이 들이닥쳐 개발팀 직원들을 모두 구속했다. 사행성 게임을 개발했다는 혐의였다. 사장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의했지만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경찰은 없었다. 이틀 뒤 아버지가 변호사인 직원의 도움을 받아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풀려나자마자 친구를 찾았지만 그는 이미 해외로 도주한 뒤였다. 친구가 떼어먹은 것은 직원들의 몇 달치 월급만은 아니었다. 회사 지분을 넘겨주기로 하고 내 아파트를 담보로 빌린 돈이 꽤 되었다. 결국 나는 집을 팔고 월세 아파트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가 이럴 수 있느냐며 억울해 하는 내게 아내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은 늘 가까이 있는 법이야. 당한 사람이 바보지.

  사파리 모드에서 나와 온라인 가상사진 코너로 들어간다. 게이머들이 자기가 찍은 동물사진을 올려놓는 곳이다. 정기적으로 사진 콘테스트도 열리지만 카메라 사용이 서툰 나로서는 그림의 떡이다. 오늘 올라온 사진 중 '자화상'이라는 제목을 클릭한다. 등의 털이 모두 은색인 고릴라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수줍은 듯 웃고 있다. 고릴라 사진 의뢰를 받은 게 나뿐만이 아닌가 보다. 자세히 보니 게임에 나오는 그래픽 고릴라 사진이 아니다. 고릴라의 주변으로 책상과 책꽂이가 있고 아치형 창문에는 흰색 레이스 커튼까지 드리워져 있다.

  은색등이란 별명을 쓰는 이가 내게 대화를 신청한다. 고릴라 사진을 올린 사람이다. 착해 보이는 고릴라의 눈을 보며 그의 대화 신청을 받아들인다. 은색등은, 내 별명이 네안데르탈인이어서 대화를 하고 싶었노라고 운을 뗀다. 대화창에 그의 문자가 올라오는 동안 컴퓨터에서 아카벨라 같기도 하고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한 흠이 흘러나온다. 흠은 하쿠나마타타 게임 세계의 언어다. 게임 개발자는 인지고고학자 스티브 미슨의 이론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흠을 만들었다고 한다. 스티브 미슨은 초기 호미니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노래 같은 언어를 사용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 언어를 흠(Hmmmm)이라고 명명했다. 흠은 아기들의 옹알이와 비슷했을 거라고 한다. 그래선지 흠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 나이를 물어본 은색등은 자기가 몇 살 더 많다며 바로 말을 놓는다. 고릴라와 네안데르탈인이 사촌간이니 자기가 나의 사촌형이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그에게 사진은 어디에서 찍었는지 묻는다.

  -영국 런던동물원 유인원연구소. 그곳에서 엄마 고릴라와 함께 살았어. 아프리카에서 밀렵꾼들에게 잡혔는데 런던박물관 유인원연구소 소장에게 구출되었거든.

  하쿠나마타타 게임에는 동물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기능이 있다. 그는 게임에 빠져 자신이 고릴라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

  -엄마 고릴라는 지금 무엇을 하나요?

  -동물원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죽었어. 밀렵꾼 올가미에 걸려서 목을 다쳤거든. 엄마가 죽은 뒤 몸을 웅크리고 아무 것도 먹지도 않는 내게 박사가 말했어. 엄마는 죽은 게 아니라 다른 생명체로 바뀐 거라고. 아마, 엄마는 바람이 되었을 거야. 숨을 쉴 때마다 목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거든.

  어쩌면 그는 너무 외로운 사람일지 모른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을 때 나도 온 세상이 텅 빈 것처럼 막막했다. 이 세상에서 부는 찬바람이 모두 내게 달려드는 것 같았다.

  -새 가족을 만들지 그래요. 나는 결혼 한 뒤에야 바람막이를 얻은 느낌이었어요.

  -나도 그러려고 했어. 등의 털이 어른의 성징인 은색으로 바뀌었을 때 암컷을 찾으려고 아프리카로 갔어. 그런데 고릴라 무리에 섞여들 수가 없었어. 동물원에서 사는 동안 너무 인간화됐거든.

  친구에게 호되게 당한 뒤부터 나는 사람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게 친근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일수록 더욱 경계하며 곁을 두지 않았다. 점점 증상이 심해져 대인기피증으로 발전했다. 요즘은 선글라스를 쓰지 않고는 외출할 수도 없다. 사람들과 시선이 마주치면 가끔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요즘엔 집에서도 환청이 들린다.

  -인간화되면 좋은 거잖아요. 진화하는 거니까요.

  -그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보는 거고. 나는 수컷 은색등 역할을 학습하지 못했기 때문에 야생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어. 고릴라의 관점에서 보면 도태된 거야.

  -지금은 어디에서 살아요?

  -5년 전까지 박사의 집에서 살았어. 그가 죽은 뒤로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녔어. 지금은 S동물원 유인원관 근처에서 다시 동물원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는 중이야.

  갑자기 모니터가 꺼진다. 검은 화면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비친다. 방을 채웠던 흠이 사라지자 팽팽하게 당겨진 정적만 남는다. 정적을 가르고 시계초침 소리가 파고든다. 나의 내부로 침투한 소리가 공포를 불러낸다. 점점 팽창하는 공포를 털어내기 위해 흠을 하며 두꺼비집을 연다. 누전차단기의 스위치가 떨어져 있다. 누전되면 전원이 차단되듯내 삶도 어느 순간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 버렸다. 집과 직장을 중심으로 순환하던 내 삶의 열차가 일탈해 정체된 공간에 멈춰서고 만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이곳에서 나는 다시 궤도에 들어설 방법을 찾지 못하고 삶을 잠식하고 있을 뿐이다.

  전화 진동 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아내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이다. 짜증내서 미안하다는 내용이다. 점심 먹고 비타민도 챙겨 먹어. 산책도 하고. 마지막 문장 끝에 찍힌 하트를 본다. 아내는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다. 2년이 넘도록 재취업이 안 돼 우울해 하는 내게 비타민 B6를 사다 준 것도 아내다. 비타민 B6가 불안감이나 우울증을 줄여준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종종거리며 고객을 만나러 다닐 그녀를 생각해서라도 빨리 바깥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 비타민 B6 다섯 정을 입에 털어 넣은 뒤, 선글라스를 쓰고 집을 나선다.

  막상 지하철역까지 나왔지만 딱히 갈 곳이 없다. 입구 앞을 서성이며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양복과 서류 가방을 든 사람들에게는 직장인의 오래된 습관이 배어 있다. 그들은 앞을 바라보며 분주히 걷다가 성큼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탄다. 급히 할 일이 있는 그들에게는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다. 예전엔 매일 습관에 의해 움직이는 게 답답했는데 지금은 정상적인 시간 궤도 안에 머문다는 증거 같아 부럽다. 나도 바쁜 일이 있는 것처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간다. 급히 개찰구로 향해 걷다가 멈춰 선다. 나는 서둘러 가야 할 곳이 없다. 돌아서려는데 누군가와 부딪친다.

  나의 선글라스와 그의 가방이 동시에 떨어진다. 젊은 남자가 인상을 찡그리고 서 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는데 거친 목소리가 들린다. 이 거치적거리는 인간은 뭐야. 놀라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는 입을 다문 채 가방을 줍고 있다. 복화술이라도 하는 걸까. 다시 소리가 들린다. 에이, 재수 없어. 여전히 그의 입술은 움직임이 없다. 환청이 더 심해진 것 같다. 숨이 차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남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밀치고 지나간다. 사람들이 흘깃거린다. 서둘러 선글라스를 주워 쓰고 사람들 시선을 피해 지하철 노선도 앞으로 간다. 눈앞에 어두운 막이 생기자 호흡이 안정된다. 천천히 지하철역 이름을 읽는다. S동물원역. 그곳에 가면 은색등이 있을 것이다. 그와는 두려움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것 같다.

  유인원관이 있어야할 자리에 공사용 펜스가 쳐져 있다. 선글라스를 벗고 펜스의 이음새 틈으로 안을 들여다본다. 시멘트 구조물들이 반쯤 허물어지고 고릴라나 침팬지 우리를 알려주던 푯말들이 바닥에서 나뒹군다. 쇠락한 것들이 끌어당기기라도 하듯 사방에서 침묵이 쏟아진다. 그곳 어디에도 은색등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온라인 게임에서 만난 사람을 찾아 S동물원까지 오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펜스에서 물러나 주위를 둘러본다. 월요일 오전이라선지 관람객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공사용 펜스 중앙에 리모델링 중이란 안내문과 조감도가 붙어있다. 조감도 가까이 다가간다. 가운데 건물을 중심으로 각각의 유인원들 정원이 정글처럼 꾸며져 있다. 아시아 오랑우탄, 중앙아프리카 침팬지, 콩고 고릴라, 이집트 망토원숭이, 마다가스카르 여우원숭이, 유인원 종류가 이렇게 많은 줄이야. 새로 개장할 그들의 공간은 내가 사는 아파트보다 넓어 보인다. 볼펜을 꺼내 그들의 우리 옆에 또 하나의 울타리를 그린다. 네안데르탈인의 계곡. 노래를 흥얼거리며 계곡을 꾸미기 시작한다.

  당신 네안데르탈인이지?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선다. 멀지 않은 곳에 눈이 쑥 들어가고 인중이 긴 사내가 서 있다. 피부가 검고 머리까지 헝클어져 있어 영락없는 고릴라다. 낙서를 몸으로 가리며 그에게 묻는다. 당신이 은색등인가요?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본다. 요즘 나의 웅얼거림을 정확히 알아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이 시간에 흠을 하며 낙서하는 것을 보면 사촌도 어지간히 할 일이 없나보군. 급히 뒷걸음질하며 선글라스를 쓴다. 그가 윙크를 하며 짓궂게 말한다. 사촌이 매트릭스의 스미스였어? 선글라스 다리를 만지작거리며 그를 살핀다. 몰골은 흉해도 고약한 냄새는 안 난다. 그가 턱으로 조감도를 가리킨 뒤 속삭인다. 낙서에 대해선 비밀 지킬게. 그 대신 점심은 사촌이 사. 이렇게 멀쩡하면서 자기가 고릴라라고 주장하다니, 아무튼 재미있는 사람이다.

  봄날 한낮이라선지 대부분의 동물들이 나른하게 늘어져 있다. 참 평화롭지? 그가 숨을 길게 들이마신다. 많은 동물들이 있는 곳이지만 하쿠나마타타 게임에 접속했을 때와는 다르다. 동물의 포효도 긴박한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얀 벚꽃이 눈처럼 날린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불안하다. 마침 유치원복을 입은 아이들이 소란을 피우며 타조관 앞으로 몰려든다. 타조 한 마리가 아이들 가까이로 다가오더니 다리를 모으고 껑충 뛰어오른다. 아이들이 환호를 지르며 타조를 향해 먹이를 던진다. 은색등이 중얼거린다. 동물원에서 인기를 끌려면 특이한 재주 하나는 있어야겠는걸.

  그가 간이음식점으로 들어간다. 김밥과 잔치국수, 떡볶이까지 순식간에 먹어치운 뒤 중얼거린다. 이젠 이런 음식과도 이별이야. 포만감에 젖은 그가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린다. 당분간 관람객은 유인원들을 보기 어려울 거야. 모두 임시 우리로 옮겨졌거든. 내가 볼 방법을 아는데 함께 갈까? 그와 같이 있는 게 즐거워 고개를 끄덕인다. 앞서 나가던 그가 갑자기 현관 유리문을 들이받는다. 사람들이 황당해하며 그를 바라본다. 그의 입술에서 피가 흐른다. 급하게 휴지로 그의 입술을 누른다. 피는 곧 멎었지만 입술이 부풀어 오른다. 당황한 나와는 달리 그는 담담하다. 놀랐지? 내 문제는 이거야. 유리벽을 볼 줄 모르거든.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벽을 세우는데 나는 매번 맨몸으로 부딪쳐서 많이 다치곤 했어. 나도 나를 보호할 유리벽을 세울 줄 알았더라면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음식점을 나온 그가 동물원 옆 등산로로 접어든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이쪽으로 올라가면 동물원 뒤쪽으로 들어가는 낡은 철문이 나와. 유인원을 보려면 그곳으로 몰래 들어가야 해. 걸음을 멈춘다. 그렇게까지 원숭이를 보고 싶은 건 아니다.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내 대화 신청에 응한 사람도 나를 만나러 동물원까지 온 사람도 사촌밖에 없었어. 그건 사촌이 간절하게 다른 세계로 옮겨가기를 원한다는 증거야.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문 앞까지 가면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거야. 나는 오늘밤에 꼭 동물원으로 들어가야 해. 따라오고 안 오고는 사촌이 결정해. 그는 다시 산을 올라간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뒤를 따라간다. 집에 일찍 돌아가도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점점 나무가 울창해지고 등산로 표시도 사라진다.

  그가 잡풀이 무성한 곳에서 걸음을 멈춘다. 주변을 살피더니 돗자리를 찾아와 깔고 앉는다. 거친 숨을 가라앉히며 그의 옆에 앉는다. 문은 어디 있어요?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나타나. 무슨 문이 어두워져야 보인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잘못 따라온 것 같다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이상하게 그 주변만 하늘이 동그랗게 열려 있다. 불안해 하는 내 감정이 전달되었는지 그가 차분하게 설명한다. 그 문은 보통 문이 아니야. 다른 세계로 옮겨갈 수 있는 통로거든. 그 곳을 통과해서 동물원으로 들어가면 자기가 원하는 동물이 되어 동물원에서 살 수 있어. 그의 표정과 어투에는 깨달음을 얻은 뒤 믿음을 전파하는 선지자 같은 확신이 담겨 있다. 세상에 동물원은 아주 많아. 그 많은 동물원에서 사육되는 동물들이 정말 다 야생에서 포획된 거라고 생각해? 천만에. 그랬다면 야생동물은 벌써 씨가 말랐을 거야. 멸종 위기에 처했던 동물들을 동물원에서 본 적 있지? 그것은 사람들이 문을 통해 동물원으로 들어가서 희귀 동물이 됐기 때문이야. 그런 문이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하다. 은색등은 일주일 전에 S동물원 유인원관 앞에서 동물원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 그 사람을 따라서 이곳까지 왔다가 정말 문을 봤다는 것이다. 이곳은 다른 세계로 옮겨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고이는 장소래. 에너지가 많이 쌓이면 세계의 경계에 문이 생기고, 문의 기운을 감지한 사람들이 근처로 모여들게 되는 거지. 내가 그를 만나고 사촌이 나를 만난 것도 문의 기운 때문일 거야. 점점 그의 말에 솔깃해진다.

  은색등에게 왜 동물원으로 들어가려느냐고 묻는다. 그가 곧 잊을 일을 뭐 하러 이야기 하냐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드러눕는다. 유리벽 이야기와 온라인에서 나눈 대화를 떠올린다.

  고릴라로 비유했을 뿐, 그의 삶은 대화 내용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의 옆에 누워 동그란 하늘의 가장자리를 본다. 위에만 바람이 부는지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가 말한다. 이제 시간이 다 된 것 같아. 사촌도 잠시 눈 좀 붙여. 그의 말이 최면술사의 암시라도 되는 듯 삽시간에 눈꺼풀에 바위덩이가 얹힌다. 잠이 몰려온다. 그 문은 꼭 동물원으로만 통하는지 물어보려는데 눈꺼풀이 닫힌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 소리, 동물 울음소리들까지 섞인다. 갑자기 휘파람이 불고 싶다. 입을 작게 모아 휘파람을 불자 소리들이 일시에 멈춘다. 잠시 뒤 답이라도 하듯 누군가가 좀 더 큰 소리로 흥얼거린다. 이어 여러 소리들이 다시 들린다. 눈을 떠 보니 주위에 안개가 깔려 있다. 은색등이 보이지 않는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걸어가 보니 낡은 철문이 나타난다. 철문에는 어울리지 않는 큰 두꺼비집이 달려 있다. 집에 있는 것과 비슷한 모양이다. 뚜껑을 열어 본다. 스위치가 '오프'로 떨어져 있다. 뚜껑 안쪽에 설명서가 붙어 있다.

  '이 문은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입니다. 이곳을 넘어가면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동물이 되어 동물원에서 먹이를 제공받으며 살 수 있습니다. 문을 넘어서는 순간, 이 세계에서의 기억은 모두 지워집니다. 문은 일주일 뒤 자정까지만 열려 있을 것입니다. 그 날 자정이 지나면 문은 닫히고 당신은 문에 대해서 완전히 잊을 것입니다.'

  은색등은 벌써 문턱을 넘어간 걸까. 축제라도 벌어졌는지 동물원 쪽이 떠들썩하다. 흥겨운 소리가 세일렌의 손길처럼 내 정신과 몸을 옭아맨다. 저쪽으로 넘어간다면 행복할까. 문 너머를 기웃거린다. 안개가 자욱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더 바짝 다가가 손으로 안개를 흐트러트리려는데 손전화가 진동한다. 아내다. 아홉 시까지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같이 저녁 먹어. 손전화 액정이 등대의 불빛처럼 환하다. 이렇게 나를 챙기는 아내가 있는데 다른 세계로 옮겨가야 할 이유가 없다. 아내의 부드럽고 따스한 몸이 그리워진다. 이 문은 아마 현실적응에 실패한 사람들이 불러낸 망상일 것이다. 문을 외면하고 서둘러 산을 내려간다.

  누전차단기 스위치를 '온'으로 올리자 가전제품들이 동시에 울어댄다. 전등을 켜고 거실을 둘러본다. 낯익은 물건들이 새삼 반갑다. 아내가 귀가할 때까지는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다. 서둘러 밥을 안친다. 곧 진동추가 움직이며 증기 빠지는 소리가 난다. 오늘 하루 동안 겪은 일들이 치직 소리와 소량의 증기에 묻혀 아득해진다.

  날카롭고 뾰족한 송곳이 가슴을 헤집는 듯한 고통에 벌떡 일어난다. 식탁 의자에 앉은 채로 깜박 잠이 들었나보다. 고개를 흔들어 악몽을 털어내고 시계를 본다. 열한 시다. 어떻게 된 걸까. 아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문자 메시지를 보내도 아무 신호도 없다. 불안이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난다. 흥얼거리며 청소를 한 뒤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간다. 낯선 사람을 만날까 두려워 계단으로 내려간다. 1층 계단으로 내려서려는 순간 아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내가 아래층 남자에게 여의도 벚꽃 축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양복을 입은 남자를 보자 무릎이 튀어나온 운동복을 입고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들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진다. 멈춰 서서 그들이 올라가기를 기다린다. 아내의 목소리엔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교태가 묻어 있다. 자동차 보험 만기되셨죠? 남자의 시선이 짧은 스커트 아래 드러난 아내의 다리를 훑는다. 아내는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 가슴 높이에서 그에게 건넨다.

  침대에 앉아 여성 잡지를 읽는 아내에게 투덜거린다. 이렇게 늦을 것 같으면 미리 연락이라도 해주지. 아내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당신, 요즘 왜 그래? 왜 말을 똑바로 못하고 웅얼거려. 친구 P가 갑자기 회사로 찾아와서 늦었어. 얼마 전에 호주로 여행을 다녀왔대. 그곳에서 아랍 남자를 만나 청혼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부인이 이미 두 명이나 있는 사람이었대. 내 생각으론 남자가 능력만 있다면 상관없을 것 같아. 귀로 들어온 말들이 나사못처럼 가슴에 박힌다. 꿈틀대며 일어섰던 서운함이 제풀에 사그라진다. 말을 끝내고 쌜쭉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아내가 잡지 페이지를 거칠게 넘긴다. 바람을 일으키며 넘어가는 종이 소리가 가슴을 저민다. 눈치를 보며 거실로 나가려는데 아내가 묻는다. 저녁은 먹었어? 어느새 아내의 얼굴이 부드러워져 있다. 잘못을 용서를 받은 아이처럼 고개를 주억거린다. 비타민도 먹었어? 비타민을 먹고 거실에서 텔리비전을 보다가 방으로 돌아가 보니 아내는 잠들어 있다.

  30대 중반에 접어들며 아내는 점점 아름다워지고 있다. 살이 붙은 몸매는 오히려 전보다 관능적이다. 아이가 있다면 덜 불안할텐데. 아내가 몸을 뒤채자 발이 드러난다. 군살이 옹이같이 박힌 못생긴 발이다. 아내의 발을 쓰다듬다가 몸을 낮추고 핥는다. 발에서 다리로 가슴으로 거슬러 올라가도록 그녀는 바람 빠진 공처럼 늘어져 있다. 그녀의 귀에 숨을 불어넣는다. 예전에 내가 직장 다닐 때 아내가 자주 하던 행동이다. 피곤하다가도 숨이 귀로 스며들면 풍구질이라도 당한 듯 나의 녀석이 일어서곤 했다. 아내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귓불을 이로 살짝 깨문다. 아내가 낮게 신음을 토하며 몸을 꼰다. 은근슬쩍 아내 몸에 나의 녀석을 들이댄다. 갑자기 신음소리를 멈춘 아내가 달뜬 목소리로 말한다. 콘돔 꼈어? 콘돔을 끼자마자 녀석이 고개를 떨어뜨린다. 다시 세워보려고 하지만 더욱 움츠러든다. 아내가 짜증을 내며 나를 밀쳐낸다. 잠이 오지 않는다. 눈을 감자 머릿속으로 소리들이 파고든다. 시계 초침 소리,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누군가 싸우는 소리. 모든 소리가 부딪치고 긁힌 것들이 지르는 비명 같다. 환청을 듣다가도 옆에서 곤하게 잠든 아내만 보면 편해졌는데 오늘은 아내의 숨소리까지도 거슬린다.

  주말인데도 아내는 고객을 만나야 한다고 나갔다. 일요일 오후에 만나는 고객은 누구일까. 고개 드는 의심을 털어내려고 하쿠나마타타 게임을 하다가 기분만 상하고 말았다. 사자 뒤를 쫓다가 오히려 사자에게 물려죽은 것이다. 게임 속 캐릭터가 죽은 것뿐이지만 내가 죽은 것처럼 섬뜩하다. 꺼림칙함을 털어버리기 위해 흥얼거리며 텔레비전을 튼다.

  요즘 S동물원에는 희귀 동물이 버려진다고 합니다. 'S동물원'이란 단어에 이끌려 소파에 앉는다. 'TV동물세계'가 방송되고 있다. 희귀 동물들이 버려지는 것은 사료비가 부담스러워져 일어나는 현상인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는 희한한 재주가 있는 고릴라가 들어왔다고 하네요. 화면에 등이 은색인 고릴라가 비친다. 그가 걸어가다가 뭔가 부딪친 것처럼 뒤로 벌러덩 넘어진다.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화면을 보고 이를 드러내며 씽끗 웃는다. 사육사가 과장된 목소리로 말한다. 꼭 개그맨이 몸 개그를 하는 것 같죠. 유인원관이 새로 개장하면 S동물원 간판 캐릭터를 호랑이에서 고릴라로 바꿀 예정입니다. 많이 보러오세요. 고릴라는 은색등이 틀림없다. 어쩌면 6일 전에 본 문은 환영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아내가 주말마다 외출해 2주째 장을 보지 못했다. 아내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오늘도 많이 늦어? 반찬거리가 거의 바닥났어. 아무런 답이 없다. 아내는 요즘 들어 부쩍 늦는다. 아내의 책상 서랍을 연다. 보험계약서와 약관이 가득하다. 대부분 내 이름으로 가입한 것들이다. 서류 중 하나를 읽는다. 선택특약 중 암, 수술, 입원, 전신마비가 체크되어 있다. 이렇게 많은 보험료를 부으려면 힘들 것이다. 옹이가 가득한 아내의 발을 떠올린다. 내가 빨리 정상으로 돌아가 직업을 구해야 할텐데. 서류들을 다시 넣고 서랍을 닫는다.

  라면을 다 먹었을 때쯤 아내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온다. 상담 중이었어.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은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아. 밥 먹고 비타민도 꼭 챙겨 먹어. 아내는 왜 이렇게 비타민 먹는 것을 꼬박꼬박 챙기는 걸까. 아내의 문자 메시지가 가슴을 묵직하게 누른다. 어쩌면 내가 환청에 시달린다는 것을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비타민 다섯 정을 입에 넣으며 통에 붙어있는 스티커를 본다.

  섭취 대상자: 평소 육류를 많이 섭취하는 분, 우울증이나 불안 증상이 있는 분에게 좋습니다. 권장 섭취량 및 섭취 방법: 식사 후 5정을 물과 함께 먹습니다.

  좀 더 많이 먹으면 환청이 사라질지 모른다. 다섯 정을 더 입에 넣고 물을 마시려다가 사레들린다. 연거푸 터져 나온 기침에 통을 라면국물에 빠뜨리고 만다. 건져서 물에 헹구고 보니 스티커의 끝이 약간 벌어져 있다. 손톱으로 잡고 당기자 쉽게 떨어진다. 아래에 스티커가 한 장 더 붙어 있다. 내려놓으려다가 권장 섭취량을 다시 살펴본다. 하루에 1정. 그동안 먹은 양보다 열다섯 배나 적다. 음식으로 먹은 양까지 합하면 하루에 1,700㎎ 이상을 먹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이 먹어도 괜찮은 걸까.

  컴퓨터 검색창에 '비타민 B6 과다 복용' 이라고 쳐 본다. '장기적으로 과다복용하면 신체를 자각할 수 없는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일종의 전신마비 증상과 비슷하다.' 전신마비. 보험계약서에서 보았던 특약이 뇌리를 스친다. 뒷골이 서늘하다. 아내는 나를 보험금을 타내는 도구로 쓰려는 걸까. 갑자기 러닝머신에서 윙 소리가 난다. 곧 누군가 등 뒤에서 달려들 것만 같다. 어쩌면 환청이 심해진 것도 비타민 과다복용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 같이 약한 인간이 살기엔 이 세상은 너무 무섭다. 아내가 돌아오기 전에 이 집에서 도망쳐야 한다. 동물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오늘 자정까지 열려있을 것이다. 서둘러 선글라스를 쓰고 전철역으로 향한다. 부지런히 걸으며 동물원에서는 어떤 동물로 살아야 할지 궁리한다. 은색등이나 점프하던 타조를 보면 동물원도 나름의 경쟁은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이 세계에서 장애였던 요소를 동물원에서 특기로 살렸다. 나의 특기는 무엇일까. 흠! 흠을 하는 오랑우탄, 흠을 하는 곰, 흠을 하는 너구리.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동물원에서는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문득 구경거리가 되어 동물원에 갇혀 사나, 전신마비가 되어 몸에 갇혀 사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이 귀찮다. 발걸음을 돌려 다시 집으로 향한다. 그림자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듯 발이 무겁다.

  흥얼거리며 하쿠나마타타 게임을 연다. 아프리카 뷰어 모드로 들어가 하게니아 숲 CCTV를 선택한다. 고릴라 가족이 보인다. 나이 든 우두머리 은색등이 나무 그루터기 위에 서 있고, 젊은 수컷들이 하게니아나무 위에서 주변을 살핀다. 그들의 보호 때문인지 나이 어린 고릴라들이 서로 엉겨서 장난친다. 어미 고릴라의 등에서 내려온 새끼고릴라가 뒤뚱거리며 걸어간다. 어미고릴라는 짓궂은 표정으로 아기 고릴라를 붙잡아 간지럼 태운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날이 어두워지자 그들은 이끼 위에 잠자리를 만든다. 나도 바닥에 요를 깔고 눕는다. 궁싯거리자니 서글퍼진다. 아내는 왜 이렇게 살벌해졌을까.

  처음 내 방에 온 날 아내는 말했다. 초식동물 같은 네 눈이 마음에 들어. 그날 그녀는 내 귀에 숨을 불어넣으며 내 몸을 더듬었다. 나도 서둘러 아내를 안았다. 아내의 몸은 아늑하고 훈훈했다. 그 뒤로 아내는 수시로 내 방을 무단으로 점거했다. 특히 가족들 중 누군가와 다퉜을 때는 며칠씩 진을 치고 돌아가지 않았다. 어느 날 술에 취한 그녀가 말했다. 우리 부모는 최악이야. 자식이 네 명이나 되는데도 직업을 가진 적이 없어. 중학교 때 사촌에게 우리 가족이 하이에나 떼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땐 죽고 싶었어. 부모님이 친척들 돈을 떼먹으며 살았거든. 그런데 그런 돈이라도 있는 게 나아. 환경이 척박하면 사람은 억척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거야. 며칠 뒤 그녀는 내 방으로 아주 이사를 왔다. 그날 내 빗장뼈를 더듬으며 말했다. 너와 함께라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아내가 이렇게 그악스러워진 것은 내가 우두머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해서일 것이다. 보험금을 탄다면 아내만이라도 편히 살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가족을 위해 우두머리로서의 역할을 하고 싶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남은 비타민을 모두 삼킨다. 졸음이 몰려온다. 문득 잠들었다가 깨면 문이 나타나고 그 문을 통과하면 하쿠나마타타 게임 속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그곳에서 인간으로서 산 기억은 모두 잊고 네안데르탈인이 되어 살 것이다. 다른 네안데르탈인들과 음악적인 언어로 소통하는 장면을 상상하자 마음이 편해진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 소리, 동물 소리. S동물원 뒷산에서 들었던 소리다.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난다. 방 안에 안개가 자욱하다. 모니터가 있던 곳에 철문이 서있다. 두꺼비집 뚜껑을 열고 설명서를 읽는다. '이 문은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입니다. 이곳을 넘어가면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캐릭터가 되어 하쿠나마타타 게임 세계에서 살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으로서의 기억은 모두 지워질 것입니다. 당신은 일주일 전에 이 문을 만났기 때문에 잠시 후 자정이면 문은 사라질 것입니다.'

  문 저쪽으로 한쪽 발을 내디딘다. 다른 쪽 발을 떼려는 순간 갑자기 불안해진다. 혹시 기억이 지워지는 게 함정은 아닐까. 어쩌면, 과거에 문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온 것은 아닐까. 초침소리가 요란하다. 곧 문은 사라질텐데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다. 문틀을 부둥켜안고 길게 흠을 한다.

  

<당선소감>

   "소설 속 인물들에 좀 더 당당해진 느낌"

  몇 년 전, 이 세계와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단번에 홀렸다.

  소설 속 인물들에 덧대어 다양한 삶을 경험할 수 있다니. 소설을 쓰는 행위가 전생의 기억을 지닌 채 윤회를 거듭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평생 소설가로 살 수 있으면 삶이 결코 짧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열고 성큼 들어섰다. 그러나 고백하건데 지난 몇 년 동안 이 세계에서 지낸 시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이 비정하고도 성스러운 세계에서 나는 기대와 좌절을 반복해야 했다. 새 인물에 덧대어 사는 동안 마음은 뜨거웠지만 현실에서의 결과는 초라했다. 이곳은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이 견디기엔 힘든 세계였다. 해가 갈수록 점점 이 세계에 정착할 것이란 확신이 약해졌다.

  며칠 전 밤길을 걸어서 집으로 오는데 어깨 위로 눈이 내렸다. 눈이, 자꾸만 어깨를 눌렀다.

  언제까지 불법 체류자로 이 세계를 떠돌아야 할까. 어쩌면 영영 정착 허가서를 받지 못할 거란 생각에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담벼락 아래 쪼그리고 앉아 울렁거리는 속을 비워내는데 눈물이 딸려 나왔다. 이 세계에 들어선 뒤 처음 흘린 눈물이었다. 어떤 존재가 그런 나를 안타깝게 여기기라도 한 걸까. 격려라도 하듯 다음날 전화벨이 울렸다. 영남일보였다.

  이 격려가 내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이젠 나와 내가 덧대어 살 많은 소설 속 인물들에게 좀 더 당당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세계에 정착하도록 도와준 영남일보에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굼벵이처럼 느린 저를 이끌어주신 박상우 선생님과 동국대학교 예술대학원 교수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함께 공부하며 위로와 격려를 나누던 소행성 벗들과 가족들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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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거침없는 문장으로 세태적 일상 그려

  좋은 작품이 많았다. 선뜻 어느 하나를 고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작품은 저마다 다채로운 성향을 보이고 있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꽤나 빠르고 다양하게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들인 끝에 고른 작품은 일단 다섯 편이었다.

  '듣고 있니?'는 탄탄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도식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작품 속 세계를 완전한 것으로 하려는 의욕이 지나치면 생명의 두근거림은 제한되고 딱딱한 '물건'으로 전락하고 만다.

  '미루나무'는 도시 변두리 마을이 수용되면서 벌어지는 풍경을 그렸고, 사실적이면서 담백한 묘사가 강점이다. 반면 '다들 사라지고 죽음만 남아 있는' 동네 같은 문어체적이고 전형적인 어법이 마음에 걸린다.

  '염소'는 강한 폭발력을 내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관념과 환상, 구체와 일상이 묘하게 결합되어 있고 독자의 눈길을 끈덕지게 흡인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결국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다 추상적인 결말에 다다른 느낌이다.

  '복원'은요즘 많이 투고되는 단편소설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많이 가다듬은 듯 깔끔한 문장, 고대의 벽화를 복원한다는 나름의 전문성, 거기에 결부된 과거와 현재의 갈등, 화해 혹은 해소라는 패턴이 그렇다. 무난하기는 하지만 당선작으로 뽑을 만한 강력한 동기를 발견할 수 없었다.

  당선작인 정영서의 '문' 역시 남성이 주인공일 때 흔히 나타나는 인물상을 다루고 있다. 보험 외판으로 경제적으로 가장의 역할을 하는 아내가 있고 사업에 실패하고 집에 들어앉아 현실도피적인 게임에 빠져 세월을 허송하는 무기력한 남편이 등장한다. 남편은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일말의 가책도 가지고 있는데, 이 '착한' 사람에게 의혹과 갈등이 생긴다는 것이 큰 흐름이다. 아내가 준 비타민이 반전의 흥미를 주고 노래하는 언어 '흠'의 설정은 참신하다. 무리하지 않고 잘 아는 이야기를 차분하게 진전시켜 나가고 있다는 것도 강점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다음을 기약하게 될 분들의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 은희경, 성석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