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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굿바이, 라 메탈 / 박숲

 

광장은 고요하다. 라인 밖(off line)에서는 문식이라 불리는 다나. 게임 속 광장을 가로지른다. 건물 곳곳에서 적의 호흡이 느껴진다. 강한 파괴력을 지닌 TRG-21 에임에 눈을 맞춘다. 연사 속도 0%, 반동이 다른 총에 비해 심하다. 다나는 강하게 떨리는 반동을 좋아한다. 살아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마우스를 쥔 손바닥으로 우우웅- 핸드폰 진동음이 전해진다. 컴퓨터 옆에 놓아둔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한다. ‘오늘 중요한 회식!’ 주인님인 메텔의 메시지다. ‘넵!’ 다나는 답을 보낸 뒤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다나는 TRG-21의 방아쇠를 조심스럽게 잡는다. 다나가 TRG-21을 선호하는 이유는 파워나 정확도가 100%이기 때문이다. 적을 침묵시킬 수 있는 단 한 방. 극도의 흥분과 긴장이 한 곳으로 집중한다.


미션: 클럽 나이트의 지하 창고에 설치된 폭탄을 제거하라! 제한 시간 3분.


핸드폰 진동이 몇 분 간격으로 울렸다 끊어지기를 반복한다. 메텔의 메시지가 끊이지 않는다. 메텔은 카톡과 모든 SNS를 거부하고 끝까지 문자메시지만을 고집한다. SNS는 누군가 자신의 삶을 엿보는 것 같아 불쾌하다고 했다. 다나는 다시 게임에 집중한다. 게임 안에서 레드 팀 하나가 ‘파이어 인 더 홀’을 외치며 다나의 뒤를 바짝 쫓는다. 클럽 나이트까지의 거리 30미터. 다나는 호흡을 멈추고 방아쇠를 당긴다. 헤드 샷! 정확하게 상대의 머리를 박살낸다.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튀어 오른다.


다나는 리사의 핸드폰 번호를 누른다. 전원이 꺼져 있다는 멘트가 나온다. 카톡 역시 확인하지 않고 있다. 어우 썅! 자신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온다. 핸드폰을 내려놓자마자 다시 진동이 울린다. 메텔의 동선이 세밀하게 찍혀 있다. 장소를 옮길 때마다 보내오는 메텔의 문자메시지가 오늘따라 살에 박힌 가시처럼 성가시다. 자판 위에 ㅍ. ㅓ. ㄱ. ㅋ. ㅠ! 라고 총을 쏘듯 마구 친다. 곧바로 게임 사이트의 화면 하단에 욕설의 댓글이 쓰레기처럼 쏟아진다. 클럽 나이트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 모퉁이에서 여러 발의 총알이 날아온다. 컨디션 지수 제로. 캐릭터는 머리와 심장 부근을 맞고 쓰러진다. 진득하게 엉겨 붙은 검붉은 피가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정수리 한복판이 실제로 총알에 맞은 것처럼 욱신거린다.


잠시 게임을 멈추고 리사가 갈 만한 사이트를 뒤진다. 리사는 수지일 때보다 가상에서의 리사일 때 더 자유롭다. 리사는 어디에도 접속한 흔적이 없다. 함께 영화를 보기로 한 약속을 기억하고 있기나 할까. 다나는 리사와 사이트상에서의 부부 관계가 끝난 뒤에도, 리사가 다니는 사이트마다 쫓아다니며 영화 보러 가자고 졸랐었다. 리사는 다나와 영화를 볼 거면 차라리 돈 되는 아저씨들 꼬셔서 드라이브 가는 게 훨씬 이익이라고 했다. 다나 역시 돈을 지불하겠다고 했다. 미친놈! 날 뭘로 보는 거야? 애새끼들 후린 돈을 나한테 준다구? 아 존나 슬프다. 다나는 리사의 반응이 자존심 상했지만 참았다. 그딴 거 끊은 지 오래됐거든. 알바비 주면 될 거 아냐. 리사에게 가상이 아닌 실제 공간에서 사귀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너랑 놀아줄 시간 없거든요. 알바비? 펫 분양 어쩌구 여기저기 찝쩍대더니 널 키운다는 사람이라도 나타난 거임? ㅎㅎ 완전 쌩깐 건 아닌가 보네.


누군가 다나를 펫으로 입양한다는 얘긴 사실이었다. 펫을 입양하겠다는 쪽지를 받던 날 다나는 값비싼 아이템을 구입해 리사를 멋진 여전사로 꾸며 주고 싶었다. 펫이 되어 돈을 버는 것만이 관심사였기 때문에 주인이 될 대상이 누구이건 상관없었다. 그런데 설마, 펫을 입양하겠다고 쪽지를 보낸 사람이 메텔이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메텔과 리사는 게임사이트의 라 메탈 멤버들이며 저격수 마니아들이다. ‘라 메탈’은 마츠모트 레이지 원작인 은하철도999 시리즈 만화에 등장하는 혹성 이름이다. 천 년 주기의 궤도를 벗어나 한파에 뒤덮인 라 메탈. 모든 사람과 사물들이 점점 기계화되어 간다는 설정이 익명의 유저들이 떠도는 사이버 공간과 비슷하다는 착상에서 따온 이름이다. 리사는 다나와 메텔에게 우리들만의 제국으로 라 메탈을 사수하자고 했다.


다나는 부 캐릭터로 메텔과 에메랄다스를 구출하려다 몸이 두 동강 나 죽게 되는 ‘다나’가 되었다. 메텔은 자신의 진짜 꿈이 우주 여행자라며 메텔이 되기를 원했다. 리사는 메텔의 여동생인 우주의 해적 에메랄다스가 되었지만 이름이 길어 원래의 닉네임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처음에 주 멤버는 성태까지 네 명이었지만 성태는 옛날 구닥다리 게임, 완전 구리고 노잼이라며 금방 탈퇴해버렸다. 세 사람은 비슷한 게임 사이트를 돌며 라 메탈 조직을 유지해 나갔다. 어떤 게임에 접속을 하든 셋은 하나의 끈으로 연결된 긴밀한 관계가 된 것 같았다. 세 사람 외에도 다른 유저들이 철새처럼 라 메탈에 잠시 착륙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어느 날 두 통의 쪽지가 와 있었다. ‘당신은 길드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다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쪽지를 열었다.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대놓고 쫓아내는 건 그나마 좀 나았다. 길드의 유저들은 팀 승률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면 보이지 않은 압박을 가해 스스로 떠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다나는 왜 자신이 추방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가족보다 더 끈끈한 정을 나눈다는 그들의 타이틀은 모두 거짓이었다. 그들이야말로 따뜻한 햇살의 감촉도 꽃의 향기도 맡을 수 없는, 감정이 사라진 차가운 기계 인간들일 뿐이었다.


두 번째 쪽지는 마리아가 닉네임인, 다나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내용이었다. ‘직접 펫이 되겠다고?’ 대뜸 반말이었다. 한 달 전부터 다나는 여러 곳의 사이트를 돌며 ‘나를 펫으로 분양합니다’라는 제목으로 공개 게시물을 올렸었다. 역할 대행 알바를 몇 번 해봤지만 다나는 펫 역할이 자신의 처지에 가장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개적인 펫분양 광고 글은 장난 아니면 19금 비공개 카페에서나 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대개 장난기 섞인 말투의 댓글이 올라오거나 혹은 개나 고양이를 분양하는 걸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자가 필요하면 당당하게 돈을 주고 사라는 비난성 댓글이 올라올 때면 온갖 ‘충’들의 질퍽한 싸움이 이어졌다. 다나는 한동안 여러 사이트에서 논란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다나는 사이트를 옮겨 다니며 끈기 있게 글을 올렸고, 아주 가끔 연락이 오기도 했다. 좀 논다는 여고생들이 노래방으로 불러내거나, 대학생 누나들은 하루 파트너로 분양을 신청했지만 대개는 다나의 실제 모습에 실망스러워했다. 짓궂은 누나들은 노골적 성적 표현이나 성적 수치감을 주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어서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돈이 떨어지면 으슥한 공원 벤치나 지하 주차장 또는 어두운 건물 계단에서 쭈그리고 자는 짓은 이젠 지긋지긋했다.


다나는 더욱 많은 사이트를 기웃거리며 점점 더 자극적인 글을 올려 수시로 강퇴를 당했다. 다나는 잠깐의 파트너가 아닌 든든한 스폰서를 원했다. 물론 그런 스폰서를 만난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지만 말이다. 성태와 일주일에 두세 번은 술 취한 아저씨들 주머니를 털어 끼니를 때우며 피시방을 전전했다. 그러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그런 짓은 이젠 끊고 싶었다. 누군가의 펫이 되어 돈만 생긴다면 까짓거 주인이 어떤 짓을 요구하든 다 들어줄 각오가 돼 있었다.


오랜만에 입양 희망자에게 쪽지를 받았다. ‘기간이나 비용, 모든 조건이 입양자 맘 내키는 대로? 개웃김^^ㅋ 어쨌든 무조건 복종! 확실함?’ 오오! 월척이 걸릴 것 같은 예감. 자판을 두들기는 다나의 손가락이 빨라졌다. ‘넵, 주인님 명령이라면 무조건 개복종! 개충성!’ 다나는 재빨리 마우스를 클릭하여 쪽지를 날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상대에게 답장이 오지 않았다. 또 낚였냐? 벼엉신, 깝치고 있네, 차라리 좆을 판다고 올려 봐. 쪽팔리게 펫이 뭐냐? 옆에서 컵라면을 들고 면발을 후루룩거리던 성태 자식이 키득거렸다. 다나는 받은 쪽지와 보낸 쪽지의 내용을 다시 훑어보았다. 마리아? 닉네임이 졸라 구리다. 아이디에 맞게 진지한 답글을 보낼 걸 후회스러웠다. 쪽지를 다시 보낼까 하다 참았다. 이쪽에서 안달을 내면 오히려 지는 게임이다.


다나는 성태 자식에게, 뭔 개솔? 짜증을 내며 게임을 다시 이어갔다. 메텔이 접속했다. 다나는 메텔에게 반갑다는 인사를 건넸다. 메텔은 웃는 표정의 이모티콘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다나와 메텔은 서로를 엄호하며 지하 창고로 향했다. 호흡을 오래 맞춰서인지 메텔과 함께 미션을 수행하면 자신이 죽는 데쓰의 수보다 적을 죽이는 킬이 늘어나 계급도 함께 상승했다. 미션을 성공하셨습니다! 이동하실래요? OK!


마리아라는 닉네임으로 다시 쪽지가 날아온 건 삼 일이 지난 뒤였다. 이미 쫑난 거라 생각했던 쪽지가 다시 날아오다니, 99.9% 성공을 확신했다.


‘어떤 요구나 명령에도 무조건 복종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음?’


아나 속고만 살았나. 네엡, 무조건 개복종요, 주인님 충성^-^! 상대에게 매달리려는 속셈이 빤해 보여 다나는 잠시 망설였다. 문장에 드래그를 입혀 삭제할까 하다 보내기를 클릭했다. 이 정도 관심이면 거래는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복종이란 말을 자꾸 강조하는 건 왠지 좀 찜찜했다. 혹시 변태? 뭐 상관없다. 리사가 상대하는 남자들도 매일 한 놈 정도는 변태라고 했다. 다나는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리사에게 폼나게 쏘고 싶었다. 주황색의 쪽지 알림 표시가 깜빡거렸다. 다나는 리사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조금만 기다려!


메텔은 삼십 분 간격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온다. 회사에서 나왔는지 회식을 하러 가는 위치의 지명을 세밀하게 찍어 보낸다. 메시지를 확인하는데 영상 통화가 울린다. 다나는 화면을 보고 깜짝 놀란다. 웬 영상? 리사의 얼굴이 흔들리며 나타난다. 헐 잘못 눌렀네, 아직도 기다리냐? 다나는 극장 옆 피시방에 들어와 있다는 말을 꿀꺽 삼킨다. 메텔과 함께 지낸 뒤 게임 밖 리사를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메텔이 리사를 만나지 못하게 한 까닭도 있지만, 리사가 매번 다나가 아닌 라인 밖 문식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리사는 다나에게 얼굴은 왜 가리냐고 한다. 다나는 그냥, 하며 대체 화면으로 바꾼다. 지금 튕기는 거? 리사가, 아니 수지가 피식 웃는다.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미소다. 아씨 지금 내 꼴이 말이 아니네. 리사는, 아니 수지는 마치 셀카라도 찍듯 각도를 이리저리 옮기며 표정을 짓는다. 다나는 마치 수지를 마주 보고 있기라도 한 듯 쑥스럽다. 당장 수술해야 되는데 돈이 부족하네, 좀 빌려줄래? 다나가 놀라서 묻는다. 수술?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바꿔 드는지 화면이 흔들린다. 재수 없게 또 걸렸지 뭐야, 아 존나 짜증! 리사는 전에도 똑같은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메텔의 펫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게임 도중 리사는 다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재수 없게 걸렸는데 수술비가 없다고 했다. 뭘 걸렸다는 건지, 무슨 수술을 한다는 건지. 다나는 리사가 아닌 라인 밖 수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흥분하여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수지는 예상보다 훨씬 예뻤다. 수술했다면서 술 마셔도 돼? 다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비록 가상공간이었지만 결혼했던 사이라 그런지 첫 만남인데도 어색한 건 없었다. 수술 따위 별거 아닌데, 애를 지웠다고 생각하면 기분 더럽거든. 그래서 아무한테도 말하기 싫어. 수지의 말에 다나는 울컥해서 물었다. 나한텐 왜 말하는데? 넌 찌질이라 부담이 없거든. 다나는 수지가 몹시 실망스러웠다. 수지는 역시 리사일 때가 훨씬 인간적이고 빛이 났다.


리사는 라 메탈에서 저격수로 활약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라 메탈에서 만큼은 키스 알바를 하지 않아도 되고 변태 아저씨들에게 당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다나 역시 라 메탈에서 최고의 저격수이며 영웅으로 사는 게 좋다. 다나는 자주 리사와 키스하는 상상을 했다. 리사가 처음 라 메탈의 멤버로 왔을 때를 떠올린다. 리사는 은하철도 만화 시리즈의 광팬이라고 했다. 자신과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을 만나 가슴이 설레며, 라 메탈 이름이 마음에 든다는 내용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세밀하면서도 포인트를 잃지 않고, 독특하고도 흥미로운 글을 올려 유저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다나는 공식적으로는, 초보인 리사에게 여러 가지 전술 요령을 알려주며 잘난 척했고, 비공식적으로는 은닉 아이디를 사용해 리사의 뒤를 쫓아다녔다. 다나의 장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리사는 언제나 당당하고 쾌활하게 맞대응했다.


가령, 난 말야, 중학교 교장이다. 너 중딩 맞지? 학교 어디야!!


리사 왈, ㅎㅎ 난 꽃다운 씨팔 세~ 취미는 키스, 특기도 키스, 기차역 일대가 내 활동 무대, 교장샘~ 나랑 키스할까? 나 존나 키스 잘해 쪼옥~♥


얼마 뒤 약혼반지와 천사의 날개 아이템을 선물하며 리사에게 사이버 결혼을 신청했다. 리사는 흔쾌히 다나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메텔이 몇 가지 아이템을 결혼 선물로 주었지만, 평소와 달리 채팅창에서 말이 없었다. 메텔은 무슨 일인지 그날따라 과격하고 저돌적으로 게임을 이어갔다. 두 사람은 눈치 없이 채팅창에 하트를 남발했다. 다나는 현실에서 리사와 실제로 결혼한 것처럼 기분이 들뜨고 행복했다. 마치 하루하루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짜릿하고 즐거웠다. 아주 잠깐이라도 사이버 공간을 벗어나면, 라 메탈의 혹성에서 이탈되어 검은 우주의 미아라도 된 것처럼 두려웠다. 다나는 영혼을 빼앗긴 기계 인간이 되더라도 리사와 메텔이 있는 라 메탈에서 살고 싶었다. 라 메탈은 모든 것이 꿈처럼 달콤하고 따뜻했다.


리사를 대할 때면 언제나 할머니가 말했던 여고생 얼굴도 함께 그려지곤 했다. 그 어린 것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그랬겄냐. 이빨로 탯줄을 끊었는지, 얼굴이 피범벅이 돼선 정신없이 도망가더란다. 삼촌이 병을 앓아서 그렇지 심성이 나쁜 건 아니니께 니가 참어라이. 사내의 극심한 폭력 뒤면 언제나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던 할머니. 폐휴지를 줍고 집에서 기른 상추나 부추, 고추 등을 시장에 내다 팔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갔지만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 할머니. 죽지 않고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 돌아오지 않겄냐. 그 여고생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버린 건 아닐까. 리사와의 가상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리사와 이혼을 하고 나자, 다나는 어쩐지 오래전 버려진 핏덩이가 된 기분이었다.


메텔은 현경으로 불리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전문대를 졸업한 뒤 십 년 동안 한 회사에서 일을 했다고 했다. 메텔은 갈수록 회사에서 있으나마나 한 존재가 돼 간다고 했다. 지금도 회식을 하는 동안 모든 직원들은 새로운 팀장에게 집중할 것이다. 메텔은 구석에 앉아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겠지. 남몰래 팀장을 노려보며 이미 자신을 떠나버린 남자를 떠올리면서. 메텔은 그 남자 생각이 날 때마다 다나에게 문자를 보내는 것 같았다. 자신이 있는 곳을 누군가 알고 있다 생각하면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메텔이 어떤 이유로 펫을 입양한 건지 알 수 없지만 다나에겐 그저 고마운 주인일 뿐이었다. 사실 펫으로 입양하겠다고 쪽지를 보낸 여자가 메텔이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상한 쪽지를 주고받던 날 다나는 주인이 될지도 모를 입양자를 만나러 갔었다.


그날 메텔은 롯데리아 이 층 창가에 앉아 있었다. 다나는 그녀가 쪽지를 보낸 여자 같다는 예감에 무작정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뭐 먹을래? 메텔은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물었다. 좀처럼 잘 웃지 않는 인상이었다. 쌍꺼풀이 없는 눈은 날카롭고 예민해 보였다. 메텔은 말없이 어딘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았다. 콜라를 한 모금 마신 뒤 다나에게 물었다. 니 조건은 뭔데? 다나는 피시방에서 지낼 돈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뭐? 너 지금 관심이라고 그랬니? 메텔은 마시던 콜라를 풉, 하고 내뿜었다. 생각지도 않은 말이 튀어나와 다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에이, 농담이죠. 저야 뭐, 먹고 잘 데만 있으면 돼요. 메텔은 정색을 하며 물었다. 가출? 아아 됐고, 우선 한 달 계약하고, 하는 거 봐서 재계약하든지. 일어나! 다나는 잔에 남아 있는 얼음을 입에 물고 메텔을 쫓아갔다. 입안에 가득 찬 얼음이 박하사탕을 문 것처럼 시원했다.


메텔의 뒤를 따라가며 다나는 가로수를 바라보았다. 가지가 몽땅 잘린 플라타너스 나무 둥치에 여린 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여린 잎들이 시멘트 기둥을 힘겹게 뚫고 나온 것처럼 안쓰러웠다. 그렇게라도 단단한 껍질을 뚫고 나온 여린 잎에 비해 자신은 단단한 기둥 안에 갇혀 바깥으로 뚫고 나오지 못하는 것 같아 답답했다. 메텔의 집은 건물이 낡아 보이는 오피스텔 4층이었다. 넌 저쪽에서 자. 다나는 방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강아지 키워요? 와아, 이게 다 강아지 건가? 메텔이 얼굴을 찡그렸다. 다나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재빨리 시선을 거두었다. 어두운 계단이나 공원 벤치에서 자고 난 뒤 울고 싶도록 쓸쓸했던 기분을 메텔의 표정에서도 언뜻 본 것 같았다. 다나는 장난감 뼈다귀를 만지작거리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하나의 공간을 소파로 경계를 두어 두 개의 공간으로 분리해 놓았다.


책상 위에는 몇 권의 책과 구형 컴퓨터가 있었다. 이거, 인터넷 돼요? 당연하지. 메텔은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침대 옆 탁자 위엔 노트북이 펼쳐져 있었다. 다나는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 뼈다귀를 바구니에 던졌다. 스스로 원한 거지만 진짜 펫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게 먹고 지낼 곳이 생긴 것은 신기했다. 게다가 메텔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현금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꼭 필요할 때만 뽑아 써. 다나는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리사를 떠올렸다. 라 메탈 혹성에 가보는 게 꿈이라던 리사와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라 메탈 혹성이 아니라도 좋았다. 어디든 리사와 함께라면 다 좋을 거 같았다. 어쨌든 갈 곳이 없다고 장난처럼 말했을 뿐인데, 선뜻 다나를 집으로 데려온 거나 현금카드까지 내미는 메텔이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메텔이 더 이상하게 보인 건 다음 날이었다. 밤 여덟 시 쯤 메텔이 초인종을 눌렀다. 다나는 잠이 취한 상태로 문을 열었다. 다짜고짜 메텔은 다나의 뺨을 후려쳤다. 야, 너 이 자식! 메텔에게 술 냄새가 풍겼다. 빨리빨리 문 못 열어? 어쭈 이게 뭐야, 신발은 항상 똑바로 정리해 놓으라고 했지. 바닥에 이 자국들은 또 뭐야, 청소 안 했어? 메텔은 지나칠 정도로 화가 나 있었고, 다나는 뭐가 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메텔은 욕실로 들어가더니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샤워를 하는지 물소리가 요란했다. 갑자기 메텔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는 것 같았다. 한참 뒤, 욕실에서 나온 메텔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씨익 웃었다. 그러곤 노트북을 켰다. 다나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다나는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만 잤다.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안도감 탓일까.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처럼 계속 몽롱한 상태가 이어졌다. 메텔은 익숙한 게임 사이트에 접속했다. 총성이 좁은 공간을 요란하게 파고들었다. 다나는 슬쩍 모니터를 훔쳐보다 깜짝 놀랐다. 라 메탈 멤버인 메텔? 설마…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다나는 메텔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왜! 치켜 뜬 메텔의 눈빛에 소름이 돋았다. 저기, 그, 혹시, 라 메탈의 메텔? 터지는 총소리가 다나의 물음을 잘게 부숴버렸다. 내가 다나인 거 알고 있었어요? 다나는 메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메텔은 마치 기계로 만든 인간 같았다. 그게 왜, 뭐 잘못됐니? 메텔은 모니터의 푸른빛을 피처럼 빨아들여 에너지를 축적하는 것 같았다. 메텔은 마우스와 키보드를 번갈아 두드리며 총을 쏘아 댔다. 가상 속 부 캐릭터를 현실에서 마주친 기분은 소름 돋도록 생경했다. 라 메탈에서의 메텔은 다나와 리사의 주변을 떠나지 않고 변함없이 지켜주는 든든한 멤버였다. 다나는 괴팍하고 제멋대로이고 기괴하기까지 한 저 여자를 차마 메텔이라 믿고 싶지 않았다. 다나는 문득 메텔과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게임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털어 내지 못한 잠이 확 달아났다. 가슴이 펌프질을 해대고 열 개의 손가락은 팔딱이는 물고기처럼 마구 움직였다. 다나는 소파 주변을 서성대며 메텔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게임이 잘 풀리지 않는지 메텔은 옷을 후다닥 벗어 던졌다. 그런 뒤 욕실로 들어가 물을 끼얹고 나왔다. 전혀 다나를 의식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다나는 궤도를 이탈해 엉뚱한 행성에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두려웠다. 모니터를 훔쳐보았다. 리사도 접속해 있었다. 두 사람은 현실의 캐릭터보다 게임 속 캐릭터가 오히려 인간적이고 따뜻했다. 다나는 어디가 진짜 현실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혼란스러웠다.


담배 연기로 가득 찬 피시방 내부는 마치 행성이 떠도는 우주의 공간처럼 낯설다. 다나는 뻐근해진 목을 돌리며 근육을 풀어준다. 게임 속 미션을 수행하지 못하고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캐릭터를 들여다본다. 라 메탈은 몇몇 유저들이 짝을 이뤄 미션을 수행하고 있다. 리사와 메텔이 없는 라 메탈은 쓸쓸하다. 다나는 단독으로 미션에 다시 가담한다. 적극적으로 적의 공격에 방어하지 않자 여러 발의 총탄이 날아와 다나를 피범벅으로 만든다. 다나는 왜 자신을 펫으로 입양한 건지 메텔의 의도가 궁금하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 메텔은 라 메탈 안에서까지 다나와 리사를 관리하려 든다. 다나는 어차피 메텔의 펫이기에 상관없다. 그러나 리사까지 관리하려 드는 건 못마땅하다.


푸른빛을 뿜어내는 모니터에서 눈을 뗀다. 피시방을 가득 채운 사람들. 컴퓨터 앞에 앉아 머리에 헤드폰을 낀 그들은 각자 원하는 세계를 표류하고 있다. 감정을 잃어버린 기계 인간들을 보는 것 같아 머리털이 곤두선다. 헤드폰을 빼고 모니터 안에서 펼쳐지는 총격전을 관전한다. 소리가 사라진 총격전이 오늘따라 기묘해 보인다. 다나는 여러 게임 사이트를 돌며 자신의 흔적을 차례로 지워나간다. 마지막으로 라 메탈 조직을 해체 시켜 버릴까 망설인다. 그들과 함께 했던 사이트 안을 이리저리 배회하며 생각에 잠긴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상태란 어떤 걸까. 메텔도 리사도 라 메탈도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 더 나아가 사내가 핏덩이를 발견했던 그 이전, 아니 그 여고생의 배 안에 아기가 자리를 잡기 전의 상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메텔의 문자메시지가 다시 도착한다. 회사에서부터 약도가 시작된다. 전화국 담벼락을 끼고 50미터, 횡단보도를 건너 푸른 약국, 수 초밥집과 개미 부동산을 지나 바다 횟집으로 이어졌다. 메텔의 문자메시지는 중독성이 강한 게임처럼 여겨진다. 메텔이 정말로 이상하게 생각된 건 종일 자신의 위치를 내비게이션처럼 세밀하게 남기는 문자메시지 때문이다. 메텔의 이상한 행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술이 취한 날은 항상 새로운 남자를 데려왔다. 쟨 신경 쓸 필요 없어, 하고 내뱉은 뒤 술을 마시며 깔깔댔다. 그들 역시 다나의 존재를 무시하듯 스스럼없이 메텔과 뒤엉켜 침대에서 뒹굴었다. 다나는 그들의 행동을 게임의 연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들의 성행위가 끝날 때쯤엔 사우나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온몸이 축축하게 젖었다. 메텔은 거침없는 행동으로 다나가 펫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인식시키는 것 같았다. 명령도, 강요도, 뚜렷한 의도도 없는 불투명한 상태의 인식을.


메텔의 말대로 낮에는 자유였다. 그 외에는 대부분 함께 게임을 하거나 메텔이 잠들 때까지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메텔이 쉴 새 없이 떠들어댄다는 걸 안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처음 3일 동안은 밤마다 메텔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장 난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였고, 5일째는 귀가 윙윙거렸고, 굳어지는 얼굴 근육을 푸느라 애를 먹었다. 10일쯤 되자 메텔의 말은 거친 자갈돌처럼 잘그락거려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종알대는 메텔의 입안에 총알을 박아 넣고 싶은 충동으로 목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메텔은 마치 자루에 담긴 쓸모없는 말 부스러기를 끝없이 쏟아 내는 것 같았다. 유독 팀장에게 뺏겼다는 남자친구 얘기를 꺼낼 때면 삵쾡이처럼 표독스럽게 변했다.


메텔은 회사 이야기를 할 때도, 동료들이나 자신의 사생활, 심지어 게임에 대해 떠들 때도 모두 숫자와 연결시키기를 좋아했다. 금융회사에서 십 년 동안 숫자를 만지다 보니 어느 순간 자신이 하나의 기호나 숫자가 된 것 같다고 했다. 메텔의 끝없는 얘기가 시작되면 차라리 감정이 없는 기계 인간이 되고 싶었다. 다나는 메텔이 떠드는 동안 종종 다른 생각에 빠졌다. 그 옛날, 여고생은 핏덩이 아기를 왜 자신의 가방에 숨겼는지 궁금했다. 그 상황에서 사라지는 것만이 최선이었을까. 할머니는 핏자국이 누렇게 바랜 문제집을 유품처럼 다나에게 전해 주었다. 여고생을 떠올리다 보면 언제나 상상은 리사로 이어졌다. 어쩌면 여고생의 이미지를 그렇게라도 리사와 연결해보려는 의지일지 몰랐다.


리사는 수술을 잘 끝낸 걸까. 고민을 털어놓는 사이트에 ‘낙태 수술’로 검색어를 친다. 놀랍게도 활자를 교묘하게 바꾼, 불법 낙태 수술 경험담들이 수두룩하게 올라와 있다. 오래전 그 여고생도 차라리 낙태를 택했다면 어땠을까. 열 달 동안 어두운 뱃속에 웅크려 있었을 아기를 떠올리자 날카로운 감정이 차갑게 달려든다. 리사는 지금 어떤 상태일까. 리사를 떠올리자 다나는 마치 자신의 팔다리와 온몸이 잘 벼린 가위에 차례로 잘려 나가는 것 같아 몸을 움찔거린다. 재빨리 계산을 한 뒤 피시방에서 뛰쳐나온다. 탁하고 습한 바람이 후끈한 열기처럼 코끝으로 몰려든다. 교묘하게 숨어 있다 공격을 퍼붓는 복병과도 같다. 순간적으로 호흡을 멈춘다. 눈앞이 침침하다.


메텔이 회사에서 나와 횟집으로 간다고 한 게 한 시간 정도 지났으니 아마도 시계의 숫자는 일곱 시를 표시하고 있을 것이다. 영상 파일을 첨부한 메텔의 메시지 알림이 울린다. 파일을 열자 처음 본 여자의 사진이 뜬다. 속이 피치는 하얀 레이스 상의를 입은 여자는 몹시 내추럴해 보인다. 하늘거리는 흰 천위로 긴 생머리를 자연스럽게 늘어뜨렸다. 여자의 미소는 물속에서 방금 빠져나온 것처럼 아름답고 청초하다. 약도는 횟집에서 다시 호프로 이어진다. 메텔은 왜 이 여자의 사진을 보낸 걸까.


다나는 지하철 쪽으로 몸을 돌린다. 눈알이 빠져나갈 것처럼 통증이 몰려온다. 머릿속에서 총알의 탄피가 탁탁 튀어 오르는 느낌이다. 라 메탈의 혹성은 사라졌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나는 새로운 라 메탈의 차가운 땅 위에 서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영혼은 사라지고 얼음처럼 차가운 감정을 지닌 기계 인간들이 산다는 라 메탈. 표정 없는 사람들이 지나간다. 그들은 갑자기 돌변하여 언제 총구를 들이밀지 모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나와 부딪치자 투덜거린다. 손가락이 미친 듯 움직인다. 다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싸늘하게 식은 금속 표면이 손가락에 닿는다. 메텔의 화난 표정이 떠오른다. 누군가에게 길들여지는 펫은 성태의 말처럼 좆같은 일이다. 메텔 역시 자신이 소속된 집단에 길들여진 펫이나 다름없다. 모든 관계가 먹이사슬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촘촘한 그물망으로 얽혀 있다 생각하자, 세상이 온통 주인과 펫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차량의 불빛을 바라보며 걷는다. 밤의 표면은 화장으로 꾸민 화려한 여자들의 얼굴을 닮았다. 쏟아지는 불빛 앞에 어둠은 습한 골목 어디쯤으로 몸을 숨긴다. 핸드폰이 울리고 영상 통화가 걸려온다. 메텔은 술이 많이 취해 보인다. 액정 화면의 움직임이 끊어질 듯 이어진다. 메텔의 몸이 흔들린다. 어디세요? 화장실. 메텔은 입꼬리를 비틀며 피식 웃는다. 내 인생에서 그년만 사라지면 돼! 중얼거리며 눈물을 닦는 건지 메텔의 손이 화면을 가린다. 잠시 후 메텔은 차갑게 내뱉는다. 오늘 게임은 한 방에 끝내자! 메텔이 묻는다. 무조건 복종할 수 있지? 옙! 메텔이 피식 웃으며 액정화면에서 사라진다. 다나는 문득 라 메탈 멤버들과 폭탄물 제거 미션을 수행하고 있다는 느낌이 번개처럼 스친다. 피시방에서 총에 맞고 쓰러진 마지막 게임이 떠오른다. 메텔과 리사는 각자의 포지션에서 싸우고 있을 것이다. 다나는 클럽 나이트의 지하 창고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하다만 게임은 끝을 내야 개운하다.


지하철 계단을 향해 뛰어간다. 라 메탈 안에는 지하철 계단이 없다. 지하철 계단을 향해 뛰어가는 문식이란 존재도 없다. 다나는 지금 라 메탈 혹성에 들어와 있다고 착각한다. 메텔의 회사 근처까지 지하철로 세 코스. 무조건 복종할 수 있지? 메텔이 묻는다. 사내도 다나에게 복종만을 강요했다. 명령을 어기거나 말대꾸를 하면 어김없이 혁대의 가죽끈이 칼날처럼 다나의 살을 파고들었다. 할머니의 등도 사내 앞에선 온전하지 못했다. 하늘이 맞닿은 계단 위 판잣집은 아무도 침범하지 못할 사내만의 제국이었다. 정신분열을 앓던 오빠를 견디지 못하고 영영 사라져버린 여고생. 다나는 사내의 제국에서 언제나 잭나이프를 숨기고 살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의 다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메텔은 새로 온 팀장에게 모든 걸 빼앗겼다고 했다. 메텔 입장에서 팀장은 라 메탈에 등장하는 적수가 아닌 것이 분해 보였다. 욕실 유리 장식장 안에 아직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쉐이프 면도기와 배가 그려진 하얀 스킨 병, 솔이 마모된 파란색 칫솔이나 서랍장에 곱게 개켜 놓은 사각팬티. 이 모든 것이 팀장만 사라지면 주인을 되찾게 될 거라고 했다. 딱 한 번 메텔과 잠을 잔 적이 있다. 잠결에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다나는 귀를 틀어막았다. 메텔이 다나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넌 내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거야 그렇지? 다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차가운 칼날에 베인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메텔의 눈물이 다나의 얼굴을 적셨다. 다나는 메텔의 체온 속에 몸을 파묻으며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따뜻하면서도 차갑고 있는 것 같으면서 없는 것 같은 여러 개의 감정은 머리가 여럿 달린 뱀처럼 다나를 뒤흔들었다.


메텔은 아직까지 다나에게 직접적인 명령을 내려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영상통화에서 했던 말이 다나의 뇌를 휘젓고 다닌다. ‘한 방에 끝내자!’ 자신의 위치를 세밀하게 보내오는 메시지들은 마치 오늘의 서브 미션을 위한 맵처럼 여겨진다. 전동차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모두 기계 인간처럼 보인다. 라 메탈의 혹성을 그린 만화의 줄거리를 떠올린다. 영혼을 빼앗겨 기계 인간으로 가득한 라 메탈에서 메텔과 에메랄다스는 탈출을 했던가? 메텔과 에메랄다스를 구출하다 몸이 두 동강 난 ‘다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 왜였지? 스스로 목숨을 버릴 만큼 다나에게 두 자매의 존재가 그토록 소중했던 걸까.


전동차의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간다. 다나는 사람들의 뒤꿈치를 보며 계단을 오른다. 지하도를 빠져나오자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다나는 사람들과 섞여 앞으로 나아간다.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적들은 언제나 어둠 속에 숨어 뒤통수를 노린다. 벌레가 기어가듯 뒤통수가 스멀거린다. 전화국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리사에겐 아직 연락이 없다. 리사는 암흑으로 가득 찬 혹성에서 여전히 출구를 찾지 못한 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리사에게 소중한 건 뭘까. 리사 역시 기계 인간으로 변해버린 건 아닐까. 리사를 떠올리자 다나는 잠시 혼란스럽다. 메텔에게 다시 문자가 온다.


메텔이 문자로 보낸 위치는 정확하다. 오피스텔 건물 앞을 지난다. 사람들이 한순간에 사라진 듯 거리는 조용하다. 다나는 주변을 살핀다. 가로수의 여린 잎사귀들은 어느새 크게 자라나 무성하게 펼쳐졌다. 다나는 자신의 푸른 잎은 여전히 단단한 기둥 안에 갇혀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것에 화가 치민다. 어디선가 갑자기 총성이 들린다. 적의 숫자가 몇 명인지 파악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적들은 다나를 두렵게 한다. 라 메탈 안에서 리사와 메텔과 한 가족처럼 서로를 엄호하며 미션을 수행했던 때가 떠오른다.


신호가 바뀐다. 다나는 무기를 확인한다. 메텔은 회식을 마쳤다고 했다. 남자 동료들은 2차를 갔고, 팀장은 회사 지하 주차장으로 갈 거라고 했다. 한 방에 끝내는 거야! 메텔의 눈에서 쏟아지는 푸른 광선이 느껴진다. 건물에서 뿜어대는 열기가 다나의 온몸을 할퀴며 땀방울을 뽑아낸다. 노래방 건물을 지나 메텔의 회사가 있다는 건물 쪽으로 걸어간다. 몇몇 사내가 시끌벅적 떠들며 지나간다. 한 블록만 지나면 회사 주차장이다.


메텔은 팀장이 몇 개월 전 이직한 그녀의 남자친구를 만나러 갈 게 뻔하다고 했다. 긴 생머리 여자가 건물 지하로 내려가며 백에서 차키를 꺼낸다.


라운드 당 작전시간 3분!


메텔은 어딘가에 숨어 다나를 엄호하고 있을 것이다. 마침 주차 관리소는 문이 닫혀 있다. 다나는 눈을 비집고 들어오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아낸다. 긴 생머리 여자의 구두 굽 찍히는 소리가 선명하다. 여자가 뒤를 돌아본다.


1분경과!


발소리를 죽이고 최대한 여자의 뒤를 따라붙는다. 3분 안에 미션을 성공하지 못하면 자신이 죽어야 한다. 여자가 B2라 새겨진 기둥을 돌아간다. 신경줄이 끊어질 듯 숨이 가빠온다. 머릿속에서 총소리가 요란하다. TRG-21이 떠오른다. 다나는 문득, 메텔의 명령 ‘한 방에 끝내기’를 거부하고 싶다. 아무도 내게 명령할 수 없어! 지금은 다나의 단독 미션, 아니 문식이 명령하는 미션을 수행하고 싶다. 한 방이 아닌, 더 잔인한 방법 ‘흉터 내기’로 깊은 상처를 입힐 것이다.


손가락 사이에서 찰칵! 소리가 난다. 금속성의 날카로움이 반짝 빛을 낸다. 손가락에 익숙한 감촉이다. 여자의 구두 굽 소리가 빨라지고 거칠게 내뿜는 숨소리가 들린다. 사내의 혁대가 떠오른다. 문식의 등짝으로 내리쳐지던 혁대의 날카로움이 칼이 되어 살을 파고든다. 사내를 말리던 할머니의 어깨 위로도 혁대가 파고든다. 다나는 사내의 미친 듯 날아오는 혁대를 붙잡는다. 손에 쥔 잭나이프의 날이 사내의 얼굴 여기저기를 가른다. 사내의 눈이 하얗게 뒤집힌다. 무조건 복종만을 요구했던 사내. 라인 밖 문식은 주인을 배반했다. 심장 박동이 요동친다. 다나는 심장이 미친 듯 날뛰는 순간이 좋다. 기계 인간의 차가운 심장과는 다르기 때문에.


여자가 뛰어간다. 라인 밖 문식이 다나에게 명령한다. 무조건 복종할 수 있지? 예스!


2분경과!


다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민첩하게 여자의 곁으로 뛰어간다. 여자가 놀라서 몸을 돌린다. 금속의 푸른 빛이 여자의 머리 위에서 날렵하게 튕겨 나간다. 기계 인간들을 차례로 처치하다 보면 혼란이 멈추고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여자가 놀란 새처럼 파닥거리며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른다. 이 여자는 누구일까. 메텔의 팀장이 아니다. 주춤하던 다나의 팔이 다시 공중으로 올라갔다 빠르게 여자의 얼굴 위를 가른다. 여자가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는다. 하얀 레이스 위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쏟아진다.


3분경과!


W I N!


다나는 재빨리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어두운 골목으로 스며든다. 가쁜 호흡을 간신히 가라앉힌다. 차가운 바람이 날카롭게 파고든다. 다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생각한다. ‘나는 누구의 펫도 아니다. 다나도 아니다. 나는 단지 라인 밖 문식이일 뿐이다.’ 숨을 죽이고 어디선가 문식을 지켜보고 있을 현경을 기다린다. 문식은 손바닥의 끈적이는 핏물을 바지에 닦은 뒤 칼을 똑바로 쥔다. 사이렌 소리가 골목을 휘젓는다. 골목 안쪽에서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들린다. 메텔일지도 모른다. 문식은 마지막 미션을 위해 호흡을 가다듬는다.




  <당선소감>


   "꾸준한 글쓰기로 묵묵히 나아가겠다"


‘문턱’이 지닌 의미를 탐색하며 글로 풀어낼 방법을 찾고 있었다. 이 방에서 저 방, 안과 밖, 이쪽과 저쪽, 이 세계에서 저 세계 등등. 어딘가로 건너기 위해선 꼭 넘어야 할 경계. 당선 전화를 받는 순간 높은 문턱 하나를 넘었다는 안도감에 ‘그래도 해냈어!’ 소리를 질렀다. 마치 빈 배로 돌아오지만 그래도 해냈다고 외친 <노인과 바다>의 노인처럼.

소설은 영혼을 입증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서사라던 루카치의 말처럼 오랜 시간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가장 두려웠던 건 나의 글쓰기에 대한 불신과 마주하는 순간들이었다. 아무것도 아니게 될까 봐. 그런 탓인지 ‘왜 글을 쓰는가’의 질문과 맞닥뜨릴 때면 존재의 이유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매 순간 날카롭게 깨어있어야만 존재 역시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학의 진정한 가치와 목적을 깨닫는 순간까지 앞으로도 꾸준한 글쓰기로 묵묵히 나아갈 것이다.

오랜 시간 문학의 길 위에서 만난 스승들과 문우들, 일일이 호명할 수 없지만 모두가 소중한 인연들이었다. 멈추지만 않는다면 꼭 이룰 수 있다던 나의 첫 스승이신 윤후명 선생님, 소설이 가야 할 진정한 방향성을 제시해주신 박상우 선생님의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기고 있다. 힘든 순간 포기의 유혹이 일 때마다 꼭 붙잡아 주셨던 남상순 작가님께 특별히 감사 말씀 전한다. ‘문학에 길을 묻다’의 문우들께도 깊은 감사를 전한다. 이번엔 제 작품에 운이 닿았지만 다음은 당신들 차례이니 힘내시라고.

나의 소중한 아이들, 든든한 남편, 글보다 딸의 건강을 염려하는 엄마,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는 형제들. 소중한 가족들 덕분에 글쓰기 삶이 더욱 가치가 있음을 고백한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신 전남매일 심사위원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더욱 단단한 작품으로 보답을 드리고 싶다.



  ● 본명 박혜경.

  ● 1967년 전남 출생. 
  ●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

 


  <심사평>


  소설의 재미와 크기·시의성 사이 고심


2020년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코로나19의 해’일 것이다. 전남매일 2021년 신춘문예 소설부문 응모작들을 심사하기 전에 코로나19에 관한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리라 예상했다. 예상과 달리 코로나19 상황을 다룬 작품은 드물었다.

본선에 올린 작품은 5편이었다. <굿바이, 라 메탈>은 사이버 세상 속 현실과 현실 세상을 넓고 깊게 잠식한 사이버 현실이 한 개인에게서 어떻게 혼합되고 충돌하는지를 막힘없이 보여주었다. <평균의 남녀>는 사람의 평균값에 관한 진지한 탐구가 도드라졌으나 보편성을 성취했는지, 아쉬움이 남았다. <홀>은 ‘의식의 흐름 기법’에 따라 실제 현실의 구멍과 의식의 구멍을 병치하여 서술했다. 지나치게 모호한 서술이 아쉬웠으나 묘하게 눈길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붉어진, 흔한 장미 문양>은 편의점에서 일어난 지갑 분실 사고를 둘러싸고 사소한 욕망의 그늘을 현실감 있게 묘사했다. <안녕, 셀리>는 키르키즈스탄 여성의 코리아드림과 한국 여성인 ‘나’의 아메리카드림(영어 구사의 꿈)이 빚어낸 재치 있고 깊이 있는 우화였다.

<굿바이, 라 메탈>과 <안녕, 셀리>를 최종심에 올려놓고 고심했다. 두 작품이 다 문장이 세련됐다. 박진감 넘치는 전개와 주제의식의 선명함, 소설로 재미있다는 점에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지난한 현실에 각기 방식으로 대응하는 양상이 흥미진진했다.

결국 작품이 담고 있는 이야기의 크기와 시의성을 잣대로 <굿바이, 라 메탈>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소설로서 많은 장점을 가진 <안녕, 셀리>에 안타까움을 전하고 <굿바이, 라 메탈>에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 송은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