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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오른손 / 김인정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영화를 본 적이 있어. 전쟁 중 포로수용소였는데, 나치가 유태인 남자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었어.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겨 죽여 버릴 것 같은 분위기였지. 그런데 그 유태인 남자가 두 손을 모으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신은 쓸모 있는 인간이라고 했어.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 말을 하는 남자의 얼굴에서는 어떤 신념 같은 것도 느껴졌지. 남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작업대로 가서 망치질을 하는 거야. 그 순간만큼은 죽음을 앞둔 죄수가 아니라 의자를 만드는 장인 같았어. 뭐라도 할 수 있는 쓸모 있는 인간이 된 거지.


의사는 테니스 엘보라고 했다. 테니스를 친 것도 아닌데, 라는 구태의연한 물음에 그 역시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웃음을 흘리면서였다. 이렇게, 하면서 의사는 오른쪽 팔을 쭉 뻗어 손잡이 돌리는 모습을 흉내 냈다. 상상의 손잡이를 돌리느라 의사의 손등과 손목이 가볍게 뒤로 젖혀졌을 때 구금자씨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예를 들면 말이죠. 반복적인 손목과 팔 동작으로 팔꿈치에 염증이 생기는, 하루에 이십 명 내로 찾아오는 흔하고 일상적인 질병이죠, 했다. 초음파 화면을 들여다보며 일상생활이 힘들었을 텐데 하던 의사는 염증이 심한 편이라 했다. 어쩌면 수술을 요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단은 약물과 물리치료를 병행해보자며 의사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 실비 보험이 있으신가요? 의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구금자씨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의사를 응시했다. 당황스러울 때면 구금자씨는 입을 벌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 모습이 자신의 남루한 행색에 더 치명상일 거라는 사실을 알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구금자씨는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도수치료비가 좀 부담되는 금액이라…… 네, 그럼 다 됐습니다. 나가시면 안내해드릴 겁니다. 의사는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구금자씨는 소맷부리로 삐져나온 낡은 속옷을 들킨 것처럼 치욕스러웠다. 내일 일어나면 주사 때문에 진통이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괜찮은 줄 알고 안 나오시면 안 됩니다. 이틀에 한 번씩은 내원하셔서 치료 받으셔야 됩니다. 구금자씨는 보풀이 잔뜩 일은 코트에 한 쪽 팔을 끼며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구금자씨는 가방을 들 때,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거나, 병원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때, 그럴 때마다 오른손이 아닌 머뭇거리는 왼손을 들어 올렸다. 오른손은 주먹을 꼭 쥔 채였다. 너는 절대 움직이면 안 돼, 하는 구금자씨의 보호 아래 손은 쑥스러운 듯 바짝 긴장돼 보였다.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지방 중소도시였다. 중심부에는 도시를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영화관과 대형 할인점이 있었으며 역사만큼 오래됐거나 지은 지 얼마 안 된 건물들이 키를 달리하며 경쟁하듯 그 주변을 촘촘히 에워싸고 있었다. 근래 들어 그 사이를 어떻게 뚫고 들어갔는지 타워크레인이 자리 잡게 된 일이 특이할 만한 사항이었다. 양팔을 늘어뜨린 채 높이 솟아있는 타워크레인은 마치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처럼 주변에 동화되지 못하고 생뚱맞게 서 있었다. 어쩌다 건물 사이로 그것이 드러날 때마다 구금자씨는 불편하고 불안했다.


5층 건물 꼭대기 층에 위치한 병원은 여기저기 메우고 덧칠한 흔적이 농후했다. 하지만 워낙 그 주변이 고만고만한 때와 나이를 먹은 건물들로 군집을 이루었고, 그곳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역사와 규칙과 정돈과 생기가 있었기에 함부로 할 수 없는 엄숙함도 있었다. 구금자씨는 그 안에서 편안했다.


집까지는 버스로 세 정거장이었다. 구금자씨는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영하 십 도였고, 눈발이 하얀 재처럼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평일 점심때였지만,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불과 몇 개월 전만해도 여기저기 바래진 건물 안에서 그만큼의 빛이나 무게를 지닌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 지어 나와 삼천 원 칼국수 집이나 오천 원 백반 집으로 또는 편의점으로 몰려가면서 수다를 떨거나 담배를 태우는, 활기가 있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구금자씨는 그런 광경들이 갈수록 드물어진다고 생각했다. 한 집 건너 임대문의를 붙여놓은 상가들이 생겨났다. 가끔 둘러보던 보세옷 가게도 천 냥 숍도 없어졌다.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 구금자씨는 문득 슬퍼졌지만, 아직까지 자신은 괜찮다는 안도감에 조금은 당당히 텅 빈 가게를 지나쳐 걸었다. 그래도 병원에서 지출한 육만 원이 자꾸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도수치료를 제외한 초음파에 엑스레이, 주사, 처방전, 진료비가 모두 포함된 금액이었다.


육만 원은 구금자씨의 일주일 치 생계비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밥값, 교통비, 그 외 자잘한 생필품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쉬는 날 하루를 빼면 하루 만 원씩 쓸 수 있는 돈이기도 했다. 구금자씨는 결국 도수치료는 받지 못한 채 처방전만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일 년 열두 달, 삼백육십오 일에 잘 맞게 짜진 그녀의 월급 사용 내역에는 몸이나 마음의 병에 연관된 항목은 없었다. 참아야 되고, 돈을 들여서는 안 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몇 달 전부터 시작된 팔꿈치의 통증은 유별났다.


결국 구금자씨는 어제 놀이방에서 십 개월 여아를 화장실 딴딴한 타일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여아의 엉덩이를 닦아주려고 세면대에 섰을 때, 더는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아이의 몸무게를 받히던 오른팔에 들이닥친 것이다. 그건 아픔이라기보다 그냥 팔이 잘려나가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구금자씨는 급하게 주저앉으면서 아이를 두 허벅지와 왼 팔로 받쳐 낼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오른팔은 잘못 조합된 인형 팔처럼 축 늘어진 채 대롱거렸다. 본인도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 억울하고, 당황해하는 모습이었다.


길을 걸으며 구금자씨는 어제의 이물감이 생각난 듯 두꺼운 외투 위를 더듬어 자신의 오른팔을 살살 주물렀다. 좀 더 버텨줘야 해. 구금자씨는 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건 바로 그녀의 삶에 위험을 초래한다는 의미였다.


구금자씨는 가진 게 너무 없었다. 해가 갈수록 전화번호 목록도 줄어갔고, 살림살이도, 키도, 머리숱도, 몸피도. 그나마도 넉넉했던 게 없었기에 쇠잔해가는 것들은 그녀를 더 가속적으로 곤궁하게 만들었다.


섬처럼 느껴졌다. 과거 언젠가 남해에서 바라봤던 섬. 까마득히 멀어 보이는 자잘한 섬들. 자기들끼리 다가갈 수도 없는, 누구도 찾지 않는, 이름도 없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런 외로운 섬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나이 쉰을 넘어선 요즈음 더 자주 그 생각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원룸에 도착한 구금자씨는 얼마간 동그란 손잡이를 쳐다봤다. 어느 때고 스스럼없이 잡고 돌렸던 손잡이가 낯설고, 두려웠다. 비닐 코팅이 벗겨지고 녹이 슨 문이었지만, 손잡이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듯 본인이 있어야 할 자리에 변함없이 못 박혀 있었다.


지금껏 구금자씨는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오른쪽으로 돌려, 숱한 문을 지나왔다. 그곳이 집이었든 직장이었든 공공장소였든 그 문을 통해 그녀는 많은 경험과 시간을 보내왔고, 마치 처음 보는 물건인 양 손잡이를 주시하는 지금 이 순간까지 도달한 셈이다. 구금자씨는 그 문들을 통과한 대가를 비로소 자신의 오른팔이 원하고 있음을 알았다. 정당한 부름이었고, 요구긴 했다. 하긴 어디 그뿐이랴. 구금자씨는 자신의 온 체중과 생계를 이제껏 오른팔에게 의지해왔음을 시인했고, 그러고 나자 그 애에게 한없이 미안한 생각이 들어 마음이 다 아렸다. 그녀는 반쯤 올라간 오른손을 정중히 내리고 왼손을 들어 올렸다.


생각보다 오른손이 하는 일들은 너무 많았다. 과거에는 모르고 지나쳐왔던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어떻게 그 공을 모르고 있었을까. 평소 스스럼없이 행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니 더 그랬다. 사소한 일이지만, 병뚜껑을 열거나 나물을 다듬거나 걸레를 짤 때마저도 힘은 오른쪽 그 애가 주도적으로 썼다. 왼손은 그저 병을 받쳐주거나 나물이나 걸레를 잡아주는 보조적인 역할만 했다. 도구를 들고 또는 빈손인 채 무언가를 자르고, 누르고, 당기고, 돌리는 그 모든 일련의 과정들을 오른손이 해온 셈이었다. 마치 티 내지 않으면서 일이란 일은 모두 해내던 묵묵한 사원의 진면목을 그가 퇴사하고야 알아챈 것처럼 그녀는 당황스럽고, 공포감이 엄습했다. 그나마 아직까지는 오른손이 주인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음이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반면 비등한 자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똑같은 지위를 차지하고 대가를 받는 왼손은 말만 많은 무능한 직원처럼 느껴졌다. 하는 일 없이 거저먹기만 하는 군식구 같았다. 반면 오른손은 똑같은 엄마의 몸에서 태어났지만, 일은 일대로 제일 많이 하면서도 차별받는 삶을 살아온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형제가 많았지. 부모도 가끔 이름을 헷갈릴 정도로.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어. 그래도 다들 어떤 식으로든 기억되잖아. 한속에서 나도 나오는 시기도 생김새도 다르니까. 누구는 예뻐서, 누구는 똑똑해서, 누구는 말을 잘해서, 누구는 막내라, 첫째라. 내 경우에는 그랬어. 누구였더라. 집에 오는 어른들은 놀이 삼아 아니면 자신의 기억력을 시험해본다는 듯이 일렬로 죽 세워놓고 첫째부터 이름을 훑어 내리곤 했어. 항상 막히는 것은 나였지. 그 순간만큼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어. 존재감이 없으므로 해서 관심을 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긴 하지. 내 얼굴을 쳐다보며 이름을 기억해내려고 애쓰는 어른들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그 시간이 빨리 지나기를 바랐어.


구금자씨는 수도꼭지를 돌리고 가스렌즈를 켜고 숟가락 젓가락을 들거나 화장실 볼 일을 마치고도, 그 모든 일을 왼손에게 일임했다. 전기 스위치, 밥통, 난방조절기, 스마트폰을 보는 족족 달려드는 오른손을 제지하고 왼손을 다그쳤다. 처음에는 주춤거리던 왼손도 서툴렀지만 참을성 있게 일들을 해나갔다. 어색해하고 조마조마 해하던 오른손도 어느 순간부터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다져진 습성은 쉽게 고쳐지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오른손이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깨우쳤으니, 구금자씨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른쪽에 무리가 생겨 그런 거라면 왼손으로 하면 되지 않나요? 일을 쉴 수 없으면, 당분간 일을 줄여서라도 오른쪽 팔을 많이 움직이지 말라는 의사에게 구금자씨가 물었다. 의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왼쪽 팔도 똑같은 통증이 시작될 겁니다. 진행은 당연히 오른쪽 보다 더 빨라질 테고요. 결국 양쪽 팔 모두 힘들어질 뿐입니다. 사람 몸에 생기는 암이란 것이 염증이 원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팔에 있던 염증이 반대쪽 뿐 아니라 장기나 관절로 옮겨갈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사람 몸에 이상이 온 것치고 별일 없이 사라지는 것은 없으니까요. 그 흔적 또한 어떤 식으로든 남기게 되는 거죠. 누구 말마따나 생계를 접을 수 없으니, 약으로라도 치유를 하는 거죠. 염증은 애초 깨끗하게 없애야 합니다. 초음파상으로 봐도 깨끗해질 때까지.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오른팔을 쉬게 하기 위해서는. 얼마간 왼팔을 써서 무리가 간다 해도, 그 긴 세월을 견뎌온 오른팔에 비한다면 이 정도는 왼팔이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더는 병원에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나중에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일단 지금은 고통을 분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나아지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구금자 씨가 근무하는 놀이방은 삼십 년이 넘은 아파트 일 층에 있었다. 최근 몇 년 사이 그 주변으로 많은 아파트가 지어졌고, 주민 일부는 일찌감치 새 아파트로 옮겨갔다. 대부분이 의욕적이고 활기찬 젊은 부부들이었고, 당연히 그들의 튼튼하고, 영특한 아이들도 딸려갔다. 젊은 사람들이라도 은행 대출이 막혀있거나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신경하거나 욕심이 없거나 변화를 싫어하거나 게으르거나 스스로 낙천적이라 생각하거나 남들이 비관적이라 말하는 부모들은 남겨졌고, 그들의 아이들과 놀이방도 남았다.


구금자씨는 그곳에서 보육도우미로 일했다. 놀이방의 점심과 간식을 마련해주는 일로 채용됐지만, 원장 선생과 두 명의 선생이 하지 않거나 못하는 일들도 자연스레 그녀의 몫으로 떨어졌다. 딱히 누가 시키지는 않았지만, 부지런하고 성실한 그녀의 성격상 또는 환경이 그녀가 그 일들을 하게 만들었다. 제 할 일을 다 하고도 욕실에서 무언가를 빨거나 여기저기 쓸거나 닦거나 그것도 아니면 좀 더 큰 아이들 방에 가서 색종이라도 오려야 그녀 마음이 편했다. 잠들지 않은 아이가 있으면 들쳐 업고라도 그 일들을 하는 구금자씨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욕심 많은 원장을 만난 덕도 있었다. 부모들이 원하면 저녁 늦게라도 상관없었고, 어느 시기부터는 토요일에도 아이들을 받았다. 모두 구금자씨를 염두에 두고 벌이는 일이었고, 그녀 역시 자신이 필요한 일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순간 그녀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됐다.


사람은 제각기 다른 빛을 갖고 태어나고, 그 빛으로 구별할 수 있다면, 나 같은 경우는 무채색이었던 것 같아. 아무도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투명한 빛. 어려서부터 그랬던 것 같아. 형제들 사이에서도 학교에서도 내가 갖고 태어난 빛은 아무 의미가 없었어. 그래서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지만, 그 자리가 비어있어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존재 말이야. 그래서 누군가 내 이름 석 자를 불러주면 나는 웃음을 함빡 지으며 돌아봤지. 그 웃음은 너무 오래 굳어있어서 어색하고 굳은 주름으로 나타났지만.


“구 선생님 왼손잡이였어요?”


보육교사 정이 말했다. 정의 목소리는 네 명의 어른과 열세 명의 영유아가 뒤섞여 어수선하게 밥을 먹고 떠드는 속에서도 튈 정도로 유난스러웠다.


정을 비롯한 원장 선생과 이 선생, 몇몇 아이들의 시선이 구금자씨에게로 향했다. 구금자씨의 왼손에는 숟가락이 들렸고, 이제 돌 지난 여아가 그녀의 오른편 가슴에 안겨 있었다. 먹는 것을 병적으로 거부하는 수빈이었다. 구금자씨 옆에 바짝 붙어서 되지도 않는 숟가락질로 연신 밥을 떠먹는 십 개월 민주에 비해 수빈이의 몸피는 반도 나가지 않았다.


구금자씨는 대답 없이 수빈이의 꼭 다문 입술 사이로 숟가락을 들이밀지만, 여아는 시체 놀이라도 하는 양 입뿐 아니라 눈까지도 꼭 감고 꼼짝하지 않았다.


“구 선생님 제 말이 안 들려요? 제가 아까 오전부터 선생님 행동이 부자연스러워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오른팔은 내려놓고, 왼손으로만 건성건성. 수빈이도 위치가 바뀌니 평소보다 더 심한 것 아니냐고요. 아니, 어제까지 멀쩡하던 오른팔이 갑자기 부러지기라도 한 거예요?”


그 사이 정 선생의 눈길은 욕실 앞에 쌓인 수건이나 걸레, 오물이 묻은 옷가지에서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려있는 장난감, 학용품까지 죄 훑어가는 중이었다.


“그게 아니고, 그게, 제가 팔이 좀 아파서요. 그리고 원래 제가 어렸을 때는 왼손잡이였거든요.”


풋, 상 맨 끝에 앉아 밥을 먹던 이 선생이 입에서 뿜어 나오는 밥풀을 욱여넣으며 웃음을 참느라 입을 틀어막았다. 스마트폰 벨이 울리자 원장은 얼굴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정 선생이 원장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구 선생님, 지금 그게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래요, 그렇다 치고, 아무리 그래도 일하면서 동료 간에 피해 주는 일은 하지 말아야죠. 주변을 둘러보고 그런 소리도 하라고요.”


그래도 대답이 없자 정 선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구 선생님, 오늘 수빈이 엄마가 한 시간 정도 더 늦는다는데 괜찮겠어요?


방에서 나오던 원장이 폰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정 선생이나 이 선생은 보나 마나 안 될 테고. 문제없는 거죠? 구 선생님?”


정과 이를 번갈아 쳐다보던 원장이 구금자씨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구금자씨가 채 대답도 하기 전에 원장의 시선은 다시 두 선생에게로 옮겨갔다. 정 선생은 잘 먹고 있는 아이에게 골고루 먹으라고 훈수를 주고, 이 선생은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선생님들, 열심히 합시다. 그렇지 않아도 갈수록 원아가 줄고 있어요. 아실만한 분들이 왜 그래요. 서로 도와가면서 해도 모자랄 판에. 나도 요새 같아서는 정말 이거 때려치우고 요양원이라도 차리고 싶은 심정이라고요. 선생님들 요양사 자격증으로 갈아타고 싶으신 건 아니죠?”


그랬던 것 같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면 나는 뭐든 했어. 금자씨, 금자씨, 구금자씨…… 초등학교 언젠지 생각이 나지 않는데,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돌아가면서 얘기하는 시간이 있었어. 공부 잘하는 사람, 노래 잘하는 사람, 돈 많이 버는 사람……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어. 쓸모 있다는 얘기는 이름이 기억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내가 열심히 할수록 다들 뒤에서 날 비웃는다는 사실을 알았지. 그리고 나를 이용해 먹는다는 것도. 하지만 어쩌겠어. 그런 때야 비로소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드는걸.


“구 선생님, 여기 그릇이오!”


설거지하느라 뒤돌아있던 구금자씨가 오른편으로 몸을 돌려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그릇이 아니라 정 선생의 냉소였다.


“왼손잡이 아니었어요? 구 선생님?”


구금자씨는 말없이 몸을 돌려 수세미를 다시 집어 들고 그릇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정 선생은 사 년제 유아교육과를 나왔고, 2급 보육교사 자격증을 갖췄다. 몸에 꽉 끼는 고동색 투피스를 입은 정 선생이 구금자씨 옆에 바짝 붙어 서서 팔짱을 낀 채 그녀가 수세미든 왼손으로 그릇을 꼼꼼히 문지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갈수록 입술이 일그러지던 그녀가 구금자씨에게 속삭였다.


“구 선생님 말로 하세요, 말로. 그렇게 어쭙잖은 개그 하지 말고. 네? 그리고 선생님 잊은 거 같아서 알려주는데 지금 구 선생이 떨치는 이 개그를 보고 있는 게 우리뿐만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나 하시라고요. 네? 구 선생님?”


하루가 멀다 하고 놀이방에서 벌어지는 아동 학대 사건으로 전국의 놀이방은 물론 어린이집, 유치원에 폐쇄회로 텔레비전을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는 법이 시행된 지도 여러 해가 지났다.


처음 사생활 침해라며 우려했던 일부 선생과 인권단체의 생각과는 달리 사람들은 폐쇄회로 텔레비전 아래에서의 삶에 익숙해져갔다. 극성스럽고 유달리 걱정이 많던 엄마들은 폐쇄회로 텔레비전이 설치됨으로써 내 아이에게 안전한 어떤 확실한 조치라도 취한 듯 안심하는 눈치였다. 사실 바뀐 것은 크게 없는데도 그랬다. 사람들은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각자의 입장에 따라 필요에 의해 위안을 찾거나 해결점을 구하는데도 적응해갔다.


구금자씨의 놀이방에도 폐쇄회로 텔레비전으로 실시간 화면이 나가기 시작했다. 엄마들은 일하거나 친구와 수다를 떨거나 쇼핑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화장실에 앉아서도 자신의 아이를 확인했고, 어떤 엄마들은 자신의 아이가 화면에 나오지 않는 이유를, 숟가락 드는 폼이 이상한 이유를, 화장실에 오래 있는 이유 등을 수시로 물어왔다.


구금자씨는 거실 한가운데 아이들을 모아놓고 책을 읽어주는 정 선생을 쳐다봤다. 폐쇄회로 텔레비전 아래 정 선생의 모션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컸고, 목소리도 평소와 달리 과장됐다. 마치 연극배우 같다고 생각하며 구금자씨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저 조그만 카메라 너머에 누군가 있어 그 누군가가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실감나지 않았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좋아했다. 아이들과 있으면 편안했고, 사람들의 눈에 띄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됐다. 지금껏 다른 사람의 필요에 의해 살아온 구금자씨가 그나마 본인이 꿈꾸는 삶이 있다면, 그것은 보육교사가 되어 정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봐주는 일이었다.


구금자씨는 본인 스스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자신의 왼손이 대견스러웠다. 이십사 시간도 안 걸려 구금자씨는 왼손잡이가 된 듯했다. 조금 더뎠지만, 왼손을 주도적으로 사용하는 일이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단지, 시간이 조금 더 걸리고, 능숙하지 못할 뿐이었다. 벌써 놀이방 일과도 반이 훌쩍 넘어갔다. 이대로라면 오늘 하루, 아니 며칠이라도 별다른 실수 없이 잘 넘길 수 있을 듯했다. 그 며칠이란 오른손이 기력을 회복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터였다.


여섯 시가 되자 제일 나이 어린 이 선생이 칼같이 퇴근했다. 아이들의 수도 줄어갔다. 부모 모두 자식을 위해 양해를 구할 수 없는 직장에 다니거나 한 부모 아이인 경우는 저녁까지 먹여야 했다. 그런 아이가 넷이었다. 민주와 수빈이도 그중에 있었다. 특히 두 아이는 제시간에 맞춰 퇴근하는 선생들을 대신해 구금자씨가 돌본 시간이 많았던 터라 정이 두터웠다. 두 아이 모두 골칫거리로 취급받는 것도 그녀가 신경 쓰는 이유였다. 민주 엄마는 직장에 다니지 않았지만, 거의 매일 아이가 저녁을 먹고 나서야 데리러 왔다. 놀이방에 드나드는 차가 있는 몇 안 되는 엄마 중에 한 명이었고, 차림새도 세련됐다. 선생들은 애 엄마가 아이 아침 먹여 보낼 생각은 안 하고 그 시간에 화장하고 지 모양내느라, 애가 저렇게 비만이 됐다고 했다. 집에서 먹을 것을 하도 안 주니 놀이방에 와서 쳐 먹는다고, 애정결핍이 비만이 됐다고, 아이까지 싸잡아서 욕했다. 물론 폐쇄회로 텔레비전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였다.


선생들은 화면이 미치지 못하는 장소와 닿는 곳이라 해도 학습도구나 장난감을 교묘하게 이용해 그 시야에 들어가지 않는 법을 알았다. 그곳에서 엄마와 같이 밉상으로 분류된 아이들은 한 대씩 쥐어 박히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민주도 뚱이란 별명 아래 제일 혹독한 타박을 당했다.


평소에 비해 시간이 많이 늦어졌지만, 구금자씨의 일도 어느덧 마무리되어갔다. 막연하기만 했던 아침에 비하면 성공적이었다.


그런 와중에 구금자씨가 피치 못 할 난관에 부딪힌 일이 있었다. 주방에서 칼을 다뤄야 할 때였다. 점심으로 야채 볶음밥을 만들거나 과일을 깎을 때, 그녀는 애를 먹었다. 별 어려움 없이 일을 잘해온 왼손도 그 부분에서만큼은 능숙해지기 위해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당근을 채 썰다가 미숙한 왼손 탓에 당근을 잡고 있던 오른손에 상처를 입힐 뻔했다. 구금자씨는 어쩔 수없이 사람들, 특히 정 선생의 눈치를 봐가며 칼을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꿔가며 들어야 했다.


아이들에게 저녁을 먹이고 치운 후, 방걸레질을 한 걸레를 욕실에서 빠는 사이 방에서 수빈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먹는 거라면 무조건 고개를 가로젓는 수빈이가 유일하게 집착하는 츄파춥스를 민주가 뺏어든 것이 틀림없었다.


구금자씨는 그러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애 엄마처럼 수빈이에게 츄파춥스를 물리고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밀린 일을 두고 마냥 아이의 투정을 받아줄 수는 없었다. 덕분에 수빈이의 몇 개 안 되는 이는 벌써 검게 썩어 들어가거나 이미 썩어 있었다. 처음 수빈이를 봤을 때 아이를 그 지경까지 둔 애 엄마를 속으로 나무랐지만, 이제는 구금자씨도 아이 엄마가 이해됐다. 공장에 일을 다니는 아이 엄마는 집에 가면 수빈이 말고도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와 장애등급을 받은 남편이 있다고 했다.


아이는 좀처럼 울음을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당장 달려가야 했지만, 하던 일은 마무리 져야 했다. 약속 시간에 대가기 위해 아직 퇴근하지 않고 부엌, 폐쇄회로 텔레비전이 미치지 않는 안쪽 의자에 앉아 화장을 고치고 있던 정 선생은 방안을 한 번 쓱 쳐다볼 뿐이었다. 구금자씨는 입으로 아이를 달래면서 부지런히 걸레를 마저 빨았다.


그러는 사이 문득 수빈이의 울음소리가 그치고 민주를 꾸짖는 정 선생의 목소리가 수돗물 쏟아지는 소리 사이로 들렸다.


“구 선생님, 여기 민주 데려왔어요. 받으세요.”


곧이어 구금자씨의 등 뒤로 정 선생의 목소리가 가깝게 들렸고, 그녀가 수도꼭지를 막 잠그고 왼편으로 부리나케 몸을 돌리려는 순간 정 선생의 손에서 벗어난 여아의 우람한 몸이 구금자씨의 오른쪽으로 떨어질 듯 던져졌다. 구금자씨는 악, 하는 비명과 함께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주저앉았다.


“나 원 참, 구 선생님도 참 집요하시네. 못 말리겠네요, 정말. 내 두 손 들었어.”


민주의 겨드랑이에 양손을 집어넣은 정 선생이 아이를 인형인 양 허공에 대롱대롱 흔들어댔다. 방실방실 웃는 민주의 입가에 침과 끈적이는 액체가 번질거렸다.


“와 정말 왼손잡이였나 봐요? 평소처럼 아이를 오른쪽으로 휙, 던졌으면 어떡할 뻔했어.”


믿을 수 없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정 선생의 말투가 진정으로 느껴져 구금자씨는 본인도 모르게 슬쩍 웃고 말았다.


“정말 대단해, 대단해. 내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


아이를 안은 정 선생이 욕실 밖으로 나갔다. 구금자씨도 수건에 손을 문질러 닦고 정 선생의 뒤를 쫓아 나왔다.


“하긴 그렇게 일을 해대는데 남아나는 팔이 어디 있겠어. 그동안 제대로 붙어 있었던 게 기적이지. 그래 팔이 아프면 사려야지. 아픈 거 참아가면서 하면 누가 알아주기나 해. 자를 생각이나 하지. 안 그래요, 구 선생님? 우리 앞으로는 잘 해보자고요. 서로 돕고 살아야지, 나이 먹은 사람끼리. 그렇지 않아도 새파란 애들 자꾸 치고 올라오는데 우리끼리라도 의지하면서 버텨내야지. 참 선생님도 이제 보육 교사 자격증이라도 따서 이런 허드렛일에서 벗어나야지 않겠어요. 내 그동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구 선생님 고생하는 거야 다 알지. 덕분에 다들 편하게 지내는데. 더군다나 원장이란 년은 그렇게 구금자씨 부려먹으면서, 그래, 초과 수당이나 제대로 꼬박꼬박 타는 거예요? 어쨌든 구 선생님도 빨리 자격증 따요, 내 알아봐 줄까요?”


씽긋 웃는 정 선생 앞에서 구금자씨는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숙이고 주방으로 갔다. 정 선생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귓바퀴를 돌아 돌아 고막을 울리고 영혼에 닿아 빛이 되어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빛은 그녀의 얼굴에 윤기로 어깨에 힘으로 몸짓에는 여유로 뻗어나갔다.


정 선생은 민주를 안은 채 보란 듯이 거실을 몇 바퀴 느릿느릿 돌았다. 구금자씨는 낯선 남의 주방에 들어선 사람처럼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지금 당장 보육교사라도 된 양 그녀의 심장은 콩닥콩닥 뛰었고 가슴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얌전해진 아이를 방에 들여놔준 정 선생은 두 아이의 머리를 양손으로 똑같이 쓰다듬은 후 주방으로 나왔다. 구금자씨는 정선생이 한없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정선생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성 싶었다.


“저, 저, 커피라도 한잔하실래요?”


구금자씨의 입에서 뜬금없는 말이 새 나왔다. 동시에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렸고, 흘러나오는 말이 제 목소리 같지 않았다. 꿈같았다. 모든 것이.


“커피 말고 냉장고에 파인애플 있던데, 우리 그거 까먹어요.”


정 선생이 식탁 의자에 앉았고, 구금자씨는 양손을 비비며 냉장고로 다가갔다. 구금자씨의 손 역시 얼굴만큼이나 붉었고, 그 기운은 조금 불길했다.


구금자씨는 냉장고 문을 열고 파인애플을 꺼냈다. 아직 여물지 않은 파인애플은 껍질이 시퍼렇고 단단했다. 거북의 등처럼 빈틈없어 보였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성긴 부분이 있나 찾아보려고 껍질을 더듬었다. 마침내 칼자루 쥔 왼손을 들어 표면에 칼날을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서서히 힘을 줬다. 하지만 칼날은 그대로 인 채 손만 부들부들 떨렸다. 칼날은 조금도 스며들지 못했다. 역시나 왼손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구금자씨는 그 과정 중에도 자신을 뚫어질 듯 쳐다보는 정 선생의 시선이 옆으로 번지듯 느껴져 무안했다. 왼 손바닥 가득 땀이 차오르자,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칼을 오른손에게 쥐여 줬다. 그 과정 중에 구금자씨는 누군가에게 모를 화가 치밀었다. 꾹 다문 그녀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어제 오늘 쉬었을 뿐인데 오른손은 그새 감을 잃은 듯 칼 쥔 폼이 어색해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왼손이 그러했듯 칼날은 쉬이 파인애플의 속살을 뚫지 못한 채 표면에서만 머뭇거릴 뿐이었다. 왜 그러는 거야, 응? 왜 그러는데. 당황한 구금자씨는 오른손을 다그쳤다. 양 이틀 과분한 대접을 받았던 오른손은 왜 주인이 갑자기 화를 내고 재촉하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구금자씨는 아랑곳없이 칼을 머리 높이 치켜 올렸다. 그리고 힘껏 내리쳤다. 마침내 파인애플은 두 동강났고, 칼날은 도마 깊숙이 박혔다. 그 사이 왼손에 날카로운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구금자씨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잘린 파인애플을 내려다봤다.


노랗게 드러난 파인애플 속살 사이로 시뻘건 피가 스며들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구금자씨가 왼손을 살살 들어 올리자 손가락 하나가 채 따라오지 못하고 덩그러니 도마 위에 남겨졌다. 왼손 집게손가락이었다. 구금자씨의 얼굴이 푹 익은 토마토의 속살처럼 붉게 짓이겨졌다. 그녀의 눈가로 토마토 즙이 흐르듯 물기가 배 나왔고, 벌어진 입에서는 침 한줄기가 탄력을 받아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뒤미처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제야 정 선생이 구금자씨에게 다가오다 똑같이 비명을 질렀다. 방 안에 있던 아이들이 울기 시작했다.


태풍의 눈에 들어앉았던 듯 차분하지만 조심스러워 보이던 놀이방은 그대로 아수라장이 됐다. 두 아이가 기거나 뒤뚱뒤뚱 걸어 나와 구금자씨의 다리를 부여잡고 더 처절하게 울었다. 구금자씨도 그런 아이들을 내려다보다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한 번 터진 울음은 봇물이 터진 듯 걷잡을 수 없었다. 오른손으로 피범벅이 된 왼손을 부여잡은 채 구금자씨는 잘린 손가락을 쳐다보다 두 아이의 작고 까만 머리통을 내려다보다 카메라 렌즈를 올려다보다 그제야 생각난 듯 정 선생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 선생은 조금 전의 충격에서 벗어났는지 한껏 고양된 표정으로 고개만 절레절레 젖다가 구금자씨와 눈이 마주치자 한마디 내뱉었다.


“내 오늘 어째 하는 행동이 이상하다 했더니 이러려고 그랬네. 사람이 항상 똑같아야지, 쉽게 변하면 안 된다고. 변해지지도 않고. 어떻게 택시? 구급차?


구금자씨는 그런 정 선생의 입만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잘린 그녀의 왼손 집게손가락은 차갑게 굳어갔다.


유태인은 어떻게 됐냐고? 죽었어. 마침 나치한테 새 의자가 생겼거나, 아니면 엉덩이에 종기라도 생겨 당분간 의자에 앉을 일이 없게 됐거나, 그랬겠지. 그 순간 의자란 나치한테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던 거지. 만일 담배 케이스나 구두나 양복 따위를 만드는 장인이었다면 어땠을까. 그중 하나라도 나치에게 필요한 물건이 있었다면 유태인은 살 수 있었을까. 쓸모 있는 인간이 되어서? 그러면 그다음에는? 자신의 쓸모를 증명한다는 자체가 우스운 거지. 그건 내가 아무리 증명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거든. 그건 그러니까 타고나는 거야. 만들 필요 없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빛처럼.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운명이라고도 하지.





  <당선소감>


   "기적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나를 말 없는 아이 그리고 책을 많이 읽는 아이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수줍음을 많이 탔던 내가 자구책으로 택한 것이 책이었던 것 같다. 다행히 책은 나와 맞았고, 어느 순간 소설가의 꿈을 꾸게 됐다.

‘꿈은 이루어진다’ 나는 이 말의 무책임함을 인정한다. ‘간절한 꿈은 이루어진다’ 나는 이 말의 위대함을 믿는다.

늦었지만 소설을 배워보겠다고 나섰을 때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이 지금은 대학생이 됐고, 그만큼의 세월을 보낸 나는 이렇게 당선 소식을 들었다. 하긴 쓸 수 있었던 시기보다 쓸 수 없었던 간절함의 시기가 그 배가 될 것임을 알기에 염치없지만 긴 세월 잘 견디고 버텨줬던 ‘나’에게 제일 먼저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나서지 않고, 구태여 드러낼 생각도 없이 제자리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존재감마저 의심받는 ‘금자’씨를 닮은 분들을 생각하면서 ‘오른손’을 썼다. 우리들은 안다. 평소 우리가 무심결에 지나쳤던 사람일수록 그 빈자리가 두드러질 수 있음을, 우리 사회를 이끄는 저력이란 그분들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왼손’의 소중함도 안다. 어차피 오른손을 보듬어줄 수 있는 것은 왼손일 수밖에 없으며 그들의 존재 여부는 공존을 전제로 했을 때 가장 빛이 나니까.

소설가는 자신의 생애라는 집을 헐어 그 벽돌로 소설이라는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한다. 내가 앞으로 쓰게 될 이야기들 역시 나를 닮은 아이들일 테지만,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항상 염두에 두고 있으며 앞으로도 나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될 듯하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글을 쓰는 데는 어쩌면 요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요즘 든다. 잠은 줄고, 뻔뻔함은 늘어가니까. 내가 바라기도 한 반면 잘 활용해야 하는 일들이기도 하다.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김종광 교수님, 손홍규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경희, 용은, 세정, 영란, 서연, 후남 그리고 윤주씨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나의 부모님과 가족들 사랑한다. 부족한 작품에 기회를 주신 광남일보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한없는 감사의 말씀 드리고 싶다.

기적이란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음을 안다. 기적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에 앞으로의 여정이 두렵다. 그래도, 행복하다.




  ● 1969년 서울 출생
  ●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 4학년 재학


 

  <심사평>


  단편소설의 미학과 문장의 힘 발현


단편소설 분야에서는 총 165편이 응모했다. 올해 응모작들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50, 60대의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인생의 중후반에 이른 이들이 자신이 조망한 인간과 삶에 대한 가치를 나누고자 하는 열망에 박수를 보낸다.

다만 이들이 ‘단편소설’에 대한 장르적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은 아쉽다. 단편소설이란 인생의 한 단면을 밀도 있게 그려냄으로써 주제를 드러내는 문학이다. 연대기적 서술이나, 회고적 서술은 단편소설의 감흥을 살리기 어렵다는 점을 염두에 뒀으면 한다.

165편 중 본심에 오른 작품은 ‘이모수’, ‘하얀 거짓말’, ‘머랭치기’ , ‘다른 소리’, ‘인간식물’, ‘오른손’ 등 6편이었다. ‘이모수’는 안정적인 문장이, ‘하얀 거짓말’은 속도감 있는 전개가 눈길을 끌었으나 두 작품 모두 소재의 참신성이 부족해서 먼저 제외됐다.

‘머랭치기’는 SNS 전쟁을 치르게 된 딸의 사건을 전경으로 삼고, 매스컴에 시달렸던 노동운동가 남편의 이야기를 후경으로 삼으면서 가족 간의 화해를 그려낸 작품이다. SNS의 즉흥성과 천박함, 편파 뉴스와의 투쟁 등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으나, 비약적 서술이 많아 내용 전달이 쉽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다른 소리’는 SF적 발상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상대방의 감정과 의도를 해석’하는 장치를 착용하고 막무가내로 행패를 부리는 노인의 속마음을 알게 된 주인공이 병상에 누운 아버지의 절망을 이해하게 된다는 내용인데, 주제는 뚜렷하나 플롯이 치밀하지 않아 소설 전개에 긴장감이 없다는 것이 흠이 됐다.

‘인간식물’은 서술을 줄이고 상징과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소설이다. 식물인간으로 돌아온 아버지를 배경에 두고, 식물에 집착하는 어머니-냉장고에서 죽어가는 화분-흙냄새-번개탄-자살-식물이 되어가는 사람-썩는 냄새를 풍기고 있는 화분의 나무를 반복되는 언어와 이미지로 제시함으로써 주제를 드러내는 기법을 시도하고 있다.

‘오른손’은 단편소설의 미학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디테일을 살린 구체적인 묘사는 인물의 성격을 생생히 보여주며, 상황의 박진감을 드러낸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은 읽히는 힘을 지니고 속도감을 추동한다. 서두에 있는 서술자의 개입은 에피그래프의 역할을 하며 소설의 내용을 암시하고, 끝머리의 개입은 주제를 매듭짓는 역할을 한다.

최종심에 남은 작품은 ‘인간식물’과 ‘오른손’이었다. ‘인간식물’의 참신함과 ‘오른손’의 문학적 완성도 중에서 고민을 했으나, 소설이 독자와의 소통을 염두에 둔 장르라는 점에서 ‘오른손’을 당선작으로 삼는다.


 

심사위원 : 이미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