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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해를 묻은 오후 / 허남훈

 

스포츠신문 연예부에서 적응에 실패한 수영은 CFP(국제공인재무설계사) 시험을 준비하며 보험설계사 일을 시작한다. 수영은 스스로 삶의 로드맵을 세우고 제 발로 보험사를 찾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지점장실에 걸린 피라미드 모양의 계보에서 자신의 이름이 오 팀장 아래에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수영은 그제야 인사담당자도 아닌 오 팀장이 왜 사비를 들여 구인광고를 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수영의 친구 용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6년째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이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몇 달 일할 결심을 하고 일자리를 찾던 중 대기업 협력업체라고 적힌 구인 광고를 발견한다. 면접을 보려고 전화를 거니 상대방은 일단 술이나 한잔하자며 건대 입구로 오라고 말한다. “요새는 다 이렇게 구인광고를 개인이 낸다냐?” 수영과 상의 끝에 용수는 건대 입구에 가기로 한다. 괜히 갔다가 콩팥이라도 떼일까봐 불안해하면서도, 뭐 어차피 더 잃을 것도 없다는 생각에 일단 부딪혀 보기로 한다.

보험설계사를 시작하면서 지인 영업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수영의 머릿속엔 오직 개척 영업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처음 본 설계사에게 보험을 들어줄 리 만무하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영업을 나갔다가 이마만 깨지고 들어오던 어느 날, 수영은 지점의 에이스인 최명석 선배의 강연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우리는요. 보험 가입시키러 돌아다니는 거 아니에요. 이미 가입된 보험 깨러 다니는 거예요. 아직 보험에 들지 않은 20%가 아니라 이미 보험에 가입한 80%가 우리의 타깃이에요. 자, 무슨 말이냐. 사람들을 만나보면요. 자기가 가입한 보험에 대해 잘 몰라요. 그리고 신뢰도 없어요. 대부분이 지인 계약이거든요. 매달 보험료가 나가는 걸 볼 때마다 울화통은 터지는데, 그렇다고 지인 눈치 보느라 해약은 못 하겠고, 언젠가는 써먹을 날이 있겠지 하면서도 마음은 찜찜하고. 그럴 때 전문가가 짠하고 나타나서 ‘제가 한번 봐드릴게요. 보험이 잘 가입된 건지 아닌지. 혹시 쓸데없이 너무 보장이 크다거나 부족한 부분은 없는지.’ 이렇게 말하면요. 다 넘어와요. 무료상담, 재능기부, 보장분석, 보험 리모델링 뭐 무슨 말을 갖다 붙이든 다 좋아요. 고객의 보험증권만 확보하세요.”

한편 협력업체 팀장으로 자기를 소개한 사내는 용수를 숙소로 안내한다. 그리고 얼른 농협에 가서 통장과 체크카드를 만들어서 자신에게 달라고 말한다. 비밀번호도 그가 정해주었다. 용수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지만 일단 그의 말을 따르기로 하는데….


한경 신춘문예 당선 장편소설 ‘해를 묻은 오후’는 3월 중 카카오페이지를 통해 연재됩니다.



  <당선소감>


   "손에 없는 것을 동력 삼아 글 썼다…계속 전진할 것"


아버지는 배달을 가다 가끔씩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생각이 안 날 때가 있다고 하셨다. 그럴 땐 일단 가던 방향으로 계속 간다고. 가다 보면 다시 생각이 나더라고. 서로 웃어넘겼지만 사실 내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손에 없는 것을 동력 삼아 써 나가면서 가끔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 어디쯤 와 있는 건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손 내밀어 준 ‘글모임’ 친구들, ‘석사 BOYS’ 녀석들, 보고 싶은 강원고 문예부 ‘여울’ 선후배님들, 고(故) 최종남 선생님, 언제나 내 곁의 종우와 근영, 그리고 멀리 있는 승만이 형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당선 통보는 낙선을 확신하고 풀이 죽어 있던 오후에 받았다.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우석(박상원 분)은 사법고시 합격 소식을 전해 듣고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될 줄 알았어요.” 그게 그렇게 멋있었는데, 언젠가 내게도 비슷한 순간이 온다면 우석이처럼만 하자고 생각했는데, 당선 통보 전화를 받던 내내 내 몸은 공중제비를 돌고 있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그 틈을 채우는 디테일을 쫓아 계속 가 볼 생각이다. 이제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어디쯤 와 있는지 불안해하지 않겠다.

무엇보다 부모님께 당선 소식을 전할 수 있어서 기쁘다. 시골 마을에서 문학 신동으로 불렸다는 아버지께 이 소설을 바친다. 그리고 나의 진이, 은수, 은진에게. 형과 형수님, 소윤, 태령에게 이 기쁨을 전하고 싶다.



  ● 1979년 강원 춘천 출생
  ●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심사평>


  소재의 섭렵이 튼튼…서술과 표현 흥미


139편이 투고된 장편소설 부문 본심에는 6편의 소설이 올라왔다. 우선 눈에 띄는 특징은 서사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것이었다. 동시대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린 이야기(‘굴러라 바퀴’, ‘리모델링’, ‘해를 묻은 오후’ 등)의 비중이 큰 편이기는 했지만, 추리(검은 진실)나 판타지(생 빅투아르를 껴안고 달리기) 혹은 재난 서사(마트에 가면 마트에 가면) 등 장르적 성향의 이야기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작품마다 개성은 뚜렷했지만 그 수준에는 편차가 있었다. 안정적인 가독성과 주제의 함량을 확보한 3편을 추려 본격적인 논의를 진행했다. ‘검은 진실’은 조작된 살인사건을 둘러싼 갈등과 반전의 플롯이 돋보이는 범죄물인데, 부분적으로 사건들 사이의 짜임새가 견고하지 못한 대목들이 있었고, 펼쳐놓기는 했으나 수습되지 못한 사건들도 적지 않았다. ‘리모델링’은 백화점 지하 식품매장을 배경으로 화려한 포장에 가려진 힘겨운 생존의 현실과 마주하고 있는 이야기다. 인물들의 사연과 그 속에 담긴 감정이 진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은 이 소설의 장점이나, 직원과 임대 사업자 사이의 갈등을 지나치게 선악의 이분법으로 이끌어간 점에서는 전형적인 면이 드러났다. 지방 신문과 스포츠신문 기자를 거쳐 보험 영업에 도전한 인물의 사회 적응의 과정을 담고 있는 ‘해를 묻은 오후’는 해당 분야의 현실을 경험할 수 있는 소재의 섭렵이 튼튼하게 이야기를 받치고 있었고 서술과 표현의 측면에서도 흥미와 문학성을 갖추고 있어 신뢰할 만했다. 다만 소설 속의 사건이 어느 정도 지난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현재의 독자들에게는 실감이 옅을 수 있다는 우려를 내포하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다소 아쉬운 점이 있지만 큰 이견 없이 ‘해를 묻은 오후’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이 투고자의 역량이라면 내용을 보완하고 구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면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작가로 등단한 자신감과 여유를 통해 순수한 마음으로 펼친 지금의 이야기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 김인숙, 손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