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농민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기차여행 / 연진희
<당선작>
기차여행 / 연진희
이사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깨달았다.
노인들만 울타리를 넘나들었다기보다 그 동에 사는 사람 대다수가
노인들, 특히 혼자 사는 노인들이라는 것을.
“나이가 많은가 봐유.
털이 듬성듬성하니 살이 훤히 보이네. 짐승이나 사람이나….”
2015년 이른 봄, 지원은 서울 근교의 14평짜리 복도식 아파트 1402호로 이사했다. 그녀는 A출판사와 가까운 망원동 낡은 빌라에서 살다가 터무니없이 치솟는 전세 보증금을 감당할 수 없어 아예 서울을 벗어나기로 했다. 지인들에게 조언을 구하며 고르고 고른 그 아파트는 대중교통으로 한시간 안에 직장을 오갈 수 있는 통근권 내에서 가장 평수가 작고 집값이 싼 곳이었다. 마을을 둘러싼 산자락이 개발제한구역에 속해서인지 그 아파트 단지를 제외하고는 건물들의 높이가 낮았다. 거리와 상점, 심지어 가로수마저 칙칙하고 우중충해 보이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나른한 조용함이며 주변의 너른 경작지와 산에서 불어오는 풀 냄새에 어쩐지 마음이 끌렸다. 지원은 오랫동안 이곳에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은행에서 대출을 조금 더 받아 아파트를 사버렸다.
이사하던 날, 활짝 열어젖힌 현관문으로 그 통로에 사는 사람들이 계속 얼굴을 들이밀며 새로 수리한 실내와 새로 이사 온 사람을 살폈다. 그렇게 불쑥불쑥 느닷없이 현관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은 대부분 칠순이 넘어 보이는, 아니 팔순에 가까울 듯한 노인들이었다. 이사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지원은 깨달았다. 노인들만 ‘허물없이’ 울타리를 넘나들었다기보다 그 동에 사는 사람들 대다수가 노인들, 특히 혼자 사는 노인들이라는 것을.
그 층에는 지원을 포함해 전부 여섯가구가 살았다. 승강기에서 가장 가까운 1401호에는 갈색으로 물들인 짧은 머리에 언제나 단순하고 우아하게 옷을 입는 노부인이 살았다. 칠십대 초반으로 보였지만 허리와 어깨가 여전히 꼿꼿하고 호리호리했다. 1403호의 동년배 부인과 육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1405호의 부녀회장이 접착제처럼 들러붙어 캐묻듯이 말을 걸면 친밀하지도 무례하지도 않은 상냥함을 갑옷처럼 두른 채 적당히 날씨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그들의 말에 잠시 맞장구를 치고는 급한 볼일이 있다는 듯 능숙하게 자리를 피했다. 일부러 피하는 게 아니라 정말 한시바삐 가야할 곳이 있다는 듯, 또 얼른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는 듯, 그래서 상대방과 더 이야기할 틈이 없는 게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사라졌다. 그래서 그들도 자신들의 분노 탱크에 불을 댕길 불씨를 찾지 못하고 점차 그녀를 어려워하다 가까이 지내기를 포기하게 됐다. 그녀에게는 ‘엄마’라고 부르며 아주 이따금 들르는 중년 여자 말고 달리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1403호에는 충청도 억양이 강한 노부인이 살았다. 목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깨살이 수북하게 오른 데다 배와 엉덩이에서 늘어진 묵직한 살 때문에 걷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아침이면 지팡이를 짚고 단지에 있는 노인정에 갔다가 늦은 오후면 큰 소리로 무릎의 통증을 투덜거리며 돌아오는 것이 일과였다. 아파트 벽이 얇아서일까, 목구멍을 놀리고픈 생리적 욕구가 잠든 사이에도 비강을 힘차게 진동시켜서일까, 벽을 통해 들려오는 노부인의 요란한 코 고는 소리에 지원은 며칠 밤 귀마개를 낀 채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 침대를 현관 옆 좁고 어두운 북향 방으로 옮겼다.
그 노부인에게는 한번 말을 붙이면 상대를 놓아주지 않고 끝도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버릇이 있었다. 한겨울에 이불을 털러 복도로 나갔다가 마침 현관문 앞에 서 있던 노부인과 맞닥뜨린 지원은 이불을 허공에 펼친 채로 삼십분이나 노부인의 젊은 시절 서사시를 들어야 했다.
“아, 네, 정말 대단하셨네요. 그런데 이 추위에 몸이라도 상하면 큰일이니 어서 들어가세요. 그럼 전 이만….”
지원이 새빨갛게 굳은 손가락들을 애써 꼼지락거리며 이불을 가까스로 거머쥐고 현관문을 열려 할 때마다 노부인은 “그래서 말이여, 내가…”라는 말로 지원의 퇴로를 막았다. 지원은 노부인의 입에서 증기기관차 연기처럼 꾸역꾸역 쏟아져나오는 입김의 기세에 눌려, 늦은 오후의 햇살이 힘을 잃고 축 늘어지기 시작할 무렵에야 겨우 집 안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1403호 노부인은 그 후로도 승강기나 복도에서 지원을 만나면 어김없이 그녀를 붙잡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지원을 붙잡지 않을 때는 지원의 현관 앞 복도에서 그 층의 다른 주민과 뭔가에 대해, 누군가에 대해 성난 목소리로 비난했다. “안되야, 그럼 안되지. 아니, 왜 그런댜…” 1403호에도 생김은 비슷하지만 말수 적고 우울한 표정의 오십대 여자가 가끔 찾아오곤 했다.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를 위해 식재료를 채워두거나 반찬을 들고 오는 것 같았다.
1403호 노부인과 가장 가까워 보이는 이웃은 1404호의 기묘한 노부부였다. 동화의 삽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노인들이었다. 길쭉하고 굵직한 등뼈가 활처럼 구부러진 남편은 눈썹과 머리칼이 새하얗고 얼굴이 불그레했다. 덥수룩한 긴 눈썹은 표정이 변할 때마다 꿈틀거리며 얼굴에 고집스럽고 단호한 인상을 더했다. 자그마하고 야윈 아내는 살짝 처진 눈매며 잡티 없는 하얀 피부며 얼굴에 항상 어린 옅은 웃음 때문인지 선한 인상을 풍겼다. 그 두사람은 언제나 어디나 함께 다녔다. 저마다의 볼일 때문에 따로 움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 없는 듯했다. 무릎이 구부정한 남자가 지팡이를 짚고 학처럼 두다리를 겅중겅중 움직이면 자그마한 아내가 바지런히 걸으며 보조를 맞추었다.
남자는 손녀 나이의 지원에게 늘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며 직장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묻곤 했다. 온순한 아내가 지원에게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걸면 “무슨 쓸데없는 소리야. 일에서 인정을 받으며 사는 것도 멋진 인생이지. 그럼, 요즘 세상에 꼭 결혼을 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어”라며 난처해하는 지원을 두둔해주었다. 자신은 지난 시대의 통념에 갇힌 다른 노인들과 다르다고 과시하고 싶은 듯했다. 곱게 빗은 하얀 성긴 머리칼을 둔탁한 은빛 비녀로 틀고 겨울에는 꽃무늬 누비 조끼에 발목까지 오는 누비치마, 여름에는 품이 넓은 모시옷을 입는 작은 노부인은 지원에게 십오년 전 세상을 떠난 외할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승강기 안에서 지원이 서둘러 다가오는 노부부를 기다리며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거나 길에서 인사를 건넬 때면 그녀는 “아유, 어쩌면 이렇게 이뻐유, 참 착해유, 요즘 아가씨 같지 않아”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1405호에는 육십대 후반의 작고 마른 남자와 작고 뚱뚱한 여자가 살았다. 남편은 딱히 직장에 다니는 것 같지 않았고, 마을 주위를 산책하는 모습만 간간이 눈에 띄었다. 같은 층 사람을 만나도 알은체하지 않았고 성대를 쓰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이 거북스러워하는 그는 항상 아내와 따로 다녔다. 1403호 노부인 못지않게 쟁쟁거리는 목소리로 누구에게든 서슴없이 온갖 질문을 퍼붓는 아내와 함께 있는 것이 괴로웠던 것일까. 아내는 남편에게 숨길 일이 많았는지, 신경이 날카로운(지원은 그런 목소리가 쉬지 않고 귓가에서 들리면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남편을 배려해서인지 긴 통화를 할 때면 늘 복도로 나왔다. 오래 서 있다가 다리가 아프면 승강기 앞까지 긴 복도를 하릴없이 거닐면서 그 층의 주민들에게 전부 들리도록 큰 소리로 전화를 했다. 아무리 내밀한 이야기라도 전동 드라이버 같은 굉음에 실려 퍼지면 비밀스러움을 잃는지, 그녀가 그토록 요란하게 자신의 개인 정보를 퍼뜨리는데도 그녀가 사기를 당했다는 소문은 들리지 않았다.
승강기에서 가장 먼 끝집인 1406호에도 노부인이 살았다. 나이와 생김은 1403호와 비슷했지만 굵은 등줄기가 젊은 여성 못지않게 꼿꼿하고 팔다리의 근육이 탄탄해 힘이 넘쳐 보였다. 그녀는 4월부터 10월까지 누군가에게 임차한 땅에서 농사를 지었고, 틈날 때마다 산을 다니며 봄나물, 복분자 열매, 둥굴레 뿌리, 밤, 도토리를 거둬들였다. 늦은 오후면 현관 앞에 자리를 깔고 밭에서 뽑은 채소며 산에서 거둔 것들을 다듬었다. 그녀는 직장에 다니는 딸과 열서너살쯤 된 손자와 그보다 어린 손녀와 함께 살았다. 그들을 위해서 식사 준비를 비롯해 살림을 꾸려가는 것도 그녀인 듯했다. 그녀가 복도를 지나칠 때면 1403호는 “아유, 이렇게 건강하니 얼마나 좋아?”라며 부러운 듯 말했고, 1406호는 땀이 밴 붉은 얼굴로 손을 내저으며 “힘들어, 힘들어”라는 짧은 말을 남긴 채 복도 끝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퉁명스럽거나 냉담한 성품은 아닌 듯했지만 남의 일에 호기심을 품는 것조차 피곤할 만큼 할 일이 많은지 그 층의 다른 노인들과 돈독하게 지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14층의 노인들은 대체로 지원의 이사를 반겼다. 매끄럽고 탄력 있는 살갗, 숱 많은 반짝이는 머리칼, 군살 없는 가느다란 몸, 샌들 밖으로 드러난 부드러운 분홍빛 발, 재빠른 몸놀림…. 눈길을 끌 만큼 아름답지는 않아도 젊음의 생물학적 특징을 여전히 간직한 그녀의 육체와 마주칠 때면 그들의 눈에 경탄과 부러움의 빛이 스쳤다.
특히 지원과 함께 다니는 작은 개는 사람들을 지원에게로 끌어당기는 자석이나 다름없었다. 얼굴과 배는 베이지색, 등과 꼬리는 검은색, 귀와 다리는 갈색과 베이지색이 부드럽게 뒤섞인 모래색이었다. 구슬처럼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풍성한 꼬리를 위로 치켜든 채 지원의 허리까지 힘차게 뛰어오르는 개를 보면 노인들은 어린아이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낯가림이 심하고 소리에 예민한 개는 매번 큰 소리로 반기며 거칠게 머리를 쓰다듬는 노인들의 손길에 움찔하며 뒷걸음질했다. 하지만 새로 이사 온 동네가 예전 동네보다 마음에 들었는지, 개는 한껏 찡그린 표정으로 그들의 손길을 묵묵히 견뎠다.
“쿵쿵쿵, 쿵쿵쿵, 쿵쿵쿵.”
짙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암막 커튼의 틈새로 비치는 흐릿한 창문을 보니 아직 이른 아침임이 분명했다. 아마도 1403호의 노부인일 것이다. 그 노부인은 핸드폰에 알람을 설정해야 한다든지 오디오에서 소리가 안 나온다든지 하는 불편한 상황이 생길 때면 때를 가리지 않고 지원의 현관문을 두들겨댔다.
이사 온 지 삼년 정도 흐르면서 지원은 현관문을 집요하게 두드리거나 초인종을 계속 누르는 사람은 1403호 노부인, 혹은 뭘 믿는지 알 수 없는 종교인들뿐임을 터득했다. 다른 지방에 사는 부모의 집에는 지원이 일년에 몇 차례 찾아갔고, 친구들하고는 각자 사는 곳들의 중간 지역에서 만났으며, 관리실에서는 지원의 핸드폰으로 직접 전화를 했다. 택배기사도 14층까지 올라오는 대신 경비실 앞에 물건을 두고 갔다. 어느 누구든 현관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그녀가 반가워할 사람일 가능성은 없었다. 특히 각종 단체의 이름을 대며 설문조사에 응해달라는 2인 1조의 여자들은 극도로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처음에 무심코 문을 열어준 날, 색과 디자인이 겉도는 음습할 만큼 단정한 차림새의 두 여자가 십자가와 조잡한 그림들이 뒤섞인 전단지를 건네며 성경 공부를 함께 해보지 않겠느냐고 끈질기게 매달렸다. 만약 개가 지원의 불쾌해하는 낌새를 감지하고 앙칼지게 짖어대지 않았다면 그 침입자들은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다. 지원은 베개로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쿵쿵쿵, 쿵쿵쿵, 쿵쿵쿵.”
토요일 이른 아침, 집이 비어 있을지 모른다는 한 점의 의혹도 없이 누군가 단호하게, 줄기차게 문을 두드린다. 개가 짖기 시작했다. 온순한 둥근 눈이 하얗게 뒤집히고 입술이 옆으로 길게 찢어지면서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지원은 눈꺼풀이 안구에서 떨어지지 않아 한쪽 눈만 억지로 뜨고는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누구세요?”
“나예요.”
충청도 억양의 여자 목소리다. 탄력을 잃은 작고 쇠잔한 목소리였다. 1403호는 아니다. 그 노부인은 언제나 “나여, 문 좀 열어 봐”라고 말한다. 1404호인가? 위급한 상황 때문에 도움을 청하는 걸까? 하지만 문을 두드리는 집요함에 비해 목소리가 지나치게 차분해서 어쩐지 분노가 느껴진다. 내가 직장에 있는 동안 개가 많이 짖어대나? 하지만 이 아이는 내가 한자리에 있기 싫을 만큼 꺼리는 사람들에게만 짖을 뿐 건물 안에서 짖으면 안된다는 것을 안다. 아마도 이 아이를 버린 예전 주인에게 거칠게 주입식 교육을 받은 것 같다. 아니면 동틀 무렵까지 튼 음반이나 영화의 소리 때문인가? 지원이 문을 열기를 주저하다 조심스레 문을 연 순간, 훅 끼치는 차가운 바람과 함께 자그마한 사람이 불쑥 들어오더니 좁은 주방 복도를 지나 큰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할 이야기가 있어유.”
“무슨….”
1404호 노부인이 한번도 본 적 없는 일그러진 얼굴로 지원을 올려다보았다. 지원이 엉거주춤 무릎을 꿇고는 노부인에게 짖어대는 개를 가슴에 안고 진정시켰다. 문틀에 꽉 맞지 않는 베란다 쪽 창에서 시린 바람이 들어왔다.
“옆집 할머니 때문에 너무 속이 상해서….”
목소리가 갈라져 잠시 숨을 고른 노부인이 말을 이었다.
“옆집 할머니가 그렇게 우리 집 흉을 보고 다녀유. 우리 바깥양반이 이번에 동대표로 나가려는데 뒤에서 어찌나 흉한 소리를 하고 다니는지….”
노부인이 서두도 없이 바닥을 내려다보며 고통스럽게 긴 독백을 쏟아냈다. 잠시 눈가를 훔치던 그녀는 지원의 공감 없는 침묵을 깨달았는지 문득 눈을 들었다. 노부인의 얼굴에 샐쭉한 표정이 스쳤다.
“두분이 아주 친하신 줄 알았어요.”
진정을 되찾은 개가 지원의 무릎을 파고들며 동그랗게 몸을 웅크렸다. 지원은 눈을 내리깔고 개의 따뜻한 몸을 쓰다듬었다. 노부인이 다시 눈썹을 치켜올리며 분에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니에유. 날 보면 그렇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유.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유.”
“네….”
문득 문이 살짝 열린 욕실에서 역한 담배 냄새가 확 풍겨 주방을 채우고 큰방으로 넘어 들어왔다. 지원이 얼굴을 찡그리며 일어나 욕실 문을 닫고 베란다의 바깥 창을 조금 열었다.
“아래층에서 올라오나 봐유. 너무하네. 아파트는 이게 문제야. 이상한 인간들이 이웃이 되면….”
노부인은 코를 실룩거리며 투덜거리고는 이제야 분이 가라앉는지 말을 멈추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천장까지 닿은 책꽂이가 세 면의 벽을 디귿자 모양으로 메웠고, 긴 책상이 나머지 한 벽을 채웠다. 책상 위에는 사전 여러 개와 하얀 종이 뭉치, 볼펜들, 책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무슨 책이 이렇게 많대유.” 노부인은 잠시 감탄하듯 벽을 쳐다보다가 무표정한 얼굴을 지원에게로 돌렸다.
“아무래도 책 만드는 일을 하다보니….”
“책이나 공부가 다 무슨 소용이래유. 여자한테는 좋은 남자 만나는 게 제일 큰 행복이지. 내 손녀 같아서 하는 얘기유.”
몸을 일으키던 노부인은 문득 개에게 눈길을 던지더니 쯧쯧 혀를 찼다.
“나이가 많은가 봐유. 털이 듬성듬성하니 살이 훤히 보이네. 짐승이나 사람이나….”
노부인은 말꼬리를 흐리더니 이렇게 느닷없이 찾아와서 미안하다는 둥, 너무 속이 상해서 그랬다는 둥 변명을 트림처럼 계속 뱉어내며 현관문 밖으로 사라졌다.
자그마한 노부인이 뱉고 간 질척이는 말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11월의 메마른 바람, 욕실 환기구를 통해 들어오는 역한 담배 연기가 좁은 방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지원은 욕지기를 느끼며 개를 가슴에 안고 목덜미에 가만히 코를 묻었다.
십분쯤 지났을까. 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집에 있는 것 다 알고 있으니 어서 나와봐. 그처럼 의뭉스러운, 하지만 위협하는 듯한 소리였다. 지원은 침입자를 집 안에 들이지 않기 위해 문을 열고 얼른 나간 후 등 뒤로 문을 닫았다.
1403호가 언제나 둥글게 웅크리던 어깨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서 눈을 부라렸다.
“1404호 아줌마 왔다 갔지? 뭐라고 그랴?”
“별 얘기 하지 않으셨어요.”
“낼 저녁 7시에 경로당으로 좀 와. 1404호 아저씨, 아주 나쁜 사람이여. 예전에 동대표를 한 적이 있는디 그때 이래저래 돈을 떼어먹었단 말이여. 그런데도 이번에 또 나오려고 하네. 내일 주민회의에서 확실하게 얘기를 해 못 나오게 막아야 혀.”
“제가 이사 오기 전의 일이라 아무것도 모르는데 제가 가서 뭘 하겠어요?”
“일단 사람들이 많이 와야 혀. 암말 말고 와. 꼭. 꼭.”
1403호는 홱 돌아서더니 승강기를 향해 지팡이를 짚고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분노는 어쩌면 건강에 해롭기는커녕 닳은 인대를 복원하고 손실된 근육을 소생시키는 유익한 감정일지도 모르겠다고 지원은 생각했다. 1405호와 1406호 앞에 배추망이 수북하게 쌓였다 사라지고, 1401호와 1403호의 딸들이 어머니 집에 무거운 김장김치 통을 놓고 간 무렵부터였다. 그릇에 담아둔 사료가 좀처럼 줄지 않았다. 그릇에서 뿌리째 빠진 이가 나왔다.
개의 입을 벌려 보니 이빨이 하얀 성벽처럼 두줄로 단단히 박혀 있던 자리에는 혀가 다 드러나도록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그 후로 개는 사료를 입에 물었다 뱉기를 되풀이하더니 가끔 힘겹게 몇알씩 삼키기만 했다.
목덜미부터 성글기 시작한 털도 이 기간에 눈에 띄게 줄었다. 등과 팔다리에, 나중에는 얼굴에까지 흰 비듬이 섞인 불그죽죽한 주름이 드러났다. 지원은 지난 몇년 동안 죽음이 곰팡이처럼 개의 몸에 뿌리를 내리고 서서히 생명을 좀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털·눈동자·피부·이·신장·심장·근육 한 귀퉁이에서부터 시작된 죽음의 침략과 정복은 십여년에 걸쳐 은밀하고 집요하게, 망설임도 물러섬도 없이 이루어졌다. 이제 죽음의 군대는 지난 몇달 사이 속도를 높여, 저녁놀이 질 무렵 드넓은 갯벌을 빠르게 삼키는 회색빛 밀물처럼, 게걸스레 생명을 유린하며 승리를 굳히고 있었다.
그런데도 개는 십오년 전 지원이 길에서 처음 데려왔을 때처럼 여전히 집 안에서는 오줌과 똥을 싸려 하지 않았다. 눈이 어두워진 후로 그 고집은 더욱 완강해졌다. 생명의 품위를 지키기 위한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전선에 선 것처럼…. 참지 못해 지린 오줌을 밟거나 미끄러져 나뒹굴 때면 개의 초점 없는 눈에 당혹감과 수치심이 어렸다. “괜찮아, 아프니까 그래도 돼”라는 지원의 위로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지원은 개의 자부심이 상처 입지 않도록 출근하는 날에는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에, 출근하지 않는 날이면 하루에도 몇번씩 아파트 단지의 차디찬 산책로 위에 개를 잠시 내려놓아야 했다. 그러면 개는 뼈대에 살갗만 붙은 앙상한 다리를 휘청거리며 똥이나 오줌을 찔끔거리곤 했다. 그런 뒤에는 지원이 개를 파카 안에 감싸 안고 두손으로 엉덩이를 받쳐 아파트 산책로를 거닐었다.
죽음의 군대는 속도를 높여,
저녁놀이 질 무렵 갯벌을 빠르게
삼키는 회색빛 밀물처럼
승리를 굳히고 있었다.
12월 중순, 편집부 체계가 재정비되고 입사 십년 만에 세계문학 총괄팀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밤늦게 돌아온 지원은 긴 책상 아래 여러개 전선이 늘어진 곳에서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들리는 희미한 신음 소리를 들었다. 버둥거리는 개의 목과 다리에 전선이 몇겹으로 감겨 있었다. 눈이 어두워진 후로 개는 방 모퉁이, 책장과 책장 사이, 현관문과 신발장 사이의 모퉁이를 더듬어 찾아 고개를 묻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런 개가 평소 잘 가지 않던 책상 아래, 그것도 일렬로 가지런히 잘 늘어뜨려 둔 전선들을 몸에 감고서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지원은 다음 날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그 뒤로 석달 남짓이 흘렀다.
개는 지난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고 물만 겨우 삼켰다. 항문 사이로 된똥이 삐죽 나올 때면 분만이라도 하는 것처럼 쉼 없이 비명을 질렀고, 지원이 항문 가까이 아랫배를 부드럽게 눌러 똥을 짜서 손가락 두어마디만큼 몸 밖으로 꺼내주어야 겨우 소리를 멈추었다. 밤새도록 개는 날카로운 쇳소리를 질러댔다. 방석에 유리 가루가 흩뿌려지기라도 한 듯 개는 눕지도 앉지도 못하고 눈을 거슴츠레 뜬 채 계속 비틀거리며 덧없이 평온을 갈구했다. 지원의 품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원은 밤새도록 개의 감각을 숨 돌릴 틈 없이 하얗게 밝힌 그 예리한 아픔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공기의 검은색이 서서히 옅어질 무렵 개는 정신을 잃었다. 지원은 그 옆에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눈 안쪽 점막이 따갑고 몸이 밑으로 꺼지는 것 같았다.
내 옆에 더 있어주지 않아도 돼. 네 여정이 얼른 끝나길…. 그런데 1401호 할머니는 어디로 가셨을까? 딸네 집으로 이사 가셨나? 어쨌든 집이 비어서 다행이네. 이 소리를 듣지 않았을 테니. 1403호 할머니는 귀가 더 어두워져서 듣지 못하실 테고…. 참, 그러고보니 1404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통 안 보이시네. 누가 편찮으신가?
눈을 떴다. 이른 봄의 햇살이 큰방 깊숙이 들어와 방 안이 환했다. 코끝에 독한 암모니아 냄새가 확 풍겼다. 지원은 방석을 세탁기에 집어넣고 개가 좋아하는 고구마를 냄비에 넣었다.
지원은 뜨거운 물에 불린 사료와 찐 고구마를 손절구로 빻아 팥알만 하게 뭉치고는 바닥의 방석 위에 축 늘어진 개를 조심스레 안아 벌어진 입속에 넣었다. 개는 달걀흰자가 낀 듯 탁하게 변한 눈을 힘없이 뜨더니 윤기를 잃은 희끄무레한 입술을 우물거리다 혀로 밀어냈다. 지원은 손가락에 물을 찍어 치석이 종유석처럼 두껍게 낀 누런 이 사이로 흘려넣었다.
개는 온종일 누워 있다 이따금 비틀거리며 일어나 오줌을 지렸다. 끝끝내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더니, 저녁 무렵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뱃속에 남은 토끼 똥만 한 똥을 지원의 손을 빌어 밀어내고는 의식을 잃었는지 아픔이 가셨는지 평온한 표정으로 누웠다.
아, 이 차가움, 내 심장이 네 몸을
덥혀주기는커녕 네 심장이 날
얼어붙게 할 것 같아. 얼음도
이보다는 따뜻하겠어.
이제 곧 그것이 개를 데려갈 것 같았다. 개가 짙은 고독 속에서 외롭게 그 순간을 맞이하지 않도록 지원은 한순간도 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마침내 생명을 삼킬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똑똑히 봐 두고도 싶었다.
방 안을 채운 따뜻한 금빛이 서서히 줄어들고 창문이 다시 회색빛으로, 짙은 먹색으로 물들었다. 지원은 전등을 켜고 다시 개 옆에 앉았다. 흐르는 것인지 멈춘 것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의 덩어리가 실내 공기를 짓누르며 팽창해갔다.
개가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꺽꺽거리며 숨을 들이마시기 위해 안간힘을 쓰더니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코에서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원은 개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개의 앙상한 목과 어깨 사이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생명이 육체를 떠나는 순간은 생각보다 짧고 초라했다.
잠시 후 개의 항문이 10원짜리 동전만큼 힘없이 벌어졌다. 그 구멍으로 똥물이 흘러나와 개의 다리와 엉덩이를 누렇게 적셨다. 한창 때의 개가 싸놓은 길고 두꺼운 똥 덩어리에서도 나지 않던 고약한 냄새가 개의 육체를 막 떠나 갈 곳을 찾지 못한 무언가를 모욕하는 것 같았다.
지원은 생의 길을 끝까지 걸어낸 작고 존귀한 생명체의 잔해를 세면대로 안고 가 물을 틀어 엉덩이와 다리 사이를 씻겼다. 똥물이 악취를 풍기며 찔끔찔끔 계속 흘러나왔다. 지원이 벌어진 항문 속에 샤워기를 대고 대장 벽에 붙은 마지막 오물까지 다 씻겨 나오길 기다린 후 마지막으로 샴푸를 뿌려 뻣뻣해진 몸뚱이를 천천히 조심스레 씻기는데 불현듯 개가 눈을 번쩍 떴다. 게슴츠레하게 다시 작아진 개의 눈은 추위를 호소하며 그녀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지원은 바삐 손을 움직여 거품을 씻어내고 수건으로 개의 몸을 감쌌다. 개는 다시 눈을 감고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개의 몸이 차가웠다. 지원은 황급히 드라이기로 개의 성긴 털을 말린 후, 개를 안은 채 침대에 똑바로 누워 가볍고 따뜻한 이불로 개를 머리까지 감쌌다. 지원은 이불 속에서 손바닥으로 개의 몸을 연신 쓰다듬었다.
아, 이 차가움, 내 심장이 네 몸을 덥혀주기는커녕 네 심장이 날 얼어붙게 할 것 같아. 얼음도 이보다는 따뜻하겠어.
눈을 뜨니 한낮이었다. 지원은 개를 가슴 위에 올려놓은 채로 눈을 떴다. 이럴 수가, 살아났구나. 개의 몸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지원은 개를 안은 채 벌떡 일어나 큰방의 소파 위에 개를 눕혔다. 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말이 없었다. 한두시간이 더 흘렀다. 지원은 허기진 배를 채우며 개를 계속 힐끔거렸다. 지원은 밝은 목소리로 개에게 다정히 말을 걸며 자신이 지난 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렀는지 이야기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개에 불안해진 지원은 반쯤 뜬 눈을 들여다보고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물기가 느껴지지 않는, 심지어 말라서 꾸덕꾸덕하게 주름진 눈동자는 그 육체로부터 이미 오래전에 무언가가 떠났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살가죽의 선명하고 낯선 물질성이 어제의 개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며 신랄하게 빈정거리고 있었다.
지원은 작은 벤자민 나무가 심긴 화분을 사서 비릿한 철 냄새가 나는 개의 뼛가루를 흙과 섞었다. 집 안에 희미하게 떠도는 개의 체취는 화려한 불꽃이 터진 자리에 희미하게 퍼지는 희뿌연 연기 같았다. 주변의 봄꽃들이 차례로 피어나고 투명한 연두색 잎사귀들이 헐벗은 나뭇가지들을 도톰하게 감싸기 시작하면서 개의 지문과도 같던, 샴푸 향과 살 비린내가 뒤엉킨 그 고유한 냄새가 조금씩 약해져갔다.
4월이었다. 지원은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이불과 개가 사용한 옷과 천들을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사프란 향이라는 위선적인 표정을 지은 세제 입자가 계약기간이 끝난 빈궁한 세입자를 내쫓듯 벽지와 장판에 궁상맞게 매달려 있던 체취를 냉혹하게 베란다 창밖으로 떠밀었다.
지원은 세탁기의 단호한 소음을 뒤로한 채 꽉 찬 쓰레기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며칠 전 실내 공사를 마친 1404호의 닫힌 문틈으로 지독한 페인트 냄새와 접착제 냄새가 꾸역꾸역 밀려나와 1403호 앞에 늘 떠도는, 많은 약을 복용하는 사람 특유의 오줌 냄새와 오랫동안 씻지 않은 몸의 역한 냄새를 지우고 승강기 앞까지 복도를 꽉 메웠다.
1404호의 노부부는 겨우내 돌아오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이 일주일 전부터 들락날락하며 집안의 낡은 세간들을 버렸고, 그 이후 망치 소리와 드릴 소리가 사나흘 동안 그치지 않았다.
승강기가 열렸다. 1404호의 자그마한 노부인이 나왔다. 지원이 자기도 모르게 노부인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동안 두분 모두 통 안 보이셔서 걱정했어요. 어디 편찮으셨어요?”
노부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저씨가 갑자기 피똥에 설사를 쏟아내서 계속 병원에 있었어요.”
“그렇게 정정하시던 분이요? 이제 괜찮아지셨어요?”
“죽었어요.”
지원은 입을 다물었다. 지원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노부인의 메마른 작은 손을 계속 어루만졌다. 영원 같은 순간이 지나갔다. 노부인은 한층 더 작아진 것 같았다.
“두분 사이가 그렇게나 좋았는데…. 힘드시겠어요.”
노부인의 입가에서 온화한 미소가 사라졌다. 노부인이 눈을 빛내며 입술을 양옆으로 길게 늘였다.
“천만에요, 너무 좋아요.”
아무 소리를 내지 않았는데도 뱃속에서부터 울려나오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노부인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확고했다.
지원은 14층의 긴 복도 옆에 독립된
객실들이 한줄로 이어진 유럽식
특급열차 같다고 생각했다.
지원의 개와 노인들은 저마다
목적지 역에서 하차하듯 차례로
14층을 떠났고 언젠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그 후 노부인은 벽지, 장판, 욕실과 싱크대, 베란다까지 싹 바꾸고 새 가구와 가전제품을 들인 깨끗한 집에서 삼년을 더 살았다. 노부인은 오전에 경로당에 가서 그곳에 모인 노인들을 위해 점심식사와 저녁식사를 만들었고, 그 대가로 관리실에서 매달 조금씩 돈을 받았다. 1403호는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두 노부인 사이에는 쉽게 녹지 않는 얼음벽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래도 둘 다 서로를 따뜻이 대하기 위해 일부러 애쓰는 것이 느껴졌다.
1404호 노부인은 오랫동안 집을 비웠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두어차례 더 하더니 영원히 복도에서 사라졌다.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들어갔다는 말이 돌았다. 얼마 후 그 집에는 할아버지의 큰 키와 할머니의 조붓하고 하얀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육십대 가까운 남자가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다.
분노와 질타와 푸념으로 생의 발전기를 돌리던 1403호 노부인도 점점 얼굴의 붓기가 심해지고 힘겹게 숨을 내쉬다 이내 사라졌다. 그 후 얼마 동안 그 집에서 드릴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1403호 노부인처럼 넙적한 얼굴이 어깨에 바싹 달라붙은 키 작은 오십대 남자가 들어와 살았다.
겨울에 살얼음이 낀 길에서 넘어져 골반뼈가 으스러졌다는 1406호 노부인은 이제 농사일은 완전히 접고 사각형의 가벼운 철제 보조장치에 의지해 반년 가까이 복도만 오가고 있었다.
1405호의 말 없는 남편과 시끄러운 아내는 두 손주가 태어나고 자라는 속도에 비례해 근육이 빠지고 주름이 늘어갔다.
예전의 출판사에 복직한 지원은 퇴근길에 승강기에서 내릴 때면 이 14층의 긴 복도 옆에 독립된 객실들이 한줄로 이어진 유럽식 특급열차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원의 개와 노인들은 저마다 목적지 역에서 하차하듯 차례로 14층을 떠났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다만 그들 스스로도 언제 어디서 내릴지, 무엇을 위해 내리는지 몰랐다. 잠시나마 여행의 지루함을 함께 견뎌준 다른 여행자들에게 인사할 겨를이 없이 그들은 느닷없이 사라졌다. 그들이 있던 풍경을 기억하는 지원의 뇌리에는 자신에게도 기차를 떠날 시간이 언젠가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간 속눈썹처럼 불편하게 각인되었다.
얼마 전 지원은 월차를 내어 새로 이사할 동네를 알아보고 왔다. 끝
<당선소감>
"한때 ‘창작의 길’ 멈추기도계속 가보라는 토닥임 같아"
여덟살에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습니다. 그 무렵 전 어머니가 사주신 50권짜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책장을 펼치고 딱딱한 검은 글자를 조금씩 읽다보면 눈앞에 산과 들판과 바다가 펼쳐지고, 궁전과 오두막이 세워지고, 말하는 동물들과 요정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온갖 사람들을 만나고 모험을 거치고 시련을 이긴 후 소설에서 빠져나오면 제가 책장을 열기 전과 다른 사람이 돼 있었습니다. 소설 한편을 벗어날 때마다 스스로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되고 인간이 느낄 법한 다양한 감정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글자만으로 그런 놀라운 세상을 만들어내는 소설가가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존재로 보였습니다.
그 후로 이제까지 제 삶은 소설을 쓰기 위한 몸부림과 그 꿈에서 달아나려는 시도의 끊임없는 반복이었습니다. 뛰어난 소설들에 압도당하고 제 초라한 언어와 제가 만든 흐릿한 세상에 절망하기를 되풀이하다 십년 전쯤 창작을 접기로 했습니다. 좋은 소설을 읽는 즐거움으로 쓰린 회한을 달래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요. 그런데 20세기의 거장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집을 가리켜 “이 책에 포함될 만한 자격을 갖춘 소설을 딱 하나만 쓸 수 있어도 행복하게 죽을 수 있겠다”라고 한 소설가 줌파 라히리의 간절한 고백이 올해 제 안에 들어와 도저히 쫓아낼 수 없는 꿈이 돼버렸습니다. 그런 저에게 단편소설 ‘기차 여행’이 당선됐다는 소식은 그 길을 계속 걸어가보라는 너무도 따뜻한 토닥임처럼 느껴졌습니다. 깊이, 깊이, 깊이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노인의 삶 섬세하게 그려내 공감·존중 내면묘사 돋보여
올해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다채롭고 흥미로웠다. 저마다 탄탄한 문장력, 각별한 얘깃거리, 가독성 있는 전개를 자랑했다. ‘틈’ ‘춤을 춰요, 엄마’ ‘나방의 기원’ ‘런, 런, 런’ 네 작품은 진정성은 유지하되 수필적 표현을 삭감하는 방향으로 퇴고한다면 괜찮은 소설로 발전할 테다.
본심에서는 세 작품을 집중 논의했다. 공히 장점과 단점이 뚜렷했다. ‘해바라기, 달을 먹다’는 고시원에 사는 십대 가출 미혼모의 힘겨운 일상을 영화로 보는 듯하다. 탄탄한 구성과 똑 부러지는 간결체로 뉴스에서 자주 접하는 안타까운 에피소드를 잘 버무려놓았다. 하지만 기시감을 넘어설 만한 뭔가가 와닿지 않았다. 화자의 마음이 강화돼야 한다. ‘입의 발달사’는 거대한 서사와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입담만 오롯하다. 시골 권력 계층을 대표하는 이씨와 중하류 계층을 대표하는 아버지의 수십년간의 악연을 다룬 얘기인데, 참신한 시골 소설로의 발전이 기대된다.
‘기차 여행’은 서울 근교의 14층 아파트 노인들의 삶을, 젊은 여성의 시선으로 섬세하면서도 따뜻하게 그려낸다. 늙은 애완견의 죽음을 다룬 에피소드는 이채로우며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전체적으로 조화롭지 못한 구성에도, 사랑과 공감과 존중이라는 사람 특유의 정서를 잔잔하면서도 명료하게 전달하는 내면묘사가 돋보였다. 당선작으로 선정하며, 남다른 문체와 각별한 시선으로 좋은 소설을 많이 써주리라 응원한다.
심사위원 : 임철우, 김종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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