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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그 섬에 코끼리가 산다 / 이서안

 

항구를 떠난 배가 일몰의 바다로 서서히 젖어 들어갔다. 멀리 떠 있는 배들은 한 폭의 그림처럼 해풍에도 흔들림이 없이 보였다. 다만 내가 탄 배 쪽으로는 세찬 바람이 불었다. 겹겹의 진회색 띠가 수평선 위로 두껍게 드리웠다. K는 화물칸 차에서 눈 좀 붙이겠다며 운전석 의자를 뒤로 젖혔다. 잠 핑계를 댔어도 카메라를 끼고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그였기에 나는 자리를 비켜줄 요량으로 성큼 2층 선실로 올라갔다. 사람이 거의 없어 휑하기까지 한 선실을 둘러본 나는 바깥 갑판을 바라보았다. 하늘과 맞물린 바다는 어둑해져 시야가 불분명해졌다. 다만 실체가 있다면 배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을 뿐이었다. 소금기와 비린내를 머금은 바람이 나를 향해 훅 들이쳤다. 섬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배였다. 우리가 도착할 섬은 몇 개의 섬을 거쳐 늦은 시각에 다다를 터였다. 까딱했더라면 오늘 이 배를 놓치고 다음 날 아침 배를 탈 뻔했었다. 그렇게 되면 또 하루가 늦어질 테고 일의 차질이 생겨 난처할지도 몰랐다. 몇 달째 행방이 묘한 홍 PD를 두고 B 제작팀들이 수군대더라고 K가 슬쩍 일러주었다. 복도를 어기적대며 지나가던 조 PD의 며칠 전 몰골이 떠올랐다. 꼬락서니는 밤을 꼴딱 새운 표정이었다.

어쩌려고 그래? 그러다 몸이 남아나겠어?

어쩌긴, 이러다 퍽 가는 거지.

얼마 전 아프리카에서 사고를 당한 두 PD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 걸 모르지 않았다.

홍 선배 소식은 들었어?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벌써 석 달째야.

왜, 한 번씩 그랬잖아. 전에도 3개월 만에 돌아왔지?

이번에는 그냥 안 넘어갈 것 같아. 국장이 단단히 벼르고 있어.

그 선배는 병이야, 병. 아주 고질병이야. B 제작팀도 안됐어. 메인 PD가 저 모양이니······.

휙 사라졌다 나타나는 홍 선배의 방송 사고를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국장들은 술자리에서 홍을 향한 직격탄을 날리느라 쉴 새 없었다. 홍 때문에 청심환 먹는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홍을 아예 제쳐놓고 안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찌 된 게 홍이 맡은 시사 다큐멘터리 프로는 시청률뿐 아니라 굵직한 상들을 싹쓸이하곤 했다. 잡다한 소리를 한방에 눌러버린 셈이었다. 그래서 술자리에서 뒷담 까고 게걸스럽게 욕을 해도 국장들은 홍 앞에서 너스레를 떨었다. 어쩔 땐 홍이 부러웠다.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던져버릴 수 있는 용기가. 5년째 안정적인 다큐 프로를 유지하고 있지만 긴장은 심해 밑에 웅크린 똬리처럼 따라다닌다. 방송에서 보장된 안정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은 가중되었다. 일정한 시청률을 확보하고도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신기루 앞에 마음을 놓았다 졸이기를 수백 번 수천 번을 더하고 있다. 이런 내 속내를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홍 선배였다. 홍 선배는 사라지고 나는 홍 선배의 제안으로 불분명한 섬, 미지의 섬으로 향하고 있다. 대게 답사 후 구성안 살펴본 뒤 사인 떨어지면 촬영 나가는 게 일반적이었다. 조 PD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나도 홍처럼 미쳤다고 입에 게거품을 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쓴웃음마저 나왔다.

담배 몇 개비를 피우는 사이에 수평선의 경계는 완전히 무너졌다. 칠흑의 바다만 깊은 수심의 비밀을 안고 먹먹하게 침잠했다. 굳이 또 그걸 나눈다면 바다인지 하늘인지 모를 그곳에 허연 담배 연기만 재를 뿌리듯 바삐 달아났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방송에 더 많은 자본이 들어오게 되면서 PD들의 이동 폭이 잦았다. 자기가 기획하고 있는 프로도 내려놓고 가는 사람들도 생겼다. 케이블 방송의 프로 중에는 공중파보다 시청률이 높은 프로도 적지 않았다. 나라고 언제 그러지 않을 리라는 장담도 없었다. 기회는 늘 있는 게 아니었다. 미적대다가 놓치면 퇴물이 되는 게 다반사였다. 이번 취재 건도 그런 참에 생긴 기회였다. 코끼리! 시청자들을 사로잡을 흥미는 있어 보이는데 서커스단 코끼리인지 애완용 코끼리인지 홍은 자세하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요즘 코끼리는 어느 동물원이나 쉽게 볼 수 있는 동물이었다. 굳이 대도시가 아니라도 소도시의 동물원에도 간혹 있었다. 동물애호가들의 동물 애완이 다양해졌다 해도 코끼리를 키우는 건 드문 일이었다. 희귀 새를 키우거나 악어를 키우는 일은 TV에 종종 나왔으나, 코끼리였다. 그것도 육지에 있는 코끼리가 아니고 남도 작은 섬의 코끼리였다. 제주도에 코끼리가 있는 건 충분히 이해 가능했다. 공항도 있고 지리적으로 동남아와 가까우니까. 점보 빌리지의 코끼리 공연은 해외 관광객 뿐 아니라 국내 관광객에게도 유명했다. 터무니없게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남도 끝의 작은 섬이라면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연락처도 없고 정보만 듣고 무작정 가는 꼴이었다. 이런 경우 허탕을 예견했으나 내가 아는 홍 PD는 그렇게 무모하거나 맨땅에 헤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배의 엔진 소리가 어두운 수면을 헤집었다. 하늘의 자디 잔 별들이 쏟아질 듯 가깝게 느껴져 도시를 벗어난 편안함과 동시에 깊은 곳에서는 원인 모를 초조가 끈적거렸다. 이제 불안은 몸에 밴 습관이었다. 움직이는 배에 몸을 싣고 있는 나의 현재는 바다 위였다. 사위가 어두웠다. 어둠만 가득한 이 공간에 아득한 곳에서부터 비치는 빛들과 배의 조명등이 나를, 바다를, 명명하며 구분 지었다.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취재하고 기획하고······ 어느새 마흔 중반에 들어섰다. 해외에는 다큐 전문 방송 채널이 확보돼 안정적으로 방송할 수 있는데 국내 방송사들은 어떻게든 다큐멘터리 방영을 줄여나갔다. 캄캄한 바다 그늘이 앞날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해졌다.

선수가 선착장 주변을 선회했다. 엔진 소리가 멈추자 선체가 가볍게 흔들거렸다. 섬에 내리는 사람은 몇 사람뿐이었고 짐을 실은 차들이 두서너 대 따라 내렸다. K가 탄 방송국 차량이 조심스레 배의 발판을 딛고 섬으로 내디뎠다. 밤을 타고 썰렁 바람이 우리를 재촉했다. 민박집은 선착장 주변 근처에 있어 차를 쉽게 주차할 수 있었다. 민박집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할 틈을 타 나는 섬마을을 살펴보려고 길을 나섰다. K는 이번에도 같이 가기를 사양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일 그가 촬영할 분량은 테이프 몇십 개가 되니 몸을 아껴두어야 했다. 언젠가는 꼭 물어보고 싶었다. 왜 디지털 시대에 계속 아날로그 촬영을 고집하는지.

불빛 두어 점이 보일 듯 말 듯, 어둑한 마을을 돌아 해변 길로 꺾어 들어가니 온 천지가 암흑이었다. 가로등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다만 정적을 뚫고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와 파도 소리가 내가 디디고 서 있는 곳의 실체를 증명해 주었다. 바람에 실려 바다의 비릿한 냄새가 볼과 목 언저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방금까지 불안정한 공간에서 조금은 안심이 되는 공간으로 이동한 것과 피곤하다는 몸의 반응 외에는 그 무엇 하나 떠오르지 않는 막막함이 밀려왔다. 내일 스케줄이 얼핏 머릿속을 스쳤다. 취재 대상인 코끼리와 정도길. 이 적막하고 어둑한 어느 구석에 코끼리가 숨을 쉬고 있다니······ 그때 쿵. 묵직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쿵. 쿵. 무게의 압력이 상당히 느껴지는 소리였다. 인도에서 언젠가 들었던 소리와 비슷했다. 코끼리가 발걸음을 떼며 걷는 소리 같았다. 나는 이제야 내가 코끼리가 있는 곳으로 맞게 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종적을 감추기 전 홍 선배는 단호하게 말했다. “조선시대에 사라진 코끼리야.” 나에게 코끼리를 찾으라는 특명을 그가 내렸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네 다큐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될 거야.” 평소 유별난 사람인 걸 모르지 않았으나 조선시대의 코끼리를 찾으라니! 아무리 새로운 건수에 목이 말라도 현실감 없는 소리에 농담을 하나 했다. 차라리 남도의 수심 깊이 묻혀 있는 보물을 찾으라고 말하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코끼리가 살아봐야 60~70살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홍은 그렇게 대책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때론 그가 한 번씩 사라져 방송국 사람들을 곤란에 빠트렸지만 내가 보건대 그건 특종을 낚으러 가는 거였다. 방송 20년 동안 그와의 관계는 탄탄했고 일 처리에 있어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홍의 이 제안은 거절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다. 모를 일이었다. 기회를 준 그가 몇 달째 잠수를 타고 있으니, 이거야 원.

다시 민박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K의 부르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K는 나에게 휴대폰을 가리키며 여기 휴대폰이 잘 터지지 않는다고 폰을 흔들었다. 그는 나에게 몇 번 연락을 시도한 모양이었다. 주인에게 부탁해 놓았는지 푸짐한 밥상이 차려져 나왔다. 시장기가 돌아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데 방송국에서 온 걸 알고 주인은 우리에게 취재를 왔느냐고 연신 물어댔다. 어차피 내일 이 섬의 사람들 모두 인터뷰를 해야 할지도 몰랐다.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주인은 1년 전 이곳 민박집을 인수해 들어왔고 섬 사정은 아직 속속들이는 잘 모른다는 투였다. 그에게 확인한 정보는 섬 띄엄띄엄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으며 큰 섬에는 50가구쯤 살고 작은 섬은 30가구쯤 모여 산다는 게 그가 아는 섬의 상식이었다. 이곳 풍광에 끌려 낚시꾼들을 밑천 삼아 은퇴 후 노후를 보내려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내가 코끼리가 이 섬에 사느냐고 묻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섬에서 웬 코끼리? 라며 되묻고 있었다. K가 나를 향해 곁눈질했다. 낚인 게 아닌가 하는 눈치였다. 내가 이 섬에 도착해 코끼리 걷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자 그는 그럴 리가 없다며 점잖은 분들이 장난치냐고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이 사람은 외지 사람이나 다를 바 없었다. 섬사람들이 외지 사람에게 선뜻 자신들의 귀한 정보를 까발리지 않을 거였다. 무엇보다 그는 코끼리에게 관심조차 없는 인물이었다. 대화를 끊기가 어색해 나는 그에게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 나이 연령대가 얼마쯤 되냐고 물었다. 그의 입에서 거침없이 튀어나온 바로는 자신이 60대 중반이 넘었는데 가장 젊은 축이고 대부분 80세가 넘고 어떤 노친들은 100세가 넘은 사람도 몇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덧붙여 말했다. 어찌 된 게 1년 동안 아이 한 명 본 적이 없다며 남도의 방언이 아닌 표준어를 구사했다.

오래전 교육방송에서 일할 때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코끼리 살인사건을 다룬 적이 있었다고 홍 PD는 말했었다. 그때는 실록 사료에 근거해 조선 시대에도 코끼리가 있었다는 것과 그 코끼리로 발생한 살인사건을 보도하는 측면에 그쳤단다. 방송이 끝나고 사라진 코끼리의 행방을 알 길 없는 궁금증은 방송사를 이전하면서 잊어버렸다가 작년 남도의 철새를 취재하면서 이 섬 근처에 들렀고, 코끼리가 유배 왔다는 섬을 지나게 되자 그때 방송했던 코끼리 프로가 떠올라 이번에는 다른 관점에서 취재를 해봐야지, 하고 기획을 계획했던 사정을 덧붙였다.

홍이 떠나면서 한 말은 그냥 흘린 말이 아니었다. 근데 이 좋은 소스를 왜 나한테 넘겼는지? 그가 직접 제작해도 되는 건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시청률 때문에 다큐에 드라마를 가미하는 나 자신의 초라함을 밝힌 심경을 들은 탓이었을까? 거슬러 올라가 보면 수습 때부터 선배들을 떠나보내는 연습을 하면서 방송 일을 했다. 떠날 때 조용히 떠나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면서 꼭 나를 보고 이 프로그램 잘 마무리하라며 과업을 당부하듯 엄숙하게 말했다. 자신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떠나면서 왜 나에게는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으나 어쩐지 따라야 할 것 같은 사명감에 프로가 바뀌어도, 메인 연출이 사라져도, 이 자리를 지킨 지 20년째다. 이번 섬 취재 건도 후배를 아끼는 홍의 배려라고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애써서 기획해놓은 걸 나에게 맡아보라며 덥석 안겨주었으니까. 그건 이 바닥에서 거의 없는 룰이었다. 최근 시청자 기고란에 올라온 제안서들은 건질 게 거의 없었다. 얄팍한 상업 목적으로 보고서를 올려놓은 게 두서너 개 되었고 터무니없는 기고도 몇 개 되었다. 급할 때는 외주업체에 의뢰할 때도 있었으나 아직 급한 건 아니었다. 방송 분량이 5주 정도 남아 있었다. 홍이 내 자리를 대신했다면 이번 취재도 홍이 맡아 진행했을 거였다. 도중에 그만두고 나간다 해도 굳이 나일 필요도 없었고 다른 PD들에게도 줄 수 있었기에 나는 호의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1년 전 섬에 갔다가 건진 거라며 홍은 급할 때 써먹을 수 있는 히든카드라고 호기롭게 몇 번 말했었다. 그는 일만큼은 서둘러 달라붙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의 선택은 방송 프로그램의 목적과 시의성에 맞아떨어졌을 때 감행을 했다. 그럼 이 건은?


*

코끼리가 있습니까?

무성하게 엉긴 숲을 헤치고 나는 무작정 외줄기 산길을 따라 산 위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고 주변의 색깔은 화려하고 다채로웠다. 펼쳐진 여정은 신기한 뭔가를 찾아가는 상황으로 보였는데 어쩐지 나는 신바람에 들떠 흥이 나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K가 취재 카메라를 들고 나를 바짝 따라붙었는데 항시 무뚝뚝한 그의 표정은 찾아볼 수 없이 해맑았다. 그 뒤에는 관광객 같은 무리가 떠들썩하게 긴 띠를 이루며 따라왔다. 밝게 웃는 소리와 아우성들이 오르막길을 따라 퍼져갔다. 족히 몇백 명이 넘는 인파였다. 코끼리 울음소리가 숲 전체에 지루하게 파동 쳤다. 소리를 따라 재빠르게 추적하는 내 모습이 보였다. 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소리의 다다름 끝에 코끼리가 우뚝 서서 코를 흔들어댔다. 코끼리도 신이 나서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엄청난 크기의 코끼리였다. 지금껏 본 코끼리 중에 가장 큰 코끼리였다. 인도에서 본 코끼리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산 중턱의 공간은 헬리콥터가 착륙할 정도의 공간이 펼쳐졌다. 코끼리는 곡마단의 코끼리처럼 화려한 장식품을 달고 주변을 여유롭게 거닐었다. 다만 놀라운 광경은 코끼리 코를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만지고 있었고, 코끼리 등에도 아이들이 타고 있었다. 사람들이 코끼리 주변을 둘러싸며 덩실덩실 원을 따라 춤을 추었다. 하회탈춤이 생각날 정도로 그들은 흥이 넘쳐 보였다. 코끼리 옆에는 대나무로 만든 2층 움막이 정글 집처럼 한 채 있었는데 K가 그쪽으로 카메라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숲을 둘레 삼아 동그란 원 안에 코끼리가 들어 서 있는 형국이었다. 코끼리가 발을 들었다 기다란 코를 돌돌 말았다 펼치기를 반복했다. 마치 서커스단의 코끼리 같았다. 아이들도 코끼리도 사람들도 환호를 지르며 더없이 즐거워 보였다.

섬의 아침은 6시인데도 햇살이 말갛게 창을 뚫고 들어왔다. 지난밤 코끼리 꿈까지 꾼 걸 보면 취재를 못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심리 기저라고 봐야 했다. K도 잠자리가 불편했는지 얼굴이 푸석해 보였다. 어떻게 보면 가장 수고가 많은 게 K였다. 전국을 취재하며 촬영을 해야 하는 그는 늘 촬영 장비와 함께했다.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직업이었다. 10년 내내 그는 군말 없이 나와 일을 해왔다. 그래서 별말이 없어도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았다. 그의 수고는 매주 한 번씩 방영되는 다큐멘터리 프로를 통해 말끔히 씻겨나갔다. 내가 그런 것처럼 그도 그랬다.

한산한 부두에는 갈매기들이 여유를 즐기며 끼룩끼룩 소리를 내었다. 간만의 여유가 오히려 나는 생경했다. 모두 고기를 잡으러 나간 것일까, 사람 하나 지나다니지 않았다. 민박에서 식사를 마친 우리는 제일 먼저 마을 회관을 찾았다. 섬의 모습과 달리 회관 건물은 현대식으로 지어져 깔끔했다. 마을 회관에는 세 명의 노인네들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백발인 세 할머니였다. 백발의 세 노인 중에 두 노인은 화투를 치고 있었고 한 노인은 모로 누워 화투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할머니,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이 섬에 정도길 어르신이 산다고 들었는데 댁이 어딘지 아시는지요? 휘둥그레진 노인들의 시선은 K의 카메라에 잽싸게 머물렀다가 다시 내 쪽으로 얼굴을 획 돌리더니 와락 달려들어 팔을 만져대며 마구 흔들었다.

-그라 재마는? 아따, 징하게 방갑쇼잉. 방송국에서 나왔으라이. 사람이 그리웠는지 할머니들은 K와 나에게 엉겨 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정되길? 정되길이 누구여?

-정되길이 아니고요. 정. 도. 길. 요.

큰 목소리로 내가 거듭 이름을 말해도 잘 알아듣지 못한 눈치였다. 아무래도 청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에게 묻고 있다고 느꼈는지 누워 있던 할머니는 슬그머니 일어나 카메라 쪽을 째려봤다.

-정 씨 할아부지는 뭣 땀시 그란다요?

-아, 예······ 여기 이 섬에 코끼리가 있다고 해서 취재차 왔습니다. 그 어르신께서 코끼리를 기르신다고 해서요.

-모라고라 코끼래? 아따 긍께…? 코끼래를…?거시기, 시방 모라고라?

-예, 할머니. 이 섬에 코끼리가 있다고 해서 방송국에서 나왔습니다.

-말해서 뭐 하냐께. 코끼래가 있지 라이. 암요. 버젓이 살아 있지 라이. 조상님 때부터 살아 있지 라이.

한 할머니가 말하자 두 할머니도 똑같이 따라 말했다. 세 노인은 주절대기를 멈추지 않았다. 세 할머니가 떠들어대는 사투리를 알아듣기가 벅차 이러다 인터뷰를 어찌 다 할까 싶었다. K가 촬영 테이프를 교체했다.

-제가 여기 섬에 오고 코끼리는 한 마리도 보지 못했어요. 쿵, 하는 코끼리 발걸음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지만요. -코끼래 소리를 들었당가?

할머니들은 일제히 놀란 표정으로 눈들을 껌벅이며 반문했다. 청력에 문제가 있다고 여겼는데 코끼리 얘기만은 신기하게 잘 알아들었다. 그중에 머리를 쪽진 할머니가 자신의 집에도 코끼리가 있다고 냉큼 말했다. 그러자 두 할머니도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의 집에도 코끼리가 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그 코끼리를 보여줄 수 있느냐고, 취재하고 싶다고 묻자 할머니들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좀 전의 부드러운 인상에서 잔뜩 심술 난 인상을 지으며 외지 사람들에게 보여줘 부정 탈지 모른다며 설레발을 쳤다. 이래서는 취재고 뭐고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았다. 할머니들이 코끼리가 있다는 게 지금까지의 팩트였다. 하지만 사실관계를 입증할 코끼리는 보이지 않았다. 꼭 미로에서 숨바꼭질하는 기분이 들면서 마음 깊숙이 낭패감이 몰려왔다.

할머니들이 코끼리가 있다고 가리킨 곳은 산 중턱이었는데 어젯밤 내가 꿈에서 만난 코끼리가 있던 곳과 얼추 비슷해 보여 나는 눈을 다시 비벼봤다. 이 섬의 산은 유독 숲이 무성했다. K는 몇 장면 찍었으니 지나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취재하자고 말했다. 다랑이 밭에서 일하는 할머니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코끼리가 이 섬에 있다고 하는데 들어본 적 있느냐고 했더니 할머니는 휘어진 허리를 힘겹게 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있지 라이”, 하고 짧게 툭 던지듯 말했다. 그리고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밭이랑 사이를 향해 무릎걸음으로 호미질을 계속했다.


*

홍 선배가 제작한 코끼리 살인사건 방송을 내가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냥 정보 전달의 교육용에다 시청자를 겨냥한 흥미를 가미한 프로였다. 요즘 심심찮게 대학가에서도 코끼리 살인사건을 연극으로 올리고 아이들 동화극이나 인형극에서도 코믹하게 이 사건을 다루어 화제가 되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거의 재미가 전부이고 팩트는 재미를 뒷받침하는 조미료 정도에 그쳤다는 거였다. 코끼리 대신에 다른 뭔가가 바뀌어도 그 오락성은 바뀌지 않아 보였다. 코끼리가 사라진 뒤의 이야기를 추적해보는 게 홍 PD 기획안의 주요 테마였다.

작년에 야심 차게 기획했던 ‘화장 권하는 사회’는 호평을 받았었다. 나와 지금 프로를 맡은 조 PD는 그 방송으로 상까지 거머쥐었다. 물론 스텝들의 수고를 알기에 그의 상은 우리 모두의 상이 되었다. 요즘 초등학생부터 화장 안 하는 아이들이 드물었다. 여성의 전용이었던 화장이 이제 남녀를 불문하고 상용화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시의도 적절했고 주제적 함의도 좋아 시청률이 높았었다. 지금 카메라를 담당하는 촬영 감독 K도 그 방송 때 함께 했었다. K는 화장품이라 화려한 색조가 주는 영상효과가 컸다고 입을 떼곤 했다. 카메라를 만지는 사람이니 그의 말은 적확할 것이다. 방송하다 보면 별 고생하지 않고 효과를 거두는 것도 있고, 수고는 수고대로 했는데 시청자 반응은 영 시큰둥한 것도 있다. 그런 경우는 타 방송에서 먼저 다루어 기시감에서 오는 이미지 때문이거나 적시의 문제였다. “그러니까 이 바닥에서 오래 하다 보면 그게 그렇고 그래”라며 PD들은 푸념 어린 하소연을 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는 것처럼.

바다에서 본 작은 섬은 작은 산을 바다에 떼어놓은 것처럼 울창하게 숲이 졌다. 작은 산에 연이어 바다에 홀로 떠 있는 무인도에도 숲이 무성했다. 도착해서 본 섬은 그냥 섬이 아니라 어느 골진 숲의 원시림을 방불케 했다. 정 노인이 사는 집은 우리가 내린 선착장에서 돌고 돌아 가장 멀고도 높은 끄트머리 집이었으나 섬 전체를 차로 둘러보는데 채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집은 산 가운데에 위치했다. 즉, 차가 진입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카메라 장비를 들어야 하는 K에게는 난코스였다. 연락망이 없으니 우리가 올라가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야외 취재에서 이런 일은 다반사였다. 어떤 프로도 쉬운 일은 없었기에 잦은 변수를 대비해야 했다.

몇 군데의 밭과 능선을 지나 숲길로 접어들자 대나무 숲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하늘을 향해 뻗은 대나무 사이로 옅은 빛과 강렬한 빛이 번갈아가며 명암을 나타냈다. 산을 향해 갈수록 바닥의 흙길이 붉은빛을 띠었다. 비자나무숲이었다. 수십 개의 가지를 뻗은 나무는 생김새만큼 야릇한 기운을 자아냈다. 침엽수의 비자나무 길은 꽤 가팔랐고 한껏 팔을 뻗으며 자란 가지들은 나무의 경계를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비자나무 열매가 떨어진 나뭇잎들에 섞여 좁은 산길에 드문드문 보였다. 나는 습기에 젖은 비자 열매를 손바닥에 올려 냄새를 맡아보았다. 소나무 향 같은 싱그러운 냄새가 코로 흡입되었다. 어젯밤에 통화한 조 PD는 기괴한 분위기로 섬을 엮지 말고 독자들의 흥미를 끌게 촬영해 오라고 말했다. 막막한 섬에서 재미를 끌 게 뭐가 있을까, 편집실에 처박혀 몇십 개의 테이프를 엮다 보면 기괴가 재미로 탈바꿈하는 게 썩 없지 않았지만 그렇더라도 뭐가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코끼리가 있다는 섬에 코끼리의 흔적조차 없으니······ 굳이 재미를 살리려면 전라도 방언을 구사하는 마을회관의 세 할머니 정도였다. 그 어른들이 자신의 집에서 키우는 코끼리를 보여준다면 몇 개의 테이프 분량은 채울 것도 같았다. 아무튼, 과제는 이 섬에서 사오일 동안 방송 분량을 다 채워야만 한다는 것만 남았다.

가슴에 숨이 차올라 더 걷기가 힘들 때 나는 꿈속에서 본 장소와 비슷한 곳에 도착했다. K도 쌕쌕거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적막한 산에서 개도 기르지 않는지 적요했다. 그늘진 숲 아래에 엉성하게 지은 초가집의 움막은 사극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했다. 그 움막집에서 나온 노인장의 모습도 옛날 드라마의 인물 같았다. 아직 상투를 올린 노인의 모습은 타임머신을 타고 등장한 것 같았으나 코끼리를 키우는 비범함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 노인의 생김새를 보는 순간부터 내 뇌리에서는 김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의 집 주변을 대충 눈 씻고 봐도 코끼리는 없었다. 코끼리가 풀 뜯어 먹으러 갔나? 하지만 조선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섬에 살았던 코끼리가 풀만 먹은 건 아니었다.

『일본 국왕 원의지가 사자를 보내어 코끼리를 바쳤으니, 코끼리는 우리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명하여 이것을 사복시에서 기르게 하니, 날마다 콩 4, 5두씩을 소비하였다. (태종실록 21권, 태종 11년, 2월 22일)』

한양에서 쫓겨나 전라도로 내려간 지 약 반년 만에 코끼리는 다시 실록에 등장한다. 이번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보고를 올렸다

『길들인 코끼리를 순천부 장도에 방목하는데, 수초를 먹지 않아 날로 수척하여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태종실록 27권, 태종 14년, 5월 3일』

갑자기 어젯밤 꿈에서 본 그 영상들이 실재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마저 생겼다. 촬영하기도 멋졌고 많은 시청자에게 큰 호응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코끼리는 오간 데 없고 섬에 한평생 묻혀 감각 없는 노인과 태풍이 몰아치면 금방 무너질 것 같은 움막과 노망기를 보이는 할머니들이 내가 본 현실이었다. 작년에 들렸다는 홍의 얘기를 꺼내자 정노인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섬에 코끼리가 있다고 해서 왔다고 하자 그는 대답은 않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바심에 지쳤는지 카메라가 무거웠는지 K가 카메라 장비를 내려놓으며 땀을 훔쳤다. 코끼리를 보여 달라고 하자 노인은 서두를 것 없다며 물주전자를 가져와 마시라고 건넸다. 나무로 만든 물주전자였다. 컵도 나무잔이었다. 우리가 마시는 것을 지켜보던 노인은 움막 옆에 있는 후미진 가마 토굴로 들어갔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의구심이라는 단어를 떨쳐낼 길이 없었다. 그 토굴은 코끼리의 반도 안 되는 크기라 새끼 코끼리가 아닌 바에야 거기서 살아 있는 코끼리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걸 K와 나는 단박에 알아챘다. 마음이 썰렁 내려앉기 시작했다. 낚인 순간이었다. 차라리 노인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이대로 사라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일순간 더 강하게 들었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낯선 장소에서 K와 나는 서로의 난감한 얼굴을 쳐다보며 실실 웃었다. 그때 정 노인이 토굴에 서서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K는 카메라 렌즈를 갈아 끼웠다. 옻칠한 듯한 네모 상자를 들고 나온 노인은 의식을 치르듯 상자를 조심스레 다루었다. 사과 상자 크기였다. 그 상자 안에 죽은 코끼리의 뼈나 모형이 있을 거라는 짐작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상자 안에서 보자기 천에 덮인 코끼리를 우리에게 펼쳐 보였을 때 우리는 애써 실망을 감추려 노력했다. 화려하지 않은 극히 소박한 목각 코끼리였다. 단지 눈길을 끌었다면 코끼리 코에 아이들이 매달려 있었고 등에도 아이들이 타고 있었다. 옻칠도 하지 않았고 유약도 바르지 않은 나무의 결이 다 드러난 코끼리였다. 팔목 크기 정도의 코끼리는 정교하고 색깔도 기묘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엮어 방송으로 내 보낼 생각을 하자 어깨에 힘도 빠지고 다리에 힘도 빠졌다. 홍이 어쩌자고 이런 말도 안 되는 것을 기획했다는 말인가! 나는 또 그 말도 안 되는 것을 무턱대고 믿고 이 남쪽 끝의 섬까지 왔다는 말인가! 김이 빠진 것은 K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돌아가서 조 PD가 지랄 발광할 것을 생각하자 더 뚜껑이 열릴 것 같았다. 모처럼 주어진 기회를 이렇게 날려 보낼 수는 없었다. 팩트만 있으면 불가능한 것도 시청률로 상쇄시켜 놓는 게 조 PD와 나였다.

한번은 우리 팀에서 내장산에서 평생 산 할머니를 일주일째 취재한 적이 있었다. 그냥 단조로운 할머니의 일상이었다. 특별하거나 관심을 끌 여지가 없는, 팩트는 ‘어떤 할머니가 내장산에서 혼자 산다’였다. 일주일 동안 그 할머니는 우리에게 몇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말이 없어 처음에는 실어증 걸렸나 생각했다. 마당에 있는 닭과 병아리에게 모이를 주고, 개밥을 챙겨주고, 밭일하고, 나무를 해왔다. 긴장을 끌었다면 그 집의 병아리를 호시탐탐 노려 지붕 위에서 빙빙 도는 솔개 녀석이었다. 그냥 내장산에서 한 할머니가 살아가는 팩트 하나 가지고 명작을 탄생시킨 조 PD를 다큐멘터리 연출가라고 해야 할지 드라마 작가라고 해야 할지 해석이 난해했지만 그 방송을 보고 전국의 아들딸들이 부모를 생각하며 울었고, 그날 통신사 집계로 부모에게 자녀들이 가장 전화를 많이 한 날이었다고 한다. 조 PD는 종종, 누누이 말했다. “팩트 하나만 있으면 돼. 나머지는 김 PD와 내 몫이야. 팩트 하나만 건져와!” 나를 슬쩍 끌고 들어가 공범으로 만들었지만 지금 이 팩트를 팩트라고 해야 하나? 섬에 코끼리가 있는 줄 알고 왔는데, 없다. 코끼리는커녕 달랑 코끼리 목상 하나 눈앞에 있는데······ 목상을 어떻게 살아 있는 코끼리로 둔갑시킬까? 그 섬에 코끼리가 ‘산다’를 ‘살았다’로 바꾸어야 하나? 살았다는 것을 증명할 팩트들은 여럿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코끼리 사건이 구체적으로 기록 되어 있었다. 태종실록 21권, 24권, 26권, 27권, 35권에도 세종실록 10권, 11권에도 코끼리는 존재했다. 그러나 ‘그 섬에 코끼리가 산다’는 것은 증명해 보일 그 중요한 실체가 없었다. 그러니 코끼리는 분명 살아있게 만들어야 하는데······. 촬영감독으로 뼈가 굳은 K가 보이콧을 했다. 찍어봐야 방영되지 못한다는 걸 K도 나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입증할 것이 없을 때도 찍어서 방송을 내보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허상이 실제로 둔갑해 아직도 그 프로의 실상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시청자들이 좀 많은가.

연기에 그을린 코끼리를 그가 내게 내밀었다. 그의 마지막 코끼리가 될지 모른다고 했다. 오늘 밤 그는 비자나무에 그을린 코끼리를 다시 그을리게 하는 작업을 한다고 말했다. 비자나무를 깎아 코끼리를 빚는 제작 과정을 못 담는 게 아쉬웠지만 그나마 연기에 그을린 작업을 촬영할 수 있어 다행한 일이었다. 정 노인은 자기를 소개할 때 목수도 아니고 목공예가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의 직업은 어부라고 간명하게 말했다. 오랫동안 배를 탔으며 이 섬에서 태어나 이 섬에서 마지막을 보내게 될 거라며 긍지가 담긴 말투로 말했다. 코끼리 목상 제조는 대대로 내려왔다고 했다. 아버지에게 만드는 법을 배웠고 그 아버지는 그 아버지에게 배웠다고. 정 노인은 이 작업이 재차 마지막이 될 거라고 하는데…?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그는 가족이 없어 보였다. 있었는데 없는지, 아예 없었는지, 그 스스로 말해주지 않는 이상 알 길은 없었다.

정 노인은 지금까지 코끼리만 만들었다고 말했다. 아니, 탄생시켰다고 말했다. 그을리는 작업을 수십 번 걸친 목상은 은은한 비자나무 향을 머금었다. 해충에 강하고 습기에 강한 비자나무로 그는 바둑판을 만들지 않고 코끼리를 만들었다. 일평생 만든 코끼리로 집 전체를 채워야 할 텐데 딱 하나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코끼리 하나 만드는데 일 년이 걸린다는데 이 섬의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는 코끼리는 죄다 그의 손에서 살아나 그들에게서 다시 살아난 건지 아니면 먼 옛날부터 간직한 일인지 모를 일이었다.

높고 기다란 절구에서 몇 줄기의 희멀건 연기가 피어올랐다. 울퉁불퉁한 표면을 보니 시중에서 파는 절구는 아니었다.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정을 쳐 깎아 만든 절구였다. 절구통은 화구통이었다. 코끼리를 만드는 그의 솜씨라면 이 화구통도 그가 만든 것일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대개의 목기나 목공예는 깎아서 만든 후 옻칠하는 게 보통이었다. 정 노인은 일반적인 방법을 따르지 않았다. 숯불에 바비큐 요리하듯 화구 높이에 코끼리를 빙글빙글 돌려 그을음이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했다. 옻칠 대신 그가 택한 방법이었다. 정 노인은 비자나무 자체가 해충에 강하다고 여러 번 말했다. 매일 작업하는 것은 아니고 시간이 날 때마다 급할 것 없이 일 년에 한 개씩 만들었는데 이제는 손목과 손가락 통증으로 제대로 만들 수가 없다고 말했다. 노인이 만든 코끼리 목상은 동남아 여행 시 골동품 가게나 특산품 가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몸매가 미끈하여 귀엽거나 우습게 생긴 코끼리가 아니었다. 수백 번을 그을린 몸통에는 마치 살아 있는 코끼리의 살결처럼 거칠고 투박한 조각의 흔적들로 입체감을 살려냈다. 마을의 몇몇 노인이 보여준 코끼리와도 사뭇 표정이 달랐다. 한 사람이 수십 개의 코끼리를 만들었을 텐데 코끼리는 어느새 그 노인들의 살아온 삶의 얼굴을 간직하고 있다는 게 다르면 다른 차이였다. 아니, 실제로 코끼리는 똑같이 만들었는데 내가 그렇게 보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섬의 코끼리들은 어르신이 다 만들었다고 하는데 집마다 코끼리 느낌이 다릅니다.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있네요.

정 노인은 내 말에 슬며시 미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돌연 멀리서 해풍이 불어왔다. 화구통의 연기가 방향을 잃은 듯 마구 흩날렸다. 똑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같은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도 나무의 재질도 다르고, 그날그날 작업할 때 그 사람의 마음과 손길이 다르고, 습도가 다르고, 온도가 다르고, 바람이 다르고, 불길이 다르고, 연기의 세기가 달랐다.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그 방송이 그 방송 같다는 소리도 간간이 듣지만 한 프로가 만들어지기까지 무수한 시간이 녹여져 만들어진 것이었다. 같은 듯 보여도 정확하게 같은 것이 아닌, 다 다른 거였다. 어쩌면 모든 게 달랐다. 그래서일까, 내가 본 코끼리 목상 중에 어떤 것도 같게 느껴지는 게 없었다. 정 노인에게 조선시대부터 코끼리가 여기 섬 근처에 살았다는 것을 아느냐고 묻고선 나는 바보 같은 질문을 한 것을 일순 깨달았다. 코끼리가 살아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멍청한 물음을 한 거였다.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있고, 부처가 있고, 조상이 있듯이 그들에게 코끼리는 그런 존재로 살아있었다.

그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지금도 그 코끼리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있다. 그의 손에서 목상이 살아나고 그 목상은 다시 카메라 영상으로 재현될 찰나에 놓여 있다. 정 노인의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었다. 나는 이번 코끼리 취재한 게 방송으로 나가니 마을 회관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을 꼭 볼 것을 그에게 권유했지만 그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안타까움이 들어서 나는 정 노인이 TV에 나오고 이 마을 사람들도 나오고 섬도 나오고 코끼리도 소개된다고 했지만 노인은 어째 듣는 것 같지 않게 코끼리 그을림 작업만 계속했다. 비자 향을 머금은 코끼리가 점점 어두운 빛을 띠었다. 비자나무가 타면서 나무 향내가 움막 안으로 물씬 들어왔다. 어둑한 공간에 존재가 확인되는 건 비자나무 냄새와 상자 안에 있는 코끼리, 지금 그을림 작업 중인 코끼리였다. 이 섬에 코끼리는 있었다. 살아있는 코끼리가 아닌 나무로 만들어진 목상의 코끼리가. 나에게는 그렇게 보이는데 이 사람들은 살아있단다. 목상의 코끼리를 시청자들에게 최면을 걸듯 살아있는 코끼리로 보십시오, 라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내장산에 사는 할머니가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고 할머니가 자연이고 자연이 할머니인 것으로 둔갑시켜 놓은 게 다큐멘터리의 변신술이었다. 그 할머니에게 자연은 그저 그런 일상이고 무의미한 자연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 할머니는 별 뜻 없이 하늘을 바라보았고, 별 의미 없이 가축들을 다루고, 늘 그렇게 먹듯이 밥상에서 혼자 꼭꼭 밥을 씹어 먹었을 터였다. 시청자들의 감동을 위해, 그 할머니와 시청자의 소통을 위해, 우리는 아주 조금만 각색하고 둔갑술을 부려 만들었더니 전국의 불효자가 가슴을 치고 부모를 찾고 전화해 시청률까지 끌어 올라 놓았으니 참으로 모를 노릇이었다.


*

그래서 살아있습니까?

바다 가운데 섬이 떠 있다. 몇백 년 전에 멀리 배를 타고 온 한 마리의 코끼리는 위, 아래가 없는 우주처럼 지금 여기 섬에서 다시 살아났다. 그때 그 코끼리는 모두가 죽기를 바라는 버림받은 코끼리였다고 실록이 전했다. .

1413년 병조판서 유정현이 태종에게 청한다.

『“일본 나라에서 바친바, 길들인 코끼리는 이미 성상의 완호玩好하는 물건도 아니요, 또한 나라에 이익도 없습니다. 두 사람이 다쳤는데, 만약 법으로 논한다면 사람을 죽인 것은 죽이는 것으로 마땅합니다. 또 1년에 먹이는 꼴은 콩이 거의 수백 석에 이르니, 청컨대, 주공이 코뿔소와 코끼리를 몰아낸 고사를 본받아 전라도의 해도에 두소서.”』.

열 개의 테이프에는 마을 사람들이 보여준 코끼리가 담겨 있었다. 치매 증세가 보인다고 할머니들을 단정 지었는데 할머니들의 기억력은 엄청났다. 노인들은 80년 넘게 이 섬에 살면서 보고 들은 얘기들을 우리에게 모조리 들려주었다. 노인들이 간직하고 있는 코끼리는 정 노인보다 정 노인의 윗대 분들에게서 물려받아 내려온 것이었다. 정 노인이 만든 목상은 이 노인들에게 없었다. 자손이 없는 정 노인이 이들 손자 손녀들에게 선물로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정 노인 가족사에 대해 은근슬쩍 물었지만 할머니들은 하나같이 모르쇠로 능청을 떨었다. 궁금증이 다소 일었지만 지금은 적절한 때가 아닌 건 분명했다. 현재는 30가구 정도 남짓 살지만 예전에는 큰 섬과 작은 섬에 150가구가 넘는 집이 있었고 중국의 무역상들도 드나드는 제법 활발한 섬이었다고 말했다. 이 코끼리를 가지고 있는 집치고 복을 받지 않은 집이 없다는데······ 자식들도 잘되고 무병장수하고, 그들이 산증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섬에는 해일이 한 번도 덮친 적이 없었고, 이 주변에서 고기를 잡거나 낚시를 한 사람이 다치거나 죽은 적도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을 사람들이 화목하게 지내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 노인은 예외였다. 그가 왜 혼자서 사는지 알 길은 없어 보였다. 할머니들의 사투리를 번역한다고 애는 먹었지만 침을 튀겨가며 말할 때 할머니는 부쩍 신이 나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여기 코끼리는 조선시대와는 전혀 다른 코끼리로 탈바꿈해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조선 전기 시대부터 코끼리가 실제로 있었고 그 코끼리가 여기 섬에 살았을 수도 있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전혀 놀라워하지 않았다. 뭐 당연한 사실을 그처럼 거듭 말하고 있느냐는 투였다. 코끼리가 이 섬의 모든 좋지 않은 악운들을 쓸어내 버렸다는 거였다. 그들에게 코끼리는 정령 같은 존재였을까? 조상이 있어 그들이 존재하듯이 코끼리가 있었으니까 지금 그들이 존재한다는 논리였다. 불현듯 산티아고 가는 길의 크루즈 데 히에로(Cruz de Hierro)의 철 십자가 아래에 쌓아올린 돌탑이 생각났다. 거기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거나 돌에다 사연과 기원을 적은 무구한 신념이 정령을 이루었었다.

유추해보면 그때 사라진 코끼리가 이 섬에 와서 섬사람들이 감동케 할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사람들이 코끼리를 불쌍히 여겨 코끼리에게 지극 정성을 들이니 지능이 뛰어난 코끼리가 그 마음을 알아채고 이 섬의 사람들을 좋아하게 됐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원래 코끼리는 순한 동물이고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는가. 섬사람들에게 신적인 존재로 각인되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고맙지 않은 존재를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하는 법은 없는 법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증명할 길은 없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기억에 코끼리가 살아 있고, 그 코끼리를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며 대단한 존재로 여긴다는 게 지금의 팩트였다.

진실을 소명으로 알고 많은 사람에게 보고 들은 사실을 제대로 알리겠다는 나의 다부진 다큐멘터리 PD의 길은 처음부터 조금씩 어긋나더니 머지않아 수정이 일상화되었다. 어느 작가가 서브 작가였던 시절의 나에게 말했다. 뭐가 팩트야? 사람들이 기억하고 믿으면 그게 팩트야! 사람들이 지금껏 즐겨보는, 5년 넘게 장수하는 다큐멘터리 프로를 보라며 조 PD는 자주 회식 자리에서 말했다. "시청자들에게 살아남아야지, 내가 말했잖아, 한 줄 팩트만 쓰라고,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한다니까!”

마을 사람들의 코끼리 보여주기 적극성으로 K는 테이프 몇십 개 분량이 채워졌다고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섬 할머니들의 구수한 방언이 내레이터와 찰떡궁합을 이룰지 몰랐다. 한 달 뒤에 방영되는 이 방송이 조선왕조실록보다 더 진한 팩트로 사람들에게 기억될지는 지켜볼 일이었다. K는 실록의 역사적 사실성을 믿느냐고 물었다. 자신은 매번 촬영할 때마다 기시감의 혼란을 겪는다고 했다. 그래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중에 한 컷의 무언가가 자신이 카메라를 놓지 않게 만든다고 말했다. 지구상에 그 무엇도 완전한 실재는 없다며, 사실이라고 착각하고 믿을 뿐이라며 진중한 K가 무거운 입을 뗐다. 코끼리의 수명은 길어야 70~80년이었다. 지금이야 문명의 발달로 100세 시대가 되었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70세까지 산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이곳저곳 눈칫밥을 먹던 코끼리가 오래 살았으리라는 가정은 어쩌면 신빙성이 없었다.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없어진 걸 보면 이 골칫거리를 누군가 없애버렸는지도 모른다. 기록 어디에도 이 코끼리의 행방에 대해 남겨져 있지 않으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니면 바닷속으로 들어갔는지, 원혼이 이 섬에 깃들어 이 섬사람들의 기억에 살아남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지만 다만 세종의 마지막 당부만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물과 풀이 좋은 곳을 가려서 이를 내어놓고,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

다랑이 밭마다 흰콩이 누렇게 익어가며 수확을 기다렸다. 대나무와 동백나무, 육박나무, 비자나무로 어우러진 메숲진 숲과 누런 콩밭은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경계를 뚜렷이 했다. 다만 파란 하늘의 하얀 구름이 조화를 깨트렸다. 이 섬의 코끼리는 언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 몰랐다. 마야 부인도 코끼리 꿈을 꾸고 아들인 부처를 잉태했다고 문헌에 전해져 온다. 인도에 코끼리가 흔하니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믿고 있는지 사실인지 확인할 길이 없는 것처럼 노인들은 이 섬에 살면 복락을 누린다고 한결같이 믿고 살아왔다. 마치 코끼리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지금의 노인들이 기껏 오래 산다고 해봐도 이삼십 년이었다. 눈에 보이는 코끼리가 이 섬에 있고 없고는 그들에게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노인들이 사라지면 코끼리도 사라질 것인데 나는 코끼리에 매달린 아이들처럼 이 섬에 코끼리가 계속 살아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생겼다. 내 말년에 이곳을 다시 올 기회가 있다면 이 섬에 코끼리가 산다고 믿는 사람들을 다시 찾아낼지도 몰랐다. 민담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실재로 둔갑하기도 했다. 그때 한 번 더 취재하고 싶다는 마음이 발동했다. 강산도 몇 번 변하고 다큐도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조 PD는 내가 기획한 ‘그 섬에 코끼리가 있다’를 ‘그 섬에 코끼리가 산다’로 편집을 지시했다. 누구나 다 예상한 타이틀이었다.

M은 무려 7년 넘게 그 이국의 땅, 해발 몇천 킬로미터의 산속 마을에서 한 작품으로 버텨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추운 날씨와 씨름하며 없는 것을 보이게 만들고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그가 촬영한 행간 사이를 관객들은 볼 수 있었고 찾아낼 수 있었다. 시청자들이 단순히 보이는 것만 본다는 것은 시청자를 몰라도 아주 모른 판단 오류였다. 관객들은 M의 다큐에서 말하지 않는 암묵의 시간과 사유를 읽어내었다. 그냥 지루한 산속에서 꼬맹이의 어설픈 행동과 말들을 주워 담았다. 그는 특별할 것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었는데 사람들은 그 얼마 되지 않는 장면에서 현상 너머의 세계를 보고 감동하며 눈물을 흘렀다. 어찌 보면 참으로 지겨운 영화인데 관람객들은 드높은 정신과 맑음의 세계를 보고 지나온 시간을 반추했다고······ 그 깨달음은 장소와 시간을 벗어나 문화의 다름까지 포용하는 앎으로서의 확대를 통해 현대인들에게 참된 인간의 사랑을 보여주었고, 올해 자신의 가슴을 가장 따뜻하게 해준 영화였다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가 국제적인 상을 받았다고 색다른 감동을 한 게 아니었다. 엔딩 컷이 올라갈 때까지 관객들은 기립박수를 아끼지 않았고 나는 낯이 뜨거웠다. 5년의 안정이 단 한 편의 영화보다 가볍다는 게 아니었다. 7년의 인고의 다큐멘터리가 한 편의 영화가 되어 관객들에게 섰을 때 100분의 영화가 아니라 수백 년의 목소리로 호소하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내 내면의 흐느적거림이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

어디에 있습니까?

작업을 끝낸 정노인은 움막 뒤편으로 우리들을 조용히 불렀다. 움막 뒤편은 아주 어두웠고 여러 나뭇잎의 냄새들로 차 있었다. K가 카메라의 줌을 조절했다. 정 노인이 촛대의 촛불을 밝혔다. 나는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표정이 신중하기도 했지만 뭔가 결연한 뜻을 자행하려는 듯 비쳤기 때문이었다. 정 노인은 양 무릎을 꿇었다. 나는 그가 잠깐 기도를 하고 있지 않나 여겼다. 그의 자세는 묵념 자세였다. 오랜 시간을 안고 닳은 서랍장에서 뭔가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마치 높은 사람 앞에서 의식을 거행하고 있는 듯 그의 두 손은 바르르 떨었다. 그의 비장한 눈빛은 결연했다. 한 개의 두루마리를 꺼내놓았는데 종이는 아니었고 양피지였다. 두루마리는 거의 80% 정도 타버려 테두리가 검게 구불거렸다. 글자 맞추기를 한다고 해도 얼마 남지 않은 한자로 한 문장도 제대로 전달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너절한 교지를 향해 정 노인은 한마디 내뱉었다. “선대왕 세종대왕의 교지요.” 정 노인이 홍에게 전해주려고 한 것은 교지였다. 세종의 친서로 사복시 주부에게 내린 일명 교지였다. 집안 대대로 조상들이 그랬듯이 정 노인이 숙명으로 받든 마지막 코끼리 지킴이 내력이었다. 이 교지가 타지 않았다면 국보급의 교지로 남는 것뿐 아니라 나는 대단한 특종으로 올해의 최우수 다큐멘터리 상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기구한 물건이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지 않고 이토록 섬 구석에서 초라한 몰골로 있는 게 쓰라리고 쓰라려 속에서 비명을 지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타버린 교지라도 세종의 친서임은 틀림없었다. 첨단 과학 기술로 진품 증명을 할 수도 있었다. 가슴 한쪽이 짧게 설레었다. 이 섬에서 유일하게 증거로 삼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내 귓가에만 들리는 환청 같은 소리를 녹음할 수도 없었고, 정 노인이 만들어놓은 코끼리 형상은 아프리카부터 인도까지 흔하고 흔했다. 방영조차 불가한 상황에서 나는 조 PD를 설득할 수 있는 물증이 있어 마음 언저리에 안도감마저 들었다. 다큐에서 물증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왜 시청자고 TV 인가? 물론 할머니들의 인터뷰 진술도 있었지만 시청자들을 감동하게 하기에는 증명력이 약했다.

사람 잘 죽이기로 소문난 악명 높은 태종이 왜 코끼리 한 마리에 천착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짐작해 보면 외교적인 실리를 더 우선으로 여긴 그의 선택이지 않았나 싶다. 용비어천가에도 조선의 개국 정당성을 홍보하려고 누인 개국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씁쓸한 사실은, 태종의 실리 외교는 한 가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다. 그들의 후예들은 귀양지 섬에서 평생을 보내야만 했다. 얄궂은 교지 한 장과 코끼리 한 마리 때문에······ 하지만 이건 내 생각이고 정 노인만 보더라도 그는 꽤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정 노인이 이 정도의 정성이라면 그 윗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기억을 더듬는 그의 눈빛이 유독 그늘졌다. 어릴 때의 충격이 컸을까, 정 노인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심장이 멎는 것 같다고 가슴 언저리를 주먹으로 쳤다. 평화를 깨트리는 폭력은 사람들을 이렇게 마비시키고 병들게 했다. 그날따라 코끼리들이 아침부터 많이 울부짖었다고 했다. 평소 듣던 울음이 아니어서 어린 정 노인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원인을 몰랐다. 남도의 끝에 있는 섬이었으니까, 그 당시 나라 정세에 어두웠을 것이다. 코끼리는 10킬로미터의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일지에도 그날 아침, 코끼리들이 유달리 불안 증세를 보였고 아주 서럽게 울부짖었다고 기록이 돼 있었다. 기록은 여기까지였다. 이후부터는 노인의 증언뿐이었다. 열 살의 시선이 전부였다. 지금 내 앞에 89살의 노인이었지만 그때를 술회하는 그의 시선은 10세의 어린이였다.

-사람들이 왜놈들이라고 했재. 아주 무시무시한 놈들이라고. 우리를 다 죽일지 모른다고 하더구먼. 우리 엄니가 집에서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으니껭. 세상모르는 열 살배기가 무서운 일을 뭘 안다요. 왜놈들이 궁금해서 좀이 좀 쑤셔야 재. 어른들 눈을 요리조리 피해 짚신이 몇 번 벗겨지면서도 내달렸지 베.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군함이라는 건디, 태양에 바다도 자글거리고 그 군함도 자글거리는 건 마찬가지였지라. 어마어마해서 오줌이 지릴 정도였으니께. 그렇게 큰 배는 처음 보았는기라. 태어나서 내 두 눈망울이 그렇게 커졌던 적이 없었구먼. 근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애라도 뭔지 모르게 무시움에 사지가 저절로 떨렸지 베. 왜놈들 입은 옷들이 햇빛에 번쩍번쩍거렸당께. 총칼을 차고 줄을 지어 행진하는 왜놈들 입은 옷이 아주 멋졌기도 했지만 두렵기도 했지라이. 바다가 보이는 절벽 근처에 대포를 배치한다고 우리 코끼리들을 강제로 다 끌고 갔지라이. 그날 구경한다고 따라갔으면 나도 죽은 목숨이었당께. 어른들 몇 분도 함께 끌려 갔지라. 대포소리가 “쿵쾅쿵쾅” 천둥소리보다 더 컸지라. 천지가 뒤집히는 줄 알았는기라.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코끼리의 찢어지는 비명도 함께 들렸지라······ 우리 집식구들은 코끼리가 죽을까 봐 가슴을 치고 맴이 찢어지게 아파했지라. 지금도 가끔씩 그 비명이 들린당께. 70년도 넘었는데 말이지. 천지가 조용해져서 마을 사람들이 죄다 나갔더니 글씨 난리도 아니었당께. 글씨 우리 코끼리들이 모조리 싹 다 죽은 거여! 군함도 대포도 사라지고, 군인들과 코끼리 시체만 널브러져 있어 눈 뜨고 볼 수 없었당께. 요상한 일은 마을 사람들은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왜놈들만 싸그리 죽었으니께, 지금도 한 번씩 생각하면 지독히 분하고 치가 떨리는 기라.

코끼리의 죽음을 얘기할 때 정 노인은 급기야 흥분 조로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하며 눈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다행인 것은 마을회관의 할머니들과 달리 정 노인은 사투리를 그렇게 많이 구사하지 않았다. 집에 텔레비전도 없는데 우리가 알아들을 정도로 발음이 정확했다. 움막 안 구석구석에 쌓인 책들을 많이 읽어서인지도 몰랐다. K와 나는 정 노인의 얘기를 듣고 가만있기가 왠지 민망해졌다. 어쩌면 이때부터 일본은 동남아를 점령할 계획을 수립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중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유럽의 식민지, 동남아에 주둔 중인 유럽 군사력을 무너트리려고 맹공을 퍼부었던 시기였다. 코끼리의 수난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대만 국립박물관의 조사 사료에 보면 1942년에 아시아 코끼리 13마리가 군사 부품을 나르는데 강제로 동원된 일제의 만행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1941년, 정 노인이 열 살 때 본 것은 역사적으로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정 노인의 아버지였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 부담감에 그때부터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정 노인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코끼리 상을 그때부터 만들기 시작했다니······. 마을 사람들은 코끼리의 희생을 두고두고 가슴 아파했다. 코끼리의 장례를 한 달 동안 절벽 아래에서 행하고 제의를 올려 코끼리들을 위로했고 사람들의 손이 타지 못하게 꼬리 섬에 수장한 것이었다. 인터뷰를 하고 있지만 나도 모르게 가슴 한 언저리가 울컥 벅차올랐다.

이제 고려에서 갓 개국한 조선은 가난한 나라였다. 팔도를 정비하고 나라의 기반을 하나씩 다져갔지만 시작 단계였다. 사람도 잘 못 먹는데 하물며 미물인 코끼리였다. 일본 국왕 원의지에게 선물로 바쳐진 코끼리는 국왕의 기대를 실망으로 바꾸어 놓았다. 인도의 전설에 나오는 하얀 코끼리를 기대했던 탓일까, 짙은 회색의 코끼리를 검다고 부정하게 여겼다는 기록들이 여러 군데서 확인된다. 조선의 팔만대장경 판본이 필요했던 막부는 코끼리와 판본을 주고받게 된다. 명목은 나라 간의 외교 선물이었지만 골칫거리를 떠넘긴 셈이었다. 하루에 그 엄청난 양을 먹어대니 어느 나라와 고을이 감당할 수 있었을까. 섬 사정은 더 열악했다. 초식동물인 코끼리가 살기에는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섬도 아니고 말레이시아의 보르네오 섬도 아니었다. 남도의 아주 작은, 무인도에 가까운 섬이었다. 사복시 정 주부가 생각한 게 기발했다. 코끼리에게 소금을 뺀 해초를 먹인 것이다. 바다에 해초는 무궁무진했으니까.

코끼리 개체 수를 조절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일지에 적혀 있었다. 개체 수가 늘어나면 아무리 단속해도 사람들 눈에 띄게 되고 4~5년마다 새끼를 낳으니 여간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코끼리는 철저하게 모계 중심이었다. 코끼리가 4마리를 넘지 않도록 하는 게 사복시 주부의 주된 임무였다. 코끼리 섬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주로 육지에서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없는 쫓기는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코끼리도 어느 육지에서 반겨주지 않았다. 육지 사람들에게 코끼리는 사람을 죽인 몹쓸 동물이었다.

조선으로 들어온 코끼리는 동남아시아에서 온 수놈 코끼리였다. 코끼리는 본래 온순한 동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공교롭게 사람이 죽은 걸 보면 수놈 코끼리의 발정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발정기는 1년의 한번 한두 달 지속한다고 하니 호르몬의 과다 분비로 흥분되어 그런 일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컸다. 1941년까지 어떻게 그 섬에 계속 코끼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는 사복시의 기록으로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난파된 배 한 척이 들어왔다. 중국 청도로 들어가는 배가 폭풍으로 섬까지 밀려온 것이었다. 그 배에는 각종 진귀한 동물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암컷 코끼리도 있었다. 코끼리를 풀어놓자 수놈 코끼리가 암놈 코끼리를 보고 그냥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부터 코끼리에게도 이 섬에서 정착할 이유가 생긴 거였다.

사복시 주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른 왕도 아니고 세종대왕이었다. 고개를 숙인 그에게 세종은 지엄한 어명을 내렸다. “코끼리를 잘 돌보아라. 네 가문이 지켜야 할 게 코끼리다. 코끼리가 병들거나 죽어서는 아니 된다. 지금 여론이 시끄러우니 너는 코끼리를 데리고 조용히 사라져라. 코끼리와 네 집안이 살 방도는 내가 마련해 줄 것이다. 풀이 많고 물이 좋은 곳을 찾아 반드시 살려놓아라”

그때부터 정 주부의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되었다고 봐야 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가 정착한 곳이 이 섬이었다. 그의 집안은 코끼리를 지키기 위해, 코끼리를 살려놓기 위해 존재했다. 코끼리의 수명은 오래 살아야 80년을 살았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1941년까지 코끼리의 후손들이 살았다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일지의 기록은 한문과 언문이 섞여 있었다. 국문학과를 전공한 덕에 일지를 대충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지금의 일기처럼 긴 내용들은 아니고 짤막한 기록이었다. 사람도 아니고 코끼리이니 코끼리의 관찰일기처럼 여겨졌다. 초기에는 코끼리가 섬에 잘 정착하도록 신경을 많이 쓴 흔적들이 있었다. 정성이 지극했는지 코끼리의 상태가 좋아졌는데 내 생각에는 정주부의 코끼리를 향한 정성을 코끼리가 모르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짐승이라도 자신을 아껴주고 애지중지하는 것을 모르지 않으리라. 더군다나 코끼리는 동물 중에서도 뇌가 크고 영리하다고 동물의 왕국을 보면서 알 수 있었다. 코끼리의 배설물 때문에 섬의 땅이 비옥해졌고 콩 농사가 잘된다고 쓰여 있다. 그리고 소를 대신해 코끼리가 쟁기를 메고 땅을 고르고 농사를 짓는데 많은 도움을 준 부분들이 기록돼 있다. 코끼리의 먹을거리를 위해 섬의 사람들이 해초의 소금을 제거해 대나무 잎과 야생초에 콩을 섞여 먹인 기록들도 있었다. 그 탓에 코끼리가 별 탈 없이 잘 컸단다. 그밖에 코끼리의 치수, 몸무게, 먹는 양, 배변 양, 임신시기, 수명, 장례 등 코끼리에 관한 지침서처럼 일지에 빠짐없이 기록돼 있었다. 특히 코끼리의 장례 부분이 눈길을 끌었다. 가족 중 누가 죽으면 코끼리들은 시체 곁에서 며칠씩 잠도 자지 않고 애도하고, 흙과 덤불로 시체를 덮어주며 사람들이 성묘 가듯 몇 년 동안 죽은 코끼리를 찾아 코로 유골을 어루만져 준다는 부분은 신기하기까지 했다. 나는 코끼리가 성묘 간 무덤이 어디쯤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분명히 섬 안 어느 곳에 무덤이 있을 터였다.

햇빛을 해바라기 삼아 진종일 콩잎은 찬란하게 번들거렸다. 콩밭, 콩잎, 콩대, 콩 덤불 ······유일하게 이 섬에서 살아 생존하는 건 이 콩밭의 콩들이었다. 물론 역사의 증인이 되어줄 노인들도 있었다. 의학적 사실에 근거하면 그들 대부분은 치매성 초기의 환자들일 거였다. 초기 치매라도 그들이 도달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유일하게 89세의 관록에도 눈빛은 20대의 청년처럼 번득이는 정 노인, 그는 시대의 전수자로서 그의 머릿속에는 데이터 과다로 여겨질 만큼 스토리로 가득 차 있었다. 어쩌면 그가 죽지 못하는 이유는 전수할 대상을 만나지 못해서 일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를 편히 눈을 감게 하려면 그의 데이터들을 방송으로 내보내야만 했다. 그래 알겠다. 근데 무엇으로? K는 대충 내 얘기를 듣자마자 어쩌라고 어깨를 연거푸 들썩이며 카메라를 구부린 무릎에 걸쳐놓았다. 코끼리들의 무성한 얘기들만 남고, 코끼리는 흔적이 없다?

바다를 향해 있는 섬의 절벽은 이상하게도 코끼리의 코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형상이었다. 그 장소에서 코끼리들이 떨어져 숨졌다고 정 노인은 말했다. 정 노인이 가리킨 손끝의 떨림에서 옅은 슬픔이 느껴졌다. 바다가 모든 비극을 쓸어가 버렸다가 다시 이 섬을 향해 토해내었다. 임금의 교지를 들고 코끼리와 이 섬에서 생애를 바친 정 주부 집안의 일대기를 섬과 바다만 알고 있었다. 몇백 년의 역사에서 코끼리를 지키기 위해 분투한 시간······ 어명을 내린 임금도 죽고 코끼리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죽었는데 자자손손 이 어명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숨죽인 시간을 살아내었다. 몇 백 년의 팩트들······ 코끼리들과 그 시대의 사람들은 없어도 어쩌면 이 바다와 섬이 수몰된 시간의 서사들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섬으로 흘려들어 온 사람들은 추노나 귀양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섬에 그런 신분이 아닌 사람은 사복시의 정 주부였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는 중이었다. 그 섬에 들어온 사람들은 엄명의 규칙이 있었다. 왕이 여러 번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도 지켜야 할 게 있었다. 코끼리가 산다는 것을 발설하면 죽음이었다. 사복시 정 주부는 코끼리를 지키기 위해 들어오는 사람과 나가는 사람의 철저한 감시와 비밀을 지켰다. 그래서 코끼리의 집도 지금 산 중턱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들에게 코끼리 소리는 기이했지만 그게 코끼리 소리라고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생전 코끼리를 본 적도 없고 코끼리 소리를 들은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천둥소리나 땅이 흔들려 나는 소리쯤으로 여겼다.

코끼리는 없지만 코끼리가 남긴 얘기들은 무성했다. 코끼리가 이 마을에 미친 영향도 모름지기 컸다. 조선 시대에 온 코끼리는 의도하지 않게 사람 둘을 죽였지만 이곳에 와서 그의 후예들은 조선 사람들을 구하고 자신들은 죽었다. 은혜를 갚은 셈이었다. 이 내용만 해도 한 분량의 다큐멘터리가 되고도 남았다. 시청자들에게 보여줄 코끼리는 없지만 정 노인이 만든 목상과 세종이 내린 거의 타다가 남은 교지, 할머니들의 인터뷰 등을 엮으면 굳이 방송하지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뭔가 부족한 것이 해결되지 않은 듯 좀체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판국에는 코끼리를 CG 그래픽으로 처리해 사이사이에 넣어줘야 할지도 몰랐다.

K는 코까지 골며 잠들어 있었다. 제일 고생하는 게 촬영감독이다. 10년을 K랑 같이 일할 수 있다는 것도 인덕이라고 봐야 했다. K와 나는 운명공동체다. 2년 전 기획시리즈 다큐를 끝내고 K와 나는 모처럼 50일 휴가를 받아 산티아고 순례에 나섰다. 일평생 걸어야 할 걸음을 산티아고에서 다 걸었다는 K는 걷기를 거부하는 버릇이 생길 정도였다. 실은 K만 걸었던 건 아니었다. 휴가를 어떻게 보낼까 하다가 우리는 산티아고 가는 길로 재충전의 기회로 삼았다. 가기 전에 K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일절 카메라를 들지 않겠다는 거였다. 그렇다 보니 찍는 몫은 내 담당이 되었다. K가 50일 동안 한 컷도 찍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는 얘기는 제작팀 모두에게 이슈처럼 회자되었다. K의 요지는 자신의 시력으로 본 세상, 인위적으로 가미되지 않은 자유롭게 펼쳐진 풍경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산티아고 순례는 모두가 알다시피 자유를 느낄 만큼 가벼운 길이 아니었다. 무거운 배낭과 변덕스러운 날씨는 또 다른 고통이었다. 나는 3일 만에 순례길에 나선 것을 후회했으나 K는 나와 달랐다. 보통 때도 체력에서는 K가 항시 나보다는 나았으나 이건 체력도 체력이지만 정신력과의 싸움이었다. 이틀간 나는 정신없이 찍어댔지만 그것도 몸이 피곤하니 만사 귀찮고 싫증이 났다. 다만 느낀 게 있다면 카메라 장비를 들고 촬영하는 K를 이해했다는 것 정도가 내가 얻은 소득이었다.

-그 어떤 영상매체도 들고 가지 않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내 시야가 렌즈가 되어 프레임에서의 해방을 만끽했으니까요. 체력의 한계 상황에서도 걸을 수 있었던 힘은 길을 둘러싼 주위의 풍광들이 가감 없이 쏟아져 안길 때, 그 자연의 순수 속에서 다음 발을 뗄 수 있었죠. 카메라의 렌즈 범위에서 결코 볼 수 없고 담을 수 없는 자연의 선물 앞에 감사할 것밖에 없더라고요. 대지의 냄새, 신록의 싱그러움, 지천으로 피어나는 이름 모를 꽃들의 향내,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 바람 소리, 순간순간이 벅찬 감동과 희열로 업그레이드되었죠. 아쉬운 게 있다면 자연의 선물을 고스란히 받은 내 감각의 주체 못 하는 심정뿐이었어요.

이런 K와 달리 나는 거기서도 다음 프로의 틀을 짜느라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길을 걸어가면 갈수록 환경과 관련된 다큐를 장기간 준비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게 일었다. 생장 피에드 포르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779km를 지나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1000km를 나는 완주했다고 하는데 K는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라며, 광활한 대서양의 일몰의 바다에서 꺽꺽대며 눈물을 흘렸다. 덩치 큰 어른이 바다를 보며 울던 광경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나는 K에게 말할 수 없는 신뢰감을 느꼈다.

-해가 뜨면 걷고 해가 또 지면 잠들고 또 해가 뜨면 걷고 또 해가 지면······ 하루도 똑같은 하루가 없었어요. 많은 사람이 그 길을 걸었어도 그 풍경 속에서 느끼는 건 모두가 달랐으니까요. 앞으로 미래에 시각과 청각으로 카메라에 담을 수 없는 다른 감각들을 재현할 수 있는 영상의 시대가 온다면 어떨까? 인간의 감각을 영상매체에 다 담을 수 있다는 세상 말이죠.

아프리카에서 급작스러운 사고를 당한 두 선배도 운명을 같이 했다. 나와 K처럼. 섬의 어둠은 일찍 찾아온다. 밤의 경계를 파도 소리가 일깨워주고 까무룩 모두가 영원히 잠들 것 같이 어둠이 짙다. 그 사이로 시간의 여울들이 파도의 물결처럼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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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테이프가 든 배낭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K의 넋 나간 표정을 보니 심각한 사태가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늦게 잠든 나를 깨운 건 K였다. 급한 일이 아니고는 그가 나를 흔들어 깨울 일은 거의 없었다. 배낭 채로 없어진 걸 보면 누가 벼르고 가져간 게 분명했다. 몇십 개의 테이프에 며칠 동안 쏟아부은 수고들이 담긴 결과물이었다. 마을의 할머니들? 정 노인? 누가 가져갔지? 그들은 촬영에 비협조적이지 않았다. 대체, 이 사고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난감이 교차했다. 조 PD에게 내일 올라간다고 했는데, 애써 작업한 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하면,성질 급한 그의 입에서 튀어나올 욕지거리들이 예상되었다. 코끼리의 부재에다 겨우 찍은 흔적들조차 사라지다니······ 섬 취재는 깡그리 날린 셈이 되었다. 다시 찍어야 하나, 이런 일이 전혀 없지 않으나 참으로 곤혹, 그 자체였다. 방법은 배낭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섬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찾아야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나를 세뇌시켰다. 찾으면 된다. 찾을 수 있다. 찾고 말 것이다. 반드시 찾게 된다······.

민박집 주인에게 제일 먼저 배낭의 행방을 물어보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혹여 어젯밤에 투숙한 낚시꾼들이 배낭을 바꿔갈 수 있을 것 같아 배를 빌려서 그 사람들 있는 낚시 장소까지 갔다. 결과는, 헛수고였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배낭이기에 바다까지 와서 배낭을 찾느냐는 투로 배낭에 엄청난 돈이나 금이 들어 있는 것 아니냐고 실없는 농담들을 툭툭 던졌다. 방송 취재 테이프라고 하니 조금은 알아듣는다는 시늉을 했다.

다시 배를 돌려 마을 회관으로 되돌아갔다. 할머니들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된 게 오늘따라 할머니들은 한 사람도 마을 회관에 없었다. 큰 섬마을에 칠순 잔치가 있어 모조리 거기로 갔다는 거였다. 이래서 찾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다. K는 다시 정 노인의 움막으로 가보자고 말을 꺼냈다. 정 노인이 그 테이프를 가져갈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가 우리를 이 섬으로 오게 한 것은 알리려는 목적이었다. 코끼리를 알리지 않을 목적이었다면 홍 선배도 그렇고 우리를 받아들였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나 정 노인은 이 섬의 지리를 꿰뚫고 있으니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발걸음을 산 중턱으로 향했다. 전국을 다니다 보면 촬영한 테이프가 비에 젖기도 하고 공 테이프가 되거나 카메라가 망가져 애를 태우는 게 자주 있는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오늘이 최악의 날이었다.

조 PD가 메일로 취재한 것을 대충 보자고 문자를 보냈는데 이렇게 난처할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찍을 게 있어 저녁에 보내겠다고 대충 둘러댔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속이 타는지 K는 다시 찍자고 했다. 서둘러 찍으면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고 한다. 역시 그의 막판에 강한 의지는 산티아고에서 보여준 그대로였다. 중요한 것은 정 노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할머니들의 인터뷰를 어떻게 하나? 큰 섬마을로 간다고 해도 이 할머니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 인터뷰를 다시 해야 하다니! 할머니들의 사투리를 생각하니 머릿속이 뱅글뱅글 돌았다.

K와 나는 시간이 없으니 배낭을 찾으면서 취재를 하자고 했다. 마을 회관에 할머니들이 없으니 밭에서 일하는 할머니라도 찾아야 했다. 근데 며칠 전 그 할머니가 아니었다. “저, 할머니? 혹시 이 섬에 코끼리를 본 적이 있어요?” 할머니는 “뭐시라?” 청력이 안 좋은지 계속 헛소리를 해댄다. “시방 뭐라고 했소? 코가 어떻게 됐다고?” 여기서 붙잡혀 시간을 소비할 수는 없었다. K가 어서 가자는 눈짓을 했다.

방송 카메라를 둘러매고 다시 산을 오르는 K의 모습에 여러 만감이 교차했다. 그의 고생에 비하면 내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자 다시 산을 오를 힘이 생겼다. 며칠 전에 올랐던 산길을 다시 오르고 있다.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고 심지어 가상 시나리오까지 그려졌다.

조 PD는 간단하게 물을 것이었다. -건졌어?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없다니? 뭐가? 코끼리?

-나도 어이가 없어······올라가서 의논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조금은 어깨가 가벼운 나였다. 한 달간의 여유는 생기기도 전에 깡그리 달아나고 한 달 앞으로 닥친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의 고심이 자리를 잡았다. 이런 일이 생기려고 외주업체에 맡기기로 한 3주 차 방송도 펑크가 났다. 3주 차에 방영될 방송이 두 달 뒤로 밀려났다. 결론적으로 코끼리가 한 주차 앞으로 와 3주 차에 방영되어야 하는 꼴이었다. 근데 아무것도 없으니······ 주체인 코끼리도 없고, 그 흔적들을 취재한 것도 없으니, 낭패였다.

정 노인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한산한 움막 마당에 닭 몇 마리만 먹이를 먹고 있을 뿐 정적만 감돌았다. 바로 깨우기가 미안해 우리도 올라오다 지친 숨을 가다듬고 물을 찾아 마셨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정 노인이 눈을 떴다. 잠결에 꿈을 꾸는 줄 알았는지 두 눈을 끔벅거렸다. K가 어르신께 다시 여쭤볼 게 있어 왔다고 하자 그는 자신이 누운 평상에 앉으라며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 서울 양반이 어젯밤에 왔다 갔다고 말을 건넨다. 그리고 우리가 취재하고 갔다는 얘기도 전했다고 했다. 아, K와 나는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뱉었다. 홍 선배였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테이프를 가져간 사람은 홍 선배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어제 우리가 잠든 사이에 홍 선배가 민박집에 들렀다? 마음 한구석에는 어느 정도 안심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두려움이 자리를 차지했다. 홍 선배가 촬영 배낭을 왜 가져간 거지? 우리가 어떻게 취재했나 궁금해서? 아니 그렇다면 우리를 깨우든지 만나러 와야지, 도대체 홍 선배는 어디에 있는 건가? 정 노인에게 묻자 행방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도 홍 선배가 우리를 만나러 당연히 갔을 거라 여기고 있었다. 자고 가라고 했지만 홍은 잠깐 들렀다가 얘기를 나누고는 급히 떠났다는 거였다. 혹시나 싶어 나는 홍의 달라진 점이나 이상한 점이 없었는지 묻자 옷차림이나 형색이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았다면서 정 노인은 콩잎 줄기 말린 것들과 여러 농기구 연장들을 빌려 달라고 해서 가지고 갔다는 말을 건넸다. 무엇에 쓰려고 하냐고 물었더니 씩 웃으며 “코끼리.”라는 말을 남기고 가더라는 것이었다.

혹시나 하고 홍 선배에게 휴대폰으로 통화를 시도했지만 폰은 아예 꺼져 있었다. 그가 농기구 연장들을 가지고 갔다면 이 섬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확인도 하지 않았지만 촬영 가방을 홍이 가지고 있을 거라는 것에 K도 수긍했다. 달리 가져갈 사람도 없었고 홍이라면 가지고 갔을 가능성이 99%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디에 가서 그를 찾는다 말인가! 섬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야 했으나 홍의 소식을 듣기 전보다는 막막하지만 않았다. 번뜻 무엇이 훑고 지나갔다. 홍 선배라면, 짐작 가는 곳이 딱 한곳이 있었다. 해안가 끝에 있는 절벽이었다. 일본군들과 코끼리가 떨어져 죽은 곳이기도 했다. 심증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여러 생각이 뇌리를 꽉 메웠다. 몇 달 동안 잠적한 홍이 이 섬에 나타난 것도 이상하고 왜 이곳에 와서 촬영 가방을 가져갔는지, 더군다나 정 노인 집에 들러서 콩대 말린 것과 농기구들을 챙겨 갔다는 것은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카메라를 맨 K가 말을 꺼내자마자 숨을 헐떡이며 바닷가를 향해 내달았다. 그의 품새로 봐서는 홍을 만나면 한 대 칠 태세였다. 평소 과묵하고 어진 사람이 한번 성질이 뻗치면 어떻게 나올지 몰랐기에 나는 K를 앞질러 뛰었다. 그러고선 K를 진정시키며 홍을 내가 만나 설득하겠다고 나서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다. 드디어 해안가 절벽이 시야에 드러났다. 누군가 서 있었다. 짐작한 대로 홍은 거세게 부는 바람을 등지고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우리가 오기를 기다린 듯 뛰어오는 우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

-뱃머리에 서 있는 너를 보았지. 늘 붙어 다니는 K도 봤어. 섬이 작아도 나를 찾으려면 반나절쯤은 족히 걸릴 거라 여겼는데. 예상보다 빨리 왔네. 그래도 너라면 여기를 생각할 것이라 생각했지.

-아니, 선배 뭐야? 몇 달 동안 여기 있었던 거야?

홍은 머리를 천천히 흔들며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절벽 끝에 서 있는 홍은 광야 그 자체였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마침 한 마리 야수처럼 눈빛이 이글거렸다. 얼굴은 수염으로 덮여 알지 못하는 사람은 홍인 줄도 몰랐을 테지만 그와 나의 관계는 무려 20년이었다. 그의 등에는 촬영 배낭이 있었다. K가 홍을 향해 뛰어갔다. 본능적인 몸부림이었다. 홍이 소리쳤다. “가까이 오면 바다에 뛰어내린다” 황급히 달리던 K가 멈칫했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K가 원망 섞인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눈에 보이는 코끼리만 찾는 너희, 이 섬의 실오라기 하나도 가져갈 수 없어!

홍이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쪽팔리게, 너희들이 그러고도 다큐 PD야!

K가 툭 내뱉었다.

-씨발, 저 새끼 완전 미친 또라이잖아. 왜 저러는 거야?

그의 내지르는 목소리에 일순 아프리카의 사고로 죽은 두 PD의 얼굴이 다시 내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은 홍의 절친이었다. 열악한 환경에 어떤 서포트도 없이 몇 달을 동물 취재에 매달린 그들이었다. 그들이 촬영한 것을 어떻게 편집해 방송국에서 유작으로 내걸지 모르지만 그들의 죽음 뒤에 남겨진 촬영 테이프가 전부였다. 홍이 사라진 것도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의 죽음으로 방송계를 떠난 사람들도 있었고 외주업체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칼럼들도 몇몇 신문에 실렸다. 더불어 독립 다큐를 찍는 사람들에게는 연대감으로 똘똘 뭉치는 계기도 마련해 주었다. 사고를 당한 두 PD는 외주업체 소속이었다.

-죽은 코끼리를 어떻게 증명할 거냐고?

그가 소리치며 말했다.

-보이는 것만 믿는 너희가 어떻게 증명할 거냐고? 시대의 행간을 어떻게 밝힐 거야?

나한테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어째 당신에게 쏟아붓는 소리 같기도 했다.

-선배, 진정하고 우리 얘기 좀 들어봐. 그 배낭은 제발 내려놓고. 며칠을 우리가 어떻게 수고했는지 누구보다 선배가 잘 알잖아. 선배 지시대로 할 테니 일단 배낭부터 내려놓자, 응?

나는 홍이 배낭을 던지지 못할 것을 진즉부터 알았다. 아니, 던질 생각조차 않는다는 걸 알았다. PD들에게 취재 필름은 목숨 같은 거였다. 홍은 배낭을 내려놓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한 무리의 거센 바람이 홍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나는 K에게 자리를 좀 피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선배와 둘만의 대화가 필요했다. 몇 달 잠수 탄 선배의 꼬락서니는 어느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를 연상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홍은 몇 달을 이 섬 저 섬을 떠돌아다니며 폐인처럼 지낸 모양이었다.

-내가 늘 감시당하며 살인 위협까지 받고 살았다는 것 넌 좀 알잖아. 방송국에 있으면 안전할 것 같아도 그렇지가 않아. 가족들도 마찬가지야. 니 형수는 우편물이 오면 깜짝깜짝 놀라. 공황장애래. 씨발 언제까지 치료해야 하는지 감이 안 온다. 돈도 없다면서 왜 애들 밖으로 유학 내보냈냐고 예전에 그랬지? 돈은 없어도 애 새끼들이 나 때문에 죽으면 안 되잖아. 아, 애새끼들이 내가 죽는 걸 지금 보기엔 너무 이르다고.

사이비 종교집단 취재 건으로 홍이 어려움을 겪은 걸 모르지 않았으나 몇 년 전의 일이라 다 끝났던 거로 알고 있었다. -뭐 근데, 사실 그거 진짜 별거 아니야. 늘 따라다니는 거니까. 대가 없는 소득은 없으니까. 그렇지 않고야 이 미친 세상을 카메라에 담을 수 없으니까. 시대정신을 갖고 시청자들을 움직이게 해야 한다! 맞아 꼰대야. 이 꼰대를, 그 부담감이 천행처럼 따라다니네. 송, 그 새끼 마지막을 보니 내가 주인공인 씨발, 존나 슬픈데 단순한 신파극이 그려지더라. 그 자리에 내가 짜부라져 처박혀 있더라고. 그 새끼 먼저 갔지만······ 야 그래도 그 새끼는 돈, 시청률에 쫄지 않았어. 갖고 있었어 씨발, 그 꼰대 정신! 그 돗대, 한 까치 꼰대 마인드로 어디든 다녔다. 새끼야, 너도 알잖아. 나라고 다를 것 같냐? 근데 그 새끼 존나 부럽다. 진짜 1년 차 때나 가질 수 있는, 현장에서 죽는 것, 그걸 해내네······ 내가 계속해서 히트작을 만든다고 부럽다고 했지만 그거 다 개 뻥이고 운이야.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내 유작이 될 수도 있다고 늘 생각해. 어쩌면 그때가 더 나았어. 거지 같은 편집실, 카메라, 인간 같지 않던 선배들과 있던 그때. 그래도 명분이 있었고 사회의 변화를 끌어낸다는 자부심도 있었지. 요즘은 돈이 안 되면 방송국에서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잖아. 시청률이 돈이니까. 다큐를 없애는 추세야. 삶이 고단할수록 다큐는 줄어들 거야. 사람들은 자신과는 다른 반대급부를 원하잖아. 카메라는 계속해서 관찰예능과 불륜만 담을 거야. 그래서 오락물과 연애 프로가 인기가 있는 거지만. 너만 매너리즘에 빠진 게 아냐. 나는 내내 시달렸어. 나에게도 전환이 필요했어. 다들 현상에 목이 마르니까, 독립 다큐로 전환하려고 하지만 독립 다큐 수준을 알잖아. 방송국 하청이야, 게네들! 나도 조만간 그럴 참인데······그래도 외주업체 하면 돈은 안 돼도 마음은 편하잖아.

수습 때부터 선배들을 봐 왔었다. 그리고 어느덧 방송국에서 내가 선배가 되었다. 내 밑에 나를 바라보는 PD들이 줄을 서 있다. 사실은 홍에게 이런 값비싼 대화를 들을 주제가 나는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방송국에서 배운 건 어떻게 또박또박 월급을 받을 수 있느냐였다. 오랜 눈칫밥에 요령만 터득했는지도 모르겠다. 돈이 되는 프로, 시청률이 높은 프로, 안정적인 프로, 5년째 안정적인 방송프로가 나를 그렇게 망쳤는지, 아니면 원래 나란 인간이 그런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누구는 살해 위협을 느끼고, 누구는 무언가를 카메라에 담겠다고 아프리카까지 가서 비참하게 죽는 모험을 감행할 동안에 나는 인기 PD가 되었다고 거드름을 피웠는지도 모르겠다. 아무 생각 없이 한 프로만 보고 5년을 달려왔다고 봐야 했다. 매주 방송을 치러 내는 것에 의미를 두면서······. 선배들에 비해 너무 쉽게 이 길을 달려왔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이 섬에서 우리가 취재한 내용들을 선배는 다 살펴보았을 것이다. 선배가 이 건을 취재했다면 특종 다큐로 만들고도 남았을 테니까.


*

홍 선배는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K를 향해 손짓하며 따라오라고 했다. 절벽 아래로 뛰어 내려가는 그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해안가에 서서 이 섬과 떨어져 있는 꼬리 섬을 가리켰다. 우리는 꼬리 섬이라고 했지만 이 섬의 사람들은 새끼 섬이라고 불렀다.

-지금부터 잘 듣고 잘 봐야 해. 다른 세계가 펼쳐질 거야. 눈 깜짝할 사이야. 나도 처음 보는 광경이니까.

선배의 목소리는 흥분된 어조였다. 그러면서 K에게 카메라 렌즈를 다른 사이즈로 빨리 바꾸라고 말했다. 이 섬에 온 것은 코끼리 무덤을 보여주려고 왔다는 것이었다. 25년마다 섬이 하늘로 올라가다니, 지나친 과장이었다. 더군다나 그곳에 코끼리가 있다니! 나는 선배의 말을 듣는 순간 마그리트의 그림이 일순 떠올랐다. 바위에 성이 있는데 바위 채로 하늘을 날고 있는 그림이었다. 홍 선배는 노인에게 들었으니 정확한 팩트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잠시 있으면 정노인도 나타날 거라고 말했다. 내 생각에도 어부로 잔뼈가 굳은 노인이 허무맹랑한 소리를 내뱉을 리는 없었다. 바다가 갈라져 이스라엘 사람들이 육지처럼 건넜다는 모세의 기적은 성경에도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그 비슷하게 물이 빠지고 뭍이 드러나는 섬들이 간혹 있기도 했었다. 비슷한 자연 현상을 기적으로 표현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코끼리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니! 정 노인은 일평생 딱 두 번 봤고 코끼리 소리는 자주 들었다고 하면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을 말할 때 그의 눈빛은 신념에 찬 말투여서 홍 선배도 믿음이 갔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정 노인의 말을 입증하고 싶은 충동이 선배에게 밀려왔다나. 하늘로 올라가든 바다 밑으로 내려가든 섬에 변화가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았다.

정 노인이 말한 시간이 다 돼 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 노인은 절벽 위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서 있을 뿐 내려오지는 않았다. 섬 절벽에서 바라보면 영락없이 꼬리 섬이었다. 원래는 같은 섬이었지만 지금은 떨어져 나가 홀로 섬 같았다. 절벽에서 바라본 하늘에는 희부연 초승달만 휑하니 떠 있다. 조락의 시간, 해가 꼴깍 넘어갈 무렵이라고 잘 지켜봐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늘의 주홍빛이 바다에 뿌려진 듯 부드럽게 맞물려 서서히 물들어간다. 하늘이고 바다고 경계를 지을 수가 없었다. 둘이 거꾸로 된들 다를 건 없어 보였다. 사람만이 나누고 분류하기를 좋아했다. 강태공 몇이 수영해 가서 앉아 놀거나 낚시를 하기에 딱 좋은 섬의 크기, 꼬리 섬은 작은 항아리가 바다에서 유영하는 자태였으나 내 눈에는 봉분처럼 여겨졌다.

그때였다. 처음 이 섬에 왔을 때 느낀 울림이 내가 딛고 있는 땅에서 다시 감지되었다. 쿵. 쿵. K도 느꼈는지 나를 놀라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바다 전체에서 울러 퍼지는 소리 같았다. 수심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차올라오는 소리, 그것은 구슬프고 처절한 애한의 소리였다. 아니, 내가 그렇게 느꼈는지도 몰랐다. 파도를 가로지르며 소리는 점점 가깝게 들렸다. 코끼리 소리에 빠진 나에게 홍이 옆구리를 찔렀다. 꽉 차올랐던 물들이 어찌 된 게 순식간에 스르르 빠져나갔다. 홍해의 기적이 양옆으로 쩍 갈라졌다면, 꼬리 섬은 주변의 물들이 점점 어딘가로 달아나는 형세였다. 바닷물은 멀찌감치 뒤로 물려나면서 섬 밑에 바닷물은 거의 없고 울퉁불퉁한 바위들만 민낯을 드러냈다. 수목들로 빽빽한 꼬리 섬에 온갖 새들이 둥지를 틀고 배설물들을 갈겨 들쑥날쑥한 암석은 멀쩡한 곳이 없어 보였다. 코끼리의 울음은 계속되었다. 그 울음소리는 긴 시간을 거슬려 수많은 사연을 담고 있었다. 마치 처절한 울음의 내막을 알아달라는 듯이. 머뭇거리던 홍과 나는 정신없이 꼬리 섬을 향해 뛰었다. 다시 물이 차오르기까지 시간이 분초를 다투었다. 꼬리 섬을 둘러싼 테두리, 바닷물에 가라앉았던 밑동 표면이 성큼 올라왔다. 멀리서 봤을 때 그게 코끼리 뼈인지, 바위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몇백 년 동안 코끼리가 있었으니 뼈가 있을 가능성도 컸다. 꼬리 섬 밑동에 붙어 있기도 하고 널브러져 바위틈에 붙어 여러 진기한 모양을 이룬 뼈들은 산호초 같기도 하고 심해에 묻혀 있는 고래 뼈 같기도 했다. 아주 큰 뼈들이었다. 동물의 등뼈 같기도 하고 코끼리의 상아 같기도 했다. 나는 K에게 카메라를 들이대 빨리 찍으라고 독촉했다. 카메라가 고정된 K의 어깨가 빨리 움직였다. 절벽에 떨어져 죽은 코끼리들은 이해가 되지만 다른 코끼리들이 왜 이곳에 모여 죽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한 섬이었는데 몇백 년의 시간 동안 조금씩 꼬리가 잘리듯이 잘리고 밀려 나갔을 수도 있었다.

한 바퀴를 도는 찰나에 바닷물이 금세 차오르기 시작했다. 코끼리 소리는 물이 차오르는 동시에 뚝 끊어졌다. 홍이 옷이 다 젖었다고 껄껄 웃어댔다. 카메라가 젖으면 안 되었기에 나는 K를 향해 빨리 뛰어나가라고 소리쳤다. 불과 몇 분 만에 섬은 원래대로 바닷물에 잠겨 뭍이 드러난 흔적을 감쪽같이 감추었다. 절벽 위로 올라와 우리는 잠긴 꼬리 섬을 어두워질 때까지 쳐다봤다. 역사의 시간이 바닷물에 수장되어 실체를 감추고 있었다. 바다 세계에는 인간 역사의 또 다른 역사가 무진장하게 감추어져 있는지도 몰랐다. 어둑한 공간에 파도 소리만 차르륵 밀려왔다 쓸려갔다.

-홍 선배, 이거 찍은 것 쓸 수 있을까? 홍은 피식 웃으며 팔을 내저었다.

-야, 그게 말이 되냐. 방영되자마자 이 섬이 절단 날 걸······ 코끼리 상아를 얻을 수 있는데 이 대한민국의 꾼들이 가만히 있겠어? 거기다 독립투사 코끼리인데 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여러 프로 해 봐 알잖아. 뭐가 좋다면 당장 그 물건들과 음식이 동난다는 것.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건 잘해요.

-그러면 왜 그렇게 급히 찍으라고 했어요?

K가 볼멘소리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다 찍는다고 해도, 우리가 사실을 안다 해도, 방송으로 내 보낼 수 있는 것은 정해져 있었다. 이것도 생각해야 하고, 저것도 생각해야 하고, 그러다 정작 내보내야 할 것은 내보내지 못하고 잠긴 캐비닛에 담긴 진실들이 얼마나 많은지······그러고 보면 역사는 감추어져 있는 사실이 더 진실일 수 있었다.

-지금은 못 써도 언젠가 다 쓰일 때가 있을 거야.

홍이 K의 등을 가볍게 쳐 주었다.

-이왕 온 김에 작품 하나 남기고 가지.

절벽 위에 서 있던 정 노인은 어느새 가고 없었다. K가 카메라로 코끼리의 흔적을 찍었지만 홍을 믿는 정 노인은 그가 찍은 장면들을 방출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알리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선조들의 코끼리 지킴의 수고였을까? 아니면 역사의 진실이었을까?

절벽 아래로 내려간 홍은 절벽 주변에서 뭔가를 찾아 헤매었다. “분명히 이 근방인데······.” 카메라를 든 K의 몰골이나 나나 말이 아니었다. 꽤 지쳐 있는 우리와 달리 홍은 바다의 암석 위로 날아다녔다. 언제나 늘 느끼는 거지만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절벽 뒤쪽 후미진 곳에는 갯벌이 형성돼 있었다. 짙은 회색의 머드였다. 일지에 코끼리가 매일 이곳에서 갯벌에 뒹굴며 놀았다고 했다. 상상만 해도 참으로 진귀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하늘 아래에 바다를 배경으로 코끼리들이 천진하게 갯벌에서 놀이하는 게. 그 갯벌에는 푹 삶아 말린 콩잎 대가 섞여 원래의 누런 색깔은 잃고 갯벌에 섞여 회색으로 범벅돼 있었다.

홍이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뭔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갯벌 옆에는 알 수 없는 덩굴나무에 싸인 기다란 암석 사이에 홍이 서 있었다. 퇴적암인지 화강암인지 동굴 벽은 온통 암석이었다. K가 카메라 렌즈를 바꾸어 들어갔다. 동굴 길목은 두세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긴 암벽 공간이 있었다. 큰 동굴이라고 말하기는 뭐 했지만 어둑한 공간 아래 바닥은 서늘하고 축축했다. 굳이 이 어두컴컴한 장소에 왜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카메라 플래시를 비추자 평평한 석벽에 그림의 형체가 보일 듯 말 듯했다. 전문가의 솜씨가 아니었다. 어설픈 코끼리의 그림이었는데 어떤 부분은 머리와 몸통만 있고 어떤 벽에는 코끼리 엉덩이와 다리만 있기도 했다. 세월의 흔적에 낡아 희미한 형체였지만 내 눈에 코끼리로 보였다. 나는 단박에 가늠되었다. 정노인이 어릴 때 그렸다는 걸. 정 노인이 그린 코끼리 상은 세월에 닳아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았다. 자세히 보지 않고는 그냥 흙무더기로 여길 뿐 코끼리로 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지금 홍 선배가 그 머드로 입체 조각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정 노인이 만든 코끼리 상과는 아주 달랐다. 홍은 옆의 평평한 벽면을 바라보며 작업할 자리를 잡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코끼리가 이 섬에서 사라지고 정 노인은 가끔 시간을 내어 콩대와 진흙, 접착 아교를 섞어 이 벽에 코끼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정 노인의 눈에 비친 코끼리, 네 마리의 코끼리였다. 그 옆에 한 아이가 있었다. 또 다른 벽화에는 코끼리 등에 아이들이 타고 있었는데 그 시대 때 정 노인의 동무들이 아니었을까, 또 다른 벽화에는 세 마리의 코끼리와 세 사람이 있었다. 정 노인의 가족 같았다. 그러면서 화가 이중섭이 자식들을 그리워해 바다에서 아이들과 노는 그림을 그린 장면들이 동시에 겹쳐졌다. 그리움은 시공간을 초월해 우리를 거기에 다다르게 한다. 산사람은 죽은 사람을 기억하려고 하니까. 자세히 보지 않거나 코끼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 벽화를 보면 사람들은 쉽게 코끼리임을 알아차릴 수 없는 그림이었다. 누군가 우리보다 먼저 여기 벽화를 본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코끼리의 내력을 알지 못하니 그게 코끼리 그림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홍은 정 노인 집에서 가져온 농기구와 갯벌 진흙과 혼합한 콩대를 자루에서 꺼내었다. 이 섬에는 고랑 사이로 바람결을 따라 누운 황금빛 콩잎과 콩대가 지천이었다. 밭길을 따라 걸으면 무릎 사이로 콩잎들이 서걱거렸다. 정 노인이 뒤란에 잔뜩 쌓아 놓은 더미도 콩대였다. 가마솥에 콩대 삶는 냄새가 소죽을 끓이던 냄새랑 흡사했다. 다만 구수한 콩대를 삶아 소를 먹이는 게 아니라 코끼리 형상을 만들 재료를 만들었다. 진흙에 볏짚을 섞어 담장을 짓고 집을 짓듯 정 노인은 소금기를 뺀 진흙에 푹 삶아 말린 콩 줄기를 잘게 썰어 혼합했다. 진회색의 갯벌과 누런 콩잎 줄기가 섞여져 코끼리 상은 살아나고 있었다. 목상은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진흙으로 만든 거는 빨리 만들 수도 있었고 코끼리가 갯벌에서 뒹굴며 놀던 때를 생각하며 만드니 더 흥이 난다고 말했다. 정 노인은 몇십 년 전만 해도 물이 들어오지 않았는데 폭풍우가 심할 때 틈새로 바닷물이 조금씩 스며든다고 했다. 홍이 지금 그 보수작업을 다시 하는 거였다. 알타미라 벽화까지는 아니라도 홍의 손에서 갯벌에 벌렁 누운 코끼리가 재현되고 있었다. 렌즈를 갈아 끼운 K의 카메라가 돌아간다. 지금 홍은 여기에 본 적도 없는 코끼리의 흔적들을 담았다. 세 마리의 코끼리 옆에 네 남자가 서 있었다. 정 노인, 나, K, 그리고 홍이었다. 그런데 어른들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어째 아이들이 서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 섬이 수몰되지 않는 이상 또 오랜 시간 후에 이 벽화를 발견한 사람들이 무슨 생각들을 할지 모르겠다. 역사는 남은 자들의 몫이다.

눈앞에 증명해 보일 거는 머드로 만든 코끼리 벽화와 이 섬에 묻힌 코끼리 무덤과 정 노인의 집안 대대로 내려온 불탄 교지와 일지, 코끼리 목상, 코끼리가 살아있다고 믿는 섬의 노인들의 말이었다. 그것도 치매기가 있어 보이는 80세가 넘은 노인들. 이들의 믿음을 대한민국에서 이 프로를 보는 사람들에게 이 섬에 코끼리가 살고 있다, 로 믿게 해야 했다. 가장 확실한 물적 증거는 코끼리 무덤이지만 그것은 증명되어서는 아니 되었다.

-자네가 할 일은 시청자들에게 코끼리가 이 섬에 살아 있는 걸 보여줘야 해. 코끼리가 시청자들의 집집에서 살아있는 걸 확인하게 해야 한다고? 그게 우리 방송인들이 해야 할 일이야. 섬에 갇혀서 오랜 시간 수인의 시간을 산 코끼리를 전국에 살아 있음을 보여줘야 해.

내 고민의 정점은 제주도에 있는 코끼리를 잠깐 빌려서 이 섬에 풀어놓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편집실에서 아무리 몇 날 며칠 밤을 새워도 코끼리를 살아 있게 어떻게 만들지, 조 PD에게 슬쩍 내밀고 꽁무니를 빼는 가상 상황극도 세워보았다. 프롤로그는 그렇다 치더라도 에필로그는?

코끼리가 이 섬에 온 뒤 두 번의 위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일지에는 기록이 없었다. 정 노인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은 그의 아버지에게서 들은 얘기였다. 1912년,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 현장에 코끼리가 다시 등장한다. 1909년에 을사늑약을 구실로 일본은 창경궁 안에 동물원인 창경원을 만듦으로써 자신들의 입지를 과시했다. 그때 동물들이 들어왔는데 인도코끼리도 들어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볼거리가 되었다. 코끼리가 돈벌이가 될 거라 여긴 사람 중에 이 섬을 어떻게 수소문했는지 코끼리를 발견하자 코끼리를 몰래 빼돌려 나가려다가 코끼리 발에 차여 죽을 뻔했다는 얘기였다. 그 사람은 몸의 마비 증세 때문에 코끼리가 있다는 사실을 발설할 수가 없었다. 이 섬에 코끼리가 사라지기까지 비밀은 유지된 셈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창경원의 동물들을 독약을 먹여 모조리 죽였다는 사실이었다. 인도에서 온 코끼리가 또 그렇게 수난을 겪었다.

정 주부가 코끼리를 데리고 간 곳은 남해의 어느 무인도였다. 세종은 무인도에서 코끼리와 정 주부 집안이 살 수 있도록 재원을 마련해 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유인 섬이었다. 코끼리의 배설물은 땅을 비옥하게 했고 이래저래 사연 많은 도망자 신세의 사람들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먹을거리도 풍부해졌다. 코끼리의 온화한 눈을 보고 살아서일까, 사람 사는 섬에 분쟁이 있기 마련인데 상부상조하며 사람 사는 맛이 느껴지는 섬이 되었다고 한다. 땅을 갈아엎을 소가 없는 섬이었다. 밭을 갈 때 코끼리가 사람들을 도와 일을 거들었지만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코끼리를 노역에 시달리게 하는 법은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코끼리를 아끼고 아이들은 코끼리를 좋아했다. 육지에 살 때는 불행하게도 사람을 죽게 하는 불상사를 일으킨 코끼리였다. 정 주부는 이렇게 유순한 코끼리가 사람을 죽게 했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자주 말했다고 전한다. 코끼리와 사람들이 정겹게 살아가는 섬은 또 하나의 율도국이 아니었을까. 정 노인의 말대로라면 우리 모두가 꿈꾸는 이상국이었다.

홍 선배를 통해 알게 됐지만 정 노인은 코끼리를 묻듯 꼬리 섬 바다에 아내와 아들을 묻었다. 마을 노인들은 정 노인 집안을 애국자 집안이라고 한마디로 규정지었다. 나는 그 ‘애국자’ 라는 말에 가슴이 쓰라려 왔다. 누군가의 혜택의 누림에는 누군가의 고통의 대가가 따랐다. 코끼리 한 마리 때문에 시작된 집안의 숙명은 몇백 년을 이어왔다. 시대의 과오에 또다시 풍랑을 겪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아들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독자를 잃은 아픔의 여파로 아내마저 잃은, 코끼리의 수장처럼 함구된 아픔의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없는 미래, 정 노인이 오랜 침묵의 상자를 연 것은 어쩌면 이것 때문인지 모른다. 코끼리 코에 매달린 아이들과 코끼리 등에 탄 아이들의 목상이 실제로 눈앞에서 재현되기를, 눈을 감기 전에 보고자 한 갈망이었는지도······. 코끼리가 묻혀 있는 코끼리 무덤은 25년마다 그것도 몇 분의 찰나만 실체를 드러냈다. 하나, 그것은 재현되었어도 안 되고 영원히 수장되어야 할 숙명이었다. 태어난 곳을 떠나 낯선 곳에서 적응하지 못해 버림받으며 타국에서 일생을 보낸 코끼리에 대한 조금이나마 예의였다. 정 노인마저 죽으면 코끼리의 기억은 수장된 코끼리 무덤처럼 묻혀 버릴 것이다. 코끼리가 살아있다고 변함없이 믿고 있는 이 섬의 노인들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순간 꼬리 섬에 수장된 역사처럼 나는 이 섬 전체가 수몰되는 것을 상상하자 섬뜩하기까지 했다. 아이들이 돌아와야 했다. 죽어가는 이 섬을 살려야만 했다. 그런데 무엇으로······.


*

원본 테이프 내놔

조 PD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장장 일주일 동안 내려가서 찍은 게 달랑 이거라고? 코끼리가 사는 섬에 취재하러 간다고 해놓고서 코끼리는 흔적도 없고 이게 무슨 장난이야? 할머니들 인터뷰만 가득 실은 테이프에 코끼리 목상에 참 기가 찬다. 김 PD, 이제 맛이 갔니? 우리 프로는 역사 프로가 아니야. 공감 다큐라고? 처음부터 그럼 코끼리 목상을 제조하는 정 노인의 사연을 담자고 취지를 세우지 그랬어.

K 어디 갔어? K 불러와. 둘 다 진짜 이러기야. 나에게 뭔가 숨기고 있지?

이 바닥에서 조 PD의 촉빠름을 따라갈 사람은 없었다. 방송국 짬밥만 얼마인가.

K가 편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촬영 테이프 전부 내놔. 나한테 전화할 때 코끼리 무덤이니 벽화니 뭐라고 구시렁댔잖아? 그런데 무덤은 왜 안 보여줘? 거짓말에 재주가 없는 K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이게 전부에요. 무덤 찍은 건 홍 PD 줬어요.

조 PD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뒤통수 맞은 표정을 짓는다.

뭐라고? 여태껏 홍 PD랑 있었어? 그걸 홍 선배를 줬다고? 단단히 미쳤구나! 아니, 왜? 홍 선배는 B 제작팀 사람이야. 에이, 씨발, 진짜 가지가지들 한다. 그럼 홍 선배가 몇 달 사라진 게 다 이것 때문이었다는 거야.

조 PD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담배를 연거푸 빨아댔다. 뚜껑 열려 펄쩍 뛰리란 건 짐작한 일이었다. B 제작팀은 같은 방송국이라도 엄밀하게 말하면 경쟁 상대였다. 게다가 조 PD는 홍 선배에 대한 징크스가 있었다. 홍 선배 때문에 상을 두 번이나 놓친 터였다. 그의 자존심에 또 스크래치가 났으니, 그를 설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꼬여만 간다.

김 PD, 어떻게 할 거냐고?

코끼리 무덤 찍은 건 나도 복사본 가지고 있어. 하지만 방영은 못 해. 좀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

야! 코끼리가 산다는 물적 증거도 없는데 코끼리 사연만 잔뜩 안고 와서는 ‘코끼리가 산다’로 방영하자고? 너도 홍 선배한테 물든 거야? 그래, 좋아. 코끼리 무덤은 바다에 묻자 쳐. 나도 꾼들이 달려드는 꼴은 못 봐. 그럼 타이틀이라도 바꿔, 기획을 수정하자고. 차라리 ‘코끼리를 찾아서’나 ‘코끼리 목상 만드는 노인’이라고 바꿔.

아니, 그렇게는 못 내보내. 반드시 ‘그 섬에 코끼리가 산다’로 해야 해. 시청률 안 나오면 내가 모두 책임져.

야, 진짜 돌겠네! 아니, 지금 시청률을 말하는 게 아니잖아. 섬에 코끼리가 산다는데 코끼리가 없는 게 문제지. 어떻게 편집할 거야?

처음에 조 PD가 그 타이틀을 냈을 때 짐짓 불편했는데 이제 내가 그 타이틀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 섬에는 코끼리가 진짜 살아 있다. 그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리고 그 섬과 바다의 오랜 시간이.

아무튼 타이틀 안 바꾸면 나는 이대로는 못해. 접어!

제작팀 안에 돌연 냉기가 감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방송은 2주 차밖에 안 남았는데 아직 조 PD 조차 설득을 못 했다. 이대로 접어야 하나? 어쩌면 이번 방송으로 A 제작팀을 떠날지도 몰랐다. 그래도 시현을 꼭 해보고 싶었다. 물적 증거인 코끼리가 없어도 사람들 기억에 살아 있는 코끼리를 안겨주고 싶었다. 이번에 이것을 못한다면 반복되는 안정에 정착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갈지도 몰랐다. 홍 선배의 말처럼 나에게도 변화가 필요했다. 뜻하지 않게 일이 실없이 풀렸다. 국장이 무엇을 누구에게 어떻게 들었는지 내 기획안 취지의 손을 들어주었다. 조 PD를 설득할 사람은 국장밖에 없었으니까. 국장을 만나고 온 조 PD는 책상을 몇 번이나 주먹으로 내리쳤다. 홍 선배의 입김이 작용했다며 이 새끼, 저 새끼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한바탕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고는 나를 무섭게 째려보았다. 여차해서 방송은 나가겠지만 조 PD와 사이는 예전 같지 않을 것을 각오해야 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신뢰를 주는 건 K였다. 나를 누구보다 잘 아는 K였다. K는 코끼리 무덤의 전 과정을 담은 테이프를 홍 선배한테 받아와 조 PD에게 주었다. 촬영의 전 과정을 살펴본 조 PD의 눈빛이 조금씩 얼룩졌다. 어떤 장면이, 어떤 대목 때문에 그의 태도가 돌변했는지 모르지만 조 PD는 메인 PD였으니까, 감이 온 건지도 몰랐다. 방송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프롤로그

광고가 끝나자마자 방송의 첫 장면이 화면과 동시에 음향이 먼저 기선을 잡았다. 바다 섬의 영상과 함께 자막이 드러났다. “남도의 끝자락, 그 섬에 코끼리가 살고 있습니다······” 내레이터 성우의 음성이 시청자들을 향해 호기심을 끌며 구성지게 울려 퍼지는 순간 남해의 쪽빛 바다가 드넓게 펼쳐졌다. 나는 현상 너머의 있는 새로운 세계의 낯섦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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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기억은 늘 다른 형태입니다. 오래된 필름처럼, 때론 디지털 화면처럼, 그러나 질감이 조금씩 다르더라도 저마다 코끼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섬에 코끼리가 살아있습니다. 당신은 어떠한 코끼리를 기억합니까?


비하인드스토리

홍 선배는 다큐멘터리에서 운과 시의성을 강조했다. 외주업체 펑크로 한 주 방영이 당겨진 게 이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줄 몰랐다. 어찌 보면 운이었다. 마침맞게 독일 베를린 미테 구 ‘평화의 소녀상’ 철거 문제가 터질 줄이야. 일본 정부의 공식 요청으로 베를린 시는 철거 명령을 내렸고 철거하지 않으면 강제 집행한다는 보도는 국민의 정서를 자극했다. 심지어 독일 차 불매운동으로 번질 태세였다. ‘그 섬에 코끼리가 산다 ’ 프로는 2020년 방영된 우리 방송국 다큐멘터리 프로 중에 가장 시청률이 높았다. 부분 캡처로 블로그를 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재방영을 원하는 시청자들이 늘어 재방영되었고 세계의 한인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 저작권 계약 요청이 쇄도했다. 석 달 뒤, 독일 베를린 시 미테구 의회는 ‘평화의 소녀상’ 철거 명령을 철회한다는 결의안을 의결했다. 일본은 심한 유감을 표명했다.


※조선왕조실록의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을 참고했다.

※동아닷컴 2017.7 20 뉴스와 다큐멘터리 『다시 태어나도 우리』를 참고 변용했다.





  <당선소감>


   "누구나 찬란한 인생에 도전할 수 있기를"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어느 정도 경험하고 늦게 시작한 문학의 길이었습니다. 태곳적 하나였던 몸체가 떨어져 나가 감춰진 기억을 안고 그리움이 되어 저를 바라봤습니다. 무수한 시간의 편린들이 유영하는 빛의 굴절 속에서 삶의 굴곡진 서사들을 제대로 투영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소설이어야 하는가? 왜 써야 하는가? 수인의 시공간에서 바다에 잔류한 섬이 되어 멀어진 거리를 메우려고 애태웠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고 가슴 깊이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사랑에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글쓰기의 지평을 넓혀가도록 기회를 주신 동아일보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소설을 통해 진실을 조명할 수 있게 인도해 주신 윤후명 선생님, 시대의 역사관을 일깨워준 황광수 선생님, 창작의 자세와 작가정신을 가르쳐주신 박상우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며 섬기며 영혼을 향한 몸부림으로 정진을 계속하는 시민공동체 지체들의 기도의 눈물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그리고 늘 나의 사랑 버팀목 남편, 아들, 딸과 착한 마음으로 세상을 밝게 보도록 어린 동생을 지켜준 열이 오빠에게도 애정 어린 감사를 전합니다. 꿈을 재현하는 문학으로 우리의 나날이 결코 팍팍하지만 않음을, 누구에게나 찬란한 인생을 살 수 있는 도전의 기회가 있음을 살아있는 글쓰기로 구현하겠습니다.


  ● 1963년 경남 마산 출생
  ● 국민대학교 문예창착대학원 졸업


 

  <심사평>


  박력있는 상상에 찬사… 압도적 신인 나왔다


여덟 편의 본심작 중 당선작 외에 좋은 작품은 두 편이었다. ‘나의 선녀, 그레이스 켈리!’는 수년 전 베트남 여자를 아내로 맞아 외국인 노동자가 밀집한 지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남자 이야기. 배우가 꿈이었다는 여자의 제안에 따라 그들 둘이서 밤마다 손님들의 옷을 골라 입고 즉흥 연극을 한다는 삽화가 눈에 띈다. 소설 전체 내용은 나무꾼과 선녀 설화의 리메이크다. 게다가 이주민 동네의 풍속 묘사도 약간 덧붙여져 읽는 재미가 있으나 연극 장면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었다는 약점, 베트남 여자 인물의 성격이 너무 희박하다는 약점을 무시하기 어렵다. ‘너의 월요일’은 근래 우리 소설에 유행 중인 레즈비언 서사의 일종이다. 이 작품이 얼마간 새롭다면 여성 유대의 동기를 어른들로부터 버려진 소녀들의 고통에서 찾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소녀의 일인칭 서술이 지나치게 자기몰입적이라는 것, 갈망, 연민, 증오의 감정 표현이 따라가다가 지칠 정도로 과잉이라는 것이다.

‘그 섬에 코끼리가 산다’는 월등히 우수한 작품이어서 당선작으로 뽑히기까지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사라진 코끼리가 살아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남도 끝의 작은 섬을 찾아간 다큐멘터리 피디. 그의 취재는 코끼리가 아니라 수장된 코끼리 무덤을 발견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거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능숙하게 서술되었다. 신뢰와 불신 사이의 협곡으로 독자를 계속 끌고 가는 스토리 텔링의 기술, ‘조선왕조실록’의 몇 줄로부터 유토피아의 꿈에 도달하는 박력 있는 상상, 일본군의 침략으로부터 섬을 지킨 ‘독립투사’ 코끼리라는 유머 등 여러 이유에서 찬사를 받을 만한 작품이다. 동아일보 중편소설 부문이 대형 신인을 배출하는 쾌거를 이번에도 달성했다. 당선자가 앞으로 발표할 소설에 기대가 크다.


심사위원 : 최수철, 황종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