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당선작>

 

   수달 / 최원섭

 

욕조의 물이 출렁였다. 그는 누워서 허연 천장을 바라봤다. 코로 물이 들어와서 머리를 쳐들었다. 양쪽 어깨와 무릎이 물 위로 솟아났다. 무릎 주변의 털들이 피부에 무질서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욕조 바닥에 등을 붙여 봐도 몸 전체가 잠기지는 않았다. 상체를 일으키자 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들리는 건 오직 물소리였다. 이 또한 층간소음이 될 수 있을까. 지나치게 세상이 조용했다.

밤새 잠을 못 자고 뒤척이던 그는 욕조에서 잠수를 시도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전체 빼기 남은 시간. 이 계산이 가능하다면 지나온 시간을 알 수 있겠지. 전체라는 시간은 과연 얼마나 주어진 것일까.

그는 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으며 거실로 나왔다. 서랍에서 팬티를 찾다가 바닥에 물자국을 남겼다. 겨우 찾은 팬티는 고무줄이 늘어져 있었다. 다른 것으로 바꾸려다가 그만뒀다. 마찬가지지.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언제부턴가 그는 혼잣말을 했다. 혼자 웃기도 하고 끄응 소리를 내기도 했다. 잠도 혼자 잤고 밥도 혼자 먹었고 자위도 혼자 했다. 혼자 안 하는 게 있을까. 전체 빼기 혼자 안 하는 거. 제로.

역시 잠이 안 왔다. 욕실에서나 거실에서나 그는 천장을 봤다. 천장은 생긴 것과는 달리 무료하지 않았다. 네모난 평면을 주시하다 보면 별의별 영상들이 눈앞에 그려지곤 했다. 시간을 보내기는 안성맞춤이지만 허송세월과 다름없었다. 아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아들 옆에 나란히 배치했다. 둘을 감싼 배경은 전 세계 방방곡곡의 명소였다. 아들과 못 가본 데가 이렇게 많다니. 조금이라도 배경이 못마땅하면 마음에 들 때까지 바꾸느라 그는 온종일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빗소리가 들려왔다. 더위는 좀 가셨지만 대신 빛이 줄어들었다. 새벽인지 아침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내심 오후로 접어들기를 바랐다. 오전에 뭘 먹을지 고민을 덜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뭘 먹어도 상관이 없었기에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는 영상이 나타나길 기대하고 있었지만 어디선가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따가닥. 딱. 딱. 따각.

불규칙하고 거친 소리였다. 그는 눈을 껌벅였다. 몸을 일으켜 소리의 근원을 찾아 나서기가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소리라면 누구든 거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혼자서 하는 일에 예외가 있었던가. 그는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보았다. 베란다에 뭔가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베란다 방충망이었다. 벌레이기에는 덩치가 컸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결과적으로 다행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희망으로 한 발 한 발 베란다를 향해 갔다. 열다섯 평 아파트라서 엎드리면 코 닿을 위치였다. 어둠이 채 걷히지 않아 미확인 존재는 타원형 윤곽만 드러냈다. 거북이를 뒤집어 놓은 꼴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큰 쥐일 수도 있었다. 꼬리가 보였기 때문이다. 화가 나서 누군가에게 욕을 퍼붓고 싶었다. 도대체 방충망에 왜 벌레 말고 다른 게 붙어 있느냔 말이다.

타원형이 움직였다. 네 발의 발톱들이 방충망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더 방치했다가는 방충망을 뜯고 집 안으로 들어올 태세였다. 그는 방충망을 소심하게 툭 쳤다. 엉덩이를 뒤로 쑥 뺀 자세였다. 타원형은 방충망에서 살짝 떨어졌다가 요요처럼 다시 붙었다. 탄력적이었다. 재차 공격에 나섰지만 성과는 미미했고, 오히려 상대가 즐기고 있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작전의 변화가 요구됐다. 그는 대항할 무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거실은 주방이자 유일한 방이기도 했다. 우선 싱크대에 달린 서랍을 열었다. 방충망을 통과할 만한 쇠젓가락 대신 나무젓가락만 가득했다. 어렵게 찾아낸 쇠젓가락을 들고 그는 베란다에 우뚝 섰다. 이를 악물고 징그러운 타원형을 푹 찔렀다. 손끝에서 뭔가 꿈틀하는 느낌이 전해졌다. 동시에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타원형은 방충망을 발톱으로 긁으며 아래로 미끄러졌다. 방충망이 아주 보기 좋게 찢어졌다.

쥐가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목격했다. 동그란 얼굴에 귀가 작았다. 뉴스나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었다. 수달이었다. 낙하할 때 서로 눈이 마주쳐서 잔상이 오래 갔다. 그 눈은 마치 입처럼 의사 표시를 하고 있었다.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운, 등의 평범한 감정 표현이 아니었다. '왜'였다. 왜 자기를 찌르는지 왜 자기가 찔려야 하는지. 실존적인 표현에 가까웠다. 그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왜, 같은 실존은 정작 그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는 다시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뒤척였다. 빗물에 젖은 수달이 천장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그는 일어나 옷을 대충 걸치고는 집을 나섰다. 복도로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중얼거렸다. 동물이야. 한낱 동물. 스스로 위안을 얻으려는 의도였지만 쉽게 마음이 달래지지는 않았다. 집에 침입한 도둑을 때리면 상해죄가 된다는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동물이 도둑으로 인정받을 수 있나. 정황상 정당방위였어. 최소한 야생동물을 상대하는 인간에게는 핸디캡을 줘야지.

경비는 앉은 채로 자고 있었다. 밖은 부슬비가 내렸고 어둠이 조금 남아있었다. 그는 집이 수직으로 울려다 보이는 지점으로 가기 위해 화단을 넘었다. 오층에서 떨어져도 살아날 수 있을까. 고양이라면. 예상지점에서 위를 보는데 빗물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비비다가 화단 한쪽에 꺾여 있는 상추 잎들을 발견했다. 잎사귀를 젖혀보니 수달이 누워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는데 빗물 때문인지 죽음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손을 넓게 펴서 비를 막았다. 수달의 작은 얼굴이 비를 피할 수 있도록. 그 덕분인지 수달이 눈을 떴다. 구슬 모양의 또랑또랑한 눈이었고 긴 수염들이 얼굴에 붙어있었다. 눈만 떴을 뿐이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계획을 갖고 나선 게 아니라서 머뭇머뭇했다. 괜찮으냐는 말도 건넬 수 없었고 119에 전화를 걸어 현 상황을 설명할 자신도 없었다. 수달은 무슨 영문인지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는 수달의 시선을 피해 먼 산을 바라봤다. 곧 아침이 올 기세여서 왠지 초조해졌다.

움직임이 없는 수달의 자세는 말 그대로 자포자기였다. 그는 수달을 끌어안을 작정으로 몸을 굽혔다. 팔이 닿을 즈음, 수달이 스스로 일어났다. 한잠 자다가 이부자리를 빠져나오는 노인 같았다. 그는 땅에 발을 디딘 수달의 모습이 왠지 어색했다. 직립이었다. 두 발로 선 키가 그의 무릎 정도였다. 수달이 그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너무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그는 엉겁결에 그 손을 잡았다.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그는 누가 볼까봐 서둘러 수달의 팔을 잡아당겼다.

집에 들어서자 수달이 우두커니 섰다. 거실바닥에 물이 흥건해졌다. 온몸을 덮은 수달의 털이 물에 젖어 반짝였다. 손님인 양 예의를 차리는 수달의 모습에 그는 들어오세요, 라고 말할 뻔했다. 그가 수달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유도했지만 발바닥을 떼지 않았다. 더 기가 막힌 건 그를 보는 수달의 눈이었다. 몸이 젖었잖아, 라고 말하고 있었다. 별 수 없이 그는 수건을 대령해야 했다. 그는 거실 구석에 있는 걸레를 집었다가 도로 내려놨다.

수달이 손발을 꼼짝하지 않아 그는 몸종 신세나 다름없었다. 그는 수건으로 손수 수달의 몸뚱이를 닦아줬다. 수달의 털은 보통 개의 것보다 굵고 꼿꼿했지만 부드러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온몸이 흠뻑 젖어 수건 하나로 모자랄 지경이었다. 배를 닦을 때는 움찔했고 머리를 닦을 때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인간을 흉내 내는 건지 본능인지 알 수 없었다. 다리는 짧아서 눈 깜짝할 사이에 닦아냈다. 집에 남아있는 마른 수건들을 소진하고 나서야 그 물기를 다 없앨 수 있었다. 고생스럽기보다는 왠지 모를 성취감이 들었다. 드라이어까지 동원해 수달의 털을 뽀송뽀송하게 마무리해 주었다. 수달은 내내 미용실에 온 손님 같은 태도였지만 그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았다. 도리어 둘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날리는 데 일조를 했다.

수달은 걸을 때, 별일이 없는 한 네 발이었다. 크지도 않은 공간을 휙 둘러본 수달은 욕실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그를 돌아봤다. 무슨 조화인지 그는 말 못하는 수달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 자신의 정체가 의심스러워서 그는 벽에 걸린 거울에 자기 얼굴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그는 수달이 원하는 대로 욕실 문을 열어줬다. 수달은 욕실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젖은 바닥과 물기가 남은 욕조를 살피더니 그에게 대뜸 눈으로 말했다.

여기네. 여기서 나를 불렀지?

그는 깜짝 놀랐다. 욕조에는 있었지만 누구를 부른 기억은 없었다.

노래를 더럽게 못하더군.

난 노래를 부른 적 없어. 가만히 누워있었어.

물에서는 생각조차 파동을 만들지. 아주 답답한 노래였어. 그냥 지나칠 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오층까지 올라왔다고?

내 몸은 엿가락처럼 늘어나. 베란다에서 베란다를 오르내리는 건 식은 죽 먹기지. 바다로 가다가 길을 잃었어. 끔찍한 터널과 하수구를 헤매다가 겨우 지상으로 올라왔건만.

그는 순간 대화를 피하고 싶어졌다. 수달이 배를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불의의 테러를 당한 부위가 쓰리구나. 쓰려.

그는 수달의 행동을 잠자코 지켜봤다. 상해죄로 걸고넘어질 심산은 아닌 듯 했다. 그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사후 조치 정도는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책이 없었다. 그의 집에 비상약품이 구비됐을 리가 만무했다. 약이라고는 수면제가 전부였고 수달을 애써 잠재울 구실도 없었다.

해가 뜨고 거실이 점점 밝아졌다. 수달은 침대 밑으로 가서 엎드렸다. 길게 처진 몸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에 그는 마땅히 앉을 자리를 찾지 못했다. 혼자 있다면야 당연히 침대 위로 갔겠지만 막상 손님의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었다. 그도 침대에 기대앉았다. 다들 출근을 했는지 이웃들은 기척이 없었다. 집 안의 고요함은 곧 서먹함으로 바뀌었다.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었지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손님 대접의 필요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가 냉장고를 열고 우유를 꺼냈다. 유통기한은 지났지만, 냄새는 괜찮았다. 그는 납작한 접시를 찾다가 펄쩍 뛰었다. 바로 옆에 수달이 와서 서 있었다. 그냥 줘. 입 대고 마시게. 그는 미심쩍은 얼굴로 우유팩을 건넸다. 수달은 두 손으로 우유팩을 받더니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수달의 손가락이 다섯 개여서 의외였다. 야무진 손아귀와 손톱 덕분에 팩을 놓치지 않았다. 수달은 우유를 많이 마셨다. 그는 자신의 배까지 부른 착각이 들었다. 수달의 주둥이가 점점 하얗게 변해갔다.

수달은 우유를 다 마시고 나서도 만족하지 못했다. 텅 빈 냉장고의 문을 닫지 못하고 미련을 가졌다. 대식가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냉장고 문을 닫으려고 수달의 팔을 당겼다. 수달은 냉장고 문을 붙잡고 버티다가 힘에 부친 듯했다. 배가 고프다는 팬터마임의 일환으로 배를 쑥 집어넣고는 스스로 놀라는 시늉을 했다. 젓가락에 찔린 듯한 부위가 부어올라 있어서 그에게 죄책감을 상기시켰다.

멋쩍어진 그가 두리번거리다가 구석에서 스펀지 미니 공을 집었다. 수달의 관심을 식욕에서 멀어지게 할 작정이었다. 옛날에 아들에게 그랬듯이 공을 큰 포물선 형태로 던졌다. 수달을 향해 날아가는 공에서 먼지가 일었다. 수달은 공을 손바닥으로 무관심하게 쳐냈다. 놀이의 룰을 모르는 것 같아 그가 다시 공을 던졌지만 수달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공을 쳐내는 강도만 세졌을 따름이었다. 그가 공을 계속 던졌다가는 서로 다툼으로 번질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수달의 식욕을 잠재우기에도 역부족이었다.

그는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수달은 거실에 눈을 감고 엎드렸다. 수달을 데리고 나갈 방도가 없어서 그는 혼자 나섰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그에게는 꽤 희생을 감수하는 결정이었다. 천성적으로 길눈까지 어두운 그였다. 마트로 갈까 하다가 수산시장으로 목적지를 잡았다.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고서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모든 게 오랜만이었지만 목표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오래전에 그는 목적지도 없이 떠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아들이 실종된 후였다. 종점에서 종점으로 종착역에서 종착역으로 오간 적이 부지기수였다. 기차도 탔고 배도 탔고 버스도 탔다. 아들이 물에 빠져 떠내려간 해변에도 여러 번 갔다. 하지만 해가 바뀔수록 그 횟수는 줄어들었고 그의 외출은 흐지부지 끝이 났다. 그 후 그는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특히 욕실로 들어가면 욕조 안에 오랫동안 머물러서 아내를 긴장시켰다. 더구나 아내는 물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아내는 그를 욕실에 못 들어가게 말렸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하루는 아내가 말도 없이 집을 나갔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아내를 기다리다 혼자 이사를 했고 줄곧 집에 틀어박혔다.

그에게 수산시장은 오랜만이 아니라 처음이었다. 상인들이 시장 통로 양쪽에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다들 말소리가 크고 빨라서 그는 금방 위축됐고 신경이 곤두섰다. 수산시장보다는 인간시장에 가까웠다. 목소리가 걸걸한 상인이 그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조기. 고등어. 삼치. 대구. 장어. 상인은 가게에 없는 생선이 없다면서 무슨 요리를 준비하는지 물었다. 요리씩이나. 그는 상인이 열거한 생선을 종류별로 한 마리씩 샀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는 근처 약국에 들렀다. 소독약과 반창고를 샀다. 텔레비전에 동물원에서 탈출한 수달에 관한 뉴스가 나왔다. 먼 태평양을 건너온 귀하신 몸이니 목격자는 즉시 신고를 바란다고 했다. 약국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아파트 건물로 들어오면서 그는 경비와 마주쳤다. 경비의 자세가 하도 뻣뻣해서 그는 시선을 피했다.

그가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수달은 현관에 마중 나와 있었다. 수달은 그를 보는 둥 마는 둥하며 그가 든 봉투에 고개를 처박았다. 사정없이 봉투를 뒤적이는 바람에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예상과 달리 수달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빼냈다. 영문을 모르는 그는 수달이 다시 거실에 엎드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봉투째 냉장고에 넣고 나서 수달 옆으로 갔다. 토라진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수달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수심 어린 얼굴로 수달을 달랬다. 수달을 돌아 눕히고 배에 약과 반창고를 처방하려 했지만 그마저 거부당했다. 수달이 그의 팔을 뿌리칠 때는 살갗을 약간 긁히는 수모를 겪었다. 마침내 수달은 벌떡 일어나더니 자기 배를 가리켰다. 이건 상처가 아니야. 배꼽이야. 넌 나에 대해서 너무도 몰라. 수달의 선언은 그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는 수달 옆에 엎드려 휴대폰 검색을 시도했다. 수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돌입했다. 기본적으로 수달은 하루의 반 이상을 먹이사냥에 투자했다. 한낮에 잠을 자고 나머지 시간은 먹는 게 일이었다. 전생에 덕을 쌓았는지, 일부다처제였다. 강에 사는 수달과 바다에 사는 수달은 먹이부터가 달랐다. 서식지가 다르니 습성과 생태도 특징이 있었다. 바다 수달은 배영에 능했고 곁에 있는 수달이 떠내려가지 않게 손을 잡아준다고도 했다.

축 늘어져 있던 수달이 슬며시 한쪽 눈을 떴다. 그도 수달을 보고 있던 차라 서로 눈이 마주쳤다. 어쩔 수 없이 두 눈을 다 뜬 수달이 말했다.

이제 내가 뭘 먹는지 알았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달은 당연하다는 듯 목을 곧게 펴서 콧대를 세웠다. 그는 꼴사나운 수달에게 한마디 건넸다.

그것만 안 건 아니지.

수달의 귀가 쫑긋해졌다.

도망자더군. 유명한.

수달은 당황하지 않고 그를 주시했다. 예상이라도 한 듯이 반문했다.

그래서 어쩔 작정이야? 나를 여기서 내보내겠다는 건가? 신고라도 하게?

나는 혼자 사는 체질이야. 늦은 나이에 깨달았지만.

난 돌아가기 싫어.

이 집에서도 살 수 없잖아. 생태계가 다르니까.

그래. 난 원래 캘리포니아 몬터레이 베이에서 왔어. 나를 좋다고 쫓아다니는 바다사자를 피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 종이 다르고 심지어 수놈이야. 펭귄을 강간했다는 소문도 파다했지. 여기는 그놈들이 없어서 천만다행이야.

동물원은 어쩌다 간 거야?

억울하게 잡혔어. 길눈이 어두워서 어쩌다 간 곳이 바다와 강이 만나는 근처였지. 그런 데가 놀기는 좋거든. 낚시금지 사인이 있어서 안심했는데.

글자도 보는군.

난 머리가 좋아. 하지만 글자는 아니고 그림이었어.

여기서는 아무도 믿지 마.

바다로 갈 거야. 동물원 우리 안에 탈출구를 만들어놨지. 그런데 막상 출발해보니 너무 미로야. 힘들게 구멍을 파놨는데. 봐봐. 내 이빨.

앞니가 보통 아니네.

하수구에 닿을 때까지 갉아댔어. 이가 좀 닳았을 거야.

수달이 앞니를 내밀어 자랑하는 걸 보며 그는 다시 외출에 나섰다. 이번에는 가까운 마트로 갔다. 그는 마트의 수산물 코너로 직행해서 조개를 다량으로 구입했다. 직원이 도매는 마트보다 수산시장이 싸다고 귀띔했다. 그가 양손에 든 봉지와 등에 맨 배낭은 조개로 가득 찼다.

경비실에서 그를 발견한 경비가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코를 벌름거리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해산물을 좋아하시나 봐요. 배낭도 꾹꾹 눌러보며 놀라워했다. 그는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엘리베이터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수달이 조개를 보자 꼬리를 흔들며 달려들었다. 거실은 금세 조개판으로 변했다. 수달은 정해진 식사 예절이 없었다. 손가락으로 조개껍질을 까기도 하고 배에 올려놓고 주먹으로 내려치기도 했다. 성치 않은 이빨까지 동원하는 바람에 옆에서 구경만 하던 그는 싱크대 서랍을 뒤적였다. 칼을 가져와서 조개껍질 틈을 벌려줬다. 덕분에 수달은 편하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는 조개껍질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다가 현관에 쌓아 뒀다. 수달은 배를 두드리며 만족해했다.

수달의 눈이 게슴츠레해지는 걸 보고 그는 수달을 침대 위로 인도했다. 수달은 사양하지 않았다. 그도 별일이 없어 수달 옆에 누웠다. 벌써 잠이 들었는지 수달의 몸이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그는 팔을 뻗어 수달의 주먹 만한 뒤통수를 만졌다. 숨을 쉬는 대상에 손을 대본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역시 묘미는 기다란 몸이었다. 그의 손이 수달의 몸통을 길게 쓸어내렸다. 엉덩이 가까이에서는 꼬리가 살짝 반응했다. 무심결의 움직임을 보자 그는 장난스러워졌다.

그는 수달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당겨 천장을 향하게 만들었다. 포유류로서 생겨나는 호기심을 절제할 수 없었다. 그는 자세히 수달의 몸통을 관찰했다. 수놈이라면 있어야 할 부위가 안 보여서 다리 하나를 당겨볼 심산이었다. 순간 수달의 시선이 느껴져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재빨리 침대보를 정리하는 척 연기를 했지만 몹시 부자연스러웠다. 수달이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수컷의 생식기는 배꼽에서 교미 때만 돌출돼 나온단다. 난 바다사자한테 물려서 배꼽이 흉하게 볼록해졌어.

그렇구나. 그는 민망해져서 도로 누웠다.

천장에 영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옆에 누가 있으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수달은 무엇을 포기하고 있을까. 캘리포니아라면 먼 길이었을 텐데. 수달은 그의 생각을 읽고 있다는 듯 대답을 했다. 그 말들이 천장에 둥실 떴다.

멀고도 험한 길이었지.

어떻게 견뎠어?

지금처럼.

지금처럼?

가만히 누워있었어.

배영이군.

그는 욕조에 누워 그런 상상을 종종 하곤 했다. 만약 달라졌을까. 아들이 배영을 배웠다면. 그래서 더 오래 물에 뜰 수 있었다면. 생존 호흡법을 익혔다면. 발차기를 더 길게 할 수 있었다면. 어딘가로 헤엄쳐가지는 않았을까. 최소한 어디선가 발견되지는 않았을까. 아들 친구처럼 비치볼이라도 껴안고 있었다면. 그 비치볼을 빼앗았다면. 그날 친구의 식구들을 따라 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그 전날 감기라도 걸려 앓아누웠다면. 애초에 그 친구를 안 사귀었더라면. 만약에. 만약에… 그는 수많은 만약을 떠올렸다. 하지만 '만약'은 있을 수 없는 가설이었다. 왜냐면 그의 관점에서 실종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었다. 현재 진행 중인 사안에 가정법을 대입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내는 냉정하게도 실종이 결과임을 인정해서 그를 놀라게 했다. 아들 실종 후 불과 십년도 안 지난 시점이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렀다. 그는 여전히 실종을 결과로서 받아들이지 못했다. 심지어 다가올 십년 아니 백년을 또 하나의 과정으로 맞이할 각오가 돼 있었다.

그는 수달을 힐끗 봤다. 바다에 누워 파도에 몸을 맡긴 수달이 눈앞에 그려졌다. 수달은 어떤 영상을 보고 있었을까. 수달이 몸을 일으켰다. 잠이 안 와. 그 역시 일어나 앉았다. 수달이 침대를 내려갔다.

자맥질을 해야겠어. 몸이 너무 건조해.

수달의 말에 그는 욕실로 가서 물을 틀었다. 욕조가 점점 물로 채워졌다. 수달은 그 새를 못 참고 욕조로 들어가 발을 담갔다. 그가 애써 말린 털들이 점차 물에 젖었다. 수달이 들락날락 법석을 떠는 통에 그가 물세례를 맞아야 했다.

물이 충분히 차자 수달은 뛰어난 잠수 실력을 선보였다. 물 안과 밖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어 그의 부러움을 자아냈다. 물 안에서 꼼짝 않기도 했는데, 그가 걱정스러워할 무렵 머리를 쏙 내미는 장난을 즐겼다.

물이 넘쳐 욕실바닥이 물 천지가 됐을 때쯤 초인종이 울렸다. 그는 더 이상 종교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방문객을 무시했다. 세 번 네 번 초인종이 계속되자 그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수달의 귀도 빳빳해졌다. 물이라서 소리가 큰 파장으로 몰려 왔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전도사라고 주장할 작정으로 현관문을 자신 있게 열었다. 경비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비슷한 표정의 경찰이 성큼 다가왔다.

동물원에서 탈출한 수달의 은신처를 제공하고 계신가요?

아니요.

조개를 무더기로 운반하셨잖아요. 이사 온 후로 칩거의 나날을 이어가던 분이.

집안을 좀 봐도 될까요.

경찰이 현관문을 미는 통에 그의 발이 조개무덤을 건드렸다. 조개껍질들이 쏟아져 내렸다. 경찰에게는 본연의 업무겠지만 경비까지 집안 수색에 참여했다. 그만큼 수색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열다섯 평에 두 명의 인력을 투입해 얻은 성과는 제로였다.

목욕을 하던 중이신가요. 찢어진 방충망 수리는 왜 안 하세요. 이만큼의 조개를 혼자서 다 드셨나요. 공허한 질문들만 던져놓고 수색 인력은 철수했다. 그는 욕조에 남은 물과 무너진 조개무덤을 바라봤다. 그에게 남은 것도 제로였다.

그는 산책을 하는 사람처럼 천천히 걸었다. 경비의 눈초리로 인해 뒤통수가 따끔했다. 그는 화단을 넘어 상추밭으로 갔다. 오층을 올려다봤다. 그 지점에서 아래를 봐도 땅바닥에는 상추뿐이었다.

아저씨. 먹을 걸 왜 밟아. 빨리 나와요.

경비가 소리쳤다. 그는 화단을 나오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없을 줄 알고 있었지. 꿈같은 일이 반복되는 법은 없어. 그는 집에 들어갈 기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파트단지 주변의 맨홀 뚜껑들을 눈여겨봤다. 수달이 한 가닥 털을 묻히지나 않았는지 유심히 살폈지만 흔적이 없었다. 간절히 비가 오기를 바랐지만 하늘은 흐린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파장이 전달되기에는 대기의 습도가 충분하지 않았다.

마트에서 수산물코너 직원이 아는 체를 하려고 했다. 그는 냉정하게 상품 진열대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덕테이프를 골랐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드러눕는 대신 그는 거실 한가운데 앉았다. 탁자에 놓인 서류봉투를 열었다. 서류를 꺼내 작성하기 시작했다. 기본정보를 기입하다가 펜을 멈췄다. 이혼 사유가 아리송했다. 아들의 실종 때문일까. 아니다. 아들에게 누명을 씌우는 꼴이지. 성격 차이일까. 너무 상투적이지. 결혼은 아무래도 존재론적인 개념이었다. 애당초 결혼이라는 제도에 섣불리 발을 들인 게 잘못일지도 몰라. 어쩌면 숨을 영원히 멈추려고 했던 게 원인일까. 그 시도들을 지켜보던 아내는 지겨웠겠지. 그때 문득 수달이 떠올랐다. 책임 전가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뤄오던 이혼서류를 다시 꺼내 들게 만들었다는 핑계를 대고 싶었다. 그는 서류를 마저 작성하고 탁자 위에 잘 보이게 펼쳐 놨다.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내가 애원하던 일이었다.

그는 옷을 벗어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과감히 겉옷을 벗어제끼고 팬티만 남겼다. 미련 없이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덕테이프를 붙여 문틈 사이를 막기 시작했다. 바다 느낌을 살리려고 했기 때문에 그가 고른 테이프는 푸른색이었다. 이왕이면 몬터레이 베이가 어떨까. 나무가 부서진 모서리 부분은 테이프를 덧붙였다. 하수구 구멍을 막기에는 스펀지 미니 공이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욕조의 물을 틀었다. 그는 욕조로 들어가 앉았다. 팬티가 우선 젖어들었다. 고무줄이 약해 벗겨질 듯했다. 이제 와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욕조가 넘쳐났다. 물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작은 폭포를 이루었다. 그는 물의 동태를 주의 깊게 살폈다. 바닥에 얇게 펼쳐져 있던 물이 점점 상승했다. 그는 기다림에 익숙하다고 자신했는데 착각이었다. 어서 물이 차기를 바라느라 다시 종교를 떠올릴 지경이었다.

이윽고 물이 욕조 높이까지 차올랐다. 기쁨도 잠시 문틈에 붙인 테이프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게 보였다. 그는 일어나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최대로 열었다. 수위가 좀 더 빠르게 올라가더니 마침내 욕조를 훌쩍 넘어섰다. 작은 수영장에 온 기분이었다. 그는 새우등 뜨기도 해보고 개헤엄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물이 가슴을 넘어 어깨까지 차오르자 그는 부산한 움직임을 멈췄다. 몸을 뒤로 젖히고 드러누웠다. 팔다리를 휘저으며 배영을 흉내 냈다. 보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다는 생각에 마음 놓고 시도했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뭐든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었다. 그는 갈수록 초조해졌고 실망감만 더해갔다. 몸에 힘이 빠져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었다. 케 세라 세라. 한순간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났다. 그는 저항하지 않고 몸을 맡겼다. 이윽고 누운 몸의 균형이 잡히자 천장이 똑바로 보였다. 긴장했던 근육이 풀려 나른하기까지 했다. 온몸에 전해지는 흐뭇함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혼자였다. 오로지 천장만이 코앞에 있었다. 천장은 살면서 가장 친하게 지낸 상대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물속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그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물을 먹고 허우적댔다.

몸에 힘을 빼라고.

수달이었다. 수달이 그의 등을 받치고 있다가 손을 뗐다. 그럼에도 그는 가라앉지 않았다. 수달이 물 밖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어떻게 된 거야? 그가 물었다.

저 정도 구멍을 통과하는 건 일도 아니지.

열어놓은 건 아니겠지?

미니 공으로 다시 막았어. 걱정 마.

그는 수달과 나란히 누웠다. 산소가 부족해져 갈수록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수달이 그를 슬쩍 보는 게 느껴졌다. 그는 빠질까봐 돌아보지 않고 누운 자세를 고수했다.

어쩔 셈이야?

그의 물음에 수달은 대답이 없었다. 그의 코가 천장에 닿았다.

어쩔 셈이야?

수달이 똑같이 물었지만 그도 묵묵부답이었다. 수달이 그의 팔짱을 끼더니 손을 맞잡았다. 그는 마치 수달이 된 기분이었다. 같은 포유류 정도까지가 좋았는데. 둘은 서로 천장을 봤다. 그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왜 다시 온 거야?

배영을 가르쳐주려고.

그럴 시국이 아닌 거 같은데.

간절할수록 배영이 필요하단다.

그는 수달이 상황파악을 잘못했다고 느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수달의 신상에 이로워 보였다.

바다로 가는 길은 아직 못 찾았어?

내비게이션이 절실해.

요즘 동물원은 살 만하지 않나?

정이 없어. 복작거리기만 하고.

그래도... 사는 데서 정을 붙이려고 해봐.

누가 할 소리를.

둘이 대화를 나눌수록 공기가 희박해져 갔다. 결국 말소리 대신 가쁜 숨소리만 이어지던 중이었다. 귀가 밝은 수달이 그에게 먼저 물었다.

무슨 소리 안 들려?

들려.

그가 귀를 기울였다. 삑. 삑. 삑. 삑. 낯설지 않은 소리였다. 물에서는 정말 잘 들리는구나. 그는 감탄하며 계속 소리에 집중했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에 이어 현관문이 열렸다. 익숙한 발걸음의 강도와 간격으로 봤을 때 아내가 확실했다. 한집에 살 때 쓰던 비밀번호라는 걸 어떻게 알아챘을까. 아내가 거실에 들어서자 잠시 두리번거리는 듯했다. 그리고는 탁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고 그 위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내는 욕실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었다. 아마 물이 새나갔던 모양이다. 아내가 문고리를 돌리다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는 고막이 울려서 얼굴을 찡그렸다. 아내는 소리를 지르다가 탁자 위의 칼을 집어 들었다. 욕실 문틈을 쑤셔댔다. 테이프 하나가 떨어져서 물 위로 떠올랐다. 문틈으로 물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아내는 부서진 모서리로 칼날을 집어넣고는 길게 갈랐다.

그의 코가 욕실 천장에 찌부러졌다. 얼굴은 작지만 주둥이가 긴 수달의 코도 천장에 부딪혔다. 수달은 끝까지 호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침착하라고 조언했다. 삶도 죽음도 다 시간문제구나. 그런 생각으로 그는 눈을 감았다. 수달의 손아귀가 꿈틀했다. 그때 거실에서 남다른 목청이 들려왔다. 뭐야 이거. 웬 물바다야.

경비가 욕실 문을 어깨로 쳐대는 것 같았다. 나이에 비해 힘이 센 사람이었다. 테이프가 찌익 하며 뜯겨져 나갔다. 문의 틈새가 넓어졌다. 틈이 벌어질 때마다 물이 거실로 새어 나갔다. 그는 걱정이 됐다. 천장과 코가 맞닿은 후로 더 이상 수위가 높아지지 않았다. 잠시 후 욕실 문이 활짝 열렸고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졌다. 그 사이로 두 포유류가 봇물처럼 쓸려나왔다.

그는 난리통에 수달의 손을 놓쳤다. 미끄러운 거실바닥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눈을 떴다. 수달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경비가 베란다의 구멍 난 방충망 사이로 목을 넣었다 빼더니 부리나케 집을 빠져나갔다. 아내는 물난리를 피해 탁자 위로 대피 중이었다. 아내가 손에 쥔 서류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내는 그의 몰골을 보다가 탁자에서 내려왔다. 어디서 찾아냈는지 마른 옷가지를 그에게 건넸다. 아내는 일단 물에 잠긴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는 아내를 따라 아파트 화단 앞 벤치에 앉았다. 그가 위를 올려다보니 오층에서 아직 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아내는 옆에서 계속 서류를 만지작거렸다. 경비가 나타나더니 아파트 주차장에서 우왕좌왕하는 수달을 경찰에 인계했다며 의기양양했다. 또한 이웃집을 물바다로 만든 피해 보상을 그가 해야 할 거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경비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아내는 서류를 찢어버렸다.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노라고 선언했다. 결의에 찼어도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가 직장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며 또한 욕실에 있는 욕조를 제거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아내에게 수달이 달아나는 걸 목격했냐고 물었다. 그를 보는 아내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내가 방금 전의 선언을 취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그의 예감을 증명하듯 아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거울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당신 꼴을 좀 봐. 그는 거울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봐도 영 주인 의식이 들지 않았다. 수염만 길면 동물계 척삭동물문 포유강 식육목 족제비과에 속하는 수달에 가까웠다.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내가 그를 불렀지만 무시한 채 다리에 점점 속도를 냈다.

동물원은 아직 문을 닫지 않았다. 수달 우리 앞은 아이들로 인해 소란했다. 그는 이곳이 아이보다 동물의 소리를 들어야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눈앞에는 몇 마리의 수달이 있었다. 그놈이 그놈이라 할 정도로 개성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놈 중에 그놈을 구별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는 아이들 고함 저변에 깔린 소리에 집중했다. 간절할수록 통하리라.

수달들이 무리를 지어 자맥질을 했다. 동시에 물에서 나오더니 어디론가 뿔뿔이 달음박질했다. 그중 한 수달이 새우등 뜨기를 하듯 엎드려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 수달을 주시했다. 기다림을 아는 놈이라면. 아이들이 다 떠나갔다. 물속에 있던 수달이 꿈틀거리며 꾸준히 시선을 끌었다. 드디어 물에서 뛰쳐나오며 몸통을 길게 뻗었다. 배꼽이 흉하지 않았다. 그는 다행이라 여겼다. 그가 찾는 수달은 바다로 갔을 테니까.

그는 주변을 배회하다가 사육사가 먹이를 주는 틈을 타서 우리 안으로 잠입했다. 그리고 초기의 적응 기간도 필요 없을 만큼 현지 환경에 금방 젖어들었다. 다른 수달들에게 새내기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 같아 처신하기가 수월했다. 그는 수달이 미리 파놨다는 구멍을 따라 태평양으로 갈 작정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초보이기는 해도 본능에 따라 자맥질을 했다. 이렇게 큰 욕조는 생전 처음이었다. 몸통을 뒤집어 한껏 여유를 부려봤다. 몸에 힘을 빼고. 침착한 호흡과 발차기. 출렁이는 물결에 몸의 중심이 흔들렸다.

언뜻 우리에 쳐진 창살 너머로 우산을 쓴 아내가 보였다. 그를 알아보는 건지 시선을 오래도록 마주쳤다. 아내의 말이 그녀의 입모양을 통해 그에게 전달됐다.

좋아 보여.

그는 최선을 다해 배영을 선보였다. 눈에 빗물이 떨어졌다.




  <당선소감>


   "글 간절할 때 침착하게 쓴 이야기"


백지를 노려보다가 욕조로 들어간다.

밀려드는 무력감에 몸을 담근다.

천장에 수달이 나타난다.

수달은 바다 한가운데서 바다사자에게 쫓긴다.

수달은 손가락을 바짝 모아 바닷물을 가른다.

꼬리는 곤두서고 수염은 꼿꼿하다.

밀려온 큰 파도에 수달의 몸이 구름 가까이 솟구쳤다가

파도의 경사면을 타고 굴러떨어진다.

한바탕 일던 물결이 잠잠해진다.

수달이 눈을 뜬다.

다시 바다사자가 나타난다. 입을 크게 벌린다.

양쪽에 솟은 이빨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수달은 눈을 감고 물결에 몸을 맡긴다.

바다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펭귄을 쫓고 있어.

바다사자가 멀어지며 윙크를 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수달 옆으로 첨벙 뛰어든다.

수달을 향해 팔을 뻗는다. 그도 나한테 팔을 내민다.

우리는 서로 팔짱을 끼고 유유히 배영을 한다.


백지에 바닷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글을 쓸 준비가 됐다.

이건 수달이 알려준 방식이다.


  ● -


 

  <심사평>


  현실감각과 상상력 균형감 월등


'2021 영남일보 문학상' 소설 부문에는 233편의 작품이 접수돼 10편이 본심에 올랐다.

코로나19로 세상이 몸살을 앓은 올해 문학도들은 무엇을 주목하고, 어떻게 해석했을까. 본심에 넘어온 작품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가 여느 해보다 컸다. 소설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곤혹과 딜레마를 가장 첨예하게 다루는 서사예술이고, 그 최전선에 서 있는 사람이 신춘문예에 도전하는 문학도들이기 때문이다.

예심을 통과한 10편의 작품 세계는 의외로 다채로웠다. 오늘도 변함없이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들, 아픔을 다독이며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가족들, 국경을 넘나들며 편견과 차별을 몸으로 견뎌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유형화해 나누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모두가 코로나19에 억눌려 산 한 해였는데도 이토록 다양한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보고 세상을 해석하며, 개성적인 서사의 세계를 구축해낸 문학도들의 능력과 열정이 새삼 경이로웠다.

'도크장'과 '신박한 것으로의 초대'는 우리 시대의 고단한 삶의 현장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용접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도크장'은 현장감 넘치는 장면구축 능력이 돋보였다. 갈등구조가 지나치게 거칠고 상투적인 것이 못내 아쉬웠다. 같은 항공사에 근무했던 스튜어드와 조종사의 이야기를 다룬 '신박한 것으로의 초대'는 코로나19가 바꿔놓은 인생을 흥미롭게 보여주었지만, 느슨하고 모호한 관계가 안타까웠다.

'푸르고 깊은' '오류' '몸에 그린 벽화'도 개성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지만 완성도가 살짝 아쉬웠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손에 남은 작품은 '브레이크 타임'과 '수달'이었다. '브레이크 타임'은 일식집 주방장의 섬세한 심리묘사와 감각적인 문장이 뛰어났다.

평범한 일상을 통해 독자들의 오감을 일깨우고 자극하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이 작품을 끝까지 지지하지 못한 이유는 구체화의 능력에 비해 추상화의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수달'은 현실을 은유하는 솜씨가 돋보이는 수작이었다. 아이를 바다에서 잃고 욕조에 물을 채우고, 끝내는 욕실의 문을 잠그고 차오는 물속에 자신을 맡기는 사내의 삶이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드는 힘을 발휘했다. 사내가 직면한 상황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는 마무리가 아쉬웠지만, 작가가 지닌 현실 감각과 상상력의 균형감이 월등하다는 점에 우리는 의견을 같이했다. 당선을 축하한다. 이번에 아쉽게 기회를 얻지 못한 응모자들에게도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 : 조갑상, 방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