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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7구역 / 김인희

 

여기에요, 189-3. 행운의 쪽지가 왔네요. 팀장이 지도를 펼친다. 7구역을 복사한 세부도이다. 샛길 따라 크고 작은 도형들이 사방에 흩뿌려져 있다. 그중 한 다각형에 팀장이 형광펜으로 색칠을 한다. 어젯밤 홈페이지에 올라온 신규 문의에요. 성인 남자, 최 민식님. 담당 선생님 상담을 받고 싶다고 하네요. 오늘 꼭 만나보는 게 좋겠어요. 인영은 성인 회원은 달갑지 않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마감날이다. 어찌 보면 오늘의 신규 문의는 팀장 말대로 행운의 쪽지임에는 틀림없다.

팀장의 등 너머로 키높이가 들쭉날쭉한 막대 그래프가 보인다. 인영의 이름에는 막대가 없다. 창가로 다가가 7구역 쪽을 내려다본다. 시내에서 버스로 10분 밖에 걸리지 않는 그곳은 몸살을 앓고 있다. 칙칙한 회색 건물 사이사이의 삐뚜름한 간판들은 흉터에 붙인 반창고 같다. 골목길은 그물망처럼 복잡하게 뒤엉겨있다.

버스는 가로수가 양 옆으로 늘어선 구부정한 길을 달려 정거장에 인영을 내려 놓고 달아나버린다. 인영은 7구역 속으로 재빨리 들어선다.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놀이터다. 인영은 놀이터를 가로질러 낮은 담장을 따라 걷는다. 문방구와 분식점을 지나쳐 오른쪽 샛길로 들어선다. 오밀조밀한 낮은 빌라들을 여럿 지나자 붉은 벽돌집 4층짜리 연립 주택이 나온다. 189-3이다. 오늘 노순 첫 번째 A는, 이 건물 302호에 살고 있다. 겉보기에 붉은 벽돌집은 10세대이지만 빈 집도 있다는 것을 인영은 알고 있다. 이 건물 102호에 초이가 아직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신규 문의 온 최민식 님은 이 건물 몇 호 인가에 살고 있을 것이다. 오전에 인영은 최민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담 시간을 미리 잡아야 했고 몇 호에 사는지도 알아야 했다. 그는 받지 않았다. 부재중 통화를 확인한다면 인영에게 전화를 할 것이다. 수업나올 때까지 연락을 기다렸지만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 문자를 남겨 놓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아직 퇴근할 시간은 멀었어. 인영은 자꾸 핑계를 댄다. 최민식님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나지 않고 있다. 해야 할 숙제를 미루어 놓은 것처럼 마음 한켠이 무겁다.

A의 집 302호로 가는 계단을 오를 때마다 인영은 102호 현관문을 쳐다본다. 무엇 때문에 아직 초이가 7구역을 떠나지 않고 있는지 인영은 답답하다. 정우는 벌써 엄마와 함께 7구역을 떠나버렸다. 정우가 떠난 후 초이가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실을 아는 이는 없다. 인영은 친절한 성격은 아니지만 초이에게 자꾸 마음이 쏠린다. 마치 보이지 않는 끈에 끌려 다니는 것처럼.

초이를 보면 아버지가 생각났다. 부평에 있는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직원을 감원하기로 결정했을 때, 아버지는 맨 먼저 해고를 당했다. 엄마는 텔레비전 볼륨이 크다고 인영의 등짝을 때렸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면서도 인영은 텔레비전 볼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낮에도 집에 있는 아버지의 버릇을 고쳐본다고 대신 인영을 손질한 것을. 참다못한 엄마는 일을 찾아나갔다. 엄마의 빈 자리는 아버지가 메웠다. 역할이 바뀐 것 뿐이었으므로 겉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버지의 손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인영은 아버지와 방바닥에 엎드려 종일 만화책을 읽었다. 고래밥을 먹으며 재미난 만화 장면이 나오면 서로에게 보여주며 까르르 웃었다. 배를 잡고 방바닥을 뒹굴기도 했다. 인영이 기억하는 가장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하루 열잔의 커피와 두 갑의 담배, 술, 주부습진등. 아버지는 가까스로 세월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택한 세상과의 타협이었다.

7구역에 배정 받아 갔던 첫날, 동행했던 팀장은 말했다. 여기가 다 선생님 땅이에요, 라고. 그 말에 인영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얼굴이 발개졌지만 금세 가슴은 부풀어 올랐다. 7구역 아이들이 모두 인영의 차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한 보물이 가득 들어있는 동굴 앞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지금 같은 장소에서 바라보는 7구역은 생명보다는 죽음에 속한 도시 같다.

7구역에는 땅 투기 붐이 일어났다. 버스로 두 블록을 넘지 않는 큰길 양쪽에 부동산 간판이 자꾸 늘어났다. 낯선 사람들이 나타나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도 가끔 보였다. 사이사이 PC방과 호프집이 개업을 다투었다. 정작 사람들에게 필요한 경찰서와 병원, 약국 등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유리창이 깨지거나 벽이 검게 그을린 빈집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남아있는 집들도 세월 때문에 빛이 바랬다. 집 없는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7구역의 계획 속에 처음부터 자신들은 배제되었다는 것을. 낡고 오래된 것들과 함께 7구역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서둘러 7구역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면서 반려 동물들을 버렸다. 버려진 동물들은 몰골이 더러웠다. 엉겨있는 잿빛 털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롭던 시절의 털 빛깔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고양이만큼 야생의 본능을 가진 동물은 없어 보였다. 양탄자 위에 엎드려있던 게을러터진 낮잠꾸러기가 아니었다. 매끈한 허리선을 흔들며 강아지까지 공격하는 동작은 맹수의 그것이었다. 강아지는 고양이를 보면 얕볼 상대가 아니라는 듯 꼬리를 낮추고 슬금슬금 도망을 쳤다.

집 없는 사람들은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초조해했다. 그 사이 다른 구역의 집값도 껑충 뛰어올랐다. 그나마 일터가 있는 7구역 주변에 악착같이 붙어있으려면 또 빚을 내야 했다. 그들에게 빚을 내는 일은 7구역을 떠나는 일보다 어려웠다. 사람들은 너그러움을 잃어버리고 날카로워졌다. 술집은 그들을 이용해 돈을 벌었다. 거리에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주정꾼들은 흥얼거리다가도 아무에게나 욕을 해대고 가래를 뱉기도 했다. 유리창이 깨어지고 벽이 검게 그을렸지만 고치는 사람은 없었다. 빈집이 늘어나자 야생 고양이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고양이들은 야위었고 ㅤ굶주려 있었다.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댔다. 대낮부터 먹을 것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들이 지하 보일러실로 숨어들었다. 인영과 맞닥뜨려도 고양이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불온한 눈빛으로 인영을 노려보았다. 교활하고도 비밀스런 동작을 보면 인영은 소름이 끼쳤다. 뭉쳐진 누더기 옷의 실체를 알아차린 것은 시각보다 후각이 먼저였다. 비릿한 피 냄새가 풍겨왔다. 인영은 속이 울렁거렸다. 행동이 굼뜬 강아지를 갈기갈기 물어뜯으며 으르렁거리는 고양이를 보고 있노라면 등골이 오싹해졌다. 피를 흘리면서 끌려다닌 흔적이 계단과 시멘트 벽면에 보였다. 고양이들은 날로 거세어졌다. 7구역에 먹이가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초조해하는 또 하나의 종족이다. 강아지의 숨통을 끊어 놓고 인영을 노려보는 고양이 눈만으로도 그 서슬을 감지할 수 있다.

189-3, 붉은 벽돌집 철문을 열고 발을 들여 놓는다.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뒤꿈치를 살짝 들어 올린다. 인영의 눈은 초이가 살고 있는 102호 계단의 구석진 곳을 살핀다. 어둠 속에서 형광체가 쏘아보고 있다. 야옹. 계단 구석에 버티고 앉아 발광 물질을 내는 녀석, 야생 고양이다. 인영은 계단과 벽면에 묻어 있는 얼룩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야생 고양이는 쓱 사라져버린다. 첫 계단을 디디기 전에 인영은 102호 현관문을 흘끗 본다. 초이가 혹시 문을 열고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다. 102호의 깨진 창문을 슬몃 곁눈질해 본다. 그가 노트북 앞에 앉아 있을 것 같아서다. 인영은 최근 초이를 본 적이 없다. 7구역을 떠난다는 소식을 기다렸지만 정작 그에게서는 연락이 없다.

처음 정우를 만나러 102호를 찾아갔던 날, 인영은 축대 밑에 웅크리고 있는 몇 마리의 고양이들을 보았다. 인영은 움찔했다.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열두 살 된 정우였다. 엄마는 어디 계셔? 인영이 묻자, 정우는 안방을 향해, 초이! 하고 불렀다. 인영은 노트북 앞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정우아버지였다. 그는 정우가 자신을 장난스럽게 초이라고 부른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정우 엄마가 주야간 교대로 일을 하느라 직장 근처인 외가에서 지낼 때가 잦다는 것과 강아지 이름이 태식이라는 말은 정우한테 들었다. 초이는 태식이를 안고 있었다. 짙은 회색의 곱슬곱슬한 털을 가진 스패니얼종이었다. 미국 대통령의 외국 순방길에도 종종 동행했다는 그 스패니얼종은 영양이 부실한 지 털이 성겼다. 갸르릉거리는 숨소리가 아니었더라면 헝겊 인형으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그는 인영이 들어서기 전까지도 노트북에 매달려 있었다. 체홉, 니코스카잔차키스, 가르시아 마르케스, 할레드 호세이니, 나지브 마흐프즈, 르 클레지오, 허먼 멜빌, 로버트프로스트의 책들이 책장에 빼곡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스콧리어링의 책들은 식탁 한쪽에 겹겹이 쌓여있었다. 그는 지독한 독서가이거나 무명작가일지도 모르겠다고 인영은 생각했다. 정우 선생님이시군요? 초이는 블랙커피를 타왔다. 그도 노트북 앞에서 커피를 마셨다. 인영은 그의 시선이 이마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정우와 공부하는 삼십여 분 동안 그가 저편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게 거북했다.

그의 얼굴이 침울해 보이는 것은 아마도 눈썹과 두 눈 때문이라고 인영은 생각했다. 짙은 눈썹과 퀭한 눈은 시인 김수영을 떠오르게 했다. 갑자기 발치에 온기가 느껴졌다. 식탁 아래로 태식이가 기어와 발등에 누웠다. 해질 무렵의 노을빛이 창문을 통해 흘러들었다. 태식아, 태식아. 그가 허리를 굽혀 식탁 아래를 살폈다. 태식이가 부르르 몸을 털며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그의 얼굴 윤곽이 석양빛에 드러났다. 인영은 한 남자를 그때처럼 오랫동안 쳐다본 적이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그로테스크한 그의 얼굴은 아주 오래 전, 아버지의 얼굴과 겹쳐졌다. 태식이의 숨소리 사이로 고양이 울음소리가 축대 밑에서 들려왔다.인영은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정우와 수업이 끝난 자투리 시간 1, 2분 정도 초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정우의 학습 진도에 대한 상담이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 중에서 인영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사람일지 몰랐다. 인영은 그가 게을러서 집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정우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단 한 가지 문제만 아니었다면 그는 보통의 아버지들 보다 훌륭했다. 보통의 아버지들은 낮에는 집에 없었고 그는 낮에도 집에 있었다.

정우의 집에 갈 때마다 인영은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열두 살 아이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겨우 서른여섯 번을 정우와 만났을 뿐인데 정우 엄마가 정우를 데려가버렸다. 정우에게 최소공배수와 최대공약수를 채 가르치기도 전이었다.

노순 첫 번째 A를 만나러 3층까지 걸어 올라간다. 저녁이 되면 이 건물 몇 호인가로 최민식님은 돌아올 것이다. 아직 퇴근할 시간은 아니다. 302호 초인종을 누른다. A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다. 인영의 눈은 한쪽 벽면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옷들을 지나 장롱에 시선이 간다. 서랍에 끼어 빠져 나오지 못하는 양말 한 짝에 눈이 멈춘다.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오늘 일정에 갑자기 끼어든 최민식님 때문이다. 그는 아직 연락이 없다. 아이가 연필을 굴려 교재를 푼다. 사각사각, 연필 굴리는 소리가 들린다. 화르륵, 교재 넘기는 소리가 숨소리에 섞인다. A에게 물어보면 혹시 알 수도 있다. 이 건물에 살고있는 최민식님, 아니? 인영이 묻자 A는 몰라요, 한다. 공부를 하겠다고 어제 신청했는데 전화를 받지 않네. 몇 호에 사는지 몰라서…. 성인 남자인데 혹시 모르겠니? 예. A는 아는 게 별로 없다. 늘 대답은 짧다. 수업이 끝나자 인영은 일어선다. A에게 머문 시간은 20분이다.

횡단보도 앞이다. 노순 두 번째 B는 횡단보도 건너편에 산다. 예정대로 라면 다섯 시 반에 B는 논술학원 차를 탈 것이다. 초록에서 빨간 불로 막 신호가 바뀌는 중이다. 신호를 기다리면서 휴대폰을 확인한다. 어제 상담을 요청해 놓고 오늘 전화를 받지 않는 일은 가끔 있는 일이다. 나중에 연락이 오거나 다음에 연락이 닿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 사이 변심했을 수도 있다. 문자를 보낸다. 안녕하세요, 7구역을 맡은 교사입니다. 오늘 방문해서 상담해드리려고 하는데 몇 시쯤이 좋으실까요? 전화를 드렸는데 받지 않으셔서 문자드립니다. 혹시 189-3, 몇 호에 사실까요? 연락주세요. 노란 피아노 가방을 든 아이가 맞은 편에서 인사를 한다. 아이의 얼굴이 낯익다. 신호가 바뀌자 인영은 빠르게 횡단보도를 건너간다. 다 건너가서야 그 아이가 189-3, 102호에 놀러왔던 정우 친구임을 깨닫는다.

정우는 없습니다. 아이 엄마가 데려갔어요. 이제 여기에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작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선생님 연락처도 모르고, 헛걸음을 하시게 했군요. 초이는 무척 미안해했다. 두 손을 비비며 허리를 굽혔다. 바닥에 누워있던 태식이가 달려와 꼬리를 흔들었다. 정우가 없는 적막한 집에 인영이 나타나자 태식이는 몹시 반가운 모양이었다. 아주 가까운 담벼락 어디쯤에서 부드득 이 가는 소리와 뼈가 부딪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영은 진저리를 쳤다. 태식이가 안겨왔다. 몹시 가벼웠다. 인영은 태식이를 가슴에 안고 털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초이의 눈빛에서 절망을 본 것은 아마도 그가 아버지를 닮아서였을 것이다. 정우 아버님도 곧 7구역을 떠나시겠네요? 인영이 묻자 No, exit. 라고 그가 대답했다. 단호한 그의 대답에서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졌다. 아버지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그의 우울한 눈동자를 본 순간, 그를 두고 7구역을 떠난다는 것은 절도나 살인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어. 이번 만큼은 절대 나쁜 일이 일어나서는 안돼. 그가 7구역을 떠나는 날까지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인영은 7구역에 남을 작정이었다. 인영은 재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다행이에요. 지난번 면담 때 재계약을 망설이는 것 같아서 무슨 일인가 했네요. 새 지역을 받으면 일도 지금보다는 훨씬 수월할텐데요. 굳이 7구역만 고집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돈도 안되는 지역인데…. 팀장은 웃으며 덧붙였다. 혹시 7구역에 무슨 보물이라도 숨겨 놓았나요? 회원이 거의 떠난 7구역을 고집하는 인영을 팀장은 어이없어했다.

제발 일 좀 해봐. 엄마의 목소리는 차가왔다. 백 번도 넘게 듣는 그 말에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은 달랐다. 모깃소리만큼 가느다란 목소리로 아버지가 대답을 했다. 출구가 없어, 라고. 아버지가 인영을 쳐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로테스크하게. 잊을 수 없는 아버지의 마지막 눈빛이었다. 오랜 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에 아버지는 일어나 천천히, 아주 느릿느릿 옷을 갈아 입었다. 소줏병도, 담배연기도, 커피향도, 만화책도 고래밥과 함께 사라졌다. 아버지의 양복 주머니에는 신용카드가 있었으나 청구서가 날아오지는 않았다. 평창의 산골짜기에서 감자 캐는 일을 도와주고 있다고도 했고, 먼 누님 벌되는 집의 가을걷이를 돕고 있다고도 했다. 강원도 청계사에 있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피투성이가 된 시신으로 돌아왔다.

B의 집 현관에서 문자를 확인한다. 최민식님은 답이 없다. B가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열린 안방 문으로 포장된 박스가 여럿 보인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지만 맥이 풀리는 것은 숨길 수가 없다. 조만간 B도 이사 갈 조짐이 보인다. 지난 달에도 7구역을 떠난 회원은 다섯이나 되었다. 용케 새 둥지를 튼 사람들이었다. 회원을 생각하면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인영은 초조해졌다. 7구역에 남아야 할 구실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팀장은 인영의 회원 중 한 명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난달 마감날, 책상 위에 세부도를 펼쳐놓는 팀장을 보자 인영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팀장이 지역을 교체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전에 인영은 가짜 이름을 실제 회원인 것처럼 불러주었다. 인영에게 7구역은 사실 아무 의미가 없었다. 초이가 7구역을 떠나는 것을 보기 위한, 최소한의 핑계거리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인영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거짓말을 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엘리베이터까지 배웅 나온 팀장은 인영의 손을 꼭 잡았다. 마감날이면 팀장은 늘 친구처럼 군다. 189-3, 오늘 꼭 찾아가는 거예요? 문이 닫히려 하자 급히 엘리베이터안으로 뛰어 들어온 팀장은 은밀한 제안을 해왔다. 오늘 중으로 189-3에서 최민식님의 입회가 연결되면 곧 입주가 시작되고 있는 새 아파트 단지를 인영에게 주겠다고 했다. 동료들 몇몇에게도 비슷한 제안을 했다는 것을 인영은 알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겨우 감췄다. 팀장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두 해 동안이나 승진에서 떨어진 팀장은 조바심을 드러냈다. 그럴 수 있어. 인영은 팀장을 이해했다. 팀장은 자신의 제안이 인영에게 적절한 미끼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기실 인영은 새 지역을 받을 마음이 없었다. 몇 달 후면 인영이 움켜쥐고 있는 이 한 뼘의 세상은 무너져 내릴게 빤했다. 어차피 그리 될 것이라면 초이가 7구역을 떠난 뒤에 그만 두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노순 세 번째 C의 집을 행해 걷는다. 4층까지 올라가려면 스물다섯 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서른아홉 살이 되도록 인영의 인생이 그랬다. 한발 나아가기는커녕 주저앉아버린, 전율도 감동도 없는 삶이다. ㄴ이 앞서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 C의 동생은 ㄴ학습지를 하고 있다. 인영은 계단에 앉아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ㄴ과 C의 집에 같이 들어간 적이 있기 때문이다.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오는 ㄴ과 마주친다. ㄴ의 낯빛이 어둡다. ㄴ이 몇 달 전에 걸어놓은 빛바랜 광고 전단이 아직도 옆집 문고리에 걸려있다. ㄴ의 수고가 전해져 온다. 팀장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다른 학습지 전단이 걸려 있으면 떼어버려요. 세상은 만만하지 않으니까요. 내가 머뭇거릴 때 빼앗기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먹이 사슬 같은 거지요. C의 엄마가 다가와, 우리 둘째를 테스트해주실 수 있으세요? 한다. 방금 전 내려간 ㄴ의 기분을 떠올렸지만 인영은 로또에 당첨이라도 된 것처럼 기쁘다. 굳이 최 민식님을 만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저희도 이사 날짜가 잡혔네요. 그곳에 가서 다시 시작하려고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선생님.

골목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기나 한 것처럼 찬 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다. 정우 엄마를 본 곳도 이 골목이었다. 여자는 정우를 자동차에 태우고 골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인영은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잔뜩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우가 몸을 돌려 손을 흔드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신호등 앞까지 쫓아간 인영은 여자한테 묻고 싶었다. 아버지를 떠나도 괜찮은지를 정우에게 물어는 보았느냐고. 정우에게도 정우의 마음이 있지 않겠느냐고. 나야말로 7구역을 떠나야 할 이유가 천 가지가 넘는 사람이라고. 그런데도 이렇게 아무일 없는 듯이 지내지 않느냐, 고 소리치고 싶었다. 여자는 깜빡거리는 신호등을 보고 있느라 인영이 뒤쫓아 온 것을 모르고 있었다.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자 정우를 태운 자동차는 순식간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자동차가 모퉁이를 꺾어 사라진 길의 적막에 인영은 몸서리쳤다. 어렴풋이 폭발하기 시작한 분노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제 막 7구역에서 정우를 빼앗아 간 여자인지 인영의 엄마인지 분간 못할, 분노의 순도가 서로 같음을 인영은 깨달았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빌라와 나란한 단독 주택의 담벼락 아래를 걷는다. 어느 사이 인영은 189-3, 붉은 벽돌집 앞에 와 있다. 담벼락 밑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던 고양이가 하품을 하며 눈을 뜬다. 발톱을 내밀고 몸체를 길게 당겨, 온몸의 털을 세우는 모습은 영락없는 새끼 호랑이다. 고양이는 붉은 벽돌집 담벼락 아래를 지나 철대문 틈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쓴다. 고양이는 몸을 납작하게 만들어 철대문 안으로 재빠르게 사라져버린다. 붉은 벽돌집을 뒤로하고 걷는 발걸음이 무겁다. 최민식님은 만났어요? 팀장의 전화다. 아직요. 그럼 어쩌지요? 마감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요. 인영은 조용히 듣기만 한다. 골목 모퉁이를 돌아 나오다가 인영은 멈칫 선다. 야생 고양이가 붉은 벽돌집 지붕을 타고 있다. 어찌 보면 야생 고양이만큼 사람을 위협하는 동물도 없다는 생각이다. 흡사 자객 같다. 102호의 깨진 창문이 마음에 걸린다. 고양이 때문에 자꾸 태식이가 걱정된다.

그날 인영은 정우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초이를 찾아갔다. 왠지 태식이가 자꾸 걱정되었다. 축대 밑에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들이 뒤통수를 찌르듯이 쏘아보는 것을 인영은 느꼈다. 초이는 거실 바닥에 앉아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집에는 노트북과 책장만 있었다. 가구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자리는 을씨년스러웠다. 수업을 마치고 밤에 찾아간 인영을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인영이 바닥에 앉자, 태식이가 다가와 발밑에 엎드렸다. 축대 밑에서 앙칼진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때마다 태식이는 움찔움찔했다. 저놈의 고양이들, 구청에 신고라도 해야 하지 않나요? 초이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어차피 원래 왔던 야생으로 곧 돌아갈 텐데요. 7구역에는 먹이가 더 이상 없으니까요. 저, 정우는 잘 있나요? 인영이 묻자 그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미소를 짓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보니 울 듯 말 듯 한 얼굴로 변해 있었다. 정우 이야기를 꺼낸 것을 인영은 곧 후회했다. 내 아들 정우가 선생님한테 그리 소중했나요? 하긴, 아무도 공부를 시작하려 하지 않는 모양이군요. 딸꾹. 저는 선생님과 터놓고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곧 선생님은 이곳에서 아무 쓸모가 없게 됩니다. 기회란 산 짐승처럼 달아나기 때문에 이를 놓치지 않는 기민함이 필요한건데….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가고 없는데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 7구역에 아직도 있다고 생각합니까? 바보 멍청이가 아니라면 다 알 만한 사실 아닌가요? 내가 먼저 7구역을 떠나면 되겠습니까? 그는 이미 취한 상태인지 말을 할 때마다 딸꾹거렸다. 내가 떠나면, 이라는 대목에서 인영은 박수를 치고 싶었다. 정답, 이라고 하마터면 소리지를 뻔했다. 그가 떠난다면 인영은 7구역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사실 나는 백수에나 어울려요, 라고 고백한 것도 그때였다. 아무한테도 꺼내보지 못한 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내 꿈이라고요. 처음에는 무언가 가장 중요한 것이, 언젠가 막연하게 꿈꾸어 왔던 그 무엇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여전히 세상은 안갯속 같았고 난 늘 무엇인가가 부족했어요. 강요된 삶은 참을 수 없어요. 세상은 메커니즘이에요. 이 메커니즘 안에서 나는 호흡하고 숨가쁘게 돌고 돌아요. 난 이 7구역이 지옥같아요. 무너져내릴 듯한 건물들과 차가운 공기, 썩은 냄새가 싫다구요. 몇 년 후, 7구역이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한다 해도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은 욕망은 없어요.

단 한 사람만 아니라면 난 벌써 7구역을 떠났을 거예요. 초이가 벌떡 일어났다. 무슨 소립니까? 그럼 7구역을 떠나지 않은 게 내 탓이란 말입니까? 왜죠?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왜 내 탓이라고들 하는 거죠? 난 원래 혼자 노는 인간입니다. 가족을 버리기까지 했단 말입니다. 지금은 태식이도 버거운 그런 형편없는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는 남은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7구역이 선생님한테는 지옥이라고요? 나와 반대시군요. 나에게 지옥은 7구역 밖입니다. 그 어느 곳도 7구역만큼 영혼을 배려하는 공간은 없으니까요. 영혼이 하얘질때까지 이 방에서 난, 한 발짝도…. 좋습니다. 나도 곧 7구역을 떠날 예정입니다. 떠날 때는 선생님께 꼭 연락을 드리지요. 우리 태식이를, 태식이를…. 초이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가 횡설수설하면 할수록 인영은 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죽을 것 같은 7구역에서 그는 아버지였고 친구였고 인영 자신이기도 했다. 인영은 그를 끌어다가 자리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날 이후 인영은 초이를 찾아가지 않았다. 102호의 깨진 창문을 곁눈질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주 가끔,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온통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자판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마구 움직이는 그는 피아니스트같았다.

D의 수업을 마치고 나와 미로 학습하듯이 골목을 걷는다. 최민식님에게서는 여전히 답장이 없다. 어두워지기 전에 연락이 닿아야한다. 7구역은 참 이상한 동네다. 인영의 계획은 늘 빗나간다. 지름길이라고 생각되어 가보면 막다른 골목이다. 좁고 폐쇄된 공간에 자꾸 갇힌다. 어느 사이 인영은 189-3, 붉은 벽돌집 앞에 와 있다. 인영은 주저 앉는다. 구두를 벗어 발을 만진다. 발뒤꿈치의 굳은 살이 잡힌다.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든다. 인영이 악착같이 7구역에 남아있는 것이 초이에게 위로가 되기는 할까. 102호에서는 분명했던 생각이 7구역의 골목에서는 공허한 일인 것 같다. 사람들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인영을 흘끔거리며 보고 지나간다. 만났어요, 최민식님? 팀장이다. 아직요. 그럼 주소는 확실하니 벨을 다 눌러보는 건 어때요? 저도 마감날이라서 수치를 맞춰야하거든요. 인영은 팀장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끝까지 해보려는 팀장의 노력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인영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렇게까지 할 용기가 애시당초 인영에게는 없다. 인영의 생각은 아까부터 초이에게 멎는다. 초이는 아직 7구역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날 그는 약속했다. 7구역을 떠날 때에는 인영에게 꼭 연락하겠다고.

어디선가 젖먹이의 칭얼대는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절망감이 찾아든다. 불안한 기운은 물러서지 않는다. 어느 새 아기 울음소리는 앙칼지게 변해 있다. 어딘가 고양이 울음소리와 닮아 있다. 골목에서 강아지 한 마리가 인영을 보자 졸래졸래 쫓아온다. 인영은 강아지를 따돌리느라 지그재그로 걷는다. 강아지는 용케 잘도 따라온다. 가로등 아래서 본 강아지는 제멋대로 자라난 털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는다. 태식이가 걱정된다. 인영은 걸음을 재촉한다. 어쩌면 태식이는 야생 고양이에게 잡아먹혔는지도 몰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초이가 있잖아. 인영은 강하게 도리질을 한다. 그날 초이에게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게 후회가 된다. 걷다 보니 아까 그 자리, 189-3이다. 피자 상자를 실은 오토바이가 달려가다가 멈춘다. 무슨 일 있습니까? 인영은 고개를 젓는다. 오토바이는 골목 끝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잠시 후 오토바이가 다시 나타나 인영 앞에 선다. 정말 괜찮습니까? 어디 많이 아프신 거 같은데요? 라고 묻는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 혹시 이 건물에 살고 있는 최. 민. 식님, 몇 호에 사는지 아세요? 오토바이는 점퍼 안 주머니를 뒤져 나달나달 해진 지도를 꺼내 휴대폰 조명등으로 한참을 비춰 본다. 오토바이가 붕~ 빠르게 옆 골목으로 들어간 사이 인영은 주위를 둘러본다. 인영의 시야에 불빛들이 어지럽게 춤을 춘다. 인영은 몸서리친다. 낮 동안 잠복해있던 수십 마리의 고양이들이 건물 창문에 켜켜이 올라 앉아 약탈을 노리며 골목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금세 나타난 오토바이가 손가락으로 189-3, 102호의 창문을 가리킨다. 아무래도 여기 같아요. 이 건물 사람들은 거의 다 떠나고 지금은 네 집만 남았거든요. 102호에는 남자분 혼자만 사는 것 같던데, 그분이 어쩌면 최씨 일수도 있어요. C. H. O. I, 라고 사인하는 걸 본 기억이 있거든요. 불 꺼진 음울한 창에 인영의 눈길이 닿는다. CHOI, 시. 에이치. 오 .아이, 초이, 최, 최민식. 반가움에 인영이 일어선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홈페이지에 행운의 쪽지를 남긴 사람이 초이라는 것을. 인영의 휴대폰 번호를 모르는 그가 쪽지를 남긴 것이다. 7구역을 떠난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 이제 인영의 마음에 망설임 따위는 없다. 당장 해야 할 일을 방해하는 어둠이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어두침침한 계단을 올라간다. 구두굽이 시멘트 바닥에 닿는 소리가 요란하다. 계단에 올라선 인영은 숨을 고른다. 오른 손을 뻗어 102호의 벨을 누른다. 딩동, 딩동, 딩동. 기척이 없다. 사방은 캄캄하다. 인영은 손을 내밀어 어둠을 헤치고 앞을 가늠한다. 인영의 발소리에 놀란 고양이들이 휙, 인영의 앞으로 줄행랑친다. 으슥한 계단의 구석으로 들어가 으르렁거리는 놈도 있다. 인영은 팔을 뻗어 문고리를 더듬는다.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선다. 큰 소리로 문에 대고 불러본다. 정우야, 정우야. 대답이 없다. 인영은 문에 찰싹 붙어 서서 귀를 바투 대어 본다. 싸늘한 냉기가 느껴진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인영은 문고리를 마구 흔든다. 더 강한 힘으로 잡아 당긴다. 가까스로 문이 열린다.

거실에 검은 형체가 누워 있다. 인영이 머리맡으로 다가가서 어깨를 흔든다. 손길에 닿은 초이의 뺨은 차고 뻣뻣하다. 옷뭉치 같은 것이 기어와 인영에게 안긴다. 태식이다. 역하고 비릿한 냄새와 술 냄새가 코를 찌른다. 구역질이 올라온다. 인영은 그 냄새를 즉각 알아챈다. 아버지에게서 풍기던 냄새, 피냄새다. 휴대폰 조명등을 초이의 얼굴 가까이 가져간 인영은 소스라친다. 움푹 팬 초이의 눈 웅덩이는 크고 깊다. 인영은 주위를 둘러본다. 형광의 눈들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인영을 쏘아보고 있다. 인영이 일어서자 형광의 눈들이 소리 없이 재빠르게 거실과 주방을 지나 다용도실 쪽으로 달아난다. 어느 때 보다도 고양이 눈빛들은 형형하다. 창을 넘고 담을 넘어 어둠 속으로 고양이 눈들이 달아난다. 저눔의 고양이, 저눔의 눈깔. 태식이를 안고 밖으로 뛰쳐 나온 인영은 고양이 눈을 쫓아 달리기 시작한다.




  <당선소감>


   "소설 읽는 기쁨·작법 작품 속에 오롯이"


언젠가 읽었던 책속의 한 귀절이 생각납니다. 잘 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준다는 말. 아주 오래 전 저는 기차를 잘못 탔습니다. 내릴 용기가 없어서 갈팡질팡 하는 사이 기차는 저를 태우고 너무도 멀리 멀리 내달려갔습니다.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아주 먼 곳에 잘 못 탄 기차는 저를 내려놓았습니다.

그 기차는 저를 목적지에 데려다주었습니다.

고마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에게 소설을 읽는 기쁨과 소설 쓰는 법을 가르쳐주신 지상 최고의 로맨티스트, 조동선 선생님.고맙습니다.

못난 제 작품을 끝까지 읽어주신 심사위원님, 고맙습니다.

먼지 나는 책꽂이속에 숨어 있던 제 꿈을 꺼내주신 무등일보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준호야,주환아, 엉뚱한 엄마를 자랑스럽다고 말해줘서 고맙다.


  ● 충남 서산 출생
  ● 인하대 경영학과 졸업



 

  <심사평>


  가족사 울림의 폭 큰 이야기로 형상화


예상이 빗나갔다. 소설이란 모름지기 인간의 삶에 관한 이야기일 테니, 올해 신춘문예는 미증유의 감염병 공포로 멈춰버린 우리 현실을 담아낸 투고작이 많을 줄 알았는데 정작 소수에 불과했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 고단하고 팍팍한 일상에서 겪는 아픔과 상처가 주종이긴 했으나 세상살이에 대한 문제의식과 성찰이 부족한 이야기는 성에 차지 않았다. 문장이 안정되고 서사가 잘 짜인 작품이라면 남들과 다른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나 살폈다.

후보에 오른 작품은 6편이었다. '맹지'는 탄탄한 문장으로 땅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재미가 있었지만 새로운 감수성이라 보긴 어려웠고 '도수치료'는 사지가 꺾여 죽은 살인사건을 도수치료 방법에 병치함으로써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강박에 연결했으나 단편소설이 갖춰야 할 압축과 밀도가 약해 아쉬웠다. '야차'는 세세하고 긴 묘사가 오히려 서사적 전달력을 이완시키는 바람에 주제로 나아가는 궤도에 진입하기를 주저했고 '틈'은 코로나19 확진자가 되어 버린 이웃과의 막막한 관계를 그려내 현실감을 살렸으나 평범한 전개와 상투화된 결말이 안타까웠다.

마지막까지 주목했던 '해파리의 춤'은 오랜 수련을 짐작하게 하는 능숙한 문장에다 남에게 털어놓기 어려운 부부간 은밀한 고민을 해파리와 미역이라는 알레고리로 엮어낸 솜씨가 돋보였다. 쓰레기 더미에서 자란 해파리의 독침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작가의 의도가 인상적이었으나 부부의 심리적 장애를 이해시켜 줄 인과가 미약했고 윤리의식을 의식한 마무리도 눈에 걸렸다. 자신의 이야기에 집착하다 보면 자의식이 넘쳐 세상을 향한 보편적 인식을 끌어내지 못할 수 있다.

개인사에 머무르는 것보다 남을 향한 시선을 나누는 이야기가 울림의 폭이 크다고 할 때, '7구역'은 단연 두드러졌다. 재개발로 인해 황폐해진 주택지에서, 남는 자와 떠나는 자 사이의 틈새가 목을 죄듯 좁혀오고 있다는 상황 설정부터 흥미로웠다. 불우한 사람들 얘기면서도 지난 시절 곤궁한 가족사에서 오는 뻔한 가난 타령이 아니라는 점도 좋게 읽혔다. 쓰레기와 함께 버려진 반려동물 무리에서 연약한 유기견의 살점을 뜯어먹는 야생 고양이의 이빨이 인간의 탐욕을 연상하게 했고, 익숙하게 남아야 할 근거도 없고 낯설게 떠나야 하는 이유도 모른 채 떠밀리듯 버려지고 마는 '7구역'의 모습이 우리 사회의 축소판 같았다.

고심을 거듭하다가,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이웃이 사는 세상으로 나아가자는 작가의 따뜻한 목소리에 끌려 '7구역'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비대면과 거리 두기를 강요받는 해괴한 현실, 세상이 더 망가지더라도 그렇다고 인간에 대한 신뢰마저 버릴 순 없지 않은가.


 

심사위원 : 정강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