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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H / 조은주

 

  등장인물
이원희: 여, 29세, 전업주부
박재희: 여, 29세, 무직
임승윤: 남, 34세, 원희 남편
김순이: 여, 59세, 원희 시어머니
박철규: 남, 63세, 재희 아버지
한정순: 여, 65세, 재희 어머니


1장

어두운 전경, 달빛만 밝다. 나란히 서있는 아파트 두 동이 보인다. 한쪽 동 원희의 집에 불이 켜진다. 그 위로 들리는 소리.

순이: (소리) 에미야, 거기 상자 건들지 마라, 잘 접어놨으니까. 베란다에 페트병도 버리지 말구. 뭘 하긴 다 쓸 데가 있으니까 그렇지.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하여간 내 건 다아 내 거다.

승윤: (소리) 여보, 내 택배 당신이 뜯었어? 열어보지 말랬잖아, 언박싱이 내 낙인 거 몰라서 그래? 아이, 다 필요해서 산 거야. 어쨌든 내버려둬, 당신은 몰라도 돼. 그거 다 내 거야.

순이: (소리) 에미야, 애들 밥은 챙겼냐? 오늘 저녁은 간단하게 먹자꾸나. 내가 아까 유튜브에 봤더니 꿔바로우가 맛있겠던데? 기름이 넉넉하지?

승윤: (소리) 여보, 내 티셔츠 세탁기에 섞지 마. 따로 빨아서 다림질해야 돼. 소매에 칼주름 알지?

불이 꺼진다. 다른 동 같은 층에 있는 재희의 집에 불이 켜진다.

뉴스: (소리) 일을 하지 않고 취업 교육 등에도 참여하지 않는 청년층인 이른바 니트족으로 인한 경제적 비용이 62조원에 육박한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청년 니트족의 실태를 김상태 기자가 자세히 전하겠습니다.

철규: (소리) 김상태 기자! 우리 집에도 니트가 있는데 왜 우리 집에는 취재하러 안 오나!

정순: (소리) 니트가 아니라 니트족.

철규: (소리) 어이! 김상태 기자! 어디를 헤매고 다니는 거야. 바로 우리 집에 니트가 제 방에 처박혀 있다구!

불이 꺼진다.

원희의 집 발코니에 불이 켜진다. 원희가 자신의 방에 붙어있는 작은 발코니에 서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불이 꺼진다.

재희의 집 발코니에 불이 켜진다. 재희가 자신의 방에 붙어있는 작은 발코니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불이 꺼진다.

다른 날, 원희와 재희의 방 발코니에 불이 켜진다. 두 사람 각각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못 본 척한다. 불이 꺼진다.

또 다른 날, 원희와 재희의 방 발코니에 불이 켜진다.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가 또 눈이 마주치는 두 사람. 이번엔 도저히 못 본 척 할 수가 없다.

재희: 건물이 희한하죠? 이렇게 동간 간격이 가까운 아파트는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원희: 그러게요. 초면에 실례지만, 아니 초면은 아니지만, 어쨌든 실례지만, 여기서 그쪽 얼굴이 너무 잘 보여요.

재희: 난 안 그럴까?

원희: 왜 반말이에요?

재희: 혼잣말이에요.

원희: 그러기엔 너무 잘 들려요.

재희: 큰 혼잣말이에요.

원희: 아, 그래.

재희: 왜 반말이에요?

원희: 혼잣말이에요.

재희: 그러기엔 너무 잘 들리는데.

원희: 그렇긴 하지?

두 사람, 피식 웃는다. 불이 꺼진다.

다른 날 다시 원희와 재희 방 발코니에 불이 켜진다. 이번엔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며 서있다. 밀담을 위해 에어팟을 낀 채로 통화하고 있다. 재희는 등산용 로프를 들고 있고 맞은편에서 원희가 받을 준비 자세를 한 채 서있다.

재희: (던지려다 말고) 근데 이게 될까?

원희: 돼. 충분히 가까워. 이 아파트 이상하잖아. 되고도 남아.

재희: 아니, 이게 사회적, 도의적으로 되는 거냐고.

원희: 안 되지.

재희: 그치?

원희: 어. 근데 심정적으론 돼. 너 방문 걸어 잠그고 안 나가지. 나 거실에 상주하는 시어머니 땜에 못 나가지. 아주 합리적인 아이디어야. 던지면 내가 받을 수 있어.

재희: 왜 네가 받아. 난간에 걸칠 건데. 그쪽에서 고정만 잘하면 돼. 나 초등학교 때 원반던지기 선수였다. 죽이지?

원희: 흐흥, 그래 죽인다 아주.

재희: 비켜 서, 다쳐.

재희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로프를 던져 원희의 발코니 난간에 걸친다.

원희: 굿 샷.

원희가 줄을 난간에 고정한 후 고리를 설치한다. 그러고는 보냉백 하나를 고리에 연결한다.

원희: 자, 역사적인 첫 시승, 탑승, 아니, 뭐라 그래야 돼?

재희: 배송, 전송, 전서구, 몰라 그냥 보내기나 해. 힘 조절, 힘 조절!

원희: 걱정 마.

원희가 보냉백을 힘껏 밀어 보낸다. 긴장된 표정으로 받을 준비를 하고 있던 재희가 보냉백을 무사히 잡자 원희는 조용히 환호한다. 재희가 가방을 안에 들여 열어본다. 시루떡이다.

재희: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웬 떡이냐 이게.

원희: 원래 처음 인사할 때 떡 돌리잖아. (허리 숙여 인사하며) 잘 부탁드립니다.

재희: 아, 예. 잘 먹겠습니다.

마주 보며 웃는 두 사람. 조명 어두워진다.

다시 조명 밝아지면 원희와 재희의 방 발코니 난간에 로프가 연결돼 있다. 발코니에 서있는 두 사람 모두 에어팟을 끼고 있다. 재희는 담배를 태우고, 원희는 꾸러미 하나를 단단히 묶고 있다.

재희: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며) 그 모습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아. 늘 새로워. 짜릿해.

원희: 줄 설치 잘 된 건가? 줄을 맨날 널었다 걷었다 할래니까 번거롭구만?

재희: 맨날 널려 있으면 발각돼. 누가 봐도 희한한 광경이야.

원희, 로프 고리에 자루를 묶어 힘껏 민다. 재희가 미끄러져 온 자루를 받는다.

재희: 나이스 캐치.

재희가 자루를 자기 발코니 안으로 들이고 물건 몇 개를 꺼내본다. 죄다 빈 유리병, 양철통, 각종 플라스틱 케이스 등 쓰레기뿐이다. 이내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자루에 넣어버린다.

원희: (난간에 턱을 괴며 아련하게) 결혼 전에 처음 시댁 갔을 때를 잊을 수가 없어.

재희: (발코니 한쪽으로 자루를 대충 밀어놓으며) 어땠는데.

원희: (어조 의미심장하게 바뀐다) 집이 분명 컸거든? 근데 이상하게 답답한 거야. 일단 살림살이가 겁나게 많아. 두 분이서 사시는데 뭔 집기가 그렇게 많이 필요하냐고. 차 대접한다고 다과상 찾는데 상이 한 오백 개쯤 나와. 그리고 찻잔 찾는다고 찬장문 여니까 그릇이랑 냄비, 후라이팬이 칠백 개쯤 있어. 중대 하나는 너끈히 먹여 살리겠더라. 베란다에는 웬 놈의 유리병, 배달용기, 페트병이 그렇게 많아. 물기 말리는 중이라나. 팬트리 안에는 택배상자가 산처럼 쌓여있어. 근데 그게 다 테이프 뜯어서 착착 접혀서 묶여 있더라. 와 씨 깨끗하고 드러워.

재희, 몸을 흔들며 킬킬대다 담뱃재가 난간 붙잡은 손에 떨어지자 ‘아 뜨거’ 하며 펄쩍 뛴다.

원희: 어머님이 그나마 정리라도 해놓고 사니까 시아버지가 눈감아준 모양이야. 근데 이제 시아버지 눈감으셔서 더 이상 눈감아줄 사람이 없으니 봉인이 풀린 거야. 집이 점점 좁아져! 갈 때마다 무서워! 혼자 돼서 적적하시다고 우리 집에 모셨는데 그때부터 내 집은 내 집이 아니야. 어머님의 거대한 컨테이너야. 그 자루는 어머님 쓰레기를 은밀히 수거하는 위대한 프로젝트의 상징이다. 잘 처분해다오.

재희: 드럽게 거창하네, 쓰레기 보내면서. 지난번에 보낸 남편 물건 그게 유용하더만. 뭐 레고, 피규어, 생필품 다 갖다 당근에 파니까 돈 좀 되더라. 그걸로 내 담배 좀 사고, 이건 네 거.

재희, 보냉백을 고리에 걸어 원희 쪽으로 보낸다. 원희가 받아서 열어보니 맥주, 소주, 와인 등과 담배 몇 보루가 들어있다. 원희, 신난다.

원희: 고맙다. 물건이 얼마 없었을텐데.

재희: 네 거 팔아서 산 건데 뭐가 고마워. 그리고 뭔진 모르겠는데 그중 하나가 돈 좀 되던데.

원희: 내 거냐, 남편 거지. 나 열 받게 할 때마다 티 안 나게 하나씩 빼돌린 거야. 그 사람은 뭘 사는 게 행복이야. 지 거, 내 거, 애들 거, 어머니 거, 맨날 사. 사고 쟁여놓고, 있는지 모르고 또 사고. 어머님은 헌 거, 자식은 새 거, 모자가 뭘 그렇게 쌍으로 모아대냐고. 그 돈 좀 되는 것도 아마 없어졌는지도 모를걸. 장식장이 초만원이라. 그러니까 진정한 애호가가 아니라 수집 흉내만 내는 사이비란 뜻이지. 그 사람은 물건이 아니라 사는 행위 자체를 애호하는 사람이야. 나보다 쇼핑몰 고객센터 직원이랑 더 심도 있게 대화한다니까. 내가 술 먹고 걔랑 사고만 안 쳤어도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결혼을 했겠냐고 젠장.

재희: (턱을 괴며 진심으로) 너도 참 불쌍하다.

원희: 지는.

재희: 응, 그래.

두 사람, 키득거리며 웃는다. 아파트 사이로 비치는 달빛이 밝다.

재희: 너 니트족 알아?

원희: 뭔데 그게. 니트 입고 다니는 애들이야?

재희: 어 그래, 니트도 한번씩 입겠지.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취직을 하지 않으면서 직업훈련도 받지 않으면서 주로 부모에 기생해 생활하면서 있는 욕 없는 욕 다 먹으면서 사는 사람들이야. 한마디로 나란 말이지. 울 아버지 뉴스 보다가 ‘그냥 놀아요 청년 무업자 비율 심각’ 어쩌구 나오니까 아주 신나서 나 들으라고 조롱하시데. 정확히 내 방으로 살을 날렸어. 나는 식구들 생각해서 여태 회사 댕기는데 저건 뭐 잘났다고 회사 때려치냐고. 여기서 저거는 나를 말한다.

원희: 그냥 재계약 안 해줬다고 사실대로 말해.

재희: 그럼 더더욱 사람 취급 못 받겠지.

원희: 재희야……

재희: 난 회사랑 맞출 의향이 있었다고. 회사가 나랑 안 맞는다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아, 됐어. 나도 이제 될 대로 되라야. 한 일 년 방에 처박혀서 게임만 하니까 난 노는 게 체질인 거 같애. 내일 밤에 클랜전에서 포인트나 왕창 딸 거야! (그때 재희 방의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 소리가 들린다) 야, 누구 왔다. 줄 이따 걷자.

원희: 어, 그래.

재희, 급히 발코니에서 사라진다.



2장

원희의 집 거실. 오늘도 순이(59/원희 시모)는 거실 베란다에서 쓰레기를 정리하고 있다. 이미 베란다가 꽉 차서 발 디딜 틈이 없다. 원희가 거실 소파에 앉아 빨래를 개는 틈틈이 순이의 동태를 살핀다. 순이가 상자의 테이프를 다 뜯어 한쪽으로 치워두고 잠시 방으로 들어간다. 원희가 그 틈을 타 재빨리 베란다로 나가서 아직 정리하지 않은 쓰레기를 대충 몇 개 훔쳐 내와 자기 방으로 달린다. 그 사이에 순이가 방에서 노끈과 가위를 가지고 나와 다시 베란다로 나간다. 상자를 개켜 끈으로 묶은 후, 그것들을 가지고 거실로 나와 주방 옆 다용도실 창고로 간다. 그 사이에 다시 원희가 자기 방에서 나와 순이의 소재를 파악한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베란다로 달려가서 쓰레기를 훔쳐내어 방으로 내달린다. 다용도실에서 나온 순이, 다시 베란다로 나가 쓰레기를 마저 정리한다. 그런데 예상보다 일이 빨리 끝나는 듯해 이상하다.

순이: 얘, 여기 있던 박스 네가 치웠니?

원희: (태연하게 방에서 나오며) 아니요, 왜요? (소파에 앉아 다시 빨래를 갠다)

순이: 물건이 비는데? 처음보다 양이 준 거 같아. 이상하네?

원희: 그럴 리가요. 어머님이 치우지 말라셔서 저는 손 댄 적도 없는 걸요.

순이: 그래, 네가 내 말을 거역했을 리가 없지. 내 물건은 다 내 건 줄 이 집에서 누가 모르겠어. 당장은 쓸모없어 보여도 나중에 다 쓸데가 있다니까. 그럴 때 찾으면 꼭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물건을 함부로 버리면 안 돼. 아니 근데 왜 자꾸 창고가 비지? 동우 아범이 가져갔을 리도 없고.

원희: (계속 빨래 개며) 동우 아범은 일 하느라 바쁜데 그걸 왜 가져가겠어요. 그리고 어머님 물건은 거진 쓰레긴데 누가 거들떠나 보겠…… (아차 싶다)

순이가 순식간에 도끼눈을 하고 원희를 노려본다. 원희는 시선을 피한다. 그때 도어락 누르는 소리가 들리자 순이가 반가운 얼굴로 거실로 들어온다. 승윤(34/원희 남편)이 택배 상자 몇 개를 들고 들어온다.

순이: 아범 오니?

승윤: (현관문을 들어서며) 여보, 내 피규어 못 봤어?

원희: 피규어? 장식장에 한 트럭 있잖아.

승윤: 아니, 이번에 시킨 거. 그게 없어졌다니까.

원희: 글쎄, 난 당신이 뭘 시켰는지도 모르는데?

승윤: 집에 도착하는 물건 잘 받아놓는 게 집사람의 도리 아니야? 택배 기사는 벌써 배송 완료했다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어. 배송 완료한 물건이 중간에 샜을 리가 없잖아. 그럼 택배 관리 제대로 못한 당신 탓 아니냐고. 그게 얼마짜린 줄 알아?

승윤이 쏘아대자 옆에서 듣던 순이가 또 도끼눈을 해가지고 원희를 쏘아본다.

원희: 당신 내가 집에서 택배만 받는 줄 알아? 얼마나 할 일이 많은데. 그리고 당신도 그래. 한 두 개여야 잘 받아놓지 너무 많아. 그걸 내가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해.

순이: 아범아, 그게 얼마짜린데 그러니.

승윤: 한정판 50만 원짜리예요.

순이: 뭐? (놀란 토끼눈과 도끼눈을 동시에 해가지고 원희를 쏘아본다) 얘, 그런 걸 분실하면 어떡하니? 넌 애가 왜 하는 일마다 그렇게 여물질 못하니. 이러니 일을 믿고 맡길 수가 있어야지. 역시 내가 이 집에 없으면 안 돼. 아니 이를 어쩔 거야, 50만 원짜리를.

승윤: 가격이 문제가 아니에요. 전 세계 100개 한정판이라구요. 또 살 수도 없어.

원희: (슬픈 표정으로) 동우 아빠. 나도 한정판이야.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어.

승윤: (물끄러미 바라보다) 당신 뭐 잘못 먹었어?

승윤, 험한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방으로 들어간다. 순이는 못 들은 체 주기도문을 중얼중얼 외며 다시 베란다로 나가 쓰레기를 또 정리한다.

원희: 젠장. 지난번에 받은 술 아직 남았나.

순이: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3장

재희의 집. 거실에는 철규(63/재희 부)와 정순(65/재희 모)이 소파에 앉아 과일을 먹으며 티비를 보고 있다. 방에서는 재희가 게임에 열중하고 있다가 잠시 쉬려는지 헤드셋을 벗는다. 갑자기 출출해진 재희는 책상 서랍에 숨겨둔 간식거리가 없나 차례차례 열어본다. 먹을 게 하나도 없다. 거실의 동태에 귀를 기울여 본다. 뉴스 소리가 계속 들린다. 다시 의자로 와서 털썩 앉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너무 배가 고프다. 할 수 없이 나가야 한다. 재희,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헝클어뜨리며 절망한다. 그때 거실에서 정순의 휴대폰이 울린다. 정순이 전화기를 확인하고는 영상통화를 시작한다.

정순: 아드을!

재윤: (소리) 엄마, 저녁은 드셨어요?

정순: 응, 먹었지. 너는?

재윤: (소리) 저희도요. 아버지는.

정순 아버지 옆에 있다. (화면을 철규에게 잠시 돌린다. 철규가 포도알을 입에 넣다가 그 손으로 엉성하게 인사하는 손짓한다. 다시 화면 가져와) 네가 보내준 샤인머스캣 먹는다. 너무 맛있다, 얘. 포도가 어쩜 이렇게 달아?

재윤: (소리) 한 여사 비타민 많이 드시고 피부미인 되시라고.

철규: 내 피부는 껍질이냐?

재윤: (소리) 아유, 아버지 무슨 소리예요. 같이 드시라고 보냈지. 그리고 피부는 다 껍질이에요.

철규가 너털웃음을 짓는다. 정순은 아들이 그저 예뻐 죽는다.

정순: 에미랑 채아 잘 있지?

재윤: (소리) 응. 채아 재운다고 아까 들어갔는데 애 엄마도 같이 자는 모양이야. 이번 주말에 건너갈게요.

정순: 아유, 일하느라 힘든데 뭐하러 꼬박꼬박 와. 주말엔 쉬지.

재윤: (소리) 그 동네에 새로 생긴 한정식집 되게 맛있다던데, 다 같이 가요.

정순: 우리야 늘 좋지. 예약해야겠네. 5명 해. 재흰 어차피 그런 데 끼지도 않잖아.

재윤: (소리) 네, 그럼 주말에 봬요.

통화가 끊긴다. 그때 재희의 방문이 슬쩍 열린다. 철규와 정순, 동시에 그쪽을 쳐다본다. 마치 잠입하는 도둑처럼 재희가 머리부터 삐져나온다. 철규와 정순은 못 본 척 다시 티비로 눈을 돌린다. 재희, 주방으로 가서 컵라면에 물을 부어 가지고 나온다.

정순: ……너도 갈래? 한정식집?

재희,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컵라면을 들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한다.

철규: 말로 해, 인마! 입이 나가떨어졌냐!

재희, 대답 없이 제 방으로 간다.

철규: 박재희! 와서 앉아봐!

재희,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돌려 소파에 앉는다. 정순이 티비를 끈다. 재희를 마주한 두 사람의 모습이 범인을 취조하는 형사1,2 같다.

재희: 3분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라면의 생명은 면발입니다.

철규: 하!

정순: 너 자꾸 엄마아빠 말 안 들을래?

재희 마지막으로 저한테 하신 말씀이 뭔지 기억이 안 납니다. 하도 오래 됐습니다. 2분 40초 남았습니다.

철규: 박재희!

정순: 언제까지 놀고 있을 거야. 취직 안 할 거면 시집이라도 가라 그랬지? 아빠가 선자리 알아봐준다고.

철규: 거긴 이미 날아갔겠지! 그때가 언젠데. 그리고 얘 꼴을 봐. 어디 들이밀래도 못 내밀어. 텄어, 인제.

정순: 계속 그렇게 인생 허비할 거야? 제발 오빠 반만이라도 닮아봐. 탄탄한 직업 있어, 토끼 같은 마누라에 여우 같은 자식 있어, 자기 명의 집 있어, 네 오빠가 세상 부러울 게 뭐 있겠니?

재희: 저도 세상 부러울 거 없습니다. 그리고 토끼와 여우가 바뀌었습니다. 1분 30초 남았습니다.

정순: 맨날 방에 틀어박혀서 뭐해, 너. 첨엔 취직자리 알아보는 줄 알았지. 근데 면접 한번을 안 보러 나가.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야, 사회부적응자처럼?

철규: 나 원 동네 창피해서 어디 가서 말을 못해요. 공부 다 시켜서 키워놨더니 저러고 있다고 어떻게 얘기해.

재희: 저는 이 집에서도 적응을 못합니다. 두 주인 내외께서 안에서부터 살뜰히 밟으시는데 어디 가서 사랑받는 사회인으로 적응하겠습니까. 그리고 오빠는 닮고 싶지 않습니다. 오빠는 오빠고 나는 나입니다. 그걸 인정 못하시면 주인 내외께서는 그렇게 계속 동네 창피하게 사셔야 합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동네 사람들도 자기 살기 바빠서 남의 집 딸이 노는지 안 노는지 관심 1도 없습니다. 주인 내외께서 괜히 세상 사람들이 다 본인들한테 관심 있는 줄 착각하셔서 그런 겁니다. 3분 지났습니다. 컵라면이 죽었습니다.

철규가 두통이 오는 듯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싼다. 정순은 기가 막혀서 이미 할 말을 잃었다.

재희: (컵라면을 들고 일어서서) 그리고 주인 내외 중 한 분이라도 다시 한 번 제 방에 무단으로 들어올 시에는 자물쇠를 달겠습니다. 애초에 제가 방문을 잠근 행위의 의미에 대해 숙고하셨다면 좋았을걸 그러셨습니다.

철규, 쓰러진다. 정순은 힘이 빠진 듯 소파에 풀썩 엎드린다. 재희가 방으로 들어간다.



4장

원희와 재희의 방 발코니. 난간에 로프가 연결돼 있다. 발코니에 서있는 두 사람 모두 에어팟을 끼고 있다. 원희가 순이의 쓰레기 자루를 로프에 묶어 보내면 재희가 받아서 안에 들인다. 재희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원희는 술잔에 술을 따른다.

원희: (술잔을 기울이며) 너 언제 마지막으로 집 밖에 나갔어? 쓰레기 버리러 말고, 담배 사러 말고, 당근 거래 말고.

재희: (골똘히 생각하다) 몰…라?

원희: 쓰레기 말고, 슈퍼 말고, 애들 픽업 말고, 그렇게 하나씩 제하고 나니까 날 위해 외출한 게 언젠지 모르겠어. 맨날 애들 뒤치다꺼리 하고, 시어머니 수발 들고, 남편 밥 차리니까 내가 집사인지, 노비인지, 로봇인지.

재희: 난 노빈데. 우리 엄마아빠가 주인이고, 쇤네는 솔거노비이옵니다.

원희: 솔 뭐? 담배 이름이야?

재희: 넌 참…… 지식이 간소해. 허례허식이 없어.

원희: 알아, 다 알았는데 까먹은 거야. 너도 제왕절개로 애 둘 낳아 봐. 한 번 할 때마다 기억력이 집채만큼 사라져.

재희: 집에 거주하는 노비 있잖아. 근데 요새는 노비도 아닌 거 같애. 노비는 하는 일이 있잖아? 근데 난 이 가정은 물론 사회공동체에서도 하는 일이 1도 없으니까 그냥 불가촉천민쯤 돼.

원희: 나야말로 불가촉천민이야. 여자는 결혼하면 그날부터 바로 최하위 계급이야. 게다가 이 집 사람들 뭔 말이 그리 많은지. 다들 나한테 뭘 그렇게 묻고 시키고 해달래. 이 집에선 다 한편이고, 나만 난민이야. 안 받아주거든.

재희: 나도 그래. 울 엄마, 아빠, 오빠 다 한편이고, 나는 난민에 난파선이야. 갈 데도 없지만 갈 수도 없어요.

원희: 그래서 맨날 거기서 담배만 뻑뻑 피웠구나. 처량한 것.

재희: 지는. 내가 게임하다 쉬는 담배 타이밍에만 기가 막히게 딱 맞춰 서있냐.

원희: 난 처음부터 딱 알아봤어. 저것은 나다.

재희: 저거라니.

원희: 그래도 난 네가 부럽다. 넌 적어도 홀몸이잖아. 난 내 몸뚱이도 애들 거야.

재희: 응, 그건 아무도 나를 거들떠도 안 보기 때문이야. 부모도 부끄러워 외면한 애야, 내가. 이 집에선 번듯한 직업 없으면 사람 취급 못 받아.

원희: 우리 서로 사람 취급 해주자.

재희: 뭔 소리야. 우리 존나 사람이야.

두 사람 마주 보고 킬킬댄다.

원희: 다음 H 접선은?

재희: 음… 모래 새벽 한 시?

원희: 응, 하나만 더 보내자. (짐을 꾸리며) 우리 맨날 여기서만 보네. 나야 시어머니 감시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다지만 넌 왜 방에 처박혀서 안 나가는데.

재희: 그냥 이 꼴 저 꼴 다 싫어. 여기가 제일 안전해. 나는 좋아, 여기서 보는 거. (로프를 퉁퉁 치며) 너 아님 이런 또라이짓을 누구랑 하냐? 호젓한 H에 흐붓한 달빛이 숨이 막힐 지경이다 후아.

원희: 어이구, 메밀꽃 나셨네. 너 그런 거 잘한다, 말 지어내는 거. 여기 이름 붙인 것도 너잖아. (로프를 치며) 이거랑 알파벳 모양이랑 똑같다고.

재희: 그러네. 나 그런 거 잘하네. 그런 거 잘한다고 주인 내외한테 어필하면 치도곤이겠지?

원희: (서글프게) 야, 우리 소울메이트 아니었어? 자꾸 못 알아듣는 말 할래?

재희: 소울은 나눠도 지식은 못 나누는구나. 오호 통재라.

원희: (말 돌린다) 너 하늘휴게소 가봤어?

재희: 휴게소를 굳이 왜 가. 놀러갈 때 감자나 사먹을라고 들르는 데 아냐?

원희: 거기는 휴게소가 양방향 도로 위에 다리처럼 놓여있어서, 중간에 서서 오가는 차들을 볼 수 있대. 거기 가보고 싶어. 차 지나가는 것도 구경하고, 포토존에서 사진도 찍고, 살 것도 많다는데 쇼핑도 실컷 하고. 한번이라도 시어머니, 남편 눈치 안 보고 애들 없이.

재희: 가자, 까짓 거. 거기도 H로 시작하네.

원희: 지 방문도 걸어 잠근 애가 거길 간다고? 네 방 밖으로나 나가.

재희: 난 너와 함께라면 H, I, J, K, LMNOP 다 갈 수 있어!

원희: 어이구, 나 울면 되는 거냐?

재희: 어, 잘 보이겠다, 여기서.

그때 원희네 집 거실에서 순이와 승윤의 소리가 들린다.

순이: (소리) 얘, 에미야, 박스랑 병 모아둔 게 또 없어졌다! 정말 너 아니냐?

승윤: (소리) 동우 엄마! 내 택배 또 어디 갔어! 기사랑 통화까지 했는데! 당신 집안일 어떻게 하는 거야?

원희가 당황스런 얼굴로 재희를 보다가 얼른 짐을 로프에 낑낑대며 묶는다. 이번엔 순이의 쓰레기와 승윤의 택배가 잡다하게 들어 있는 거대한 자루다. 들어올리기도 쉽지 않다. 그때 마침 재희네 집 거실에서도 철규와 정순의 소리가 들려온다.

정순: (소리, 문고리 거칠게 돌리며) 박재희 문 안 열어? 네가 기어이 자물쇠를 달아? 엄마아빠가 너 잡아먹니!

철규: (소리) 야 이 자식아, 여기가 네 집이야? 이거 내 집이야, 30년 상환 주택담보대출! 네가 이렇게 나오면 우리도 생각이 있어!

재희, 난감한 얼굴로 문 쪽을 돌아보고 원희를 다시 본다. 원희가 짐을 로프 고리에 걸려고 애를 쓰고 있다.

재희: 야, 빨리빨리!

재희 뒤에서 문 부수는 소리가 들린다. 뒤에서는 쾅쾅 소리가 들리고, 앞에서는 원희가 무거운 짐을 가지고 아직 기를 쓴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잘 되지 않는다. 원희네 집에서도 순이와 철규의 소리가 계속 들린다.

순이: (소리) 동우 에미야, 듣고 있냐?

승윤: (소리) 여보, 안 나오고 뭐해, 엄마가 부르잖아!

마침내 원희가 짐을 밀어 보내는데, 너무 무거운 탓인지 가다가 중간에 서버렸다. 자루 주둥이 부분에는 순이의 페트병과 승윤의 기다란 피규어 하나가 볼썽사납게 삐져나와 있다. 원희와 재희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쳐다본다. 이윽고 재희의 방문에서 들리던 쾅쾅 소리가 멎고 문이 활짝 열린다. 철규와 정순이 재희 방에 쳐들어온 것과 동시에 원희네 집에서는 순이와 승윤이 원희를 찾아 방에 들어온다.

순이: 아니 얘는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시에미 말이 말 같지 않니?

승윤: 여보 뭐 하냐고, 내 택배 어디다 뒀냐고!

원희가 필사적으로 로프를 가리고 섰는데 그 모습이 하수상하다. 승윤이 원희를 밀치자 기다란 로프가 맞은편 동으로 뱀처럼 뻗어있다. 순이와 승윤, 발코니 바깥으로 몸을 쭉 내밀고 보는데, 곧 한가운데 멈춰선 자루의 물건들을 알아본다. 시선을 더 옮기니 저쪽에 세 명이 보인다. 재희, 철규, 정순이다. 각 집에 세 사람씩 총 여섯 사람의 열두 개의 눈이 사정없이 교차한다.

원희, 재희: (소리) 좆됐다……

순이: 아니, 이게 왜 여기서 나와?

승윤: 당신…… 외줄 타?

철규: 거기 뭡니까!

순이: 뭐라니! 그러는 거기는 뭔데!

정순: 왜 다짜고짜 반말이에요!

순이: 아니, 미안합니다. 근데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난 생전 이런 건 첨 보는데!

철규: 저희도 금시초문입니다. (재희에게) 너 대체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어?

정순: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별 희한한 꼴을 다 본다. 작년에 빙판길에 넘어졌을 때 저승사자 따라 갔어야 했는데!

재희: 뭔 소리야 통뼈라 멀쩡했구만.

정순: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재희: 쟨 내 친구야. 서로 왕래하기 거시기해서 그냥 이걸로 해결 본 거야. 별거 아냐.

철규: 하다하다 별짓거릴 다 한다. 내 집에 이런 요상한 걸 걸어놓고 첨 보는 사람이랑 줄타기를 해! (둘러보다 아까 받은 자루를 발견한다) 이, 이 쓰레기 이거, 다 저 집에서 보낸 거야?

재희: 줄을 왜 타, 그리고 내 친구라니까.

철규: 네가 친구가 어딨어!

재희: 제기랄 아빠는 딸년을 얼마나 병신으로 봤으면 그런 말이 서슴없이 나와!

철규: 이게 어디서 바락바락 대들어, 싫으면 내 집에서 나가!

재희: 아, 드럽게 내 집 내 집 하네, 치사해서 진짜!

철규: 뭐! 치사? 치사아?!

재희: 그만 좀 쥐 잡듯이 잡으라고, 그러니까. 나라고 여기 살고 싶어서 살겠어? 갈 데가 없는 걸 어떡해? 어디 갈 데만 있었으면 진작 나갔어!

정순: 너 무슨 말버릇이야, 엄마아빠한테?

재희: 이 집에선 하는 일 없으면 그냥 없는 사람이야. 자식이 애완동물도 아닌데, 번듯하면 자식이고 안 예쁘면 유기야? 방에 자물쇠까지 달았으면 그 마음이 어떤지 한번쯤 물어볼 만도 하잖아. 말하기 싫은 사람이 나예요, 엄마아빠예요? 생각을 해보세요. 엄마아빠가 나라면 유기견에 유령 취급을 1년을 받으면서 여기 붙어 있고 싶겠냐구요. 그러다 내 얘기 들어주는 사람 겨우 하나 만났는데 그것도 맘에 안 들어? 어차피 내논 자식새끼 누구랑 뭘 타든 뭔 상관이야?

한편 원희네에서는,

승윤: 동우 엄마, 말 좀 해봐, 이게 다 뭐야. 왜 남의 집에 이런 걸 걸어놨어? 저 사람 누구야? 당신 내 택배 저 사람한테 준 거야?

순이: 기가 막혀서 원. 하는 일 없이 놀고먹는 주부가 집안 단속이나 잘할 것이지 이런 걸 걸쳐놓고 내 물건을 빼돌려? 내 집에 도둑이 있었어, 도둑이!

원희: 내 집이에요.

순이: 뭐라고?

원희 내 집이라고요, 친정부모님이 보태줘서 애 아빠랑 반반씩 산 내 집! 이게 왜 어머님 집이에요. 내 집에서 내 맘대로 물건 처분도 못 해요!

순이: 그 물건이 네 거냐? 이게 어디서 시에미한테 대들어!

원희: 대들면 좀 어때서요. 시어머니가 뭐 신이에요? 신도 자꾸 사람 시험하면 믿음이고 나발이고 구독 취소예요. 말 나온 김에 한 말씀 더 하는데, 자꾸 교회 가자고 하지 마세요. 저 지옥 갈 거예요!

순이: (커다란 충격) 마귀가 역사했구나!

원희: ……잘못했어요.

순이: 그치? 잘못했지?

원희: 네. 어린 나이에 사고 쳐서 결혼했다고 여태껏 시댁에서 기 한번 못 펴고 싫은 소리 다 듣고, 남편이 나보다 나이 많고 재력 있다고 그 성질머리 다 받아주고, 나도 공부 계속 했으면 멀쩡히 직장 다니고 엄마 아빠 사랑 받는 외동딸로 살았을 텐데 너무 잘못했어요. 이렇게 살면 안 됐어요.

순이: 그래서, 네가 지금 당장 애들 팽개치고 집이라도 나가겠다는 거야?

원희: 왜 나가요, 내 집인데. 그리고 원래 들락날락 하는 게 집이에요. 맨날 감시 받으면서 맘 편히 나가지도 못하는 게 아니라. 아시겠어요?

다시 재희네,

정순: 재희야, 너 안 그랬어. 어릴 땐 착했다. 재윤이도 속 한번 안 썩이고 번듯하게 잘 컸는데 넌 왜 반항이야? 것도 스물아홉에?

철규: 안 되겠어. 낙하산을 태워서라도 어디 취직을 시켜야지. 애 똑똑하니까 알아서 하겠지 여태 참았는데, 더 이상은 안 돼. 여보, 나 흰머리 부쩍 는 거 봐, 다 이 자식 때문이야.

사이좋은 영장류처럼 흰머리를 골라 뽑아주는 모습에 재희는 기가 찬다.

다시 원희네,

승윤: 동우 엄마, 당신 왜 그래. 이제껏 우리집 화목하고 아무 일 없었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맘에 안 드는 게 있었으면 나한테 말을 하지, 나 당신 남편인데 나 아니면 누가 들어주, (원희가 말을 끊는다)

원희: 닥쳐, 입만 살아가지고. 입 터는 기술은 고객센터 상담하다 늘었나보다? 맨날 물건 사제낄 시간은 있고 와이프한테 먼저 살뜰히 말 걸어줄 시간은 없냐? 처자식 건사를 돈으로만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지리를 지아비로 섬기고 사는 내가 부처다.

순이: 부처라니 기독교 집안에서! (하늘 향해) 주여, 용서해 주시옵소서! (다시 원희에게) 이게 진짜 듣자듣자 하니까?

원희: 예, 계속 듣자듣자 하세요. 그동안 말씀 많이 하셨어요, 어머님.

순이: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온다. 그저 기도만 한다) 주여,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할 때에 주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였사오니, 마귀가 역사한 이 어린 양을 용서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승윤: (이 상황이 다 믿을 수 없다. 저쪽 재희네를 향해 외친다) 거기, 아가씨! 도대체 누구길래 애 엄마를 이렇게 만든 거예요! 내가 얘 스물두 살 때부터 알았는데 아가씨 같은 친구 한 번도 못 봤는데, 누구길래 사람을 이렇게 베려놨냐고!

철규: 베려놓다니! 그쪽 애 엄마가 우리 앨 베려논 거 아냐, 지금! 우리 애 얌전하고 착실하게 회사 다니던 애였는데 그쪽 애 엄마 만나고 이렇게 된 거 아냐? 도대체 그 집구석이 어떻길래 애 엄마가 애는 안 보고 거기 붙어서 우리 애랑 노닥거려!

순이: 뭐라구요? 그 집구석! 이 집구석이 어때서! 당신 그 말 당장 취소 못해!

정순: 아니, 우리 애 아빠보다 연배도 아랜 거 같은데 왜 아까부터 계속 반말이야!

순이: 좋은 말 나가게 생겼어, 지금!

승윤: 여보세요! 왜 저희 어머니한테 그러시는데요, 그 집 자식이 문젠데!

철규: 뭐? 증거 있어, 이 자식아?

승윤: 얻다 대고 자식이야, 내가 할아버지 자식이에요?

철규: 뭐 할아버지?!

그 말에 철규의 뚜껑이 열렸다. 안 그래도 요새 흰머리 때문에 침울한데, 할아버지 소리에 난간을 부여잡고 원희네로 점프할 기세로 으르렁거린다. 정순이 그런 남편을 말린다. 맞은편에서 순이와 승윤도 거세게 맞받아치며 한바탕 싸움이 시작된다.

달 밝은 밤, 양측 동의 두 세대에서 시작된 고성방가에, 위아래 집들의 불이 하나둘 켜지며 발코니에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인다. 처음엔 그들을 만류해보지만 도무지 그칠 기미가 없자, 밤잠 다 깨서 열 받았던 차에 한 덩어리로 뭉쳐 싸운다. 그때 딩동댕동 하는 아파트 안내방송이 울려 퍼지자 싸우던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멈춘다.

방송: 안녕하십니까. 입주민 여러분께 공동생활의 규범에 대해 잠시 안내말씀 드립니다. 첫째, 늦은 시간 소음으로 고통 받는 세대가 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안내는 싸움을 재개한 사람들의 아우성에 묻히고 만다.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번진 두 동의 싸움질에 전 세대의 불이 달빛보다 환하게 켜진다. 그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원희와 재희, 다시 에어팟으로 통화한다.

원희: 아, 아쉽네. 더 세게 밀었어야 됐는데. 내가 문과라 계산을 못해.

재희: 하필 운때 드럽게 못 맞췄네. 쫌만 일찍 할걸.

원희 어쩌지?

재희: 어쩌긴 날라야지. 여기 있으면 불똥 튀니까, 일단 튀고 보자.

원희: H 갈래? 하늘휴게소.

재희: 콜. 아빠 차키 훔쳐갈게. 너 아까 술 마셨으니까 운전은 내가 한다.

가족들은 이미 싸움에 열중하여 두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 틈에 원희와 재희가 슬그머니 현장을 빠져나간다. 그 위로 소리.

원희: (소리) 고마워. 너 없었음 어쩔 뻔했니.

재희: (소리) 말했잖아, 너랑 있으면 H, I, J, K, LMNOP 다 간다고.

원희: (소리) 그래. 난파도 같이 하면 어딘가에 닿겠지.

재희: (소리) 우린 이어져 있어서 이제 난파 안 해, H부터는 쭉.

원희: (소리) 그래 H부터.

재희: (소리) 휴게소 가면 감자나 실컷 먹어야지.

원희: (소리) 그런 데 아니야.

재희: (소리) 그럼 어떤데, 지 까짓 게 휴게소지.

원희: (소리) 가보면 알아.

막.


 

 

  <당선소감>

 

   "애매한 예삿일이었던 삶이 달라졌다"

  요새 잠을 잘 잡니다. 걱정과 불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늘 건강 앱의 수면 그래프를 확인합니다. 걱정과 불안이 없기 때문에 그래프의 막대기는 거의 끊김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막대기가 불연속적으로 끊겨 있었습니다. 그 끊어진 잠의 토막 사이에 기억도 안 나는 심상한 꿈들이 들고 났던 것도 같습니다. 그렇지만 별일은 아닙니다. 그런 날도 있으니까요. 아침으로 샐러드를 막 먹기 시작했을 때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마침 그때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있었는데 거절과 수락 버튼을 헷갈려 거절해버렸습니다. 괜찮습니다. 가끔 그럽니다. 다시 전화하면 됩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당선을 알리는 전화였습니다.

  오늘 아침에 샐러드와 따뜻하게 데운 닭고기를 먹을 때까지의 제 삶은 잠의 토막 사이에 들고 나는 꿈들처럼 심상하고, 기억도 안 날 만큼 평범했습니다. 사소한 이벤트조차 없었습니다. 기대해본 일은 잘 안 됐으며 거의 모든 일은 반전없는 결말로 스러지고, 로또는(몇 번 사보지도 않았지만) 5등도 돼 본 적이 없습니다. 애매한 예삿일. 그게 여태껏 살아온 바의 한줄평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 닭고기가 식어가면서부터는 일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음……이게 무슨 일이지? 당선 소감을 쓰는 지금도 어리둥절합니다. 그냥 저는 인생을 거진 방구석에 틀어박혀 책만 읽으며 보냅니다. 어제도 좋아하는 소설가의 최근작을 읽으며, 아 이런 사람이 작가고 예술가지 나는 안 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화가 오지 않는 것에 실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당선이 되었다 하니 어안이 벙벙합니다. 내가 왜? 어째서?

  특별히 감사합니다. 저를 책과 사랑으로 키워주신 어머니, 신춘문예 응모를 권유하신 연출가 정범철 선생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성선희 선생님, 정다운 희곡창작수업 학우님들, 그리고 저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 덕분에 제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어요.

  작가가 되는 것보다 작가로 사는 게 더 힘들다고 합니다. 꾸준히 글을 쓰며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 한번의 당선보다 더 힘들다는 말이겠지요. 앞으로 어떻게 작가로 살아야 할지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부터는 제 수면 막대기가 끊기는 걸까요? 전화가 오지 않는 동안 사실 한 가지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뭐가 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쓰는 걸 즐기자. 즐기는 사람은 못 이긴다고 했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쓰겠다는 각오는 채 마련하지도 못했지만 즐기며 쓰겠습니다. 사실 즐겁습니다.

 

● 1983년 인천 출생 
● 단국대학교 어문학부 국어국문학 졸업


 

  <심사평>

 

  

  "평범한 존재들의 저항 생기 있게 구축하는 솜씨 돋보여"

  응모편수가 75편으로 예년에 비해 많이 줄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공연 현장과 대학의 교육 현장이 상당부분 위축되고 있으며 희곡 장르의 창작 역시 여기에 영향을 받고 있지 않나 짐작해 본다. 올해 응모작들 속에서 고립의 문제는 어느 때보다 부각되었다. 1인 가구의 현실, 청년 실업, 고독사, 신뢰가 깨진 사회, 직장 내 경쟁관계, 가족 관계 속의 소외 등이 문제적으로 다뤄졌다. 고립 속에서 실그물처럼 형성되는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희곡들도 눈에 띄었다.

  당선 후보로 논의된 작품들은 '정기구독', '별똥별, 날아오르다', 'H' 세 편이었다. '정기구독'은 사물인터넷과 구독경제의 일상화 속에서 디지털 데이터로 수렴되어 가는 우리 삶의 양상을 1인 가구, 청년실업 등의 사회 문제와 결합한 작품이다. 희극적 톤을 유지하면서 극을 발전시키는 정교한 변주가 돋보였다. 인간 사이의 대화가 극도로 축소되고 기계와의 소통을 통해 일상을 영위해가는 삶의 양식적 변화를 극적 형식 안으로 들여왔으며 숫자로 치환되어 가는 존재의 위기를 보여준다. 주제의 동시대성 뿐만 아니라 안정된 대화, 유머러스한 상황 구성 능력으로 심사위원들의 큰 지지를 받았으나 지나친 반복과 인용, 극적 행동의 제약 등이 무대 표현의 걸림돌로 지적되었다.

  '별똥별, 날아오르다'는 오래된 다가구 주택의 다섯 가구 인물들을 상호 교차시키는 가운데 보육원에서 성장한 청년과 독거노인의 만남을 그렸다. 고시원을 나와 자립의 새로운 단계에 선 청년과 외톨이 노인은 서서히 대화의 물꼬를 튼다. 소박한 무대를 배경으로 여러 인물군을 구현한 것이 장점으로 꼽혔지만 극적 상황이 분절적이고 제목에서 제시하고자 한 의미가 극 전개 과정을 통해 충분히 구현되지 못한 면이 있었다.

  'H'는 사회뿐만 아니라 가정에서까지 소외된 두 주인공이 함께 탈출을 꿈꾸면서 벌어지는 일종의 스노우볼 코미디다. 주제면의 새로움보다는 거기에 대항하는 평범한 존재들의 저항을 희극적 문법에 의지해 생기 있게 구축해나간 솜씨가 돋보였다.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전업주부, 계약직과 실업 상태를 오가는 젊은 여성은 가느다란 로프에 의지하여 서로를 잇고 연대를 발전시킨다. 작가는 물건 혹은 사용가치로 대체되는 인간관계를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극작법 안으로 슬그머니 끌어들여 명랑한 희극을 만들었다.

  장단점이 분명한 세 작품 중 'H'를 당선작으로 올린다. 작가의 거침없는 언어 능력과 상황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과감함이 장막 희곡 창작에도 힘이 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 노이정, 문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