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당선작>

 

  나의 우주에게(Dear My Universe) / 김마딘

 

  ■등장인물 

유성  남자. 35세. 다소 건조한 언어 습관을 지니고 있다. 
해미  여자. 35세. 
선배   
천문학도   
친구 
*선배, 천문학도, 친구는 일인 다역이 가능하다.

  무대

해미가 사는 지구, 유성이 모험하는 우주. 특정 공간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해미의 지구와 유성의 우주가 적절히 섞여야 한다.

  시간

가까운 미래.

  1장

  갤러리.

  해미, 꼿꼿한 자세로 손을 배꼽 근처에 모으고 서 있다.

  선배가 그런 해미를 지켜보고 있다.

  해미와 선배는 단정한 근무복 차림이다.

해미 안녕하십니까!

선배 음….

  우주의 어딘가를 모험하고 있는 유성, 등장한다.

선배 다시.

  유성, 허공에 드래그1)한다.

유성 해미.

해미 안녕하십니까.

선배 잘 좀 해봐.

해미 안녕하십니까.

유성 해미야.

해미 어! 잠깐만….

선배 해미씨! 정신! 잠깐은 무슨.

해미 아, 네.

유성 알았어. (드래그하며) 연결 종료.

선배 자세 무너진다.

유성 (드래그하며) 녹음.

해미 죄송합니다.

유성 바쁜가 보네.

선배 허리! 손은 배꼽 아래로 내리지 말고.

해미 네.

유성 열심히 산다는 증거겠지?

선배 이렇게 인사까지 교육해 주는 선배 없다.

유성 편할 때 연락해….

해미 감사합니다.

선배 기본적으로 예의가 중요한 거 알지? 거기다 우린 보러 오는 사람들 수준이 있잖아.

유성 우린 어제도 연락하고….

해미 아… 네.

선배 근데 혹시….

유성 어제의 어제도 연락하고….

선배 남자친구 있어?

해미 어….

유성 목소리는 선명한데, 요샌 네 얼굴이 잘 안 그려져. 너도 그래?

선배 그냥 궁금해서.

해미 …있습니다.

유성 갑자기 너무 감상에 젖었나? 결론은! 연락해. (드래그하며) 전송.

선배 (사이) 그래? 아쉽네…. 음… 잠깐 쉬자.

해미 네!

  선배, 퇴장한다.

  해미, 허공에 드래그한다.

해미 유성.

유성 지금 막 녹음 남겼는데.

해미 아, 그래? 정신이 없었어….

유성 괜찮아.

해미 … 갤러리에 일 구했어!

유성 갤러리?

해미 응, 그냥 작게 전시….

유성 전시?

해미 아… 응.

유성 곧 네 그림도 걸리겠네.

해미 어… 오늘은 뭐 했어?

유성 나야 매일 똑같지.

해미 그니까 뭐 하셨냐구요.

유성 일지 쓰고, 밥 먹고, 간간이 멈춰 있을 땐 관측도 하고.

해미 목적지는?

유성 아직. 목적지를 설정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구.

해미 너무… 막연한 거 아니야?

유성 새삼스럽게 왜 이래.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해미 춥진 않고?

유성 알잖아, 추울 일이 없어. 지금도 셔츠 하나 입은 게 끝이야.

해미 여긴 추운데. 뭔 우주선이 그리 좋냐!

유성 그러게.

  사이.

해미 진짜, 갑자기, 그냥 궁금한 건데, 찾고 있는 그거… 얼마짜리야?

유성 응?

해미 가치가 있는 거냐고.

  사이.

유성 … 이해 안 되지?

해미 아니야, 그래도 네 일인데.

유성 솔직히 말해도 돼.

해미 … 진짜 솔직히 말한다?

유성 나도 그걸 원해.

해미 모래 찾으러 육년째 돌아다니는 거… 이해 안 돼.

유성 나도 어쩔 땐 그래.

해미 이제 좀 힘들지?

유성 지금도 설레.

해미 아, 설레?

유성 말했잖아. 처음 보는 모래였어, 성분이 뭔지 전혀 알 수도 없고 지구에선 본 적도 없는. 사실 ‘모래’라는 단어를 쓰는 것도 미안할 정도야. 그게 모래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거든.

해미 쓸모없이 생겼나 보네?

사이.

유성 … 화났어?

해미 아니야…. 뉴스에서 널 종종 봐, 물론 옛날 모습이지만. ‘우주로 떠난 젊은 남자’라는 타이틀이 계속 올라와. 떠난 지 육년이 넘었는데도 사람들은 널 추앙해 주더라. 너, 다른 일 해볼 생각은 없어? 이 정도 관심이면 네가 콧노래만 불러도 빌보드 일등일 거야.

유성 나 노래 못해.

해미 말이 그렇단 거지. 어쨌든… 좀 맹목적인 느낌이야. 사실 사람들은 네가 뭘 하는지 제대로 모르잖아. 네가 고작 모래 찾으러 갔다는 걸 알아도 사람들이 좋아할까?

유성 우주의 구성단위를 연구하는 것도 내가 할 일 중 하나야.

해미 어째 부업이 더 그럴싸해 보인다.

  사이.

유성 무슨 얘기 해볼까?

해미 음….

유성 … 할 말이 점점 없어지네.

해미 할 말이 남아 있는 게 이상하지.

유성 그건 그래.

해미 아, 동창회를 갔었는데, 이제 막 결혼한 애들이 자기 남편 지방으로 출장 갔다고 징징거릴 때마다 웃음밖에 안 나오더라.

유성 가소로웠겠네.

사이.

해미 넌 왜 날 선택한 거야?

유성 응?

해미 한 번은 물어보고 싶었어.

유성 오늘은 질문들이… 평소랑 다른 거 같네.

해미 대답해 줘. 한 명만 선택할 수 있었잖아.

유성 그러니까 널 선택했지.

해미 어머니도 계시고, 아버지도 계시고, 동생도 있는데?

유성 가족보단 너랑 정신을 연결하는 게 좋을 것 같단 결론이 떨어졌거든.

해미 고마워해야 할 포인트인가?

유성 내가 고마워해야지.

해미 그럼 너희들 말로, 그런 결론을 도출하도록 만든 전제는 뭔데?

유성 에이, 그래도 넌 내 여자친군데….

해미 솔직하게 말하세요, 아저씨.

유성 … 오해하지 말고 들어.

해미 우리 사이에 오해는 무슨 오해야.

유성 넌 가족이 아니니까.

  사이.

유성 너 지금 오해했지?

해미 어… 아니.

유성 목소리가 딱 오해한 목소린데.

해미 … 무슨 뜻이야?

유성 말 그대로. 엄마, 아빠, 동생은 우주가 반으로 쪼개져도 가족이잖아.

해미 ….

유성 해미야?

해미 난?

유성 넌 언제든 남이 될 수도 있잖아.

해미 ….

유성 섭섭해?

해미 그럴 리가.

유성 다행이네.

해미 가봐야겠다. 쉬는 시간 끝났어.

유성 쉬는 시간이 신기하네. 누가 보면 내 얘기 끝나길 기다린 줄 알겠다.

해미 ….

유성 해미야, 걱정하지 마.

해미 (드래그하며) 종료.

  해미, 퇴장한다.

  침묵.

  유성, 허공에 드래그한다.

유성 녹음.

지금 너무 멀리 와 있어.

지구는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야.

그런데도 한 번씩 잠에서 깨. 이상한 중력이 느껴질 때가 있거든. 지구가 날 부르고 있다고 생각할 때도 있어.

그건 아마 너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기도 하고.

말도 안 되지?

그럴 때마다 창밖으로 보이는 별들에 집중하는 편이야.

좀 낯간지럽네. 그냥… 그렇다고.

(드래그하며) 전송.

유성, 퇴장한다.

  2장

  거리.

  저녁의 가로등 불빛 아래로 해미, 등장한다.

  천문학도, 해미의 반대편에서 등장한다.

천문학도 손… 해미씨?

해미 … 아, 네.

천문학도 전 그… 학생인데….

해미 그래서요?

천문학도 몇 가지 질문을 좀 드릴 수 있나 해서요.

해미 아… 조상님들 잘 지내십니다.

천문학도 아니요! 아니요! 한유성 박사님, 아시죠?

  사이.

해미 아니요. 모르는데요.

천문학도 아, 모르시는구나.

해미 네, 수고하세요.

천문학도 티비에 그렇게 많이 나오셨는데 모르시는구나.

사이.

천문학도 간단한 질문입니다.

해미 네?

천문학도 통신이 가능한 거죠?

해미 무슨….

천문학도 박사님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가족분들도 답을 안 주시고.

해미 어… 제가 좀 바빠서….

천문학도 그래도 백방으로 뛰어다니면서 정보를 긁어 모았습니다.

해미 이해 안 되는 소리만 늘어놓으시네요.

천문학도 어떤 여자가 한유성 박사님과 이어져 있다는 소식까지 들었고요.

해미 ….

천문학도 정말 다른 게 아니고, 인터뷰만요. 궁금한 게 많습니다.

해미 왜 사람들이 걔한테 집착하는 거예요?

천문학도 상상하고 인식할 수 있는 범위, 그 밖에 있는 분이잖아요. 홀몸으로 우주에 나간다는 게 쉬운 선택도 아니고.

해미 유성이가 정확히 뭘 하는지 알아요?

천문학도 그분의 세계를 어떻게 저 같은 학생이 이해할 수 있겠어요.

해미 생각보다 초라할걸요.

천문학도 그럴 리가요. 지구보다 더 큰 가치가 있으니까 떠나셨겠죠.

해미 (사이) 인터뷰, 해봅시다. 도대체 뭘 상상하는진 모르겠지만.

천문학도 정말요? 저 앞 카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알려주세요,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

  천문학도, 퇴장한다.

  해미, 허공에 드래그한다.

해미 녹음 수신… 삭제.

암전.

  3장

  한적한 카페.

  해미와 천문학도, 마주 보고 앉아있다.
  
천문학도 일단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해미 아, 네.

  사이.

천문학도 전 한유성 박사님을 존경합니다.

해미 아… 예. 그건 잘 알았어요.

천문학도 아, 그렇군요.

해미 왜 그런 거에 목숨을 걸어요?

천문학도 네?

해미 뭐… 우주라든가, 별이라든가.

천문학도 멋지잖아요.

해미 아… 멋.

천문학도 무슨 일을 하시죠?

해미 저요? 그림 관련된….

천문학도 아, 예술을 하시는군요.

해미 네, 뭐, 예, 엇비슷하게.

천문학도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제가 공부하는 분야도.

해미 언제까지 거기에 목숨 걸 수는 없지 않을까요? 일도 좀 하고, 돈도 좀 벌어야 할 텐데.

천문학도 아… 조언 새겨듣겠습니다. 그래서! 한유성 박사님은….

해미 새겨들은 거 맞죠?

천문학도 네. 박사님은 어쩌다가 우주로 나가게 되셨죠?

해미 할 일이 없었나 봐요.

천문학도 어… 그러면 한유성 박사님은 왜 지구를 떠나신 거죠? 일종의 문제의식이라던가….

해미 말만 바뀌었지, 방금 하셨던 질문이랑 뭐가 다르죠?

천문학도 ….

해미 진짜 유성이를 존경해요?

천문학도 네.

해미 걔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셨죠?

천문학도 논문은 많이 읽어 봤습니다.

해미 제가 진짜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걔는 일상생활이 안 되는 애예요. 현실감각이 없는 애라고요.

천문학도 예술을 하신다 했죠?

해미 왜요?

천문학도 전 잘 몰라서요.

해미 아.

천문학도 그니까… 제 눈엔 그쪽도 썩 현실감 있어 보이진 않아요.

해미 ….

천문학도 그냥 각자 집중하는 게 다른 거죠.

해미 … 아, 그렇죠.

천문학도 부탁합니다.

  사이.

  해미, 허공에 드래그한다.

해미 유성.

  유성, 등장한다.

천문학도 설마 연락을 취하신 건가요?

유성 응.

해미 어, 나 지금 어떤 학생을 만났어. 너랑 비슷한 거 공부한다는데… 좀 이상해.

유성 괜찮겠어?

천문학도 박사님, 저는!

해미 그래봤자 들리지도 않아요. 제가 무슨 전화기도 아니고.

천문학도 아.

유성 사람들이 아는 거 싫어했잖아.

해미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너 팬이래. 원래 너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 좀 특이하잖아.

유성 칭찬으로 들을게.

해미 뭐 물어볼까요?

천문학도 어… 잠시만요. 왜 우주에 나가셨는지요!

해미 거기까지 간 이유 좀 알려 달래.

유성 고등학생이야?

해미 그건 왜?

유성 어렵게 대답해도 돼?

해미 어려 보이진 않는데….

천문학도 저 대학교 일학년….

유성 아, 그래?

해미 그래도 쉽게. 전달하기 힘들어.

천문학도 뭐라 하십니까!

해미 기다려봐요.

천문학도 알겠습니다….

유성 어… 모든 별엔 중력이 존재해.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단 거야. 하지만 왜 서로 부딪치지 않는 걸까, 생각해 본 적 있어?

해미 아니.

유성 그보다 더한 각자만의 움직임이 있어서야. 서로 간의 끌림마저 덮어버리는 회전운동처럼. 별들은 자기만의 궤도가 있고, 그걸 서로가 알고, 덕분에 각자의 영역을 지켜낼 수 있는 거지.

해미 음… 그럼 절대 안 부딪치는 거야?

유성 꼭 그런 건 아닌데… 좀 어렵나?

해미 거리를 둔다는 거잖아.

유성 뭐… 그치. 나름 신이 만든 초기 세팅 값이랄까?

해미 신도 믿어?

유성 아직 못 밝혀낸 게 산더미라 믿진 않아도 부정할 순 없지.

해미 예상 밖이네.

유성 ‘회전운동’이라는 전제가 무너지면 그 아래 딸린 모든 게 무너지잖아.

해미 근데?

유성 신기하더라.

해미 응?

유성 회전운동을 멈추고 서로를 끌어당기다가 충돌해버린 별이 나타났거든.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내가 말한 모래가 생겨났는데, 이게 지금 온 우주를 떠돌고 있어. 난 그걸 찾고 싶고.

  사이.

해미 사명감이라든가 명예라든가… 그런 건….

유성 그런 게 의미가 있나? 고밀도의 기체 속에서 나타난 모래 알갱이들, 아름답지 않아?

천문학도 어떤 답이….

해미 우주에서 가장 사소하고 쓸모없는 걸 찾으러 갔답니다.

천문학도 오! 시적인 답변이군요.

유성 전달했어?

해미 ….

천문학도 그러면 두 번째 질문! 박사님은 언제쯤 돌아오시나요?

  사이.

유성 해미야?

천문학도 저기….

해미 아, 네.

천문학도 언제쯤 돌아오시는지….

해미 너, 언제쯤 와?

유성 아마….

해미 아냐! 말하지 마.

유성 … 알겠어.

천문학도 언제쯤….

  사이.

해미 … 오긴 와?

유성 변덕은 여전하네. 말할까, 말하지 말까?

해미 어….

유성 … 안 돌아갈 수도 있어.

  사이.

천문학도 저기요?

유성 물론 돌아갈 수도 있겠지.

해미 너 지금 그게….

유성 확정은 아니야. 모든 걸 확신할 순 없으니까.

해미 몇 퍼센트 가능성이 있다! 그런 것도 없어?

유성 퍼센트를 너무 믿지 마. 확률은 항상 오류를 범해. 단지 나한테 두 가지 보기가 있음을 알려주는 거야. 돌아가는 것과 돌아가지 않는 것.

해미 ….

천문학도 혹시 무슨 말씀을….

해미 왜 그런 질문을 해요? 질문을 준비라도 해오시던가요!

유성 대답이 됐어?

천문학도 아… 죄송합니다.

해미 죄송하면 앞으로 찾아오지 마세요.

유성 옆에 계신 분한테도 좋은 말 많이 해줘.

천문학도 그럼 연락처라도….

유성 미래엔 나 대신 여기에 있을 수도 있잖아.

해미 본인이 우주로 가든 뭘 하든, 전 관심 없어요. 근데… 본인 욕심 채우자고 고통스럽게 기다리는 사람 파헤치고 다니진 마세요. 그거 되게… 이기적인 거잖아요.

천문학도 … 네. 죄송했습니다.

천문학도, 퇴장한다.

  사이.

유성 왜 말이 없어?

해미 이제 점점 짜증이 나.

유성 화났어?

해미 연결을 아예 끊어버리고 싶어.

유성 (사이) 나도 힘들어.

해미 퍽도 그러시겠어요, 박사님.

유성 그거 알아? 지구에 있는 인간보다, 나뭇잎보다, 사막의 모래보다 별의 숫자가 더 많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해미 어쩌라는 건데? 신기하다고 놀라줄까?

유성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단 거야.

해미 넌 희소성도 없는 별들 사이에서 그것보다 더 쓸모없는 알갱이를 찾는 거네?

유성 … 그래, 맞아.

해미 누가 너한테 그런 거 찾으라디? 누가 너 위인전에 올려준대?

유성 그런 건 바란 적 없어…. 그냥 살면서 하나쯤 이루고 싶은 게 있는 거잖아.

해미 유성아, 현실적으로 생각해.

유성 충분히 현실적이야.

해미 난 안중에도 없어?

유성 네가 제일 소중하지.

해미 거짓말 작작해.

  사이.

유성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너한테 상처 주려는 건 아니야. 잠시… 각자가 지나온 궤적을 돌아보잔 뜻이야.

해미 기다려.

유성 (드래그하며) 연결 종료.

  유성, 퇴장한다.

해미 유성 아, 유성아.

  4장

  공항.

  친구, 커다란 배낭을 메고 등장한다.

친구 야!

해미 어!

사이.

친구 뭔 일이야?

해미 응?

친구 거울 좀 봐라, 네 표정이 어떤지.

해미 아냐! 오늘은 너만 신경 써.

친구 야, 가방 가지고 타는 건 안 되냐? 좀 불안한데.

해미 비행기 처음 타보냐?

친구 어….

해미 사람들은 네 가방에 관심도 없어.

친구 하루이틀 가는 거면 말을 안 하겠는데….

해미 걱정 마시라고요!

친구 …그래도 진짜 고맙다. 와줄 줄은 몰랐어.

해미 아니야. 너 미친 건 내가 예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친구 그래, 나 미쳤다.

해미 어디로 가?

친구 태국부터 시작하려고.

해미 최종 목적지가 어디야?

친구 안 정했어. 그냥 세계를 돌 거야.

해미 밥은 먹었니?

친구 아니, 안 넘어갈 거 같아.

해미 선경이는?

친구 회사에 있겠지.

해미 놔두고 가도 되겠어?

친구 방법 있냐?

해미 욕 엄청 먹었을 거 같은데.

친구 주위에서 무진장 욕하더라, 멀쩡한 와이프를 집에 혼자 두고 어딜 쏘다니냐면서.

해미 틀린 말도 아니네. 너도 나이가 이제 서른다섯이야.

친구 해미야, 너한테까지 잔소리 들으려고 부른 거 아니야.

  사이.

친구 난 가야겠어. 진짜 마지막 기회 같아.

해미 가든지 말든지.

친구 그래서… 너한테 부탁이 있어.

해미 뭔데?

친구 선경이 좀 챙겨줘.

해미 너 진짜 미친놈이니?

친구 이해가 안 되지? 그래도 너희 둘만 한 친구가 없잖아.

해미 내 주변엔 정상이 없는 거 같아.

친구 결혼하고 알았어, 내가 집구석에 붙어 있을 수 없다는 걸.

해미 와… 말하는 거 진짜 이기적이다.

친구 어제 걔도 나한테 그러더라. 자기도 사업하면서 나까지 신경 쓰긴 힘들 거 같대.

해미 그걸 믿어? 옆에서 도와줄 생각은 안 해봤어?

친구 해미야, 난 일상생활이 안 될 정도야. 가본 적도 없는 외국의 도시 풍경이 꿈에도 나온다니까.

해미 가관이다, 정말.

친구 가족을 버리는 건 아니야.

해미 너 그거 합리화다.

친구 선경이랑 밤새 술을 같이 마셨어. 그때 알겠더라, 내가 걔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해미 네 말에서 논리라곤 찾아볼 수가 없네.

친구 서로 바라보는 방향이 달라. 난 와이프를 그리워하고 걔도 날 그리워하고, 차라리 그게 제일 아름다운 형태 같아.

해미 포기하는 것도 있어야지.

친구 왜?

  사이.

해미 그건… 보고 싶지는 않겠어?

친구 보고 싶겠지. 근데… 난 알아. 그런 순간적인 마음에 휩쓸려서 얼굴 봐봤자… 할 말이 없어.

해미 그게 와이프 사랑한다는 놈이 할 소리냐.

친구 야, 원래 그럴수록 할 말이 없는 거야.

해미 진짜 너희 전부 다 이해할 수가 없다.

친구 이해를 바라진 않아. 그래서… 내 부탁은?

해미 하… 생각은 해볼게. 네가 내 남편이었으면 지구 반대편까지 가서라도 끌고 왔을 거야.

친구 다행히도 아니네.

  친구, 주먹을 내민다.

친구 안 쳐? 팔 아파.

해미 나쁜 새끼.

  해미, 주먹을 툭, 가져다 댄다.

친구 뭐라 생각해도 좋아. 나… 간다.

  친구, 퇴장한다.

  긴 침묵.

  해미, 허공에 드래그한다.

해미 유성.

  유성, 등장한다.

유성 어떤 생각을 했어?

해미 떠나지 않는 내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내 주위를 떠나는 사람들이 이상한 건지 고민하게 되더라.

유성 둘 다 이상하진 않지.

해미 넌 지구에서 얼마만큼 떨어져 있어?

유성 멀리.

해미 정확히 얼마만큼.

유성 계속 이동 중이야. 너랑 말하고 있는 지금도 점점 멀어지고 있어.

해미 네가 만약 다른 세상에 있는 거라면, 나는 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유성 ….

해미 넌 있는 거야?

  사이.

유성 “넌 있는 거야?” 뭔가 말이 어렵게 들리네.

해미 돌려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유성 지금 나랑 너랑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잖아. 이보다 더한 증명이 필요한가?

해미 난 네 목소리만 듣잖아. 이젠 네가 있는지 없는지도 헷갈려. 어떻게 생각해?

유성 어느 정도 공감해.

해미 이해하려고 노력도 해봤어. 근데 내가 널 무슨 수로 이해할 수 있을까. 넌 항상 참으라는 듯이 말하잖아. 우주의 원리, 별의 규칙 같은 이상한 소리나 늘어놓고. 기억은 나? 어떤 생각이 드냐면, 넌 이제 나랑 다른 세상에 사는 존재 같아.

유성 … 그런 결론에 도달한 이유가 뭘까?

해미 뉴스나 주변 사람들 말로는, 이젠 네가 탄 우주선의 속도와 위치를 가늠할 수가 없대. 솔직히 어떤 면에선 신기하고 위대하다고도 느꼈어. 근데 이런 생각은 하게 되더라. ‘그럼 넌 다른 시공간에 있다는 건가?’ ‘하루에도 몇십 광년을 이동하는 네가, 나랑 똑같은 시간 개념을 공유한다고 말할 수 있나?’ 좀… 무서워.

  사이.

유성 의외다. 지금 네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한 가설이네. 그래도 주변을 너무 믿진 마. 걔들도 잘 몰라. 본인들의 상상 밖이라고 해서 다른 세상이니 뭐니 소설 쓰는 거? 그냥 우스워. 결과만 생각해. 지금 너랑 나랑 정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거.

해미 내가 너랑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유성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마.

해미 그래! 너 말 잘했다. … 너 지금 무섭지?

사이.

해미 혹시라도 못 돌아올까 봐.

유성 재밌네.

해미 정말 미안한데… 이제 힘들어.

유성 넌 다 잘하는 애잖아. 능력도 있고.

해미 봐. 넌 나에 대해 아는 게 없어. 현실이 어떤지도 모르고.

유성 나도 가끔 현실이 버거울 때가 있어, 너만큼.

  사이.

유성 그래, 네가 보기엔 내가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예전의 지식으론 나처럼 우주를 여행하는 게 불가능하니까. 원래 인간이란 거 자체가 본인이 이해할 수 없으면 틀리거나 다른 존재인 걸로 규정해버리잖아.

해미 누가 그런 거 가르쳐 달래?

유성 하지만 언제까지 예전에 멈춰 있을 순 없지 않겠어?

해미 그래서 네가 뭘 찾았는데. 뭐가 보이긴 해?

유성 사실 답은 안 보여. 여긴 너무 넓고 공허하거든. 그런 막막함을 안고서라도 내가 할 일은, 뭔가를 선택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겠지. 그리고 그 앞에 네가 있을지 내가 찾던 모래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

해미 (드래그하며) 연결 종료.

  해미, 퇴장한다.

유성 그래도 딱 하나 믿어줬으면 하는 건, 내 모든 선택의 대전제는 언제나 널 포함하고 있다는 거야.

암전.

  5장

  일 년 후. 다시 갤러리.

  해미와 선배가 마주하고 있다.

선배 그땐… 미안했다. 원래 예절을 교육한다는 게….

해미 아, 이해합니다! 예전엔 저도 답답하게 일했는데요, 뭐.

선배 뭐… 그래. 그림은 원래 계속 그렸던 거야?

해미 아, 네. 여기서 제 그림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선배 갑자기 그만두더니… 이렇게 돌아왔네. 일년 만에. 사람 인연이 참….

  유성, 등장한다.

선배 그림… 아름답더라. 우주를 가본 사람 같달까?

해미 아… 감사합니다.

선배 여기서만 전시하긴 아까워.

해미 여기도 과분해요.

선배 작가님이라 불러야 하나?

해미 부담스럽습니다. 우연히 좋은 기회를 잡은 거뿐인데요, 뭐.

선배 (사이) 괜찮으면… 오늘 밥이라도 먹을래?

  해미, 유성을 보고 얼어붙는다.

선배 싫어?

해미 (사이) 사람이란 건 참 안 바뀌나 봐요.

선배 나쁜 뜻은 아니었는데.

해미 먹어요, 밥.

선배 진짜? 맛있는 거 먹자. 좋은 곳으로 알아 놓을게.

  선배, 재빨리 퇴장한다.

  유성, 허공에 드래그한다.

유성 해미야.

  긴 사이.

유성 내가 원하던 반응이 아닌데? 방금 나간 분은… 새로운 인연인가?

해미 … 손은 왜 움직이는 거야?

유성 아직은 이게 익숙하달까? 아니! 반응이 어떻게 이래? 뭔가 드라마틱한 반응을 원했는데.

해미 그니까… 나도 내가 왜 이럴까 생각 중이야. 차분해지네.

유성 사실 나도… 엄청 고요해. 아직도 우주에 있는 것 같아.

  사이.

유성 그래서 결론은! 잘 지냈어?

  사이.

해미 내가 연결을 왜 끊었냐면!

유성 괜찮아. 이해해.

해미 (사이) 돌아왔네.

유성 찾았거든.

해미 아, 그… 모래?

유성 응.

해미 어땠어?

유성 반가웠지.

해미 돌아왔단 소식은 한 번도 못 들었는데, 뉴스에서도.

유성 몰래 왔어. 모래는 찾았는데, 모래의 의미를 못 찾았거든. 날 기다려준 사람들이 이해할 만한 의미.

해미 힘들겠네.

유성 힘들긴. 난 오히려 좋아.

해미 왜?

유성 신비로움.

해미 응?

유성 의미를 못 찾아야 내가 다시 우주로 가지.

해미 의미를 찾는 과정이 너한텐 의미인 건가?

유성 신비로움, 그 자체가 의미인 거지.

해미 참… 끝까지 이해를 못 하겠다. 그러면 거기 계속 있지, 왜 왔어?

유성 널 보러, 마지막으로.

사이.

유성 지금 상황에 어울리는지는 모르겠는데,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해미 나도 마찬가지야.

유성 이젠 네 근처를 맴돌지 않을 생각이야. 더 멀리 가게.

해미 나도 널 끌어들이지 않을 생각이야.

유성 여기선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우주가 편하게 느껴질 정도야. 중력도 아직 적응이 안 돼. 땅바닥은 날 계속 끌어당기는데, 내 몸은 붕 떠서 어딘가로 날아가려고 하거든.

해미 솔직히 나도… 별자리나 행성, 이런 거 관심 없었다.

유성 알아. 그래도 막상 들으니까 섭섭하네.

해미 너도 내 그림엔 관심 없었잖아.

유성 … 들켰네. (사이) 마지막으로 우주 이야기 좀 들려주려 했는데!

해미 남자들 군대 얘기보다 재미없어.

유성 나 군대 안 갔잖아.

해미 아!

  사이.

유성 … 잘 가!

해미 … 너도!

해미, 퇴장한다.

  에필로그

  우주로 향하는 길.

  유성, 모래가 담긴 작은 유리병을 꺼낸다.

  유성, 허공에 드래그한다.

  유성 녹음.

  연결은 끊어졌지만, 마지막 편지를 남겨볼까 해. 불가능한 게 가능해질 수도 있으니까…. 너무 미련한가?

  이 모래의 발견이 나한텐 생명의 탄생보다 경이로운 순간이었어.

  근데 넌 여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뭔가 의미가 부여된다면 네가 날 기다렸던 모든 순간에도 가치가 생기는 걸까?

  오히려 무의미가 너한텐 의미일 수도 있겠더라.

  신비로움이 날 다시 우주로 떠나게 하는 것처럼, 이 모래의 무의미는 네가 택한 현실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줄 거야.

  난 이기적이었어. 널 두고 떠난 만큼 빈손으로 돌아가기 싫었거든. 그리움을 발판 삼아 하루에도 수십 광년을 도망쳤거든.

  그래도 난 다시 우주로 갈 거야. 이번에도 넌 이해하기 힘든, 목적지 없는 여행일지도 몰라.

  우린 너무 다르고, 이걸 깨닫기까지 오래 걸렸어.

  다만 한 가지, 우린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단 거야.

  네가 나에겐 버팀목이자 동력이었던 것처럼, 나의 한 부분이 너의 작품에 아름다운 영감이 되기를 기도할게.

  유성, 허공에 드래그한다.

  유성 전송.

  막.

1)이 작품에서 ‘드래그’는 상대방과의 정신 연결을 위한 일종의 수신호다.


 

 

  <당선소감>

 

   끈질기게 절실하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포착할게요

  아직은 글을 쓰는 게 즐겁습니다. 물론 ‘별’과 ‘연인’이라는 단어가 ‘나의 우주에게’(Dear My Universe)라는 희곡이 되기까지는 제 나름의 고민이 있었지만요.

  올해 여름 카페에 앉아서 이 작품의 첫 대사를 끄적이던 때가 떠오릅니다. 감정에 취해서 논리를 잃기도 하고, 논리를 생각하다 보니 감정을 잃기도 하고, 그런 실수들이 하나씩 모여 이 작품과 저의 애착 관계가 형성된 거 같습니다.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아주 작은 관계를 탐구하고자 했던 저의 소망이 전달됐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합니다.

‘지켜보는 것’, 사실 이게 가장 어려운 일인데 저의 부모님과 동생은 그걸 해낸 사람들입니다. 지금처럼 조금만 더 지켜봐 주세요. 언제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맛집을 찾아다니며 매번 같이 공연을 보는 형, 누나, 선배. 일하느라 바쁘지만, 항상 든든한 누나. 지금도 어디선가 편집을 하고 있을 나의 친구. 패션과 타투를 사랑하는 누나. 만나진 못해도 다이렉트 메시지(DM)로 별별 이야기를 다 나누는 중고등학교 동창. 원고 마감에 지쳐 있던 저에게 활력이 되어 준 ‘개인 사정’ 팀원들. 소중한 광명 친구들. 밥 두 그릇 먹는 나를 군말 없이 기다려 주는 예대 동기들. 어딘가에서 꿈을 좇고 있을 ‘느릅’ 팀원들. 이제는 극장을 운영하시며 멋있게 연극을 하는 선생님. 빈틈 많은 저의 상상력을 존중해 주면서도 희곡의 기본을 알려 주시던 교수님. 모든 분에게 늘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끈질기게 천천히 나아가겠습니다. 삭막한 세상이지만 아름다운 부분을 포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겠습니다. 자유롭게, 그리고 절실하게 다음을 준비하겠습니다.

● 1998년 서울 출생 
● 서울예대 극작 전공 1학년 재학 중


 

  <심사평>

 

  

  인간 존재의 의미 고민, 무심한 듯 엮어낸 대담성에 매료

  올해 응모작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는 동안 우리의 가슴을 강력하게 두드린 것은 ‘꿈과 희망이 부재한 차가운 현실’을 마주하라는 외침이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청년 세대의 암울한 현재와 어두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호소하거나, 거대 가치와 개인의 이익이 대립되며 생기는 갈등을 논하거나, 가족과의 관계의 붕괴를 목격하며 겪은 괴로움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 외침들은 심사하는 내내 묘한 불편감과 갑갑함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분명 이것이 현실인 것을, 이 목소리들이 그저 어리광 같은 불만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가슴에 안겨진 무게감을 기꺼이 안은 채 당선작을 정했다.

   소재의 참신함과 동시대성을 지닌 주제 의식, 우수한 구성력과 무대화의 가능성 등을 심사의 기준으로 삼고 예심을 거쳐서 최종 후보로 올라온 작품은 ‘나의 우주에게’, ‘늑장’, ‘채송화’였다.

  이 중 ‘나의 우주에게’는 마치 겉보기에는 사랑을 잃어 가는 두 남녀에 대한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이나 변화하는 관계성을 드러내는 세심한 대사들과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무심한 듯 담담하게 엮어 내는 작가의 대담성에 매료됐다.

  일상의 언어에서 출발하나 유효적절한 표현들만을 선택한 대사와 장면 구성력 또한 우리를 이 이야기에 동의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우주에게’를 최종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꿈과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버텨 나가는 사람들을 국가에서 관리하는 특별 보호 국민으로 분류해 희망을 죽이는 알약을 삼키게 한다는 독특한 설정에서 출발한 ‘늑장’이나 죽음을 앞둔 할머니의 삶을 되짚어 나가며 인생에 대한 고찰을 서정적으로 풀어낸 ‘채송화’ 역시 우수한 작품들이었다.

  비록 당선의 영예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이야기를 풀어낸 필력이 상당하다는 점에서 후일을 기대하게 하는 수준작들이었다. 또 다른 시작선에 선 신진 작가들의 날 선 시선이 오래도록 유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 송한샘, 이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