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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반려울음 / 이선락

 

슬픈 시를 쓰려고 배고프다, 썼는데 배으다라 써졌다
뒤에 커서를 놓고 백스페이스키를 누르자 정말 배가 고팠다

뱃가죽이 등에 붙어버렸나? 배가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고프다, 쓰자 배가 없어졌다. 등이 구부러지는, 굴절된 뼈 같은 오후

그래, 슬픔은 늘 고프지
어딘가가 고파지면 소리 내어 울자, 종이 위에 옮겼다

*

세면대 위에 틀니를 내려놓듯 덜컥, 울음 한마디 내려놓고 왔습니다
그뿐인가 했더니
옆구리 어디쯤에 쭈그리고 있던 마음, 굴절되어 있네요

거품을 집어삼킵니다 씹어도 건더기라곤 없는 튀밥
혓바닥이 마르고, 버썩거립니다

그래요, 뭐든 버썩거릴 때가 있어요 잠깐 눈 돌리면
쏟아지기도 하고…

난 수년 전 아이 몇몇 쏟아버린 적도 있어요

그땐 내 몸도 깡그리 쏟아졌던 것 같아요 마지막 손톱을 파낼 땐
눈에도 금이 가고 있었죠

‘얘야, 눈빛이 많이 말랐구나 눈을 새뜨고 있는 게 아니었어’ 내가,

‘손가락을 흘리고 다니지 말랬잖아요 근데 왜 까마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지…’ 보송보송 털이 난 꿈속에서

*

배가 고프단 얘긴 줄 알았는데, 그림자 얘기였어

부품해진 그림자론 날아오를 수 없다, 어떤 돌은 그림자도 생겨나지 않는다, 죽은 후론 배꼽도 떠오르지 않는다, 쏟아졌던 아이들이

처음으로 수면에 떠올라
‘배꼽은 어디 있을까?’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깨지지 않는 것도 깨진 것이 돼 버린 오후
이렇게 비좁고, 나는 깎아지른 맘뿐이었나

몇 줄 적지 못한 종이 한 장 찢어, 공중에 날리는


 

 

  <당선소감>

 

   나이는 숫자일 뿐… 더 많이 생각하고 노력해야죠


  농막에서 돌아와 막 책상 앞에 앉았을 때 낯선 번호의 전화가 왔다. “서울신문 기자인데요.” 나는 금방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내 속의 내가 한 길쯤 공중으로 솟아올랐던 걸까? 아내가 진정하라고 어깨를 내려주었을 때서야 참으로 많이 놀랐구나, 기뻤구나, 실감이 났다. 전화기 속으로 절이라도 겹쳐 넣고 싶었다.

  수 해 전 아내는 농막 하나를 지어 내어주며 하고 싶은 것 많이 해 보라고 권했다. 이튿날 바로 읽고 있던 시집 10여권을 들고 가 종일토록 읽었다. 토요일 오후엔 동리목월문예창작대에서 수강했다. 구광렬 시인의 첫 수업 때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된 계기였다.

  그 후에도 손진은 시인, 전동균 시인, 유종인 시인의 열강을 놓치지 않고 들었다.

  제법 몇 해가 흘렀을 때에서야 약간씩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내 속의 내가 말을 걸기도 했고, 주위의 사물들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써 보라고 권하는 듯했다.

  시가 되는지 뭐가 되는지도 모르고 즐겁게 썼다. 여러 시집을 읽었다. 수백여 권쯤 될까? 세 번, 네 번, 열 번, 스무 번쯤 좋아지는 시집을 더 많이 읽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좋아하게 됐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노력하겠다, 다짐해 본다.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리며, 노심초사 나를 지켜봐 주신 여러 지인들께도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문우님들께도, 시목문학회 회원들께도 깊이 감사를 드린다. 아내를 다시 한번 껴안아 주고 싶다. 마스크를 벗고 사는 시간이 얼른 왔으면. 기다려진다.

 

● 1957년 경북 경주 출생 
● 건국대 수의과대학 졸업 
● 동리목월문예창작대 재학


 

  <심사평>

 

  

  고픔과 아픔 외면하지 않는 시, 질문을 그치지 않는 시

  올해도 많은 분들이 새봄을 향해 시를 보내 주셨다. 오랜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읽었다. 예년보다 더 오래 숙고했는데, 손에서 쉽사리 내려놓을 수 없는 작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단단하게 짜인 세계를 횡단하며, 심사자들의 눈과 손이 시종 천천히 움직였다.

  ‘오픈’이 보여 준 감춤과 들킴의 미덕, ‘물과 풀과 건축의 시’에서 감지한 조용한 폭발, ‘비닐하우스’가 만들어 낸 미묘한 긴장, ‘온몸일으키기’가 일으킨 위트와 블랙 유머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같이 머리와 가슴을 두드리는 시편이었다.

  당선작과 끝까지 경합한 ‘저기 저 작은 나라’ 외 네 편은 독특한 시적 세계관으로 심사자들의 고른 지지를 받았다. 자기만의 세계가 이미 상당 부분 구축돼 있어 앞으로 그 세계가 어디로 어떻게 뻗어 나갈지 궁금했다. 토씨 하나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 문장들은 묘한 리듬감을 자아내 읽을 때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띤 토론 끝에 ‘반려울음’ 외 두 편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젊음은 젊은 상태, 혹은 젊은 기력을 가리킨다. 젊은 시가 있다면 그 상태를 잊거나 잃지 않고자 기력을 쏟아붓는 시일 것이다. ‘고픔’과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시, 질문을 그치지 않는 시일 것이다. 일상의 한 장면에서 지나간 시간을 길어 올리고 작금의 감정을 그 위에 내려놓는 시일 것이다. ‘반려울음’은 쓰면서 고파지는 시, 배가 뱃가죽과 배꼽을 소환하는 시, 마침내 쏟아버리면서 동시에 쏟아지는 시였다. “버썩거리는” 일상을 비집고 다른 존재를 향한 유일한 감정이 솟아오르며 빛나는 시였다. 울음을 껴안으면서 울음과 함께 살겠다고 다짐하는 시였다.

  시 쓰는 데 있어 이른 시간과 늦은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를 쓰는 시간은 모두 제시간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응모자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심사위원 : 신해욱, 오은, 박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