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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상자 놀이 / 김보나

 

내 방엔 뜯지 않은 택배가
여러 개 있다

심심해지면
상자를 하나씩 열어 본다

오래 기다린 상자는
갑자기 쏟아지는 풍경에 깜짝 놀라거나
눈을 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건 착각이야
세계는

누군가 눈을 뜨기 전에
먼저
빛으로 눈꺼풀을 틀어막지

나는 상자가 간직한 것을 꺼내며 즐거워한다

울 니트의 시절은 지났고
이 세제는 필요하다

새로 산 화분을 꺼내
덩굴을 옮겨 심으면
내 손은 순식간에 흙투성이가 된다

그래도 돼
뮤렌베키아 줄기가 휘어지는 방향을 따라가도 돼

친구는 이것을 선물하면서
식물은
쏟아지는 빛의 자취를 따라가며
자란다고 말했지

방을 둘러보면
여전히 상자가 수북하다

이삿짐이거나
유품 같다

빈 상자가 늘고
열 만한 것이 사라져 가면

나는 이 방을 통째로 들어
리본으로 묶을 궁리를 해 본다


 

 

  <당선소감>

 

   다르게 말하는 방법 ‘활자’가 열어준 세계


  겨울의 초입,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완치 가능성은 높지만 갑상선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마음이 얼어붙었다. 출퇴근길, 바삐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각했다. 단단한 빙하가 된 것 같다고, 점점 부서지고 작아질 얼음이 되어 먼 하류로 떠내려가는 것 같다고.

  막막한 그때, 당선 전화를 받았다. 거짓말처럼 생일에 걸려 온 전화는 이렇게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엔딩 크레디트가 내려진 것처럼 살지 말라고, 너는 이제 활자의 세계에서 다시 태어날 거라고.

  언젠가, ‘얼음의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 촬영감독 요나 인톤은 팽팽한 빙판이 호수 한가운데에서 깨지는 순간을 영상으로 포착했다. 길고 깊은 균열이 생기는 그때, 얼음은 노래한다. 나는 무언가를 잃어 가는 사람들의 곁에 있고 싶다. 그러한 방식으로 노래하는 법을 배우기로 하면서.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이 어둠 속에서 하얗게 떠오른다. 서툰 나를 받아 주는 아네스와 베드로, 오빠와 두 동생과 다투고 또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다. 삼십 대가 되면 좋은 일이 더 많이 찾아온다고 한 혜지 언니, 초등학생 때부터 서로 곁을 지켜 준 미혜와 수인, 평생 미더운 눈빛 서우종 선생님, 널 믿는다는 말 대신 말없이 손을 잡는 진희, 언니는 시인이 될 거라고 나보다 앞서 믿은 윤혜, 함께 글을 쓰고 사계절의 풍경을 여행한 지혜, 혜배, 혜라에게 고맙다. 무지개책갈피와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 글쓰기 친구들, ‘SOH’가 있어 일하는 나날 가운데에서도 마음을 가다듬으며 읽고 쓸 수 있었다. 쭈뼛대며 수업에 찾아온 사범대생을 격려한 한영옥 시인님,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법에 대해 알려 준 김상혁, 황인찬, 김소연, 김언 시인님과 첫걸음을 응원해 준 심사위원님들께 갓 우린 차처럼 따뜻한 감사를 전하고 싶다.

  모두에게 행운이 깃들었으면 좋겠다. 숨은 씨앗을 어떻게든 찾아내 싹을 틔우는, 햇빛을 닮은 힘이 이 글에 어리면 좋겠다. 앞으로도 활자를 믿고 쓰면서, 어쩌면 날 녹일지도 모를 빛과 사랑을 따라 흔들리며 나아가고 싶다.

 

● 1991년 서울 출생. 
● 성신여대 교육학과 졸업. 
● 편집자로 근무 중.


 

  <심사평>

 

  

  평범한 소재서 리듬감 이끌어낸 상상력… 서정시 품격 한층 높여

  심사는 예심과 본심을 통합해 진행됐고, 논의를 거쳐 10여 편의 작품이 본심에 올랐다. 이 중에서 ‘가뭄’ ‘포도’ ‘청년 희망 회복’ ‘상자 놀이’가 경합한 끝에 ‘상자 놀이’가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마지막에 아쉽게 수상의 영예에서 밀려난 다른 작품들 역시 서정적 울림과 개성을 지닌 높은 수준을 보여줬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중론이었다.

  ‘가뭄’은 자연어의 결합을 통해 영혼의 갈증과 슬픔을 형상화해내는 언어 감각이 눈에 띄었다. ‘포도’는 도입부의 돌발적인 이미지가 끝까지 유지되는 흡인력과 의미의 여운을 증폭시키는 간결한 시상 전개가 인상적이었다. ‘청년 희망 회복’은 변두리 재개발지와 도시계획 차원에서의 개발행위의 상관관계를 통해 사회적 관심을 환기해내는 시선의 힘이 돋보였다. ‘상자 놀이’는 평범한 일상의 소재에서 운문적 리듬감을 이끌어내는 풍부한 상상력과 감성이 감탄을 자아냈다.
이 작품들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일차 의견 교환이 있고 난 다음 ‘가뭄’은 언어 감각의 화려함에 비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불투명하다는 점, ‘포도’는 돌올한 언어 배치가 인상적이지만 한편으론 그것이 행간의 깊이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이 각각 지적돼 제외됐다. 최종적으로 ‘청년 희망 회복’과 ‘상자 놀이’가 남았다. ‘청년 희망 회복’은 재개발지에 꽂힌 ‘깃발’을 통해 세계가 재편되고 그 안으로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적하는 사회적 비판의식과 구체적 사실감이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다소 시가 직설적이고 산문적이라는 점이 고심케 해 당선작이 되지 못했지만 이 응모자의 앞날을 기대하게 한다. 결국 끝까지 남은 ‘상자 놀이’가 별다른 이견 없이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우선 ‘상자 놀이’는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여백의 미가 서정시로서 갖춰야 할 품격을 한층 높인다. 시상을 전개하는 맑고 순수한 시행의 흐름이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에서 막힘없이 운용돼 운문적 리듬감으로 충일하다. 또 시행과 시행을 건너뛰는 간결함과 담백함으로 우리 마음의 여백에 잔잔한 파문을 남기는 풍부한 상상력이 여운을 자아낸다. 이 시는 “뜯지 않은 택배”라는 평범한 일상의 소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을 구태의연하게 쓰지 않고 현실에 발을 댄 독특한 시선으로 변주하는 공간 변용 능력과 감정의 안배가 뛰어나다. 상자의 닫혀 있음과 열림, 그를 통해 드러나는 어둠과 빛이 팬데믹 시대의 도시적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내를 주거 공간에 집약해낸다. 무엇보다 당선작과 함께 보내온 응모작들의 수준이 고른 점도 안심케 하는 대목이다. 산문화와 장식적인 수사가 대세를 이루는 오늘날의 시적 풍경 속에서 이 신예시인이 현실 세계와 상상 세계를 덧대어 어떤 삶의 박동과 리듬을 우리에게 선물해줄지 큰 기대를 가지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 나희덕, 박형준, 문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