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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나도사진과 / 고가람

 

  나의 중학교 시절을 아름답게 만들어 준 당신께 이 작품을 바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2021.08.27.PM 13:08

  네모난 세상이다. 내 손에 쥔 순간의, 그리고 과거의 세상. 아무래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가운데 찍혀있는 사진관이다.

  좀 더 콕 집어 표현하자면 사진관의 간판이다. 흰색 간판에 정직한 초록색으로 또박또박 각진 글씨체로 적혀있다. '나도사진과'

  크기는 작다. 도시의 인테리어 잘 되고 깔끔한 파스텔 톤의 벽을 가진 커다란 소위 '스튜디오'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곳은 스튜디오가 아니다. 깡시골의 사진관이다.

  음, 뭔가 두 단어는 비슷한 듯 다른 단어의 느낌이 있다. 마치 '헤어샵'과 '미용실'의 차이? 아니면 '스시'와 '초밥'의 차이? 내가 잘 알아먹게 설명을 잘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 이상의 설명은 어렵지만 그래도 무슨 소리인지 알아줬으면 한다.

  사진관의 양옆으로는 커다란 주황빛의 파라솔들이 인도를 점거하고 있다. 이 날은 5일장 날이었다. 나흘 동안 접혀있던 파라솔들은 닷새 만에 주인을 위해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파라솔은 이 작품에서 정말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다. (정말 다행이었다. 비가 안 와서) 그들은 인도만 점거하고 있는 게 아니라 사진관의 간판까지도 점거하고 있었다. 덕분에 첫 글자의 'ㅁ' 받침과 끝 글자의 'ㄴ' 받침은 자연스럽게 파라솔 뒤로 숨어버렸다.

  사진관 유리문 앞에는 분홍빛 보자기로 정성스레 포장된 제법 커다란 선물상자가 놓여있다. 나는 그 보자기 속 선물의 정체를 알고 있다. 내가 아주 잘 아는, 쥐뿔도 없는 어떤 놈이 정육점 아저씨께 제일 좋고 제일 비싼 놈으로 넉넉하게 담아달라고 부탁한 고기세트였다. 그 놈은 이제 한 달간 라면만 먹고 살겠지.

  사실 지금까지 설명한 것들은 전부 지금 소개하려는 이 사람을 위한 배경 혹은 무대장치다. 뭐랄까. 갑자기 뭔가 눈이 시리다. 다른 걸 소개할 때와는 달리 벌써부터 기분이 참 오묘하고 씁쓸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다행스럽기도 하다. 손이 흔들려서 초점이 나갈 뻔도, 수평이 안 맞을 뻔도, 혹은 그 순간을 못 담을 뻔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작품이 나왔다. 만약 다시 찍으라고 한다면 이만큼이라도 찍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뭔가를 찍으면서 이렇게 긴장했던 적은 없었다. 나에게 있어 너무나 특별한 존재였기에, 그리고 내 인생에 어쩌면 다시 올 수 없는 셔터찬스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유리문을 열고 나와 선물상자를 발견하고는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대는 이 사람. 이 사람의 진갈색 슬리퍼, 이 사람의 회색 배바지, 이 사람의 무지개색 카라티는 지금에서야 눈에 들어온다. 사실 찍을 당시에는 오로지 그의 하얀 머리카락만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은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 눈이 마주칠까 두려웠으니까.

2001.04.01.PM 13:08

  이번에도 역시 네모난 세상이다. 이번엔 제법 사람들이 많다. 누가 봐도 중학생 쯤 되어 보이는 학생들이 두 줄로 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앞줄의 일곱은 앉아서, 뒷줄의 여덟은 선 상태로 상체만 앞으로 숙이고 있는 자세다.

  가운데 쪽 학생들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서려 있다. 그리고 점점 양 날개로 갈수록 학생들의 표정이 딱딱하다.

  나는 사실 내 시선을 기준으로 둘째 줄 왼쪽 맨 끝에 학생이 가장 눈길이 간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여드름이 곳곳에 나있는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표정은 역시나 굳어있다. 그것도 어쩔 수 없다. 저 날을 나는 확실히 기억한다. 물론 그 날 하루를 전체적으로 따져보면 기분좋은 날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사진 찍히던 그 시간대에선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되려 좋은 쪽이었다.

  표정이 저런 건 그냥 어색해서 그런 것이다. 저 어색한 표정을 짓는 내 자신이 싫어서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사진기 앞에서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 능력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나같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정말 많으니까. 사진을 찍고 다니는 걸 업으로 삼고 다니는 놈이 이런 말을 하는 게 웃기긴 하다. 생각해보면 그래서 내가 사진기 앞이 아닌 뒤에 서 있는 걸 택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거기에 전혀 또래가 아닌 아저씨 한 분이 그 옆자리에 서 계신다. 아저씨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다. 아저씨의 표정은 해맑다. 적당히도 아니고 아주 많이 해맑다. 그 웃음이 전혀 억지스럽거나 딱딱하지 않다. 내가 아까 말한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아저씨인 듯하다.

  이 아저씨가 바로 사진관 앞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나의 작품 모델이 되어버린 사진관 주인아저씨다. 그리고 중학교 사진 동아리를 지도하셨던 국어 선생님, 그러니까 나의 은사님이기도 하다.

- 사진에 대한 주절거림 -

  사람이 살면서 자세히 기억하는 하루가 얼마나 될까? 바로 어제 먹은 반찬 메뉴도 기억을 못하는 게 사람인데…. 망각은 힘들 때의 기억을 잊게도 해 주지만, 힘들 때 꺼내 볼 추억도 잊게 만든다.

  그래서 사진을 꺼낸다. 예전 사람들은 정사각형의 앨범을 꺼내고, 요즘 사람들은 핸드폰 갤러리를 혹은 SNS 예전 게시물을 뒤적거린다.

  지금 나도 그러고 있다. 이 사진은 나에게 특별하다. 지금 나를 웃게 만드는 몇 안 되는 사진이다. 아까도 살짝 말했었지만 이 날은 다른 의미로 잊을 수 없는 날이 될 뻔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잠깐 주절거려 보려 한다.

  나는 점심시간에 항상 도서실을 가곤 했다. 거기서 특별한 일이 없고서는 5교시 종이 치기 정확히 5분 전까지 구석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렇다고 내가 처음부터 책을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는 점심시간에는 무조건 나가서 축구를 했었다. 하지만 중학교 학교 배정 때 운이 없게도 친한 친구들 중에서 나만 다른 학교로 오게 되었다. 그나마 몇몇 안면이라도 있는 녀석들은 있었지만 걔네들과도 반이 갈리게 되어서 졸지에 생판 모르는 아이들하고만 한 반이 되고 말았다. 대부분 그 나이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원래 친하던 아이들끼리 무리를 지어 다녔기에 나는 낄 자리가 없었다. 물론 흔히 생각하는 왕따는 아니었다. 인사도 하고 10분짜리 쉬는 시간에는 소소한 얘기도 했다. 하지만 점심시간에 내가 낄 무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기에는 내 스스로가 너무 처량하게 느껴졌기에 어디서 뭔가를 그냥 하고 싶었다.

  그러다 찾은 곳이 도서실이었다. 처음에는 만화책을 뒤적거리면서 앉아있었지만 얼마 지나니 더 이상 새로운 만화책이 없었다. 그래서 소설책이나 전기 등을 서서히 읽게 되었다. 매일 같이 도서실을 가다 보니 점점 더 책에 흥미를 붙여가게 되었지만, 반대로 점점 더 친구들과는 멀어져 갔고 점점 더 소심해져만 갔다. 그런데 어느 날 누가 갑자기 내가 읽던 책을 뺏어서 덮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선생님이었다.

  "야. 너도 나가서 좀 놀아. 한 달 내내 도서실에만 있냐."

  "네. 근데 나가서 노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럼 주말에 학교 나와. 선생님이 하는 사진 동아리 같이 하자. 가입비 그런 거 없으니까 엄마한테 부탁해서 밥만 싸 와. 책 읽는 것보다 훨씬 재밌을 테니까."

  "네."

  주말까지 학교에 나와서 동아리 활동을 하자는 선생님의 말을 순순히 따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나이 많으신 선생님의 제안을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그 당시의 나는 소심했으니까. (물론 지금도 그렇다.)

  그렇게 해서 간 날이 그 날이었다. 부모님은 일 때문에 바쁘셨기에 주말에도 늘 집에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날도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내가 까먹지 않고 엄마한테 도시락을 싸 달라고 했다면 아마 아침에 뭐라도 챙겨 놓고 나가셨을 것이다. 하지만 도시락을 싸 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가 학교에 도착하고 나서야 생각이 났다.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생각으로 일단 모임장소인 학교 뒷산 앞에 서있었다. 바로 얼마 뒤, 선생님이 오셨고 우리는 선생님을 따라 뒷산에 올라갔다.

  나는 걸어 올라가면서도 계속 도시락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생님은 계속 나에게 말을 거셨다.

  "생각보다 재밌지?"

  "네. 좋네요."

  "학교에선 책만 읽고, 주말에는 집에서 공부만 하는 게 좋은 게 아냐. 새로운 취미도 붙이고 활동적으로 생활해야 인생이 재밌어져."

  낮은 산이라서 역시나 한 30분 걸었더니 정상에 도착했다. 애들은 철봉에 매달리기도 하고 윗몸일으키기 기구에 누워 대결도 하였다. 나는 나무에 기대어 땀을 닦았다.

  "올라오느라 힘들었으니까 챙겨온 밥들 먹고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그럼 나는 저쪽에서 누워 있을 테니까 좀 있다 보자."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선생님은 가져온 커다란 돗자리 두 개를 바닥에 깔아 주셨다. 그리고는 나무벤치에 누워, 쓰고 오신 모자를 얼굴에 덮고 낮잠을 주무셨다. 애들은 자연스럽게 빙 둘러서 돗자리에 앉았다. 나도 그 사이에 일단 앉았다.

  아이들은 가방에서 각자 도시락을 꺼냈다. 돈가스를 싸온 애도 있었고, 계란말이 반찬, 심지어는 삼단 도시락에 싸온 녀석도 있었다. 물론 일회용 도시락 그릇에 1000원짜리 김밥을 사온 애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 꺼낼 게 없었다. 근데 너무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팠다. 그래도 꾹 참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 있던 한 녀석이 나한테 물어봤다.

  "야. 너 도시락 없냐?"

  "어. 내가 엄마한테 싸 달라고 말하는 걸 깜빡해서. 그래서 말인데 혹시 좀만 나눠먹어도 될까?"

  나로서는 정말 눈 딱 감고 용기내서 꺼낸 말이었다.

  "야. 그러게 깜빡 하랬냐?"

  그 녀석은 간단하게 내 말을 쳐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다른 애들한테 말했다.

  "내 거 반찬이랑 바꿔 먹을 사람."

  그 말을 계기로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싸 온 반찬을 나눠 먹었다. 나는 더욱 더 비참해졌다. 도저히 앉아있기가 힘들었던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 사이로 숨었다. 그리고는 억지로 소리를 죽여가며 서럽게 울었다. 내가 여기 왜 왔을까? 그냥 집에 있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라고 수없이 속으로 울분을 삭혔다. 솔직히 선생님만 아니었으면 당장 뛰어서 내려가고 싶었다.

  "너 왜 울어?"

  그 때 자고 계신 줄 알았던 선생님이 내 어깨를 잡으며 물어보셨다.

  "깜빡하고 도시락을 안 싸 왔어요."

  "그럼 나눠먹자고 하면 되잖아?"

  "애들이 싫대요."

  "그런다고 혼자 여기서 찍찍 울고 있어? 자리에 돌아가 있어."

  "네. 죄송합니다."

  나는 최대한 눈물을 닦아내고 부은 눈이 덜 보이게 고개를 푹 숙인 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자리에 앉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으로 친구들은 자기 도시락을 먹느라 내 상황에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 때 선생님이 나를 향해 도시락 하나를 내밀었다.

  "야. 먹어라. 배가 안 고파서 점심도 안 먹고 있었는데 네가 대신 좀 먹어라. 다 먹고 빈 그릇만 나 줘. 대신 꼭 다 먹어라. 와이프가 음식 남기는 거 싫어하니까."

  애들은 힐끗 그 상황을 쳐다봤다. 나는 그 도시락을 받고 또 한 번 눈물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정말 억지로 꾹 참고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도시락 통에는 냄새만 맡아도 맛있겠다는 걸 알 수 있는 제육볶음이 들어있었다. 그 사이에 선생님은 내 옆에 생수통 하나를 무심한 듯 두고 가셨다.

  도시락 뚜껑을 열자 쏜살같이 근처에 녀석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었던 것 같다.

  "내 거랑 바꿔먹자. 아까 일 때문에 삐진 건 아니지?"

  내가 그 날 반찬을 바꿔 먹었는지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같았으면 오히려 '그래 많이 먹어라.'하고 바꿔 줬을 것 같지만 그 때는 어떻게 행동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그 날 밥 먹고 나서 사진에 대한 뭔가를 분명 배웠을 텐데 뭘 배웠는지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에 내려가기 전에 기념으로 한 장 찍자고 하셔서 자동 셔터로 찍은 게 바로 이 사진이라는 건 기억이 난다.

2006.02.27.PM 17:08

  이 사진엔 선생님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진도 선생님과 관련이 있는 사진이다. 그래서 이 사진도 오랜만에 꺼내 보았다.

  사실 이 사진은 지금 보면 바닥의 수평이 미묘하게 맞지 않는다. 내 기억으로는 아마 아버지가 찍어주신 사진이다.

  20살 재수생 시절의 나와 엄마의 사진. 나인지 나만 알 수도 있겠다 싶다. 지금의 나와 너무 다른 모습이다. 말 그대로 몰라보게 살이 쪘었던 그 시절 내 모습이 보인다. 얼굴이 억지로 웃고 있지만 죽상인 걸 알겠다. 그러고 보면 나는 웃는 걸 참 못한다.

  엄마는 참 그럴싸하게 잘 웃고 계신다. 지금보다 주름이 훨씬 적다. 아마 사진 밖의 아버지도 그러하겠지.

  살짝 보이는 꼬질꼬질한 핑크빛 바닥은 침대 매트리스다. 그 매트리스 위가 나의 생활공간이었다. 출입문이 열리는 90도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바닥은 매트리스와 책상이었다. 그야말로 난 발 디딜 곳이 없었다.

  위쪽으로 보이는 은색 봉은 빨래걸이였다. 한쪽 구석에 뚫린 조그만 환풍구에서 나오는 더운 바람에 의존하여 겨우 이 눅눅한 곳에서의 나의 빨래들을 말렸다. 세탁은 밖에 있는 공동 세탁기에서 돌려 왔어야 했는데 눈치가 보여 너무 오래 사용할 순 없었다. 그래서 완벽히 탈수가 덜 된 채 방으로 가져오면 밤새 옷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을 몸으로 받아가며 자기도 하였다.

  지금도 거리를 탐색하다보면 '00고시원'이라고 붙어있는 작은 불투명 창문들이 유난히 마음에 걸린다. 그건 아마 글자 안에서 살고 있는 나와 같은 20살들이 창문 너머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아들.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찍고 헤어지자.'

  이 날은 난생 처음 독립을 한 날이었다. 기념일이라면 기념일이었다. 그래서 어머니께선 이 말을 건네셨다. 그래서 찍게 된 게 이 사진이었다. 부모님은 그 날 오후 나를 서울 한복판 고시원 촌에 두고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그 때 기분은 어떠하셨을까? 아직 그걸 물어볼 자신은 없다.

  재수는 나의 여러 가지를 바꾼 사건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볼 때까지 꿈이 막연했다. 서울에 있는 아무 대학 경영학과에 들어가는 것. 사실 경영학과 학생들에겐 미안하지만 소위 내 주변 문과에서 공부하는 대부분 학생들의 꿈이 경영학과 입학이었다. 나도 그랬고 그 친구들도 그렇고 왜 거기 가고 싶냐 물어보면 십중팔구 대답은 똑같았다.

  "지금은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어서요."

- 사진에 대한 주절거림 2 -

  그리고 거기 말고는 대답할 선택지가 없었다. 만약 인문계열을 가고 싶다고 대답하면

  "너 거기 가면 백수 돼."

  십중팔구 이런 말이 되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신 관리도 제대로 안 되던 상황에서 마지막 기회였던 수능마저 처참하게 망하고 말았다. 경영학과만 보고 달려왔던 고등학교 3년이 무너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모든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래서 하루 종일 먹는 걸로 그걸 풀어댔다. 나의 외형과 내형이 모두 망가져가고 있다는 걸 모른 채 점점 더 골방철학자마냥 땅굴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분한테서 연락이 왔다. 친구, 친척 모두와 연락을 끊고 살던 날에 우리 집으로 걸려온 전화 한 통. 당연히 나는 받지 않았다. 엄마가 나 대신 받았다. '네. 선생님.'이라고 하는 엄마의 말 한 마디에 누구의 전화인지 바로 감이 왔다. 엄마가 다급하게 나를 향해 받으라는 손짓을 했고, 옆에 있던 아버지도 같이 손짓하셨다.

  그런데 나는 강하게 손사래를 치며 되레 방문을 닫았다. 너무 부끄러웠다. 멀리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녀석이 아무래도 상황이 이래서 받기 그런가 봐요. 아무쪼록 선생님께서 이해 좀 부탁드립니다. 네. 조만간 아들 녀석이 안부전화 드릴 테니까 그 때까지 좀만 기다려 주세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수능 끝나면 가장 먼저 찾아뵈려고 계획까지 세웠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선생님이셨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선생님 앞에 당당하게 설 제자가 되지 못했고, 그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쨌든 그 전화를 받고 찾아본 게 아까 꺼내봤던 중학생 시절의 그 사진이었다. 한참 동안 책상에 앉아 사진을 보았다. 그러다 문득 방 한 쪽 구석에 있는 싸구려 카메라가 눈에 들어왔다. 나의 정말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였던 사진. 내가 가장 행복할 때는 카메라 뒤에서 행복한 것들을 네모난 세상 속에 담아내는 순간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방을 박차고 나와 부모님 앞에 섰다. 그리고는 무슨 배짱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망설임 없이 선언했다.

  "저 사진하고 싶어요."

  어머니와 잠깐 눈을 맞추시더니 아버지께서 짧게 한 마디 말씀하셨다.

  "그래라."

  그 날부터 나의 목표는 사진학과 입학이 되었다. 하지만 알아보니 사진학과는 국내에 얼마 있지도 않을뿐더러 실기 준비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냥 동아리에서 조금 배우고, 취미로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실력으로는 가당치도 않은 수준이었다. 그래서 정보들을 모으다 보니 결국 서울 쪽에 있는 사진학원 입시반에 들어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부모님께서는 한 평짜리 고시원 월세까지는 내 주시기로 하였다. 그리고 학원비와 사진 장비들은 내가 직접 벌어서 공부하기로 하였다.

  이 일 년 동안 정말 많은 고생을 했지만 어쨌든 나는 다행스럽게 사진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합격통보를 받고 나는 가장 먼저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부모님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주셨다. 하지만 여전히, 왠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께 연락드릴 용기만큼은 여전히 나지 않았다.

2021.07.25.PM 13:08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사진이다. 배경은 오늘 찍은 사진과 동일하다. 다만 파라솔이 초록색 줄에 묶인 채로 접혀 있다. 그래서 남도사진관 간판이 온전히 보인다.

  장날이 아니라서 확실히 인도는 한산하다. 나는 오히려 이런 날을 선호했다. 사람들과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 날. 네모난 세상이 시끄럽지 않아 보이는 날. 이 세상이 왠지 쓸쓸해 보이는 날. 나는 그런 날을 선호했다.

  그 사진관을 찍은 건 정말 온전한 우연만은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며칠 뒤, 제법 커다란 사진공모전이 열린다. 나는 뭔가 나를 사로잡을 만한 사진거리를 찾기 위해 10년이 넘게 떠돌아다녔다. 나는 새로운 곳, 특히 소위 말하는 시골 동네에 오면 항상 하는 한 가지 루틴이 있었다. 그건 바로 동네 사진관들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 행동에는 명확한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 마지막 주절거림 -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되고 졸업을 며칠 앞둔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날 점심에도 나는 습관적으로 도서실로 향했다. 그곳에 가면 늘 계시는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선생님께서는 역시나 그 날도 항상 계시는 자리에서 앉아 계셨다. 나는 조심스럽게 선생님한테 가서 인사를 드리고는 나의 지정석으로 가려고 하였다. 그 때였다.

  "오늘은 밖에 나가서 찬바람 좀 쐬면서 얘기나 해도 될까?"

  "네. 좋아요. 선생님."

  나와 선생님은 밖으로 나와 잎 하나 없는 은행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너 찔찔 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업하는구나. 고등학교 가서도 잘해라. 너는 아마 잘 할 거다."

  "네. 그동안 감사했어요."

  "그런 말 들으려고 부른 건 아니고. 너는 꿈이 뭐니?"

  "글쎄요. 저도 그게 걱정이에요. 잘 모르겠어요. 일단은 고등학교 가서 생각해보려고요."

  "그래. 끊임없이 계속 고민해보렴. 어떻게 보면 나는 사실 그런 고민이 없었지. 성적 맞춰서 사범대학 가라고 해서 갔더니 어느 순간 교사가 되어 있었으니까. 사실 그래서 뭔가 아쉽기도 해. 물론 교사생활이 불행한 건 아니지만 정말 내가 간절히 원해서 여기까지 왔나 확신이 안 들 때도 있고. 그래서 너는 이거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네가 행복해질 수 있는 미래에 대해 계속 고민해 줬으면 좋겠어."

  "네."

  나는 그 때의 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 그 때 당시에는 온전히 와 닿지는 않았지만 일단 선생님 말씀이기에 마음에 새겨두었다. 지금은 물론 너무나 와 닿는다. 그러면서도 내가 너무 이상을 쫓아온 것은 아닐까 후회할 때도 있지만.

  "그래.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너는 나한테도 특별한 제자니까."

  "저도 선생님이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선생님도 나중에 퇴직하시면 뭐 하실 거예요?"

  "나? 나는 이미 생각해둔 게 있지. 나는 시골마을에서 작은 사진관 하나 차려서 사는 게 꿈이야. 거창하게 말고 작은 곳에서. 나는 사진들과 있을 때가 행복하니까."

  "제가 잘 되면 꼭 맛있는 거 사들고 선생님 사진관 찾아갈게요. 그 때 꼭 제 사진 찍어주세요."

  "그래. 꼭 연락해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 날도 남도사진관 앞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리고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몰래 숨어서 사진관 주인이 밥 먹으러 나올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오랜 시간을 건너 선생님을 눈에 담게 되었다. 나는 기다렸던 순간이 왔음에 너무나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슬펐다. 20살 때처럼, 아직까지도 떳떳하게 인사드릴 수 있는 자랑스러운 제자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름만 사진작가이지 사실 아무도 모르는 떠돌이 아저씨나 마찬가지인 내가 선생님 앞에서 무슨 말을 꺼낼 수 있을까.

  나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계속 그 근처에서 배회만 하였다. 그러다 이틀 뒤 장날이 되었다. 묶여있던 파라솔이 펴지고, 그로 인해 남도사진관은 '나도사진과'가 되었다. 그걸 보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따라서 저도 사진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저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게 사진이라서 사진을 하게 되었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사진을 찍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큰 걸까요, 아니면 제가 그럴만한 능력이 없는 걸까요.'

  그래도 한 가지만큼은 꼭 해내고 싶었다. 사실 사진작가 일을 시작하면서 마음먹었던 게 하나 있었다. 꼭 선생님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하나 만들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사진기 뒤의 내 얼굴을 보며 환하게 웃어주는 작품을 찍어보고 싶었다. 지금은 나설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맛있는 걸 사들고 그 사진관 앞에 두고 숨어있다면 그걸 보며 기뻐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담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2021.08.27.PM 13:08

  다시 처음의 네모난 세상으로 눈길이 돌아왔다. 이렇게 오랫동안 주절거리면서도 정작 내가 아직까지도 확인하지 못한 게 한 가지 있었다. 그건 선생님의 표정이었다. 분명 사진 속 인물임에도 아직까지 차마 쳐다보지 못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억지로 선생님의 얼굴을 확인하였다. 선생님의 표정이 과연 어떨까?

  선생님의 표정은 내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전혀 밝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그 표정을 보자마자 선생님의 표정이 밝지 못한 이유를 단번에 알았다. 그리고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선생님의 표정을 밝게 해드릴 방법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나는 이 사진을 공모전에 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사진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 이 사진은 내가 다짐했던 것을 전혀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 사진은 사진을 찍은 나도 행복하지 못하고, 사진 속 피사체도 행복하지 못한 작품이었다.

  나는 내일의 나를 확신하지 못하겠다. 사진관 안으로 들어가서 선생님의 사진기 앞에 설 수 있을지, 다른 날들처럼 사진관 근처만 한없이 배회하다 돌아올지, 아예 시도조차 못하고 이곳을 떠나갈지 나조차도 내가 선택할 행동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

2021.08.28.PM 17:08

  이 배경만 세 번째다.

  다른 때보다 조금은 배경이 어둡다. 시도조차 안하고 이곳을 떠나가려다, 그래도 앞까지는 갔지만 사진관 근처만 한없이 배회하다, 결국 정말 오랜 시간 끝에 사진관 안으로 들어갔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장날이 아니다. 하지만 파라솔이 펼쳐져 있다. 그래서 양쪽 끝 받침을 오늘도 가려주고 있었다. '나도사진과'

  그건 선생님이 만들어주신 작품이었다. 앞의 상인 분들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잠깐만 파라솔을 펴도 되겠냐고 물어봐 주셨다. 다행히 상인 분들께선 흔쾌히 파라솔을 펼쳐 주셨다. 오히려 파라솔이 작품에 등장하게 되었다고 좋아해 주셨다.

  가운데엔 흰머리에 배바지를 입고 촌스러운 카라티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분홍색 보자기로 쌓인 물건을 들고 있었다. 내가 산 고기였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참 맛이 좋았다.

  이 사진을 찍어준 대가로 나도 10여년 만에 사진기 앞에 서야만 했다. 앞으로 이 사진으로 접수를 하기로 할아버지와 약속하였다.

에필로그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별 볼일 없는 놈이라서 인사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어제 오지 그랬냐. 고기는 하루라도 빨리 먹어야 맛있는데. 같이 먹으려고 안 먹고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 밖의 할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투자를 잘 했네. 제육볶음 도시락이 소고기가 되었으니까. 지금 행복하니?"

  "네. 행복한 것 같아요."

  "시간 될 때 와서 밥 먹고 가라."

  "네. 선생님."

  오늘에서야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찍는 사람도 찍히는 피사체도 행복한 사진작품을. 이제 조금 있다 사진 공모전에 이 작품을 내러 간다. 어느 때보다 마음이 홀가분하다. 뭔가 될 것 같아서?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왠지 홀가분하다. 


 

 

  <당선소감>

 

   "실제 모델은 제 은사 김임태 선생님...뵙고 싶어"

  우선 제 작품을 뽑아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합니다. 또한 제 작품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이야기는 지난 여름, 부모님과 놀러갔던 해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나의 어렸을 적 추억들을 담고 있는 해남, 그곳에서 발견한 옛날 간판, 그 간판을 살짝 가리고 있는 파라솔, 그 아래 서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그 정겨운 얼굴들에서 겹쳐진 나의 또 다른 어릴 적 추억. 중학생 시절, 이제는 나이가 지긋하실 나의 선생님. 평범한 듯 조금은 독특한 이 작품의 제목이 머릿속에서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절대 복잡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숨기지 않고 제가 가진 생각들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사진작가인 '그'가 작품이 진행될수록 점점 사진기 앞으로 나오듯이 저 또한 소심한 성격의 저를 바꿔보기 위해 이 작품만큼은 글 뒤에 숨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의 인생에서 매번 변곡점을 주는 커다란 존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건 바로 사진관 주인인 그의 은사님입니다. 은사님의 모델은 실제 저의 은사님이신 김임태 선생님이십니다. 선생님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컸기에, 그만큼 초라한 자신을 보여드리는 게 부끄러웠기에 전화를 받지 않았던 '그'처럼, 저 또한 그 마음으로 선생님을 애써 외면하듯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세월이 어느덧 오늘날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을 마무리하며 다짐했던 게 한 가지 있었습니다. 당선여부와 상관없이 꼭 선생님께 찾아가서 인사드리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으로 상까지 받고 선생님을 찾아뵐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기쁘고 설렙니다.

  끝으로 보잘 것 없는 아들을 무조건 믿어주신 부모님께 가장 먼저 감사드립니다. 또한 힘든 순간 용기를 주셨던 이재은, 임종구 작가님, 그 외의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친척 분들, 지인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그'처럼 공모전에 도전하시는 모든 분들께도 이 영광을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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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기발한 착상과 변화…환상적이고 몽환적 느낌"

  소설은 당대 사회상의 반영이라고 했다. 그래서, 예전과 비교하면 '실버 세대'를 소재로 하는 응모작이 증가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팬데믹(pandemic)을 일으킨 '코로나 19'가 소재나 주제로 등장하는 응모작도 많았는데, 그들 모두 현상만 드러냈을 뿐 내면을 그리지 못해서 아쉬움을 주었다. 그리고 응모작 중 상당수가 단편소설의 특징이 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더 나아가서 문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응모작도 눈에 띄어서 그 아쉬움은 더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응모작 중에서 선자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이금주의 , 고성혁의 , 김보형의 , 조성은의 , 공미숙의 , 고가람의 이었다.

 이 응모작들 모두 행간에서 고심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 와 응모작이 돋보였다.

  라는 응모작은 스토커가 당연히 남자일 거라는 예상을 뒤집고, 여자가 스토커라는 점이 참신했다. 그건 '역발상'에 가까워서 관심을 끌만 했다. 그런데 가족사(부모)인지, 화자의 스토킹에 관한 서사인지, 모호해서 아쉬움을 주었다. 물론 화자의 아버지와 스토킹 대상(남자)을 손가락으로 연결한 점은 좋았으나, 그런 장치만으로 두 가닥으로 나누어진 서사를 하나로 묶기에는 부족했다. 단편소설의 특징처럼, 어느 한쪽 서사에 무게를 더 실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는 응모작은 좋은 '이야기꾼'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기에 충분했다. 작가는 '네모난 세상(사진 속의 피사체와 그 사연)'에 관한 스토리를 단편소설로 형상화하는 재주가 훌륭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영어 단어로 바꾸면 'see'인데, '네모난 세상(사진)'을 통해서 보니까 'look'로 바뀌게 되는 기발한 착상과 변화는 선자에게 호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한 사진작가의 평범한 서사가 '동그란 구멍(뷰파인더)'을 통해 '네모난 세상(사진)'으로 인화(印畵)되면서, 환골탈태와 더불어 환상적이며 몽환적인 느낌까지 들게 했다. 그건 '카메라의 힘'이 아니라 '작가의 힘'이 분명했다. 그래서 선자는 를 당선작으로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장 수련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하고, 생각을 더욱 깊이 가다듬는 일에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등용문에 오르면, 그 순간부터 경쟁 상대가 문청(文靑)이 아니라 기성 작가들로 바뀌기 때문이다. 아무튼, 어둡고 긴 터널을 뚫고 지나왔을 이 응모자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고 싶다.

심사위원 : 박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