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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싹 / 임춘보

 

  명태는 먹태가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접시 위에 잘게 찢어진 생선의 살점들을 보며 장 부장은 확신했다. 심해를 헤엄치던 생선이 값싼 마른안주가 되고 싶었을 리 없다. 하지만 식품으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면 심해의 기억은 잊어야 한다. 야망을 품을 거라면 차라리 질 좋은 황태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게 바람직하다. 플라스틱처럼 딱딱하게 굳은 지느러미를 움직이려 애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현실감각이 없는 먹태는 공동체에도 해를 끼친다. 함께 노끈으로 꿴 다른 생선들에게 애꿎은 희망이나 서글픔만 심어주기 때문이다.

  말이 많은 김 과장이 퇴사한 이 대리의 근황을 떠벌리고 있었다. 이 대리가 작업실 겸 카페를 오픈했는데 너무 예쁘더라고요. 기계적으로 먹태 구이를 씹던 장 부장의 입술이 동작을 멈췄다. 입안에 든 생선의 거칠고 마른 살점이 쓰게 느껴졌다. 소주를 한 모금 삼켜내는 것과 동시에 장 부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고작 직장생활이 힘들다고 낙오하는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말이야!

  이 대리의 인스타그램을 구경하던 직원들은 조용히 핸드폰을 끄고 입을 다물었다. 오래된 민속주점의 길쭉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열댓 명의 직원들이 둘러앉아 있다. 장 부장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직원들을 못마땅한 눈으로 훑었다. 희끗하고 버석대는 머리털을 가진 장 부장과는 달리 부루퉁한 얼굴들 위로 쏟아지는 그들의 검은 머리털에서 아직 새것 같은 윤기가 흘렀다. 테이블 위에는 부스러기만 남은 먹태 구이와 비계가 떠다니는 돼지 찌개, 계란말이 몇 점과 음식물이 묻은 나무젓가락들이 섞여 있었다. 법인카드가 아닌 장 부장의 사비로 내는 술상은 늘 이렇게 비루했다. 신입사원이 누린내 나는 돼지 찌개를 한 숟가락 떠먹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장 부장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은 맥주만 홀짝댔다. 회식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는 이는 장 부장뿐이었으니, 흥이 나서 술을 실컷 들이붓고 취한 이도 장 부장밖에 없었다.

  장 부장은 이 대리의 소식을 듣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퇴사하기 전 이 대리는 고생이라고는 모르는 말간 눈으로 눈물을 질질 짰다. 남들 다 하는 야근이, 남들 다 듣는 군소리가 그리 힘들다며 앓는 소리를 하는 요즘 애들은 도태되어야 마땅하다. 장 부장은 술잔에 반쯤 남아있는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온몸에 열이 올랐다. 이 대리가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서 다행이라며 말을 전하는 김 과장의 의중마저 의심스러웠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는 밤새 야근하고도 선배들이 새벽에 한잔하러 가자고 하면 거절을 못 했어. 새벽 네 시에 술자리가 파하면 회의실에서 새우잠을 자곤 했지. 거기에 비하면 요즘은 직원들 개인 시간도 존중해주고 자유롭지 않나? 이 대리는 아직 젊어서 진짜 고생스러운 게 무엇인지 잘 몰라. 그런 조그만 난관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잘 될 수가 있겠어!

  장 부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훈계를 늘어놓았다. 술집의 노란 조명이 사람들의 얼굴 위로 덧씌워졌지만, 흥분과 취기로 달아오른 장 부장의 혈색을 감추기에는 부족했다. 장 부장은 오늘 회식의 목적도 잊은 채 격분했다. 말을 꺼냈던 김 과장이 죄지은 얼굴로 어깨를 움츠렸고 나머지 직원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직원들의 얼굴에 묘한 비소가 흘렀지만, 술이 얼큰하게 취한 장 부장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도, 이 대리 빈자리가 컸는데 찬희 씨가 성실하게 해주니 다행입니다.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듯 윤 차장이 화제를 돌렸다. 장 부장은 게슴츠레 풀린 눈으로 제 술잔에 술을 채우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 남자답지 않게 굳은살 하나 없는 뽀얀 손이었다. 고개를 들자 천진하게 씩 웃는 신입사원과 눈이 마주쳤다. 성실하긴 뭐가 성실해! 하고 내지르고 싶은 장 부장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윤 차장은 신입사원의 칭찬을 바쁘게 늘어놓았다.

  찬희 씨야말로 요즘 애들답지 않게 씩씩하고 성실하죠. 장 부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윤 차장의 말이 맞긴 했다. 신입사원인 김찬희는 성실하게 근무했고, 야근과 술자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 부장은 처음부터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억지스러운 트집을 잡아도, 호되게 혼쭐이 나도, 그는 도무지 기죽는 법이 없었다. 언젠가 싹수가 노란 놈이라는 핀잔을 주었더니, 김찬희는 생글생글 웃으며 맞받아쳤다.

  햇빛을 못 봐서 그렇습니다, 부장님. 이 주 동안 야근을 했더니 얼굴이 누렇게 떴어요.

  응석과 애교가 섞인 신입사원의 말에 사무실의 직원들은 낄낄대며 웃었다. 어디서 말대꾸냐고 호통칠 타이밍을 놓친 장 부장은 짜증을 억누르고 제 자리로 돌아왔다. 스물일곱 살인 김찬희의 얼굴은 주눅이 베여있던 20년 전 장 부장의 얼굴과 너무 달랐다. 장 부장은 그것이 아니꼬웠다. 하지만 윤 차장이 신입사원을 추켜세우고 신입사원이 더 열심히 하겠다며 싹싹하게 구는 상황에서 분위기를 깰 수는 없었다. 장 부장은 신입사원의 잔에 소주를 넘치게 채워주며 점잖게 말했다.

  지금처럼 열심히 하다 보면 잘하게 돼. 아까 회의실에서 했던 말은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다 자네 잘되라고 그러는 거지. 내가 그래도 뒤끝은 없는 사람이야. 내가 자네 나이일 적에는 말이야. 한 달에 80만 원을 받으면서 일했어. 물론 여기까지 오는 길은 쉽지 않았지. 나는, 그때 나는, 내가 당신들처럼 새파랗게 젊었을 때는 말이야.

  장 부장은 알코올에 찌들어 감각이 무뎌진 혓바닥을 열심히 놀렸다. 직원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하품을 참았다.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가엾고, 제 시련이 가장 혹독한 것이며, 제 깨달음이 가장 값진 것이라 믿는 사람의 이야기는 늘 지루하다. 달팽이관에 새겨질 만큼 듣고 또 들었던 장 부장의 조언들은 싸구려 돼지 찌개 냄새가 났다.

*

  회식 때마다 술에 취한 장 부장이 늘어놓는 그의 지난한 인생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외아들이지만, 우리 어머니는 나를 응석받이로 키우지 않았어.

  장 부장은 어머니에게서 처음 체념을 배웠다. 서른 살에 과부가 된 어머니가 홀몸으로 외아들인 장 부장을 키워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도 모자 사이의 돈독함을 의심하지 않았다. 의지할 곳이 아들밖에 없는 여인이 그 아들에게 베풀었을 사랑은 분명 헌신 그 이상이리라.

  하지만 가끔 장 부장은 의구심이 들었다. 장 부장의 기억 속에는 어머니의 얼굴보다 어머니의 등이 더 많았다. 말린 멸치처럼 작고 야윈 어머니의 구부정한 등. 손을 뻗어 희미한 온기를 더듬어도 쉽게 돌아봐 주지 않던 단단한 등이었다. “영준아.” 하고 상냥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일도 드물었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등지고 앉아 빨래를 개거나, 방바닥을 닦거나,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영준은 지친 얼굴로 잠을 청하는 어머니에게 어린애다운 수다를 늘어놓았다. 선생님께 들었던 칭찬, 소풍날 먹고 싶은 음식, 받아쓰기 성적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어머니는 꼭 필요한 질문 이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 어머니가 새벽부터 밤까지 일해야 하는지, 왜 소풍 날 오실 수 없는지에 대한 다정한 대답을 어린 영준은 듣지 못했다. 영준은 점차 어머니의 응답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인생의 모든 굴곡에서 누군가에게 공감과 위로를 얻는 것을 체념하게 되었다. 꼭 닮은 모자는 함께 식사할 때도 아무 말 없이 음식물을 씹어 삼키는 일에 집중했다. 그래서 홀어머니의 별난 아들 사랑을 아내에게서 전해 들었을 때 영준은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영준은 무심한 말투로 그렇게 대꾸했다.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 투정 부리지 못하는 아이는 어른스럽다는 칭찬을 받으며 자란다. 그 말은 촉진제가 되어 아이를 좀 더 빨리 어른으로 키운다. 어머니와 단둘이 살던 지하 단칸방은 한낮에도 축축한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영준은 작고 어두운 방 안에서 혼자 숙제하고, 밥을 먹고, 어머니를 기다렸다. 밤이 오기를 기다렸고,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기다리고 참아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천장에 맞닿아있는 가로로 긴 창문에는 하늘대신 콘크리트 바닥이 보였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 그 발길에 이는 뿌연 먼지, 구겨진 코카콜라 캔. 그런 보잘것없는 풍경마저 방범창의 창살들이 조각조각 잘라냈다. 나이키 운동화를 신는 친구들 사이에서 낡은 운동화의 뒷굽을 꺾어 신으며 영준은 자신의 욕망을 솎아내고, 자르고, 다듬었다. 노 거목의 특징과 정취를 축소해 인공적으로 배양해낸 분재처럼 영준은 몸집이 작은 어른으로 유년기를 보냈다.

  코밑이 거뭇해지는 사춘기가 왔을 때도 영준은 또래들처럼 치기 어린 행동을 하지 않는, 아니 할 수 없는 성실한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십 대 소년답게 그도 열일곱 살의 봄에 한 번도 바란 적 없는 열병을 앓았다.

  고등학교 입학하는 날, 같은 버스를 탔던 여학생에게 반했지. 매일 아침 버스를 타면 그 얼굴부터 찾았어. 우연히 마주치는 날이면 그날은 운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그 애의 꿈을 자주 꾸었던가. 매끄러운 뺨을 쓰다듬고 싶다고 생각했던가. 어느 날 아침, 버스 뒷좌석에 앉아 창문을 응시하는 여학생의 옆모습을 보다가 영준은 문득 슬퍼졌다. 졸업하면 다시는 볼 수 없겠지. 무슨 용기였는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말을 걸어보자. 이름을 물어보자. 영준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여학생이 앉아있는 자리 앞으로 가서 섰다. 코끝과 손이 새빨갛게 얼어붙는 추운 날이었는데도 손바닥이 땀으로 젖었다. 잔뜩 긴장한 손을 감추기 위해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었을 때, 겉면이 닳아서 흐물대는 종이가 축축한 손바닥에 닿았다.

  영준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쥐어준 천 원짜리 지폐 한 장. 지폐를 내밀던 핏줄이 불어진 손과 마디가 굵은 손가락 끝에 박힌 빛바랜 손톱도 떠올랐다. 사흘 동안의 왕복 버스비로 써야 할 돈이었다. 덜컹거리는 버스의 진동에 맞춰 여학생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서 흐트러지는 것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영준은 여학생과 함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 여학생과 함께 소보로빵을 먹는 것을 상상했다. 주머니 안의 지폐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찌푸리는 법을 모를 것 같은 여학생의 반듯한 이마가 경멸로 구겨지는 모습이 그려졌다. 준비한 모든 단어가 목구멍에서 사그라들었다. 제 곁에 선 남자애의 상상을 알 길이 없는 여학생은 표정 없는 얼굴로 창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영준은 발걸음을 옮겨 여학생 곁을 떠났다. 결국 영준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여학생에게 말 한번 걸어보지 못했다.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어. 우리는 교복도 입지 않은 세대라서 명찰을 확인할 수도 없었지.

  여학생의 얼굴도 흐려지고 그날의 비참한 심경도 무뎌졌지만, 영준은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겨울이 지나고 영준은 대학생이 되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성적보다 낮은 등급의 학교를 지망했다. 배우고 싶은 전공보다는 취업이 잘되는 학과를 선택해야 했다. 무릎이 늘어난 청바지를 입고 매일 도서관에 앉아 책장을 넘기는 그를 두고, 동기들은 ‘붙박이장’이라며 놀렸다. 영준은 매 학기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 그러고도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충당해야 하는 삶을 그들에게 설명해내지 못했다.

  입학 후 처음 맞이하는 대학 축제 기간에도 영준은 도서관에서 자리를 지켰다. 멀리서 노랫소리와 함성이 흐릿하게 들렸다. 영준은 같은 구절을 반복해서 읽다가 기지개를 켰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흐드러진 라일락이 봄밤에 젖어있었다. 꽃가지들이 천천히 흔들렸지만 느린 봄바람도 라일락의 향기도 열람실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자신의 뒷모습을 상상했다. 허탈한 한숨이 새어 나오려는 순간, 영준은 펜을 쥐고 있는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펼쳐진 책의 맨 윗줄을 다시 침착하게 읽어 내려갔다. 지금은 김밥과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회비를 걷는 학과 모임은 눈치를 보며 빠져야 하지만 그런 것쯤은 괜찮다. 스무 살의 영준은 자신의 개화가 머지않았다고 믿었다. 늦더라도 봄은 오고야 마니까.

  하지만 졸업을 앞두고 IMF 외환위기가 덮쳤다. 대학만 나오면 그럭저럭 괜찮은 직장에 근무할 수 있었던 선배들과 달리 영준은 제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직장에 입사해야 했다. 동기들이 대학원으로, 유학으로 도피하는 동안 그는 허겁지겁 사회로 뛰어들었다. 낮은 급여의 중소기업이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몇 년 후, 성적이 형편없던 동기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그가 선망하던 직장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애초에 삶의 난이도가 다르다는 것을 이미 사무치게 잘 알고 있었던 영준은 억울하거나 분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갓 입사한 영준은 면접을 볼 때 입었던 흰 와이셔츠 한 벌로 반년을 버텨냈다. 이틀에 한 번씩 셔츠를 빨아가며 입었는데, 퇴근 후 빨아둔 셔츠가 채 마르기도 전에 출근하는 날이 많았다. 습기가 덜 빠진 차가운 셔츠가 맨살에 닿을 때마다 살갗에 소름이 일었다. 축축한 셔츠 위로 이른 새벽의 찬 공기가 내려앉을 때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신입사원인 영준의 자리는 사무실 출입구 앞 책상이었다. 서랍장도 없는 책상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에게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 좀 더 넓은 책상에 앉고 과장 직함을 달았을 때 또래보다 늦은 결혼을 했다.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된 후부터 어머니의 성화로 토요일마다 선을 봤다. 영준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 만한 타입이 아니었다. 가난이, 피로가, 우울이 그의 얼굴 근육을 팽팽하게 경직시켰고, 매력적인 표정을 지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시작도 해보지 않고 포기한 첫사랑을 곱씹으며, 영준은 몇 번쯤 용기를 내서 여성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들은 미소를 지었지만, 다음 기회를 주지는 않았다. 선 자리에 나온 여성들 대부분은 커피 한잔을 비워내기 바쁘게 짧은 인사와 함께 자리를 떴다. 수십 번의 거절을 당하고, 주말마다 정장을 차려입는 일에 지쳐갈 때쯤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소매가 닳은 카키색 원피스를 입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영준은 커피잔을 매만지는 거칠고 투박한 손을 심드렁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통통한 팔다리도, 골격이 큰 체형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싫었던 것은 영준을 닮은 그녀의 표정이었다. 영준은 좀처럼 웃지 않는 지루한 얼굴을 마주 보며 잔에 남은 커피를 빠르게 비워냈다.

  하지만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도 아내는 다른 여성들처럼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영준은 망설이다가 자리를 옮겼다. 부대찌개를 먹고, 근처 공원을 걷고, 아내를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결혼 후 그 이야기를 했더니, 맞선이 처음이었던 아내는 언제 작별 인사를 건네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며 황당해했다. 버스 안의 소녀처럼 곁에 서는 것만으로도 손이 땀에 젖던 긴장감은 없었다. 하지만 그때의 그녀는 영준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여자였다. 이만하면 되었다. 영준은 겨우 취업에 성공했을 때처럼 그렇게 마음을 다독였다.

  결혼을 하고 1년 후에 아이가 태어났다. 눈과 코가 영준을 그대로 빼다 박은 아이였다. 6명으로 시작했던 중소기업이 이제는 지방에 지점을 낼만큼 성장했고, 장영준 사원은 장 부장이 되었다. 잘 살았냐고 묻는다면 망설이겠지만, 열심히 살아왔냐고 묻는다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인생이었다. 영준은 그것이 못내 자랑스러웠고, 서글펐고, 아까웠다.

*

  조악한 식재료들이 내장 속에서 뒤섞이고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 자꾸만 트림이 나왔다. 장 부장은 빵빵하게 차오른 오줌보를 비워내고,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화장실을 나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들이 웃어 재끼는 소리가 복도까지 들렸다. 장 부장이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직원들은 얼굴의 웃음기를 거두었다. 자리에 앉은 장 부장이 피로한 얼굴로 벽에 머리를 기대자, 최 대리가 눈치를 살피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최 대리는 얼마 전부터 롱 보드를 배우고 있다며 핸드폰으로 자신이 찍은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신입사원은 크로키와 유화를 배우고 있었고, 김 과장은 휴가 때 가족들과 스쿠버다이빙을 했다고 한다.

  장 부장은 꾸벅꾸벅 졸며 생기가 넘치는 그들의 일상을 묵묵하게 들었다. 가끔 그는 직장생활에 청춘을 갈아 넣지 않는 직원들이 야속했다. 인내하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는 삶을 요즘 애들은 도통 존경할 줄 몰랐다. 그 애들은 하고 싶은 것은 뭐든 하고, 싫으면 언제든 뛰쳐나갔다. 취미생활과 여행지에 대한 담소가 이어지는 가운데, 장 부장은 돼지찌개 표면에 하얗게 응고된 기름 덩어리를 멀거니 바라보며 자리를 지켰다. 돼지는 고기가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나무도 젓가락 따위가 되고 싶지 않았을 테고, 계란이 계란말이가 된 것은 끔찍한 일이다. 문득 자신의 살찐 배가 보였다. 개 목줄처럼 힘없이 늘어진 넥타이와 땀에 젖어 눅눅해진 회색 양말도 보였다. 옆구리와 배에 식어 빠진 기름이 끼지 않았을 그 시절에는, 장 부장도 장 부장이 되고 싶지 않았다. 볼품없이 늙은 직장인 따위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도 여행을 가고 싶었어. 여행을 가려고 사표를 쓴 적도 있다고.

  꾸벅꾸벅 졸던 머리를 식탁에 쿵 떨어뜨리며, 장 부장이 중얼거렸다. 한숨 같은 장 부장의 말은 직원들의 떠드는 목소리에 묻혔다. 곁에 앉은 윤 차장만이 장 부장의 혼잣말을 듣고는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평소에 여행도 안 가시는 분이 왜 여행 가려고 사표까지 쓰셨어요?

  장 부장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힘겹게 내쉬는 숨에 술 냄새가 묻어있었다. 윤 차장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 잔을 건넸다.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냉수가 식도를 따라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장 부장은 싸늘한 찬바람이 머릿속을 휘저어 놓았던 3월을 기억했다. 갓 입사했을 때 혼자 살던 낡은 원룸과 그 방의 습한 공기, 벽지에 슬어있던 곰팡이 자국을 떠올렸다.

  스물일곱 살이었던 영준은 버텨내기도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주말도 없이 야근하고, 휴가도 반납하고 근무했다. 영준은 합리적이지 않고 경제성이 떨어지는 감정들을 거침없이 잘라냈다. 하지만 정원수처럼 동그랗게 손질한 마음은 가다듬는 그때뿐, 자꾸만 불쑥불쑥 가지를 뻗고 잎을 키웠다. 입사한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영준은 사직서를 썼다. 힘겹게 펜을 움직여 서명하고는 숨을 훅 들이켰다. 하지만 오전 내내 사직서를 들여다보다가 결국 서랍 속에 집어 넣어버렸다. 사직서를 쓰게 된 계기는 아주 사소했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마무리 지었던 금요일 오후, 영준은 미열과 오한을 느꼈다. 퇴근 후 병원을 찾은 그에게 의사가 물었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영준은 제 몸을 찬찬히 살피며 고통을 호소했다. 아무리 두드려도 뻐근한 목, 어깨, 손목, 허리의 통증, 이제는 만성이 되어버린 두통과 소화불량, 눈의 이물감, 좀처럼 가시지 않는 피로. 영준은 처방받은 약을 가방에 쑤셔 넣으며 병원을 나왔다. 그리고 퓨즈가 끊어진 기계처럼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한 발짝 내디딜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힘들어.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한 마디에 머릿속 어딘가가 파열음을 내며 부서졌다.

  몸살은 다음 날까지 이어졌고 영준은 입사 후 처음으로 병가를 냈다. 종이 상자 같은 자취방에 누워 눈앞에 보이는 벽과 천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암막 커튼 사이로 새어 나온 햇살이 그의 방을 대각선으로 길게 자르고 있었다. 빛줄기 위로 부유하는 먼지가 반짝거렸다. 하얀빛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기자 곰팡이가 슬어있는 벽지가 보였다. 남아메리카 대륙 같네. 처음 집을 보러온 날도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칠레, 쿠바, 브라질, 아르헨티나의 위치를 천천히 눈으로 더듬었다. 벽지의 얼룩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는 그에게 부동산 중개인은 월세를 만 원 깎아주겠다며 조심스레 제안했고, 영준은 망설임 없이 집을 계약했다.

  남아메리카 대륙을 가로지르는 햇살을 보다가 영준은 꿈에서 깬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좁고 어두운 방 안에 갇혀 어제처럼 살다가 나는 죽겠지. 벌떡 몸을 일으켜 창고에서 먼지가 쌓인 캐리어를 꺼냈다. 옷장의 옷을 와르르 쏟아냈다. 쫓기듯이 짐을 싸서 일어섰지만, 현관문 앞에 우뚝 선 영준은 차마 문고리를 잡지 못했다. 낡은 철문이 단호하게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걸 봤어. 그래서 며칠 뒤에 바로 사표를 제출했지.

  술에 취해 몸이 고꾸라진 장 부장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뭘 보셨는데요?

  어느새 장 부장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던 최 대리와 신입사원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퇴사한 직원을 향해 약해빠진 패배자라며 욕을 하던 장 부장이 신입사원일 적에 사표를 썼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한편으로는 과거의 자신을 새까맣게 잊은 장 부장이 가엾었다. 고개를 든 장 부장이 몽롱한 눈빛으로 말했다.

  싹. 싹이 자랐지. 창문에서.

  네? 뭐가 자라요?

  장 부장은 잠꼬대처럼 창문틀에서 풀이 자랐다며 중얼거렸다.

  창틀 모서리에 연두색의 작은 잎이 뾰족하게 돋아있었다. 영준은 믿을 수 없어서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보았다. 삼월이라지만 아직은 추웠다. 창문 틈의 때처럼 끼어있는 아주 적은 양의 먼지 속에서 새싹이 잎을 틔우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창틀의 먼지와 한 덩이가 될 것 같은 조그만 풀이었다. 창틀에 손을 대보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금속의 한기가 손바닥을 통해서 전해졌다.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엉뚱한 곳에서 싹을 틔우는 그 풀이 가엾기보다는 어리석게 느껴졌다. 이것은 제가 자라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바람이 창문을 우악스럽게 흔들었다. 정오가 지나면 해도 들지 않는 북향집이었다. 창문틀에는 잎을 적셔줄 물도, 양분을 줄 흙도 없었다. 내일이면 강풍에 바싹 말라 부서질 것이 분명했다. 영준은 무심한 얼굴로 창문을 쿵 닫았다.

  하지만 예측과는 달리 그 풀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며칠 후, 영준은 양팔을 벌리고 있는 잎들 사이에서 더 작고 더 옅은 색의 싹이 돋아난 것을 발견했다. 영준은 고개를 빼고 허리를 숙여 풀을 아주 가까이에서 바라보았다. 손을 둥글게 말아 풀 위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잠시라도 살이 에이는 바람을 막아주고 온기를 나누고 싶었다. 손안에서 그 풀이 몸을 떠는지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코끝이 시큰해졌다. 마지못해 살아내는 하루들이 쌓여가는 동안, 어떤 것들은 싹을 틔우고, 잎이 자라고, 또 시들어간다. 무서웠다. 갑자기 조급해졌다. 심장 부근에서 무언가 툭툭 살을 찢고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영준은 책상 속의 사직서를 꺼내 제출했다.

  여행은 다녀오셨어요?

  모두 알고 있는 결말의 이유를 캐내려는 듯 최 대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 여행을 갔었더라면 장 부장이 지금 이 자리에 없을 테니, 그는 결국 떠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장 부장은 허탈하게 웃었다.

  못 갔어. 어머니가 아프셨거든.

  사직서를 제출한 다음 날,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영준은 사직서를 낼 때보다 더 공손한 태도로 머리를 조아리며 말해야 했다. 어머니가 편찮으십니다. 번복해서 죄송합니다. 사직은 철회해주십시오. 그의 목소리에는 비굴함보다 더 초라한 절박함이 담겨있었다. 어머니는 2년 후 집에서 눈을 감으셨다. 그날도 특근해야 했던 영준은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사직서를 썼다가 찢었지.

  거래처의 이사가 회식 자리에서 욕설과 삿대질을 퍼부었던 그 날, 영준은 소파에서 잠든 아내의 얼굴을 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여보, 나 회사 그만두고 잠시 쉴까?

  영준의 목소리에 아내가 부스스 눈을 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 곧 아빠가 될 사람이 책임감도 없어?

  아내가 졸음이 묻어있는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영준은 아내의 부푼 배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야, 그냥 해본 소리야.

  영준은 고개를 저으며 아내를 달랬다. 임신 후 잠이 부쩍 많아진 아내는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십 년 동안 부었던 적금의 만기일이 다가올 때도 영준은 사직서를 썼었다. 그동안 영준은 차장으로 진급했고, 해가 잘 드는 남향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거실의 전면 유리를 통해 밀집된 주택가와 도로가 보였다. 제 몫을 해냈다는 벅찬 기쁨이 영준의 입가에 피어올랐다. 영준은 아내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내는 거실에서 아이의 머리를 땋아주고 있었다.

  나, 여행이 가고 싶어.

  한참을 망설이다가 뱉은 말인데,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물정 모르는 아이의 투정처럼 들렸다. 아내가 영준을 싸늘하게 돌아보며 물었다.

  지원이 학원비는 어떡하고? 집 대출은 안 갚을 거야?

  영준은 기가 죽어 힘없이 중얼거려야 했다.

  그냥 해본 말이야.

  아내가 신경질적으로 안방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영준을 팔을 벌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결혼 십 주년을 앞두고 영준은 아내와 자주 다투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자 장 부장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장 부장은 양팔을 식탁에 괴고 이마를 짚었다. 얼굴이 뜨거웠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잘못 보신 것 아닙니까?

  신입사원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한쪽 눈썹을 찌푸리고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장 부장의 얼굴을 알아채지 못한 신입사원이 물었다.

  어떻게 겨울에 창틀에서 풀이 자랄 수 있습니까? 물도, 흙도 없는데요.

  아니야. 있었어. 분명히 있었어!

  장 부장은 벌컥 역정을 내며, 제 말을 믿지 않는 신입사원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초점이 풀린 눈동자 위로 눈꺼풀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단호한 음성도 입 밖으로 튀어 나가자 옹알이처럼 뭉개졌다.

  사무실의 화초들은 영양제도 주고, 오후엔 창가에 내놓고 광합성도 시키는데. 한 달을 못 버티고 죽어 나가는….

  신입사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장 부장이 휘젓는 팔에 맥주병이 부딪치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곁에 앉은 직원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날카롭게 부서진 유리병 사이로 거품이 낀 노란 액체가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장 부장은 신입사원의 뺨이라도 칠 것처럼 양팔을 휘저었다. 말도 안 되는 게 가끔 자라기도 해! 어리석고 눈먼 것이 제 주제도 모르고 돋아날 때가 있어! 장 부장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구멍에서 토해지는 음성은 천박한 주정뱅이의 고성일 뿐이었다.

  너 이놈의 새끼, 어린놈의 새끼! 네가 뭘 안다고 이 자식이!

  분노와 취기에 젖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부장님, 취하셨습니다.

  윤 차장이 곁에서 장 부장의 팔을 잡았다.

  찬희 씨, 자랄 수 있어. 민들레도 아스팔트에서 자라잖아. 좁은 틈새로 뿌리를 깊게 내리는 식물이면 가능해.

  윤 차장이 재빠르고 침착한 어투로 말했다. 신입사원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시선은 장 부장을 향했다. 장 부장은 윤 차장의 대답을 듣고 머릿속의 불길이 꺼지는 것 같았다. 장 부장은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휘젓던 팔을 내려놓고 허공을 응시했다. 그래. 그것은 분명히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곳에서 가느다란 뿌리로 벽을 뚫고 있었다. 윤 차장이 달래듯이 말했다.

  부장님, 너무 취하셨는데 이제 귀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장 부장은 고개를 돌려 윤 차장을 마주 보았다. 윤 차장은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지 못하는 장 부장을 부축하는 모양새였다. 맥주병을 깬 후부터 직원들은 바짝 얼어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장 부장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너무 취했다. 너무 취해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지껄였다.

  그래. 이제 가야지. 일찍 가서 자야 내일 출근을 하지.

  장 부장은 뻣뻣하게 굳은 몸을 움직여 바닥에 떨어진 외투를 집어 들었다. 최 대리가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장 부장이 휘청대며 몸을 일으켰다. 눈동자의 초점은 잃었지만, 평소처럼 위엄 있는 표정으로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내일 지각하지 말라고. 나 때는 말이야, 새벽까지 회식해도….

  부장님.

  윤 차장이 말을 끊고 장 부장을 불렀다. 장 부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윤 차장을 돌아보았다. 예의 바른 윤 차장이 제 말을 가로막는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부장님, 내일부터는 일찍 일어나지 않으셔도 돼요.

  윤 차장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묻어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장 부장이 눈썹을 치켜 올리자, 윤 차장이 망설이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부장님 송별회였잖아요.

*

  너무 취하신 것 같던데, 혼자 가실 수 있을까?

  윤 차장이 화장실 입구를 힐긋 돌아보며 말했다. 당혹감과 충격이 번지던 장 부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장 부장은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걸어갔다. 직원들은 장 부장의 뒷담화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퇴사하는 날에도 잔소리를 늘어놓는 상사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장 부장은 퇴사할 때까지 이게 무슨 진상이래. 댁에 연락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최 대리, 몰랐어?

  김 과장이 몸을 굽혀 한껏 목소리를 낮춘 채 말했다.

  장 부장님, 3년 전에 이혼하셨잖아. 아이랑 사모님은 대전으로 가시고, 지금은 장 부장님 혼자 계셔.

  정말요? 몰랐어요.

  뭐 좋은 일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겠어. 최근에 입사한 사람들은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안됐지, 뭐. 이제 저 나이에 이직도 쉽지 않으실 텐데.

  장 부장님이 20년 근무하셨죠?

  맞아. 어려울 때 입사하셔서 정말 고생이 많으셨대.

  그렇게까지 회사에 헌신했는데 너무했지.

  회사에 헌신하는 건 바보짓이라니까요. 화장실에 너무 오래 계시는데요? 잠드신 건 아니겠죠?

  제가 가볼게요.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직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입사원이 장 부장이 떨어뜨린 외투를 챙기며 일어섰다. 신입사원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가방을 둘러매자 김 과장이 한시름 덜었다는 얼굴로 신입사원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찬희 씨가 고생 좀 해줘.

  신입사원이 화장실의 문을 열었을 때, 영준은 변기통을 붙잡고 내장 속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게워내고 있었다. 위액에 퉁퉁 불은 누르스름한 먹태가 변기 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황태도, 아니 인간의 살점도 되지 못한 먹태의 찌꺼기를 보고 영준은 더욱 서러워졌다. 누군가 자기 등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영준이 구역질을 멈추고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비틀대며 돌아보니 주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신입사원의 매끈한 얼굴이 보였다.

  부장님, 집에 가셔야죠.

  외투를 한 손에 든 신입사원이 말했다. 입꼬리가 축 처진 입을 힘겹게 움직이며 영준이 중얼거렸다.

  있었어. 정말로, 그때는, 그런 것이 있었어.

  영준의 꼬부라진 혀가 맥락 없는 단어들을 뱉어냈다. 신입사원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영준을 위로하기 위해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흰자가 깨끗한 눈이 장 부장을 마주 보았다.

  부장님, 이제 남미횡단 하실 수 있어요. 원하시는 것들, 다 하실 수 있어요.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영준이 몸을 휘청대자 신입사원이 다급하게 영준의 한쪽 팔을 붙잡았다. 영준의 얼굴이 창백하게 일그러졌다. 돼지는 고기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고기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핏물을 빼고, 불판에 몸을 지지고, 고춧가루와 매운 마늘로 온몸을 절인 고깃덩어리에게 다시 돼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위로는 너무 가혹했다. 그것은 돼지고기를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차라리 좋은 등급의 상품으로 취급해주는 것이 옳았다.

  장영준 부장은 20년을 다닌 직장에서 정리해고를 당했다. 함께 책상을 비워야 할 동료 중 대부분은 오히려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실업급여를 몇 달쯤 받을 수 있죠? 담담하게 내일을 이야기하는 이들 사이에서 영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 중 가장 큰 두려움을 감당해야 하는 이는 더 오래 근무했던, 더 나이가 많은, 더 많은 것들을 포기했던 영준이었다.

  자리로 돌아온 영준은 컴퓨터도 켜지 않고 모니터의 검은 화면을 한참 바라보았다. 지친 얼굴이 검은 화면에 흐릿하게 비쳤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무실은 평소처럼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와 여기저기서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로 분주했다. 그곳에서 영준은 고장 난 부품처럼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칠이 벗겨진 철제 책꽂이를 바라보았다. 과장으로 승진했을 때 자리를 옮기면서 샀던 책꽂이였다. 책꽂이에는 모서리가 마모된 종이 파일이 빼곡하게 꽂혀있다. 삐걱대는 책상도, 바퀴 하나가 부러진 의자도, 영준과 함께 닳아있었다. 이제는 아픈 어머니도, 눈을 흘길 아내도, 책임져야 할 아이도 없다. 몇 번씩 자리를 박차고 싶었던 이곳을 겨우 떠날 수 있게 되었는데 영준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컴퓨터의 전원을 누르자 비프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삐삐삐삐삐삐. 무엇이 고장 난 것인지 영준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화장실 문밖에서 새어 나왔다. 신입사원이 변기통을 정리하고 외투와 가방을 추스르는 동안 영준은 세면기를 양손으로 부여잡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거울 속에서 미간과 입가에 주름 팬 반백 발의 남자가 영준을 바라보았다. 창틀에서 싹을 틔우던 그 풀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문득 창문을 열어보니 풀이 있던 자리에 빗물만 고여 있었다. 썩어 문드러졌는지 바짝 말라 부서졌는지 알 수 없었다. 솎아내야 했던 회한들 사이에 그 풀이 섞여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영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미처 발아하지 못한 그 풀의 씨앗을 찾으려는 것처럼 영준은 거울에서 시선을 거둘 줄 몰랐다. (끝) 


 

  <당선소감>

 

   "날마다 끈질기게 자랄 것“

  수험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소설을 썼습니다. 시험을 치고 합격예정자 발표를 기다리는 한 달 동안 단편소설을 한 편씩 썼습니다. 나는 3년 내내 낙방했고, 그 덕에 단편소설 여섯 편을 완성했습니다. 열등감과 불안을 잊기 위해 글을 썼는데 돌이켜보니 잊지 않기 위해 썼던 것 같기도 합니다. 세 번째 소설을 쓰고 나서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능이 없어도, 끝내 응답받지 못해도, 앞으로도 지금처럼 계속 쓰겠지라고. 금방 사그라들 호기심으로 치부했던 열정이 단단히 뿌리내렸다는 것을 뒤늦게 인정해야 했습니다.

  당선 연락을 받은 후 밤잠을 설쳤습니다. 감히 꿈꿔본 적도 없는 길의 통행증을 손에 쥔 것처럼 기뻤지만 사실은 겁이 났습니다. 글쓰기는 늘 어려웠습니다. 나는 말을 갓 배운 어린애처럼 더듬댔습니다. 어떤 날은 말을 잃은 노인처럼 아무것도 토해내지 못했습니다. 내가 쓰는 것이 소설이 될 수 없을까 봐,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이야기가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앞으로도 깜빡이는 커서를 기약 없이 바라보는 날이 많겠지만, 지칠 때면 오늘 얻은 용기를 꺼내 쓰겠습니다. 이제 시작하는 무지렁이에게 과분한 상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쌓아만 두고 읽지 않은 책들이 부끄럽고, 글쓰기에 매진하지 못했던 어제도 아쉽습니다. 열심히 배워서 날마다 끈질기게 자라겠습니다.

  빚진 이들이 많습니다. 저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지인들에게 졸고를 들이밀며 읽어달라고 괴롭혀왔습니다. 재미없는 글을 읽어준 홍과 미화, 이수에게 고맙고, 합평해주셨던 지인들에게도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하지 않도록 지원해준 엄마에게 가장 고맙습니다. 어리석은 나를 인내해주고 보듬어주는 친구들과 고마운 인연들, 가르침을 주신 김종광 교수님, 손홍규 교수님, 서울디지털대학교의 문예창작학과 교수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기회를 주신 전남매일과 심사위원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1987년 대구 출생. 
● 계명대 건축공학과 졸업. 
●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 편입


 

  <심사평>

 

  

  젊은 패기·새로운 시도 의지 돋보여

  2022년 전남매일의 신춘문예에 응모한 원고들을 심사하면서 행간에 읽히는 젊은 패기와 새로운 시도를 향한 의지에 깊은 애정과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서사가 박진감 넘치는 작품은 사유가 공허하고, 인간의 내면을 치열하게 탐구하고자 한 작품은 서사의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는 식의 불균형이 흔히 눈에 띄었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서사와 사유를 함께 다루기를 요구하는 단편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해 앞으로 더 뜨겁게 연구하고 모색하기를 당부한다.

  마지막까지 당선을 겨룬 ‘창국아 내가 왔다’는 문장이 안정적이고 생동감 있는 장면과 인물의 묘사가 돋보였다. 5·18이 남긴 깊은 상처로 황폐해진 인간의 길고 오랜 아픔을 진정성있게 보여주었으나 결국 일정한 전형성과 상투성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부분이 아쉬웠다. 5·18이나 4·3 항쟁, 위안부 문제와 같은 역사적 비극을 소설로 다루고자 할 때 작가들이 늘 부딪치는 거대한 벽이 있음을 유념하기 바란다. 그 자체로 인간의 이성을 넘어서는 거대한 역사적 비극 앞에 서면 허구와 상상력은 돌연 구차하고 초라해지곤 한다. 기록문학과 차별화하며 소설이 닿아야 할 문학적 성취의 고지가 어디인지 치열하게 모색하고 점검해야 할 것이다.

  당선작인 ‘싹’은 전형적으로 꼰대라 불릴만한 주인공의 내면과 외면을 균형적으로 묘사하며 그 비루한 괴리 사이에서 인물의 입체성을 확보하고 아연 페이소스를 자아내는 능숙한 솜씨로 읽는 내내 즐거움과 감동을 주었다. 거대서사나 기발한 설정에 기대지 않고도 삶 속의 흔한 장면들 속에서 얼마든지 참신하고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의 발굴과 전개가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앞으로 성취가 기대되는 재능있는 신인의 탄생에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 심윤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