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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이불 / 방희진

 

  “향이 너무 독하지 않아요?”

  퇴근길에 들른 수연은 그새 두 번이나 내게 물었다. 당연히 내가 동의할 것이라는 표정이었다. 집 안은 거실 베란다에서 행운목 꽃이 뿜어내는 향기로 가득했다. 한 뼘쯤 도막진 행운목을 사다가 수반에 담아주고 나중에 다시 화분에 옮긴 건 그 애였다. 베란다로 가 꽃을 피운 걸 신기해하더니, 요모조모 살펴볼 새도 없이 꽃향내에 진저리를 치며 거실로 뛰어들어왔다. 꽃은 저녁 무렵 피었다가 이튿날 아침에 다물었다. 그만큼 향기도 짙어지는 시간이었다.

“좋기만 하구나.”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갸웃하는 수연의 얼굴에 언뜻 딱해하는 빛이 스쳐갔다. 이모도 어쩔 수 없이 노인이네, 말하지 않아도 그런 의미일 터였다. 나는 그저 꽃대를 따라 뭉쳐 핀 볼품없는 흰 꽃이 분내보다 향긋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십 년 넘게 행운목 화분에 물을 주면서도 그게 꽃을 피울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 탓에 수연이 올 때마다 공기청정제부터 뿌려대며 수선을 부려도 집 안에 괴어 있다는 퀴퀴한 냄새가 늘 긴가민가하듯 꽃향기 또한 정체를 알기까지는 시간이 더뎠다. 내 눈에 꽃대가 들어왔을 때는 이미 자잘한 꽃망울이 제법 벌어진 뒤였다.

  수연은 차라리 평소의 구중중한 냄새가 낫다고 했다. 꽃향내가 향수 냄새처럼 메스껍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닮아 젊은 시절 립스틱 향내에도 멀미를 했다. 여덟 살 터울의 동생인 수연의 엄마를 건너뛰어 수연도 그랬다. 수연이 특히 못 견뎌하는 건 향수 냄새였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근처 누군가가 향수 냄새를 풍기면 모처럼 잡은 자리도 포기하고 멀찌감치 피해간다고 했다. 내가 낳은 삼남매 중에서는 향내에 예민한 아이는 없었다. 나는 떨어진 기력만큼이나 코가 무뎌진 뒤로는 웬만한 냄새쯤은 순하게 길들이고 사는 편이었다.

“거실 창문을 닫지 그러니.”

  나는 수연이 사온 호박죽을 쇼핑백에서 꺼내며 말했다. 그럴까? 나를 거들려고 식탁 쪽으로 오던 수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꽃향내가 아니더라도 시월 저녁은 창문을 열어놓기에는 서늘했다. 그러나 거실 창가로 간 수연은 창문에 손을 대는가 싶더니 그냥 돌아섰다. 겨울에도 창문 한 귀퉁이를 열어놓고 지내는 내 갑갑증을 떠올린 듯했다. 수연은 주방 쪽으로 되돌아오며 어쨌든 행운목 꽃이 핀 건 내게 길조라며 좋아했다. 제집에 있는 것도 꽃대를 내미는지 살펴봐야겠다고 했다. 도막진 걸 살 때 내 것을 함께 샀고, 뿌리를 내려 화분에 옮긴 것도 비슷한 시기였다. 하지만, 꽃이 핀다면, 아무래도 꽃대를 잘라버려야겠죠? 아무리 좋은 징조를 예고한다 해도 이 향내를 어떻게 견디겠냐고 했다. 나는 그런 수연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얘야, 모진 손이 꽃을 꺾는 법이란다. 향내가 독하다 한들 저대로 세상 보러 나온 걸 해쳐서야 되겠니? 수연은 더 대꾸하지 않았다.

  오늘은 수연의 봉급날이었다. 낮에 전화를 걸어 누룽지백숙으로 유명한 인근의 맛집을 예약하겠다는 수연에게 나는 호박죽이나 사오라고 일렀다. 이종들 생일이 죄다 이달이잖니. 시월에 애를 셋이나 낳았으니 삭신이 오죽 쑤시겠냐. 우스개처럼 덧붙였다. 수연은 실망하면서도 퇴근하자마자 빛의 속도로 달려갈게요, 라고 명랑하게 말했다. 수연이 교사로 일하는 초등학교는 서울 외곽에 있었다. 내가 사는 신도시에서 멀지 않은 거리였다.

  수연이 전자레인지에 호박죽을 데우고 냉장고에서 서너 가지 반찬을 꺼내 식탁을 차렸다. 달착지근한 호박죽이 입맛에 썼다. 나박김치는 국물이 시고 무 숙채는 양념이 가라앉아 마르고 싱거웠다. 수연은 퍽퍽 수저질을 하는데도 어쩐지 깨작거리는 느낌이었다. 반찬 탓이려니 하면서도 눈빛으로 수연을 나무랐다. 수연은 고갯짓으로 행운목이 있는 베란다를 가리켰다.

“넌 결혼할 맘이 영 없는 거니? 올해 지나면 마흔 쪽으로 부쩍 휘어질 텐데.”

“누군들 나일 안 먹나요? 지지고 볶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하라죠 뭐.”

“얜, 결혼을 취미로 하니? 재밌게 사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

  말해놓고 보니 잔소리였다. 언제부턴지 나는 수연을 만나면 당연하다는 듯 결혼 얘기를 입에 올렸다. 제 엄마를 대신해 간섭할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굴었다. 뻔한 길이 싫으면서도 문득 돌아보면 그 길에 깊숙이 들어와 있듯 사람 사는 일은 매사가 그런 것 같았다. 소녀 시절에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낭자한 웃음소리를 경멸했다. 까마귀나 까치가 깍깍대는 소리처럼 조심성이 사라진 웃음소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년의 어느 날 내 웃음 속에서 깍깍 소리를 발견하곤 정말 깍깍거리고 웃었다. 나도 말 많은 노인네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호박죽 한 그릇을 억지로 비웠다. 생목이 오르는 걸 꾹 참았다. 수저를 내려놓으며 수연 아빠의 안부를 물었다. 안성에서 배농장을 하는 수연 아빠는 오 년 전 동생이 암으로 죽은 뒤 바로 재혼했다. 고등학교 때 인근 여학교에 다니던 풋사랑 상대였다. 남편과 사별하고 안성 시내에서 작은 식당을 하고 있던 여자였다. 여자는 재혼하면서 식당을 접고 수연 아빠의 농장일을 돕고 있었다. 제 오빠처럼 재혼에 시큰둥하지는 않았지만, 수연은 그들 신혼부부가 이듬해 새집을 지어 옮겨간 뒤로는 발을 끊다시피 했다. 동생의 흔적이 완벽하게 지워진 듯했다. 새집에 다녀와선, 섭섭함보다도 아빠의 하이모 가발이 좀 낯설었을 뿐이라며 수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들의 서로에게 익숙한 모습이나 애도 기간 없는 다정함 같은 것도. 여름에 태풍으로 낙과가 심해 올해 배농사는 형편없는 모양이었다. 가끔 제 아빠와 통화라도 하니 다행이었다.

  겨우 죽 먹은 설거지에 시간을 들인다 했더니 수연은 조리대며 개수대까지 꼼꼼히 닦고 있었다. 올 때마다 하는 짓이었다. 며느리들도 들어가길 꺼려 거실에서만 뱅뱅 도는데 수연은 내 부엌살림에 스스럼이 없었다. 개수대 부근에서 시궁창 냄새가 난다거나 냉장고 바닥에 눌어붙은 푸성귀를 떼어내며 투덜거려도 늘 깔끔하게 치워놓곤 했다. 나는 수연을 쫓아다니며 부엌이 더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변명했다. 귀찮아서라고 한마디면 끝날 말이 쓸데없이 길어졌다. 수연은 텔레비전이나 보라고 하더니, 생각났다는 듯 남은 죽은 꼭 데워 먹으라고 당부했다. 수연이 사온 죽은 호박죽 말고도 종류별로 넉넉했다.

  늦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라고 수연을 채근했다. 아니면 내일 아침 출근은 여기서 하라고 일렀다. 수연은 꽃향내 타령을 하면서도 아홉시 뉴스가 끝날 즈음에야 일어섰다. 제가 사온 죽으로 저녁을 때워 보내려니 미안했다. 수연이 구두에 발을 꿰며 심상한 척 나를 돌아보았다.

“수진 언니 생일엔 월차 내려고요. 저도 언니 보러 가야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두덩이 뜨거워져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딸아이 수진의 생일은 아흐레 뒤였다. 수진의 나이도 이제 마흔을 넘기고 두 해가 지났다.

  텔레비전에서 내일의 날씨를 전했다. 설악산과 오대산은 단풍이 절정이었고 내일도 전국은 가을볕이 눈부실 예정이었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아파트단지 안으로 걸어들어가며 몇 번이나 멈춰 섰다. 심장 수치는 정상이라는데 여전히 숨이 찼다. 지난해 협심증 수술을 받곤 꾸준히 약을 먹고 있었다. 담당 의사는 이번엔 와파린 양을 조금 줄여서 처방했다고 했다. 피를 묽게 해 혈관 속에서 핏덩어리가 생기지 않게 해주는 약이었다. 손가방이 두 달치 약으로 불룩했다. 병원에서 정기검진을 받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관리만 잘하면 백 살까지 너끈하리라는 의사의 말이 지나친 농담처럼 언짢게 들렸다. 지금도 몸 따로 마음 따로 움직여 부딪치고 성할 날이 없는데, 백 살까지라니 끔찍했다. 물론 젊고 친절한 의사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집으로 꺾어드는 모퉁이 벤치에 낯익은 얼굴들이 앉아 있었다. 이옥련과 김선희가 먼저 나를 알아보았다. 이옥련이 와서 앉으라는 뜻으로 비어 있는 옆자리를 톡톡 쳤다. 벤치는 두 개가 니은자 모양으로 놓여 있었다. 오후 볕이 좋으니 노인정으로 가지 않고 거기 모인 듯했다. 벤치에 그늘을 드리운 느티나무 잎이 그새 노릇했다. 노파들은 잎이 노릇한 느티나무 아래 무심히 모여들어 지저귀는 새들 같았다. 맘보가 없으니 이옥련이 허전해 보였다. 맘보는 초가을 찬 바람이 돌기 시작할 때 폐렴이 더쳐 세상을 떠났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맘보춤을 잘 춘대서 노인정에서 불리던 이름이었다. 둘은 어릴 적의 연과 얼레처럼 늘 짝패로 붙어 다니곤 했다. 나는 노인정 회원은 아니었고 벤치에서 이들을 알게 됐다.

  그러잖아도 다리를 쉬려던 참이었다. 나는 이옥련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함께 있던 중년 여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이불집 광고 명함이었다. 여자는 집집마다 명함을 꽂아놓고 가는 길이라고 했다. 아파트 노파들 사이에선 여자네 이불집이 꽤 알려진 모양이었다.

“맘보도 봄에 이 집에서 이불 했잖어.”

  이옥련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봄에 묵은 솜을 틀어 새로 이부자리 했다고 자랑이더니 두 계절 만에 저세상으로 가버렸다는 얘기였다.

“하긴 맘보야말로 제일 좋은 이불 덮었지.”

  김선희가 맞장단을 쳤다. 맘보는 신도시에서 가까운 공원묘지에 묻혔다.

  여자가 준 명함을 살펴보았다. 다솜이부자리, 솜틀공장과 이불공장을 갖춘 직거래 침구 전문업체라고 씌어 있었다. 두꺼운 목화, 명주, 양모 솜을 최신 기계설비로 소비자의 기호에 맞게 고쳐드립니다. 이불 맞춤 일체, 침대 커버, 혼수품 전문…… 병원에 가기 전 온 집 안을 헤집고 찾던 그 명함과 똑같은 것이었다. 현관문 틈에 끼워놓은 것을 잘 간수해두었는데 그곳이 어딘지는 영 떠오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노파들에게 물어보기로 하고 찾기를 포기했다.

“목화솜이 열 근 있는데, 오래된 거라.”

  나는 말을 더듬었다. 어떤 뻐근한 감정 같은 것이 한꺼번에 몰려와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여자가 반색했다. 솜을 타면 묵은 솜도 보송하게 살아나는데, 오래된 건 상관없다고 했다. 오히려 귀한 목화솜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냐며 놀라워했다. 열 근이면 이불이랑 요 해서 두 채씩은 나오겠구먼. 이옥련이 거들었다. 짐작대로였다. 예전 같으면 한 채를 만들 양이지만 요즘은 아파트 생활 기준으로 얄팍하게 두 채를 지었다. 여자가 재촉하듯 내 팔을 잡았다. 새삼 망설임이 그늘처럼 밀려왔다. 나는 입술을 앙다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방으로 여자를 데려갔다. 두 개의 마대에 담긴 목화솜이 붙박이장 한쪽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오래됐지만 최상품이라고 여자가 말했다. 어쩌면 이렇게 보관을 잘하셨어요? 여자의 감탄이 빈말 같지는 않았다. 딸에게 혼수이불을 해주려 마련했는데 여태껏 쓸 일이 없었노라고 여자에게 말했다. 더 묵힐 수도 없어 솜이불이나 해주려 한다고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시대가 달라진걸요. 저희 딸도 결혼은 선택이라 하네요.”

  여자가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거실로 나오며 여자가 다시 말했다.

“따님이 내켜하지 않으면 저한테 파세요. 값은 후하게 쳐드릴게요.”

  나는 손을 내저었다. 수연에게 휴대전화를 걸어 여자와의 약속 날짜를 정했다. 이틀 뒤 토요일 오후에 여자와 수연이 집으로 오기로 했다. 하루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에서 일을 보고 있던 수연은 느닷없는 솜이불 이야기에 어리둥절해했지만 사연은 나중에 들려달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당연히 내 것인 줄 알고 있었다. 샘플책을 보고 겉감을 골라야 했다.

“그럼 목화솜은 모레 따님 만난 뒤 실어갈게요.”

  여자가 말했다. 여자는 궁금해서 묻는 건 아니라는 듯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그런데 따님이 따로 사나 봐요. 하긴 직장이 멀면 출퇴근하기가 힘드니까.”

  나는 가만히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자는 그제야 집 안에 감도는 꽃향내를 맡았는지 안노인이 계신 집은 냄새부터 다르다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으니 생각들이 갈피 없이 몰려왔다. 그 생각의 줄기 하나가 머릿속에 괴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결론을 내렸다. 두 사람의 방문이 굳이 내일일 이유가 있겠냐고, 좀 더 나중에 해도 늦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불현듯 정신이 들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실로 가 불을 켜고 텔레비전 전원을 눌렀다. 그새 심야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밤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 작은방으로 달려갔다. 그대로 밤을 지새우게 된다면 그 생각의 줄기 하나가 또다시 찾아들지도 몰랐다.

  두 개의 마대가 정확히 닷 근씩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남편한테서 한쪽 무게가 약간 세다고 들은 것도 같았다. 작은방 붙박이장에서 그것을 꺼내 하나씩 거실로 옮겼다. 한 손으로는 어림없어 주둥이에 양손을 모아서 들었더니 넘어질 것처럼 걸음이 뒤뚱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먼저 것이 조금 더 묵직했다. 남편은 뭐든 저울에 달아보는 습관이 있었으니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을 거였다. 지금도 창고에는 장대저울이며 앉은뱅이저울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모두 시어른들이 농사지을 때 쓰던 물건이었다.

  마대는 색만 바랬을 뿐 깨끗했다. 두 자루 다 끈을 풀어보았다. 이불집 여자와 미리 풀어본 것은 꼭 동여매지 않아 느슨했다. 목화솜은 노르스름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타지 않은 날솜 그대로 스무 해 가까이 보관해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보송보송하고 희디희던 첫 모양과 감촉이 아련했다. 한 줌 쥐어보곤 도로 내려놓았다. 주둥이를 여며 현관 쪽 구석으로 치웠다. 나는 더 늦기 전에 잘한 일이라고 중얼거렸다.

  지레 부린 수선 탓에 숨이 차고 어지러웠다. 그것도 일이라고 티를 냈다. 마대를 꺼내다 몸이 쏠리며 붙박이장에 부딪혀 어깨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와파린을 복용하면서부터는 멍이 쉽게 들었다. 수연은 와파린이 두 잎짜리 작은 연둣빛 식물이 떠오르는 이름이라고 했지만 내 몸에 종종 푸른 멍을 남겼다. 주의해야 하는데 자주 잊었다. 한번은 부엌에서 거실로 전화를 받으러 가다가 고꾸라진 일도 있었다. 전화벨은 울리고 마음은 다섯 발짝 가 있는데 발이 두 발짝만 나갔다. 만세 부르는 모양새로 엎어지곤 광대뼈 부근에 피멍이 들어 한동안 바깥출입도 못 했다. 상처를 본 수연이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건강하던 엄마를 대장암으로 잃고 난 뒤 누군가 다치거나 아픈 모습을 보는 것이 견디기 어렵다고 그 애는 말했다. 수연 엄마는 나의 막냇동생이었다. 우리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부모를 여의었고 그 때문인지 수연 엄마는 나를 친정어머니처럼 따랐다.

  내일 이불집 여자와 만난 수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새삼 신경이 쓰였다. 어제저녁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수연에게 전화로 간단히 설명했을 때 그 애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애에게 의사를 묻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제야 짚어졌다. 주고 싶다는 내 마음에만 열중한 탓이었다. 수연의 말이 귓가에 되살아났다. 이모, 너무나 감사한데요. 근데 그것이 저한테 와도 되는 걸까요? 수진 언니에게 주려던 용도로 쓰이지 못한다면 이모가 실망하실 거라고 했다.

  나는 심야 뉴스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마대 주위를 서성거렸다.

  토요일이었다. 수연과 이불집 여자는 오후 세시에 올 터였다. 냉장고에 변변한 음료수 하나 없었다. 비우고 채워 넣는 일이 느슨해지면서 냉장고는 빈 배로 지낼 때가 많았다. 아파트단지 앞에 있는 마트로 나섰다. 수연과 이불집 여자에게 대접할 만한 것을 사올 요량이었다. 오늘도 볕이 좋았다. 노인네 살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햇빛만 쐐도 살갗으로 살아갈 힘이 쏙쏙 스며들 것 같았다. 공연히 눈에 물기가 돌았다. 헐거워지는 건 오래 신은 신발만이 아니었다. 어느 때부턴가 헛도는 나사처럼 감정도 잘 죄어지지 않았다.

  단지 초입에 있는 101동이 진입로 건너로 마주 보였다. 남편과 함께 가꾸던 텃밭이 그 어름에 있었다. 목화솜은 거기서 수확한 것이었다. 괜찮은 시절이었다. 나는 아직 사십대였고 건강한 주부였다. 남편은 조만간 은행 지점장이 될 예정이었으며, 아이들은 청죽처럼 푸르디푸른 나이였다. 대학에 다니다 입대한 큰아이는 신도시 북쪽의 부대에 배속되어 군 생활 중이었고 작은아이는 의대 예비과정 학생이었다. 그리고 막내, 수진은 고등학생이었다. 공부에 지쳐 원숭이처럼 두 팔을 늘어뜨려 보이곤 했으나 잘 웃는 버릇과 싱그러움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남편은 이곳 토박이였다. 텃밭은 시어른들의 것이었다. 그분들은 신도시가 조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례차례 돌아가셨다. 남편이 신도시 지점에 발령받고 우리가 그 부근의 아파트에 이사해 살고 있을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곳은 신도시 외곽의 농촌 지역이었다.

  첫 봄에 우리는 텃밭에 무엇을 심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오랫동안 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게다가 둘 다 농촌에서 자라선지 농사일의 고단함을 먼저 떠올렸다. 작은 밭 하나를 놓고 겁을 냈다. 우리는 한쪽에 상추와 치커리 따위 푸성귀를 심었다. 그리고 생각해낸 것이 목화였다. 나의 고향에서는 그때도 밭 한 귀퉁이에 목화를 심었다. 그것으로 식구들의 이부자리를 만들기도 했지만 해마다 얼마씩 모았다가 딸들에게 혼수이불을 해주었다. 나는 그게 흉내내고 싶었다. 수진이 결혼할 때 직접 가꾼 목화솜으로 이불을 해주고 싶었다. 딸을 둔 부모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남편과 나는 의견이 일치했다. 우리는 화초 다루듯 목화를 가꾸었다. 꽃을 피우고 다래를 맺고 목화솜으로 피어나는 과정을 어여쁘게 지켜보았다.

  텃밭 농사는 오래가지 않았다. 신도시가 커지면서 이곳도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남편과 나는 목화 가꾸기에 점점 자신이 붙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그사이 모은 목화솜을 마대에 담아 쓰일 날을 헤아리며 보관해두었다. 텃밭을 포함해 들판은 곧 아파트 숲으로 변했고 우리도 그때 우선 분양을 받아 이곳으로 옮겼다. 남편의 고향 마을로 돌아온 셈이었다.

  자동차 경적이 연거푸 울렸다. 택시가 멎더니 차창으로 중년 사내 얼굴이 튀어나와 짜증을 냈다. 할머니, 빨간불에 건너시면 어떡해요. 몇 번이나 미안하다 말하고는 길을 건넜다. 마트는 마을버스가 다니는 이차선도로 건너에 있었다. 도로가 한적한 편이어서 아파트 사람들은 차만 다니지 않으면 신호를 곧잘 무시했다. 파란불이 켜져도 주위를 둘러보고 한 박자 늦춰서 건너라던 수연의 당부가 떠올랐다. 그 애는 가끔 나를 그렇게 상늙은이 취급했다. 돌아올 때는 도로가 텅 비어 있는데도 그 애 말대로 했다. 바퀴 달린 것만 보아도 몸이 후들거리던 시절이 되짚어지며 새삼 몸서리가 났다.

  101동을 쳐다보며 진입로에 들어섰다. 멀리 108동 쪽으로 이옥련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뒤편으로 노인정이 있었다. 이옥련은 아마 한 시간도 안 돼 영감 점심밥을 차려야 한다며 일어설 것이었다. 이옥련은 죽은 맘보를 부러워했다. 맘보의 남편은 적당히 먹고살 것을 남겨주고 젊다 싶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맘보의 기억 속에 남편은 등허리가 꼿꼿하고 새치 몇 개 뽑아내면 염색하지 않아도 검은 머리 빽빽하던 중년 남자였다. 자신의 남편처럼 끼니때마다 밥을 차려 바쳐야 하는 잔소리 많은 영감이 아니었다. 내게 수진이 늘 스물다섯 꽃다운 처녀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사흘 뒤면 수진의 생일이었다. 마흔두 살의 수진은 어째 상상 속에서도 그려지지 않았다.

  아들들은 수진의 생일에 못 올 모양이었다. 맏이는 그날 참석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회의가 있었고, 이태 전 아프리카로 의료 활동을 떠났던 둘째는 아예 그곳에 눌러앉았다. 안부 전화를 걸어온 맏이에게 슬쩍 비춰보고 나서야 맏이가 수진의 생일을 기억조차 못 한다는 걸 알았다. 맏이는 평소 골프조차 흥미보다는 업무와 관련해 어쩔 수 없이 친다고 했다. 남편이 죽고 나서는 수진의 생일에 가족 모두 모이는 일이 뜸해졌다. 내게도 무덤덤해진 자식들에게 수진의 생일을 기억해달라고 바라는 건 부질없는 짓이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는 법이었다. 알아야 할 것은 언제나 너무 늦게 깨달아졌다. 치사랑을 바쳤어야 할 분들은 이 세상에 없고 내리사랑을 주고픈 이들은 내게서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맏이와 통화를 마치고 집 안을 치웠다. 수연과 이불집 여자가 손님이라도 되는 듯 모처럼 집안일에 열중했다. 거실 베란다를 비로 쓰는데 행운목 부근이 끈적끈적했다. 옆에 있는 화초들도 잎이 번들거렸다. 행운목 꽃에서 흘러나온 끈끈한 액이 주변에 떨어진 것이었다. 꽃대는 꼭대기와 옆구리에서 나온 것 두 개였다. 꽃숭어리 무게가 버거운지 둘 다 잎사귀에 얹히듯 휘어져 있었다. 꽃대가 기대고 있는 이파리에도 투명한 액에 작은 꽃잎들이 들러붙어 있었다. 분무기로 물을 뿜어 화초 잎을 닦아냈다. 개나 고양이만 발정이 나는 건 아닐 터였다. 뜬금없는 상상에 낯을 붉혔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었다.

  수연이 사온 전복죽을 데워 점심을 먹었다. 입이 깔깔해 도통 맛을 알 수 없었다. 수연의 정성을 생각해 몇 수저 넘겼다. 잠깐 소파에 누웠다. 정신은 우물처럼 맑은데 몸이 한없이 무거웠다. 이렇게 계속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무거워진 몸을 감당하지 못하고 영혼이 쑥 빠져나가는 것일 터였다. 시월엔 애를 셋이나 낳았지. 뼈 마디마디가 죄다 물러난다 한들 그게 뭐 이상한 일이라고. 기운이 없으니 자꾸 헛된 생각이 스며들었다. 나는 눈을 감지도 않았는데 꿈같기도 한 허방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빨려들어갔다.

  나 같으면 화장할 시간에 밥 한술 더 뜨겠다. 출근하는 수진의 등에 대고 내가 혀를 찬다. 아침밥은 뜨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수진은 머리 손질부터 화장까지 공들인 게 표가 난다. 게다가 생일 밥상 아닌가. 미역국도 먹는 시늉만 한 애가 트렌치코트에 머플러까지 두르고 현관문을 연다. 어쨌거나 그렇게 차려입으니 제법 사회인 티가 난다. 수진은 대학을 졸업하고 두 해째 직장에 다니고 있다. 앳된 얼굴이 불만이더니 오늘의 화장과 차림은 마음에 드나 보다.

  저녁에 말씀드릴게요. 수진은 싱글거리며 집을 나선다. 곧바로 현관문이 빼꼼 열리고 수진이 고개를 디민다. 엄마, 미안해요. 수진이 사라진다. 현관의 도어록이 잠긴다. 삐리릭. 나는 현관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수진의 젊음이 눈부셔 그 애가 불고기며 잡채며 생일 음식에 손대지 않았다는 것을 잊는다. 아침 반찬으론 사실 과하다고 남편에게 말한다.

  가슴에서 불덩이 같은 게 치밀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캄캄해진 눈앞에서 도어록 버튼이 반 바퀴 돌아 제자리에 멈췄다. 동시에 도어록 버튼음도 멎었다. 먼저 살던 집 도어록 버튼은 유난히 소리가 또렷했다. 엄마, 미안해요. 수진의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단풍색 트렌치코트가 어둠 속에서 점점 부풀며 다가오더니 싱글거리는 아이 얼굴이 그대로 내 얼굴 전체로 스며들었다. 나는 냉장고로 달려가 찬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수진이 저녁에 돌아와 하려던 말은 끝내 듣지 못했다. 그날 저녁의 약속만 아니었다면 수진은 무사했을까? 나는 대답을 얻지 못한 채 오래도록 내 안의 피멍에 주먹질을 했다. 아이를 치고 달아난 운전자에게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저주란 저주는 죄다 퍼부었다. 경찰에선 어떤 단서도 찾지 못했고 남편과 내가 내건 현수막은 그해 가로수가 모조리 잎을 떨어내고 겨울바람이 불 때까지 이면도로 가에서 저 혼자 펄럭였다. 집에서 겨우 두 블록 거리였다. 아이가 사고를 당한 시간에 나는 주중의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아이의 소개팅에 철 지난 낭만을 덧씌우곤 공연히 들떠 있었다. 생일날의 소개팅을 부추긴 건 나였다. 그 애의 눈부신 젊음이 아까워서였을까. 다음 날로 미루려는 아이에게 미루지 말라고, 생일날 누군가를 만난다면 엄마와 아빠처럼 특별한 추억이 될 수 있을 거라 바람을 넣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안방의 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수연과 이불집 여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응급실로 모셔가려 했다고 수연이 말했다. 나는 수연에게 이불 겉감을 골라보라고 했다. 여자가 그래도 될까 하는 얼굴로 샘플책을 내밀었다. 수연이 두세 가지를 골라서 보기 편하게 내 눈 가까이 대주었다. 단색에 디자인이 점잖은 것이었다. 내가 좋아할 만한 것이었다. 수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네 취향대로 골라보렴.”

  자세를 고쳐 앉는 수연에게 내가 말했다. 잠깐 수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더니 뭔가를 결심하듯 입술을 꼭 다물고 샘플책 몇 장을 넘겼다. 나는 그런 수연에게 말했다.

“이제는 네 것이란다.”

  혼수이불이면 좋겠다는 말은 애써 참았다. 나도 말 많은 노인네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녀석과 지지고 볶는 일에 재미를 가져보는 쪽도 하나의 선택일 수 있겠지만. 수연의 표정이 환해졌다. 수연은 제 침대 커버에 맞춰 단순한 줄무늬를 고르겠다고 하더니 갑자기 바꿨다. 자잘한 꽃무늬가 들어간 것으로 분홍색과 푸른색 두 가지를 정했다.

“선물은 역시 꽃이겠죠.”

  수연이 웃으며 너스레를 피웠다.

“그쵸, 그쵸. 센스 있으시네.”

  이불집 여자가 소리내어 웃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쩐지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여자가 주문서를 만들고 수연에게 영수증을 건넸다. 완성된 이부자리는 수연의 집으로 배달해주기로 했다. 일주일쯤 걸릴 거라고 여자가 말했다.

“아, 그런데 따님이 아니셨어요?”

  여자가 수연과 나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엄마를 자꾸 이모라 부른다고 여자에게 대답했다. 수연이 내게 눈을 흘겼다. 하긴 이모는 반쯤 엄마니까요. 여자가 말했다.

  수연이 여자를 따라 나갔다. 여자와 함께 목화솜 마대를 엘리베이터에 옮기고, 밖으로 나가 여자의 차에 실어주고 돌아올 터였다. 몸인지 마음인지 한구석이 허물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느낌 속에 담긴 후련함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수연은 밤에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예정에 없이 자고 가는 일이 없는 아이였다. 내일이 일요일이니 상관없다고 했다. 나는 어지러울 뿐 견딜 만했다. 수연은 마치 나를 자리보전하고 누운 환자처럼 대했다. 저녁때는 씻겨주겠다며 수선을 부렸다. 실랑이 끝에 나는 지고 말았다. 대신 세수만 하기로 했다.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방으로 가져오겠다는 걸 억지로 말렸다.

  수연이 욕실에서 세숫대야에 따듯한 물을 받았다. 나는 욕실 문 앞에 순한 아이처럼 앉아 있었다. 수연이 내 목에 수건을 둘렀다. 아주 어릴 적 이렇게 해준 이는 어머니였을까, 할머니였을까. 기억 속에서 삼베수건을 둘러주던 어떤 손길이 생생했다. 수연이 세숫물을 내 앞으로 가져왔다. 세면대에서 비누를 내리며 말했다.

“자, 우리 정옥이, 손 씻고 세수하자.”

  나는 얼굴을 앞으로 빼고 눈을 꼭 감았다. 수연의 손이 어릴 적 누군가의 손길처럼 얼굴에서 시원하게 움직였다. 비누 거품을 내어 씻은 뒤 손으로 물을 퍼 헹구었다. 눈앞으로 말간 가을볕이 지나간다 싶더니 어느새 나는 울먹울먹하고 있었다. 나는 젖먹이가 으앙 하고 우는 것처럼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울음소리는 어딘지 산비둘기 소리와도 닮은 듯했다. 그것은 구슬픔의 뿌리까지 함께 토해내는 소리였다.

  수연은 이번에는 손을 씻자고 했다. 군데군데 검버섯이 돋은 내 두 손을 잡아 세숫대야에 담갔다. 기름기 없는 피부가 수연의 손길에 따라 밀려다녔다. 울음은 참을수록 흑흑 소리가 커졌다. 수연은 다시 물을 받아 손과 얼굴을 헹궜다.

  수연은 내 울음은 아예 달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곤 거실로 가더니, 행운목 꽃향내가 향수 냄새보다 독하다고 투덜거렸다. 다행히 제집에 있는 것은 꽃이 필 기미 따윈 보이지 않는다며 좋아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수연이 꽃향내에 넌더리내기는 처음이었다. 


 

 

  <당선소감>

 

   “진심에 닿는 언어 찾기에 게으르지 않을 것”

  신춘문예 시즌이 되었을 때 응모에 다소 회의적이었습니다. 몇 차례 낙방해 본 경험 때문에 일까요.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이건 축제이고, 축제에 나가 춤을 추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춤 솜씨가 형편없는들 잘 추려고 축제에 나가는 것은 아니지 않냐고 저 자신을 설득시켰습니다. 축제가 다 끝났다고 여기던 때에 뜻밖에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놀람과 설렘의 감정이 뒤엉켜 한동안 허둥거렸습니다. 누군가 저의 춤을 봐준 이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기왕이면 다음번에는 조금 더 근사하게 춰 보자, 그런 다짐을 하고 있던 참이었으니까요.

  오랫동안 소설은 제게 신 포도였습니다. 돌아보면 그런 왜곡된 사랑이 우습기만 합니다. 지나친 사랑이 빚은 참사일까요. 지금은 저 나름의 자기 암시 같은 것으로 때때로 해 봅니다. 정면을 바라봐. 뒷걸음치지 마. 여전히 부족하고 소설이 주는 고통도 만만치 않지만, 더 나은 실패 쪽으로 한 걸음만이라도 더 나아가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쓰다 보면 언어는 늘 미끄러지고 인물의 진심에 가닿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에 잠을 설치곤 합니다. 인간과 인간사의 탐구라는 소설의 명제를 논하기에는 저는 아직 애송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명제에 다가가기 위해 늘 깨어 있겠습니다. 진심에 가닿는 언어를 찾기에 게으르지 않겠습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한 번 네 글을 써보라고 기회를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끝까지 가보겠습니다. 문학의 길에서 만난 스승과 문우들, 고맙습니다. 아둔한 눈이 조금이나마 뜨였다면 그것은 모두 그들 덕분입니다. 함께 파고를 건너온 가족에게도 감사를 전합니다. 이제는 별이 되신 부모님께 오늘의 기쁨을 바칩니다.

 

● 충남 서산 출생
●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 현재 프리랜서 편집자로 불교 역주 서적 제작


 

  <심사평>

 

  

  “잘 다듬어진 문장, 정갈하면서도 맛깔스럽게 읽히는 문체가 작품의 큰 미덕”

  짧은 분량에 어울리는 글감과 주제의식, 인물과 사건의 탄탄한 구성, 깔끔하게 다듬어진 문장. 이는 단편소설의 기본적인 요건이고 미덕이다. 소설 습작 과정도 이런 점들에 초점을 두고 이루어진다. 심사위원이 갖고 있는 잣대 또한 그것이다.

  전체 응모작 가운데 본심에 오른 작품은 <모범에 대하여>부터 <미결>, <배출>, <소리없는 방>, <스벅 1호점 한정판 머그잔 구매기>, <이불>, <탈곡기>, <해왕성엔 다이아몬드 비가>, <화이트 칼라의 색깔 노트>, <흉터>까지 모두 열 편이었다. 한 편만 가려 뽑는 심사여서 각각의 작품들이 갖고 있는 장점보다는 흠결을 앞서 들춰볼 수밖에 없었다.
추억담을 지루하게 늘어놓는 식의 구성이 산만한 글이나 문장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작품이 안타깝게도 절반을 넘었다. 읽는 재미가 돋보여도 결말을 느슨하게 처리하거나 현실감이 떨어지는 사건을 전개해서는 독자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심사위원들의 수고를 크게 덜어준 작품이 <이불>이다. 암으로 엄마를 잃은 조카와 교통사고로 하나뿐인 딸을 여읜 큰이모가 적절한 거리를 두고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주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절제된 언어에 얹혀 따뜻하게 다가온다. 단편소설다운 구성력 또한 탄탄하다. 잘 다듬어진 문장, 정갈하면서도 맛깔스럽게 읽히는 문체 역시 이 작품의 큰 미덕이다. 그간의 습작 과정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이 작품을 쓴 작가가 앞으로 써나갈 소설이 벌써 기대된다.

심사위원 : 송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