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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세계, 고양이 / 김현주

 

손끝에 떨어진 작은 눈물 한 조각에
지구 반대편 수만 년 전의 빙하가 서서히 녹고 있다

흩어지는 만년설 사이로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파란 눈동자
작게 너울거리는 심장소리가 빼꼼히 나를 올려다본다
휘둥그랑 투명한 수염을 휘날리며
다정히 나의 세계에 뛰어들었던 고양이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강렬한 축문처럼 나를 감싸던 고양이가 사라진 지금
나는 달빛 한 조각의 자비도 없는 세상에 포위되었다
언제쯤 돼야 이 지긋지긋한 것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무쇠 신을 끌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길고 긴 북극의 밤에는
길도 없고 이정표도 없고 고양이도 없다

가시처럼 불행의 취기만 가득 담은 냉담한 숨결을 통과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을 지난다
쇄빙선도 깨지 못한 얼음에 갇혀
일각고래와 청새치 바다거북이 가라앉은 심해 한가운데를
혼자 일렁이는 밤

천리라도 따라가고 만리라도 따라간다는
낯익은 이별가에 목이 메인다
동그랗게 떠있는 그곳을 향해
차가운 유빙과 얼어붙은 별들을 데리고 간다
먼지처럼 부서져 내리며 솟아오르는
나, 또는 고양이라는 세계


 

  <당선소감>

 

   "복잡·치열한 일상 불현듯 멈출때… 시와 함께 걸어갈 것"

  복잡하고 치열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불현듯 시간이 멈출 때가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그 수많은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불빛으로 가득 찬 제주의 도심을 지나 숲길을 달리다 보면 문득 세상의 이면처럼 반듯하게 펼쳐진 들판이 나타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한밤의 들판에는 세찬 바람을 따라 풀들이 눕는 소리와, 낮게 울려 퍼지는 말들의 수군거림, 아득히 들려오는 습한 천둥소리만 가득합니다. 방패처럼 나를 감싸던 시야와 소리가 멀어지고 하루 종일 흘러넘치던 것들이 온전히 사라지는 그 시간, 거대하고 희미한 은하수의 흔적 사이로 먼 곳의 별들이 아주 조금씩 움직입니다.

  밤눈에 덮인 겨울 산사의 오솔길에는 작은 돌부처들이 줄지어 앉아 있습니다. 소복하게 눈 쌓인 동그란 어깨와 무릎 사이로, 빨간 산딸기 열매가 덩굴손을 꽉 쥐고 슬쩍 올라앉아 있기도 합니다. 끝없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오래된 삼나무 냄새와 낡은 전각을 감싸고 있는 지붕, 숲을 머금은 채 묵직하게 머무는 이끼의 흔적, 그 사이 어딘가에서 세상은 길의 끝자락을 쥐고 고요히 멈춰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수많은 것들을 떠올립니다. 침묵으로 가라앉은 시간을 따라 총총히 흩어진 것들,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을 외롭고 고요한 그들 사이에 여전히 내가 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소중한 기회를 만들어주신 경인일보와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시의 문을 열고 기꺼이 그 길로 이끌어 주신 최금진 선생님께 가장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시와 함께 모든 것의 경계를 넘어 꾸준히 걸어가겠습니다. 더불어 함께 하는 시와몽상 문우들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변함없는 자리에서 기다려주며 지지하고 응원해 준 중재씨와 우리 고양이들, 가슴 깊이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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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감각적 문장·세련된 은유로 한층 높인 시의 격조"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자는 해마다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올해도 마감 당일까지 1천여 편의 응모작이 접수되었다. 한편 한편이 응모자들의 땀과 고뇌의 산물일 것이다.

  예심 없이 심사위원 두 사람에게 응모작품이 전달된 것이 12월 중순쯤이었다. 충분한 검토의 시간을 보내고 12월 20일, 심사위원 두 사람은 경인일보 사장실 옆 접견실에서 만나 당선후보자들의 작품을 놓고 협의를 계속했다.

  두 사람이 테이블에 올려놓는 응모작마다 담당 기자가 일일이 인터넷 검색을 해나갔다. 순수 신인이어야 한다는 응모 요강에 맞는 사람인지를 확인했다.

  모든 인쇄매체에 소개된 경력이 있는 응모자는 신인으로 보지 않았다. 많은 응모자가 이 조항에 걸려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의 꿈을 접어야 했다.

  올해의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작들의 가장 큰 특징은 거대담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예컨대 팬데믹이라던가 이태원 사태 같은 국가 사회적인 재앙 문제를 짚어가는 담론이 사라진 것은 아쉬운 대목이었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세계, 고양이'를 두고 장시간 논의를 계속했다. 그리고 응모작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라는데 합의했다.

  당선작은 차가운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고 있지만 상승의 이미지로 시를 밀어 올린다는데 동의하고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읽을수록 만만치 않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선자 김현주는 감각적인 문장과 세련된 은유로 시의 품격을 높이며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첫 연의 도발적인 문장이 독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손끝에 떨어진 작은 눈물 한 조각에/지구 반대편 수만 년 전의 빙하가 서서히 녹고 있다'라는 문장이 마치 불온하게 타들어가기 시작하는 도화선 같다.

  '달빛 한조각의 자비도 없는 세상에 포위 되'어 터벅터벅 걸어가는 북극의 밤은 그녀의 의식의 세계다.

  그런가하면 '가시처럼 불행의 취기만 가득 담은 냉담한 숨결을 통과하며/영원히 끝나지 않은 밤을 지난다'와 같은 유려한 문장이 시의 격조를 한층 높이고 있다.

  당선작은 투명한 얼음 같은 차가운 이미지로 빛난다. '동그랗게 떠 있는 그곳을 향해/차가운 유빙과 얼어붙은 별들을 데리고'가는 시인의 그곳은 먼지처럼 부서져 내리면서도 솟아오르는 대지일 것이다.

  그녀의 시세계가 대지를 다 품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한국 시단의 별로 찬란하기를 빈다.

심사위원 : 김명인, 김윤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