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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낮에 접는 별 / 양수빈

 

  홍주가 가야 할 강의실은 3층 301호실이었다. 엘리베이터는 5층에 멈춰 서 있었다. 버튼을 누르고 한참을 기다렸으나 엘리베이터는 내려오지 않았다. 버튼을 두세 번 더 누르고 나서야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홍주는 팔뚝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계단은 가팔랐고, 한 명이 겨우 오르내릴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았다. 홍주는 누군가 위에서 내려오는 상상을 했다. 그럼 누가 물러나야 할까. 아무래도 뒤에 아무도 없는 사람이 양보해야겠지.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이던 홍주가 코트 주머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홍주는 손안에 만져지는 차갑고 날카롭고 예리한 물체의 윤곽을 더듬었다. 홍주의 엄지가 날 끝을 꾸욱 눌렀다가 날 선을 타고 미끄럽게 내려왔다. 두 개의 가위 날을 연결해주는 볼트의 동그란 몸체에 홍주의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강의실 입구에는 STAFF라고 적힌 명찰을 목에 건 남자와 여자가 서 있었다. 그들은 홍주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하며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가리켰다. 참석자 명단이라고 적힌 종이를 가만 내려다보던 홍주는 자신의 이름 옆에 동그라미를 쳤다. 진행요원들은 친절했지만 지루해 보였다.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을 뒤로한 채 홍주가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섯 명 정도의 사람들이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었다. 홍주는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삶을 아는 인문학 원데이 클래스’라는 무료 강의를 처음 발견한 것은 한 달 전이었다. 다파랑의 폐업신고를 하고 돌아오던 길, 홍주는 낯선 건물 벽면에 붙은 강의 홍보 포스터를 발견했다. 강의를 신청한 이유는 설명란에 적힌 ‘겹쳐진 삶의 단면을 펼쳐보는 방식’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그때 홍주는 자신의 삶에 일어난 일들을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다만 사소한 부분들이 겹쳐 삶을 불가해의 영역으로 이끈 것이라면, 그것을 모두 펼쳐보는 방식을 알고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 달력을 확인한 후에야 홍주는 오늘이 강의 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게를 내놓고 정리하느라 강의를 신청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낼 만큼 정신이 없었던 탓이다.

  다파랑은 홍주의 부모가 지하상가에서 10년 가까이 운영해온 잡화점이었다. 다파랑이라는 이름은 홍주의 부모가 함께 지었지만, 그 의미에 대해선 의견이 갈렸다. ‘무엇이든 다 팔기 때문’에 지었다는 아빠와 달리, 엄마는 당신이 파란색을 좋아하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가게 벽은 꼭 파란색으로 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주는 엄마와 함께 페인트칠을 했다. 독한 페인트 냄새에 코끝이 찡해졌다. 아빠는 천장에 달 전등을 손보느라 바빴다. 홍주도 엄마도 페인트칠은 처음이라, 얼룩지고 뭉친 부분이 생겼다. 엄마는 고르지 않은 부분조차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진짜 우리 가게 같잖아. 엄마는 울퉁불퉁한 벽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홍주는 코웃음 치면서도 엄마를 따라 벽을 매만졌다. 색이 참 곱다. 엄마가 속삭였고 홍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진짜 파랗네.

  그런 다파랑이 문을 닫은 지 벌써 3주가 흘렀다. 3주 전 재고 물품을 중고 매입 업자에게 넘긴 홍주는 그가 떠난 뒤 카운터 안쪽에 떨어진 가위를 발견했다. 택배의 포장지를 뜯거나 물건을 구매한 손님들이 상표를 잘라달라고 부탁할 때 엄마가 사용하던 가위였다. 중고 매입 업자가 미처 챙기지 못한 것일까. 어쩌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보고도 두고 간 것인지 모른다. 텅 빈 가게 안에 홀로 남은 가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홍주는 가위를 주워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그날 이후로 홍주는 늘 주머니에 가위가 든 코트를 입고 다녔다.

  히터가 켜지지 않은 강의실은 조금 쌀쌀해서 홍주는 코트 앞을 더 여미었다. 사람들의 옆자리에는 하나같이 가방이 올려져 있었다. 가방을 가져오지 않은 사람은 홍주뿐인 듯했다. 그게 꼭, 소중한 물건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느껴져 머쓱해졌다. 그때 홍주의 대각선 앞에 앉은 남자가 가방 안에서 빵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남자가 빵을 씹고 삼키고 다시 빵 봉지를 뜯는 소리만이 적막을 채웠다. 홍주는 빵을 씹을 때마다 볼록해지는 남자의 볼을 바라보다가 벽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한 시 십 분. 강의 시간은 한 시였으나, 강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벽시계 아래에는 밝은 초록색 퍼코트를 입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십 분이 더 지났을 때, 강의실 입구에 서 있었던 직원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강의실에 들어섰다.

  강사님의 개인 사정으로 오늘 강의는 취소되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직원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직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몇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원은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홍주는 쉴 새 없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직원의 고개를 바라보았다. 목각인형 같다, 그런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럼 수업이 다음 주로 미뤄지는 거예요? 알록달록한 키링 여러 개가 달린 가방을 멘 여자가 직원에게 따지듯 물었다. 직원은 아직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확인 후 연락을 돌릴 예정이라고 대답했다. 가방을 든 여자는 짜증 섞인 몇 마디를 더 던진 후에야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세 분께서는 혹시…….

  직원의 말에 홍주는 그제야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남은 사람은 홍주와 가방에서 빵을 꺼내먹던 남자, 초록색 퍼코트를 입은 여자뿐이었다. 제일 먼저 일어난 사람은 코트를 입은 여자였다. 여자가 강의실을 빠져나간 후에야 홍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금 사과하는 직원에게 괜찮다고 답하며 홍주는 주머니 속 가위를 꽉 움켜쥐었다 놓았다. 홍주의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힐끔 뒤를 살피자 빵을 먹던 남자가 가방을 갈무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와 홍주, 그리고 남자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굽 높은 구두를 신은 여자는 계단을 고르듯 신중히 걸음을 옮겼다. 홍주는 발뒤꿈치가 계단에 닿을 때마다 가위를 잡았다 놓기를 반복했다. 한 손에 들어오는 가위의 감촉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건물 밖으로 나온 홍주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저녁엔 아빠를 따라 병원에 갈 생각이었다. 아빠는 면회가 허락된 오후 일곱 시쯤 병원에 들를 것이다. 변호사는 그런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진심으로 반성한다는 티를 내는 게 감형에 도움이 된다고. 남의 속도 모르고 떠드는 변호사의 멀끔한 얼굴을 오래 노려본 기억이 났다.

  홍주는 지금쯤 홀로 점심을 먹고 있을 아빠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홍주의 아빠는 본죽에서 파는 비빔밥을 좋아했다. 한 달 전 그날도 아빠는 점심으로 비빔밥을 먹었고 저녁엔 간만에 동네 친구들을 만나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처음 경찰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을 때 홍주는 보이스피싱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작년 여름, 술을 마시다가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뒤로 아빠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아빠, 누가 10억 준다고 그러면 술 마실 거야? 홍주의 짓궂은 질문에도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던 사람이 바로 아빠였다. 그런 아빠가 술을 마셨다니. 술을 마시고 운전을 했다니. 차를 빼달라는 연락을 받은 친구가 너무 취한 바람에 그나마 덜 마신 아빠가 운전대를 잡았다는 설명을 들은 후에도 홍주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주차하려고 나왔다던 아빠가 왜 돌연 운전대를 잡고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는지. 자정이 넘은 시각, 식당에서 역 두 개를 지나는 거리에 있는 사거리까지 달리는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리고 노인. 검은 비닐봉지를 든 채 사거리를 가로질러 걷던 노인을 떠올렸다. 홍주는 경찰과 함께 블랙박스 영상을 보았다. 여러 번 보았지만 홍주는 보닛에 노인의 몸이 부딪히기 직전 늘 고개를 돌렸다. 질끈 감았던 눈을 떴을 때 화면에 남은 것은 나풀거리며 허공을 떠도는 검은 비닐봉지뿐이었다. 껌 한 통이 들어있었다던 비닐봉지는 언뜻 보면 날아가는 새처럼 보였다.

  홍주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찬 공기에 하얗게 피어오르는 숨을 멍하니 지켜보는 홍주의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무슨 사정일까요?

  깜짝 놀란 홍주가 어깨를 움츠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강의실에서 빵을 먹던 남자였다. 남자가 홍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당일에 강의를 취소하다니, 엄청난 사연일 것 같은데 말이죠.

사고라도 난 거 아니겠어요?

  퍼코트를 입은 여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홍주는 어설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엄마가 죽은 뒤 회사를 그만둔 홍주는 다파랑에서 일을 돕기 시작했다. 다파랑에서는 늘 같은 말을 반복하기만 하면 됐다. 찾으시는 물건 있으세요? 그건 저쪽 코너에 있어요. 계산해드릴게요. 봉툿값은 별도예요……. 다른 말은 할 필요도 없었다. 낯선 이와 예기치 못한 대화를 나누는 일은 너무 오랜만이어서 홍주는 어쩔 줄 몰랐다.

  지인이 죽었을지도요. 남자가 무심한 얼굴로 내뱉었다. 핸드백 안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낸 여자가 그거네, 하고 맞장구를 쳤다. 차 안에서 가까운 이의 부고 전화를 받는 강사의 모습을 떠올리던 홍주는 무감한 얼굴로 선 남자와 여자가 어떤 종류의 죽음을 상상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담배 피우세요? 여자가 남자와 홍주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아뇨. 남자가 말했다. 홍주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아쉽다는 듯 중얼거린 여자가 두 사람에게서 세 발자국 정도 떨어져 담배를 피웠다. 저는 사실 강의 후에 있을 뒤풀이를 기대했는데 말이죠. 여자의 말에 남자가 전 해독 능력이 떨어져서 술을 못 마셔요, 하고 대답했다.

  그럼 커피는 드세요? 강의가 취소되는 바람에 약속 때까지 시간이 떠버렸는데, 제가 커피 맛있는 집을 알거든요. 금세 담배를 지져 끈 여자의 말에 남자가 홍주를 돌아보았다. 그 일련의 행동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홍주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택시 안에서 이름과 인사를 나누었다. 여자의 이름은 선린, 남자의 이름은 동우였다. 제 취미는 종이접기예요. 고등학생 땐 종이접기 동아리까지 들었어요. 말만 종이접기 동아리지, 자습하기 위해 모인 애들이 대부분이었지만요. 그 안에서 진짜 종이접기를 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동우의 얼굴이 천진해서 홍주는 속으로 그의 나이를 가늠해보았다. 적어도 홍주보다 대여섯 살은 어릴 것 같았다. 많이 쳐줘야 스물셋 정도로 보이는 앳된 얼굴.

  나는 강의라는 강의는 닥치는 대로 듣고 있어요.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서요. 남들이 하는 말, 남들이 하는 생각을 머릿속에 잔뜩 욱여넣어야 좀 살 것 같거든요, 요즘은. 선린이 종아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말을 마친 두 사람이 마치 짠 것처럼 홍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는……. 운을 뗀 홍주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주머니 깊숙이 손을 넣은 홍주의 손가락 끝에 가위 날이 닿았다. 택시 기사가 과속방지턱 위를 거칠게 넘었다. 저는 연극배우예요. 덜컹거리는 감각과 동시에 홍주의 입에서 거짓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정말요? 선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두 사람이 무슨 연극에 출연했냐고 물을까 봐 홍주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홍주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런데 세 분은 무슨 사이신가? 골목길에서 툭 튀어나온 오토바이를 향해 한바탕 욕을 퍼부은 택시 기사가 별안간 물어왔다. 선린과 동우, 홍주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입을 연 사람은 동우였다. 가족이에요. 무슨 가족이 서로 이름도 몰라. 택시 기사가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동우가 웃으며 덧붙였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라서요.

  남산 초입에 내려 이리저리 길을 훑고 나서야 선린은 카페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페가 있던 자리에 붙은 임대 글자를 한참 바라보던 선린이 두 달 전에만 해도 있었는데, 하고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온 김에 전망대라도 가볼까요? 정적을 깨고 동우가 말했다. 선린은 힘이 빠진 듯 시무룩한 목소리로 그러죠 뭐, 하고 대답했다. 전망대는 처음 가보는 것 같은데, 생각하던 홍주는 난생처음 만난 두 사람과 남산을 걷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가파른 오르막길 중턱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홍주가 정류장에 붙은 노선표를 살피는 사이 전망대 근처까지 단번에 갈 수 있는 버스가 도착했다. 평일 낮인데도 버스 안이 꽉 차 있어서 세 사람은 나란히 선 채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겼다. 버스는 느리게 움직였다. 홍주는 창밖 너머 가지가 앙상해진 나무와 그 밑을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걷는 사람들 틈에서 홍주는 아빠의 잔상을 발견했다. 차에 치인 노인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할 새도 없이 곧 뇌사 판정이 떨어졌다. 아빠는 고개 숙인 사람이 되었다. 사고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병원을 찾아 노인의 부인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병실을 지키는 사람은 노인의 부인이 유일했다. 그녀는 아빠와 홍주가 찾아와도 시선을 주지 않고 꼼짝없이 누워 있는 노인만 바라봤다. 우리는 아이가 없어요. 우리 둘뿐이에요.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아빠에게 노부인이 한 말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선린과 동우를 따라 버스에서 내린 홍주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껴안다시피 서서 사진을 찍는 커플 한 쌍과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여자들 여러 명, 흰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남자와 원색의 등산복을 입은 중년 남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린은 별말 없이 망원경을 향해 걸어갔다. 홍주와 동우가 선린의 뒤를 따랐다. 렌즈에 눈을 바짝 붙이곤 망원경 몸체를 이리저리 흔들던 선린이 하나도 안 보이는데? 중얼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망원경의 동전 투입구가 검은색 테이프로 막혀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고장 났나 본데요. 동우의 말에 선린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오늘은 정말 되는 일이 없네. 여기서 담배 피우면 안 되겠죠? 동우가 말없이 아이와 강아지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노란색 옷을 입은 강아지가 목줄을 손에 쥔 남자 옆에 앉아 혀를 길게 내밀어 숨을 고르고 있었다. 홍주는 까치발을 하곤 망원경 너머의 풍경을 내다보았다. 울창한 나무로 이루어진 산의 풍경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빼곡히 들어찬 건물들밖에 보이지 않자 김이 샜다.

홍주 씨.

  홍주가 동우를 돌아보았다. 동우가 검지를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동우의 손가락을 따라 올려다본 하늘은 깜짝 놀랄 정도로 새파랬다.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파란 하늘.

하루에 하늘을 세 번 올려다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래요.

  동우가 말했다. 그 말에 선린이 누가 그래요? 물었다. 인터넷에서 그러던데요. 순 엉터리네. 선린이 주먹 쥔 손으로 종아리를 두드리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홍주는 별안간 들려온 웃음소리에 망원경 옆쪽에 놓인 나무 계단을 바라보았다. 열 명 남짓한 외국인들이 떠들썩하게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다파랑에도 종종 외국인 손님이 찾아왔다. 주로 캐리어나 큰 배낭을 멘 관광객들이었는데, 우산이나 담요, 수건 등을 찾곤 했다. 홍주는 엄마의 장례를 치른 뒤로 집에만 처박혀 지내는 아빠에게 해외여행을 제안한 적이 있었다. 여행지는 손님의 국적에 따라 그때그때 바뀌었다. 일본 손님이 오면 오사카에서 다코야키를 먹는 게 좋겠다고 말하다가, 중국 손님이 오면 만리장성을 산책하듯 길게 걷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가게를 길게 비울 수 없다는 대답만 반복했다.

  홍주는 건조한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젖혔다. 가게를 처분하고 남은 돈은 사고 피해자의 병원비와 벌금으로 빠져나갔다. 홍주가 아빠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홍주는 손가락을 세워 가위 날을 쓸어내렸다. 비교적 넓은 날 바닥을 훑다가 뾰족한 날 끝을 힘주어 누르자 희미하지만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검지와 엄지를 모아 날을 빠르게 쓰다듬던 홍주가 손바닥을 오므려 날을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날 만큼 세게 쥐고 있다가 주머니 밖으로 손을 휙 빼냈다.

뭐야, 손 왜 그래요?

  선린의 말에 홍주가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피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다 바닥으로 뚝 뚝 떨어지기까지 했다. 홍주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자, 도리어 선린이 당황한 기색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어디서 다쳤어요? 선린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동우가 가방 안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꺼내 홍주에게 건넸다. 받아요. 얼떨떨한 얼굴로 홍주가 휴지를 받아들었다. 왼손에 휴지를 들고 상처 난 손바닥을 멀뚱히 바라보는 홍주가 답답했는지, 선린이 홍주의 손에서 휴지를 빼앗듯이 가져갔다. 그러곤 홍주의 손목을 잡고 상처 부위에 휴지를 돌돌 말아 감았다. 거대하고 푹신해진 손바닥을 보던 홍주가 별안간 눈물을 떨구었다. 눈물이 차오른다는 감각을 채 느끼기도 전에 눈물이 툭 떨어졌다. 건조한 안구는 필요하지 않을 때만 촉촉해졌다. 홍주의 손바닥을 부여잡고 있던 선린이 팔을 들어 홍주의 어깨를 천천히 토닥였다. 홍주는 손바닥에 감긴 휴지로 눈물을 닦았다. 그런데도 눈물이 그치지 않자, 선린이 조심스레 홍주의 몸을 껴안았다. 어깨와 어깨가 맞닿고 선린의 긴 머리카락이 홍주의 찬 목덜미를 덮었다.

  홍주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선린의 어깨너머로 동우가 갑 티슈를 들고 서 있었다. 휴지를 두 개나 들고 다녀요? 선린의 물음에 동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 휴지가 더 부드럽거든요. 홍주는 티슈 겉면에 적힌 ‘아기 피부용’이라는 글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눈물이 그쳤다.

내 애인은 파리에 있어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선린이 대뜸 입을 열었다. 홍주의 손바닥에서 흐르던 피가 서서히 멎었을 때쯤 많아진 인파를 피해 세 사람은 전망대를 벗어나기로 했다. 산책로로 이어지는 길을 발견한 사람은 동우였다. 등산복을 입은 채 왁자지껄 지나가는 무리와 춥지도 않은지 민소매를 입고 달리는 사람들이 세 사람의 앞을 지나갔다. 산책로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철제 의자 세 개를 발견한 선린이 잠깐 앉았다 갈까요? 물었다. 보통 이런 곳엔 벤치가 있지 않나요. 동우가 미심쩍다는 듯 의자를 꼼꼼히 살폈으나 선린은 벤치면 어떻고 의자면 어떻냐며 냉큼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동우와 선린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는 사실에 머쓱해진 홍주는 죄 없는 티슈만 구겨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동우가 티슈 한 장을 더 건넸다. 이젠 필요 없었지만 홍주는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때 세 사람 앞을 뛰어가던 어린아이가 땅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멀리서 큰 소리로 통화를 하던 여자가 넘어진 아이를 향해 후다닥 달려왔다. 여자가 일으켜 세워줄 때까지 아이는 우는소리 하나 없이 그저 흙바닥에 납작 달라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이는 양 손가락을 까딱이며 모래 알갱이의 개수를 세고 있었다. 엉거주춤 엉덩이를 뗐던 셋은 도로 의자에 앉았다. 어디까지 얘기했죠? 선린이 머쓱하게 웃었다.

우리는 매일 통화를 했는데, 어느 날 그 사람이 어제 친구가 총에 맞았어, 라고 말하더라고요.

  잠시 말을 멈춘 선린이 아이의 옷에 묻은 흙을 연신 털어대는 와중에도 통화를 이어가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어깨와 볼 사이에 핸드폰을 낀 여자는 연신 “말도 안 돼, 정말? 내가 못 살아” 하고 대꾸했다. 순간 아이가 홍주를 바라보았다. 괜히 훔쳐본 것 같아 멋쩍어지려던 찰나, 아이가 홍주에게 손을 흔들었다. 인사를 받은 홍주 대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우가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홍주는 아이가 여자의 손을 잡고 얼마간 멀어지고 난 후에야 잇속으로 안녕, 하고 작게 우물거렸다.

  선린이 말을 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목소리가 너무 낯설어서 전화하는 사람이 바뀐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그는 정확히 또박또박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점심을 먹고 식당에서 막 나온 후였고 나는 담배를 피우러 뒤쪽 골목으로 갔어. 어느 순간 돌아보니 친구가 한 남자랑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지. 가만 보니 가방을 뺏기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 같았어. 그러다 총에 맞은 거야.

그는 선린에게 물었다. “왜 그랬을까?” 마치 퀴즈를 내는 사람처럼. “그건 내 가방이었는데.”

  애인은 너무 이상하지 않으냐고 나한테 계속 물었어요. 왜 친구는 자기 것도 아닌 가방에 그토록 필사적이었을까. 그건 그냥 갈색 인조가죽으로 덧댄 평범한 백팩일 뿐이었는데. 담배를 피울 동안 잠시 맡겨둔 별로 소중하지도 않은 물건이었는데. 연신 중얼거렸죠. 내가 가방을 잡고 늘어지던 죽은 친구의 새하얘진 손마디를 눈앞에 그릴 수 있을 때까지 애인은 계속했어요.

대체 왜. 대체 왜.

  하지만 선린이 충격을 받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사람 통화 내내 나를 선린아, 하고 부르더라고요. 선린아. 선린아. 우리가 사귀고 한 번도 나를 애칭으로 부르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내가 말이 없자 선린아, 듣고 있어? 하고 묻더라고요. 내가 누군지 완전히 잊은 사람 같았어요.

  선린이 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 순식간에요. 이 모든 일이 정말 순식간에 일어났어요. 말없이 앉아 있던 동우가 가방 안에서 티슈를 꺼내 선린에게 건넸다. 선린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거절당한 티슈를 붙잡고 한참 손가락을 움직이던 동우가 선린의 손바닥 위에 티슈로 접은 별을 올려놓았다. 선린은 유치하다고 타박하면서도 별이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레 손안에 쥐었다.

  그때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와 흰 강아지를 품에 안은 할머니가 세 사람에게 다가왔다. 어어, 이거 우리 의잔데.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세워 홍주와 선린, 동우가 앉은 의자를 가리켰다. 아이고 죄송해요. 동우가 넉살 좋게 사과하며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급히 일어난 홍주는 괜스레 의자를 손바닥으로 쓱 닦아냈다. 할머니는 홍주가 앉았던 의자에 강아지를 앉혔다.

  강아지는 두 눈이 뿌옜다. 늙어서 눈이 안 보여요.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던 할머니가 불쑥 말했다. 아아. 홍주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홍주와 동우, 선린은 잠시 강아지를 내려다보았다. 인형처럼 얌전히 앉아 있던 강아지가 문득 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들었다. 언니가 자리 양보해줬네. 할머니의 말에 불투명한 눈동자가 홍주를 향했다. 깜짝 놀란 선린이 쟤가 홍주 씨를 보는데? 말했다. 할머니가 웃으며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은 멀었지만 다 알아봐요. 강아지는 할머니의 손길을 느끼듯 눈을 감았다.

  산책로 초입에 도착했을 때, 동우는 땅에 떨어진 비닐봉지를 밟고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앞서 걷던 선린과 뒤따라 걷던 홍주가 화들짝 놀라 동우를 부축해주었다. 동우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어났다. 안 아파요? 홍주가 묻자 동우가 볼을 긁적였다. 엉덩이를 잃어도 살 수는 있겠죠? 선린은 동우가 진짜 이상하고 웃긴 사람이라며 깔깔 웃었다. 한참 웃음을 참지 못하던 선린이 시간을 확인하곤 놀란 얼굴로 홍주와 동우를 바라보았다. 벌써 다섯 시가 다 되었다고, 이만 가봐야겠다고 인사하는 선린을 향해 홍주는 꾸벅 고개를 숙였고 동우는 선린 씨, 하고 입을 열었다. 선린이 동우를 돌아보았다. 별 접는 거, 되게 쉽거든요. 나중에 꼭 접어보세요. 그 말에 선린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기쁜 것도 슬픈 것도 아닌 것 같은 얼굴. 이내 미소를 지은 선린이 잘들 지내요, 인사를 남기고 내리막길을 따라 천천히 멀어졌다.

  선린의 뒷모습이 점처럼 작아졌을 때 동우가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할까요? 물어왔다. 때마침 홍주의 배가 꼬르륵 소리를 내며 아우성쳤다. 동우가 듣지 못했길 바라기엔 소리가 너무 컸다.혹시 빵 좋아해요? 동우가 물었다. 민망함에 귀 끝을 새빨갛게 물들인 홍주가 좋아해요, 작게 대답했다.

제가 맛있는 빵집을 알아요.

  동우와 홍주는 선린이 내려갔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동우가 안내한 빵집은 명동역 안에 있었다. 달랑 한 개뿐인 테이블에는 이미 누군가 앉아 있었다. 동우는 익숙한 듯 빵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카운터 안쪽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던 직원이 동우와 홍주를 힐끔 쳐다보았다. 어서 오세요. 인사하는 목소리에 귀찮음과 지루함이 배어 있었다. 여기는 단팥빵이 특히 맛있어요. 동우가 홍주에게 속삭였다. 그런 말을 듣고 단팥빵을 고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동우는 홍주가 고른 단팥빵 한 개와 소보루 두 개, 슈크림 네 개를 계산했다. 감사합니다. 홍주가 인사하자 동우가 손을 내저었다. 고작 팔백 원인데요, 뭐. 빵집 밖으로 나온 동우가 맞은편에 놓인 파란색 벤치를 가리켰다. 배고프니까 먹고 가죠. 홍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동우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홍주가 단팥빵을 반쯤 먹었을 때 동우는 이미 두 번째 소보루의 포장지를 뜯고 있었다. 홍주의 입맛에 단팥빵은 조금 달았다. 홍주는 남은 단팥빵을 봉지 안에 집어넣은 뒤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별로예요? 동우가 물었다. 아뇨, 맛있어요. 맛있는데 조금 달아서요. 짧게 고개를 끄덕인 동우가 빵을 마저 먹었다. 목 막히지 않냐는 홍주의 물음에 동우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두꺼운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급한 걸음으로 벤치 앞을 지나갔다.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걷던 그들은 개찰구 앞 분식집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를 맡고는 잠시 멈칫했다. 홍주는 분식집 가판대 앞에 서서 어묵 꼬치를 먹던 여자가 뜨거운 듯 후후 입김을 불어대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저 빵집은 저희 형이 일하던 곳이에요.

  홍주가 동우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동우는 슈크림이 든 봉지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오전 일곱 시부터 저녁 다섯 시까지요. 일요일 하루 빼고는 늘 저 빵집에서 일했어요.

지금은 그만두셨어요?

  동우가 봉지를 잡아 뜯었다.

죽었어요. 두 달 전에.

  형의 장례를 치르고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동우는 형의 유니폼을 반납하기 위해 빵집에 들렀다. 오후 열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 생각보다 손님이 많았다. 손님들은 갓 나온 빵을 구경하고 메뉴판을 읽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때 일곱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진열된 소보루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옆에서 빵을 진열하고 있던 직원이 어어, 그러면 안 되지, 하고 외쳤다. 핸드폰을 보고 있던 아이의 엄마가 왜 아이에게 소리를 치냐며 버럭 화를 냈다. 줄 서 있던 손님들이 얼굴을 찌푸린 채 여자를 힐끔거렸다. 동우는 아이의 엄마와 직원이 말다툼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유니폼이 든 종이 가방을 카운터 옆에 내려놓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러곤 맞은편 벤치, 지금 동우와 홍주가 앉아 있는 이 벤치에 앉아 빵집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형의 존재가 사라졌음에도 빵집은 그대로였다. 새로운 빵이 구워져 나오면 손님들이 찾아와 빵을 고르고 커피를 주문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 동우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변함없는 일상에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다고.

  홍주는 빵가루가 묻은 동우의 입가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빵을 굽는 동우의 형이 떠올랐다. 한 번도 본 적 없어 눈 코 입은 흐릿했지만 단정하고 곧은 자세로 묵묵히 일하는 등을 떠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홍주가 남자를 부르자, 남자의 몸이 천천히 움직였다. 돌아선 얼굴을 본 홍주는 깜짝 놀랐다. 피로에 물든 얼굴은 노부인을 닮아 있었다.

  아빠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홍주는 딱 한 번 홀로 노인의 병실을 찾은 적이 있었다. 폐업신고를 한 날이었다. 처음부터 병원에 갈 계획을 세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답답한 마음에 이리저리 길거리를 배회했을 뿐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원 앞이었다. 못 본 척 지나칠까도 생각했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들어가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긴 복도를 지나 낯익은 이름이 붙은 1인실 병실 앞에 도착한 홍주는 노크하려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변호사의 말처럼 선처를 위한 연극처럼 보이진 않을까 두려움이 든 탓이었다. 서성이던 홍주는 때마침 병실 문을 연 간호사와 마주쳤다. 간호사가 미심쩍은 얼굴로 홍주를 힐끔거렸다. 홍주는 아무것도 아닌 척, 간호사의 시선을 피하며 복도 벽면에 등을 기댔다. 천천히 닫히는 문틈으로, 홍주는 노부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얇고 힘없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무어라고 다정히 속삭이고 있었다. 이후에도 두 명의 간호사가 병실을 찾았다. 병실 문이 열릴 때마다 노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홍주는 쪼그려 앉은 채 흩어지는 목소리를 주워 담았다. 나지막한 음성을 듣고 있으니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한참을 앉아 있다 돌아갈 요량으로 몸을 일으킨 홍주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노인의 부인이 흰 가습기를 품에 안은 채 병실 앞에 서 있었다.

  말문이 막혀 멍하니 서 있던 홍주가 겨우 입을 열어 실례했다는 말을 내뱉었다. 급히 돌아서는 홍주의 걸음을 멈춰 세운 것은 노부인의 목소리였다. 노부인은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뒤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열고 나온 노부인의 손에는 회색 머플러가 들려 있었다. 홍주는 얼결에 머플러를 건네받았다.

잠시 복도 끝을 응시하던 노부인이 홍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목이 너무 훤해요.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가면서 홍주는 머플러에 얼굴을 묻었다.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고작 머플러 하나일 뿐인데 아주 무거운 것을 든 것처럼 손안이 묵직했다. 해가 진 거리를 걸으며 홍주는 머플러를 두르는 대신 목을 훑고 지나가는 한기를 견디기로 했다. 홍주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멈추지 않고 걸었다.

  홍주가 눈을 떴을 때 동우는 마지막 슈크림을 먹고 있었다. 뿌연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나서야 홍주는 자신이 동우의 가방에 기대 깜빡 졸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과하는 홍주에게 동우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괜찮다고 대꾸했다. 오늘 좀 피곤한 하루였잖아요. 동우가 작은 조각이 된 슈크림을 한입에 삼켰다. 가방 안에서 물티슈를 꺼내 손을 닦는 동우를 보면서 홍주는 이렇게 말하는 상상을 했다.

난 매일 가위로 누군가를 찌르는 상상을 해요.

그럼 동우는 놀랄까? 미쳤다고 욕을 할까? 이유를 물을까?

그러나 홍주가 실제로 그렇게 말했을 때, 동우는 놀라지도 욕을 하지도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물티슈의 뚜껑을 닫아 가방에 넣고 지퍼를 잠근 동우는 그런데 정작 찔린 사람은 홍주 씨네요, 놀리듯 말했다.

그러게요, 바보같이.

바보 같은 게 아니라 대단한 거죠.

뭐가요?

남을 찌르기는 쉬워도 나를 찌르기는 어려운데, 그걸 해냈잖아요.

  동우의 말에 웃음을 터뜨린 홍주가 주머니 안으로 더듬더듬 손을 밀어 넣었다. 손가락을 세워 가위 날을 눌렀다. 뾰족한 날이 살갗을 파고들어 또다시 상처를 낼지도 모른다는 예상과 달리 아무리 날을 눌러봐도 약간의 통증만 느껴질 뿐 손가락은 멀쩡했다.

이만 갈까요. 동우의 말에 홍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시간 넘게 앉아 있던 탓에 엉덩이에서 찌르르한 통증이 느껴졌다. 동우의 집은 홍주의 집과 반대 방향이었다. 두 사람은 벤치 앞에서 짧은 인사를 나누었다. 개찰구 안쪽에서 정차 역을 알리는 방송이 들려왔다. 홍주가 머뭇거리는 사이 동우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홍주는 동우의 커다란 가방이 작아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동우의 가방 속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우에게도 가위나 칼처럼 날카로운 물건이 있을까.

  한참을 붙박인 듯 서 있는데, 멀리서부터 동우가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어어, 하는 사이 동우가 홍주 앞에 섰다.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 숙인 동우가 가방 앞주머니를 열었다. 그가 꺼낸 것은 빵 봉지로 접은 별이었다. 홍주 씨가 졸 때 접었어요.

  미끄러운 빵 봉지는 홍주가 이리저리 만지자 스르르 풀려버렸다. 풀린 빵 봉지를 허탈하게 바라보던 홍주가 물었다. 별 접는 방법 알려줄 수 있어요? 동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다시 파란색 벤치로 돌아갔다. 빵 봉지에는 접는 선이 남아 있었다. 홍주는 접힌 자국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동우는 네모난 빵 봉지를 비스듬히 둔 채 삼각형 모양으로 두 번 접었다. 마주 보고 있던 꼭짓점이 맞닿았다. 동우가 접힌 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 부분을 다시 접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별을 접을 때는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 반듯하게 모서리를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동우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봉지에 적혀 있던 빵집 이름 글자가 겹쳐졌다. 일렬로 반듯하게 나열된 갈색 글자들은 겹겹이 포개지고 포개져, 마침내 의미를 알아볼 수 없는 하나의 그림처럼 보였다. 휘리릭 봉지를 뒤집은 동우가 거의 다 됐어요, 하고 홍주에게 격려하듯 말했다.


 

  <당선소감>

 

   희망·사랑·위안의 기미… 누군가에 닿을 수 있다면

  당선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지만, 한편으론 깊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고민이 된 탓입니다.

  돌이켜보면 늘 어떤 기미를 찾아다녔던 것 같습니다. 희망, 사랑, 위안의 기미를요. 누군가의 글과 말 속에서, 나를 스치는 타인의 삶 속에서 그 기미들을 느낄 때면 기쁘고 또 행복했습니다. 찰나의 순간이 모이고 쌓여 유형의 마음이 되는 경험을 했고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그런 기미로 닿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순간을 늘 바라고 또 바랐습니다.

  소설을 읽어주시고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함께 쓰는 가람과 재은, 민아와 하빈.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이 옆에 있어 외롭지 않았습니다. 소설의 섬세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주신 이장욱 선생님, 새로운 방향을 알려주신 강영숙 선생님과 하성란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당선 소식에 함께 기뻐해 주시고 응원해주신 우다영 작가님께도 깊은 감사와 사랑을 보냅니다.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느낀 설렘이 저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묵묵히 지지해준 부모님과 은서와 은동, 오랜 친구 같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께 마음을 보냅니다. 수정 씨의 현명함과 희상 씨의 믿음이 나의 용기였습니다. 나의 반쪽 지윤, 너와 함께 울었던 날들이 나를 살게 했어. 나보다 더 나를 믿어준 다은과 지인, 승원을 비롯한 모든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만나면 늘 열네 살의 얼굴로 웃게 되는 규아, 재재, 민지, 소연, 유진아 보고 싶다. 민주와 상하, 상희 덕분에 대학 시절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아 고맙습니다. 소라야, 너를 떠올리면 어두운 밤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은밀하게 나눴던 꿈이 떠올라. 언제나 무한한 애정을 보내주는 소중한 용우, 덕분에 내 세상이 조금 더 넓어졌어. 사랑합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소설을 사랑하게 됐을까 종종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골몰해봐도 사랑의 기원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무언가를 사랑하는 일을 영원히 하고 싶다는 마음뿐입니다. 그중 제일 사랑하는 소설의 곁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습니다. 그럴 수 있도록 계속 쓰겠습니다.

● 1995년 서울 출생. 
● 동국대에서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을 전공했다.


 

  <심사평>

 

  인물의 좋은 행위와 결심… 그 이면에 작가의 ‘좋은 마음’ 느껴져

  소설이 위기라는 말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들려온다. 하지만 이상하다. 소설을 쓰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그렇다면 무엇이 위기인 걸까? 아이러니한 고민 속에 응모된 소설들을 읽어나갔다. 작품마다 이야기와 주제의식이 상이했지만 중심인물이 어려운 세계 속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버텨나가는 소설이 많았다. 인물은 일할 곳을 알아보고, 열정을 쏟을 의미와 대상을 고민했으며, 머물 방과 집을 찾았다. 소설 속 세계와 사건 인물은 모두 허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뉴스와 다큐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소설은 이야기의 줄거리를 정리한 문장들의 모음이 아니다. 소설 속엔 작가의 마음과 감정이 깃들고, 타인과 세계에 대한 시각과 입장이 보이며, 선택한 단어와 문장 속엔 고유한 개성과 감각이 육체를 입고 생생하게 표현된다. 사건과 상황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독자가 그것을 왜 봐야 하는지, 그 속에서 발견하게 될 것은 무엇인지, 알게 해주는 단계까지 나아갔더라면 더 좋았을 소설도 많았다.

  ‘오영의 소설’은 잘 쓴 소설이었다. 처음에는 후기를 작성하는 일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글쓰기에 관한 소설로 확장되었고 나아가 진짜와 가짜를 고민하는 주제로 뻗어 나가는 것이 훌륭했다. 다만 소설 속에 예술과 글쓰기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납작하고 전형적인 것이어서 아쉽게 느껴졌다.

  ‘돌아가는 마음’은 노곤하고 지난한 일상의 문제를 재치있고 유머러스하게 다뤘다. 언니의 캐릭터가 좋았다. 처음엔 엉뚱하게만 보였는데 읽어나갈수록 진한 슬픔과 깊은 감정의 결이 느껴졌다. 소설이 다 끝났을 때 언니의 감정과 사연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와 사연이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내가 말하지 않는 것들’은 열여섯 인물의 감정과 마음, 그리고 말을 잘 표현한 작품이었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 일부러 새침하게 구는 사춘기의 행위가 누구나 공감될 수 있도록 설득적으로 쓰여 있어서 즐겁게 읽었다. 하지만 중심인물 주변 인물은 표면적으로만 그려졌고 이야기의 전개와 마무리 역시 예측 가능한 선에서 안정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쉬웠다.

  ‘낮에 접는 별’은 문장과 표현, 구성과 전개 모든 부분이 고르게 좋았다. 걸리는 부분도 있었다. 몇몇 장면에서 시간성과 공간성이 모호하게 그려졌고 뒤로 갈수록 감정을 보여주고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닌 다소 감상적으로 흐른다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이야기 속에 적절하게 녹아있는 인물의 행위와 결심, 그 이면에 존재할 작가의 마음이 좋다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특히 홍주가 목도리를 받았음에도 휑한 목에 두르지 않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이야기 속에서 좋은 장면으로 기능했고 그렇게 쓰기로 한 작가의 선택은 앞으로 계속 좋은 소설을 쓰게 될 것이라는 신뢰를 갖게 했다. 심사위원들은 ‘낮에 접는 별’을 당선작으로 기쁘게 합의했다.

심사위원 : 조경란, 정소현, 정용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