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체어샷 / 박정현
<당선작>
체어샷 / 박정현
1
대표는 나더러 자기 집에 들러서 잡화벌꿀과 노트북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아마도 본인은 부탁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나는 명령으로 들었지만. 대표의 집은 회사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의 빌라 5층이다. 대표는 늘 공적인 업무와 사적인 업무를 교묘하게 섞었다. 어디까지가 공적인 업무이고 어디까지가 사적인 업무인지 고민하지만, 그건 모래사장에 바다의 경계를 긋는 것처럼 무용하다. 어차피 네, 하고 대답할 테니까.
이런 거 불편하나?
처음 샌드위치를 사오라고 명령했을 때 내게 했던 말이다.
아니요, 편합니다.
편합니다, 라니. 그 상황에서 이 이상 바보 같은 대답을 하기도 쉽지 않다. 내가 편한만큼 대표는 선을 넘는다. 이건 일종의 영역 싸움이다. 대표는 내 몫의 샌드위치 값도 지불한다며 자기 명령을 부탁으로 정당화하고, 나는 복종이 아닌 호의로 하는 행동이라며 스스로 기만한다. 샌드위치 심부름은 외근을 빙자한 운전 부탁으로, 중고 거래 심부름으로, 집안의 가구를 옮겨달라는 부탁으로 이어진다. 내가 초래한 일이다. 나갈 준비를 하는 나를 보고 고개를 젓던 디자이너 남서윤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불편한 게 편한 겁니다.
시켰을 때 싫은 티라도 내란 말이겠지. 나는 꿈틀거리지도 못했구나, 자책하며 걸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5층에서 열렸을 때,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여자는 화들짝 놀랐다. 눈 주위가 붉었고 날이 추웠음에도 앞머리가 땀에 젖어 있었다. 보풀이 일어난 코트 깃을 바투 올린 채 비스듬히 돌린 고개는 어쩐지 누가 손찌검을 할 때 눈을 질끈 감기 위해 미리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지체하지 않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고양이 털이 공중에 떠다녔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문을 열었다.
오후의 남의 집에는 기묘한 고요함이 있다. 수요일마다 방문하는 가정부 덕에 집안은 깔끔했다. 환기를 위해 열어둔 베란다 통창으로 투명한 햇빛이 환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평화로운 연립주택촌이 내려다보이고, 고가도로에서 차들이 오가는 소리가 방음벽에 둥글게 깎여 웅웅 거리며 귀에 닿는다. 나는 눈을 감은 채 햇볕을 쬐고 그 회색 소음을 들었다.
방은 세 개다. 거실 탁상 위 노트북을 챙겨 부엌에 두고 화장실로 갔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빤히 노려보다가 선반을 열었다. 각종 영양제와 비타민, 처방전이 필요한 전문 의약품 따위가 노란 약통에 들어있다. 라벨에 쓰인 약의 성분을 하나씩 읽어보다가 종합비타민, 루테인, 오메가3 따위의 건강보조제만 주섬주섬 손바닥 위에 쏟아 입에 털었다. 수돗물을 조금 마셨다. 선반을 닫고 밖으로 나와 냉장고를 열었다.
냉동실과 냉장실 구분할 것 없이 꽉 차 있다. 좋은 냉장고는 아래가 냉동실이다. 양 갈빗대, 소, 돼지고기, 참돔 따위가 진공포장 되어 있다. 냉장실 신선칸에서 천도복숭아를 하나 꺼내 크게 베어먹자 과즙이 바닥에 튀었다. 양말로 닦은 뒤 싱크대 앞에 서서 마저 천도복숭아를 다 먹고 씨앗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잡다한 쓰레기 위로 누군가 사용한 일회용 주사기가 보였다. 냉장고에서 반쯤 남은 진을 꺼내 크게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냉장고 문을 닫았다.
씹을 때 턱 근육이 꿈틀거리는 느낌. 삼킬 때 울대가 요동치는 소리. 그런 게 전부다. 이런 발작적인 행동은 하면서도 왜 하는 건지 스스로 설명하기 힘들다. 그냥 단순한 보상심리 때문일까. 휘파람을 불었다.
대표에게는 18살 먹은 노령의 고양이가 있다. 삼색이고, 당연히 암컷이다. 사진으로는 많이 봤지만 직접 본 적은 없다. 낯을 가리는지 내가 문을 열면 늘 어딘가로 숨어버린다. 최근에 대표는 일본 여행 동안 동네 구인 어플로 연락한 펫시터에게 고양이를 맡겼다. 펫시터가 심장약을 잘못 투약해 고양이 상태가 급속도로 안 좋아졌다고 말했다. 치료 비용으로 수억이 깨졌다며 펫시터가 자신의 고양이를 죽인 거나 다름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펫시터에게 맡기기 전부터 고양이는 몇 차례 거품을 물고 발작해 병원에 갔던 적이 있다.
고양이 화장실 뚜껑을 열고 삽으로 모래를 뒤적였다. 며칠 동안 치우지 않은 오줌 덩어리와 똥이 삽 끝에 걸렸다. 화장실 선반에서 리스테린을 꺼내 가글을 하고 세면대에 뱉은 뒤 신발을 다시 신으려는데, 열려있는 침실 문 좁은 틈새에서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신발을 신지 않은 발을 길게 뻗은 다음 손가락 끝으로 문을 확 밀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몇 주 전부터 나는 집 근처 독립서점에서 소설창작 입문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가벼운 독서모임도 있었고, 시 창작 수업도 있었고, 에세이 수업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소설창작 수업을 택했다. 나는 내 삶을 쓰고 싶었지만 있는 그대로 쓰고 싶진 않았다. 같은 또래 친구들이 차근차근 자리 잡고 결혼 준비까지 하는 마당에, 업계 관례라며 4대 보험도 들지 못한 채 박봉의 월급을 받고 아침을 회사 식기 설거지로 시작하는 내 삶을 적어서 뭘 한단 말인가? 이런 걸 그대로 받아 쓰고 싶진 않다. 소설은 픽션이니까, 픽션을 발판으로 현실을 극복하고 싶었다.
나는 내 삶을 쓰고 싶었지만
있는 그대로 쓰고 싶진 않았다…
소설은 픽션이니까, 픽션을 발판으로
현실을 극복하고 싶었다
선생은 등단한 지 5년 정도 된 작가였다. 이름은 처음 들어봤다. 서점에서 그녀가 쓴 소설집을 살펴봤는데, 중쇄를 찍지 못했다. 유명하지 않아서 그런가 정원을 10명 정도로 예상한 수업은 나를 포함해 4명이 전부였다. 선생은 첫 수업 때 말했다.
소설 쓰는 방법 같은 건 가르칠 수 없습니다.
초면인 수강생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멋쩍게 웃었다.
소설을 완성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같이 쓰고, 읽고, 응원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수강생들은 모두 전에 소설을 써본 적 없는 초심자였다. 다들 뭔가를 쓰고 싶어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선생은 쪽지를 나눠주며 지금 각자가 당면한 가장 큰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짧게 한 줄로 적으라고 말했다.
그게 여러분 소설의 씨앗이 될 겁니다. 이야기를 쓰는 건 출산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산모이자 산파입니다. 핵심적인 아이디어가 착상하고 메타포를 만나 화학 작용을 일으키고, 그게 머릿속에서 천천히 불러오다가 결국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 아이는 걸을 수도 있고, 얼마 못 가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겁내지 마세요. 밖으로 나왔다는 것은, 여러분이 그 문제를 쓰기 전과 달리 소화했다는 걸 의미할 테니까요.
어둑한 서점 한가운데서 둥글게 배치한 의자에 앉아 번갈아 가며 자기소개를 하고 각자가 처한 현실적인 문제를 나누는 모습은 마치 알코올중독자 치료 모임의 한 장면 같았다. 키가 크고 입만 웃는 여자가 먼저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뭔가 민망합니다. 영양사… 라고 불러주세요.
안녕, 영양사.
선생이 인사하자 모두 웃으며 따라 인사했다. 영양사는 시선을 맞은편 의자 오른쪽 다리에 고정한 채 말했다.
병원에서 영양사 보조로 배식 일을 합니다. 그래서 영양사라고… 방금 지어냈습니다. 이름을 말해도 큰 상관은 없지만, 이름보다는 이쪽이 저에 대해 알려주는 게 많을 것 같습니다. 제가 처한 문제는… 부끄러워요. 몸무게에 대한 집착이 심해요. 보다시피 키가 큰 편입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이만큼 컸어요. 하지만 몸무게는 44킬로그램 정도입니다. 자랑하는 건 결코 아니에요. 여기서 더 찌는 걸 참을 수 없어요. 몸무게를 신경 쓴 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습니다. 중학교 때까지는 건강했고, 꾸미는 것도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전부 재미없어져 버렸습니다. 특성화 고교를 나왔으니 거기서 배운 영양사 일을 할 뿐이지 다른 걸 할 여력은 없어요. 버는 돈은 족족 병원비나 핸드폰 게임에 써버립니다. 들으면 놀랄 거예요. 월급을 전부 게임에 써버리는 수준이니까요. 오래전부터 제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남자를 만나고 싶지도 않고요. 제가 제어할 수 있는 건 몸무게, 그거 딱 하나뿐인 것 같아요. 45 킬로그램이 체중계 한가운데에 인쇄되어 있어요. 44에 멈추는 체중계 침이 오랜 친구 같습니다. 거기에 기대서 살아요. 여러분이 보기에 문제 같지만, 솔직히 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문제죠. 쓸 수 있다면 이것에 대해 써보고 싶어요.
생각보다 솔직하게 말해서 놀랐다. 나머지 둘도 각자가 처한 문제를 고백했다.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종이에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루이, 루이입니다.
안녕, 루이.
빈 종이를 냈는데… 문제가 없어서는 결코 아닙니다. 문제는 많아요. 뭐가 가장 큰 문제인지 몰라서 그렇지. 첫 직장에서 1년 조금 넘게 일하고 있는데, 최근에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고 있어요. 잡지나 사보, 문화행사기획을 하는 회사입니다. 직원은 고작 3명뿐이고요. 이런 설명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원두를 갈아서 드립 커피로 내려 마실 수 있는 사무실이 있지만, 4대 보험은 업계 관례라는 이유로 들어주지 않는 곳입니다. 작은 곳일수록 대표의 힘이 세고, 뭐든 대표 위주로 돌아갑니다. 가끔 앉아서 사무실을 돌아보면 대표의 뱃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하나도 제대로 요구하지 못했습니다. 싸워야 하는 순간이 많았는데, 전부 싸우지 않았습니다. 제 안의 수동성과 노예근성이 20대 남자는 착취당하는 게 당연하니까, 라며 자신을 먼저 속였습니다. 몇 달 전에 새 디자이너가 들어왔어요. 그분에게 회사를 소개하는데, 부끄러웠습니다. 진작 느꼈어야 할, 제가 유예했던 부끄러움을 그제서야 느낀 거예요. 그분은 지금도 가끔 제게 말해요. 아무도 대신 싸워주지 않는다고. 그런데 저는 여전히 싸우지 못해서 스스로가 한심합니다.
이야기를 쓰는 건 출산과 같습니다…
겁내지 마세요. 밖으로 나왔다는 것은,
여러분이 그 문제를 쓰기 전과 달리
소화했다는 걸 의미할테니까요
*
점심 무렵까지 출근하지 않던 대표에게 전화가 왔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우는 소리만 들리길래 끊었는데, 곧바로 다시 전화하더니 고양이가 죽었다고 말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펫시터가 고양이를 죽였다고 집요하게 덧붙였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대표는 전화를 끊고는 선임 에디터인 김철진과 남서윤에게 차례로 전화해 똑같이 고양이가 죽었다고 말했다.
다들 와서 참치 마지막 가는 길 배웅해줘요.
김철진은 한숨을 쉬더니 죽은 고양이 보러 갈 준비를 하자고 했다. 남서윤은 동물 사체를 보는 게 싫다며 거절했다. 나는 대표가 보낸 문자를 확인하고 가는 길에 죽을 사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나와 김철진은 전복죽을 회사 카드로 산 뒤 걸어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통곡 소리가 들렸다. 현관은 신발로 가득했다. 거실 탁자 위로 푸른 수건에 쌓인 채 뻣뻣하게 굳어있는 고양이가 첫눈에 보였다. 대표는 그 앞에 앉아 얼굴을 두 손에 파묻은 채 울고 있었다. 그 뒤로는 대표의 지인 대여섯 명이 병풍처럼 대표를 둘러싼 채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고양이가 좋은 곳에 갔을 거라 말하고 있었다. 나무토막 위 버섯처럼 대표의 등에서 팔 여러 개가 자라난 것 같았다. 대표는 자기가 여행을 가서 고양이를 죽였다고 자책했다. 그러면 지인들은 대표가 아니라 펫시터가 죽인 거라며 위로했다. 대표는 눈물을 닦은 뒤 나와 김철진더러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했다. 김철진은 천연덕스럽게 두 손을 모은 채 고양이가 웃어른이라도 된다는 듯이 존댓말로 인사를 하고 반절을 했다. 나는 옆에서 고양이를 우두커니 내려다봤다. 수차례 대표의 집에 들를 때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죽어서 처음 봤다. 고양이는 기지개를 켜다가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어쩐지 대표의 지인들이 뒤에서 나를 노려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죽은 고양이의 이마를 몇 차례 쓰다듬다가 좋은 곳으로 가라고 말하고는 뒤로 빠졌다. 대표는 사무실로 복귀하려는 나와 김철진을 불러 세웠다.
반려동물 장례식장 좀 알아보고 단톡방에 올려줘요. 부탁할게요.
고양이 장례식을 마친 대표는 요 며칠 지쳐 보였고, 내내 신경이 날카로웠다. 한번은 이동통신사 요금제 연장 사은품으로 받은 핸드블렌더 성능이 끔찍하다고 이런 형편없는 물건을 VIP 사은품으로 기획한 책임자가 누구냐며 상담직원을 붙잡고 무려 2시간 동안 분풀이를 했다. 통화 내용이 고스란히 사무실로 흘러들었다. 대표는 통화를 끊고는 나를 불렀다. 나는 내가 작성한 기사 때문이라 여기고 깨질 준비를 했다.
대표가 건넨 건 흡사 줄자처럼 보일 정도로 긴 영수증이었다. 핸드폰 화면에 다 담기도록 영수증을 들고 있으라고 했다. 나는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악사처럼 구겨지거나 꼬여서 누락 되는 부분 없이 영수증을 펼쳤다. 동물병원 영수증이었다. 진찰비, 입원비, 검사비, 약값, 수혈비, 수술비 등 기타 잡다한 의료서비스가 날짜와 함께 수차례 반복해서 적혀있었다. 그걸 모두 합친 금액은 9백만 원이 넘었다. 대표는 자기가 찍은 사진을 넘겨보며 확인하고는, 대뜸 내가 웃기게 나왔다고 말했다.
며칠 뒤 대표는 중식당에서 직원들에게 점심을 샀다. 고양이를 애도하느라 회사 일에 소홀했던 부분에 대해 사과하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김철진은 대표에게 오전에 사무실에 방문했던 남자가 누구였냐고 물었다.
변호사. 소송 걸었거든.
나는 짜장면을 비비던 젓가락을 멈췄다. 김철진이 물었다.
소송이요? 누구한테요?
펫시터.
배보다 배꼽이 더 클 텐데요.
걔 때문에 참치가 죽었어요. 걔가 죽인 거야. 여행 가기 전에 직접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가르쳤다고. 수액은 어떻게 놓고, 영양제, 흡착제, 이뇨제, 심장약은 어떻게 먹이는지. 불안해서 카톡으로도 세세하게 남겼어요. 내 성격 알잖아. 그런데 그걸 지 멋대로 먹여서 참치를 죽인 거야. 이건 돈 때문에 하는 게 아니에요. 잘못했으면 죗값을 치러야지.
나는 음식을 절반가량 남겼다. 대표는 잡채밥을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이를 닦고 자리에 앉아 동네 구인 어플을 깔았다. 위치를 회사로 지정한 다음 검색창에 ‘펫시터’라고 입력했다. 서너 페이지에 걸쳐 펫시터 일을 자원한 사람들의 프로필이 쭉 떴다. 조그마한 프로필을 차례로 넘겨보다가 멈췄다. 사진에서 시차는 느껴졌지만, 분명히 닫혀있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그 여자였다. 아이디는 ‘toibi94’였다. 햇볕이 충분히 들지 않아 조금 어둑한 실내에서 고등어 고양이를 안은 채 플래시를 터뜨려 찍은 필름 사진이었다. 찍히는 게 익숙하지 않은지 포즈를 취한 몸은 어딘가 경직되어 있다. 하지만 안겨있는 고양이는 편안해 보인다. 여자의 입꼬리는 한쪽만 살짝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마 플래시가 잦아든 다음에는 허리를 꺾으면서 웃었을지도 모르겠다. 여자는 자신을 다음 문장으로 소개했다.
어제는 당신이 고양이를 구했지만, 내일은 고양이가 당신을 구할 겁니다.
갑자기 명치 한가운데가 아팠다. 아코디언처럼 펼쳤던 영수증 끝에 적힌 9백만 원이라는 금액이 그만큼의 고통으로 다가왔다. 나의 부채가 아니었지만 나는 9백만 원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날, 야근을 마치고 잠이 올 때까지 토이비의 펫시터 서비스를 이용한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반복해서 읽었다.
*
영양사는 늘 30분 정도 일찍 서점에 도착했다. 그녀는 이런저런 책을 빼서 도입부만 살펴보다가 다시 꽂아두곤 했다. 나 역시 모처럼 일찍 서점에 도착해 영양사에게 말을 붙였다.
안녕, 영양사.
안녕, 루이.
소설은, 잘 돼갑니까?
뭘 쓸지 정했어요. 아직 한 글자도 쓰지 못했지만.
나는 말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써 보려고요.
거식증은요?
같은 거예요.
그런가요?
3년 전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파킨슨병으로요.
아이고.
요리를 잘하시던 분이라 항상 집에 갈 때마다 음식을 엄청 해주셨어요. 저는 살찔까 봐 거의 먹지 않았고요. 나중에는 엉망으로 사는 제 모습을 보이기 싫어 뵈러 가지도 않았어요. 그럴 때 있잖아요, 정작 상대는 신경도 안 쓰는데.
알아요.
할머니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들렀을 때, 두 손이 축 늘어진 할머니를 처음 봤어요. 가구 틈 사이엔 먼지가 쌓여있어요. 할머니 성격에 분명 거슬렸을 텐데, 아무런 말도 안 하시더군요. 할머니는 도우미에게 부탁해 피자를 시켰어요. 그 와중에도 제가 마른 게 걱정이셨던 거죠. 저는 아주 오래전처럼 잘 먹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두 명이서 먹지도 못할 만큼의 피자와 파스타를 꾸역꾸역 다 먹었어요. 할머니는 보기 좋다는 말만 힘없이 반복했어요. 저는 밖으로 나와서 먹은 걸 전부 아파트 화단에 토했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에요. 지금도 가끔 상상해요. 제가 떠나고, 해가 저물고, 소파에 앉은 할머니 위로 어둠이 켜켜이 쌓이는 장면을. 후회돼요. 너무 많은 게. 그런 걸 전부 쓸 거예요.
아름다운 기억 같아요. 좋은 이야기의 냄새가 나요.
토 냄새가 아니라요?
나는 웃었다.
루이 님은, 진짜 문제가 뭔지 이제 알게 됐나요?
네.
뭘 쓸 건가요?
주중에 수차례 변호사가 방문했다. 대표는 회의실 문을 닫고 변호사와 마주 앉아 소송을 준비했다. 접객용 커피를 들고 회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긴 탁자를 채우고 있는 잡다한 문서들이 보였다. 증거 목록이라고 써진 문서에는 영수증을 든 내 사진이 풀샷으로 들어가 있었다. 내가 회의실에 머무는 동안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변호사는 가볍게 눈인사만 했다. 문을 닫고 나가자 둘은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회의실 벽은 얇았고, 화장실 변기에 앉아 환풍기 옆의 창문을 열면 회의실 창문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대표는 소송에서 꼭 이겨야 한다며, 이길 것을 가정하고 동물병원에서 이런저런 치료를 받은 거라고 말했다. 변호사는 투약 사고가 있었던 날 이전의 치료 기록은 돈이 아깝더라도 따로 첨부하지 않는 것이 승소할 가능성을 높일 것이라 조언하고 있었다. 나는 대화가 듣기 싫어 변기 물을 내렸다.
변호사가 떠난 뒤에 대표와 김철진, 그리고 나는 사보 책자 제작 건으로 미팅을 위해 외근을 떠났다. 내가 운전하고 김철진이 보조석에 앉고 대표가 상석에 앉았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동네의 맛집이 어딘지 따위의 사사로운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대표가 대뜸 말했다.
신용불량자더라고.
마치 그곳의 추천 메뉴를 말하듯이.
누가요?
펫시터. 참치 죽인 애. 따로 하는 일도 없는 애야. 고소장 받고 나니까 생각이 바뀌었는지 죽을죄를 지었다고 용서해달라며 문자를 보냈어. 문자뿐인 거야.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알아. 진즉에 직접 찾아와서 무릎 꿇고 자기가 죽인 거라고 용서를 구했어야지. 그랬더라면 나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을 거야. 이런 애들은 다시는 펫시터 일을 하면 안 돼. 제2의, 제3의 참치가 또 나올 거야. 나는 그걸 막는 거야.
투약 사고 전부터 입원 치료한 적 많았잖아요.
내가 충동적으로 내뱉자마자 갑자기 옆 차선의 차가 끼어들었다. 나는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차 안의 모두는 앞으로 쏠렸다가 내던져지듯이 등받이에 널브러졌다. 대표는 백미러에 비친 내 눈을 노려보았다. 파란불이 들어왔다. 내가 출발하지 않자 뒤에서 클락션이 울렸다.
미팅 장소 주변은 주차할 곳이 마땅찮았다. 주차장을 세 곳이나 돌았지만 전부 꽉 찬 상태였다. 그나마 자리가 있는 곳은 걸어가기에 너무 멀었다. 미팅 시간이 다가오자 대표는 그냥 근처 골목에 차를 대라고 했다. 나는 불법주차 견인 구역이라고 답했다. 대표는 그냥 여기다 대고 차에서 대기하라고 버럭 짜증을 냈다. 김철진은 내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 성큼성큼 걸어가는 둘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펫시터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실제로 고작 스치듯 한번 우연히 마주친 게 전부다. 고양이는 18살이었고, 만성신부전을 비롯한 잡다한 병을 달고 몇 달 전부터 여러 차례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자신의 나태에 대한 변명인지 자기 연민을 남들에게 강요하기 위한 강박인지 대표는 자신의 사적인 일정을 시시콜콜하게 회사 단톡방에다 모조리 남겨뒀다. 고양이의 상태가 악화돼 병원에 갔다가 의식을 회복했다는, 전혀 관심 없는 지난 기록도 마찬가지다. 정말 펫시터가 고양이에게 잘못된 용량의 약을 준 걸까? 그것 때문에 고양이가 죽은 걸까? 펫시터의 투약 사고로 고양이가 일으켰다던 발작은 이전의 발작과 다른 걸까? 마지막 며칠 동안 고양이에게 쏟아부었던 고가의 치료는 정말 고양이를 위해서였을까? 그 여자는 그저 고양이를 좋아하는 신용불량자일 뿐인데.
차 문을 열고 나와 짧은 거리를 시계추처럼 진자운동 하듯이 걷기도 하고 다리를 덜덜 떨고 건물 벽에 머리를 반복해서 찧기도 했다. 부당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나는 핸드폰으로 회사 차 사진을 찍고 불법주차 단속 신고를 넣었다. 15분쯤 지나자 2인 1조의 단속 공무원이 왔다. 나는 반대편 골목에 서서 그들이 앞유리창에 단속 스티커 붙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시간이 30분 정도 지났을 때, 대표와 김철진은 미팅을 마치고 돌아왔다. 대표는 딱지를 보고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나는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걸린 것 같다고 답했다. 대표는 단속하는 사람들이 오면 차를 몰고 근처를 돌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안 그러면 내 존재 이유가 무엇이겠냐며 쏘아붙였다.
늦은 새벽까지 나는 노트북 화면의 점멸하는 커서만 노려보았다. 한 시간째 한 글자도 쓰지 못했지만 눕지 않았다. 어차피 누워봐야 잠은 오지 않는다. 눈을 감으면 오늘 하루 대표와 싸워야 했으나 싸우지 못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망상 속에서 그걸 바로잡으려 할 뿐이다. 꿈속에서 늘어난 고무 팔다리로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주먹을 휘두르고, 말미잘 같은 손가락으로 서로 목을 움켜쥔 채 버둥거릴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숨이 거칠어졌다. 나는 동네 구인 어플에 들어가 펫시터의 프로필을 멍하니 보다가 충동적으로 말을 걸었다.
당신을 알아요.
…
할 이야기가 있어요.
…
참치에 관한 겁니다.
…
메시지 끝에 ‘읽음’ 표시가 떴지만, 펫시터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
창작 수업은 마지막 합평을 두 주 앞두고 있었다. 선생은 글을 쓰다가 막히거나 고민되는 부분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다. 비록 자기가 해결할 순 없을지언정 함께 생각해보면 풀릴 수 있는 지점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영양사는 쓰다 보니 소설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 같았고, 그 기억을 충실하게 쓰려고 마음먹은 순간 도리어 이야기가 잘 쓰이지 않고 조금씩 엇나가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선생은 생각에 잠긴 채 곰곰이 대답을 골랐다.
어쩌면 우리는 자전적인 이야기밖에 쓸 수 없는 것일지도 몰라요. 그런 의미에서, 소설은 기대한 것처럼 자유도가 높은 창작 활동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무엇을 쓰던 그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가리키고 있을 겁니다. 기억을 그대로 쓰려고 해도 거짓을 덧대는 나를 발견할지도 모르고요. 지금 제가 모른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있죠? 정답은 없습니다. 엇나가면 엇나가는 대로 이야기를 따라가 보세요.
선생은 뭔가를 덧붙여 설명하려다 관두고 쓴웃음을 지었다. 대신 나를 몇 초 동안 쳐다보았다.
저는 왠지 루이 님이 쓸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베일에 싸여 있죠. 쓰면서 고민되는 부분은 없으세요?
있습니다.
저희와 나눌 수 있는 문제일까요?
현실의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는데, 그걸 소설 속에서 바로잡는 게 무의미한 일처럼 느껴집니다.
윤리나 책임과 관련해서 말이지요?
네. 실제로 저는 비겁한데 소설 속에서 용감하게 그리는 건 자기기만이니까요.
소설 속 주인공과 루이 님은 동일 인물인가요?
…아니요.
그러면 주인공이 루이 님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저는 제 문제를 쓰고 있는데요.
소설은 기본적으로 거짓이죠. 안에는 진실이 들어있어야 하지만. 앞선 영양사님의 질문과 연관 지어 고민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동의했어요. 앞으로 읽을 이야기를 ‘지어낸 이야기’라고 믿고 읽기로. 그건 책을 펼치는 순간 독자가 작가와 맺은 무언의 약속입니다. 거짓이라는 형식은 딱 한 발짝, 혹은 반 발짝만큼의 용기를 작가에게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소설 속 인물은 해볼 수 있는 거죠. 물론 그 행동이 현실과 균형점을 잃는다면 쉬운 타협이나 편한 미화에 그쳐 버릴 위험도 존재합니다만, 그 정도의 시도도 애초에 허락하지 않는다면, 쓰는 사람과 소설 속 인물이 너무 슬프지 않을까요? 루이 님도, 저도.
*
대표는 내게 변호사에게 보낼 추가 서류를 등기로 보내고 오라고 명령했다. 서류를 받아들며 생각했다. 이건 칼이다. 펫시터를 찌르는. 그리고 나는 그걸 변호사에게 전달하러 간다. 갑자기 어제 꿨던 꿈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분명히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잿더미처럼 형태가 무너져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는데, 우체국을 향해 힘없이 걸어가는 길에 꿈은 다시 채도를 띠고 시간을 역행해 형태를 갖췄다.
꿈에서도 나는 회사원이었다. 나는 사장에게 사직서를 냈다. 사장은 주문했던 명함이 오늘 도착했는데, 명함을 길가의 모든 사람에게 전부 나눠주고 나면 사직서를 수리하겠다고 답했다. 내 책상 옆에는 족히 수천 장, 수만 장은 되어 보이는 명함으로 가득한 사과 박스가 3개 정도 적재되어 있었다. 나는 외투 주머니마다 명함을 가득 쑤셔 넣고 거리로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자기소개를 한 뒤 명함을 건넸다. 사람들은 명함을 받자마자 버리거나,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이 거리의 모든 사람이 내가 이 회사에 다닌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그만둘 수 있는 것이 내 운명이었다. 다리가 너무 아팠지만, 거리에 벤치는커녕 걸터앉을 턱조차 없었다.
이건 어떤 의미일까.
나는 계단을 올라 우체국 현관을 향해 걸었다. 유리문에 비친 내 모습은 미묘하게 뒤틀려, 나이지만 내가 아닌 것 같았다. 오른손으로 왼손에게 악수를 청하듯이 현관 유리문 손잡이를 쥐는 순간 갑자기 유리문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나는 허공에 손잡이만 쥐고 있는 꼴이 됐다. 사람들은 방금까지 문이 존재했던 내가 서 있는 자리 대신 옆의 온전한 유리문을 여닫으며 지나다녔다. 우체국 청원 경찰이 다리를 절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손잡이를 쥔 손을 앞으로 내저었다.
제가 부순 게 아닙니다. 그냥 쥐자마자 부서졌어요.
청원 경찰은 손잡이를 쥐고 있는 내 손을 힘줘서 붙잡았다. 나는 내가 부순 게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어서 팔을 휘둘렀다.
정말 제가 부순 게 아니에요. 갑자기 부서졌어요.
그는 꽉 움켜쥔 내 손가락을 하나씩 펼쳐 손잡이를 뺏었다.
원래 강화유리가 이런 식으로 부서져요. 충격이 누적되다가 버티지 못하는 그 순간.
그는 큐사인을 주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박살 나는 거죠. 운이 없었을 뿐입니다.
청원 경찰은 키오스크에서 일반 업무 버튼을 누른 뒤 번호표를 내게 건넸다. 나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청원 경찰이 바닥에 무질서하게 널려있는 유리 조각을 쓰레받기에 쓸어 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창구 직원이 내 번호를 부르자,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환하게 햇빛이 쏟아지고 있는 출구로 발길을 돌렸다.
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회사 단톡방을 켜고 ‘참치’, ‘병원’ 등의 단어로 검색했다. 대표가 일컫는 투약 사고 이전 시점의 기록을 찾아 하나씩 갈무리했다. 해당하는 날짜에 내가 썼던 근무일지를 참고해 그날의 정황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내가 모은 자료는 이미 고양이가 노환으로 투약 사고 이전부터 비슷한 발작 증세를 보이며 수차례 동물병원에서 응급 및 입원 치료를 받은 적이 있음을 증언하고 있었다. 나는 문서의 제목을 ‘토이비’라고 쓴 뒤 저장하고, 대표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대표는 내가 뭔가를 요구하리라는 것을 눈치채고 근처 카페에서 얘기하자고 했다.
대표와 나는 야외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나는 보내지 않은 등기서류를 돌려주며 말했다.
퇴사하겠습니다.
대표는 이유를 말해보라고 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펫시터. 그건 내가 겪는 피해를 감수하고 일하는 것과 분명히 달랐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대신 나는 평소 품고 있던 불만을 모조리 말했다. 월급이 너무 적다, 면접 때는 4대 보험이 된다고 하더니 왜 아직도 가입되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 사적인 심부름이 너무 많다,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수습 기간이 6개월인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이 모든 부당한 대우를 업계 관례라는 말에 속아 받아들인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다 등… 말하면서 서서히 감정이 올라왔다. 대표는 내 말을 차분하게 듣고 나서 모두 조정 가능한 문제라고 답했다. 또, 불만이 있으면 진즉 얘기해야지 마치 자신을 악덕 업주인 것처럼 모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나무랐다.
근무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 말을 꺼낸 게 아니에요.
이 자리에서 일하다 보면 직원들에게 소홀할 때가 있어. 그건 내가 사과할게.
저는 그만할 겁니다.
들어봐봐. 4대 보험 가입도 해줄 수 있고, 월급도 올려줄 수 있어, 다만 4대 보험 때문에 받는 금액 자체는 지금이랑 크게 차이 나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나는 네가 돈을 차라리 더 받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서…
아니요.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더 하고 싶지 않아요.
대표는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내 표정을 꼼꼼하게 살폈다.
네가 바라는 점들이 개선되면 더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런데도 할 수 없다는 건 그만두고 싶은 이유가 따로 있다는 거잖아.
…
말해봐. 진짜 이유를.
…시간이 부족해요.
시간? 무슨 시간.
소설을 써야 하는데 시간이 부족합니다.
짧은 정적이 흐른 후 대표는 발작하듯 웃었다. 카페 안의 다른 손님들이 쳐다봤다. 대표의 경박한 웃음과 내가 방금 내뱉은 말 중 무엇이 나를 더 부끄럽게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대표는 손끝으로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더니 내게 담배를 한 대 빌리고는 실실 흘리는 웃음 따라 연기를 내뱉었다.
지금껏 들었던 수많은 퇴사 사유 중 기록할만한 내용이네. 진지하게 하는 말이니?
네.
글 쓰는 사람 대 글 쓰는 사람으로 조언해도 될까?
아니요.
나는 네가 가려는 길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아.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시인, 소설가 친구들인 거 너도 봤잖아. 물론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 그런 시대니까. 하지만 다 제쳐두고 진짜 작가가 되려면 네가 품고 있는 질문과 시선이 대중과 공명할 만큼 특별해야 해. 너, 특별하니? 무슨 센터 창작 수업에서 들은 칭찬 몇 마디로 이런 결정을 내리려는 게 아니길 바란다.
서점에서 하는 창작 수업입니다.
등단이 되든 안 되든 어차피 돈은 못 벌어. 그건 알지? 대부분 어떻게 돈을 버는 줄 알아? 피라미드야. 네가 듣는다는 그 창작 수업 선생처럼, 글 쓰고 싶다는 너 같은 애들 상대로 다시 쓸 수 있다며, 다단계 녹즙기 팔 듯이 열정 팔이 해서 입에 풀칠하는 게 그 바닥 현실이야. 그리고 너도 언젠가는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해야겠지. 잘 풀리는 경우를 가정한다 해도 말이야. 네가 가려는 미래가 그래. 준비됐어?
저는 그냥 글을 완성하고 싶을 뿐인데요.
그럼 회사 다니면서 써.
다니면서는 못 써요.
왜.
그게 제 문제니까요.
회사가?
예.
마치 내가 문제라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정말 그만둘 거니?
네.
단호하네. 그래서, 그렇게 완성하려는 건 무슨 이야기인데?
제가 쓸 수 있는 걸 쓸 겁니다.
여기서 좋은 추억만 가져가길 바란다. 이 바닥 좁아. 다 오가며 마주칠 거야. 나는 널 응원해. 부디 내 인맥이 널 돕는 데 쓰였으면 좋겠네.
저는 제가 써야만 하는 걸 쓸 겁니다.
그래. 고생했다. 이번 주까지만 나와.
예.
가끔 얼굴 보자.
조만간 볼 일이 있을 겁니다.
대표는 자기가 마시던 에스프레소 잔에 꽁초를 던져 끄더니 굳은 얼굴로 등기서류를 챙겨 먼저 떠났다. 나는 동네 구인 어플에 접속해 다시 펫시터와의 대화창에 접속했다.
저는 참치를 당신에게 맡긴 사람의 회사 직원입니다. 참치는 당신이 맡기 전부터 수차례 발작을 일으켜 입원 치료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대표가 회사 단톡방에 남긴 기록을 모두 모아 정리했습니다. 메일 주소를 알려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필요하면 증언을 할 수도 있습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읽음’ 표시가 떴다. 펫시터에게 답장이 온 건 퇴근길 버스 창가 왼편에 앉아 느릿하게 지나는 고궁을 바라볼 때였다.
왜 나를 도와주는 건가요.
나는 이게 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쪽은 어떻게 되나요.
이번 주까지만 일하기로 했습니다.
그만둔 건가요. 나 때문에.
어차피 그만둘 생각이었습니다.
곤란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요.
메일 주소 알려주세요.
정말 곤란한 문제가요.
메일 주소 알려주세요.
펫시터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다가 내가 현관문을 열자 메일 주소를 보냈다. 나는 씻지도 않은 채 바로 책상 앞에 앉아 지금껏 내가 정리한 자료를 보냈다. 발송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가슴 한가운데 얹혀있던 끈적하고 무거운 응어리가 한꺼번에 사라진 것만 같았다. 나는 비로소 한 글자도 쓰여있지 않은 한글 문서를 켜고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2
이곳에서의 지난 1년은 내게 20리터짜리 종량제 봉투에 쑤셔 넣을 수 있는 정도의 짐만 남겼다. 나는 쓰던 머그컵만 챙기고 나머지는 전부 버렸다. 건물 밖으로 나서는 순간 평소와 달리 유난히도 거리가 조용했다. 사람도 없었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옆으로 비스듬히 비춰오는 햇살에 가로수 그림자만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일요일 아침의 거리처럼, 이상하게 초현실적인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펫시터는 전봇대 뒤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에 마주쳤을 때와 똑같은 옷차림이었다. 펫시터의 손은 멈추지 않고 부산스레 계속 움직였다. 주머니에 넣었을 때조차 집을 잘못 찾아간 두더지처럼 금세 밖으로 나와 코트 깃이나 단추 따위를 의미 없이 만져댔다. 나와 펫시터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정류장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펫시터가 먼저 말을 꺼냈다.
보내준 자료, 잘 읽었어요.
방금 퇴근하면서 단톡방을 나왔습니다. 이제 다시 못 들어가니까, 그 내용으로 충분하기를 바랍니다.
묻고 싶은 게 많은데, 바쁜가요.
지금 물어보세요.
계속 곰곰이 생각했어요. 왜 나한테 연락한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요즘 제가 창작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창작 수업이요?
네, 소설 창작 수업이요.
아아… 네.
쓰면서 느낀 건데, 내가 어디까지 거짓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해요. 10을 속이고 싶으면 적어도 7은 진실해야 해요. 지금 제가 쓰는 이야기에는 저도 나오고, 그쪽도 나와요. 그 모습 그대로는 아니지만. 뭐라고 부르죠?
토이비입니다.
일단 루이입니다. 아무튼, 대표도 나와요. 적도 필요하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니요, 아직 설명을 덜 했어요. 차라리 마주친 적이 없었다면 편했을 겁니다. 그랬다면 영수증도 아무 생각 없이 들고 있었을 테고, 신용불량자란 말을 들었을 때도 기억하지 못했을 겁니다. 무엇보다 토이비 님이 남긴 글귀도 읽지 않았을 테니까요.
글귀요.
어제는 당신이 고양이를 구했지만.
내일은 고양이가 당신을 구할 겁니다.
네, 그거요.
제가 믿는 말이에요.
안고 있던 고양이는…
아, 치치. 제가 키우던 고양이에요. 1년 전에 죽었어요. 지금도 생각하면 아파요. 그 뒤로 펫시터 아르바이트를 조금씩 했어요. 저는 고양이를 좋아하고, 고양이가 집마다 밝힌 온기를 느끼는 게 좋아요. 물론 모든 고양이가 행복한 건 아니지만.
이런 일을 겪고도 그 말을 믿으세요?
네.
나라면 고양이는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을 텐데.
그 친구는 그냥, 아팠을 뿐이니까요. 그 집에 마지막으로 다녀간 직후부터 줄곧 연락이 왔어요. 너 때문에 참치가 죽고 있다고, 네가 참치를 죽였다고. 처음에 무심코 죄송하다고 말하자, 계속해서 연락이 왔어요. 참치가 거품을 문 사진이나, 동물병원에서 치료받는 사진, 2박 3일 동안 저의 행적을 세세히 캐묻는 장문의 메시지와 저주들… 거기에 대응하다 보니 어느 순간 꼬투리가 잡혀 정말 내가 죽인 것처럼 상황이 변했어요. 무서워서 연락을 끊었습니다. 그 사람이 보낸 메시지를 읽고 있으면 질식할 것 같아서 전부 지워버렸어요.
그러면 안 됐는데.
소송장 받은 뒤로는 집 밖으로 안 나갔습니다. 지쳤던 걸까요. 아마도 그랬을 거예요. 줄곧 외면했던 생각도 다시 떠올랐고요.
무슨 생각이요.
부부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수단으로 아이를 갖듯이 나도 그런 목적으로 고양이에게 의지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요. 거기까지 닿자 어쩌면 정말 내가 고양이를 죽인 게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이렇게 끝이구나. 이 사고가 최종선고구나, 그렇게 받아들이려던 차에 루이 님이 보낸 자료를 받은 거예요.
어쩌면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거예요. 대표는 소송을 취하하지 않고, 토이비 님은 패소하고, 고양이는 살아 돌아오지 않고.
그래도 괜찮아요. 고맙다는 말, 하고 싶었어요. 고마웠습니다. 메시지 받고 저번에 마주친 사람이구나, 떠올렸고 보내준 자료 읽어보면서 내 잘못이 아닌 걸 아는 사람이 있구나, 생각했어요.
…
여전히 답은 모르겠어요. 나한테 왜 연락한 건지. 소설을 쓴다고 했죠?
네.
이 이야기를?
그대로는 아니에요. 저만의 메타포가 있어요.
들려줘요.
듣고 싶어요?
내 이야기이기도 하잖아요.
좋아요. 레슬러… 레슬러에 관한 이야기에요. 멕시코 노갈레스 국경 인근의 트레일러 파크에 사는 한 레슬러가 있어요.
…레슬러랑 멕시코라고요?
네, 끊지 말고 들으세요. 주인공의 링네임은 저스트에요. 등에 문신으로 링네임을 저스티스(Justice)라고 새기려다가 아파서 저스트(Just)까지만 새겨서 저스트에요. 중요한 건 아니지만… 여튼 주인공은 주중에는 알로에 농장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링에 올라요. 얼굴이 못생겨서 가면을 써야 하고, 변변찮은 악역만 맡아서 매번 두들겨 맞아요. 좋지 않은 조건으로 계약을 맺어 알로에 농장에서나 링에서나 전부 제대로 된 보수를 받지 못해요. 링 밖의 진짜 인생이나, 링 안의 가짜 대본에서나 큰 차이가 없는 거죠. 주인공이 사는 이유는 오직 하나, 자기가 키우는 고양이 때문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고양이가 집을 나가요. 삶에 의욕을 잃은 주인공은 밭에서 알로에 수확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고, 십장은 그날의 일당을 주지 못하겠다고 말해요. 주인공은 대들어보지만 얻어터지고 돈도 받지 못하고 트럭 뒷자리에도 앉지 못한 채 집까지 걸어가요. 한참을 걷다가 마테차 파는 여자를 만나요. 주인공은 돈이 없다는 걸 숨기고 마테차를 마시고, 또 또르띠야까지 먹어요. 다 먹고 천연덕스럽게 떠나려는데 여자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주인공을 붙잡지 않아요. 주인공이 왜 자기를 붙잡지 않냐고 묻자, 여자는 자기도 그런 적이 있다고만 대답해요. 주인공은 주말에 링에 올라요. 언제나처럼 얻어터지는 역할이에요. 얻어터지다가 객석을 보니 인력대기소 소장과 레슬링 협회장이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그 순간 주인공은 뭔가… 대본에서 벗어나 충동적으로 약속되지 않은 플레이를 하기로 결심해요. 그런 내용입니다.
이게… 우리 얘기인가요? 완성했어요?
아뇨. 하지만 결말은 정해놨어요.
주인공이 뭘 하는데요?
…체어샷이요.
체어샷.
체어샷. 주인공이 체어샷으로 대본에 써진 주인공을 이겨요.
우리가 이긴다고요.
정확히 저나 토이비 님이 이기는 건 아니죠. 아무튼 그래요.
현실이랑 달라도 그냥 쓰는 거죠?
아직은 모르는 거죠. 대표는 자기가 믿는 걸 현실에서 소송으로 증명하려는 거고, 나는 내가 믿는 걸 소설에서 체어샷으로 증명하려는 거예요. 설령 소송에서 진다고 해도 토이비 님이 틀렸다는 건 아니니까, 토이비 님은 저랑 상관없이 끝까지 싸웠으면 좋겠습니다.
…버스가 와요.
이제 갑니다.
떠나면 다시는 안 올 건가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버스에 탔다. 토이비가 뒤에서 말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거죠? 체어샷을 한 다음에는요! 고양이는요!
젠장, 저도 몰라요. 어떻게든 되겠죠.
문이 닫히고, 버스는 출발했다. 토이비는 그 자리에 붙박힌 채 점점 멀어져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뒤통수에 달라붙은 시선은 전혀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
마지막 소설 창작 수업을 모두 마친 다음 날, 나는 또렷한 정신으로 잠에서 깬 채 오늘이 주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곱씹었다. 더 이상 출근할 곳은 사라졌고, 내가 쓰던 소설도 어제의 합평을 기점으로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었다. 나는 밖으로 나와 걸었다.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을 잘 때를 제외하면 생각을 멈출 수 없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두 가지뿐이다. 글을 쓰거나, 걷거나. 해결되는 건 없다. 언제나처럼 발걸음으로 생각을 반죽하다, 한발 한발 쌓인 피로가 나를 짓누르면 잠시나마 잡념에서 해방될 뿐이다.
어제 수업을 마치고 다른 일정이 없던 나는 같은 처지의 선생과 영양사와 함께 맥도날드에서 뒤풀이를 했다. 늦은 밤이라 아르바이트생들은 지쳐 보였고, 넓은 가게 2층에는 얼음만 남은 콜라를 빨대로 반복해서 빨아대며 조훈현과 이창호의 바둑 기풍에 대해 토론하는 노인 둘이 전부였다. 선생이 트레이에 음식을 받아 조심조심 걸어오는 모습을 보며 문득, 그가 동료처럼 느껴졌는데 왜 그렇게 느낀 것인지는 설명하지 못하겠다.
거리는 어둠에 잠겼고, 검은 차창은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사해 우주에 지금 이 공간만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선생은 이제 자신을 선생이 아닌 동료로 여겼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나와 영양사는 선생을 끝까지 선생이라고 불렀다. 선생은 소설 말고 다른 화제로 이야기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우리는 소설로 엿본 서로의 모습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결국 소설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영양사의 소설이 마음에 들었다. 전후 사정을 알고 읽긴 했지만 묘한 이야기였다. 거식증을 앓는 주인공이 아파트 화단의 가시나무를 뽑아와서 집에서 키운다. 주인공은 계속해서 먹고 토하며 싸우고, 가시나무는 자란다. 마침내 영양사가 말했던 기억을 대면하고 소화할 수 있게 되자 주인공이 가시나무를 어딘가로 심으러 가며 소설은 끝난다.
이야기가 뻗어나갈 수 있는 방향에 대해 열정적으로 떠드는 내가 부담스러웠는지 영양사는 선생에게 지금 무슨 이야기를 쓰고 있냐고 물으며 화제를 돌렸다. 선생은 개를 산책시키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답했다. 그 이상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대신, 충분히 안에서 발효되기 전에 남들에게 앞으로 쓸 이야기에 대해 말하면 거기서 생긴 구멍으로 마법 같은 공기가 다 새어나가 결국 이야기를 쓸 흥미를 잃게 된다며 자기는 여전히 소설 쓰기에 대해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것 하나는 알아서 나쁠 것이 없다고 말했다. 또 선생은 창작 수업을 하기로 했던 결정을 수업하는 내내 후회했다고 말했다. 나의 추측처럼 수강생이 너무 적게 들거나, 내가 쓴 소설이 기대 이하여서는 아니었다. 그저 우리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자기도 갖고 있지 않은데 가르친답시고 뭔가를 말해야 하는 상황을 반복해서 마주하는 게 무서웠다고 말했다.
나는 이야기를 완성하고 일을 그만뒀는데 기분이 개운하지 않다고, 이런 찜찜한 기분은 내가 잘못된 결말에 다다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단순히 실직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일을 그만뒀다는 말에 선생은 당황했다. 선생은 혹시 이 수업 때문에 그만둔 거냐고 물었고, 나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관련이 없지는 않다고, 일을 그만둬야 균형이 맞는 것 같아서 그랬다고 답했다. 놀랍게도 영양사도 일을 그만뒀다고 고백했다. 물론 그녀의 경우에는 쓰던 소설 때문은 아니고, 몸이 약해져서 좀 쉬면서 글도 좀 써보다가 나중에 다시 똑같은 영양사 일을 할거라고 덧붙였다. 선생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다가 대뜸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나는 대표가 했던 피라미드와 다단계 비유를 인용하며 우리가 미래를 몰랐던 건 아니니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농담했고, 선생은 더없이 정확한 표현이라며 웃었다.
우리는 모두 현실에서 패배했으면서 각자의 후회를 소설로 바로 잡으려 했고, 우연의 일치인지 뭔지 그 과정에서 전부 직업을 잃었다. 결국 소설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그렇게 대화는 흩어졌고, 나는 적당한 끝인사도 하지 못한 채 아르바이트생의 대걸레가 발밑으로 들어올 때쯤 둘과 헤어졌다.
나는 갈 곳이 없었지만 계속 걸었다. 혼자 걸을 때마다 누군가가 나를 따라온다. 앞서가는 것도 아니고 보폭을 맞춰 걷는 것도 아니다. 조금 처진 채 나를 따라온다. 형태는 자주 바뀐다. 이어폰을 껴도 그의 말이 들린다. 최근에는 복면 차림의 저스트가 오른손에 접이식 의자를 쥔 채 나를 따라온다. 그는 레슬러고, 덩치가 나보다 훨씬 큰 데다가 웃장을 깐 상태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만 같다. 나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고백했다.
펫시터와 다시 만나지 못했어.
그는 스페인어로 말했지만 이어폰에서 더빙된 목소리가 들렸다.
알아.
넌 내가 부끄럽겠지.
네가 네 삶을 용납할 수 있었다면,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어. 전화가 올 거야. 잘 받아.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야.
그의 말대로 전화가 왔다. 저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망설이다가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배은망덕한 새끼.
네.
이럴려고 그만뒀냐? 내 등 뒤에 칼 꽂으려고?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잠시 생각을 골랐다. 닫힌 눈꺼풀 위로 오전의 짙은 햇살이 심장박동 따라 붉게 비쳤다. 핸드폰에선 머리끝까지 열받은 대표가 욕을 퍼붓는 소리가 노이즈처럼 끊이지 않고 작게 들려왔다. 나는 상상했다. ① 자리에서 일어난다. ② 앉고 있던 의자를 접는다. ③ 의자를 들고 목표에게 걸어간다. ④ 의자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다음, 힘껏 휘두른다.
아직 퇴직금이 안 들어왔던데 이번 주까지 입금해주세요.
나는 전화를 끊었다. 공원 한가운데에서 길은 어디로든 뻗어 있었다. 저스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다른 전화를 기다렸다. <끝>
<당선소감>
10년의 습작… 좋은 삶 살며, 좋은 글쓰기 위해 노력
초등학교 시절, 집이 외딴 시골이라 학교까지 거리가 어림잡아 3㎞ 정도 됐습니다.
아버지는 폭우가 쏟아지지 않는 한 차로 실어다 주지 않았습니다.
8살 무렵 등하굣길 왕복 6㎞를 매일 걸으며 생각한 건, 일상을 견디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처음 이야기의 힘을 느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첫 번째 습작을 쓴 뒤로 시간이 10년 정도 흘렀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제 글을 꾸준히 읽어주는 독자는 딱 네 분입니다. 그중 둘은 가족이고, 나머지 둘은 같은 방향의 길을 걷는 동료입니다.
혼자 쓰면 쓸 때의 기쁨, 그것뿐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걸로도 충분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계속 이어 나가기 힘듭니다. 글을 쓰다 보면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
아, 실패는 필연이구나.
그런데도 계속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네 분이 읽어줬기 때문입니다.
뭘 쓰든 간에
- 이놈 또 이상한 거 썼네.
- 네 생각이 나서 슬펐다.
- 여기는 설득이 되지 않아요.
- 감동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양한 감상을 받으면서, 그들과 연결됐다고 느꼈습니다. 이야기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계속할 수 있고, 여기에 지금 내 삶을 바칠만한 의미가 있다고 믿게 됐습니다.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려 그분들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번에 이 소설을 읽게 된 모든 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좋은 삶을 살고, 좋은 이야기를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이야기가 따로 있기 때문에 마저 쓰러 가겠습니다.
● -
<심사평>
절묘한 구성 드러내며 ‘자기타파’의 과정을 과감히 선행
본심에 오른 작품들 간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던 것은 저마다의 특색과 장점 그리고 실력을 고르게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고 따라서 두루 기쁜 일이겠으나 심사자는 그만큼 더 깊은 고민에 빠져 미세한 차이까지 짚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최종 논의를 세 작품으로 줄이는 데도 끝까지 신중을 기했다.
‘구제’는 무엇보다 재미가 있었다. 일본인 남성 청바지 하나가 엮어내는 우연의 연쇄, 우연을 바탕으로 하여 발생하는 관계의 인드라망, 우연과 관계가 직조해 내는 존재(Sein) 자체의 양상을 이토록 경쾌하고 흥미롭게 서술해 낸다는 게 놀라웠다.
산문의 재치와 시의 웅숭깊음까지는 좋았으나 순환 혹은 연기론의 가없는 세계관의 개입은 외려 소설을 관념에 가둔다는 인상을 주었다.
‘더미’는 차분하고 단단하다. 익숙하게 흘러가는 우리의 삶이 무심코 묻어버리는, 그러나 묻어서는 안 되는 것들까지 묻어버리며 다 그런 거지, 뭐가 어때서? 라고 묻는 우리에게 날카로운 쇠붙이를 들이대듯 가책하는 소설이다.
현실적 삶의 편의성과 공모하여 자신마저 속이다 끝내는 망실해 가는 우리에게 울리는 경종과도 같은 이야기지만 바로 그 경고의 ‘선명성’이 소설에서는 외려 경계해야할 대상이 된다.
‘체어샷’은 소설이라는 것으로 현실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써 이야기의 거푸집을 삼고 있기는 하지만 실은 누구나 맞닥뜨리고 있는 다양한 현실 문제를 포괄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펫시터, 영양사, 루이, 소설 강사가 직업은 다르지만 좀처럼 타파할 수 없는 현실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타파라고 했거니와 이 작품은 문제의 극복을 ‘깨트려버림’에서 찾고 있는데 의자를 들어 상대를 쳐부수는 프로 레슬링의 ‘체어샷’를 인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타파의 대상이 당연하게도 괴랄한 회사 대표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그보다 먼저 전제되어야 할 타파의 대상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절묘한 구성이 드러난다.
끝내는 신과 타협한 욥을 비웃으며 죽음이라는 파국에 자신을 내던진 ‘필경사 바틀비’의 바틀비처럼, 루이는 그것이 반성이든 자기부정이든 파국이든 의자를 들어 ‘자기타파’의 과정을 과감히 선행한다.
소설 쓰기 과정을 통해 루이의 삶에 노정되는 체어샷의 이러한 양방향성은 웬만한 통찰과 솜씨로는 그려내기 힘든 시도였음에도 ‘체어샷’은 믿음직스럽게 그것을 해냈다고 보았다. 당선자와 응모자에게 축하와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 : 구효서, 최수철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작품 개요: "체어샷"은 부조리한 직장 문화와 권력 관계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청년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입니다. 현실과 픽션을 넘나드는 메타픽션적 구조를 통해 글쓰기라는 창조적 행위가 지닌 저항의 가능성을 탐구합니다.
형식적 특징:
1. 메타픽션적 구조
- 현실 서사와 창작 서사의 이중 구조
- 글쓰기 과정의 자기반영적 서술
- 현실과 허구의 경계 해체
2. 서술 기법
- 1인칭 시점의 섬세한 심리 묘사
- 현실과 상상의 교차 서술
- 간결하고 속도감 있는 문체
3. 상징과 비유
- 체어샷: 억압된 현실에 대한 저항의 상징
- 레슬러 저스트: 이상적 자아의 투영
- 고양이: 연약한 존재들의 상징
내용 분석:
1. 이중 구조
- 현실: 회사에서의 갈등과 펫시터 사건
- 픽션: 멕시코 레슬러 이야기
- 두 서사의 교차와 융합
2. 인물 구도
- 루이: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청년
- 대표: 권력을 남용하는 억압적 존재
- 토이비(펫시터): 부당한 상황의 피해자
- 저스트: 루이의 이상적 자아
3. 사건 전개
- 펫시터 사건을 통한 갈등 표면화
- 소설 창작을 통한 내적 성장
- 퇴사라는 실천적 선택
주제 의식:
1. 저항과 글쓰기
- 글쓰기를 통한 현실 극복 시도
- 예술적 승화를 통한 자기 해방
- 창작의 힘과 한계
2. 사회 비판
- 직장 내 권력 관계 비판
- 부조리한 사회 구조 고발
- 약자에 대한 연대 의식
3. 개인의 성장
- 자기 정체성 확립 과정
- 도덕적 결단의 순간들
- 실천적 저항으로의 발전
작품의 의의:
1. 문학적 성취
- 메타픽션의 성공적 구현
- 현실과 허구의 창조적 결합
- 새로운 서사 형식의 실험
2. 사회적 의미
- 청년 세대의 현실 반영
- 저항의 새로운 가능성 제시
- 연대의 중요성 강조
3. 현대문학사적 의의
- 메타픽션의 한국적 수용과 발전
- 사회 비판과 예술성의 조화
- 동시대 청년 문학의 새로운 지평
이 작품은 현실과 픽션을 넘나드는 독특한 구조를 통해 현대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개인의 저항 가능성을 탐구합니다. 특히 글쓰기라는 예술적 행위를 통한 현실 극복의 시도를 보여줌으로써, 문학의 사회적 역할과 가능성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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