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하나, 둘, 셋, 넷, 다섯. / 정경미

<당선작>
하나, 둘, 셋, 넷, 다섯. / 정경미
도둑이 되고 말았다. 교실에 떨어진 백 원짜리 동전 하나도 선생님께 가져다 주는 내가 도둑이라니. 성능 좋은 최신 휴대전화를 훔친 도둑도 아니고, 돈을 훔친 도둑도 아니고 반장이라는 감투를 훔친 반장 도둑.
"주호야, 오늘 반장 선거 한다고 했지? 너도 반장 한번 나가 봐."
중학교 2학년인 형이 아침밥을 먹으며 밥맛 떨어지는 말을 했다. 인기가 많아 반장을 수시로 했던 형은 내 맘을 너무 모른다. 형, 나도 반장이 하고 싶어. 하지만 추천도 안 해주고 설령 추천받는다 해도 몇 표 나올지. 창피나 안당하면 다행이거든.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상해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형, 반장 그거 해서 뭐해. 귀찮기만 해. 하기 싫어."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퉁퉁거리는 말투에 형이 내 본심을 알았는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등굣길에 옆 동에 사는 민철이를 만났다. 학원을 많이 다녀서인지 민철이 가방은 돼지 저금통처럼 배가 불룩했다. 가방 무게 때문에 뒤로 넘어질 듯 보였다. 한 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이 갑자기 굵어졌다. 민철이가 우산을 가져오지 않아 내 우산을 같이 썼다. 불룩한 민철이 가방까지 씌워 주었더니 오른쪽 어깨가 축축해졌다.
4교시, 반장 선거 시간.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민철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나를 추천했다. 나는 이름을 잘못 들었나? 우리 반에 나 말고 김주호가 또 있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 왜 나를…. 아침에 우산 씌워줬다고 추천하나? 난생처음 반장 후보가 되니 기분이 어리둥절했다. 선생님께서 김주호라는 내 이름을 칠판에 적으셨다. 힐끔거리며 이름을 쳐다볼 때마다 눈꺼풀은 파르르 떨리고 심장은 콩닥거렸다.
후보는 나와 수경이 그리고 인기가 많은 진태, 이렇게 세 명이었다. 진태는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는데 공부도 잘했다. 거기다 다정하고 유머감각까지 있는, 내가 봐도 멋있는 아이였다. 그런 진태와 경쟁을 해야 하니 내가 반장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래도 후보가 세 명이니 운 좋으면 부반장은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는 슬쩍 들었다.
진태는 큰 키와 달리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이 날 뽑아준다면 무척 고맙겠습니다."
거창한 공약은 없었다. 뽑아주면 고맙다고 말하며 웃음 한 번 날린 게 전부였다. 그러나 그 말이 뭐라고. 친구들은 야! 우! 하면서 크게 손뼉을 쳤다.
"나는 반장은 하기 싫습니다. 부반장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부반장이 된다면 반장을 도와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수경이는 튀어 오르는 공처럼 경쾌한 목소리로 부반장이 되고 싶다고 했다. 진태와 수경이가 공약을 발표할 동안, 나는 너무 떨려 속이 울렁댔다. 후보가 될 줄 몰랐으니 당연히 발표 연습도 안했다.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진태처럼 '날 뽑아 주면 고맙겠다'라고 말할까? 그럼 따라쟁이라고 웃겠지? 그냥 열심히 일하겠다고 할까? 에이 너무 밋밋해.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어…. 어, 내가 반장이 된다면... 어... 학급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어…. 깨끗한 교실로 만들고 단합이 잘 되는 반을 만들겠습니다."
나는 주눅 든 목소리로 '어어' 거리며 어벙하게 발표했다. 가뜩이나 붉으스럼한 얼굴은 왜 그렇게 화끈거리는지. 이럴 때 친구들이 진태에게 했던 것처럼 우렁찬 박수를 쳐 주면 마음이 진정될 것 같은데, 친구들은 내 발표에 관심이 없는 듯 작은 박수만 쳐 주었다.
개표가 시작되었다. 우리 반은 모두 스물여덟 명. 나는 내가 몇 표를 받을 수 있을지 속으로 세어 보았다. 나를 추천한 민철이, 나, 내 짝 그리고 같은 교회 다니는 성수와 다정이. 적어도 다섯 표는 나올 거야. 또 누가 알아? 표가 예상보다 많이 나올지. 계산을 하다 보니 웃음이 입꼬리로 살짝 삐쳐 나왔다.
"이진태, 이진태, 이진태."
진태 이름만 연달아 나왔다. 가끔 수경이 이름도 있었다. 쪽지 스무 장을 펼 동안, 내 이름은 한 번도 불리지 않았다. 칠판에 적힌 김주호라는 이름 아래 칸은 막대 줄 하나 없이 비어 있었고, 마음 속은 창피함으로 가득 찼다. 제발 한 표라도 나와 줘 제발. 간절히 바랐다.
"이제 세 장 남았네."
개표하던 아영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제야 '김주호'라는 내 이름을 불렀다. 드디어 막대 하나가 내 이름 아래 그였다. 그러나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안다면 그 한 표가 차라리 나오지 않는 게 더 좋았다. 개표가 끝났고 진태 스물한 표, 수경이 여섯 표, 나는 내가 적은 한 표만 달랑 받았다. 쥐구멍이 있다면 들어가 숨고 싶었다. 민철이 자식, 날 뽑지도 않을거면 뭐하러 추천해서 이런 수치심을 주는 거야. 나는 맨 앞줄에 앉아 까불거리고 있는 민철이 뒤통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원망했다.
하지만 원망도 잠시, 곧바로 기가 찬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진태가 앞으로 나가더니 말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개표하는 동안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에 반장을 못할 것 같습니다. 너무 미안하고 수경이와 주호에게 사과합니다."
진태는 왜 반장을 못하는지 변명도 하지 않고 반장 자리를 내려 놓았다. 선거 원칙으로 보면 두 번째 표를 많이 받은 수경이가 반장이 되어야 하지만, 수경이는 처음부터 부반장을 하겠다고 말했다. 하! 이게 무슨 일인가? 이렇게 해서 내가 반장이 되고 말았다. 한 표를 얻고 반장이라니, 그것도 내가 적은 한 표를 얻고 반장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잠자던 사자가 벌떡 일어나 웃을 일이었다.
내가 원했던 반장이 되었지만, 우쭐거리기는커녕 반장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다. 게다가 한 표 받고 반장이 되다 보니,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줄줄이 닥쳤다. 4학년 전체에 소문이 쫙 퍼졌다.
"4학년 3반 반장, 한 표 받고 반장이 되었대."
"그 한 표도 자기가 찍은 표라 하던데."
"야, 나 같으면 부끄러워 못 하겠다."
"반장자리 훔친 것 같아."
아이들은 한 표 받고 반장을 하는 게 싫었던지 나를 미워하는 것 같았다. 남의 물건을 훔친 도둑처럼 내가 반장 감투를 훔친 것으로 여겼다. 게다가 '어이, 한 표 반장, 한 표 반장' 재미삼아 그렇게 부르는 애들도 있었다. 그러다 '한 표 한 표'가 발음이 비슷한 암표가 되면서 급기야 암표반장이 되어 벼렸다. 암표라면 인기 많은 콘서트나 스포츠 경기를 할 때, 뒤에서 비싸게 파는 표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잘못한 것도 없이 나는 도둑 반장, 암표 반장이 되었다. 내가 결코 이런 반장을 원했던 게 아니었는데 선거 이후, 나는 반장의 '반' 자만 들어도 삼십육계 달아나고 싶었고, 반장이라는 감투는 엉망진창으로 내게 씌워졌다.
미술 시간.
"얘들아, 오늘은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대로 그리자. 잘 그린 그림을 골라 학급 게시판에 붙일 거니까 최선을 다해 그려보자."
선생님께서 수업 과제를 내셨다. 그림이라면 사생 대회에 나갈 때마다 상을 척척 받아오는 아영이가 제일 잘 그렸다. 모두 자신의 그림을 게시판에 걸고 싶은지 그림 속에 빨려 들어갈 듯 집중해서 그렸다. 그리기를 마친 뒤, 친구들은 아영이 그림을 보기위해 아영이 주위에 몰렸다.
"아영아, 넌 그림을 어떻게 이렇게 잘 그려? 그런데 이게 무슨 그림이야?"
"연필 스케치야. 사실적으로 그린다고 그렸는데 어때?"
"사실적인 게 뭐야?"
"그림이 실제와 똑같이 닮았다는 말이야."
"맞아! 그림이 반장 선거 때랑 똑같아."
반장 선거라는 말에 갑자기 머리끝이 고슴도치 가시처럼 곤두섰다. 그림 보다가 반장선거가 왜 나오지? 아영이 그림이 궁금했다. 고개를 쭉 빼서 앞에 앉은 아영이 그림을 보았다. 머릿속이 아찔했다. 아영이가 반장 선거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던 것이다. 투표 쪽지를 펴는 아영이와 그걸 지켜보는 또랑또랑한 친구들 얼굴. 거기까진 좋았다. 칠판에 적힌 이름 아래 막대 개수까지 똑같이 그렸다. 유명한 화가라도 되는 듯, 연필로만 그린 아영이의 그림은 너무 사실적이어서 선거 때의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아영이 그림을 보며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내 이름 아래 막대 한 개가 그어진 그림이 게시판에 붙을 상상을 하니 땅바닥에 퍼질러 울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와 형에게 물었다.
"형, 나 어떡해!"
울먹이며 형에게 암표 반장, 반장 도둑, 그리고 아영이 그림 이야기를 털어놨다. 형은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해법을 내려 주었다.
"주호야, 네가 잘못한 게 없잖아. 그러니 부끄러워 마. 피하지도 말고. 당당하게 부딪혀. 그게 정면승부야."
"정면승부? 그거 어떻게 해야 해?"
"반장이니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친구들이 암표라 해도 속상해 하지 말고 친절하게 대해. 그리고 그림이 걸려도 가볍게 웃으면서 넘겨. 그리고 반장은 봉사하는 자리야. 표가 중요한 게 아니라 반장 역할을 잘하면 그게 진짜 반장이야. 알겠지. 용기내고 할 수 있겠지?"
뭔지 잘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수경이와 내가 학급 게시판에 걸려고 고른 아영이 그림을 보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주호야, 아영이 그림은 빼는 게 낫지 않을까?"
선생님이 왜 그러시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잠시 주저 했지만 그림을 보고 웃어넘기라는 형의 말이 떠올랐다.
"선생님, 아영이 그림이 제일 잘 그렸어요. 붙여도 괜찮아요."
정말 별거 아니었다. 마음을 살짝 바꿨더니 그림이 게시판에 붙어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를 반장 후보로 추천한 민철이는 등굣길에 자주 부딪혔다. 가뜩이나 덩치 작은 민철이가 뚱뚱한 가방을 메고 걸으면 무척 힘들어 보였다. 나는 민철이 신발주머니를 들어주기도 했고, 가끔 책가방을 바꿔 메기도 했다. 그러면서 민철이와 단짝 친구가 되었다.
한번은 민철이가 다 지난 반장 선거 얘기를 했다.
"주호야, 반장 뽑을 때 너를 추천해 놓고 안 찍어서 미안."
"상관없어. 그런데 왜 날 안 뽑았니?"
"그날 네가 우산 씌워줘서 널 찍으려 했는데, 수경이가 뿌연 내 안경을 닦아줘서 수경이 찍었어. 웃기지?"
그제야 민철이가 나를 찍지 않은 의문이 풀렸다.
난 당당해지고 봉사하라는 형의 말을 실천해 보기로 했다. 쉬는 시간에 칠판도 나서서 닦고, 차렷경례도 크게 말하고, 교실 바닥에 떨어진 휴지도 보이면 주웠다. 어렵지도 귀찮지도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공부도 열심히 해서 단원평가도 척척 풀었고, 친구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4학년 1학기가 그렇게 지나갔다.
2학기 반장 선거 시간.
"자, 2학기 학급을 이끌어 갈 반장을 추천해 보자. 1학기 때 임원을 했다 하더라도 다시 할 수 있는 거 알지."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민철이가 또 손을 들었다.
"저는 김주호를 추천합니다. 김주호는 공부도 잘하고, 남을 잘 돕습니다."
민철이가 나를 붕 띄우면서 후보로 추천했다. 갑자기 지난 선거의 악몽이 떠올라 헛딸꾹질이 났다. 이번에는 진태, 수경이, 나, 강준이, 이렇게 네 명이 후보였다. 역시 예상대로 진태 이름이 많이 나왔다. 진태가 다섯 표, 수경이가 한 표 나올 동안 내 이름은 하나도 없었다. 또,또 내 이름이 없잖아. 저번처럼 한 표 나오면 어쩌지? 손에 땀이 나고, 심장이 쪼그라드는 순간, 드디어 내 이름이 나왔다.
"김주호, 김주호"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연달아 나왔다. 땅바닥에 가라앉아있던 기분이 하늘로 치솟으며 롤러코스터를 탔다. 하마터면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개표가 끝났다. 진태 열일곱 표, 수경이 네 표, 강준이가 두 표였다. 나는 다섯 표를 받아 부반장이 되었다. 다섯 표!. 적다면 적지만, 나에게 더 없이 자랑스러웠다. 도둑 반장과 암표 반장이라는 별명을 싹 지워 주고, 일학기 때 반장 역할을 잘 했다는 표창장 같은 다섯 표였다. 난 더 이상 암표 반장, 도둑 반장이 아니었다. 다섯 표를 받은 부반장이었다.
교실 게시판에 아영이 그림이 아직 붙어 있었다. 햇빛을 많이 받아 흰 바탕이 누렇게 변했고, 사실적이라던 연필 선도 뭉툭해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아영이의 그림 속, 내 이름 아래 다섯 개의 막대가 그어진 상상을 하니 또다시 웃음이 삐쳐 나왔다.
<당선소감>
-
소꿉친구들이 생각나서 어릴 때 놀던 뒷동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내 키만 한 무성한 풀들이 길을 뒤덮어 가던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나의 동심과 무성한 풀은 서로 엇박자를 내고 있었습니다.
제게 너무 넓고 깊어서 실체가 없던 글.
나의 일상생활과 늘 엇박자를 내던 글.
하다만 숙제처럼 오랫동안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눈처럼 날리는 벚꽃 때문도 아니었고, 창밖으로 하얗게 퍼진 봄 햇살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저녁밥을 준비하며 주방에서 마늘을 까던 분주하고 바쁜 그 시간, 엇박자를 내며 웅크리고 있던 글을 문득 끄집어냈습니다. 무성한 풀이 저의 펜심을 완전히 가로막기 전에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즐겁고 신나게 글을 썼습니다. 동화를 쓰기 위해 학교 운동장과 문구점, 어린이 도서관을 오가며 아이들의 표정, 아이들의 언어, 아이들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덩달아 제 일상이 놀이터에 놀러 나온 아이들처럼 가벼워졌습니다. 이렇듯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쓰다 보니 동화는 '유치한 성장'이라는 아이러니한 가르침을 덤으로 안겨주었습니다.
비록 뒷동산에 올라가진 못했지만, 이제 그곳에서 함께 놀던 소꿉친구들을 동화 속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쟁이 치열한 만큼 전혀 기대하지 못했는데, 생일날 선물처럼 당선전화를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의 글을 뽑아 주신 매일신문사와 심사 위원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지도해 주신 이득균 선생님과 문우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본인들의 동심을 되살려 세심하게 읽어 준 아들과 딸, 책 읽기를 싫어해 세 줄 읽고 당선이라는 농담을 던진 남편, 팔십 넘긴 깊은 주름을 모두 구긴 채 웃으시며 축하해 주신 부모님, 제 삶을 더 풍요롭게 해 준 친구들과 이웃분들 모두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오늘의 당선이 종착지가 아닌 출발선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제가 쓴 동화를 읽으며 단 한 명의 어린이라도 더 긍정적이고 밝은 생각을 하며 자라나기를 바래봅니다.
● 1967년 경북 경산 출생
<심사평>
-
힘과 용기를 주는 동화
많은 응모작 가운데 끝까지 심사자의 손에 남은 작품은 다섯 편이었다.
'우리 이웃을 소개합니다'(이루미)는 이웃과 단절된 삶에 익숙한 현대인의 일상 단면을 소재로 한,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만한 따스한 이야기다. 주인공이 이웃과 가까워지는 과정을 개연성 있게 그려낸 솜씨는 이야기꾼으로서 작가의 역량을 보여준다. 안정감 있는 문장도 좋아 보이는데, 후반부의 다소 거친 진행이 여러 장점을 빛바래게 했다.
'최후의 통첩'(김수현)은 아이들 세계에서 일어날 법한 '보이지 않는 폭력과 차별'에 맞서는 용기, 그리고 그 용기의 원천인 '약자의 연대'를 실감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특히 통쾌하게 마무리되는 대단원은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줄 만하다. 각 인물에 부여된 짙은 전형성 때문에 개성이 묻혀버린 것이 흠이다.
'진짜 언니'(이한님)는 요즈음 흔히 볼 수 있는 재혼 가정 아이들의 심리 갈등과 그 해소 과정을 차분하게 그려낸 동화다. 서술이 담백하면서도 두터운 사실성을 갖추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되었다. 뒤로 갈수록 세부묘사 부족이 눈에 띄는데, 이는 어쩌면 단편동화가 가진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할머니의 나라'(김민유)는 소재의 독특함이 눈길을 끈다. 재두루미의 눈길로 본 한 할머니의 인생역정 속에 근대사의 아픔을 잘 담아냈다. 도식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역사를 오로지 '사람의 삶'에 집중하여 그려낸 것도 장점이다. 서술에서 뭔가 서두른다는 느낌이 나는 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작가의 욕심에서 비롯된 걸까.
고심 끝에 결점이 가장 적은 '하나 둘 셋 넷 다섯'(정경미)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이 작품은 뜻하지 않은 일로 열등감에 시달리던 한 어린이가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 수작이다. 시종 담담해 보이는 절제된 서술 속에 주인공의 내밀한 심리 변화와 갈등 극복 과정이 밀도 있게 담겨 있다. 주인공이 극복해낸 것이 남의 시선이라기보다 자신이 만든 자괴감이란 점에서, 이 동화가 고만고만한 결손과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보통 어린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전언이 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 서정오 작가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1) 이야기의 핵심 한 줄
“한 표로 반장이 된 아이가, ‘도둑 반장’이라는 시선을 ‘자기 안의 자괴감’으로 바꿔 이겨내는 성장담.”
이 작품은 ‘반장’이라는 흔한 소재를 **‘정당성/자격’**의 문제로 비틀어, 어린이 독자가 현실에서 실제로 겪는 부끄러움·불안을 정확히 건드립니다.
2) 제목의 힘: 숫자가 “점수”가 아니라 “자기 존엄”이 되는 구조
제목의 숫자(하나~다섯)는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이야기의 척도예요.
- 1학기: 1표(그것도 자기 표) → “암표 반장/도둑 반장”
- 2학기: 5표 → “표창장 같은 다섯 표”, ‘나도 누군가에게 선택받을 수 있다’는 감각
여기서 중요한 건 표 수가 많아져서 성공한 게 아니라,
주호가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했다”**라는 기준을 세운 뒤에 표가 따라온다는 점입니다.
즉 숫자는 인기 투표가 아니라 내적 성장의 가시화로 기능해요.
3) 초반의 몰입 장치: “도둑”이라는 강한 자기 규정
“반장이라는 감투를 훔친 반장 도둑.”
어린이는 자기 감정을 과하게 규정할 때가 있죠. 이 작품은 그 과장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서사의 추진력으로 삼습니다.
- ‘정상적으로 추천받아 선출된 반장’이 아니라
- ‘정당성에 의심받는 반장’으로 시작하니까
독자는 바로 “이 아이가 어떻게 이걸 견딜까?”로 붙잡힙니다.
4) 악역이 없는 갈등 설계가 좋다
이 작품은 누군가가 일부러 괴롭히는 폭력 서사로 끌고 가지 않아요.
- 아이들은 잔인해서가 아니라 재밌어서 별명을 붙이고
- 주호는 누군가에게 배신당했다기보다 기대가 무너져서 괴로워하고
- 민철이는 ‘나쁜 친구’가 아니라 가벼운 선택(안경 닦아준 수경) 때문에 표가 이동했을 뿐
이런 설계 덕분에 이야기가 “나쁜 애 응징”이 아니라,
보통 교실의 미세한 서늘함을 다룹니다. 현실감이 커져요.
5) 형(형의 조언) 역할: 이야기의 윤리적 중심축
형의 조언은 메시지가 노골적으로 튀지 않게 “행동”으로 옮겨지죠.
- “당당하게 부딪혀.”
- “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역할을 잘하면 진짜 반장.”
이 말이 교훈으로 끝나지 않고,
주호가 실제로 칠판 닦기, 휴지 줍기, 친절하게 대하기 같은 ‘작은 봉사’로 번역됩니다.
즉 이 동화의 윤리는 추상이 아니라 일상의 수행이에요.
6) 최고의 장면: ‘아영이 그림’ 에피소드
이 에피소드가 서사를 한 단계 올립니다.
- 단순히 별명으로 놀리는 것보다
-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이 게시판에 붙는다는 상상은 훨씬 잔인해요.
왜냐하면 그건 아이들 세계의 “기록”이고 “전시”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주호가 그림을 뺄 수도 있는데, 스스로 선택합니다.
“붙여도 괜찮아요.”
이 한 문장은 주호가 상처를 지우는 방식(회피) 대신
**상처를 감당하는 방식(수용)**을 택했다는 선언이라서, 이야기의 성장이 설득력을 얻어요.
7) 마지막의 감정 처리: “복수”가 아니라 “웃음”
결말이 통쾌함으로 끝나되, 누군가를 눌러 이기는 방식이 아닙니다.
- ‘다섯 표’를 표창장에 비유하고
- 게시판 그림을 보며 웃음이 삐쳐 나온다로 마무리하죠.
이 웃음은 상대를 조롱하는 웃음이 아니라,
내가 나를 다시 받아들이는 웃음이라서 따뜻합니다.
'좋은 글 > 동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26 문화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구름을 잡는 방법 / 김현아 (0) | 2026.01.12 |
|---|---|
| [2026 무등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가오리 연 / 신경재 (0) | 2026.01.12 |
| [2026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날 좋아해줘 / 최승연 (0) | 2026.01.11 |
| [2026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지피티가 그러는데 / 이해준 (0) | 2026.01.10 |
| [2026 국제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아이라는 이름의 북 / 조현숙 (0) | 2026.01.0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