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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익명의 원칙 / 이한주

 

인물

무기명(40대 후반 남자)
상담가(30대 중반 남자)
진(10대 중반 여자)



한겨울, 밤

장소

차분한 디자인의 카운슬링 룸

무대

중앙엔 컴퓨터와 각종 서류가 올려진 넓은 책상이 놓여 있고, 회전이 되는 하얀 의자와 푹신한 검은색 소파가 책상을 사이로 마주 보고 있다. 하얀 의자 근처엔 정신의학 서적들이 꽂힌 책장이, 소파 오른편 구석엔 곰돌이 인형이 있다.

무대가 밝아지면 하얀 의자에 앉은 상담가가 보인다. 초조하게 서류를 정리하다 한숨을 쉴 때 들리는 작은 노크 소리. 상담가가 몸을 바로 세운다.

상담가: 들어오세요!

무대에 들어서는 무기명. 검은 모자, 마스크를 쓰고 후드 점퍼를 목 끝까지 올려 무장한 상태로 소파에 앉는다.

무기명: (나지막이) 안녕하세요. 저...

상담가: 아, 자기소개 안 하셔도 돼요. 익명 상담 신청하셨으니까. 대신 지금부터 내담자분을 무기명, 기명 씨라고 부르려고 하는데. 따로 원하시는 호칭 있으신가요?

무기명: 아뇨. 그걸로 됐습니다.

잠시 침묵. 무기명이 상담가 쪽을 힐끔거린다.

무기명: 이런 사람 별로 없죠? 생초면의 선생님이 나 알아보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싸매다 못해 이름까지 싸매고...

상담가: 에이. 아니에요. 기명 씨 같은 사람이 기명 씨뿐일 것 같죠? 전 아예 선글라스까지 낀 사람도... 아.

무기명: (의문스럽게) 원래 상담사가 딴 사람 얘기 남한테 하면 안 되지 않아요? 드라마에선 그거 되게 철저하게 지키던데.

당황해하며 허둥대는 상담가. 이내 푹 한숨을 쉰다.

상담가: 사실 이게 자격증 따고 받은 제 첫 번째 상담이라서요. 선글라스 낀 사람도 대학 강의 때 사례로 나온 게 기억나서 툭 튀어나왔네요. 졸업을 해서는 아직도 강의실에서 못 벗어났네. 아이고. 그래도 걱정 마세요. 저랑 이번에 상담해보시고 별로시면 또 새로운 선생님으로 바꾸실 수도 있으니까. 맘 편히 상담하시면 돼요.

무기명: 첫 상담이든 뭐든 상관은 없는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그것보단 내 얘기가 바깥으로 어떤 식으로든 새나가는 게 정말 질색이라.

상담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그 점이라면 괜찮습니다. 방금은 수업 받은 내용이라 튀어나온 거지 제 고객이신 기명 씨의 상담 내용은 그 누구도 알 수 없게 철저히 비밀 유지를 지킬 테니까요. 이래봬도 상담사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가 비밀 유지라 그거 하나 못 지키면 상담사 자격증 버려야죠.

무기명: 다른 원칙들은 뭔데요?

상담가: (손가락을 꼽으며) 보자... 내담자와의 심리적 거리 유지, 내담자 존중, 객관적 판단과 시선, 금전적 거래 금지, 내담자와 사적 관계 금지? 또 있던가..

무기명: 그 정도면 됐습니다. 정말 아직도 학생 같으시네요. 질문하는 족족 대답도 다 하고..

상담가: 아, 네. 그럼 (헛기침하며) 질문이 끝나셨으면 이제 본격적으로 상담 진행해도 될까요?

무기명: 아뇨. 여기까지 할래요.

상담가: 예?

무기명: 정해진 시간을 넘어선 게 아니면 상담은 언제든 제가 원할 때 끝낼 수 있다고 하던데 아닌가요?

상담가: 아뇨, 맞습니다... (침울하게) 다른 상담사분 연결해 드릴까요?

무기명이 소파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한다.

무기명: 오늘만 여기까지 한다고요. 다음 상담은 2주 뒤가 좋은데.

상담가: (상기된 표정으로) 같은 요일로 하실래요?

무기명,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무대 밖으로 향한다. 나가기 전 잠시 뒤돌아 상담가 뒤쪽을 바라보다 걸음을 옮긴다.

암전.

다시 불이 켜지면 상담가가 휴대폰을 든 채 통화하며 무대를 돌아다니고 있다.

상담가: 예, 선배. 저야 완전 적응 끝냈죠. 만날 저 유도리 없이 군다고 뭐라 하기만 하고. 걱정 하지를 마요. 고객이랑 벌써 석 달째 잘하고 있거든요? 묘하게 상담할 때 시선이 안 맞는 게 좀 이상하긴 한데... 아이. 자세하게 상담 내용은 못 말하지만 아무튼 그래도 처음 받은 일치곤 괜찮아요. 예예. 아, 그러니까. 내가 학벌, 경력이 좀 딸려서 그렇지 빠릿빠릿 잘 배우고 매뉴얼대로 일도 잘하는데. 대학병원들이 이걸 몰라준다.

못마땅하게 바닥을 차며 의자에 털썩 앉는 상담가.

상담가: 내가 꼭 선배 병원 탈출해서 큰 병원 갈 거예요. (피식 웃으며) 건방지긴 제가 뭘요. 말이 그렇다는 거..

똑똑. 노크 소리.

상담가: 어우, 내담자분 오셨네. 저 먼저 끊어요!

핸드폰을 가운 주머니에 넣고 숨을 고르는 상담가.

상담가: (큰 소리로) 네에.

무기명이 들어와 소파에 앉는다. 후드 점퍼의 지퍼가 반쯤 내려가 있지만 여전히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다. 무기명이 상담가 뒤쪽을 힐끔대다 소파에 앉는다.

상담가: 네 번째 상담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무기명: 예.

상담가: 오늘 기분은 어떠세요?

무기명: 오늘은 좀 가라앉게 되네요. (고개를 돌리며) 눈이 많이 와서.

상담가: 겨울이 다 그렇죠 뭐. 눈 싫어하세요?

무기명: 싫어요. 잠이 안 와. 선생님, 그거 아세요? 눈에서도 내리는 소리가 나요. 빗소리가 아니라 눈소리. 제 귀엔 그게 들려요. 겨울이 오면 매일 밤에 그 눈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귀를 손으로 탁탁 치며)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상담가: (턱을 쓸며) 여전히 불면증 있으시고. 갑자기 불안해지시거나 하기도 한다고 하셨죠. 통증은 좀 나아지셨어요?

무기명: (씁쓸하게) 아니요. 아플 이유도 없고 검사를 해도 멀쩡하다는데 자꾸 두통이랑 근육통이 와요. 여기선 진통제 처방 같은 거 안 되나요?

상담가: 저희는 상담 서비스만 제공해 드려서 약 받으시려면 다른 병원에서 처방전 받으셔야 합니다. (달래듯) 원래 우울증이 신체 증상으로 나오기도 해요. 그게 다 스트레스 발현이라. (잠시 망설이곤) 왜 눈소리가 기명씨 귀에 그렇게 크게 들릴까요. 처음 우울증이 시작된 이유는, 아직도 말씀하기 싫으세요?

잠시 정적.

무기명: (불편하게 몸을 뒤척이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저조차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상담가: 그냥?

무기명: 자꾸 쳐다보니까. 위축되고 불안하고...

상담가: 누가요? 누가 기명 씨를 쳐다보는 기분이 들어요?

무기명: 아뇨. (눈빛이 변하며) 기분이 아니라 진짜 있는 형체가 날 봐요. 애가 매번 침대에서 나만 빤히 쳐다보고 있는 기분 알아요? 말도 안 하고 쳐다만 보는데. 밥맛도 다 떨어져서 진짜. 밥 한 술도 제대로 못 뜨겠다고.

상체를 푹 숙이고 머리를 부여잡는 무기명. 상담가, 당황한다.

상담가: 매번 보고 있으면 (주위를 둘러보며) 지금도 있어요?

무기명,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때, 무대로 들어오는 진. 상담가의 뒤에 위치한 책장에 몸을 기댄다. 손가락으로 진을 가리키는 무기명.

상담가: (뒤를 돌아보며) 여기 있구나. 그래서 기명 씨가 가끔 제 뒤를 쳐다봤군요. 어떤 사람인데요? 저한테 알려줄 수 있어요?

무기명: (덜덜 떨며) 여자, 여자애에요. 단발머리. 깡마르고 불쌍하고 안쓰러운... 그런...

상담가: 기명 씨를 힘들게 하는데도 불쌍한 사람이에요? 계속 쳐다보는데도? 왜 그럴까. 왜 그 여자애가 불쌍할까, 기명 씨는.

빤히 무기명을 바라보는 진. 무기명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무기명: 불쌍하잖아요. 이렇게 추운 한겨울에 맨발로... 내가, 나 때문에 저렇게 있는 거니까. 내가 저렇게..!

갑자기 몸을 굳히며 말을 멈추는 무기명. 정신을 차리듯 몇 차례 고개를 흔든다.

무기명: (딱딱한 어투로) 오늘은 여기까지 할래요.

상담가: 기명 씨.

무기명: 안녕히 계세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난 무기명이 무대 밖으로 나간다. 서둘러 나가는 무기명 뒤로 진이 따라붙는다. 한숨을 쉬며 책상에 엎드리는 상담가.

상담가: 아, 뭔가 더 안 올 것 같은데... 이제야 입이 좀 트이나 했더니. 젠장.

암전.

밝아지면 상담가와 무기명이 서로의 자리에 앉아 마주 보고 있다. 무기명, 마스크 없이 모자만 눌러쓰고 있다. 진, 무기명이 앉은 소파 옆 곰돌이 인형을 만지작대고 있다.

상담가: 되게 오랜만이네요. 두 달 만인데. 잘 지내셨어요?

무기명: 예, 뭐. (잠시 망설이다) 저번엔 죄송합니다. 너무 도망치듯이 가버려서.

상담가: (고개를 저으며) 아닙니다. 저는 기명 씨가 그렇게 떠나신 것보단 다시 여기로 돌아올 맘먹으신 게 더 신경이 쓰이네요. 다시 오기로 정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무기명: (옆의 진을 힐끗대며) 생각해보니까 제 입으로 직접 누군가한테 그, 그 애의 얘기를 꺼낸 게 처음이더라고요.

상담가: 그 애? 아, 매번 쳐다본다는.

무기명: (고개를 끄덕이며) 진이예요.

상담가: (종이에 메모하며) 네. 진. 그래서요?

무기명: 나 혼자만이 온전히 진의 삶에 대해 알고 있는데. 내가 없어지기라도 하면, 이제 이 세상에 아무도 진이라는 애가 살았는지도 모르게 되면 정말 끝의 끝까지 내가 얘를 죽여 버리는 것 같아서요. 누구라도 나 이외의 사람이 진에 대해 기억할 수 있게 하는 게 걔를 위한 것 같아서.

상담가: (맞장구치듯) 제가 같이 기억해주시길 바래서 오셨구나. 그러고 보니 전부터 되게 챙기시네요. 어떤 사람이죠? 어떤 사이예요?

무기명, 소파에서 일어나 진의 키만큼 손으로 표시한다.

무기명: 내 어깨만 한 애였어요. 수다스러웠고 걷는 날보다 뛰는 날이 많은 애였죠. 걔랑은...(망설이다) 전쟁터에서 만난 사이였습니다.

상담가: (놀란 얼굴로) 군인이셨나요?

무기명: 아뇨. 종군기자. (살짝 웃으며) 꽤 잘나갔어요. 그 업계에선. 겁도 없이 교전 중인 시간에도 몰래 들어가서 사진 찍어대는 간덩이 부은 놈으로 유명했죠.

과거를 상기하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무기명. 자신을 따라 소파에서 일어난 진과 눈이 마주치고 다시 고개를 숙인다.

무기명: 진은 그렇게 내가 잘나갈 때 만난 전쟁고아 중 하나였습니다. 제가 사정이 딱해 보여 자주 먹을 걸 주거나 생필품 조금을 넘겨주곤 했는데. 그 불쌍한 게 겨우 그거 받고 방방 뛰곤 했어요. 겨우 그런 걸로도 행복해지는 어린애였습니다.

상담가: 원래도 전쟁 피해자를 도우신 편이었나요, 아님 유독 그 아이만?

무기명: 가끔 도울 때도 있었지만 진을 만난 당시에 유독 그 지역 전투가 격해서 취재할 게 많아 다른 곳보다 오래 머물렀어요. 그만큼 오래 교류한 것도 진이 처음이라 아무래도 정이 더 갈 수밖에요. 특히...

무기명의 말에 진이 빙글 웃으며 책상, 소파 사이를 방방 뛰어다닌다. 무기명의 시선이 달음박질하는 진을 계속 따라다닌다.

무기명: 여태껏 만난 사람들과 달리 표정이 있는 게 정감이 가고 오히려 더 안타까웠죠. 원래 전쟁을 겪으면 좋은 표정도 싫은 표정도 다 사라진 텅한 표정이 대부분인데 진은 혼자 평화로운 곳에 있다 뚝 전쟁터로 떨어진 애 같았어요. 가끔 억지로 웃기도 했지만 어쨌든 웃는 표정을 유지한 것만으로도 대단하죠.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앤데.

상담가: 왜요?

무기명: 너무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거든요. 전쟁고아들도 전시 상황에 노출되는 건 최대한 피하려고 총소리나 폭격 소리가 나면 반대 방향으로 도망가는데 진은 그러질 않았어요. (안타깝게) 늘 같은 자리에, 똑같이, 망부석으로 있었죠.

상담가: (조금 걱정스레) 전투에 휘말릴 수도 있었겠네요. 왜 늘 그 자리에?

진, 달리기를 멈추고 바닥에 쭈그려 앉는다. 흙을 파는 시늉을 하며 낑낑댄다.

무기명: 지 가족들이 거기 있대요. 학교만 갔다 왔는데. 평소랑 늘 똑같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이 없어졌다고. 집이 그 잠깐 새에 돌 언덕이 되어 있어서... 집이 폭격으로 다 엎어진 거죠. 엄마, 아빠, 동생 둘이 집에 있었는데.

무기명, 진을 따라 쭈그리며 바닥을 긁는 진의 손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는다.

무기명: 걔는 아직 제 가족들이 그 언덕 밑에 살아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늘 그곳에서 폭우가 쏟아지나 총알이 쏟아지나. 거기 주위만 빙빙 돌고, 뛰어다니고, 또 돌을 치우고, 흙을 파고. 그것만 하루 종일 반복하더라고요. 며칠이고, 몇 달이고. 진짜 살아 있다고 믿는 건지, 아니면 그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못 살겠는 건지.

무기명의 손이 벌벌 떨리다 이내 바닥에 떨궈진다.

무기명: 차마 그만하라고 말릴 수도 없었어요. 말리는 순간, 직시하게 해버리는 순간 그 애 표정은 내가 그동안 봐온 다른 사람들과 똑같거나 그보다도 못한 얼굴로 떨어져 버릴 게 뻔해서. 그냥 음식만 주구장창 갖다 줬죠. 그때도 제 가족들 몫은 꼭 빼고 남은 음식만 먹었고 물도 저는 목만 축이고 나머지는 돌 틈 사이로 팔을 비집어 넣어 안에 뿌렸어요. 가족들 마셔야 한다고.

상담가, 표정이 일그러진다.

상담가: 진도 기명씨도 힘들었겠네요.

무기명: 제가요? 보기만 하고 제대로 도와주지도 못했는데?

상담가: 그 지켜본다는 게 힘든 거잖아요. 힘든 사람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거. 그게 얼마나 힘든 건데요. 그 사람의 옆에 도와줄 사람이 나밖에 없을 땐 더더욱.

진, 무기명을 마주 본다.

무기명: (무심결에) 네.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

멈칫하다 손에 얼굴을 묻고 괴로워하는 무기명. 진이 몸을 일으켜 무표정으로 무기명을 바라본다.

상담가: 기명씨?

무기명: (빠르게) 아냐. 난 그런 말할 자격 없어.

상담가: (다급하게) 왜 자격이 없어요. 기명씨는..

무기명: (말을 끊고) 내가 걔를 죽였으니까!! 난 적어도 그 애 때문에 힘들다고 하면 안 되지, 사람이라면!!

정적.

상담가, 동공을 이리저리 떨다 부들대는 손을 책상 아래로 내린다.

상담가: (심호흡 후) 그게 무슨 뜻일까요?

무기명,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린다. 얼굴에 눈물이 흥건하다.

무기명: 진짜 생각만 하지 말고 진을 억지로라도 거기서 끌고 나왔어야 했는데. 아니면 총에 맞을 일은 없었을 텐데. 설령 표정을 잃더라도 살아만 있으면 다음이 있었을 텐데.

진, 총에 맞은 것마냥 어깨, 다리, 머리에 충격받은 듯 몸을 꺾는다.

무기명: 후회할 겨를도 없이 애는 이미 바닥에 쓰러졌어요.

진, 덜덜 떨다 바닥에 곤두박질치듯 쓰러진다.

무기명: 제 가족들이 있는 곳에서 총을 맞았어. 그 애 부모님은 자기들이 스러져 간 곳에서 딸이 같이 쓰러져 버렸을 때 얼마나 저승에서 울었을까.

진, 바닥을 가족처럼 어루만지며 콜록댄다.

무기명: 그 애처로운 손짓을 보며 카메라를 든 날 보며 얼마나 저승에서 이를 갈았을까.

찰칵. 셔터 누르는 소리. 조명이 과하게 하얘지다 원래대로 돌아온다.

상담가, 숨을 들이켠다. 아예 고개도 내려버린다.

무기명: (상담가에게 다가서며) 그래도, 그래도 정말 찰나였어요. 몇 초 안 됐다고. 나도 그때는 내가 왜 그랬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떨리는 목소리) 그땐 내 머리보다, 내 가슴보다, 내 손이 딱 1초 더 빨랐어요. 매번 일한 대로 정확하게.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나 봐요.

진절머리 내듯 자신의 손을 잡아뜯어대는 무기명. 진, 바닥에 늘어진 채 이젠 기침도 하지 않는다.

무기명: 그래도 카메라 다음엔 그 애를 잡았어요. 끌어안고 내 심장이 터지도록 달렸는데. (숨 가쁘게 쉬며) 그랬는데. (진을 쳐다보며) 이미 애 심장은 멈췄더라고.

조명, 진이 누운 곳만 꺼진다.

무기명: (새빨간 눈시울을 비비다) 선생님.

상담가, 천천히 내린 고개를 든다. 무기명과 상담가의 표정이 데칼코마니같이 되어 있다.

무기명: 내가 내 일 대신 그 애를 더 빨리 잡았다면 뭔가 달랐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난 왜 차라리 그 두 선택의 결과가 같길 바라게 될까요? 나는요, 선생님. 내가 너무 끔찍해서 숨이 안 쉬어져요.

암전.

밝아지면 무표정의 상담가와 무기명이 마주 보고 앉아 있다. 무기명은 모자까지 벗은 맨얼굴이다. 진, 무기명의 뒤에 서 있다.

상담가: 기명 씨.

무기명, 멍하니 허공만 바라본다.

상담가: 무기명씨!

무기명: 아, 예. 오랜만이네요. 아닌가? 우리 언제 봤었죠?

상담가: (걱정스레) 한 달 만입니다. 기억 안 나세요?

무기명: 요즘 날짜 개념이 잘 감이 안 와서. 오늘도 밖에 눈 오는데. 아세요?

상담가: 거의 끝눈일 겁니다. 저번에도 눈이 싫다고 하셨죠. 소리가 크다고. 요즘도 불면증이?

무기명: 아뇨. 이젠 소리가 안 나요. 선생님, 제가 왜 눈이 싫었는지 아세요?

상담가: (잠시 망설이다) 진이 죽은 날의 날씨?

무기명: (피식대며) 아니요. 그 애 나라는 더운 곳이라 걔는 눈 한 번 본 적 없을 겁니다. 내가 눈이 싫어진 건 진이 죽은 이후 때문이었어요. 그때 찍은 사진, 결국 포기 못 하고 세상에 내건 시기가 겨울이었습니다.

상담가, 미간을 찌푸린다.

무기명: 사진 보이고 한 삼일? 잠잠하다 시작되더라고요. 별의별 말을 다 들었어요. 넌 동조자다, 아니다 방관만 했지, 결국 병원에 옮기긴 했잖냐, 더 빨리 옮겼으면 살았을 거다, 일 욕심에 기본 도리도 말아 먹은 개새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듣고 업계에서 쫓겨났죠. 아니, 반쯤은 자의였구나. 버티려면 더 버틸 수 있었는데 포기한 거니까.

진이 무기명의 어깨를 두드리자 무기명이 어깨를 으쓱댄다.

무기명: 처음 사진에 대해 논란이 된 게 공교롭게 첫눈 내리는 날이었는데 겨울 내내 욕을 듣다 퇴출당할 즈음에 마지막으로 눈을 맞고 겨울이 끝났어요. 그땐 눈 맞는 것 정도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다음 해가 되고 나서야 알았죠. 아. 난 눈만 내리면 그때의 말들이 생각나게 되어버렸구나. 눈 한 송이 내릴 때마다 그 당시에 동료, 선배, 언론에게 듣던 말 한마디씩 내 귀에 떨어졌어요.

고개를 위로 젖히는 무기명. 진과 눈을 맞추고.

무기명: 그렇게 5년 사니까 못 살겠더만요.

상담가, 한숨을 쉬다가 무기명의 눈앞에 손가락을 부딪쳐 주의를 끈다.

상담가: 그럼 그 아인 언제부터 보인 겁니까?

무기명: 글쎄. 언제였지?

진이 입을 벙긋댄다. 무기명, 자세히 보려 인상을 찌푸린다.

무기명: 6년, 아니 6년 반?

상담가, 조급하게 책상을 주먹으로 콩콩 두드린다.

상담가: 무기명씨. 진이 말도 겁니까? 저랑 대화하면 안 될까요?

무기명: 아, 죄송. 말은 못 해요. 그냥 입 모양으로 뻐끔댈 때가 있어서 대화하는 척한 거지. 이상하죠. 원래 그 애는 정말 쉬지 않을 정도로 말이 많았는데 왜 지금은 조용할까요? 내 귀는 이제 눈 소리도 들릴 만큼 예민하니 이제는 정말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들어줄 수 있는데.

상담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무기명. 상담가, 불편한 기색으로 몸을 비튼다.

무기명: 선생님은 왜 진이 말이 없다고 생각해요? 안 하는 걸까요, 못하는 걸까요? 얘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뭘까요?

상담가: 기명 씨. 저는 기명 씨의 답을 대신 내려드릴 순 없습니다. 다만 상담사는 내담자가 자신의 답을 찾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죠.

무기명, 상체를 앞으로 숙여 상담가와 거리를 좁힌다.

무기명: 그냥 답해주면 안 돼요? 선생님이 답해주면 마음이 좀 편할 것 같은데.

상담가, 대답이 없다. 그 모습에 무기명, 폭주하듯 질문을 쏟아낸다.

무기명: 선생님도 이렇게 죄책감에 찌든 적이 있어요? 왜 흘려 말하고 명확한 대답은 피해요? 상담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면 답을 제대로 줄 거예요? 사실 이런 죽은 사람 보고 일만 쫓다 사람, 그것도 애 목숨 놓친 제가 이해도 안 되고 공감도 안 되죠?

진, 무기명이 질문을 쏟아낼수록 무기명과의 거리를 점차 좁힌다. 거의 반쯤 업힌 상태.

상담가: (힘겹게) 전 사적으로 상담실이 아닌 곳에서 내담자를 만날 수도, 기명 씨 생각을 명확하게 단정 지어 줄 수도, 완전히 내담자의 감정에 공감하는 것도 해선 안 됩니다. 그게 원칙이에요.

무기명: 아, 원칙. 첫 상담 때 말씀하신 그거. 되게 중요한가 봐요. 우리 만난 지 몇 달은 넘었는데 생각해보니 한 번도 선생님은 원칙 어기려 든 적이 없네.

무기명, 무릎을 갑자기 탁 친다.

무기명: 아니다. 한 번 있네. 내가 진 얘기 했을 때. 그때 울었죠? 나처럼. 그거도 심한 공감 아닌가?

상담가: (심하게 당황하며) 어, 그건...

무기명: 선생님. 난 이제 대화가 하고 싶어요. 이제까지는 상담이었잖아요. 나는 쏟아내고 선생님은 듣다가 방향만 제시해 주는. 원칙인 건 아는데. 딱 한두 번이라도 좋으니까 나랑 대화해 주면 안 돼요? 서로 생각 얘기하고 감정에 동화되기도 하고. 사실 저...

진, 무기명의 목에 팔을 감는데 그 형상이 올가미를 닮았다.

무기명: 이렇게 망가지고 난 후에 제대로 누군가랑 대화해 본 적이 없거든요. 진이 자꾸 눈에 밟혀서 정상적으로 대화하기가 힘들었으니까. 그러니까 오랜만에 평범한 대화가 하고 싶은...

상담가: (말을 끊고) 기명 씨. 원칙은 지키려고 있는 겁니다.

무기명, 몸에 힘을 쭉 빼고 소파에 등을 기댄다. 진과 가까워지고 상담가와 멀어진다.

상담가: 전 기명 씨와 상담사와 내담자로 얽힌 이상 이 원칙을 꼭 지킬 필요가 있어요. 대화를 같이 나눌 수는 없지만 그 대신 기명 씨가 다시 다른 사람들과 평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겁니다.

무기명, 진이 만든 올가미에 손을 얹는다.

무기명: 아뇨, 선생님. 괜찮을 것 같아요.

진, 미소 짓고 무기명이 따라 짓는다.

무기명: (편안한 어조로) 이제 저 진짜 괜찮아질 거예요.

암전.

뉴스 속보가 들려온다.

5년 전, 전쟁 고아의 총상당한 모습을 고스란히 찍어 논란이 됐던 전 종군기자 이 모씨. 직업적인 욕심으로 인해 윤리를 저버렸다는 거센 비판을 받고 업계에서 퇴출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결국 14일 오전,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사인은 조사 중에 있지만 현재까지 범죄 혐의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자살로....

의자 넘어지는 소리, 책이 찢기는 소리가 뉴스 소리를 덮는다. 상담가의 울음소리.

불이 밝혀지지만 상담가의 책상과 의자엔 조명이 들어오지 않는다. 소파에 앉은 상담가의 모습만 보인다. 하얀 모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모습.

상담가: 이런 사람 많죠? 다 가리면서라도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요즘에 많으니까. (날카로운 목소리로) 아, 그 호칭은 좀. 차라리 익명. 익명이라고 불러주세요. 네. 훨씬 낫네요. ...선생님. 선생님도 원칙 그런 거 열심히 지키세요?

어두운 곳에서 뚜벅이는 소리. 이내 밝은 조명 안으로 무기명이 들어온다. 눈을 마주치는 두 사람.

익명: 아니, 어떤 순간까지 그걸 지켜야 할지 아세요?

끝.

 

 

  <당선소감>

 

   수없이 많은 인생 담긴 글, 앞으로도 계속 써 나갈 것

먼저 제가 어떤 길을 선택하고 나아가든 늘 뒤에서 지켜봐 준 제 가족들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제가 진로를 정하지 못할 때 같이 고민해 주신 고3 담임 선생님과 어설픈 글밖에 쓰지 못하던 저를 지금까지 잘 지도해 주신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님들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글을 쓰는 것은 지금의 제 삶과는 또 다른 인생을 여러 번 사는 것과 같았습니다. 제가 아직 겪지 못한 감정과 저에게 닥치지 않은 사건들을 겪는 인물들에 몰입하며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어린 시절부터 저만의 놀이였습니다. 그 놀이로 시작된 것이 이렇게 점차 발전하며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결과로 다가온 것이 기적이라고 느껴집니다. 투고하기 위해 우편봉투에 원고를 넣으면서도 큰 기대는 감히 갖지 못했습니다. 그저 한 해 한 해 계속 도전하는 것 자체를 의미가 있다고 여기며 보낸 저의 글이 선택받았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제 희곡은 크게는 직업 원칙과 보편적 윤리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요 몇 해 사이에 폭력이 더욱 몸집을 키우는 것이 느껴지는 요즘이기에, 폭력의 주체나 전쟁의 양상 말고도 그 큰 몸집인 괴물의 그림자에 가려진 한 명의 피해자를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피해자를 안타까워하지만 한편으론 내 일이 아니라며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는 무기명은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자신을 투영해볼 수 있는 인물 같습니다. 무기명은 결국 참상을 막지도, 죄책감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했지만, 어쩌면 무기명과 진의 얘기를 듣고 죄책감도 알게 된 익명은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결국 하나일 것 같습니다. 이 희곡이 제 손에서 나온 마지막 작품이 아니라 첫 시작이 되는 작품이 되도록, 앞으로도 수없이 다양한 인생들이 담기는 글을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3학년


 

  <심사평>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 들게 해… 연극성과 극적 전개의 설득력 모두 갖춰

문학은 역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195편의 신춘문예 응모작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한다. 작품들은 오늘의 주요 관심사, 사회 현상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많은 작품이 예년보다 더 개인과 일상에 집중했고, AI와 로봇이 삶 속 깊숙이 들어오며 나타나는 불안과 공포를 다양하게 그려냈다. 거의 모든 작품에 죽음과 절망과 두려움과 불신이 넘쳐흐르는 현상은 우리 사회의 암울한 감정 지표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 작품이 소재와 아이디어를 표면에 펼쳐놓은 정도에 그치고 있어 아쉬웠다.

본심에는 ‘밤이 지는 날’, ‘사람들은 왜 아이를 버릴까요’, ‘익명의 원칙’ 세 작품이 올랐다. ‘밤이 지는 날’은 주인공이 어린 시절 친족에게 당한 성폭행과 결혼 후 딸이 자신의 남편에게 당한 성폭행을 중첩시키며 주인공의 불행했던 삶을 이야기하지만, 두 성폭행 사건을 한 작품에 담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결말도 감상적이었다. ‘사람들은 왜 아이를 버릴까요’는 자신의 아이를 버린 엄마를 변호하는 변호사의 이야기이다. 법학에서 말하는 ‘내심과 표시의 불일치’를 통해 인물의 윤리적 딜레마를 심도 있게 다루기는 하나, 극의 전개가 추진력을 얻지 못하고 문제 제기에만 그친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익명의 원칙’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전직 종군기자의 상담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무의식적 선긋기를 하는 방관자들에게 보내는 이야기다. 작품은 익명으로 상담사와 상담하는 과정에서 원칙을 내세우며 행했던 결과에 대한 죄책감이 어떻게 전이되는지 극적으로 보여주며, 읽는 이에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한다. 심사위원들은 세 작품 중에서, 작품의 연극성과 극적 전개의 설득력과 질문의 확장성을 갖춘 ‘익명의 원칙’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마음을 전하며 더욱 좋은 작품으로 만나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 임선옥 평론가, 오경택 연출가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1) 제목의 함정: ‘무기명’이면서 ‘익명’을 원한다

  • 내담자의 호칭이 무기명(말 그대로 ‘이름 없음’)인데, 그는 “익명 상담”을 신청해요.
    → **익명(보호)**을 원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이름 없음” 자체가 그의 정체성이 되어버린 상태.
  • 제목 「익명의 원칙」은 두 겹으로 읽힙니다.
    1. 상담 현장의 윤리: 익명성·비밀유지·거리유지 같은 전문 원칙
    2. 사회의 윤리: 익명 뒤에 숨어 던지는 비난/폭력의 원칙(뉴스 속 여론의 말들이 눈처럼 “떨어짐”)

즉, 이 작품은 “익명”을 치유의 장치로도, 폭력의 가면으로도 동시에 씁니다.


2) 큰 구조: “상담실” 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세 번의 전환

암전(장면 전환)이 있을 때마다 관계가 바뀝니다.

  1. 초반: 상담가의 미숙함(원칙을 말로만 외움) + 무기명의 경계심(비밀 강박)
  2. 중반: ‘진’의 등장으로 상담이 “정신증적 환시”처럼 보이다가, 결국 **윤리적 사건(카메라 셔터)**로 실체를 드러냄
  3. 후반: 무기명은 “대화(인간적 접촉)”를 요구하고 상담가는 “원칙”을 고수 → 무기명은 “괜찮아질 것”이라 말하며 올가미(진의 팔) 쪽으로 기울어짐
  4. 에필로그: 무기명 죽음 뉴스 + 상담가 붕괴 → 상담가가 새로운 익명 내담자가 된다(역전)

결말은 해결이 아니라 전염(전이)의 완성이에요. 무기명의 죄책감이 상담가에게 옮겨가고, 상담가는 다시 “익명”을 찾습니다.


3) 인물 분석: 3명인데, 사실은 3개의 윤리(혹은 3개의 시선)

무기명(전 종군기자)

  • 트라우마 핵심은 “죽음을 봤다”가 아니라 **죽음을 ‘찍었다’**는 데 있어요.
  • 그는 계속 “내 손이 1초 더 빨랐다”고 말합니다.
    → 전쟁터에서 몸에 밴 직업적 반사(셔터)가, 인간으로서의 반사(붙잡기)를 이겼다는 자기 고발.
  • 상담가에게 원하는 건 치료기술이 아니라 판결/면죄/대화입니다.
    “답해주면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말은 사실 *‘내 죄의 의미를 타인에게 떠넘기고 싶다’*는 유혹이기도 해요.

상담가(처음엔 초짜, 끝엔 원칙의 화신)

  • 첫 상담에서 “선글라스 낀 사람”을 말해버리는 실수로 이미 균열이 생깁니다.
    → 그는 원칙을 안다고 말하지만, 긴장하면 말이 새는 사람이에요.
  •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반대로, 원칙에 더 매달립니다.
    왜냐하면 무기명의 사건은 상담가에게도 감당 불가능한 윤리적 무게이기 때문.
    원칙은 전문성의 표지가 아니라, 상담가 자신을 지키는 방어벽이 됩니다.
  • 그래서 마지막에 책 찢기는 소리/의자 넘어지는 소리는 “내가 지켰던 원칙이 사람을 살리지 못했다”는 붕괴를 무대로 물리화해요.

진(말 없는 ‘증거물’)

  • 진은 유령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무기명이 회피하던 **사건의 핵심(피해자)**을 무대 위에 계속 “현존”시키는 장치입니다.
  • 특징적 연출: 무기명이 불안해질수록 진이 가까워지고, 결국 팔이 올가미처럼 목을 감습니다.
    → 죄책감이 “기억”을 넘어 “신체적 목조름”으로 변환되는 순간.

4) 핵심 상징 1: ‘눈소리’ = 비난이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다시는 씻기지 않는 소리

무기명이 말하는 “눈소리”는 매우 정교한 은유예요.

  • 눈은 원래 조용한데, 무기명에게는 “커다랗게 들립니다.”
    → 그 소리는 실제 기상 소리가 아니라, 여론의 말(동조자/방관자/개새끼…)이 귀에 “떨어지는” 감각.
  • 특히 “눈 한 송이 내릴 때마다 말 한마디씩 귀에 떨어졌다”는 대목이 결정적입니다.
    → 비난이 기억의 날씨가 된 거예요. 겨울이 오면 자동으로 재생되는 처벌.

그래서 그가 불면에서 벗어나는 방식은 “용서”가 아니라 “소리가 안 들리게 됐다”는 형태로 나타나요. 이건 치유라기보다 감각의 마비/단절에 더 가깝게 읽힙니다.


5) 핵심 상징 2: 셔터 소리(찰칵) = 총성의 다른 이름

희곡이 가장 잔인하고 정확한 순간은 여기예요.

  • 진이 총을 맞아 쓰러지는 동작 직후
  • 찰칵 셔터 소리 + 과하게 하얀 조명(플래시)

이때 무대는 말로 설명하지 않고, “윤리적 선택의 1초”를 **감각(소리·빛)**으로 박아 넣습니다.
전쟁터에서 “기록”은 생존이 아니라 종종 “폭력의 동조”가 되죠. 이 작품은 그 논쟁을 ‘강연’처럼 하지 않고, 셔터 한 번으로 관객 몸에 꽂습니다.


6) ‘원칙’의 양면: 치료 윤리인가, 방관의 합리화인가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이거예요.

  • 상담가의 원칙(거리 유지·객관성·사적 관계 금지)은 분명 필요합니다.
  • 그런데 무기명은 그 원칙을 “나를 살리는 안전장치”가 아니라 “나를 더 외롭게 하는 벽”으로 체감해요.
    그래서 “상담이 아니라 대화”를 요구합니다.

여기서 작품은 한쪽 편을 단순히 들지 않아요. 오히려 원칙을 지키는 상담가가 ‘옳기 때문에’ 더 비극적이 됩니다.
상담가는 원칙을 지켜도, 원칙을 지키지 않아도, 결과적으로 누군가가 무너질 수 있다는 공포를 떠안게 되니까요.

마지막 질문 “어떤 순간까지 그걸 지켜야 할지 아세요?”는 그래서 답이 없는 채로 남습니다.
이건 ‘원칙을 버려라’가 아니라, 원칙만으로는 다 못 받는 무게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7) 무대 소품/동선의 의미

  • 곰돌이 인형: 진의 ‘어린 피해자성’을 말 없이 고정시키는 오브제. 진이 소파 옆에서 만지작대는 순간, 상담실은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 현장 보관소처럼 변합니다.
  • 책장(정신의학 서적): 상담가가 붙든 ‘이론/매뉴얼/원칙’의 상징.
    끝의 책 찢기는 소리는 “지식의 무력함” 혹은 “원칙의 파열”을 물리적으로 들려줘요.
  • 조명:
    • 플래시(사진) = 폭력의 순간
    • 죽음 이후 상담가 책상 쪽에 조명이 비치지 않음 = “전문가 자리(책상)”에서 추락

8) 결말의 역전: 상담가는 왜 ‘익명’이 되는가

마지막 장면에서 상담가가 하얀 모자/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익명이라고 불러달라”고 하죠.

이건 단순한 ‘충격’이 아니라, 희곡의 주제를 완결하는 구조입니다.

  • 무기명은 진을 찍은 사람이고, 상담가는 무기명을 들었던 사람이에요.
  • “보는 것/기록하는 것/듣는 것”은 정도 차이만 있을 뿐, 모두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계 맺기입니다.
  • 결국 상담가는 “원칙을 지킨 사람”이었는데도, 그 이후를 혼자 감당하지 못해 익명 뒤로 물러납니다.

즉, 이 작품이 말하는 방관은 ‘악의’가 아니라 감당 불가능한 무게 앞에서 발생하는 후퇴예요.
그래서 관객이 자연스럽게 심사평처럼 “나라면?”을 떠올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