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매일신문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횡단보도에 끝이 있긴 한가요? / 해서우

<당선작>
횡단보도에 끝이 있긴 한가요? / 해서우
인물 : 아이, 할머니, 노가리, 명태, 고대의 명태
공간 : 사거리 횡단보도, 고대의 호수
무대
사각형 형태의 사거리 횡단보도, 꼭짓점마다 작게 대기 공간이 있다.
횡단보도 정중앙에는 작고 얕은 웅덩이가 있다.
1장
사막화된 도시의 저녁,
페인트칠이 다 벗겨진 횡단보도와 불규칙적으로 깜빡이는 신호등.
이곳의 땅은 자주 흔들린다.
배낭을 맨 아이가 신호를 기다린다.
백골이 된 할머니는 횡단보도 한쪽에 누워있다.
신호가 초록불로 바뀐다.
아이는 흰색 선을 따라 보폭을 크게 걷는다.
아이 : 하나… 둘… 셋…
신호가 빨간불로 바뀐다.
아이 : (신호를 보고) 아,
아이는 달려서 대기 공간에 도착한다.
아이 : 뼈.
(사이) 갈비-뼈.
(사이) 갈-비-뼈.
아이는 할머니를 본다.
신호등이 꺼진다.
아이 : 갈비뼈가 있긴 한 거야?
(횡단보도를 질주한다) 갈비뼈가, 사람한테 갈비뼈가 정말 있어? 12쌍 갈비뼈가 1번부터 12번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심장이랑 폐를 감싸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 하나쯤은 없을 수 있잖아. 없어도 되잖아!
땅이 흔들리고, 아이는 넘어진다.
신호등이 켜진다.
아이 : 없으면 안 되나?
아이는 일어나서 할머니를 본다.
갈비뼈를 만지면서
아이 : (간지럽다) 나는 여덟 개밖에 없는 것 같은데.
저 멀리서 고대 명태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이는 들을 수 없다.
고대3 : 간지러워.
고대2 : 어디가?
아이 : 아홉 갠가?
고대3 : 등에 날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애.
아무것도 없어?
초록불로 바뀐다.
아이는 걷는다.
아이 : 열…
고대2 : 부레옥잠밖에 없는데….
아이 : 열하나…
고대1 : 혼자서만 몰래 뭐 먹었지?
아이 : 열둘…
고대3 : 이 호수에,
아이 열둘…
고대3 : 숨길 데가 어디 있어.
아이 : (조금씩 화가 난다) 열둘…
고대2 : 옛날에는 말이야,
홍수가 나면 저어기루 흘러가기두 했대.
고대1 : 저어기?
빨간불로 바뀐다.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걷는다.
고대2 : 여기보다 차갑구 더 넓은 곳.
고대3 : 살아남았대?
고대2 : 그건
아이는 할머니 앞에 선다.
아이 : 왜 멋대로 죽어버린 거야!
긴 사이.
아이 : (작게) 죄송해요.
(걷는다) 사아실
걷다가 두 발을 모아 멀리뛰기 한다.
아이 : 안 죄송해요.
뛴다.
아이 : 툭하면 오밤중에 나가서는
뛴다.
아이 : (할머니 말투로) 그냥 잠깐, 땅 위에 친구 만나러-.
힘껏 멀리 뛴다.
아이 : 여기에 뭐가 있다고. 아무것도 없는데.
아이는 할머니를 본다.
아이 : 아주 제멋대로야.
아이는 대기 공간으로 힘없이 걸어간다.
신호등 옆에 쪼그리고 앉는다.
무릎에 머리를 묻는다.
신호등,
깜빡이지 않고 제대로 작동한다.
주머니 많은 망토를 입은 노가리가 나온다.
머리에 헬멧처럼 꾸민 어항을 쓰고,
거대한 천 가방을 질질 끌고 온다.
빨간불 멈추고,
초록불 걷다가,
빨간불 멈추고,
초록불 걷는다.
노가리는 아이를 지나쳐서 할머니 앞에 도착한다.
아이는 수집가를 본다.
노가리 : (신호등 보고) 음,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제대로 울린다지.
노가리는 백골의 할머니를 가방에 넣기 시작한다.
아이 : 그럴 때 쓰는 말 아닌데.
노가리 : 악!
아이 : 간이 코딱지.
노가리 : 내 간은 그렇게 작지 않소이다만…
아이 : 뭐 하세요?
노가리 : 20세기형 여성 노인의 인골, 수집 중이외다.
아이 : 누구신데요?
노가리 : 수집가라고나 할까.
아이 : 거짓말.
아이는 노가리에게 다가간다.
노가리의 가방에서 할머니를 빼낸다.
아이 : 우리 할머니 좀 냅둬요.
노가리 : (할머니를 넣는다) 네 할머니라는 증거도 없잖아.
아이 : (할머니를 꺼낸다) 제가 봤어요.
노가리 : (가만히 본다) ….
아이 : (할머니를 끌면서) 하얗고, 딴딴한 얼굴, 쓰다듬고,
엄마 아빠, 다- 엉엉 울고,
(쉰다) 저는 안 울었어요.
(다시 끌면서) 나무 상자에 넣어다가, 운구차 타고,
위로, 위로, 올라가서,
노가리 : 매장 문화는 21세기에 종결됐다지?
아이 : 땅에다 묻으면, 돈 내야 한다고,
노가리 : 살겠다고 땅으로 들어가서는-
지렁이, 두더지, 땅강아지, 공벌레, 딱정벌레, 사슴벌레,
아이 : 여기에서, 불 피우고, 태우는 거,
노가리 : 이 벌레, 저 벌레, 그 벌레, 요 벌레,
아이 : (멈춘다) 제가 다 봤어요.
노가리 : 다 땅 위로 몰아냈다지?
아이 : 몰라요. 날 때부터 땅속이었는걸요.
노가리 : 인골도 방치하고!
사이.
노가리 : 그럼, 두개골만이라도….
아이 : 갈비뼈도 하나 없는데….
노가리 : 허-.
초록불이 깜빡깜빡.
노가리 : 일단… 알았다.
아이는 할머니를 두고 걷는다.
노가리는 아이를 따라간다.
빨간불로 바뀐다.
아이 : 있잖아요.
노가리 : 응.
아이 : 달그락 달그락 시끄러워요.
노가리 : 귀를 막아 봐.
아이 : 가방에 뭐예요?
노가리는 고민하다가 가방에서 뼈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노가리 : 갈루스 갈루스 도메스틱쿠스 경추.
아이 : 갈루갈루쿠스가 뭐예요?
노가리 : 닭이외다.
노가리 : 닭 쇄골.
닭 대퇴골.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요골.
아이 : 오스랄로아파스가 뭐예요?
노가리 : 예에에엣날에 살았던 사람.
닭 흉골.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골반.
아이 : 호모네안데르가 뭐예요?
노가리 : 아마도
아이 : 아마도
노가리 : 네 조상.
아이 : 우리 집에는 그런 이름 없어요.
노가리 : 닭 두개골.
노가리는 가방을 탈탈 턴다.
닭 뼈가 우수수 쏟아진다.
아이 : 다 닭이네요.
노가리 : 죄다 닭이지, 얼마나 먹어 치웠으면.
아이 : 누가요?
노가리는 아이를 빤히 바라본다.
아이 : 할머니
노가리 : 그건 모르겠는데….
아이 : 할머니 6번 갈비뼈는 없어요?
노가리 : 음, 20세기형 갈비뼈라아-
노가리는 이 주머니 저 주머니 뒤적이다가
노가리 : 뼈다구!
아이 : 있어요?
노가리 : 사-탕.
아이 : 아.
노가리 : 드실라우?
아이 : …네.
아이와 노가리는 뼈다구 모양 사탕을 먹는다.
아이 : 있잖아요.
노가리 : 응.
아이 : 산 사람은 왜 살아야 해요?
노가리 : 이미 살아있는데 살아야 한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아이 : 다들 그러던데.
노가리 : 내 사전에는 없어.
아이 : 할머니 친구들이 저를 막 쓰다듬으면서,
호상이다, 호상이야,
그랬어요.
엄마랑 아빠는 호상 아니랬는데.
노가리 : 말 붙이기 나름이지.
아이 : 다 재수 없어요.
노가리 : 기분대로 해.
아이 : 그래서 집 나왔어요.
노가리 : 나는 집이 없다오.
사이.
아이 : 잘래요.
아이는 할머니 옆으로 간다.
아이 : (노가리에게) 가져가시면 안 돼요.
노가리 : 걱정 마시게나.
배낭에서 원터치 텐트를 펼치고 잠든다.
노가리는 뼈들을 가방에 담는다.
담고 담다가 가방에 들어간다.
신호등이 꺼진다.
2장
도시의 밤,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린다.
웅덩이가 내려앉는다.
지름 100cm 크기의 구멍이 생긴다.
신호등이 깜빡깜빡.
노가리가 가방에서 얼굴만 내밀고 주위를 살핀다.
노가리 : 에헤이.
할머니가 벌떡 일어난다.
구멍 가까이 다가가서
할머니 : 이거 완전-
사이.
할머니 : 콩이네.
노가리 : (할머니 있던 자리를 보고) 어?
할머니 : (노가리에게) 콩 골라내지 말라니까.
노가리는 가방에서 나와 구멍을 내려다본다.
노가리 : 딸려 들어갔나?
할머니는 체조한다.
요가 같기도 하고 기체조 같기도 하고 태극권 같기도 한 체조를 한다.
명태가 나온다. 노트북을 들고 있다.
명태 : (텐트 보고) 저거 뭐야?
노가리 : 애긴데 가출했대.
명태 : 왜?
노가리 : 얘기 들어주는 사람이 없나 봐.
명태 : (구멍 보고) 어-.
노가리 : 또 구멍 났어.
명태 : 또 구멍 났네.
노가리 : 여기도 이제 떠야겠다, 그치.
명태 : 안 되는데.
노가리 : 왜?
명태 : 호수잖아.
노가리 : 웅덩이야.
명태 : 웅덩이가 호수잖아.
노가리 : 웅덩이는 웅덩이지.
명태 : 호순데….
노가리 : (작게) 웅덩이.
노가리는 가방에서 밧줄과 삽을 꺼낸다.
몸에 밧줄을 묵고 신호등에 고정한 뒤, 구멍으로 들어간다.
명태는 구멍 근처에 앉아 노트북을 연다.
블로그 '명태박사입니다'의 가장 최근에 작성한 게시글, '고서적 속 명태'를 켜놓고 계속 새로고침 한다.
명태 : 노가리야,
노가리 : 응?
명태 : 이번에 올린 거 봤어?
노가리 : 당연하지.
명태 : 조회수 0인데.
노가리 : 어- 꿈에서 봤어.
명태 : 무슨 내용이게.
노가리 : 명태 이야기-.
사이.
명태 : 나는 꼭 파워블로거가 될 거야….
노가리 : 힘-내-.
명태 : 명태 검색하면
할머니는 우뚝 멈춰서서
할머니 : 축!
명태 : 조려 먹고 튀겨 먹고 구워 먹고 끓여 먹고 말려 먹고 태워 먹고 삭혀 먹고
할머니 : (한쪽 다리로 선다) 모든 건 중심이 잡혀 있어야 한다.
명태 : 명태 음식으로 점철된 인터넷 갈아엎을 거야.
할머니 : (넘어진다) 안 그럼 무너져버리는 거야.
노가리는 구멍에서 자동차 번호판, 타이어 조각을 발견한다.
노가리 : (구멍에서 얼굴 내밀고) 도로였나 봐.
명태 : 횡단보도 있잖어.
노가리는 구멍으로 들어간다.
명태는 새 게시글 '명태는 사실 식물이었다'를 작성한다.
명태 : 명태는 사실 식물이었어요. 저도 처음에는 안 믿었는데요,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께서 말씀하시길,
할머니 : (체조한다) 울지 말어.
명태 : 이 명태의 부레는 부레옥잠의 잎자루다!
사이.
명태 : 정말이에요. 고대 명태와 부레옥잠은 하나의 부레를 공유하는 공생 관계, 혹은 하나의 생명체였던 것입니다.
할머니 : 운다고 해결되는 것 하나 없다.
명태 : 현대의 명태와 고대의 명태, 무엇이 다를까요? 먼저 현대의 명태는 1~10℃의 수온을 좋아해요. 다 자란 명태는 10~12℃, 치어는 1~6℃를 선호하죠.
할머니 : 잘 봐봐. 눈 감고 폐에 가득 찬 숨을 후우우우 뱉으면
노가리는 전단 여러 장을 구멍 바깥으로 던진다.
노가리 : 집 나간 명태를 찾습니다- 포상금 50만 원-.
할머니 : 동그란 구멍들이
노가리 : (구멍에서 얼굴 내밀고) 구멍?
명태 : 구멍?
노가리 : 아냐. (들어간다)
할머니 : 퐁 퐁퐁 퐁 퐁퐁
명태 : 명태는 21세기까지는 서해안에서 베링해, 오호츠크해, 일본 북해도, 한국 동해를 회유하며 살았습니다. 수온 상승으로 이제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북극해에 서식합니다.
노가리 : (춤춘다) 북쪽으로- 북쪽으로-
할머니 : (춤춘다) 북쪽으로- 북쪽으로-
(멈추고) 터져서 점 하나만 남는단다.
노가리 : 북쪽의 북쪽이 동나면 어떡하지?
할머니는 신호등을 타고 오른다.
명태 : 한때 국내에서는 '노가리는 명태 새끼가 아니다-' 하고 남획을 일삼았는데,
노가리 : 그럼- 나는 누구란 말이야-?
명태 : 명태 새끼.
노가리 : 아하.
할머니는 신호등에서 떨어진다.
명태 : 명태들 사라지니깐 반성이랍시고- 뒤늦게 어획을 전면 금지했다네요.
할머니 : (손가락으로 몸을 가리킨다) 경추, 쇄골, 대퇴골, 요골, 두개골, 흉골,
명태 : 국정과제로 명태 살리기 책정해서는 치어 키워다가 방류하고.
당연히 성과는-
할머니 : 6번 갈비뼈
명태 : 없었습니다.
노가리는 그물, 철제 도르래, 엔진을 발견한다.
노가리 : (구멍에서 얼굴 내밀고) 항구가 있었나 봐.
할머니 : (아프다) 금 갔나….
명태 : 각설하고. 선조의 말씀에 따르면 명태의 기원은 인류보다 100만 년 앞섭니다. 고대의 명태는 20℃ 이상의 수온을 좋아했어요.
노가리 : (들어간다) 더-워-.
명태 : 바다가 아닌 호수가 주 서식지로, 수면을 부유하며 광합성을 즐기고, 산소와 탄수화물을 영양원으로 삼았습니다.
할머니 : 네가 축을 찾기만 하면 말이다.
명태 : 8월 단 하루 꽃을 피우고, 씨앗을 뿌리거나 새 뿌리를 내리는 방식으로 산란했다지요.
할머니 : (명태에게 올라탄다) 우리가 그 축을…
노가리 : 명태야,
명태 : 응.
할머니 : 맞대기만 하면 말이야…
노가리 : 여기에 뭔가 있다.
명태 : (일어난다) 뭐가?
할머니가 구멍으로 떨어진다.
명태는 구멍을 내려다본다.
노가리 : 동그란
명태 : 동그란?
노가리 : (완두콩을 꺼내며) 완두콩.
구멍에서 물이 솟구친다.
아주 밝고 환한 빛이 퍼진다.
긴 사이.
일러스트 : 김재경 작가
일러스트 : 김재경 작가
암전.
3장
고대의 호수, 웅덩이는 호수가 된다.
고대의 명태들과 명태, 노가리가 호수를 떠다닌다.
명태 : 호수다.
노가리 : 웅덩이야.
명태 : 웅덩이는 호수였잖아.
노가리 : 호수가 웅덩이였잖아.
명태 : 호순데….
노가리 : (작게) 웅덩이.
사이
노가리 : 편하다-.
명태 : 편안해-.
사거리 횡단보도는 여전하다.
할머니가 횡단보도를 걷는다.
할머니의 걸음을 따라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뀐다.
고대1 : (할머니에게) 너.
고대2 : 그러지 말어.
고대1 : (할머니에게) 부레옥잠은?
할머니 : 몰라.
고대1 : 어떻게 몰라?
고대2 : 그러지 말래두.
할머니 : 있잖아, 내가
고대2 : 으응.
할머니 : 휴게시간에 낮잠을 자려고 했거든.
고대1 : 그치.
할머니 : 직장가 사람들 썰물처럼 빠지고 산더미 같은 설거지 해치우고 나면 온몸이 쑤시고
고대2 : 뼈마디가 남아나질 않지.
할머니 : 의자 네 개 딱 붙여서 자려고 하는데
고대1 : 에어컨 바람에 지느러미 살랑거리고 아르바이트생 둘이서 속닥속닥
고대2 : 이제는 안 간지러?
할머니 : (등을 보고) 그런 것 같아.
고대1 : 간지러워서 일부러 떼어냈지?
고대2 : 넌 말을 해두 참.
명태 : (텐트 보고) 쟤는 아직도 자나?
노가리 : (텐트 보고) 애들은 잠이 많잖아.
할머니 : 밖에서 굉음이 들리는 거야.
고대1 : 갑자기?
할머니 : 강화유리 있잖아, 20장은 족히 되는 강화유리가 한꺼번에
고대2 : 와장창?
할머니 : 쨍그랑도 아니고 와장창도 아니고 콰과광.
고대1 : 돈이 얼마야.
할머니 : 아르바이트생이 벌떡 일어나더니
고대2 : 어, 사람 죽었다.
아이가 텐트를 벌컥 열고 나온다.
아이 : 구급차 소방차 사이렌 위옹위옹-
할머니 : 가게 밖으로 나갔는데 사람들이 나와 있었어.
고대1 : 공사장 인부가 32층에서 떨어졌대.
고대2 : 어느 디자인 회사 사옥 짓는댔지?
할머니 : 사람들이 저 회사 사장 딱하다, 이러대.
사람 죽은 사옥은 5년 안에 망한다고.
아이 : 듣기 싫어!
아이는 노가리와 명태에게 간다.
할머니 : 오후 1시 되니까 썰물처럼 죄다 사라지고
고대2 : 도로는 자동차만 쌩쌩
고대1 : 공사는 재개돼서 사람 기계 오르내리고
아이 : (노가리에게) 우리 할머니는요?
할머니 : 나도 저녁 장사 준비하러 들어갔지.
노가리 : 그게-
할머니 : 동태 손질하고 콩나물 양파 무 썰고 육수 끓이고
명태 : 없어졌대.
고대2 : (할머니에게) 아프지는 않구?
할머니 : (갈비뼈 만지며) 하나도.
아이 : 거짓말!
노가리의 가방에서 흘러나온 뼈와 갖갖은 물건들,
호수를 둥둥 떠다닌다.
고대2 : 부레옥잠 말야, 물에 휩쓸려 갔을까?
명태 : (노가리) 가방, 안 챙겨도 돼?
고대1 : 찾아와야지.
노가리 : 괜찮아- 다른 수집가가 나타날 거야-.
할머니 : 나중에. 저녁 먹겠다고 사람들 득달같이 몰려오잖아.
고대1 : 과장님, 이번에 보고서가 어쩌구 프로젝트가 저쩌고
고대2 : 술 취해서는 고함 좀 안 질렀으면 좋겠어. 싸우기나 하구 말이야.
할머니 : 아무도 낮에 있던 일은 안 꺼내대.
아이의 텐트 앞으로 뼈들이 모여든다.
아이는 뼈를 헤집으면서
아이 : 할머니, 할머니 어딨어?
할머니는 신호등 앞에 앉는다.
할머니 : 가게 닫고 집 가려다가 맞은편을 계속 봤다.
노가리 : (아이에게) 거기에 없어.
아이는 계속 뼈를 헤집는다.
할머니 : 간지러웠어.
고대1 : 부레옥잠은 어딜 간 거야.
고대2 : 나두 자꾸 등이… 간지러운 것 같애.
명태 : 북쪽으로 갔나 봐.
아이 : 아니야!
할머니 : (몸을 좌우로 흔든다) 땅 아래고 위고 온갖 바퀴 달린 것들이 굴러서
고대2 : (몸을 좌우로 흔든다) 땅이 흔들리는구나.
고대1 : (몸을 좌우로 흔든다) 땅이 진동하는구나.
노가리 : 다들 떠나려는 거야.
노가리는 헤엄친다.
웅덩이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명태도 고대의 명태들도 따라 빙글빙글.
물건들이 넘실거린다.
할머니 : 저 앞에 얀이사벨 모텔 꼭대기에 사는 말들도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고
고대2 : 입술 부르르 콧김 킁킁
고대1 : 달리지도 않는데 땅이 진동하니까 화가 났대나.
아이는 급하게 물건들을 줍는다.
할머니 : 횡단보도를 걷고 또 걸었어.
고대1 : 신호가 바뀌면 기다렸다가
아이 : 다 버렸어.
고대2 : 또 바뀌면 걸었다가
아이 : 옷이고 책이고 수저고 싸그리 다!
노가리 : (명태에게) 블로그는?
명태 : 예약 발생 100개.
할머니 : 가게를 지나고
아이 : (이불 끌어안고) 이불, 이불은 나 주면 안 돼?
(냄새 맡고) 아직 냄새난단 말이야.
고대1 : 은행을 지나고
노가리 : 아무도 안 보잖아.
아이 : (돋보기안경 쓰고) 나중에 내가 쓸 수도 있잖아.
고대2 : 어느 디자인 회사 사옥을 지나서
명태 : 나아중에
아이 : (복대를 차고) 나도, 나도 갈비뼈 부러진 것 같아.
할머니 : 편의점을 지나고
명태 : 누군가는 보겠지.
고대2 : 횡단보도를 빙글빙글
노가리 : 아무도 안 보면 어떡해?
아이 : (할머니에게) 엄마아빠가 죄다 종량제 봉투에 넣어서 버렸어.
고대1 : 자동차는 얌전하게 멈춰서고
명태 : 누군가는 볼 거야.
할머니 : 뜨겁게 달궈진 바퀴들을 보면서 생각했어.
아이 : 할머니,
할머니 : 좀…
사이.
할머니 사라졌으면 좋겠다….
고대 명태들과 노가리, 명태는 동시에 할머니를 본다.
아이 : 할머니, 왜 아무 말도 없이 죽어버린 거야?
고대 명태들과 노가리, 명태, 할머니는 동시에 쓰러진다.
아이 : 나 이제 콩도 잘 먹는데…
고대 명태들과 노가리, 명태, 할머니는 꾸물거리며 일렬로 모인다.
줄을 맞춰 횡단보도를 기어 다닌다.
아이 : 목소리 하나도 기억 안 나.
아이는 텐트 앞에 앉는다.
고대 명태들과 노가리, 명태, 할머니는 일어난다.
서로의 몸을 더듬으며 축을 찾는다.
축과 축을 맞대어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간다.
아이 : 다 어디로 가버린 거야.
하나의 유기체가 된 고대 명태들과 노가리, 명태, 할머니,
활짝 웃으면서 서로 다른 방향의 저어기를 가리킨다.
아이 : 거짓말….
긴 사이.
고대 호수가 사라진다.
고대 명태들과 노가리, 명태, 할머니는 무표정으로 해체한다.
아이를 제외한 일동, 목례를 나누며
일동 : 퇴근해보겠습니다.
고대의 명태들은 아이의 텐트를 들고 나간다.
노가리와 명태도 소품을 정리하다가 나간다.
할머니는 아이 앞에 선다.
할머니 : (아이와 눈 맞추며) 그만 집에 가야지?
긴 사이.
할머니는 횡단보도 한쪽에 눕는다.
불규칙적으로 깜빡이는 신호등.
신호가 초록불로 바뀐다.
아이는 흰색 선을 따라 보폭을 크게 걷는다.
아이 : 하나… 둘… 셋…
아이는 계속 걷는다.
땅이 진동한다.
막.
<당선소감>
-
아주 멋지고 대단한 당선 소감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다짐 때문인지 아무것도 적을 수가 없어서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동료들과 '만약에 당선되면' 대화를 가끔 나누었는데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요. 욕심 없이 써보겠습니다.
욕심 없기가 어려워서 감사 인사를 먼저 전합니다.
부모님께. 강단과 넉살 좋은 웃음을 물려준 정숙, 예민함과 이야기꾼의 자질을 안겨준 홍섭. 언제나 나의 선택을 믿고 응원해준 덕에 뭐든 겁 없이 시도할 수 있어요.
선생님들께. 누리 언니,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단국대학교 교수님들, 4년 동안 배운 문학을 기반 삼아 희곡을 썼습니다. 선생님들의 은혜에 존경을 표합니다.
멀리서 늘 다정을 보내는 은빈, 하영, 하은, 현정. 희곡 쓰는 동력이 되어준 선민 선배님, 경현 님, 시시프트. 갚을 수 없는 애정을 주는 채윤, 민경, 인. 응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 동엽. 함께 문학 공부하고 희곡 쓰고 공연하고 공연을 찾아준 모든 분께, 고맙습니다.
공연이 좋습니다. 나 살아있는 게 맞나, 열네 살 가을에 생각한 이후로 딱 1cm 몸이 떠 있습니다. 테두리 벗어나 색칠한 그림처럼 영혼이 나오려다가 만 것 같은 느낌. 자꾸만 사람들이 죽어서, 나만 두고 사라져서, 아직 죽지 않은 당신 죽을까 봐, 나도 죽을까 봐 겁이 나는데요. 공연에 속하는 동안은 지면에 발이 닿습니다. 꼭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저 무대의 한 귀퉁이에 나도 있고 싶다, 그렇게 희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쓰다 보니 공연보다 희곡이 좋아요. 즐겁고 자유롭고 무엇보다 편안합니다.
기억과 기록과 계승과 멸종, 몸과 축과 영혼과 꿈, 죽음과 장례와 애도와… 너 살았던 흔적을, 나 살았던 흔적을 남기고 싶습니다. 누군가는 분명 찾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발견이 곧 위안이리라는 바람으로, 현시와 과거를 희곡 언어로 보존하는 극작가가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심사위원과 매일신문사에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4학년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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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신춘문예는 전국 각지에서 응모된 희곡과 시나리오를 예심과 본심, 최종심을 통합해 진행하는 방법으로 심사했다. 먼저 예심을 통해 총 5편의 작품을 본심에 올린 후, 그 작품들을 본심에서 다시 심사하고, 마지막으로 2편의 작품 중 한 편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최종심 과정을 거쳤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을 살펴보면 먼저, '안녕'은 자동차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딸과 아빠의 이야기인데 상대를 볼 수 없는 사람과 보고 있는 두 사람의 안타까운 사연이 눈길을 끌지만, 전개가 단조롭고 대화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도 평이했다. '창문 열면 벽'은 여성의 내면 트라우마를 보여주려 했지만 자신의 외면과 화해할 계기가 없다는 단점을 드러냈다. '유령들의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에 한 모텔에서 펼쳐지는 소동을 다루고 있는데 죽은 자와 산 자의 만남과 이야기가 흥미롭지만, 결말로 가는 과정이나 주제의 제시가 설명적이었다.
'도깨비'는 베트남 출신 부인과 지적장애인 남편의 이야기를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을 통해 보여주는 추리극 형태로 극을 풀어가고 있다. 대화나 상황설정이 탄탄하고 마지막에 밝혀지는 베트남 부인과 장애인 남편에 대한 편견을 깨는 반전이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그러나 신춘문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신선함에서 아쉬움이 있었다.
'횡단보도에 끝이 있긴 한가요?'는 흥미로운 상상력으로 가득한 작품이었다. 형식이 어느 작품보다 특이했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을 것 같지만, 상상력을 조금만 더해보면 굉장히 풍성한 이야기들이 살아서 움직였다. 이러한 다양한 시적 상상력의 여백은 작품의 장점인 동시에 치명적인 단점으로도 보였다.
심사위원은 본심 5편의 작품 중 전통적인 극작법으로 풀어낸 '도깨비'와 형식미를 앞세운 새로운 실험과 도전의 '횡단보도에 끝이 있긴 한가요?' 두 작품을 최종심 대상으로 두고 고심했고, 두 작품 중 신춘문예의 신인 정신에 더 어울리고 연극적 상상력을 자극하여 무대 위의 모습을 기대하게 만든 '횡단보도에 끝이 있긴 한가요?'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당선자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도전과 실험정신으로 무장하되 극작품의 기본기를 더 쌓아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낙선자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묵묵히 자신의 글을 쓰고 있는 모든 예비 작가에게도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힘든 겨울을 잘 이겨낸 모든 이에게 행복한 봄이 찾아오기를 기원한다.
심사위원 : 안희철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이 희곡은 “이야기(서사)로 설명하는 극”이라기보다, 상징·리듬·무대장치가 먼저 의미를 만들고, 관객이 그 의미를 ‘건너가며’ 조립하게 하는 실험극에 가까워요. 제목부터 그걸 선언하죠.
1) 제목이 던지는 질문
**〈횡단보도에 끝이 있긴 한가요?〉**는 단순한 길찾기 질문이 아니라,
- 애도의 끝(그리움의 종료)이 있나?
- 삶의 반복 신호(초록/빨강) 속에서 “건너감”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 도시/문명/기후 위기 속에서 우리는 계속 어디로 이동하는가?
를 묻습니다.
그리고 작품은 “끝”을 보여주지 않고, 마지막에 다시 1장의 리듬(하나…둘…셋…)으로 되감기며 관객에게 “끝은 없다/끝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를 체감시키는 방식이에요.
2) 공간이 곧 주제다: 사거리 횡단보도 + 중앙 웅덩이
무대는 사각형 사거리 횡단보도(네 꼭짓점 대기 공간) + 중앙의 얕은 웅덩이로 시작해요.
이 구조는 아주 노골적으로 “삶의 구조”를 닮았습니다.
- 대기 공간: 멈춤/유예/보류(살아남은 자의 시간, 결정 못 하는 시간)
- 횡단보도 흰 선: 규칙, 질서, ‘건너는 행위’ 자체(삶을 통과하는 방식)
- 중앙 웅덩이: 기억의 구멍/무의식의 구멍/세계의 붕괴 지점
→ 2장에서 웅덩이가 구멍이 되면서, “애도의 구멍”이 “세계 붕괴의 구멍”으로 커져요.
→ 3장에서 그 구멍은 **호수(고대의 호수)**로 전환되어 시간대(현대↔고대)가 뒤섞입니다.
즉, **개인의 상실(할머니의 죽음)**이 **문명/생태의 상실(명태/부레옥잠/수온/남획)**로 연결되는 구조입니다.
3) 인물들은 ‘사람’이 아니라 ‘역할/상태’에 가깝다
아이
- 핵심 상태: 분노→죄책감→부정→질문(왜 살아야 해?)
- 아이는 계속 ‘세기(counting)’를 하죠. “하나…둘…셋…”
이는 통제 욕망이에요. 감당 안 되는 죽음 앞에서, 숫자는 “질서”처럼 보이니까요. - 아이의 집착: 갈비뼈(특히 6번 갈비뼈)
‘신체의 결손’은 ‘마음의 결손’을 대체하는 표적이 돼요.
“하나쯤은 없을 수 있잖아”는 사실 “할머니가 없어도 되는 세계가 되면 안 되는데”의 뒤틀린 표현이기도 해요.
할머니
- 처음엔 백골로 누워 있지만 2장에서 벌떡 일어나죠.
이 할머니는 현실의 할머니이기도 하고, 아이 내면의 **‘죽은 자’**이기도 하고, 더 크게는 ‘노동하는 몸’(식당, 설거지, 동태 손질, 프로젝트 보고서…)의 상징이에요. - 3장에서 “퇴근해보겠습니다”로 정리되는 순간, 할머니는 ‘영원한 유령’이 아니라 퇴근하는 존재가 됩니다.
→ 애도는 끝나지 않지만, 살아있는 세계의 리듬(출근/퇴근)이 죽은 자를 처리하는 방식을 드러내죠. 잔인하면서 정확해요.
노가리(수집가)
- “20세기형 여성 노인의 인골 수집”을 하는 존재.
죽음이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수집·데이터·물질로 처리되는 세태를 희화화해요. - 가방에서 닭뼈,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네안데르탈 등 각종 ‘분류’가 쏟아지는 장면은
죽음의 분류학(라벨 붙이기)이 애도와 무관하게 돌아가는 세계를 보여줍니다. - 그런데 노가리는 악역처럼만 굴지 않아요. 아이에게 사탕을 주고(뼈다구 모양 사탕), 대화를 받아주죠.
즉, 이 인물은 냉혹한 체계이면서 동시에 듣는 자의 기능도 합니다.
→ “얘기 들어주는 사람이 없나 봐.”가 작품의 숨은 핵심 대사예요.
명태(‘명태박사입니다’)
- 블로그를 새로고침하고, 조회수 0을 절망하며, “명태는 사실 식물이었다” 같은 게시글을 쓰죠.
이건 웃기지만 동시에 비극이에요. - 명태는 지식을 생산하지만, 세계는 여전히 “명태=먹을거리”로만 소비합니다.
→ **말(기록)이 생존을 구하나?**라는 질문이 숨어 있어요.
글쓰기/기록의 무력감과 집요함이 동시에 나옵니다.
고대의 명태들
- 아이의 세계에서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시작해요(1장).
→ 인간의 상실에 압도되어 비인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태. - 2장에서 “부레옥잠”, “공생”, “수온” 등 생태 정보와 연결되며
개인 애도가 멸종/기후위기 애도로 확장되는 통로가 됩니다.
4) 반복되는 장치들이 만드는 의미의 “루프”
이 작품은 반복이 곧 내용이에요.
(1) 신호등: 초록/빨강/깜빡/꺼짐
- 초록은 “가라”, 빨강은 “멈춰라”.
애도는 가고 싶어도 못 가고, 멈추고 싶어도 멈추지 못하죠. - 마지막에 신호등은 다시 불규칙 깜빡임으로 돌아가요.
→ 시스템(질서)은 고장난 채로, 아이는 또 걷습니다. “끝” 대신 “지속”을 남겨요.
(2) “웅덩이냐, 호수냐”
노가리/명태가 끊임없이 다투는 말장난은 단순 개그가 아니라,
- 웅덩이(사소한 것)로 치부하면 책임이 작아지고,
- 호수(생태계)로 보면 책임이 커집니다.
즉, 명명(이름 붙이기)의 윤리를 건드려요.
“이건 그냥 웅덩이야”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붕괴를 축소해버립니다.
(3) “콩(완두콩)”과 “부레옥잠”
- 2장 구멍이 “콩”이라는 할머니의 대사는 황당하지만 중요해요.
구멍=결핍=공허를 ‘콩’으로 바꿔 부르는 순간, 결핍은 **씨앗(번식/생명)**의 이미지가 됩니다. - 구멍에서 물이 솟고, 고대의 호수로 넘어가죠.
→ 상실의 구멍이 “과거로 이어지는 물길”이 됩니다.
애도는 죽은 이를 되살리진 못하지만, 시간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식으로요.
5) 가장 중요한 갈등: “죽음(애도) vs 살아있는 리듬(노동/소비/정리)”
3장에서 할머니의 독백은 거의 현대의 사회비극이에요.
- 32층 추락사(공사장 사고)
- 사람들은 “사장 딱하다”, “사옥은 5년 안에 망한다” 같은 말만 하고
- 오후 1시가 되면 죄다 사라지고 공사는 재개
- 아무도 낮에 있던 일을 꺼내지 않음
이건 개인적 죽음(할머니)과 사회적 죽음(노동자)이 같은 질감으로 놓이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말하죠.
- “엄마아빠가 … 종량제 봉투에 넣어서 버렸어.”
→ 애도의 대상(물건/기억/흔적)들이 폐기물 처리되는 세계.
이때 아이가 부탁하는 “이불은 나 주면 안 돼?”는,
- 기억을 붙잡을 최소한의 물질을 요구하는 절규예요.
수필 〈삶의 최소단위, 숟가락〉이 ‘숟가락’에 집착하듯, 이 희곡은 ‘이불’/‘뼈’에 집착합니다.
최소단위가 다를 뿐, 둘 다 살아남기 위한 물질의 끝을 붙잡는 거예요.
6) “축(軸)”이라는 단어가 반복되는 이유
할머니가 체조하며 말하죠.
- “모든 건 중심이 잡혀 있어야 한다.”
- “축을 찾기만 하면… 맞대기만 하면…”
여기서 축은 두 겹입니다.
- 몸의 축: 무너진 몸(죽음/노쇠/사고)을 다시 세우는 원리
- 세계의 축: 무너진 세계(사막화 도시, 흔들리는 땅, 구멍)를 붙잡는 원리
마지막에 고대 명태+노가리+명태+할머니가 “하나의 유기체”가 되려는 장면은
**‘서로 축을 맞대어 살아남는 공동체’**의 환상이에요.
하지만 곧 해체되고 “퇴근”합니다.
→ 공동체는 잠깐 가능하지만, 현실은 다시 각자 생존으로 흩어짐.
이 희망/좌절의 급전환이 작품의 날카로움입니다.
7) 결말 해석: “퇴근”과 “다시 걷기”가 남기는 것
- 모두가 무표정으로 해체하고 “퇴근해보겠습니다”라고 인사하는 순간,
관객은 ‘연극’의 장치를 자각합니다.
메타극적 종료예요.
죽음/멸종/기억/기록을 다뤘지만, 배우들은 퇴근하죠.
→ 우리는 비극을 보고도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잔혹한 진실. - 그리고 아이는 다시 걷습니다.
“하나…둘…셋…”
땅은 진동합니다.
막.
끝을 주지 않아요. 대신 “질문”만 남깁니다.
- 계속 건널 건가?
- 끝이 없는 횡단을 어떻게 견딜 건가?
- 누구의 목소리를 들을 건가?
8) 이 작품을 한 줄로 요약하면
“애도는 개인의 상실에서 시작하지만, 세계의 붕괴(노동·소비·멸종·기후)의 리듬 속에서 끊임없이 ‘건너가야 하는 일’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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