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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포말 / 이호영

 

등장인물
문익 60대  창현 30대
응현 30대  현선 60대


무대

여름. 노을 지는 오후. 제주도 호텔 스위트룸.

블루와 화이트 톤의 고급 리조트로 세련된 분위기이다. 넓은 창으로 지중해 빛 바다가 한눈에 펼쳐진다. 고급 라탄과 실크 벽지가 럭셔리해 보인다. 화려한 다이닝 룸이 있고,

넓은 거실에 스트라이프 소파가 놓여 있다. 침실은 두 개로 킹사이즈 침대가 하나 있는 곳만 관객석에서 내부가 보이고, 한 곳은 내부가 보이지 않게 문으로만 존재한다.

호화로운 숙소에 비해 이들의 차림은 수수하고, 단출하다.

좋은 방향제 향기가 은은하다. 가끔 파도 소리가 들린다.

1장

문이 열린다.

문익, 창현, 응현, 현선 차례로 들어온다.

각자 자신의 짐을 들고 있지만, 현선은 빈손이며 어깨를 떨고 있다.

문익 엄마 눕혀 얼른.

창현 엄마. 이쪽이요.

창현이 현선을 내부가 보이는 침실로 안내하고, 현선은 그대로 침대에 눕는다.

응현이 창현과 현선을 따라 들어간다.

외투와 가져온 짐은 모두 내부가 보이는 침실로 옮겨진다.

응현 여기가 안방인가?

창현 호텔에 안방이 어디 있어. 그냥 침실이지.

응현 처음 와 봐서 그래. 오빠도 두 번째잖아.

현선 추워. 에어컨 좀 꺼 줘.

응현 이건가? (삑-삑-삑-삑-) 음?

창현 비켜.

에어컨이 꺼지는 소리가 난다.

응현, 머쓱한 제스처를 취하고 현선의 이불을 덮어 준다.

응현 엄마. 저희 마루에 있을 거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세요.

현선 응.

창현 마루 아니고 거실.

창현과 응현, 거실로 나간다.

문익, 창 바깥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창현 좋죠?

문익 그러게. 끝내준다.

창현 밤에는 불꽃놀이도 옥상에서 해준대요.

문익 이렇게 비싼 방 냄새를 맡아 보네.

창현 앞으로는 자주 그래야죠.

문익 (등을 토닥이며) 아껴 써.

창현 좋아하시는 거 보려고 열심히 하는 건데요.

문익 룸서비스 시킨 건 언제 오는 거야? 가지러 가는 건가?

창현 가져다줘요. 올라오면서 주문했으니까 좀 걸리겠죠.

응현, 호텔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문익 소주도 시킬 수 있나?

창현 시킬 수 있죠.

문익 호텔에서 시키면 비싸잖아.

창현 상관없… (웃으며) 네, 그럼 그건 그냥 일 층 로비에 편의점 있으니까 사 올게요.

문익 그럴래?

창현 네. 다녀올게요.

문익 여기 카드.

창현 됐어요. 제가 사 올게요.

창현, 나간다.

응현 그렇게 좋으세요?

문익 시늉.

응현 네?

문익 오빠는 뿌듯함이 윤활제잖아. 맞춰 줘야지.

(소파에 벌러덩 누우며) 아이고- 그래도 우리 아들 잘났다!

응현 근데 엄마는 감기가 맞는 거죠?

문익 그렇겠지. 병원 아직 안 가봤어.

응현 네?

문익 너랑 수영하고 나서 더 심해졌어.

그니까 오빠가 호텔 수영장 있다고 말했는데 왜 말도 없이 바다를 즐겨.

응현 이미 일주일째 골골댔다면서요.

제주도 여행을 취소하고 병원에 갔어야죠.

문익 엄마가 병원 안 가겠다는데 그럼 억지로 끌고 가냐?

그리고 그럼 니 오빠가 실망했을 거 아냐.

응현 못하실 것도 없잖아요. 아빠 성깔에.

문익 약 먹으면 나을 거라 그래서 지켜보는 중이야. 좀 기다려.

정 못 버티겠으면 근무하다가도 전화 주면 데리러 가겠다고 했어.

응현 아빠 일하는 곳에서 그런 게 가능해요? 그렇게 자유롭지 않을 것 같은….

문익 시끄러워.

응현 …엄마 성격에 아빠 일하는 시간대에 전화 안 할 텐데. 기어가더라도 혼자 가지.

문익 그만. 아빠 짜증 나려고 그래.

현선 추워… 추워….

2장

해가 졌다. 소파에서 술 먹기 시작하는 문익, 창현, 응현. 건배.

셋 모두 앞으로 대화가 이어지는 도중 틈틈이 멈추지 않고 마신다.

아주 조금씩 취기가 오른다.

창현 좋죠?!

문익 응현아, 엄마 먹을 것 좀 덜어서 문 안에 넣어줘.

응현 엄마가 먹을 게 별로 없어요. 죄다 고기라.

창현 과일 담아. 과일. 샤인머스캣 좋잖아.

응현, 접시를 꺼내 오고 냉장고에서 꺼낸 과일을 담고 방문을 연다.

응현 엄마. 엄마. 샤인머스캣 드실래요?

현선 ….

응현 엄마.

현선 … 안 먹어….

응현 엄마. 오늘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요.

현선 물… 물….

응현 아. 물.

응현, 거실에서 물을 떠서 가져다준다.

창현 여태 물도 안 드렸어?

응현 힘들면 부르세요.

현선 ….

응현, 문 닫지 않고 거실로 나온다.

창현 대체 어쩌다가 저런 거예요? 저 상태로 물에서 어떻게 논 건지 이해가 안 되네.

문익 요즘 계속 안 좋았어.

창현 자기관리를 너무 안 하는 거 아니에요?

문익 (땅콩 던져 먹으며) 집에서 쉬어야 했나?

응현 아빠랑 오빠가 계속 같이 와야 한다고 했잖아요.

창현 그럼 안 오냐? 이렇게 좋은 곳을 예약했는데.

이제 바쁘고 지은이 눈치 보여서 예전처럼 넷이 돌아다닐 수 없는데 힘쓴 거잖아.

응현 알았어…. 누가 뭐래.

문익 내가 봤을 땐 할머니 돌아가시고 힘들어서 그래. 이제 두 달 찼잖아.

응현 그런 것 같기도 해요. 3년을 긴장 상태로 매일 살았는데. 한계에 온 거겠죠.

창현 저 정도면 너 들어가서 살아야 하는 거 아니냐?

응현 나 잘살고 있어 혼자.

창현 아빠는 계속 일하시고, 엄마 심적으로나 물적으로나 무리하고 있는데,

너는 뭐 특별히 하는 것도 없잖아. 지금.

응현 오빠. 나도 생활이라는 게 있어. 이제 내 동네는 서울이 아니라 강원도라고.

창현 자식 도리를 너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단 생각은 안 드냐?

너만 자유로우면 다 괜찮아? 주변 안 봐?

응현 그럼 오빠가 서울로 와. 부모님 계신 곳으로.

창현 지은이랑 이제 막 살림 합쳤는데

무슨 헛소리야. 내가 혼자냐?

응현 그니까 합칠 때 서울로 오지.

창현 내가 평생 모은 돈, 일하는 곳 거리,

지은이 기준 이 세 개 다 맞는 데가

어딘 줄 알아? 인천 저 끝. 거기 하나 나오더라.

내가 고른 게 아니라, 조건이 거길 고른 거야.

(짧은 사이) 넌 청약이 뭔지는 아냐?

문익 아무튼 할머니 일도 잘 마무리가 됐고, 이제 엄마는 건강만 잘하면 돼.

창현 (한숨) 그건 어떻게 된 거예요?

문익 뭐.

창현 할머니 부동산은 뭐 그렇게 됐고, 현금 분배가 이상하게 됐다면서요.

문익 말하자면 너무 긴데, 하여간 엄마 태도가 제일 난감했어.

창현 또 왜요.

문익 엄마가 자기는 다 필요 없다고 그러니까 나만 황당하잖아.

창현 아빠 힘드셨겠네요.

응현 엄마가 필요 없다고 하면 필요 없는 거 아닌가.

창현 엄마가 혼자냐? 그래서요? 이모들만 가져갔나요?

문익 내가 그렇게는 안 놔두지.

창현 역시 아버지! 아직 지혜로우셔.

보이냐? 아빠가 계셔서 엄마가 사는 거라니까.

응현 무슨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해요.

문익 우리끼리니까 하는 이야기야. 우리끼리니까.

응현 엄마 들리면 또 불편하게.

창현 그 돈 나중에 달라고나 하지 마라. 너 지금처럼 살면 무조건이다.

응현 내가 뭘….

창현 그래서 말해봐. 니 인생을 이제 어쩔 셈이야?

응현 뭘….

창현 뭐하면서 사느냐고. 하루 일과를.

평가하겠다는 게 아니라 일단 설명해 봐.

문익 에헤이. 부담 주지 마라 동생한테.

응현 걱정해서 물어보는 것도 아니잖아.

문익 (살피다) 오빠가 이런 데서 재워주니까 고맙다고 한 번 성의껏 해봐.

응현 그냥 나는…. 몰라. 엄마처럼은 살고 싶다.

창현 많이 망가졌구나. 내 동생.

응현 나?

창현 엄마처럼 사는 게 뭐가 좋냐. 이리 휘둘리고 저리 쫓아다니고.

평생을 가족들 무료로 간병이나 하고.

이번에 외할머니 돌아가시면서 겨우 종료된 거지.

아빠 면전에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너무하신 거예요.

우리 어렸을 때 엄마가 평일에는 대전에서 양가 할아버지들 집 왕래하면서 휠체어 두 개씩 끌고, 주말에는 아버지 반찬 챙긴다고 서울 왔다 갔다 하는 거 볼 때마다, 솔직히 내가 남자인 게 다행이더라.

문익 엄마가 자진해서 한 거야. 그때 양가에 추억이 얼마나 많다고 했는데.

창현 고모도 안 했잖아요. 남의 아빠 돌보는 게 편해요?

문익 그럼 너는, 너 바쁘고 응현이가 아빠 간호 못 하겠다. 그러면

고민 없이 요양원으로 보내버리겠다? 하하하.

사이.

문익 뭐야?

응현 아무튼 나는…. 나는…. 더 설명하기 싫어. 나에 대해서.

그거 하기 싫어서 서울에서 나온 건데.

문익 그래도 응현이는 엄마랑 다르지. 자기 직업이 있으니까.

창현 책 하나 냈다고 뭐. 그런 걸 누가 읽기는 하냐?

응현 인기 없어. 돈 안 돼. 아무도 몰라. 됐어?

창현 와 …. 이렇게 회피하는 거, 이거 딱 엄마잖아.

비슷한 줄만 알았는데 그냥 똑같네.

응현 당장 무슨 말을 해도 오빠는 만족 못 해.

모두가 오빠처럼 계획 세우고 준비된 정답이 있을 수 없다고.

참 웃겨. 오빠는 엄마를 말로는 딱하게 여기면서, 엄마처럼 사는 건 별로라고 깎아내리고 욕하네.

그건 엄마의 삶을 이해하는 게 아니야. 평가지.

창현 넌 여자고, 엄마랑 아예 똑같으니까, 이해하고 자시고 할 게 없겠지.

응현 분명하게 말하는데 내가 엄마를 가장 잘 이해하는 건 같은 성별이어서가 아니라, 이 집에서 엄마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노력한 사람이기 때문이야.

창현 그렇다고 네가 엄마한테 가장 잘한 사람도 아니지.

응현 … 오빠도 이제 용돈 좀 보낸다고….

창현 용돈 좀? 용돈 조옴? 서른 먹고 처맞고 싶냐?

사이.

응현 저 담배 좀 피우고 올게요.

문익 딸! 임신 안 돼!

응현, 퇴장.

창현, 응현이 나간 걸 확인한다.

문익 그래. 말 나온 김에 너희 집들이 한 번 해야지.

창현 나중에요.

문익 지금쯤 정리가 다 된 거 아냐?

창현 문제가 좀 생겨서 아직 입주 못 했어요.

문익 무슨 문제? 무리해서 구한 집이라고, 저번에 계약금까지 냈다고 자랑했잖아.

창현 자랑은 무슨.

창현, 소주를 세 잔 연속 들이켠다.

문익, 그 속도에 맞춰서 세 잔 들이켠다.

사이.

창현 아빠. 저 여쭤볼 거 있어요.

문익 뭔데 그래.

창현 엄마랑 응현이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문익 그래.

창현 얼마 전에 장모님이랑 장인어른이 집 보러 오셨거든요.

문익 그래서?

창현 놀라시더라고요.

문익 왜.

창현 너무 오래됐고, 좁다고.

문익 아니, 아니, 젊은이 부부가 그 정도 시작이면 훌륭하지 뭘!

창현 미국 가서 살면 어떻겠냐 그러세요.

문익 미국?

창현 프랜차이즈 장사 뭐 있냐 그러시던데요.

안 그래도 지은이가 대학원 가고 싶고, 더 공부하고 싶다고 그러더니,

결국 부모님께 말했나 보더라고요.

문익 아니, 결혼했으면 그런 건 남편이랑 대화해야지.

누구 돈으로.

지은이 아버지가 아직 일을 하신댔나?

창현 네. 마취과 의사라 정년이 딱히 없으신가 봐요.

문익 ….

창현 자존심을 계속 긁어요.

사이.

문익 임신시켜.

창현 네?

문익 임신하고 일단 애 낳으면 부부는 하나가 돼.

창현 아니….

문익 그땐 니 말을 더 믿고 싶게 될걸.

결국 부모는 늙어 사라진다는 걸 자연스럽게 느끼게 될 테니까.

창현 ….

문익 공부고 뭐고, 기억도 생각도 안 날걸.

눈앞에서 자기랑 똑같이 생긴 천사가 우는데 다른 걸 어떻게 보냐.

응현이 쟤도 좋아하는 남자만 생겨봐.

지금이야 뻐팅기지. 눈이 뒤집힌다고.

아무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네가 문제가 아니라는 소리야.

어깨 펴. 그딴 걸로 자존심 상하지 말고.

창현 …. 네.

문익, 한잔 들이켠다.

사이.

문익 (흥분하며) 하하하. 역시 넌 아직 멀었어 이 자식아. 자식아. 자식아!

결혼하든, 사업장에 직원이 몇 명이 늘든 간에 멀었다고. 이 자식아!

아빠는 인마. 네 나이 때 사장은 아니어도 내 밑에 사원이 100명이 넘었어.

그렇지. 그렇지. 여보! 얼른 나와 봐! 나와 보라고!

문익, 안방에서 아픈 현선을 질질 끌고 나온다.

문익 당신 아들이 지금 결혼이 아니라 입사를 했네!

하하하! 근데 대표가 장인어른!

나한테 다 물어봐! 어린애처럼! 어린애 처어러어어엄~!

문익, 아파서 쓰러진 현선의 손목을 질질 끌며 춤을 춘다.

응현, 들어온다.

응현 아빠. 왜 이래요. 미쳤어요?

뭐해! 아빠 말려!

창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문익의 팔을 잡아끈다.

문익, 저항하며 힘겨루기가 잠시 이어진다. 문익이 손찌검하려 팔을 올린다.

창현, 문익의 양팔을 꽉 잡은 채 차렷 자세가 되게 한 뒤 놔주지 않는다.

문익, 당혹감과 굴욕감이 동시에 밀려온다.

창현 진정하세요.

사이.

놓아 준다.

문익, 밖으로 나가려 한다.

창현 담배 피우러 가시죠? 다녀오세요.

문익, 퇴장.

창현, 널브러진 현선을 조심스레 안고 침대로 옮긴다.

현선 추워…. 추워….

창현 엄마.

현선 추워…. 추워….

응현, 식탁에 앉아 마른세수를 한다.

사이.

3장

창현과 응현이 거실에 있다.

창현이 소주를 계속 들이켠다.

응현 술 잘 못 마시잖아.

창현 까불지 마.

응현 안주 좀 같이 먹든가.

창현 네가 봐도 나 살 많이 쪘냐?

응현 모르겠네.

창현 뺀 거야. 백까지 갔다가 약간.

응현 조절하면 되지….

창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응현 그럼 뭐가 중요한데.

창현 과식할 때라고 지금은. 늘어. 계속 마시면. 계속 먹으면.

거래처랑 먹다 보면 늘고, 스트레스 풀다 보면 늘고.

응현 …새언니는 뭐라고 해?

창현 몰라.

응현 모른다니.

창현 같이 안 잔 지 오래됐다?

응현 그 잠이 그 잠을 말하는 게 맞아?

창현 둘 다야. 안 자줘 같이. 계속 피해.

욕구가 안 생긴대. 양심도 없는 년.

빈손으로 온 게 욕구가 웬 말.

응현 뭐 그러냐….

창현 나도 아빠처럼 은퇴할 때 되면 빠지겠지.

욕심도 빠지고…. 허벅지도, 팔도 얇아지고….

그럼, 볼품도 없어지려나.

응현 너무 오래 남았잖아.

창현 금방이야. 응현아. 금방이라고.

언제까지 부모님이랑 이렇게 다닐 수 있을 것 같냐.

사이.

창현 너희 동네에 탕후루는 있냐?

응현 갑자기 무슨 탕후루야…. 오빠 또 가게 바꿨어?

창현 관심도 없지? 벌써 2호점이다.

응현 대만 카스텔라…? 였잖아.

창현 그 중간에 세계 과자점도 있었어. 아, 도쿄 모찌도.

네가 멍할 동안 사람들은 그렇게 새로운 맛을 찾아서 헤매고 있지.

응현 오빠는 요리는 관심도 없고 하지도 못하면서,

유행 1년도 못 갈 거 뻔히 알면서도…. 권리금 받고 빠지는 것만 계속하네.

창현 뭐?

응현 따지고 보면…. 창업 초보자들 속이는 건 아니야?

창현 그 돈으로 이런 데 오는 거야.

응현 나는 오빠 일 조금도 모르지만….

창현 속이는 거 아니고, 시장 흐름을 아는 거야.

지금껏 뺑이치면서 배운 게 그거고.

응현 …오빠가 나한테 했던 말이잖아. 오빠 같은 초보자들 속인다고.

창현 그런 사소한 거 다 따지고 눈치 봐가면 돈벌이 못 찾아.

생존하겠다는 각오만 명확해지면 그런 건 금방 사소해져.

응현 가장 닮기 싫어했잖아. 아빠의 그런 말습관.

조절할 수 없다면 그건 과식도 아니고…. 폭식이라고.

사이.

창현 네 눈에는 내가 그냥 처먹는 거 같지.

창현, 일어난다.

응현 오빠.

창현 아빠 들어오시고, 엄마 눈 뜨면,

나 일 때문에 바빠서 먼저 간다고 전해.

다른 말 하지 마.

문익, 들어와 소파에 앉는다.

창현, 안방으로 들어가 짐을 챙겨 나오려다, 현선 앞에 멈춘다.

창현 엄마. 긴장 좀 하고 살아요.

다 그렇게 살잖아요.

왜 본인만 삶에서 제쳐 둬요?

그런 식으로 살지 마세요.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넘치는데,

엄마까지 그러지 말라고요.

이제 우리 겨우 잘살아 보려고 하잖아요.

…엄마. 전화 안 받은 거 아니에요.

일할 때만 꺼놓는 거예요.

근데 일이 잘 안 끝나서….

아버지가 잘 해줘요? 응현이는 자주 와요?

솔직히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요.

더 악착같이 해서 몇 년 안에 근처로 이사 올게요.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아시죠?

내일은 더 커질 거예요.

내일은요, 더 커질 거라고요.

상상도 못 하실 만큼.

창현, 거실로 나온다.

창현 응현아.

응현 응.

창현 사회에서 일인 분도 못하면서, 잘 사는 사람 광인 취급하지 마.

응현 …응.

창현 그딴 태도로는 평생 이런 데가 있는 줄도 모르고, 얼마나 달콤한 향기가 배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도, 또 그 잔향이 얼마나 끝내주는지도 모르고 살다 죽을걸.

…하긴. 모르면 부러운 줄도 모른다는데.

근데 넌 이미 여기 들어왔고, 곧 하룻밤 자게 될 거고, 새벽에 목이 말라 잠에서 깨면 문득 저 큰 창을 보게 될 거고, 눈치채기도 전에 발이 먼저 옮겨지고, 처음 보는 시야로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거야.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참을 생각하겠지.

이런 데서 하는 생각은 질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말도 안 되는 고요함, 안정감, 편안함.

사치스러운 것들이 주는 풍족함. 만족감.

인상 깊지 않다고 스스로 되뇌어도 쉽지 않을걸.

못 해본 경험이라는 건 그런 거니까.

그렇게 다르다는 너도 계속 여기가 생각날 거야.

언젠가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데리고 오고 싶어지게 되겠지.

응현 ….

창현 돈은 그렇게도 좋은 거야.

창현, 퇴장.

문익 응현아.

응현 괜찮아요. 아빠.

문익 그게 아니라, 샤인머스캣 좀 먹자.

응현, 냉장고에서 샤인머스캣을 꺼내 온다.

문익 너도 좀 먹어.

응현 네.

문익 오빠도 내켜서 널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 거야.

응현 네.

문익 재미있을 수도 있는데 오빠는 너무 조급해.

차라리 아빠한테 말해볼래?

응현 뭘요?

문익 관심사 같은 거. 소재?

응현 뭐에 관해 쓸 거냐고요?

문익 그래. 네 입으로 들려줘 봐. 판단력이 있잖냐. 너도 아빠한테 다 물어봐.

응현 (짧은 사이) 진짜로 말해요?

문익 잘하면 용돈도 준다. (지갑을 꺼내 놓으며) 격려금.

사이.

응현 제목은 ‘가족과 나눈 이야기’입니다.

문익 오케이.

응현 아버지가 잠든 엄마의 어깨를 발등으로 걷어찼다.

문익 ….

응현 그 모습에 진저리 난 아들은 엄마의 비명을 뒤로한 채 밖으로 나가버리고, 딸은 아버지를 말리다 오래된 식탁의 들뜬 나무껍질에 목이 긁혀 피가 났다.

늘어진 흰 티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발길질은 계속됐다.

나가버린 아들이 부른 경찰이 곧 다섯이나 도착했고, 아버지의 핏발 선 눈이, 수치스러운 얼굴이 딸의 티셔츠처럼 물들었다.

‘이놈들. 나라 세금이 얼만데 이딴 일에 다섯이나 출동을 해?

다신 그러지 마. 다시는!’

그 뒤로 아버지는 다시는 발등으로 엄마를 치지 않았다.

그때 딸이 알게 된 사실은,

아버지를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는 건,

아내의 경련도 아니고, 딸의 애원도 아니고,

자신보다 강한 존재라는 것.

그래야만 비로소 온순해진다는 것.

딸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아주 통쾌하면서도,

한편으론 말할 수 없이 쓸쓸해졌다.

사이.

문익 제정신이냐?

응현 뭐가요.

문익 집에 펜 드는 사람 있으면 사생활이라는 게 없다더니.

응현 ….

문익 아빠는 다 갚았어! 그런 잘못 같은 거!

엄마랑 사이도 회복됐어.

그걸 이제 와서 꺼내는 저의가 뭐야!

응현 아직 나는 못 갚았어요.

문익 뭐가.

응현 나는 아직 한 대도 못 때렸다고요.

사이.

문익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응현 엄마는 단단한 사람이에요.

문익 나도 안다.

응현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버티고 있다고요.

아빠는 못 해요. 아빠는 가만히 있으면 죽을 테니까.

엄마는 잊은 것 같아요.

그럴 수도 있겠죠. 여러 가지 이유로.

엄마가 지켜보지 않았다면 아빠 삶이 어떻게 됐을까요.

아빠는 혼자 밭을 다 갈았다고 생각하시잖아요.

울타리가 없었다면, 아빠는 땅이 끝나는 곳까지 곡괭이질만 하다 이미 죽었을 거예요.

왜 자꾸 무리해서 일을 찾는 거예요.

가을도 오고, 겨울도 오는데, 그렇게 죽도록 채우신 창고는 아직 열어 보지도 않으셨잖아요.

아까 엄마가 토할 때, 아빠가 등 문질러준 게 좋았대요.

엄마는 언제나 그런 걸 기다렸다고요.

사이.

문익 술 더 사 와야겠다.

문익, 현선의 침실로 들어가 외투를 챙겨 입는다.

현선에게 다가간다.

현선 추워…. 추워….

문익 여보. 열 좀 볼까.

현선 추워….

문익 병원 갈까? 병원 가고 싶어?

현선 안 가…. 안 가….

문익 내일은 정말 업어서 가야겠다.

현선, 문익의 반대편으로 돌아눕는다.

문익 술 냄새 심해?

사이.

문익 여보.

현선 ….

문익 여보. 내일 묻고 싶은 게 있어.

용서 없이도 같이 살 수 있는 건가?

여보. 내 세상은 안 오는 거지?

밟고 지나간 듯 이렇게 가는 거지?

분명 뭘 오랫동안 서둘렀는데

왜 이리 고요할까.

처참하게 무능력하고…. 아쉬워….

요즘 잠만 들면 당신이 내 발목을 끌어당기는 꿈을 꾸네.

나를 끌고 물속으로….

당신은 오래 살고 싶나?

당신도 그러고 싶어?

당신은 뭐가 제일 두려워?

나는….

나는….

현선 (잠꼬대하듯) 내가 끌어당긴 게 아니야.

당신의 꿈이야.

정말 어리석어.

정말 어리석지….

사이.

문익, 침실 문을 닫고 거실로 나온다.

문익 해 뜨면 엄마 데리고 병원 가자.

문익, 퇴장.

응현, 졸린 듯 눈을 비비며 안이 보이지 않는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사이.

잠시 뒤, 다시 문을 열고 나와 현선이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현선 옆에 몸을 던지듯 쓰러져 버린다.

3장

현선 아파…. 아파….

응현 엄마? 119 부를까?

현선, 고개를 돌리며 거부한다.

현선 물 좀 줘….

응현, 현선에게 물을 먹여 준다.

겨우 들이켠다.

현선 으으… 으으… 퉤… 퉤에….

현선, 머그잔에 침을 뱉는다.

현선 헉…. 헉…. 헉….

현선, 숨을 뜨겁게 연신 헐떡인다.

현선 나 살기 싫은가 봐.

으으… 으으… 퉤. 퉤에.

한심해…. 한심한 김현선….

사이.

응현 낫게 해 달라고 빌었어?

현선 살게 해 달라고 빌었지….

응현 ….

현선 침대에 누울래. 추워….

응현이 머그잔을 받으려 하자, 현선이 응현과 멀리 놓고 눕는다.

현선 나가…. 나가서 자….

응현 엄마.

현선 ….

응현 아까 그 일 때문에 더 심해지신 거죠.

아침에 제가 그렇게 해서…. 그렇죠?

문익,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온다.

말없이 소파로 걸어가 눕고 곧바로 잠이 든다.

응현 어떻게 들어갔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어떻게 나왔는지 생생하니까 이상해요.

아무튼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분명 주변에 아무도 없었는데 어떻게 본 거예요?

그런 건 누가 미리 경고해 주긴 하는 거예요?

나중에 엄마가 죽으면 같이 죽을 것 같진 않은데, 어떻게 살 수 있을진 장담을 못 하겠어요.

하지만 내가 죽으면 엄마는 죽을 것 같아서.

…그런 것도…. 누가 미리 경고를 해줄까요?

엄마가 날 만든 거 맞죠?

근데 왜 나한테는 엄마의 아량이 없을까요.

나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사이.

현선 내일 대답할게…. 가서 자….

응현 내일이요….

긴 사이.

현선 엄마….

응현 네?

현선 그때 엄마가 바다에서 절 건져주었을 때…. 참 고마웠어요.

응현 ….

현선 분명 밤이라 안 보였을 텐데, 어떻게 본 거예요?

그런 건 누가 미리 경고를 해주는 거예요?

다시는 못 보는 건가요.

기다려주면 안 돼요?

들어오지 마세요…. 들어가지 마요….

사이.

응현 내일 대답할게요….

현선, 부스럭부스럭 이불을 휘감는다.

응현 어제 하늘 되게 이뻤다는데 우리는 못 봤네….

응현, 현선의 발을 정성껏 주무른다.

사이.

현선, 이불에서 나와 자세를 비교적 편히 눕는다.

응현 해 뜨는 거 아름답다. 보여요?

현선, 긴 숨을 내쉰다.

응현, 천천히 고개를 꾸벅이며 잠에 스며들려 한다.

현선 띄워 보내네. 저 멀리. 아주 멀리.

붙잡고 있던 것들. 스스로를 용서하여.

물길을 거스르는 듯하여도 머지않아.

이렇듯 얽혀 남아서.

같은 태양 안에 머물며.

서로의 파도를 견디며….

현선, 천천히 잠이 든다.

응현, 고개가 떨구어지고 현선의 발을 꼭 쥔 채 이불 위로 포개진다.

아침 빛이 창을 타고 두 사람을 내리쬔다.

막.

 

 

  <당선소감>

 

   화해되어 버리는 것들… 숨이 트이는 순환 같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를 붙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영광 돌립니다.

엄마. 감사해요.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엄마의 말들을 이쁜 곳에 담아 오래오래 들여다보고 싶어서였어요.

아버지. 아버지가 제 아버지셔서 살아갈 수 있었어요. 언제나 살아남는 법을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오빠. 오빠는 평생 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사람이야. 오빠는 언제나 나를 기 살게만 해.

나도 그렇게 평생 되고 싶었어. 고마워. 모든 게 오빠 덕이야.

우리 학교 교수님들. 잘 가르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학교 친구들 모두 고맙고, 사랑합니다.

세상에 좋은 희곡을 써주신 한국의 극작가님들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살다 보면 미안해, 괜찮아, 하지 않아도 삶 속에서 화해되어 버리는 것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맥락에 전혀 맞지 않는 모습을 보여도, 어떠한 관계에서는 그게 사과로, 또 용서의 신호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죠. 저는 그런 게 인간의 차마 한결같지 못한, 그래서 자연스러워 숨이 트이는 순환 같습니다.

그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고, 같이 산다는 건 그런 날의 연속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에게 상처 준 그 사람은 어떨 땐 정말 끔찍하지만, 또 그렇지 않은 면도 옆에 있다 보면 보게 된다는 일종의 기대의 가설인 것이죠.

단순히 시간의 흐름이 용서를 빚어낸다는 뜻은 아닙니다. 원인/결과, 선/악으로는 도저히 설명 불가한 숨겨진 통로의 지점이 있고, 그것이 바람직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봐준다’ 라는 말이 지닌 두 가지 의미ㅡ바라보다와 넘어가주다ㅡ를 들여다보면, 그건 어쩐지 너그러운 삶과 닮아 보입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재학


 

  <심사평>

  

  한 가족 역사, 시간 압축 통해 전복한 작가의식 발군

202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는 122편의 작품이 문을 두드렸다. 고립된 개인의 역사를 통해 우리 시대 폭력의 기원을 탐색한 작품들이 눈에 띄었고, 시공간과 사건을 정교하게 구조화한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별것이 다 대수다’는 강력한 메타포를 우화적으로 형상화한 상상력이 돋보였으나 현실과의 충돌을 더 집요하게 벼리지 못한 점이 아쉽다. ‘밤에, 그 밤에 좁아지는 도로 위에서’는 고립된 공간에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밀도 높은 연극성이 인상적이었지만 정서가 사건을 앞서가거나 이야기가 도식화되는 점들이 지적되었다. ‘0의 소비’는 애착을 느끼는 물건을 지키려는 인간과 인간성을 분석하는 인공지능 사이의 관계가 매력적이었음에도 인간성에 대한 이분법적 접근이 예측할 수 있는 결말로 이어졌다. ‘달리고 볼일’은 장애인 생존권을 전면에 다루면서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로까지 나아가는 과정이 감동을 주지만 타자화된 시선으로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주저되었다. ‘곰, 문’은 곰 사육장에서 탈출한 곰이 마을을 습격하는 사건을 배경으로 동물착취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비극성을 체감하게 했다.

‘포말’은 호텔 스위트룸에서의 하루와 한 가족의 지리멸렬한 역사를 대비시킨 강력한 역설이 안정적인 극적 구조를 만들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궤적, 어머니와 딸이 처한 조건이 전형적일 수 있음에도 시간의 압축을 통해 전복시킨 작가의식이 발군이었다. 우리는 각 인물의 최대치를 이끌어 흩어짐의 미학을 보게 한 ‘포말’을 최종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당선 작가에게 축하를 건네며, 희곡 문학의 미덕과 희망을 다시 발견하게 해 준 후보작 작가들에게도 응원과 격려의 인사를 전한다.

심사위원 : 고연옥, 오세혁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희곡 **「포말」**은 “제주도 스위트룸에서의 단 하루”라는 얇은 현재 위에, 한 가족이 수십 년에 걸쳐 쌓아온 폭력·돌봄·돈·부채감을 겹겹이 압축해서 올려놓는 작품이에요. 제목 그대로, 대사는 계속 “부글부글” 올라왔다가(술, 분노, 구토, 고백) 금세 꺼지고(침묵, 회피, ‘내일’로 유예), 다시 올라옵니다. **포말(거품/거품침)**처럼요.

아래는 장면·인물·상징을 중심으로 촘촘히 풀어볼게요.


1) 제목 「포말」이 동시에 가리키는 것들

포말은 기본적으로 바다의 거품인데, 이 작품에서는 3겹으로 작동합니다.

  1. 휴양의 거품(사치의 거품)
    제주 스위트룸, 지중해 빛 바다, 방향제, 샤인머스캣, 룸서비스, 불꽃놀이…
    “좋은 것”이 가득하지만, 이들이 그 안에서 안정되게 누릴 수 있는 건 찰나예요. 돈으로 만든 평온은 거품처럼 잠깐 유지됩니다.
  2. 갈등의 거품(술이 만든 포말)
    소주가 윤활유처럼 말을 풀어주고, 동시에 말을 망가뜨립니다.
    ‘우리끼리니까’가 반복되며, 평소 숨겼던 폭력이 “거실”로 떠오르죠.
    거품은 화려하지만 실체가 없고, 터질 때 더 지저분해집니다.
  3. 몸의 포말(구토/침/숨)
    후반부에 현선이 머그잔에 “퉤… 퉤에…” 침을 뱉고 헐떡이죠.
    “추워…” “물…” 같은 생존 언어는, 이 가족의 역사(말)보다 더 원초적인 층위로 내려갑니다.
    가족 드라마가 결국 몸으로 귀결됩니다.

2) 무대가 이미 말하는 역설: “세련된 스위트룸 vs 수수한 차림”

작품은 시작부터 정답을 깔아요.

  • 공간: 고급, 넓은 창, 라탄·실크, 방향제, 파도 소리
  • 인물 차림: 수수하고 단출

이 대비는 “우리가 여기에 있어도,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를 말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아무리 좋은 공간을 빌려도 가족의 습관(폭력/회피/서열)은 그대로 따라온다는 점이에요.


3) 구조: ‘하루’로 압축한 ‘가족사’ (1장–2장–3장–(다시 3장))

겉으로는 3장 구성인데, 텍스트 상 3장이 한 번 더 등장하죠. 오탈자일 수도 있지만, 작품 정서상으로는 오히려 이렇게 읽힙니다.

  • 같은 밤이 “다른 밤”으로 반복된다.
    거실에서의 폭발(아버지) → 침실에서의 붕괴(어머니)
    가족의 상처는 한 번 터지고 끝나는 게 아니라, 공간만 바꿔가며 반복돼요.

1장: 도착/배치/균열의 씨앗 심기

  • 현선은 빈손(주체성의 상실, ‘자기 몫이 없음’) + 어깨 떨림(이미 몸이 신호를 보냄)
  • 침실 두 개 중 관객에게 보이는 침실에 현선을 눕힘
    → “보이는 방”이 곧 병든 중심이 됩니다.
  • “마루 아니고 거실” 같은 언어 교정
    → 가족은 서로를 사랑하기 전에 먼저 교정/평가합니다. (창현의 성향 예고)

2장: 술/돈/효도의 언어가 갈등을 ‘합법화’

  • “우리끼리니까 하는 이야기야.”
    → 폭력이 가장 잘 자라는 문장입니다. 외부 윤리를 차단해버리니까요.
  • 유산/부동산 분배 이야기
    → 죽음 이후에도 가족은 “애도”가 아니라 정산으로 움직입니다.
  • 창현이 응현을 몰아붙이는 핵심 논리: “자식 도리” + “너만 자유로우면 돼?”
    → 돌봄을 ‘의무’로 바꾸는 순간, 관계는 곧장 서열이 됩니다.
  • 폭발의 클라이맥스: 문익이 현선을 질질 끌고 나와 춤을 춤
    → 이 장면은 “사랑하는 가족 여행”이라는 포장 위로, 과거의 가정폭력이 현재형으로 튀어나오는 순간이에요.
    더 무서운 건, 문익이 그걸 “웃음/농담/자랑”으로 처리한다는 점.

3장(거실): 창현의 붕괴 — ‘성공’의 내부가 이미 무너짐

  • “같이 안 잔 지 오래됐다… 욕구가 안 생긴대”
    → 창현의 핵심 결핍은 돈이 아니라 **존엄(사랑받는 감각)**입니다.
  • 탕후루/유행/권리금
    → 창현은 “시장 흐름”이라 포장하지만, 사실은 불안이 낳은 생존술이에요.
    그래서 살이 ‘쪘다/뺐다’가 단순 몸 얘기가 아니라, 불안이 몸에 축적되는 방식이 됩니다.
  • 창현이 엄마에게 쏟는 말: “긴장 좀 하고 살아요… 내일은 더 커질 거예요”
    → 이건 효도가 아니라 자기 합리화의 기도문에 가까워요.
    “내일은 더 커질 거야”는 엄마를 위한 말 같지만, 사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주문입니다.

3장(침실): 응현–현선의 밤 — ‘말’이 아니라 ‘발’로 화해를 시도

  • 현선의 문장들은 점점 원초적 단어로 줄어듭니다.
    “추워… 물… 살기 싫은가 봐…”
    → 가족사가 문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선언이에요.
  • 응현이 “엄마의 발을 주무른다”
    → 이 작품이 택한 ‘화해’는 선언이 아니라 돌봄의 구체입니다.
    (그래서 이 희곡이 잔인하면서도, 끝내 숨이 트입니다.)

4) 인물 4명의 대칭 구조

이 작품은 사실상 두 축의 대칭으로 움직여요.

문익(아버지): ‘채우는 사람’의 공포

  • 일, 돈, 술, 말로 계속 “채워야” 살아있는 타입
  • 본질적 질문을 던지지만 끝내 답은 못 얻음
    “용서 없이도 같이 살 수 있는 건가?”
    → 죄책감이 아니라 통제권 상실의 공포가 더 큽니다.
  • “임신시켜”는 충격적인데, 정확히 문익의 세계관을 요약해요.
    관계를 사건(임신/출산)으로 묶어 통제하려는 발상.

창현(아들): 아버지를 싫어하며 닮아가는 사람

  • 교정/평가/계획/정답 강박
  • 아버지를 막아 세우는 장면이 결정적이에요.
    그 순간 창현은 “아버지를 제압할 수 있는 더 강한 존재”가 되고,
    응현이 나중에 말하는 핵심 진실(폭력은 더 강한 존재 앞에서만 멈춘다)을 이미 몸으로 수행합니다.

응현(딸): ‘기록하는 자’의 칼날

  • 응현의 무기는 돈도 폭력도 아니고 **서사(글)**예요.
  • 그래서 아버지가 가장 분노합니다.
    “집에 펜 드는 사람 있으면 사생활이라는 게 없다”
    → 폭력 가해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경찰보다도 기록이죠.
  • 응현의 “아직 한 대도 못 때렸다고요”는 단순 복수심이 아니라
    힘의 비대칭을 뚫고 나오는 절규예요.
    “내가 인간으로 인정받으려면, 나도 ‘힘’이 있어야 한다”는 비참한 학습.

현선(어머니): “가만히 버티는 사람”의 역설

  • 거의 말이 없고, “추워/물”만 남지만
  • 마지막엔 가장 시적인 문장으로 세계를 정리합니다.
    “띄워 보내네… 붙잡고 있던 것들… 스스로를 용서하여…”
    → 현선은 가족 안에서 가장 약해 보이지만, 가족을 ‘흘려보낼 줄 아는’ 유일한 존재예요.

5) 핵심 주제: “용서”가 아니라 “같이 사는 기술”

작품은 “폭력을 용서할 수 있는가”를 묻는 듯하지만, 더 정확히는 이거예요.

  • 용서가 없어도 관계가 굴러가버리는 구조
  • 사과/용서의 문법이 아닌, **‘봐준다’(바라보다/넘어가주다)**의 문법

당선소감의 문장이 작품의 해설서처럼 붙어 있죠.
“맥락에 전혀 맞지 않는 모습을 보여도, 어떤 관계에서는 그게 사과로, 또 용서의 신호로 넘어가게 되는…”

즉, 이 희곡은 도덕적 결론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가족이란 시스템이 어떻게 폭력도, 돌봄도, 죄책감도 한 덩어리로 순환시키는가”를 보여줘요.


6) 상징/소품이 드러내는 ‘계급 감각’과 ‘감각의 정치’

① 향기(방향제) vs 술 냄새

  • “좋은 방향제 향기”는 계급의 안전함을 상징하지만,
    문익이 묻죠: “술 냄새 심해?”
    → 계급의 향기는 쉽게 배지만, 가족의 냄새는 더 쉽게 새어나온다.

② 샤인머스캣

  • 호화의 상징인데, 계속 “먹자”가 나오고 “엄마는 안 먹어/물”로 대비됩니다.
    → 이 집에서 ‘좋은 것’은 늘 **누군가의 생존 필요(물, 열, 병원)**를 가립니다.

③ 두 개의 침실

  • 한 방은 보이고(현선), 한 방은 보이지 않음(응현이 원래 들어간 방)
    → “보이는 고통”과 “보이지 않는 고통”의 분리.
    결국 응현은 다시 “보이는 방(엄마 방)”으로 들어와 눕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방(개인 삶)을 포기하고 돌봄의 중심으로 회귀하는 동작이에요.

7) 가장 중요한 전복: “시간 압축”이 만드는 폭발력

심사평의 말처럼, 이 작품은 가족사를 길게 플래시백으로 보여주지 않아요.
대신 한밤의 술자리에서 튀어나오는 대사와,
응현이 아버지 앞에서 “이야기”로 낭독하는 순간에
수십 년이 한 번에 압착됩니다.

그래서 관객은 “아, 이 가족은 원래부터 이랬구나”가 아니라
“지금 이 방 안에서 과거가 동시에 벌어진다”를 체감해요.
이게 연극적으로 아주 강합니다.


8) 마지막 장면의 의미: ‘화해’가 아니라 ‘버팀의 공동체’

끝은 화해 선언이 아니라 이런 이미지로 끝나죠.

  • 현선이 누워 숨을 고르고,
  • 응현이 발을 잡고,
  • 아침 빛이 창을 타고 두 사람을 내리쬔다.

즉, 이 작품의 결론은 “문익이 반성했다”가 아니고, “창현이 성장했다”도 아니고,
딸이 엄마와 같은 태양 아래에서 파도를 견딘다예요.

현선의 마지막 문장들은 시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생존 기술이에요.
“붙잡고 있던 것들을 띄워 보내며… 서로의 파도를 견디며…”

포말은 사라지지만, 바다는 남습니다.
이 가족의 말들은 터지고 꺼지지만, 남는 건 결국 몸과 돌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