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간장 항아리 / 한호연

 

 쿵,현관문이 닫힌다. 딸아이가 막 집을 빠져나가는 순간이다. 출근하는 딸아이를 배웅하느라 현관문 앞에 서 있던 나는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주방으로 간다. 그리고 잠시 집 안의 기척에 귀를 기울인다.

 딸아이의 체온이 채 가시지 않은 식탁의자에 앉는다. 아침식사를 하려는 참이다. 그러나 입맛이 없다. 시아버지가 또 변기 위에 똥을 묻혀 놓은 탓이다. 한두번 있는 일도 아니면서 그때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느낀다. 치솟는 분노에 바르르 몸을 떨기도 한다. 콩나물국에 딸아이가 절반쯤 남긴 밥을 말아 후루룩후루룩 억지로 밥알을 삼킨다. 쉰하나, 밥 힘이 곧 육체를 지탱하는 힘이란 걸 나이가 말해 주기 때문이다.

 설거지를 끝내고 막 주방을 나서려는데 콩콩 지팡이 소리가 들려온다. 콩콩, 소리가 집 안 가득 울려 퍼진다. 낮은 음계로 비눗방울 흩어지듯 울려 퍼진다. 벽과 냉장고 사이 비어 있는 좁은 공간으로 재빨리 몸을 숨긴다. 나는 벽과 냉장고 사이에 낀 샌드위치가 된다.

 “에미야.”

 나를 부르는 시아버지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다. 목소리만 듣고 어떤 땐 남편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곧 그게 남편이 아니라 시아버지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아직도 그렇게 목소리에 기운이 넘치는 걸 보니 백수를 누리겠다고 덕담 아닌 덕담들을 해댄다.

 “에미야.”

 나는 시아버지가 부르는 소리에 숨바꼭질하듯 숨어 꼼짝하지 않는다. 콩콩콩, 지팡이 소리에 맞춰 콩닥콩닥 가슴이 방망이질친다. 이 순간 몸이 번데기처럼 작아질 수 없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시아버지가 여기저기 방을 기웃거린다. 아마도 귀를 쫑긋 세운 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다그치듯 콩콩콩 나를 찾던 지팡이 소리가 포위망처럼 점점 주방을 향해 다가온다. 진군하듯 콩콩콩 다가온다. 불안과 초조가 엄습한다. 곧 숨어 있는 나를 발견할 것만 같다. 예, 있었구나, 이빨 빠진 노장군처럼 붉은 잇몸을 드러내며 배시시 미소 지을 것만 같다. 손바닥으로 진득이 땀이 배어난다. 냉장고 벽면에 스윽 땀을 문지른다. 그 순간 냉장고와 손바닥의 마찰로 삐익하며 작은 소음이 인다. 간이 콩알만 해진다.

 녹내장으로 오래전 시력을 잃은 시아버지다. 한쪽 눈에만 약간의 시력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아주 미미한 정도의. 시아버지의 표현대로라면 뿌연 안개 속에 물체가 어른거리는 정도의 시력이다. 그 거리도 정면에서 3㎝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도 자꾸 심장이 콩닥거린다. 물론 설마한다. 그러나 때론 설마가 사람을 잡기도 한다. 에미야, 밥이 끓고 있구나. 봐라, 솥단지 위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거 보이지 않니? 라고 말하던 어느 날을 생각해 보면 말이다.

 시아버지의 비릿한 체취가 바로 코앞에 느껴진다. 아니다. 바로 코앞엔 냉장고가 있다. 나는 벽과 냉장고 사이 좁은 틈 사이에 끼여 있고 냉장고 옆 벽면을 마주보고 있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린다. 아주 가까이 시아버지의 옆모습이 보인다. 소맷자락을 반쯤 걷어 올린 팔뚝에 부스럼처럼 생채기도 보인다. 손톱으로 긁은 자국이다. 딱지가 앉았던 곳을 다시 긁어댄 탓에 피가 채 마르지 않고 엉겨 붙어 있다. 피비린내가 느껴지는 듯하다. 지난밤 가려움과의 싸움이 극심했고 처절했음을 뜻한다. 대패가 있으면 쓱쓱 밀어댔으면 좋겠구나. 아마도 지난밤 역시 그랬을 것이다.

 콩. 게걸음처럼 옆으로 한걸음 더 시아버지가 냉장고 가까이 다가온다. 콩닥거리던 숨소리가 쿵쿵 북소리로 변한다. 긴장감에 이젠 손바닥뿐 아니라 온몸이 땀으로 젖어든다. 꼭꼭 숨어라. 꼭꼭 숨어라…. 종종머리 찾았네. 장독대에 숨었네. 까까머리 찾았네. 방앗간에 숨었네…. 숨바꼭질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잡히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일 뿐이다.

 “얘가 아침부터 어딜 간 게야. 에미야!”

 시아버지가 다시 콩콩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잠시 나의 시야 밖으로 사라진다. 시아버지는 이내 되돌아온다. 되돌아와서 말한다.

 “점심엔 칼국수를 먹자꾸나.”

 나는 시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눈 대신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더듬이 하나를 몸속 어딘가에 숨겨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찾을 순 없지만 내가 어디에 있을 거라는 걸 정확히 짚어내기 때문이다. 아니다. 어쩌면 시아버지는 그때 밥솥단지 위로 허옇게 김이 올라오던 그 순간처럼 나를 발견한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못본 척 음흉을 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청양고추 숭숭 썰어 넣고 고춧가루 양념장도 듬뿍 풀어 국물이 얼큰하게 끓여다오. 입맛이 통 없어서 말이다.”

 시아버지의 입맛이 없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오늘 아침상도 밥그릇이 깨끗이 비워졌기 때문이다. 반찬도 마찬가지였다. 남긴 거라곤 씹다 뱉어놓은 질긴 김치뿐이었다. 시아버지는 무언가를 먹고 싶을 때 늘 입맛이 없다는 핑계를 댄다. 에미야, 굴을 먹어야겠다. 입맛이 없구나. 굴이 노인들의 원기 회복에 좋다지 않냐. 에미야, 소간을 구워다오. 소의 간이 침침한 눈에 좋다는구나. 눈이 안 보이니 살맛도 안 나고 사는 맛이 없으니 입맛도 없지 뭐냐. 노인들은 밥숟가락 놓는 날이 바로 제삿날이란다.

 “알았쟈?”

 시아버지가 콩콩콩 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시아버지는 여전히 주방 안에 있다. 대답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목이 비틀린 풍뎅이처럼 제자리만 맴돌고 있을 뿐이다. 콩콩콩콩콩콩…. 또 14층 여자가 쫓아올라오지나 않을까 조바심이 난다. 그러나 요 며칠 14층은 잠잠하다. 방아 찧듯 콩콩대는 소리가 듣기 싫다며 하루가 멀다고 쫓아올라왔던 게 바로 엊그젠데 말이다. 그새 또 이사를 가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14층엔 사람들이 오래 머물지 않았다. 층간소음을 이기지 못하고 항의에 항의를 거듭하다 모두들 제풀에 나가떨어져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지팡이 소리가 멀어진다. 콩콩콩콩콩…. 시아버지의 방이 있는 현관쪽을 향해 멀어져 가고 있다. 보이진 않지만 귀가 그것을 감지한다.

 어린아이의 걸음마처럼 느리긴 하지만 길을 찾아가는 지팡이 소리에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다. 24평 공간이 시아버지의 손바닥 안에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못 찾아가고 못 찾아낼 공간은 없다. 시어머니가 돌아가고 이곳 아들집으로 와 13년을 쭉 같은 공간에서 살며 발로 걷고 지팡이와 손으로 더듬어 익숙해진 집이다. 보이지 않는다 해도 집 안 구석구석이 머릿속에 훤할 것이다. 

 시아버지가 집 안 지리에 훤해질수록 나는 점점 공간을 잃어가고 있다. 쓰임새 없이 보류된 공간들만이 내 공간처럼 느껴진다. 쾅. 방문이 닫힌다. 지팡이 소리도 함께 방문 안으로 사라진다. 정적이 앙금처럼 내려앉는다. 공간과 공간이 미로처럼 복잡하고 어지럽게 얽혀 있는 집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아니 꼭 그런 집이 아니더라도 그냥 낯선 집만으로도 괜찮을 것 같다. 나는 며칠 전 현관문 앞에 붙어 있던 광고지를 떠올린다. 새로 태어난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아파트 어쩌고 하며 수준으로 비교해 보라던 새로 지은 아파트 광고다. 마음이 흔들린다. 광고지 속에서 말하던 수준이란 게 어쩌면 내가 원하던 바로 그런 아파트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방으로 들어간 나는 방 안 가득 어슴푸레하게 어둠을 품고 있는 커튼을 젖힌다. 투명한 창문 너머 제라늄과 영산홍이 꽃을 활짝 피우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봄의 이중성을 생각한다. 봄은 새 생명의 계절이지만 또한 죽음의 계절이기도 하다. 환절기가 되면서 부쩍 부고 소식이 늘고 남편은 지난밤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가장 친한 친구의 아버지였고 이제 겨우 칠십 중반의 나이였다. 돌아간 분보다 무려 열일곱살이나 나이가 많지만 아직도 정정한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남편은 친구의 아버지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고 전화에 대고 혀를 끌끌 찼다.

 창문을 연다. 짠내가 훅 코를 찌른다. 화분 옆 빈 간장 항아리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다. 물론 빈 항아리는 아니다. 간장 대신 물이 가득 채워져 있다. 간장냄새를 없애려고 채워 둔 물이다. 그러나 냄새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시어머니가 쓰던 간장 항아리를 가져온 게 벌써 일년 전이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시아버지가 아들집으로 들어오면서 그동안 비워 두었던 오래된 주택을 헐값에 팔아넘기고 가져온 것이다. 주인 없는 집에서 빈집을 지키던 항아리들은 대부분 금이 가거나 깨져 멀쩡한 건 작은 간장 항아리 하나뿐이었다. 깨끗이 씻은 뒤 매실이나 담글까 해서 들고 왔는데 냄새가 지독했다. 깨끗이 씻고 닦아도 사라지지 않는 냄새였다. 창문을 열면 방으로 거실로 솔솔 풍겨 오는 간장냄새에 남편이 내다 버리라고 여러 번 성화를 했다. 그러나 간장 항아리를 내다 버리는 대신 나는 항아리에서 간장냄새가 사라지는 방법을 찾아 인터넷을 뒤지거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 방법에 대해 물었다. 

 누군가는 간장 항아리는 간장 항아리로밖에 쓸 수 없다는 비관적인 대답을 했다. 또 누군가는 항아리 속에 물과 식초를 섞어 부으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항아리 속에 신문지를 넣고 태우든가 볏짚을 넣고 태우라는 등의 말을 했다. 그러나 어느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는 베란다로 나가 수도꼭지에 연결된 긴 호수를 끌어다 화분에 물을 준다. 붉은 꽃잎이 오래오래 싱싱할 수 있도록 흠뻑 물을 준다. 간장 항아리에 가득 담긴 물도 퍼낸다. 간장 항아리를 청소하기 위해서다. 한바가지 두바가지 세바가지…. 물이 진한 갈색으로 변해 있다. 수십년 간장을 품고 있던 항아리라서 항아리에 깊숙이 배어 있던 간장이 우러나온 것이다. 그렇게 며칠씩 간장과 함께 고여 있던 물이라 냄새가 구릿한 게 무척이나 역겹다. 

 문득 간장 항아리가 웅크리고 있는 유령처럼 느껴진다. 유령 같은 간장 항아리가 어쩐지 시어머니 모습 같기도 하다. 앉은키도 꼭 그만했을 것이다. 항아리 속의 물을 모두 퍼낸 뒤 수돗물을 틀어 항아리를 닦는다. 냄새가 더욱 진하게 진동한다. 닫혀 있던 베란다 창문을 연다. 진하고 독한 것이 꼭 시아버지의 오줌냄새 같다. 늙으면 다 그런다더라. 늙으면 오줌냄새가 독해진대. 누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아마도 10년 전 캐나다로 이민 간 친구 A의 말일 것이다. 어쩌다 전화하면 시아버지의 안부부터 묻는 친구다. 아직도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그게 궁금한 것이다. 잘 지내셔. 아직도? A는 내 대답에 늘 경악하듯 놀란다. 그리곤 재차 확인하기 위해 묻는다. 연세가 어떻게 되신다고 했더라? 아흔셋. 내 대답에 A는 또 놀랜다. 세상에나! 정말 오래도 사신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나를 측은해한다.

 진하고 독한 것이 어디 오줌뿐일까. 항아리를 수세미로 싹싹 문질러 닦으며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 않나요?”

아리에 혼이라도 붙어 있는 듯 나는 항아리를 향해 말한다. 항아리 밖으로 스며나와 꼬들꼬들 말라붙어 있던 간장이 뱀껍질처럼 뚝뚝 떨어져나간다. 아 글씨, 이 늙은이가…. 차마 며느리에게는 할 수 없던 말들이 뚝뚝 간장찌꺼기가 되어 떨어져 나가는 걸 느낀다. 그렇다고 몰랐을까.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된 시어머니를 밤마다 시아버지가 성가시게 했다는 것을. 그때 시아버지의 나이 일흔여덟이었고 시어머니는 일흔여섯이었다. 

 젊어서는 바람기 때문에 속깨나 썩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아들을 늦게 보는 바람에 그 핑계로 집에 씨받이로 작은마누라를 들였던 일까지. 시어머니의 이마 한가운데 갈지자로 남은 흉터가 바로 그때 생긴 것이었다. 씨받이로 들어온 작은마누라가 남편의 사랑을 등에 업고 아침마다 세숫물을 떠다 바치라 밥상을 차려 바치라 어찌나 유세를 떨던지 한바탕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웠는데 그때 시아버지가 작은마누라 편을 들어 재떨이를 던지는 바람에 생긴. 그렇게 재떨이를 이마에 맞고 피를 철철 흘리는데도 시아버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던가. 그런데도 마지막 가기 전 시어머니는 내게 시아버지를 부탁했다. 눈이 안 보여 저래 갖고 혼자 어찌 살 수 있겠나. 니가 돌봐줘야지. 간장 항아리에 다시 물줄기를 쏟아붓는다. 간장 항아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시어머니가 흘린 눈물줄기처럼 느껴진다.

 “오늘 신문은 안 온 게냐?”

 다시 항아리에 새 물을 채우고 막 돌아서려는데 어느새 베란다 앞에 와 서 있는 시아버지를 발견한다. 숨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을 깨닫는다. 내가 어디에 있다는 것을 시아버지가 정확히 감지해버린 뒤이기 때문이다. 조금만 일찍 발견했더라면 싶다. 그랬더라면 가까이 베란다 창고 속에 숨을 수도 있었을 텐데….

 “전화라도 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 왜 신문이 안 오는지.”

 묵묵부답인 내게 시아버지가 재촉하듯 말한다.

 “신문 끊었어요, 아버님.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오늘도 앵무새처럼 나는 어제와 똑같은 대답을 한다.

 “아, 그래. 끊었다고 했지. 애비는 사무실에서 본다고.”

 물론 그것은 핑계일 뿐이다. 사실 내가 신문을 끊은 건 매일 신문을 읽어달라고 다그치는 시아버지 때문이었다. 식구들이 모두 집을 빠져나간 아침, 콩콩콩 당신의 방을 빠져나와 신문을 보지 않으면 하루가 똥 싸다만 것처럼 찝찝하다며 신문을 읽어줄 때까지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했기 때문이다.

 “하긴 늙은이가 세상 돌아가는 것은 알아서 무얼 한다고.”

아버지가 쩍 입맛을 다시며 말한다. 그게 서운함의 표현이라는 것을 나는 모르지 않는다. 치매를 앓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벌써 1년 전 끊은 신문을 자꾸 잊은 듯 되묻곤 하는 것 역시 무언가를 얻고자 조르는 어린아이의 투정 같은 것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모르진 않지만 나는 시어머니가 아니다. 작은마누라가 애를 낳지 못하고 대신 시어머니의 배 속에 씨앗이 잉태되던 순간을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행운이었다고 삼신할매에게 감사하는, 그 바람에 뿔이 난 작은마누라가 집을 나가버린 것이 하늘의 도우심이었다고 칠성님과 산신할아버지에게 감사하는 우둔하고 연약하고 맹목적인 시어머니가 아니다.

 “애비는 출근했냐? 오늘 아침엔 통 얼굴을 볼 수가 없더구나.”

 “예.”

 나는 대답한다. 지난밤 애비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장례식장에서 아침에 곧바로 사무실로 출근했다는 것까지 세세히 얘기하지는 않는다.

 “오늘은 반찬이 좀 짜드라.”

 “그러셨어요?”

 똑같은 음식을 두고도 싱겁다 짜다 말하는 시아버지의 변덕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래서 내 대답도 자연 심드렁해진다.

 “싱겁게 먹어야 한다. 그게 건강에 좋아. 아, 참. 나는 밥에 콩을 넣어다우. 검은 콩이 눈에도 좋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낮춰 줄 뿐만 아니라 치매예방까지 한다는구나.”

 “네.”

 그쯤이면 된다. 그런데….

 “계속 넣고 있는 걸요. 오늘 아침엔 상에 콩자반까지 올렸는데 콩자반 그릇을 싹싹 비우셨잖아요.”

 대답이 단답형을 넘어 서술형으로 넘어간다. 요 입이 방정이다.

 “그래그래, 그랬지. 내 정신 좀 봐라. 좀 전에 먹고서도 금세 까먹으니. 그래서 더욱 검정콩을 먹어야 한단 말이지, 껄껄껄….”

 시아버지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다. 기분이 좋다 보니 시아버지의 목소리 톤도 한층 높아진다.

“지난밤에는 어찌나 몸이 가렵던지 득득 긁다 보니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구나. 너는 자꾸 병원에서 준 연고를 바르라고 하지만 나는 연고가 싫다. 바르고 나면 끈적끈적한 게 찝찝하면서 더 가려워지는 것 같지 뭐냐. 연고를 발라서 될 일이 아니야. 그 뭣이냐 노인성 건조증이라고 했냐? 의사가 뭘 모르는 게지. 차라리 보약을 한제 먹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싶다. 원기가 부족해서 그런 게야.”

 시아버지와의 대화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한번 붙들리면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끝이 없다. 내겐 인내가 필요한 시간이다. 그러나 나는 지루함을 느낀다. 결혼식장의 주례사보다 더 지루함을 느낀다. 지루해서 하품이 나온다. 똥도 마렵다. 똥…. 아침 일찍 엄마, 하고 비명을 지르듯 나를 부르는 딸아이의 목소리에 욕실로 들어가 발견한 시아버지의 똥이 생각난다. 변기 속이 아니라 변기 위에 한방울 잘못 떨어뜨린 똥이 딸의 엉덩이와 변기 위에 짓뭉개진 채로 발견된 똥이었다. 부르르 또다시 진저리가 처진다.

 “아버님, 변기에 또 똥을 묻혀 놓으면 어떻게 해요. 애가 아침 잠결에 무턱대고 변기에 앉았다가 엉덩이에 똥이 묻는 바람에 얼마나 놀랬게요.”

 “거 참, 내가 그랬더냐?”

 수치심 때문일까. 시아버지가 콩콩콩 당신 방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 시간이 길진 않을 것이다. 오래지 않아 시아버지는 또 당당하게 당신의 방을 나와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집 안을 활보하고 다닐 것이다.

 나는 외출준비를 한다. 세수를 하고 얼굴에 스킨과 로션, 그리고 선크림 등 몇가지 화장품을 찍어 바르는 동안 나는 하늘과 구름과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광고지 속의 새 아파트 건물을 떠올린다. 뭉게구름과 구름 속을 날고 있는 새들을 떠올리고 선과 선들이 퍼즐처럼 이어진 평면도를 떠올린다. 나는 소녀가 된 듯 가슴이 설렌다. 설레는 가슴을 안고 집을 빠져나와 버스를 탄다.

 선시공, 후분양 되는 아파트는 마무리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정원수를 심느라 여기저기 땅이 파헤쳐져 웅덩이를 이루고 있고 아스팔트 콜타르로 막 포장을 끝낸 도로는 봄날의 투명한 햇살을 머금은 채 검은빛으로 반짝인다. 나는 신축 아파트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 속에 휩쓸려 모델하우스 안으로 들어간다. 막 발을 들여놓은 거실이 베란다를 확장해 놓은 탓인지 운동장처럼 넓어 보인다.

 “여기가 몇평이야?”

 누군가 묻고

 “40평.”

 누군가 대답한다. 긴 복도를 지난다. 거실과 안방 서재를 잇는 복도다. 거실을 지나고 서재를 지나 복도 맨 끝 안방 앞에 이른다. 한무리의 사람들이 안방으로 들어선다. 조금 뒤처져 나도 그들처럼 안방으로 들어간다. 안방 안의 또 다른 문을 본다. 그곳에서 나는 부부욕실과 또 하나의 방을 발견한다. 드레스룸이다. 열자쯤 돼 보이는 철제로 된 긴 수납공간이 드레스룸 벽 한면을 차지하고 있다. 나는 드레스룸이 마음에 든다. 미로처럼 느껴진다. 숨어 있기 좋은 방이라는 생각이 든다. 

람들이 다른 방을 보기 위해 빠져나간 뒤에도 나는 한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다시 한번 천천히 방을 구경한다. 묵은 때 하나 없이 깨끗하고 반짝반짝 윤이 난다. 새로움의 시작이다. 새로움은 익숙지 않음을 말하고 익숙지 않음은 불편함을 뜻한다. 시아버지에겐 그럴 것이다. 이곳의 모든 곳들이 다 미로 같을 것이다. 나는 새집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낡고 오래된, 그래서 눈을 감고도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있는 너무 익숙하고 편한 그런 집이 아닌,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투른 새집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막연한 꿈이다. 공무원인 남편의 월급으로 두 아이를 대학까지 공부시켜내는 것만도 빠듯한 살림이다. 때문에 저축 같은 건 거의 꿈도 못 꿨다. 더군다나 이제 남편의 정년도 몇년 남지 않았다. 아파트를 담보로 분양가의 70퍼센트까지 대출을 해 준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무리를 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모델하우스가 자꾸 나를 유혹한다. 이곳으로 오세요. 

 나는 신축 아파트를 나와 잠시 시계를 본 뒤 가까운 커피숍으로 들어간다. 시아버지는 한시면 점심식사를 할 것이고 그때까지는 아직 두시간의 여유가 있다. 그리고 신축 아파트로부터 집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아메리카노요.”

피를 주문하고 다정하게 햇살이 스며드는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신축 아파트에 대해 생각한다. 불가능한 희망을 가능한 희망으로 바꿔 놓을 방법에 대해 골똘한다. 그러나 가진 돈이 얼마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40평의 아파트라면…. 살고 있는 집을 팔고 얼마간 대출을 끼고 산다고 해도…. 나는 문득 시아버지를 떠올린다. 살던 주택을 판 돈이 그대로 시아버지의 수중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헐값이라도 최소 1억은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그 돈을 선뜻 내줄 리 만무하다. 13년을 함께 살아오는 동안 아이들에게 용돈 한번 준 적 없고 수고한다며 내게 옷 한벌 사 준 적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시아버지의 인색함은 일찍이 살면서 생일선물 한번 받아본 적 없다는 시어머니의 불평을 통해서도 알고 있던 터이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쉰다. 창밖으로 어디선가 날아온 하얀 꽃잎들이 눈송이처럼 휘날린다. 꽃이 지천으로 피고 햇살이 좋은 이런 날 사람들은 꽃구경도 가고 산천 구경도 가고 멀리 외국으로 세상 구경도 간다고 했던가. 친구들은 종종 그랬다. 자식들은 다 커 이제 제 볼일 보기에 바쁜 나이고 남편은 오십을 넘긴 늙은 마누라의 여행쯤 간섭하지 않았다. 

 남편을 위해 곰국만 끓여 놓는다면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여행경비는 적금을 부어 마련했다. 일년이고 이년이고 삼년이고 부어 마련한 적금으로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운명적인 사랑이 담긴 베킨오 다리를 건너기 위해 이탈리아에 간다거나 1m마다 노동자의 시체 한구가 묻혀 있다고 봐도 무방할 거라는 어마어마하게 긴 만리장성을 보기 위해 중국으로 가고, 또 유황이 펄펄 솟는다는 온천을 찾아 일본으로 갔다. 그러나 내겐 모두가 먼 얘기들이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점점 내 손길로부터 멀어져가지만 시아버지는 반대로 점점 더 내 손길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처럼 갈수록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박당하고 있었다.

몫의 삶이 시아버지로부터 유린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돈보다는 자유를 열망하던 친구는 10억이라는 유산의 유혹도 물리치고 자유를 선택하지 않았던가. 그 친구 역시 생각해보니 A다. 병든 시어머니를 모시기 싫어 재산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남편을 꼬드겨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A가 갑자기 부러워진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파트 상가 슈퍼에 들러 밀가루 한봉지를 산다. 시아버지를 위한 칼국수를 끓이기 위해서다. 상가를 나와 집을 향해 걸어가다 104동 3~4라인 건물 앞에 세워져 있는 이삿짐센터 트럭을 발견한다. 아파트 건물 위로 길게 키를 늘이며 뻗어 올라간 사다리차의 층수를 헤아리지 않더라도 나는 그것이 14층으로 오는 이삿짐이라는 걸 알아챈다. 마침 엘리베이터 안에서 14층으로 올라가는 여자를 만난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치켜들고 한층한층 올라가는 층수의 번호만 헤아리고 있는 여자의 인상이 만만치 않다. 아마도 집주인이리라 직감한다.

 “에미냐?”

 용케 문 여는 소리를 들은 듯 시아버지가 묻는다. 눈이 어두우니 귀가 밝은 것인지도 모른다.

 “점심엔 라면을 먹자꾸나.”

 시아버지의 변덕이 조석변이다. 그새 또 마음이 변해버린 것인가 싶은 생각에 헛웃음이 나온다.

 “매운 건 싫으니 국물이 허여멀건 라면을 끓여다오.”

 나는 라면을 끓인다. 시아버지의 말대로 국물이 허여멀건 라면이다. 물을 두배쯤 잡아 라면의 면발이 푹 퍼지게 끓인다. 시아버지는 면발이 꼬들거리는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치아가 성하지 않은 탓에 무엇이든 부드럽고 야들야들한 걸 좋아한다. 입에 넣는 순간 푸딩처럼 그냥 꿀꺽 삼킬 수 있을 만큼 부드러운 것을 좋아한다. 밥도 부드럽게, 콩도 부드럽게, 고기도 부드럽게, 시아버지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들 모두 마찬가지다. 때문에 나는 늘 두번의 밥을 짓고 두번의 반찬을 만든다. 보통의 밥과 부드러운 밥, 보통의 반찬과 부드러운 반찬. 마지막으로 계란 하나를 풀어 휘휘 저어 준 뒤 시아버지 방으로 들고 간다. 라면이 퉁퉁 불어 우동가락처럼 보인다. 시아버지가 기다렸다는 듯 밥상 앞으로 엉덩이를 밀며 다가온다.

 “냄새가 좋구나.”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는 시아버지의 얼굴에 헤벌쭉 미소가 번진다. 치아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붉은 잇몸만 보일 뿐이다. 갓난아기와 같은 잇몸 그대로이다. 잇몸이 가라앉아 틀니가 덜그럭거린다더니 이제 식사 때마저 틀니를 빼버린 듯하다.

 시아버지는 젓가락이 아닌 포크로 라면을 먹는다. 잘고 부드럽고 무르게 만들어진 음식을 집기가 젓가락보다는 포크가 더 쓸 만하기 때문이다. 포크를 들고 있지 않은 다른 한손엔 하얀 면장갑을 끼고 있다. 위치를 확인하느라 뜨거운 라면냄비 위에 손을 올려 놓기 위해서다. 시아버지가 얼굴을 라면그릇 앞에 바짝 갖다 대고 포크로 라면을 건져 올려 후루룩 부채살 같은 주름을 입가에 모으며 라면을 빨아들인다. 시아버지의 긴 인중을 바라본다. 인중이 길면 오래 산다더니….

 “국물에 밥을 말아 먹었으면 좋겠구나.”

 그건 딱 1초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시아버지가 구십이 넘도록 장수하는 것은 긴 인중 때문이 아니라 줄지 않는 식성 때문이라고 고쳐 생각한다. 이제 겨우 4년 남짓 남은 남편의 정년을 생각하면 시아버지의 긴 명줄에 조바심이 난다. 떠난 이의 부고장쯤 소홀히 다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밥을 가져다준다. 물기가 촉촉한 부드러운 밥이다. 나는 라면국물에 밥을 말고 있는 시아버지를 향해 14층이 또 이사를 간 모양이라고 말한다.

 “새로 이삿짐이 들어오더라고요.”

 “거, 잘됐구나. 걸핏하면 쫓아 올라와서 시끄럽네 어쩌네 하면서 괜히 생트집을 잡더니만.”

 시아버지가 반색한다. 그런 시아버지를 향해 새로 이사 오는 사람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고 말한다. 전에 살던 사람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요즘은 층간소음 때문에 이웃간에 살인도 난다던데….”

 그 말이 귀에 거슬린 탓일까. 흐흠, 하면서 시아버지가 헛기침을 한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인다. 그러다 다시 입을 연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참에 저희도 이사를 갔으면 해서요. 매번 아래층 사람들과 싸우는 것도 지긋지긋하고… 일층이라면 괜찮지 않겠어요? 아래에 사람이 없으니 지팡이 아니라 방망이를 두들겨댄다고 해도 시끄럽다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집을 새로 마련한다면 일층이 좋겠다는 건 시아버지에게 돈을 타내기 위해서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다. 생각해 보니 전혀 틀린 말도 아니다.

 “그래그래 그것도 괜찮겠구나. 일층이 좋지. 땅냄새도 맡을 수 있고. 땅냄새 맡으며 사는 게 건강에도 좋다고 하지 않던.”

 시아버지가 맞장구를 친다.

 “그래서요. 아버님이 좀 도와주셨으면 해서요. 저희가 가진 돈이 있어야 말이죠.”

 나는 말을 해 놓고 시아버지의 눈치를 본다. 시아버지의 얼굴이 금방 새침하게 변한다. 먹던 밥숟가락마저 내려놓는 것이 심히 못마땅한 눈치다.

 “내가 돈이 어딨더냐. 먹고 죽을래도 없다.”

 쉽게 열리지 않을 완고한 주머니라는 걸 예상 못한 것은 아니지만 한가닥 희망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낀다. 생일 선물 한번 못 받아 보고 평생을 살았다는 시어머니의 말이 다시금 생각난다. 어디 그뿐일까. 찢어진 이마를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해 주기는커녕 그 이마의 상처가 저절로 아물 때까지 두고두고 시어머니에게 핀잔과 욕설을 퍼부었다던 시아버지다. 독하기가 40년 묵은 간장 항아리보다 더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다리차가 14층을 향해 요란하게 돌진한다. 우우우웅- 어지러운 내 가슴 한복판을 가로지른다. 나는 시아버지 방에서 나와 활짝 열려 있는 베란다 창문을 닫는다. 집 안이 한결 조용해진다.

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는다. 짜증스러운 마음에 누군가에게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지만 이 시간 내 짜증을 받아 줄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다. 딸아이는 대학 졸업 후 막 들어간 회사의 일이 손에 익지 않아 징징거리고 있을 터이고 아들은 군대에 있으니 푸념거리가 있어도 없다고 해야 할 형편이고 남편은….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자기 아버지 편을 들지도 모른다. 그러다 잠이 든다. 아주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일어나 시계를 보다 두시간을 훌쩍 넘게 잔 걸 깨닫는다.

 나는 베란다로 나간다. 남편이 퇴근하기 전 간장 항아리를 한번 더 닦아내기 위해서다. 그래야 냄새가 덜 진동한다. 그런데 간장 항아리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항아리를 찾는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생각을 한다. 항아리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면서. 나는 시아버지 방으로 간다. 내가 없는 사이 누가 집에 왔다 갔는지 물어보기 위해서다. 살그머니 방문을 연다. 방안에서 퀴퀴한 냄새가 진동한다. 코를 큼큼거리다 없어진 간장 항아리를 시아버지 방에서 발견한다.

 “아버님, 이걸 방으로 가져오시면….”

 뚜껑조차 덮이지 않은 간장 항아리에서 올라오는 역한 냄새에 나는 코를 싸 쥔다.

 “어떠냐. 좀 크다싶긴 하지만 그래도 이게 요강으론 그만이지? 난 이제 이 방에서 꼼짝하지 않을란다. 이사고 뭐고 차라리 이게 낫겠다.”

금 전, 그러니까 내가 깜박 잠이 들었던 시간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나는 생각해 본다. 그러나 아무 그림도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잠들어 있던 내내 지팡이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것과 그 때문에 내가 깊은 낮잠에 빠질 수 있었다는 것 외엔. 그러고 보니 점심식사 후 내내 시아버지가 방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꼼짝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지팡이 없이 집 안을 활보하고 다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내가 모르게 감쪽같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멀리서 밥솥단지 위로 허옇게 김이 올라오던 순간을 발견하던 일을 생각하면.

 노을이 진다. 노을이 지면 시아버지의 방 창문은 석양을 품은 하나의 커다란 액자가 된다. 노을은 지는 노을이 아니라 타는 노을이다.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든다. 

끝.

 

 

 

 

 

[당선소감]“내 글 많이 부끄러워하며 열심히 노력하며 살고 싶어”

 숫기 없는 한아이가 있었다. 숫기 없는 아이는 집이 좋았다. 집이 좋아 누에고치처럼 방안에 들어앉아 책을 읽거나 세상에 떠도는 낱말들을 끌어 모아 퍼즐조각 맞추듯 글을 지어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나는 이담에 크면… 꿈은 거기서 멈추었다. 다음이 생각나지 않았

다. 사실은 생각나 지 않은 게 아니라 또 다른 꿈들에 접혀버렸을 뿐이었다. 아이가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된 아이는 여전히 수줍음이 많았고 집을 좋아했다. 어른이 된 아이는 어느 날 문득 책갈피 속에

묻어두었던 나뭇잎을 발견하듯 어린시절 자신이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아, 그런 꿈을 꾸었었지. 그리고 겁도 없이 가슴속에 다시 그 꿈을 품었다. 

 올해 나는 그동안 살던 오래된 아파트를 이별하고 새 아파트로 이사했다. 석양이 거실 창으로 그림처럼 다가드는 곳이었다. 나는 저녁이면 거실 창 앞에 서서 놀바라기를 했다. 노을은 아름다웠다. 아름답

지만 서쪽 하늘을 이글이글 타는 불덩이처럼 빨갛게 물들이는 순간은 자주 있지 않았다. 기다림이 허망해지는 순간이었다.

 놀바라기를 하듯 기대와 실망 사이를 오가며 세상의 단어들을 주워 모았다. 실망이 때론 절망으로 바뀌었다. 절망은 슬럼프로 이어졌고 희망은 쉽사리 찾아오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심사평]“진부한 소재 참신하게 구성, 작품마무리 작가 역량 돋보여”

 77편의 응모작품 중에서 예심을 통과한 작품은 〈2월의 서정〉〈장어를 먹는게 아니었다〉〈간장 항아리〉〈붉은 바다 거북〉〈음치〉〈쥐떼〉〈Kcl〉〈좆망둥이〉〈천종〉〈가늘고 길게〉등 10편이었다.


 삶의 현장에서 고뇌하는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다룬 작품이 많았다. 하지만 치밀한 구성과 정확한 문장으로 형상화한 작품이 많지 않아서 아쉬웠다. 무엇보다도 신춘문예 응모소설의 특성인 참신성과 패기를 담은 실험적인 작품이 없어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면이 있었다.

 작품을 정독하고 나서 〈간장 항아리〉〈붉은 바다 거북〉〈Kcl〉로 압축해 세심한 논의를 거듭했다.

〈Kcl〉은 악마 같은 양아버지에게 철저하게 망가진 여자가 유기견을 죽이는 일을 하면서 증오와 용서를 말하려고 했지만, 너무 서술적이어서 아쉬웠다.

〈붉은 바다 거북〉은 삶의 냉혹한 현실을 거북이에 비유해서 치밀하게 그렸다. 애인의 차를 타고 가면서 실패한 아버지를 회상하는 주인공의 애환을 예리하게 잘 나타냈다. 문장을 좀 더 다듬고, 이야기를 옹골차게 압축하면 좋은 작품이 될 것 같다.

 〈간장 항아리〉는 늙은 시아버지가 풍기는 고약한 냄새와 시어머니의 체취가 담긴 간장 항아리의 냄새를 애써 씻어내며 살아가는 여인의 신산한 삶을 군더더기 없이 잘 그렸다. 소재의 진부함을 참신한 시

각과 구성으로 형상화했다. 작품을 마무리하는 끝부분에서 작가의 역량이 돋보였다.

 고심 끝에 완성도가 높은 〈간장 항아리〉를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응모자 여러분께 성원을 보내며, 보다 좋은 작품 쓰기 위해 정진하시기를 바란다.

 심사위원=이광복〈소설가〉, 김선주〈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