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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고양이 / 김형준

 

 

눈을 떠도 어둡긴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분명 눈꺼풀이 위로 올라갔지만 어둠에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보이지 않는다면 다른 감각에 의존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이 소리마저도 흡수한 것 같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을 다시 뜬 다음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가슴이 답답했다. 공기가 부족해서 숨 쉬기가 어려운 것하고는 느낌이 달랐다. 가슴 부위를 뭔가가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나는 지금 엎드려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두워 보이지 않는데다가 방금 전에 정신을 차린 탓에 내가 어떤 자세로 있는 건지 확실하게 파악이 되지 않았다. 내 상태를 알아내기 위해선 몸을 움직여봐야 할 것 같았다.



일단 눈을 깜빡이면서 고개를 아래로 숙여보았다. 내 뜻대로 고개가 움직이는 걸 보니 엎드린 자세는 아니었다. 다음으로 한쪽 다리를 들어보기로 했다. 아무리 용을 써봐도 다리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뭔가에 짓눌려 있는 듯했다. 다치거나 절단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됐다면 나는 지금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을 것이다. 다리는 물론이고 어느 부위에서도 극심한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가슴이 답답할 뿐이었다.



바닥을 울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순간 심상치 않은 느낌에 걸음을 멈췄다.

“젠장, 지진이야. 아래로 내려가, 빨리!”

어떻게 건물이 무너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줄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휘청대던 두 남자의 모습… 그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다리는 그렇다 치고 두 팔은 어떤지 궁금했다.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보았다. 엄지손가락이 구부러지는 게 느껴졌다. 용기를 내서 이번엔 주먹을 쥐어보았다. 두 손 다 주먹을 쥘 수 있었다. 주먹을 쥔 채로 팔을 굽혀보았다. 익숙한 느낌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팔은 움직이는구나.”

중얼거리며 팔을 내렸다. 팔꿈치가 뭔가에 닿았다. 주먹 쥔 손을 펴서 팔꿈치에 닿은 게 무엇인지 만져보았다. 까끌까끌한 느낌인데 손으로 한 움큼 집어 올릴 수 있었다. 생각한 게 맞다면 이건 흙이었다. 모래보다는 좀 더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흙일 거라고 확신하며 나는 손을 움직여 가슴 위부터 아래로 훑어 내려갔다. 많이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손이 흙에 닿았다. 이제야 내가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 짐작이 갔다. 나는 지금 흙에 묻혀 있었다. 땅속에 묻힌 건 아니었다. 정신을 잃기 전에 겪었던 상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들통을 짊어지고 이 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들통엔 흙이 가득 들어 있었다. 집주인의 호사스러운 취미에 맞춰 이 층은 식물을 키울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집을 이렇게 지을 수 있다는 걸 부러워하면서 나는 이 층 구석진 곳에 쌓아놓은 흙더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흙더미 옆으로 양복 차림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양복과 어울리지 않게 안전모를 쓰고 있는 그가 휴대폰에 대고 목소릴 높였다.

“뭘 어떻게 했기에 그런 결과가 나온 거야? 월급 받아 처먹으면서 그 정도밖에 못하겠어?”

나이는 대략 삼십 대 정도로 보였지만 전화를 받는 태도와 분위기로 판단해보건대 사회적 지위가 높은 것 같았다. 상대방은 아마도 부하직원인 듯했다. 기껏해야 또래 아니면 서너 살 정도 차이가 날 터였다. 연상이든 연하든 간에 목소리를 높이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부모 잘 만나 어려움 모르고 자란 외동아들 티가 팍팍 났다. 나는 괜히 주눅이 들어서 어깨를 움츠린 채 걸음을 재촉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지 다시 원상 복귀해놔. 내일 이맘때까지 시간을 주겠어.”

상대방의 말은 듣지도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십중팔구 돈 문제 때문일 거라고 예상하며 나는 들통에 들어 있는 흙을 목표한 지점에 쏟아 부었다. 그저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짜증이 났다. 삼신할미의 선택에 따라 운명이 갈린다는 게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를 악물고 들통의 어깨끈을 움켜잡았다. 어차피 나하곤 상관없는 세계의 일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일 층으로 내려가 들통에 흙을 채워 나르는 것이었다. 어깨끈을 추스르며 계단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봐, 거기.”

남자의 목소리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설마 날 부른 건 아니겠지 싶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혹시 담배 피우나?”

그의 발 옆에 빈 담뱃갑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한 개비 얻어 피워도 괜찮겠지?”

방금 전에 소리를 지를 때하곤 말투가 달랐다. 상냥함이 느껴지는 말투에 나는 담뱃갑을 내밀며 그에게 다가갔다.

담배를 입에 물고 나서 그가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척 보기에도 값나가 보이는 라이터였다. 금으로 도금이 되어 있는 표면에 화려한 문양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문양은 호랑이가 포효하는 모습이었다.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 라이터를 내 눈 앞에 들이밀었다.

“그거 잠깐 내려놓고 자네도 한 대 피우지 그래?”

나는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그의 거듭된 요구에 결국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가 라이터로 직접 불을 붙여주었다. 담배를 깊게 빨아보았다. 돈 많은 인간이 불을 붙여줘서 그런지 담배가 유독 맛나게 느껴졌다.

“무겁지 않나? 내려놓으라니까 그러네.”

그가 들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괜히 들통을 내려놨다가 작업반장에게 들키면 한소리 들어야 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 나는 들통을 어깨에서 내려놓았다. 남자가 피식 소리 내어 웃었다.

“김씨 눈치 보느라 못 내려놨던 거군.”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왠지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로 인해 담배 한 개비 피울 수 있는 여유를 맛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황송할 따름이었다. 그는 공사가 늦어져서 김씨에게 재촉을 좀 해놨다고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사가 진행되는 상황을 여유롭게 살피는 것 같았다.

“이 정도 속도라면 담배 한 개비 정도는 피워도 괜찮을 거야.”

그가 이렇게 말하긴 했어도 나는 마음이 찝찝했다. 아무리 직급이 높은 사람이 괜찮다고 말했어도 결론적으로 날 혼내는 건 김씨였다. 막걸리를 한 잔 걸치고 나면 나를 버릇없고 게으른 요즘 젊은이로 낙인을 찍었다.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면 트집 잡힐 만한 짓을 하지 않아야 했다. 담배 피우는 속도가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군대는 갔다 왔나?”

뭐 특이한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올해 초에 제대했고, 지금은 마지막 남은 한 학기 등록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거라고 대답했다. 조용히 얘길 듣던 그가 꽁초를 바닥에 버렸다.

“졸업하고 나서도 힘들겠구만.”

나는 순간 이 말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던 일이 나에게도 벌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길거리캐스팅으로 스타가 된 연예인처럼 나도 혹시 이 남자 밑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런 상상에 빠져 있었다. 행복한 상상을 깨버린 건 작업반장 김씨였다. 직접 들통을 짊어지고 온 김씨가 큰 소리로 날 불렀다.

“이봐요, 김씨. 내가 잠깐 붙잡고 있었던 거니까 너무 화내지 마세요.”

흙더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들통에 들어 있는 흙을 쏟아 부은 뒤 김씨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공사 진행 속도가 너무 늦다고 한 게 누굽니까, 도련님?”

김씨의 말을 듣고 나서 내 예감이 맞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와 함께 담배를 피웠던 그는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난 도련님이었다.

“이러다가 또 늦게 되면 저만 욕 얻어먹지 않습니까?”

“알았어요. 이제 놔줄 테니까 데리고 가세요.”

그는 군말 없이 손을 들었다. 상상은 상상일 뿐이었다. 나는 마지막 한 모금을 빤 뒤 바닥에 꽁초를 버렸다. 김씨는 혀를 차며 계단으로 걸어갔다. 나도 발길을 돌려 김씨를 따라갔다. 그는 다시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쪽으로 귀를 기울이며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바닥을 울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순간 심상치 않은 느낌에 걸음을 멈췄다. 앞서가던 김씨도 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무슨 진동 같은 게 느껴졌는데.”

김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닥이 흔들렸다.

“젠장, 지진이야. 아래로 내려가, 빨리!”

말하곤 그가 계단을 향해 뛰었다. 지진이라는 걸 경험해본 적이 없는 나로선 경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안절부절못했다. 진동이 심해지자 나는 계단과 반대방향으로 휘청거렸다.

“야 인마, 거기로 가면 어떡해. 여기로 오란 말이야, 계단 앞으로 와!”

김씨의 외침을 들으면서 나는 흙더미 쪽으로 떠밀려갔다. 휘청대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흙더미 위에 쓰러졌다. 김씨는 날 포기하고 도련님을 향해 손짓했다. 그도 나와 같이 진동을 못 이기고 휘청거리는 중이었다.

언제 어떻게 건물이 무너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줄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휘청대던 두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살아 있다면 여기 어딘가에 나와 같이 흙에 묻혀 있을 것이었다. 이 층엔 흙더미가 여기저기에 쌓여 있었다. 그 정도 양이면 이렇게 몸이 묻혔다 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었다.

칠흑 같이 어두운 이곳에서 누군가를 찾으려면 소리를 질러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두려움이 먼저 밀려왔다. 목청껏 소리를 질렀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경우 느끼게 될 상실감이 나는 두려운 것이었다.

“망설이지 말자. 망설이면 안 돼.”

똑같은 말을 주문처럼 계속 내뱉은 덕분에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소리를 지르기 위해서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거기 앞에 누군가 있죠? 저 좀 도와주세요, 제발.”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아니었다. 목소리는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반가운 마음에 나는 손부터 뻗어보았다.

“저기, 계신 곳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최대한 뻗어보았지만 손에 닿는 게 없었다. 목소리의 주인공도 나와 같이 끙끙대고 있었다.

“젠장, 어두워서 어디가 어딘지 전혀 모르겠어요.”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나는 설마 그 사람인가 싶어서 누구냐고 얼른 물어보았다.

“그렇게 묻는 당신은 누굽니까? 여기서 일하는 인부라면 내 호주머니에서 나간 돈으로 일당을 받았을 겁니다.”

작업반장이 도련님이라고 부르던 그 남자가 틀림없었다. 남을 깔보는 듯한 말투였지만 이런 상황에선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웠다.

“저기, 제가 아까 담배를 드렸었는데요.”

말하자 그도 반가워하는 목소리로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았다. 어두운 곳에 있으니까 시각뿐만 아니라 위치감각까지 헷갈렸다. 나도 그와 똑같이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표정이 보이지 않아서 어떤 의미로 한숨을 내쉰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죄송하지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여쭤 봐도 될까요?”

내가 던진 질문에 그의 한숨 소리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지진이 틀림없어. 일본에서 유학할 때 느꼈던 바로 그 진동이었거든. 한국에서도 느끼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

“결국 지진 때문에 건물이 무너지고 만 건가요?”

질문을 던지자 퍽 하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지만 그가 주먹으로 흙을 내리친 것 같았다.

“내진 설계를 하자고 그렇게 주장했는데, 결국 설계 과정에서 그걸 다 빼버린 모양이야. 여기서 살아나가기만 한다면 그 자식들을 싹 다 잘라버리겠어.”

그의 목소리에선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쳐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일은 벌써 터져버렸다. 삼 층 건물이 무너졌는데 이 정도로 어둡다는 건 우리를 둘러싸고 잔해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렇게 된 상황을 떠올려보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잔해가 우연찮게 우리를 피해서 떨어진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신론자인 내가 살아남았다는 점이었다. 나는 분명 숨을 쉬고 있었다.

“이봐, 목소릴 들어보니까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은데 손이라도 좀 뻗어볼 수 없겠나? 어디쯤에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면 안심이 될 것 같은데.”

“아까부터 계속 손으로 더듬어보고 있는데, 손끝에 닿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짓말처럼 손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내 입에서 헉 하고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최대한 멀리 손을 뻗어보았다.

“혹시 제 손가락이 피부에 닿지 않았나요?”

“난 아닌데. 혹시 또 다른 사람을 찾아낸 거 아니야?”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손가락 끝에 닿은 부분을 손톱으로 긁어보았다. 기절한 상태라면 어떤 방법을 써서든 깨우는 게 좋을 듯했다.

“이 사람은 아직 정신을 차리진 못한 것 같아요.”

“잠깐 기다려봐. 라이터가 여기 어디로 떨어졌는데 말이야.”

말하며 그가 흙바닥을 훑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상황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짐작만 할 수 있었다.

잠시 뒤 그가 탄성을 내질렀다. 라이터를 찾았음에 틀림없었다. 뚜껑을 열고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작은 불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가 라이터를 자신의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 새하얗던 도련님 얼굴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나 있었다. 어쨌든 사람의 얼굴이었다.

“자네와 나 말이야, 얼마나 떨어져 있는 것 같아?”

그의 질문에 나는 팔을 쭉 뻗어도 손이 닿지 않을 정도라고 대답했다.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그가 라이터 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김씨의 얼굴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이마에 나의 손가락이 닿아 있었다. 내가 깨우려 했던 사람은 바로 김씨였다.

“이봐요, 김씨! 일어나 봐요, 어서!”

 

그의 외침에도 김씨는 반응이 없었다. 정신을 차린다고 해도 목 아래론 당장 움직일 수 없었다. 김씨는 얼굴만 빼고 목 아래가 전부 흙에 묻혀 있었다. 나는 순간 쌤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상시 날 괴롭히던 그를 떠올리면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저께 밤에도 그는 나를 술안주 삼아 면전에서 씹어댔었다.

“개보다 못한 새끼들이야, 너희들은. 그저 오냐 오냐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너희들이 진짜 가난이란 걸 알기나 하겠어, 응?”

말하곤 그가 잔을 비웠다. 바닥엔 막걸리가 다섯 통이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내가 한 통 정도 마셨으니까 나머지 네 통은 그가 마신 셈이었다. 나는 피곤해 하품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으며 그가 하는 얘길 잠자코 들어주었다.


가슴이 계속해서 답답한 가운데 고양이 울음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환청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얘기를 나누었던 그가 죽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내 앞에 있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만큼 키워줬으면 대학 등록금 정도는 당연히 자기 힘으로 벌어야지, 그게 뭐가 힘들다고 징징 짜냐, 응? 내 말이 틀리냐? 너도 같은 세대니까 뭐라고 변명을 해봐, 인마.”

나는 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말하는 젊은 세대에 나도 속하긴 하지만 내가 그에게 변명을 해야 할 정도로 잘못을 저지른 적은 없었다. 듣기 싫은 얘기도 엄청난 인내력을 발휘해서 들어주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변명을 해보라는 건지 나는 따져 묻고 싶었다. 내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내가 한마디 하려던 순간이었다.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가 손을 내저으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됐다, 됐어. 변명은 무슨 변명이냐. 넌 그래도 이렇게 나와서 직접 돈을 벌고 있는데.”

말하며 그가 바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공사현장 근처에 살고 있는 도둑고양이가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김씨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제야 눈치껏 술상을 치우고 잠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난 세 달 동안 그와 함께 술을 마시게 되면 이런 식으로 마무리를 짓곤 하였다.

공사현장 옆에 만들어놓은 임시거처에서 세 달 동안 숙식하며 일하는 걸로 계약이 되어 있었다. 숙식을 해야 하는 이유는 일종의 경비 역할도 맡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되게 힘들 거라고 예상했지만 적응하다 보니까 출퇴근보다 훨씬 더 나았다. 한 가지 문제라면 김씨와 함께 생활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일을 하면서도 들들 볶았고 술주정으로도 날 괴롭혔다. 술을 마셨다 하면 우리 세대의 잘잘못을 떠들어댔던 김씨가 지금은 흙에 묻혀 꼼짝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아무리 불러도 김씨는 깨어나지 않았다. 손톱으로 이마를 긁어보았지만 김씨는 느낌조차 없는 듯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꽉 막혀 있는 공간에서 우리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라이터도 계속 켜둘 수 없었다.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이런 일이 생길 걸 예방하기 위한 조치로 내진 설계를 하자고 했던 건데 그 썩을 것들이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거야, 젠장.”

그의 목소리가 공간 안에 울려 퍼졌다. 마치 아무 것도 놓여 있지 않은 빈 방에서 들리는 목소리 같았다. 세 명이 각자 떨어져 있는 거리를 유추해보면 꽤 넓은 공간이었다. 내진 설계가 빠졌다 하더라도 건물이 이런 식으로 무너져 내린 건 천만 다행이었다.

“여긴 그렇다 치고 일 층에 있던 인부들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목소릴 들으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대로 일 층에서도 인부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거실과 화장실, 그리고 주방과 세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짐과 가구를 모두 들여놓은 그곳에서는 마무리로 청소를 하고 있었다. 각각 식물을 키우는 공간과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인 이 층과 삼 층엔 아직 짐과 가구를 들여놓지 않았다. 만약 일 층처럼 이 층과 삼 층도 마무리로 청소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궁금해졌다. 삼 층에 들여놓은 운동기구 때문에라도 이런 천운은 생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아울러 일 층에 있던 아저씨들도 운이 좋았을 거라고 나는 확신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봐도 그들이 이 층에 있던 우리보다 안전한 곳에 있었던 셈이다. 밖으로 재빨리 빠져나갔다면 모두 무사할 것이었다.

“일 층에 있었으니까 안전하게 밖으로 나갔을 거예요.”

“그러면 다행이지. 젠장, 한 명이라도 잘못됐다간 일이 요상하게 꼬일 거란 말이야.”

내뱉은 말의 뉘앙스가 인부들을 걱정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얘길 계속 이으려는 듯 목을 가다듬었다.

“병원에서 치료가 가능한 경우라면 상관없겠지만 이번 일로 인해 사망자라도 생긴다면 골치 아파진단 말이지. 꼬투리 하나 잡아서 우리 회사를 어떻게 해보려는 것들이 주위에 깔려 있거든. 이보다 더 좋은 기회도 없을 거란 말이야.”

역시 그의 걱정은 사람 목숨보다 회사의 안위에 있었다. 그에게 조금이나마 가졌던 호의가 사라져버렸다. 돈 많은 것들은 어느 누구나 똑같을 것이었다. 저 인간에겐 나 역시도 집을 짓기 위해 필요한 일당 팔만 원짜리 소모품에 불과할 터였다.

“자네 말대로 일 층에 있던 인부들은 무사히 피했다고 하더라도 지금 내 눈앞엔 김씨가 사경을 헤매고 있단 말이지.”

말하며 남자가 라이터를 다시 켰다. 김씨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불현듯 끔찍한 생각이 떠올랐다. 김씨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이 어두운 공간에서 흙에 묻혀 있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만약 김씨가 진짜 죽었다면 나는 지금 시체와 함께 묻혀 있는 것이었다.

“젠장, 이쪽에선 도저히 손이 닿질 않아. 이봐, 다시 한 번 더 김씨의 이마를 손톱으로 긁어봐.”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손을 뻗는 것조차 주저하게 되었다. 비록 손톱일지라도 시체에 닿는 게 기분 좋을 리 없었다. 나는 주저하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뭐해? 그쪽에서 손 좀 뻗어보라니까.”

“시, 싫은데요.”

지금껏 살면서 나보다 윗사람에게 대놓고 싫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에겐 무조건 복종이었고, 군대에서도 고참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묵묵히 일만 했다. 남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살면 별다른 고민 없이 살 수 있었다. 하다못해 이 일도 아버지가 소개해준 것이었다.

제대 후 나는 대학을 그만두고 직장을 알아보려고 했다. 등록금을 대줄 정도로 여유가 있는 집안이 아니었다. 차라리 돈을 버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정리하고 나서 부모님에게 내 뜻을 밝혔다. 당연히 이해해주리라 생각했는데 반응이 아주 딴판이었다. 어머니는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대학은 반드시 졸업해야 한다고 못을 박아놓은 뒤 아버지는 지인을 통해 이 일을 알아봐주었다. 서너 달 정도 일하면 한 학기 등록금은 마련할 수 있을 거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사고 소식을 듣고 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김씨를 만지기 싫어 주저하는 마음을 접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라이터를 켠 덕분에 그의 얼굴이 어렴풋하게나마 시야에 들어왔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너, 방금 싫다고 했냐?”

“예, 싫습니다.”

흙에 묻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지금껏 나한테 그런 식으로 대들었던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

말하곤 그가 라이터를 껐다. 어둠이 이젠 익숙해졌다. 그가 숨을 쉬는 소리가 거칠게 들려왔다.

“사람은 없었지만 말 못하는 동물은 한 마리 있었지. 아주 어렸을 때 고양이를 키운 적이 있거든.”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납량특집 때 괴담을 들려주는 성우의 목소리와 느낌이 비슷했다. 어두운 건 괜찮지만 저런 얘기는 듣기 싫었다. 나는 손으로 귀를 막았다.

“하얀 털이 복슬복슬하게 나 있던 고양이였어. 새끼 때 길에서 주워온 녀석이었지. 더럽다고 쳐다보지도 않는 식구들과 달리 나는 녀석을 아주 예뻐했어.”

귀에 손바닥이 밀착되도록 힘을 주었는데도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손으로 귀를 막는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친 탓에 귀를 막을 힘도 없는 모양이었다.

“저기요, 김씨 아저씨 이마를 다시 긁어볼게요. 그러니까 그 얘기는 이쯤에서 그만하죠, 예?”

말하며 손을 뻗으려고 하는데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난데없는 웃음소리에 깜짝 놀라 나는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내가 어렸을 때 키웠던 고양이 얘기란 말이야.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잘 들어봐.”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새끼 땐 마냥 예쁘고 귀엽기만 했어. 나에게 오라고 손짓하면 군말 없이 쪼르르 달려오곤 했지. 보풀 같은 게 달려 있는 장난감을 가지고 가면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 폴짝폴짝 뛰어다니면서 보풀을 잡으려고 하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어.”

얘길 듣고 있는데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이겠거니 하면서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렇게 마냥 귀여울 것 같았던 녀석도 시간이 흐르면서 자라고 말더군. 몸만 커진 거라면 상관없었을 거야. 문제는 그런 미물도 정신적으로 성장을 한다는 점이었지. 어느 정도 자라고 나니까 슬슬 반항을 하더란 말이야. 아무리 불러도 나에게 오지 않더라고. 장난감으로 유혹해도 가르릉거리며 눈치를 보더란 말이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가슴에 무언가가 막혀 있는 느낌이 영 가시질 않았다. 다시 한 번 더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꽉 막혀 있는 게 여간해선 뚫리지 않을 기세였다.

“한두 번은 참을 만했어. 하지만 그것도 쌓이고 쌓이다보니까 결국엔 폭발하더라고. 학교를 갔다 왔는데 아무도 없는 거야. 밥하고 청소하는 아줌마도 그날따라 보이지 않았어. 평상시 같았으면 아줌마를 찾아 돌아다녔겠지만, 그날은 아줌마 대신 녀석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렀지.”

가슴이 계속해서 답답한 가운데 고양이 울음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기분 탓에 들린 환청이 아니었다. 순간 나는 공사현장 근처에 도둑고양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 도둑고양이가 이곳으로 기어들어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둡지만 윤곽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나는 눈을 크게 떠보았다. 그가 라이터로 불을 밝혔다. 그의 얼굴이 불빛에 드러났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그의 얼굴을 보았다. 얼굴이 변해 있었다. 그것은 온전한 인간의 얼굴이 아니었다. 마치 유전자의 돌연변이 현상으로 인해 생겨난 괴물을 보는 것 같았다.

“탁자 밑에 웅크려 있던 녀석을 발견하곤 냉큼 안아 들었지. 치켜세운 발톱으로 얼굴과 손등을 마구 할퀴었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 오히려 녀석을 이제야 내 뜻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매우 들떠 있었지.”

고양이를 닮은 괴물의 입가가 미소를 짓는 것처럼 위로 올라갔다. 입술 사이로 보이는 이빨이 날카롭게 빛났다.

“녀석을 품에 안고 커다란 드럼세탁기가 놓여 있는 베란다로 나갔어. 당시만 해도 그런 세탁기는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제품이었지. 거기에 녀석을 집어넣었어. 안에 갇힌 녀석은 최후의 몸부림을 치더군. 하지만 난 이미 녀석에게 유죄를 선고한 뒤였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작동버튼을 눌렀지. 기계 소리가 들리면서 녀석이 뱅글뱅글 돌아가기 시작했어.”

고양이 소리에 이어 이번엔 기계 소리가 들려왔다. 세탁기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뭔가 단단한 걸 뚫을 때 사용하는 기계 소리였다. 드르륵거리는 소리에 나는 귀를 기울였다.

“식구들은 그 일에 대해 모른 척했어. 멍청한 고양이가 세탁기 안에 기어 들어갔다가 그런 일을 당한 거라고 자신들을 속였던 거야.”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그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는 알 것 같았다. 구조대가 우리를 구하기 위해 핸드브레이커로 건물 잔해를 뚫고 있는 소리였다.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이제 알았으니까, 그만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

말하며 나는 라이터가 꺼지는 걸 보고 나서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어두워진 곳에서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명백하게 날 비웃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그런 웃음소리를 듣게 되면 기분이 나쁘게 마련이었다. 그 점에 대해 한마디 하려고 고개를 숙이는데,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멈추더니 한 줄기 빛이 구멍을 통해 새어 들어왔다. 빛은 김씨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지만, 창백하게 변한 낯빛은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여기 아래에 사람이 있어요.”

바깥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작았지만 무슨 의미인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 있어야 할 무엇이 사라졌다는 걸 나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닿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가 있던 자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 여기에 있는 잔해를 들어 올립시다. 하나, 둘, 셋!”

바깥에 있는 구조대원의 목소리가 들린 다음 조금 더 커진 구멍을 통해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시멘트 덩어리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시멘트 덩어리 표면엔 건설사 로고와 함께 화려한 문양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문양은 호랑이가 포효하는 모습이었다. 그 아래에 피가 고여 있었다.

잔해를 들어낸 구멍으로 구조대원의 손이 들어왔다. 허공을 짚던 손가락이 김씨의 얼굴을 건드렸다. 위치를 확인한 구조대원이 김씨의 목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맥박을 짚는 듯하더니 김씨가 죽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다른 사람을 찾아 분주하게 움직이는 구조대원의 손을 보면서도 나는 살려달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얘기를 나누었던 그가 죽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내 앞에 있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나도 죽었을지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이 떠올랐다. 제발 그건 아니길 바라면서 구멍이 더 커지는 걸 지켜보고 있는데, 빛이 들어와 나를 비추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질끈 감았다.

“이봐요, 눈 좀 떠봐요. 살아 있는 거 맞죠?”

구조대원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저 먼 곳에서 라이터 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 사람은 절대 갈 수 없는 곳이었다. 나는 이곳에 있는 유일한 생존자였다. <끝>

 

 

 

 

 

 

 

[소설 당선소감] 김형준 “10년째 기다려온 반가운 전화 더 좋은 글을 위해 온 힘 다해 노력”

 

매년 12월 중순이 되면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곤 했습니다. 이번엔 좋은 소식이 올 거라고 믿으며 휴대폰을 자주 확인했죠. 행여나 낯선 번호로 전화가 오면 잽싸게 통화버튼을 눌렀습니다. 혹시 기다리고 있던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얼마나 떨렸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떨림은 실망감으로 바뀌기 일쑤였습니다. 몇천만원짜리 대출이 가능하다는 전화를 수신거부로 설정해놓은 뒤, 저는 12월이 다 가도록 연락을 또 기다렸습니다. 이런 기다림이 벌써 10년째 이어지고 있었네요. 

올해에도 저는 몇 번의 대출 관련 전화를 받고 실망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좋은 소식은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슬슬 마음을 정리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별다른 기대 없이 전화를 받았고, 저는 곧 머리가 멍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떨리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기자님이 하시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당선소감을 써서 언제까지 보내달라는 얘기에 저는 얼른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원고지 70매짜리 단편소설을 쓰는 것보다 이 글이 더 어렵다는 걸 새삼 깨닫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즐거운 고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이 너무나 많이 계시네요. 

부족한 작품이나마 시간 내서 읽어주고 합평을 하기 위해 모였던 풀밭동인회 여러분, 소설을 쓰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를 작가라고 불러주었던 친구들과 홍직 선배, 앞으로 소설을 계속 쓸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님들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더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 무진장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못난 큰아들을 항상 믿어주시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이 영광을 돌립니다. 동생 형욱이와 제수씨,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조카 아련이하고도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소설 심사평] 성석제·하성란

 

“양심과 비양심, 삶과 죽음 자유롭게 넘나들며 과도하지 않게 인물 내면의 감정 흐름 이끌어”

 

역시 ‘잠수함 속 토끼’들이다. 

기민하게 움직인다. 투고작들을 읽다보면 그 해의 관심사가 한눈에 보인다. 본심 진출작은 모두 다섯 편이었다.

‘싸움소’와 ‘타조’를 읽으면서 문장과 사유에 대해 생각했다. 

‘싸움소’는 역사 속 한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웅담을 얻으려는 왜병들과 소를 이용해 위기를 피하는 기지가 흥미롭지만, 걸림돌은 바로 문장이다. 공들인 문장이라는 것은 알겠으나, 과도한 묘사 때문에 되레 선명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타조’는 ‘인간이 자동차와 같은 속력으로 달릴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하에 출발한 소설이다. ‘타조처럼 달리는 인간’이란 이미지가 선명한데, 무성의해 보이는 문장 때문에 발상 자체가 빛을 잃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필요한 한 문장, 한 문장이어야 한다. 더구나 단편이다.

‘1막과 2막 사이’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독립을 꿈꾸는 노년기의 한 여자 이야기이다. 드라마를 보듯 이야기가 무난히 흘러가는데, 특히 소설의 경우 무난함은 치명적 결함이 될 수 있다. 큰 단점이 없지만, 새롭고 개성있는 이야기들에 밀릴 수밖에 없다.

‘채널 8’은 철부지 여성 주인공의 캐릭터 때문이라도 충분히 사랑스러운 소설이다. 깊은 밤 홈쇼핑 방송에서 위안을 받고 물건을 구입한다는 설정은 요즘 시대에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 어쩌다 맞선을 보게 된 남자에게서 얼토당토 않은 이유 때문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결말 또한 무척 세련되었다. 그런데도 왜 아쉬웠을까. 경쾌함과 유머는 간직한 채 조금 코끝이 싸한 것이 있었으면, 그것도 아니라면 독자를 좀 불편하게 하는 게 있었다면 하는 게 아쉬웠다.

‘도둑고양이’를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이견이 없었다. 이 작가의 장점은 자칫 과도하게 흐를 수 있는 감정선을 잘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자가 인물의 내면을 이해하고 따라가는데 어떤 걸림돌도 없다. 경험이든 아니든 그것은 충분히 작가가 그 인물에 대해 많은 시간 사유한 결과일 것이다. 거기에 양심과 비양심, 생과 사를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자유롭게 넘나든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다음을 기약한 분들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