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거리의 마술사

김종옥

 

남우가 바닥에 떨어졌을 때 복도 창틀에 매달려 그 모습을 지켜본 수많은 학생 틈에 그녀도 끼어 있었다. 학생들은 일제히 비명을 질렀고 붙잡은 것이 무엇이든 간에 더 꽉 움켜잡았다. 창틀이나 창턱, 친구의 손이나 맞잡은 손, 아무 것도 잡지 않았던 손은 그냥 꽉 주먹이 쥐어졌다. 아마 그것은 저기서 떨어지는 사람이 순간적으로 자기 자신이라는 착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그녀는 그것이 순간적인 착각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단순히 그들 내부에서 영원히 무언가 떨어졌다든지 그날 이후 그 끔찍한 목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든지 하는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었다. 또한 그의 추락을 막지 못한 후회나 심지어는 그를 그렇게 내몬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으로 떨어졌다는 의미도 아니다. 사실은 정말로 그들 모두가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생각이 아주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남우가 공중으로 뛰어올랐을 때, 그가 분명히 무언가 실패했을 때, 자신의 시도 속에서 영원히 추락했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끔찍했고 고통스러웠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 후에 아주 기적 같은 고요가 찾아왔다. 남우가 만들어 낸 마지막 소리가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학생들은 비명을 그치고 입을 다물었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이 본 것을 기억했다. 건물 벽면에 나 있는 검은 실금, 바람에 쉴 새 없이 잎을 뒤집는 가로수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 항상 아침저녁으로 오르내렸던 육교, 그리고 우리 동네, 아파트 건물, 파란 하늘, 구름……. 그것은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떤 마법 같은 일은 분명히 그 순간에 일어났다고 그녀는 믿었다. 그것은 세상이 일순간 아주 평화로워진 것 같은 마법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남우를 내려다보는 학생들 모두가 일순간 그 세계 속에 포함되게 하는, 마치 그들 모두가 하나의 눈을 가진 하나의 영혼이 되게 하는 마법이었다.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이 본 모든 것이, 이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그것은 분명히 남우가 그들 모두를 대신해서 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들 모두가 남우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세상 전부가 떨어졌다. 그러니까 그들이 그 순간 붙잡은 것이 무엇이든 간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담배 한 대 피워도 되죠. 어차피 아줌마는 경찰도 아니잖아요.”

그녀는 가방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고는 천천히 입에서 연기를 뿜어냈다. 비스듬히 여자를 올려다보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어때요, 나쁜 학생처럼 보여요?”

너는 나쁜 학생이 아니잖니. 나는 너에 대해 알고 있단다.”

그래요?”

여자는 카멜 색의 얇은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아주 고운 빛깔이었고 원단도 좋아 보였다. 여자는 창턱에 엉덩이를 반쯤 걸친 채 팔짱을 끼고 테이블에 앉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태영이는요? 걔도 나쁜 학생이 아닌가요?”

네가 뭘 묻는지 모르겠구나.”

아줌마는 변호사시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법적인 질문이죠.”

이건 법적인 게 아니란다. 법은 그런 게 아니야.”

그럼 여기에 법은 없나요?”

?”

, 법요. 바로 여기에, 아줌마와 나 사이에 말이죠.”

변호사는 팔짱을 풀고 두 손을 뒤로 해서 손바닥으로 창턱을 짚었다.

법은 어디에나 있지. 하지만 특별히 지금 여기에 더 많이 관여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구나. 나는 변호사로서 너를 만나는 게 아니야. 너도 알겠지만, 학교처럼 좁은 동네에서는 금방 말들이 퍼지니까, 나는 태영이 엄마의 부탁으로 여기에 온 거야. 그녀와 나는 사법연수원 동기였지. 그녀는 걱정이 아주 많단다, 당연한 일이겠지. 나라도 그랬을 거야. 태영이가 나쁜 학생이냐고 물어봤지? 나는 잘 모른단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애는 아직 어린애라는 거야.”

맞아요. 그애는 어린애죠. 우리 모두가 그렇죠. 하지만 곧 어른이 되겠죠.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말이에요.”

누구?”

남우요.”

변호사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반 정도 피운 담배를 유리재떨이에 꼼꼼하게 비벼 껐다. 그러고는 가만히 재떨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줌마 말은 틀렸어요.”

어떤 말이?”

만일 아줌마가 변호사가 아니었다면 담임이 이런 면담을 허락하지도 않았겠죠.”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돼. 다시 말하지만, 이 자리는 전혀 법과 무관한 자리야.”

우는 애도 있었나요?”

뭐라고?”

아줌마가 면담한 학생 중에 우는 애가 있었느냐고요?”

없었다. 네가 한번 대답해보렴. 그날 울었던 애가 있었어?”

있었죠.” 그녀는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아이들 대부분은 그런 걸 본 적이 없을 테니까요. 무서워서라도 울었겠죠.”

너는 어땠어?”

제가 울었느냐고요?”

아니, 너는 그런 걸 본 적이 있어?”

죽은 사람요? 아님 죽는 거요?”

어떤 거나.”

그녀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변호사를 바라봤다. 플라스틱 일회용 라이터를 손에 쥐고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남우가 걷는 모습은 조금 이상했다. 딱히 뭐가 이상한지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아마 이것이 가장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마치 기계 같았다. 그래서 어떤 아이들은 그를 로보캅이라고 불렀다. 물론 실제로 부른 것은 아니다. 그애를 로보캅, 하고 부른 것은 아니다. 남우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그럼 대체 그애에게 뭔가를 하라고 하거나 하지 말라고 할 때, 아이들은 그를 어떻게 불렀을까? 그녀는 잘 몰랐다. 다만 아주 오래전에 남우야, 하고 부르던 자기 목소리를 기억했다. 그때 그들은 바닷가에 있었다. 그녀는 까르르 웃고 있었다. 아이들 특유의 날카로운 고음의 웃음이었다. 하지만 남우는 그렇게 웃지 않았다. 남우는 잘 웃지 않았다. 눈도 잘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남우야, 하고 불러도 잘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면 그녀는 계속해서 남우야, 남우야 하고 불렀다. 어른들이 그런 그들을 돌아봤다. 남우야, 희수가 부르잖니? 거들어 준다. 남우야, 하고 어른들도 그애의 이름을 부른다. 그래도 남우는 돌아보지 않는다. 그녀는 계속해서 계속해서 그애의 이름을 불렀다. 지치지도 않고,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채, 처음과 똑같이 아주 신나는 일이 있다는 듯, 네가 그 일에 꼭 필요하다는 듯. 마침내 남우가 돌아본다. 그녀를 쳐다본다. 결코 웃는 얼굴은 아니었다. 미소라고 부를 만한 어떤 것도 그애의 얼굴에 나타나 있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그애가 즐거워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만이 남우의 미소를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가짜 기억이다. 그렇게 어렸을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 리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기억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만들어졌다. 사진은 바닷가에 쪼그려 앉은 두 아이를 담고 있다. 그러니까 완전히 가짜 기억만은 아니었다. 그 둘은 머리를 맞대고 모래 위에 있는 무언가, 아니면 그냥 모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진 속에 남우의 옆얼굴이 살짝 보였다. 그녀는 그애가 사진 속에서 어떤 표정인지 알아보려고 오래도록 살펴보았다. 몇 장의 사진이 더 있었다. 그녀의 가족과 남우의 가족이 함께 떠난 여행이었다. 여행은 그 한 번뿐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그 후로 남우 가족과 여행을 가거나 하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 그들에 대해 말하지도 않았다. 어째서일까?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찍은 사진들, 어른들과 함께 찍은 단체 사진, 그 안에서 남우는 무표정했고 표가 나지는 않지만 미묘하게 다른 데를 보고 있었다. 분명히 몇 번인가 이쪽을 보라는 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그녀는 바닷가의 그 사진 속에서, 단둘이 머리를 맞댄 그 사진 속에서만 남우가 웃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그녀는 교실 칠판에서 어떤 낙서를 보았다. 그것은 한자로 사내 남()자와 비 우()자를 적어넣고 그 옆에 영어로 레인맨(Rain Man)이라고 적어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구름에서 비가 내리는 그림을 덧붙였다. 남우 = 레인맨. 아주 단순하면서도 재치 있는 발견이었다. 그것을 본 아이들은 와아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이것은 레인맨이라는 영화에 대한 것이다. 영화에서 레인맨이라는 캐릭터는 자폐증을 앓고 있다. 우스꽝스럽게 걷고, 우스꽝스럽게 말하고, 우스꽝스럽게 행동한다. 그녀도 웃고 말았다.

남우는 계속 걷고 있다. 로보캅. 레인맨. 하지만 아이들이 실제로 그 이름을 부른 것은 아니었다. 아무도 그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그애를 불렀을까? 학교 복도에서, 교실의 뒤편에서, 커다란 전신 거울이 있는 계단에서, 육교 위에서, 보도에서, 아파트 건물 사이로 난 길 위에서, 남우는 계속 걸었다. 그녀는 그런 남우의 뒤편에서 걷고 있다. 그녀는 남우야, 하고 부르던 자기 목소리를 기억했다. 그것은 언제나 그녀의 가슴과 목 사이에서 맴돌았다. 그래서 남우는 멈추지 않았다.

 

남우는 왕따는 아니었어요. 그냥 친구가 없었을 뿐이죠. 맞아요. 그게 왕따의 본래 뜻이죠. 하지만 조금 달랐어요. 심한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죠.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친구가 없는 게, 아무도 말 걸어주지 않는 게 이미 너무 괴로운 일이었을까요? 하지만 그건 잘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세상에는 그냥 괴로운 일과 더 괴로운 일이 있겠죠.

남우는 좀 이상한 아이였어요. 자폐증 같은 면이 있었죠. 확실히 자기 세계에서 잘 나오려 하지 않는 아이였어요. 하지만 완전히 자폐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그냥 심하지 않은 자폐, 아주 조용하고 말이 없는 아이 그 중간께에 있었을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친구가 없다는 게 그애에게 확실히 괴로웠던 일인지 아닌지 잘 판단할 수가 없어요.

 

아이들이 그애를 괴롭히지 않은 데는 그런 면이 크게 작용을 했다고 봐요. 그애가 좀 아프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죠. 아이들은 그애를 교실 한구석에 놓인 신발장이나 청소도구함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무도 그런 가구를 괴롭히지는 않잖아요. 그애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아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보이지 않았다고 해도 될 정도예요. 이건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어떤 아이들은 그애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지 몰라요. 다른 데서 만났다면, 사진이나 뭐 그런 데서 보았다면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항상 남우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니까요, 아무도 그애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었어요.”

어쩌면 그애는 그런 걸 바랐는지도 모르겠구나.”

뭘 바라요?”

자기 세계 속에서만 사는 거. 단단한 껍질 안에, 마치 달팽이처럼 말이지.”

달팽이라고요?” 그녀는 웃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가 그렇게 얘기한 게 아니니.”

그랬죠.”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맞아요. 우리가 남우를 따돌린 게 아니라 남우가 우리를 따돌렸다고 볼 수도 있겠죠. 그애가 그걸 바랐다고요.”

그녀는 변호사를 바라봤다. 변호사는 이제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돌려 여름 햇볕으로 환한 창을 바라보았다. 그런 채로 그녀는 말했다.

가끔 세계에 대해 생각해요.”

세계?”

아까 말씀하셨잖아요. 남우가 자기 세계 속에서만 살길 바랐다고요.”

그랬지.”

하지만 아줌마도 아시잖아요. 그런 건 그냥 하는 말일 뿐이라고요. 자기 세계라느니 하는 말. 그렇지 않아요? 세계는 저기에 있는 거지, 자기 안에 있는 게 아니에요. 누구도 그럴 수 없어요.”

그럼 너는 남우가 괴로웠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테이블에 올린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변호사님.”

.”

변호사님은 신이 존재한다고 믿으세요?”

종교가 있느냐고 묻는 거니?”

아니요. 그냥 신이 있는 걸 믿느냐고요.”

그게 무슨 차이가 있지?”

저는 종교가 없지만, 신이 있다고 믿어요.”

이건 남우에 관한 이야기니?”

이건 신에 관한 이야기죠. 우리가 보는 모든 것에 관한.”

 

그녀는 교실 앞쪽 창틀에 몸을 기대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운동장에는 아이들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 채 공을 쫓고 있다. 공이 공중으로 높이 솟아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면 아이들은 그 주위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다시 모였다가 흩어졌다. 마치 영원히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영구 기계처럼.

오래전에 청소시간은 끝났다. 책상 줄도 잘 맞춰져 있고, 바닥에 떨어진 휴지도 없고, 칠판도 깨끗하게 닦여져 있다. 주번은 그녀에게 나갈 때 문을 꼭 닫고 나가라고 당부한다. 누구 기다려? 가방을 들고 마지막으로 교실을 나가면서 그가 묻는다. 그녀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녀는 문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주번의 마지막 표정을 떠올렸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하지 않는다.

그림자가 점점 더 길어졌고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공을 쫓는 아이들의 숫자도 줄어들었다. 그건 마치 아이들 자체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어쩌면 숫자를 미리 세어뒀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아니, 누군가는 항상 그 숫자를 세어두지 않았을까? 그 숫자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항상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남우는 주번이 마지막으로 나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열린 문 앞에. 교실 앞 공간에서 그녀와 가장 멀리 떨어진 지점에. 그녀는 남우를 보고 빈 책상과 걸상을 보고 다시 남우를 보았다. 남우는 언제나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그애가 뭘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남우가 왜 그 자리에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교실에는 두 사람뿐이었므로. 한순간 남우가 자신에게 말을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중에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남우야,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남우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봤다. 그러곤 곧바로 돌아섰고 문을 통과해 교실을 나갔다.

그녀는 창문을 닫고 천천히 교실 앞 공간을 가로질러 문 있는 데까지 갔다. 그리고 다시 한번 텅 빈 교실을 둘러보았다. 어쩐지 아이들이 있을 때보다 교실은 작아 보였다. 고개를 내밀고 복도를 살펴보았지만 이미 남우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그 자리에서 정말로 남우를 본 건지 확신할 수가 없어졌다. 잠시 후에 어쩌면 남우가 뭔가를 찾으러 교실에 왔다가 자신이 있어서 그냥 돌아갔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듯한 추측이었다. 내가 있어서 그냥 돌아갔다. 그녀는 남우의 자리에 가서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서랍도 텅 비어 있었다. 그애가 찾고 있었던 게 뭐였을까? 그녀는 다시 교실 앞으로 돌아와 창가로 다가갔다. 어느새 노랗던 태양빛은 사라지고 땅에는 잿빛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공을 쫓는 아이들이 남아 있었지만, 어스름 속에 공은 잘 보이지 않았고, 그런 그들의 모습은 마치 환영과 함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나쁜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 모습마저도 마치 눈 깜박할 사이에 지워진 것 같았다. 그 숫자를 헤아리던 누군가와 함께. 그녀는 나가면서 교실 문을 닫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지.” 변호사가 말했다.

그래요. 아줌마도 이미 다른 애들에게 들으신 거죠.”

안나 얘기 말이지?”

안나를 만나보셨나요?”

아니. 그애는 면담을 거부했단다. 그럴 시간이 없다는 이유였지.”

말도 안 되지 않아요?”

면담을 거부한 거? 글쎄, 내가 보기에 정말 바쁜 것 같던데. 학교에도 잘 나오지 못할 정도라면 어디서 그애를 만나볼 수 있겠니?”

아뇨. 그 소문 말이에요.”

여러 소문이 있었던 것 같더구나.”

안나가 그애를 좋아한다는 소문도 있었죠.”

정말 그랬었니?”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안나는 같은 여자가 봐도 정말 예뻤어요. 하지만 그게 전부였죠. 그게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였어요. 그런 면에서 보면 둘은 공통점을 가진 셈이었죠. 우리는 남우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게 없었거든요. 아니, 어쩌면 이 말을 반대로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우리는 그 둘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고 있다고요. 모두가 남우가 어떤 애인 줄 알았죠. 안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아줌마도 나보다는 안나에 대해 더 많이 알 거예요. 아주 가끔 그애가 학교에 올 때면 아이들은 그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어요. 쉬는 시간마다 1학년 애들이, 다른 반 학생들이, 선배들이 그애를 보려고 교실 앞에 줄을 섰죠. 그애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행동했어요. 우리가 티브이에서 보았던 익숙한 모습 그대로요. 그게 어려운 일이었는지 쉬운 일이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어려운 일이었다 하더라도 참을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그 시간은 항상 짧았으니까요. 그러나 남우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애는 가장 심하게 괴롭힘을 당한 날에도 끝까지 교실에 남았죠. 그건 쉬운 일이었을까요? 안나는 우리 반 애 중 몇 명이나 바깥에서 만나게 되면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이건 정말 웃기는 일이죠. 우리 반 애 중 몇 명이나 바깥에서 만나게 되면 남우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하지만, 장담컨대 안나는 남우를 알아볼 거예요.

이런 건 마치 동화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안나가 항상 출연하는 티브이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우리는 안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전혀 모르게 되었죠. 남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상황이 달라졌죠. 안나가 수업 중에 손을 들었어요. 모두가 그 손을 바라봤죠. 남우를 제외하고 말이죠.”

 

선생은 칠판에 쓰기를 멈추고 안나를 바라본다. 그녀가 일어나서 칠판이 잘 안 보이는데 앞으로 자리를 옮겨도 되겠느냐고 묻는다. 그녀의 자리는 교실 뒤쪽에 있었다. 선생은 앞쪽의 자리들을 죽 둘러보았다. 안나는 손가락으로 어떤 자리를 가리켰다. 남우의 옆자리였다.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깜짝 놀랐는데 그 이유는 이상한 것이었다. 아이들은 남우의 옆자리가 비어 있다는 걸 그 순간 처음 안 것 같았다. 마치 안나가 가리키는 순간 거기에 빈자리가 생겨난 것처럼.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고 안나는 책과 노트를 들고 그 자리로 걸어갔다. 희수는 그날의 그 이상한 분위기를 똑똑히 기억했다. 그녀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안나가 남우의 귀에 대고 무슨 말인가를 건네던 순간이었다. 그것은 수업 중에 흔히 옆자리의 아이에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남우는 칠판을 바라보고 고개를 숙여 자기 책상 위를 바라보고 다시 칠판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아주 미묘하게 고개를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아이들 모두가 그것만 바라보고 있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안나는 다시 남우의 귀에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 다음에 남우가 뭐라고 그녀에게 말하는 걸 아이들은 보았다. 심지어 남우가 그때 웃고 있었다고 말하는 학생도 있었는데, 그 아이가 앉은 자리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선생은 몇 번이나 들고 있던 책을 교탁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은 학생들을 바라봐야 했다. 오늘은 이상하게 조용하다고 선생은 생각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남우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갔다. 아이들은 교탁이 놓인 단상을 지나 앞문을 향해 걸어가는 남우를 보았다. 그들은 마치 처음으로 남우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약간 움츠린 채 이상하게 걷는 남우를.

다음 수업 시간에도 안나는 남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점심시간이 지난 후에야 남우의 옆자리는 비게 되었다. 이전에 항상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자리가 비어 있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인 것 같았다. 아이들은 그런 생각이 분명히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아주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는데, 얼마 후에 그것이 불쾌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남우의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는 게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런 불쾌감을 가장 먼저 직접적으로 표현한 사람이 태영이었다. 이 말의 의미는 태영이가 두 번째는 아니었고, 세 번째도, 마지막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녀는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태영이를 잘 아세요?”

어떤 질문인지 모르겠구나.”

태영이 어머니와 친구 사이시라면서요. 태영이가 어렸을 때 보고 그러시진 않았나요?”

그렇진 않단다.”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시군요.”

변호사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시겠지만 태영이는 문제아가 아니었어요. 성적도 상위권에 속했고 선생들이 싫어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잘 나갔죠. 여학생들에게 인기도 많았어요. 그애에게는 묘하게 여성적인 면이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뒷자리의 아이들과 잘 어울렸죠. 같이 밤에 놀러다니기도 하고. 대학생 여자친구가 있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심지어 그 여자친구가 외제차를 갖고 학교 앞에서 기다렸다는 말도 있었는데 그냥 소문이었을지 모르죠. 아님 친누나였거나. 그애를 부러워하는 남자애들도 생겨났죠. 그애가 돈을 꿔달라고 하거나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한 적은 없었지만, 눈에 띄지 않게 무언가를 시키는 수는 많았죠. 옆 반에 가서 체육복 좀 빌려다 줘. 매점 가는 길에 빵 좀 사다 줘. 그러면 웬만한 아이들은 그 말을 들어줬어요. 그게 전혀 기분 나쁜 일이 아닌 것처럼.

그래서 어느 날 쉬는 시간에 태영이가 남우를 쳤을 때 아이들은 깜짝 놀랐죠. 그냥 쳤다고요. 남우가 책상에 앉아 있는데 그 옆을 지나다가 마치 남우가 인형이나 마네킹이나 된 것처럼. 그애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내리쳤어요. 그러고는 그냥 계속 가던 길을 걸어갔어요. 많은 아이가 그 장면을 보지는 못했어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쉬는 시간의 교실이란 정신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금방 교실 안에 있는 모든 아이가 무슨 일인가 방금 일어났단 걸 알게 되었죠. 뭐야, 뭐야. 이런 수군거림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왔죠. 남우는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꼼짝도 하지 않았죠. 나중에 태영이가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다른 친구에게서 전해 들었는데, 그냥, 이라고 했다더군요. 그럴 작정으로 그애 곁으로 걸어간 건 아니라고요. 그냥 걸어가다 문득 보니 남우가 보였고 그냥 그러고 싶었다고.”

그냥이라고?”

. 그냥.”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게 시작이었죠. 태영이의 행동이 안나와의 소문 때문인지 아닌지는 몰라요. 그 다음 계속해서 일어났던 일들이 태영이의 그냥때문인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죠. 분명한 건 아이들이 남우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전혀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는데, 아니 너무나 눈에 띄어서 자기들과는 상관없는 존재라고 여겼는데 갑자기 남우가 자기들과 같은 교실 안에 있다는 걸 아이들이 절절하게 느끼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남우가 여기에 있다고요. 하지만 분명히 그애는 자기들과 달랐죠. 그건 이미 알고 있었어요. 남우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교실에서 안나와 같은 존재였죠. 사실 안나를 싫어하는 애들도 꽤 있었어요. 하지만 어쨌든 안나는 우리 교실에 없었죠.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세계는 여기에 없었어요. 바깥세계, 연예계라는 곳에 있었죠. 똑같은 의미에서 남우의 세계도 여기에 없다고 아이들은 생각해왔어요. 하지만 그 생각을 수정해야 했죠. 왜냐하면 남우는 항상 교실에 있었으니까요. 안나와는 달랐어요. 그애의 세계가 다른 곳에 있다 해도, 아이들은 그게 어딘지 몰랐죠.

처음에는 분명히 아이들은 남우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던 것 같아요. 다르게 말하면 그애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몰랐다고나 할까요. 아이들의 생각 속에 그애가 들어왔는데, 왜 그런지 몰랐죠. 그애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는데,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죠. 그러나 금방 알게 됐어요. 혼란스러움이 걷히고 망설임이 사라졌죠.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을 아이들은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건 증오였죠.”

그녀는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아무도 왜 그렇게 됐는지 설명할 수 없었어요. 태영이의 말처럼 그냥 그렇게 됐다고 말할 수밖에……. 왜냐하면 남우는 아무 짓도 안 했거든요. 그애는 그대로였어요. 이전과 어떤 것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아니, 이건 틀린 표현일 거예요. 그냥은 아니겠죠. 뭔가 이유가 있을 거예요. 또는 이유가 너무 많아서 어떤 게 진짜인지 헷갈리는지도 모르죠. 모든 게 이유가 됐죠. 안나와의 소문이나, 태영이와의 일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남우라는 존재 그 자체 말이에요. 더 중요한 건 아무도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마치 처음부터 모두가 그애를 싫어했던 것처럼 굴었어요. 이유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분명했죠. 갑자기 뭔가가 생겨났는데, 그건 이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웠어요. 마치 바람이나 햇볕처럼 말이죠.”

 

숲 속에서 그녀는 남우를 기다린다. 장대같이 가느다랗고 키 큰 나무들이 그녀의 모습을 아파트 뒷길로부터 가려주고 있었다. 언제 비가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젖은 흙냄새가 났다. 남우가 오자 둘은 숲의 안쪽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녀는 한 손에 불이 붙은 담배를 들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 불빛이 너무나 환해져서 길에서 보일 것 같았고, 그녀는 멈춰 서서 적당한 바위 위에 앉아 마지막 한 모금을 빨고 바닥에 비벼 껐다. 남우는 한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뭔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건 그냥 그애의 평상시 버릇이었다.

그날 남우는 거리의 마술사에 대해 얘기했다.

거리의 마술사?” 그녀가 물었다.

. 거리의 마술사.

그가 뭘 했는데?”

마술을 보여줬지. 남우는 말했다.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일어나게 했어. 남우는 그가 보여준 마술을 그녀에게 얘기해 준다. 카드를 맞힌다든지, 카드를 순간적으로 다른 카드로 바꾼다든지, 비어 있는 콜라 캔을 다시 채운다든지, 사람의 마음을 읽어서 그가 떠올린 숫자나 물건의 형상을 맞힌다든지, 또는 아주 조금이지만 공중에 뜬다든지…….

공중에 뜬다고?”

. 발이 지면에서 떨어져 그렇게 높게는 아니지만, 또 그렇게 오랫동안은 아니지만, 공중에 떠 있었어.

그건 놀라운 걸.”

모든 게 놀라웠어.

하지만 그건 마술일 뿐이야. 속임수야. 그냥 그렇게 보이게 만든 것뿐이야.”

그래?

. 그건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야.”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보였는데.

그건 그 사람이 아주 뛰어난 마술사라서 그래.”

그럼 너도 그렇게 할 수 있어?

연습하면 몇 가지는 보여줄 수 있겠지.”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래 너도 할 수 있어.”

남우는 말이 없었다. 아마도 그가 보여준 마술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냥 그렇게 보이게 만드는 것.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일어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 그게 마술이었다.

남우야.” 그녀가 말했다. “아까 학교에서 널 봤어. 어떤 아이들과 같이 있었지. 멀리서 봐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몇 개의 이름을 남우에게 들려줬다.

그애들이 맞아?”

몰라.

남우야.”

학교를 그만둬. 네가 꼭 이 학교에 있을 필요는 없잖아?”

남우는 여전히 말없이 서 있었다. 물론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었고 마지막도 아닐 거라는 걸. 마치 간빙기처럼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어떤 종류의 평화가 주어진다는 걸. 그녀는 세계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세계에는 항상 공을 쫓아 달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헤아리는 누군가. 남우는 걷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고개를 숙이고 기계처럼 딱딱한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로. 남우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봤다.

그럴 필요가 있어.

?”

남우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둠에 가려 그것을 또렷하게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남우에게 다가갔다. 남우는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내가 마술을 보여줄게.

무슨 마술?”

마술. 속임수. 실제로 일어난 게 아니지만 일어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

그러고는 남우는 뒤돌아섰다. 나무들 사이를 뚫고 길로 나아갔다. 숲을 빠져나갔다.

어른들은 말하죠. 왜 도움을 청하지 않았느냐고요. 맞아요. 도움을 청했어야 했어요. 만일 나였다면 그렇게 했을 거예요. 저는 견딜 수 없었을 거예요. 물론 완전히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아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다고요. 하지만 한번 왕따를 당한 아이는 금방 얘기가 전해져요. 요즘에는 뭐든지 빠르죠. 비밀이 없어요. 대안학교 같은 것도 있죠.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히 방법이 있었을 거예요. 어딘가 아주 안전한 곳이. 마치 기적처럼 평화가 가득한 그런 세계가 어딘가 있겠죠. 비꼬는 말이 아니에요. 누군가, 어떤 힘이, 선한 힘이 그런 장소를 만들고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영원히는 아니죠. 완전히는 아닐 거예요. 하지만 어떤 불합리한 괴롭힘이, 이해할 수 없는 증오가, 무지막지한 악()이 존재한다면 그 반대도 존재할 테니까요. 우습죠. 저는 이 일과, 그애에게 일어났던 일과…….”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무언가를 참아야 했다.

그래요. 저는 이 일을 겪으면서 오히려 선()에 대한 확신이 생겼어요. 악을 통해서 선을 보는 거죠. 어디선가 악은 악을 바라보는 그 눈 속에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건 그 반대의 경우죠. 선은 악을 바라보는 눈이 없으면 볼 수 없어요. 악을 통하지 않으면 볼 수 없어요. 모든 게 그 눈 속에 있죠. 하지만 그 눈은 언제나 속고 말아요. 진실을 보지 못하죠. 마치 마술을 보는 것처럼. 우리는 그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란 건 알지만, 눈은 몰라요. 하지만 그럭저럭 넘어가요. 저건 속임수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런 게 몇 번이나 반복되죠. 계속해서 계속해서. 그땐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 버려요.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조차 확신할 수 없어요. 나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 버려요. 자기 자신이 뭘 했는지, 뭘 하고 있는지, 앞으로 뭘 하면 되는지. 그런데 어떻게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겠어요? 이건 남우에 대한 얘기가 아니에요.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죠. 사실 도움을 받아야 했던 건 남우가 아니라, 우리였어요. 반 아이들이었죠. 아시겠죠? 그러니까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능했죠.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장소. 변호사님은 그런 걸 상상할 수 있나요?”

잠시 후 변호사가 말했다.

그건 법적인 질문이니?”

그녀는 웃었다.

물론 아니죠. 이건 법에 대한 얘기가 아니에요.”

그럼 신에 관한 얘기겠구나.”

아뇨. 그냥 마술사에 관한 얘기죠.”

마술?”

칼에 대한 얘기를 들으셨을 거예요. 그리고 피도.”

그래. 아이들은 칼을 봤다고 했지.”

. 저도 봤어요. 남우가 들고 있었죠.”

 

그녀가 맨 먼저 본 것은 남우가 교실 앞문에 서 있는 모습이다. 마치 어느 날인가 청소가 끝나고 혼자 교실에 남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돌아섰을 때 보았던 그 모습처럼. 그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교실이 아이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날처럼, 남우를 보고 교실의 아이들을 보고 다시 남우를 보았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왜 그런지는 몰랐다. 남우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볼 거란 생각을 했다. 아니, 그러기를 바랐다. 남우를 끌고 그냥 교실을 나가고 싶었다. 바닷가, 두 아이가 모래사장 위에 머리를 맞대고 쪼그려 앉아 있다. 그곳은 어디였을까? 그녀는 비로소 그때 그 둘이 모래사장 위에서 뭘 보고 있었는지 기억해 냈다. 남우가 교실로 들어왔다. 그녀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곧장 자기 책상이 있는 데로 가더니 서랍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한 손으로 쥘 만한 무언가. 그녀는 갑자기 교실 안이 시끄러워진 것처럼 느꼈는데 재빨리 훑어봐도 특별히 그럴 만한 일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어쩐지 신경이 날카로워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남우는 그것을 손에 쥐고 천천히 교실 뒤편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시선이 조금 더 빨리 목적지에 도달했는데 거기에는 태영이가 발을 걸상 위에 올려놓고 책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등을 보이며 앉아 있었다. 그는 옆 책상에 앉아 있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누구였을까? 나중에 그 장면을 떠올려봐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남우가 태영이를 노리고 있다고 느꼈던 건 확실히 기억났다. 그 다음에 남우가 태영이가 앉은 책상을 발로 민 것. 태영이가 책상과 함께 밀려 휘청대며 바닥에 떨어질 듯하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았던 것. 책상은 넘어지고 그 안에 담겨 있던 것들이 바닥에 차라락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그 소리는 확실히 다른 아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큰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물러서는 소리. 의자와 책상이 끌리는 소리. 그런 모든 소리가 사라지자 단단한 침묵이 드러났다. 그 침묵은 벌어진 상처 안에 있는 뼈와 같아서 조금만 건드리면 비명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처음에 태영이는 남우의 손에 들린 칼을 보지 못했다. 그녀가 맨 먼저, 마치 손 그 자체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하얀 칼날을 보았다. 하지만 그건 아까 남우가 책상 서랍에서 꺼낸 것이었다. 그건 날을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종류의 칼인 것 같았다. 태영이 오른팔을 뻗어 남우의 머리를 노렸으나 생각만큼 빠르지 않았다. 남우는 허둥대지 않고 거리를 벌렸다가 다시 좁혔다. 남우는 왼손을 들어 태영의 시야를 방해하면서 오른손을 허리 아래쯤에 두고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주변의 누구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 태영이는 여전히 남우의 오른손을 보지 못했다. 다시 헛되이 태영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아이들이 조금 더 뒤로 물러섰다. 그 바람에 책상 하나가 더 쓰러지고 의자 끌리는 소리가 다른 어떤 소리를 묻어버렸다. 하지만 그 소리는 조금 있다 다시 터져 나왔다. 누군가 칼이라고 소리쳤다. 그제야 태영이도 남우의 오른손을 보았다. 근육이 뻣뻣이 경직됐다. 남우의 시선은 태영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태영도 그런 남우의 얼굴을 맞보았다. 처음 보는 것 같은 얼굴. 마치 죽음의 사자처럼 보였다.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다리를 뒤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남우의 왼손이 여전히 태영의 얼굴 앞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태영은 자신이 본 것과 보지 못한 것을 생각했다. 보지 못한 것과 본 것을 생각했다. 다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히 태영은 자신이 뒤로 조금씩 물러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남우와의 거리는 그대로였다. 제발, 누군가 한 명이라도 남우를 붙들어 줬으면 하고 바랐다. 어느새 뒤가 막혔다. 이건 뭐지? 벽인가, 신발장인가?

마침내 태영은 남우가 뭐라 중얼거리는지 듣게 되었다. 동시에 자신이 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건 그만큼 남우가 가까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남우는 왼손으로 태영의 눈을 가렸다. 태영은 어둠 속에서 배에 무언가 쑥 들어오는 걸 느꼈다. 불에 데인 듯 뜨거웠다. 불 그 자체가 배로 들어온 것처럼 뜨거웠다. 남우는 그냥 이라고 말했다. 태영은 어둠 속에서 자기 자신이 불타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칼은 없었죠.”

그래. 현장에도 없었고 경찰이 와서 온 교실을 다 뒤져도 발견하지 못했지. 그 비슷하게 보일 만한 어떤 것도 없었어.”

태영이는 그저 정신을 잃었던 거고요.”

. 아무런 상처도 없었어.”

그녀는 빙긋 웃었다.

알아요? 피를 봤다는 아이도 있었어요.”

.”

피가 막 솟구쳤다고 떠벌리던 아이도 있었죠. 자신이 그걸 봤다고요. 그애를 만나봤어요?”

아니. 그날 이후로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구나. 집에 전화해서 부모와 통화를 해봤는데, 내가 학교 얘기를 꺼내자마자 전화를 끊더군.”

그건 정말 대단한 쇼였어요. 모두가 속아 넘어갔죠.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내가 궁금한 건 그 다음에 있었던 일이란다. 왜 남우가 복도 창턱에 올라서게 된 거지?”

그건 이미 다른 애들에게 들으셨을 텐데요.”

그게 전부니?”

뭘 들으셨는데요?”

남우가 도망을 쳤다고 하더구나. 그럼 누가 그애를 쫓아갔지?”

모두가요.”

너는 아니었지.”

물론 그런 의미는 아니죠. 애들은 정말로 태영이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남우가 태영을 칼로 찔러 죽였다고요. 그런데 누가 그런 살인자를 붙잡으려고 했겠어요. 사실은 남우가 아니라 애들이 도망쳐야 할 일이죠.”

그럼 말이 안 되잖아.”

근데 남우가 두 손을 들어 보였어요. 아무 것도 없는 두 손을. 고개를 똑바로 들고 말이죠. 심지어는 희미한 미소까지 보이면서요. 이제껏 아무도 남우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죠. 그게 묘하게 아이들을 진정시켰어요. 마치 최면에서 깨어나게 하는 무슨 약속된 동작 같았죠. 남우는 그런 채로 교실을 걸어나갔어요. 누군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누군가가 남우를 붙잡아야 한다고 소리쳤죠. 아이들이 그애의 뒤를 쫓아갔어요. 그애는 계속 걸어갔죠. 상상해 보세요. 양손을 들고 미소를 띤 채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걷는 한 아이를. 그리고 누군가 정말로 그애를 붙잡으려고 했죠. 아니면 그냥 아무 것도 모르는 다른 반 아이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고 했는지도 모르죠. 그걸 시작으로 많은 아이가 남우를 붙잡으려고 했어요. 남우는 그걸 계속 뿌리치면서 걸었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그애가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모르겠어요. 시간이 흐르자 아이들은 완전히 꿈에서 깨어났죠. 이제 그애를 붙잡는 게 목적이 아니었어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애를 때리고 넘어뜨리고 짓밟으려고 했죠. 욕을 하고 침을 뱉고 비웃으려는 게 목적이었죠. 그리고 이번에는 그 모든 일이 정당화될 수 있었죠. 남우는 정말 그럴 만한 일을 당할 사람이 되었어요. 남우는 계단이 있는 데까지 갈 수 없었죠. 학교를 내려가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어요. 아마 그래서 창을 열고 밖으로 나가 선 거겠죠.”

내려가려고 했다고?”

.”

아이들은 그애가 죽으려고 한 것처럼 보였다고 하던데?”

자살요?”

.”

그건 아마 애들이 그 장면을 보았을 때 모두 태영이가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테죠. 남우가 태영이를 죽였다고 말이죠. 그렇다면 남우가 자살할 만한 이유가 충분하잖아요. 그러나 그건 그냥 쇼였어요. 모두가 몰랐다 하더라도 남우까지 모를 수는 없죠. 자신이 태영이를 죽이지 않았다는 걸, 그애는 죽지 않았다는 걸. 근데 왜 자살을 하겠어요?”

나중에는 애들도 알았지. 자살할 만한 이유가 그 외에도 있다고 애들은 믿는 게 아닐까?”

변호사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애는 왕따를 당했어. 그 이전에도 그다지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 같지는 않구나.”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괴롭다고, 무섭다고 사람들이 자살하는 걸까요?”

마음이 약한 사람들은 죽음이 어떤 해결책이 된다고 믿기도 하지. 죽음을 원하기도 하지.”

전 잘 이해할 수가 없군요. 삶이 아무리 무서워도 죽음만큼 무서울까요? 자신이 뭔지도 모르는 것을, 원할 수 있을까요?”

이건 의미 없는 대화인 것 같구나. 이건 죽은 자의 말을 통해서만 풀 수 있는 질문이지.”

아뇨, 만일 누군가 죽음을 바란다면 그 사람은 죽음이 뭔지 아는 사람 일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삶 속에서 죽음을 살죠. 그 사람은 삶 속에서 죽음을 봐요. 그러나 남우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애는 죽음 속에서 삶을 보는 애였죠.”

변호사는 그녀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더 이상의 조사는 없을 것 같구나. 그게 네 말대로 자살이 아니라 사고사라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별로 없을 것 같아. 뭐라 해도 창턱에서 발을 뗀 건 그애 자신이니까. 아무도 그애를 그 자리로 내몰지 않았고 다시 내려오지 못하게 막지도 않았지. 그렇지 않니?”

그녀는 테이블에 두 손을 올려놓은 채 변호사를 올려다보았다.

그애를 괴롭힌 애들은 어떻게 되나요?”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니. 도움이 필요한 건 그애들이라고. 그리고 그건 불가능할 거라고.”

그녀는 아무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변호사는 문 앞에서 아직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녀를 다시금 쳐다보았다. 그녀는 창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창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하지만 창은 환한 빛 때문에 그저 하얗게 보일 뿐이었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려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가능할 수도 있어요. 아마 그애가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죠.”

 

저녁 어스름이 깔리는 상가 거리에서 그녀는 거리의 마술사를 만났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그가 거리의 마술사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상점들은 하나둘씩 간판에 불을 밝히기 시작했고 방금 지나쳐 온 반찬 가게에서 부침개나 전 같은 구운 반찬 냄새가 풍겨왔다. 앞쪽의 새로 생긴 슈퍼마켓에서 오늘의 특가상품을 소리치는 아저씨의 마이크 목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왔다. 장바구니나 비닐봉지를 든 아주머니들이 바깥에 내어놓은 야채나 과일 등을 허리를 굽혀 살펴보고 있었다.

거리의 마술사는 그녀에게 카드 마술을 보여줬다. 과연 남우가 말했던 대로 놀라운 솜씨였다. 그녀는 계속 놀랍다고 소리쳤다. 마술사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연달아 계속 마술을 시연했다. 하나만 더요, 하나만 더요, 그녀는 계속 재촉했다. 마술사가 마지막으로 보여 준 마술은 이런 것이었다.

그녀에게 펜과 노트를 건네주며 자기한테서 멀리 떨어진 데까지 걸어가라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결코 자기에게 펜 움직이는 것도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그녀에게 정말로 중요한 사람의 이름을 종이에 적으라고 했다. 정말로 중요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마술사는 말했다. 그녀는 그렇게 했다. 마술사는 그 이름을 적은 종이를 그 자리에서 노트에서 찢어낸 다음 작은 조각이 되도록 여러 번 접으라고 했다. 그녀는 또 그렇게 했다. 그러고는 마술사에게 돌아와서 그 종잇조각을 건네주었다.

마술사는 그녀에게 라이터가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라이터를 꺼내 마술사에게 건넸다. 그러자 마술사는 그 종잇조각에 불을 붙였다. 어스름은 조금 전보다 깊어져서 불빛은 아주 환했고 종이에 쉽게 옮겨붙었다. 하지만 몇 번이나 접어 두툼해진 종이뭉치는 한번에 확 타오르지는 않았다. 검은 재를 남기면서 금방 꺼졌고 마술사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종이의 이쪽저쪽에 불을 붙여 태웠다. 검은 재 몇 개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술사는 이제 충분히 종이가 태워졌다고 생각했는지 라이터를 그녀에게 다시 건네주고 종이의 타지 않은 부분을 손끝으로 쥐고는 그 재를 옷 위에서 자기 배에 문질렀다. 마치 죽은 자를 위한 의식처럼.

그 다음에 마술사는 옷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자 맨살 위에 검은 재로 어떤 이름이 쓰여 있는 게 보였다. 바로 그녀가 종이에 쓴 이름이었다. 바로 그녀의 필체 그대로 마술사의 하얀 배 위에 그 이름이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무언가 목과 가슴 사이를 꽉 누르는 것 같았다.

마술사는 그녀에게 한 발 다가와 자신의 손을 바로 그곳에 얹었다. 그러고 가만히 있었다.

이 이름은 여기에 있어요. 마술사가 말했다. 언제까지나 그럴 겁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한 손에는 라이터를 들고 다른 손에는 불에 태운 종잇조각을 들고.

 

거리의 마술사는 돌아서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런 마술사의 뒷모습을 어둠이 조금씩 지워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자기 눈물이 지워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남우야, 하고 불렀다. 그러자 남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정말 마술 같구나, 하고 생각했다.

 

 

<당선소감>


에 이르는 첫 계단내게 꼭 필요했던 힘

 

설익음이 설움으로 번질 때마다첫 소설을 썼을 때, 그것은 거의 20년 전인데, 비록 엉망이고 유치했지만, 나한테 아주 근사한 게 있다고 느꼈다. 지금은 이 정도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 내가 아주 근사한 소설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그냥 흘렀고, 그간에 내가 썼던 적지 않은 소설들을 보았을 때, 그 어느 것도 근사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거리는 마치 지상에서 달까지의 거리 같았다. 만일 나한테 근사한 게 있다면, 이토록 오랜 시간이 흐르고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데 어째서 한 번도 드러나지 않은 걸까? 그 답은 말할 것도 없이 나한테는 근사한 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재능이라고 부를 수도 있으리라. 어쨌든 그게 나한테는 없는 것 같았다. 이게 비교적 최근에 내가 내린 결론이다. 이 결론은 나를 의기소침하게 했고, 또 겁먹게 했다. 나를 달까지 오를 수 있게 해줄 거라 믿었던 그 근사한 게 내게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거기까지 오를 수 있을까? 그것은 너무나 멀고, 또 나한테 남은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제 나한테 근사한 게 없다는 걸 인정하지만, 여전히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 믿고 있다. 그 믿음은 아주 미약하고 사실 억지스러운 것이지만, 당선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간은 힘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그때 그 믿음이 생겨났는지도 모르겠다. 당선은 달까지 오르는 계단의 첫 번째 칸과도 같다. 분명히 말해서 그것은 거의 의미 없는 높이지만, 정말로 내게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나를 붙들고 계단의 첫 칸을 오르도록 해주신 심사위원에게 우선 감사드린다. 경희대 문학동아리 들녘과 그곳에 함께 했던 사람들, 또 조해룡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동안 묵묵히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주신 부모님들께 감사드린다. 그분들의 무한한 믿음과 지지는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마지막으로 봄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녀의 꿈에도.

 

1973년 서울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심사평>


 

왕따 문제로 인간의 폭력성 예리하게 파헤쳐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대체로 일정한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소재도 다양하고 이야기를 꾸려내는 솜씨도 상당했는데, 정작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작품들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말 그대로 이미지의 시대답게 대부분 보여주기에 충실한 반면, 무엇을 말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아무래도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기울이다는 존재론적 소외라는 주제를 나름대로 안정감 있게 그려냈지만 참신함이 부족했고, ‘까사 안디나로 가는 길은 후반부에서 남자의 느닷없는 등장, 폭력 장면의 작위적 설정 등이 흠으로 지적됐다. ‘흡혈귀, 그녀는 구로 디지털단지를 배경으로 다인종이 함께 살아가는 국제도시 같은 풍경을 흥미 있게 그려냈는데, 인물의 형상화가 다소 부족했고 초반부의 의욕에 비해 후반부의 산만함이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남은 세 작품은 각기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어 우열을 가리기 쉽지 않았다. ‘샹그리라는 없다는 누군가를 찾아 버려진 도시로 들어간다는 팬터지적 요소가 인상적이다. 초반부의 흡입력 그리고 자본주의의 황폐한 풍경을 그려내고자 한 의욕은 좋았지만, 무게 있는 주제를 제대로 형상화해내기엔 아무래도 힘이 달렸다. ‘달로 간 파이어니어는 무엇보다 능숙한 이야기 전개가 강점이다. 하지만 달의 이면이라는 상징성을 설득력 있게 꾸려내지 못한 까닭에 아쉽게도 작가의 목소리가 증발해버리고 만 느낌이다.

당선작 거리의 마술사는 탄탄한 기본기와 진지한 주제의식이 짜임새 있게 어우러진 수작이다. 교실의 왕따 문제라는 기왕의 낯익은 표면구조에 머무르지 않고, 작가는 인간성의 이면에 감춰진 증오와 폭력성에 대한 대단히 예리하고도 통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안의 괴물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 바로 그 괴물이, 우리 모두가 갖고 태어난 인간성을 보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것. 그 점에서 이 소설은 개인과 집단, 이데올로기의 맹목성, 선과 악에 관한 알레고리라고도 부를 만하다. 자칫 가벼운 이야기만을 찾기 쉬운 요즘 같은 시대에, 윤리적인 주제를 소설의 구조 안에 이렇듯 세련된 솜씨로 갈무리해낸 작가의 역량과 성찰이 새삼 돋보인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늘 초심 그대로 뚜벅뚜벅 나아가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 박범신 · 임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