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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 배(光背)

(광배: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 머리나 등 뒤에 광명을 표현한 원광.)

김종옥

 

오늘도 재봉틀 소리는 쉼 없이 울려 퍼진다. 소리와 함께 생기는 진동은 내 머리를 지나 다락을 흔들어간다. 나 역시 삐걱대는 이 나무 소리에 공명하듯 재봉틀을 돌린다. 나는 지금 점퍼의 팔을 붙이고 있다. 정확히는 백 여덟 번째의 팔. 그렇게 한쪽에만 팔이 붙은 이상한 옷을 바구니 안으로 밀어 넣는다.

나는 재단 일을 한다. 재단사, 그 이름을 얻기 위하여 얼마나 오랜 시간을 지내왔던가. 내가 이 평화시장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오년이 지났다. 그동안 박음질 솜씨는 물론 키도 몰라보게 늘어 높아만 보이던 다락은 이제 허리를 구부려야만 아래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드르륵, 드르르륵-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지금 창밖으론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들린다. 이 지겨운 소리는 내 자리 왼편에 자리한 작은 창문을 타고 늘 나를 방해한다. 평화시장의 수많은 작업장 중 창문이 있는 자리는 많지 않지만, 그 중 하나가 바로 내 자리 왼편에 작게 자리하고 있었다. 얼굴하나가 겨우 들어갈 작은 창이지만, 성실히 근무해온 나에게 주어진 사장의 특혜였다. 작은 창은 답답한 작업장의 공기에서 구해주는 통풍구이며, 바깥세상과 나를 연결해주는 소중한 쉼터였었다. 저 빌어먹을 고함 소리가 울려 퍼지기 전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바보회, 그들은 점심시간마다 소란을 떨어대며 나의 휴식을 방해했다. 열두시가 지나자마자 알람처럼 들려오는 지겨운 소리,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그들의 그 목소리는 나뿐 아니라 사장들의 비위를 거스른 것이 분명했다.

아주 배가 불러 터졌구먼, 저 놈의 새끼들, 우리 업장엔 저기 관련된 것들은 없지?”

작업반장의 굵직한 목소리가 재봉틀 소리를 뚫고 들려온다. 자연히 반장을 바라본 나는 누렇게 색이 입혀진 이를 잔뜩 드러내고 웃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분명 모두가 불쾌해 마지않을 웃음이지만 나는 의례 그와 같이 마주 웃는다.

바보회, 그들이 잘 한 일은 아마도 자신들이 바보라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뿐일 것이다. 백날 떠들어도 변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부질없이 질러대는 고함, 그것은 바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 같은 사회의 밑바닥 인생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요원한 일인 것을 모르는 바보. 깨질 것을 알면서 달려드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과 객기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이 깨질 것이라는 확연한 사실 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 바보들의 멍청함은 괜스레 잠잠히 일하던 아이들의 마음까지 흔들기 시작했다. 내가 이곳을 들어 올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지금까지 그들을 제외한 어떤 누구도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불만이라는 괴롭고도 불필요한 감정을 아무도 떠올리지 않았던 것이었다.

바보회는 전태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있다. 전태일, 그와는 몇 번이고 얼굴을 마주했었다. 내가 처음 시다공으로 일을 시작할 때,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옆 작업장의 시다공, 그가 바로 전태일이었다. 같은 시기에 들어온 인연으로 태일은 늘 나에게 인사를 했지만 나는 그가 달갑지 않았다. 어떤 일이든 같이 시작했다는 것은 동기라는 의미이외에 경쟁상대라는 의미 또한 부여가 되는 것이다.

너네는 시다공 좀 쓸 만하다며? 우리는 영 답답해서

나는 손이 매우 느린 편이다. 지금도 그것은 변하지 않았기에 남들보다 쉼 없이 일하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 아이롱질에 칼질을 손이 찢어져도 해야만 겨우 남들의 할당량을 좇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늘 비교대상이 되었던 태일이 곱게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비단 나와 태일을 비교했던 것은 재단사들만이 아니다. 태일을 높게 쳐주는 것은 작업장의 여공들 또한 같았다. 여공들의 환심을 사기위한 풀빵은 태일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본인은 몇 정거장이 넘는 거리를 걸어 집에 가야 했기에 늘 통금에 걸리면서도 태일은 풀빵을 나눠주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힘들게 돈 벌어서 왜 그렇게 쓸데없는 데 쓰는데?”

밥도 먹지 못하고 일하는 모습이 안쓰럽잖아.”

언젠가 내가 물어본 것에 대한 태일의 대답이다. 기가 막혀 웃음도 나지 않는 내 앞에서 그는 속없이 웃고 있었다. 안쓰럽다. 그것은 우리처럼 비루한 인간의 입에서 나올 단어가 아니었다. 나는 물론이고 그 역시도 누군가를 안쓰럽게 여길 주제가 되기나 하던가! 자신의 주제를 넘어 누군가를 긍휼히 여기는 것은 기만이고 모욕이다. 만약 태일의 그 동정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면 분명 나는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안쓰러워하는 것은 확고히 상대방을 뛰어넘을 조건과 능력을 가졌다는 조건이 채워져야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태일은 그 조건을 충족하는 자가 아니었다.

며칠 뒤 태일이 내가 일하는 작업장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풀빵이 든 신문지가 꼭 쥐어져 있었다. 태일은 내 것 뿐이 아니라 우리 작업장의 여공들이 함께 요기할 정도의 양을 들고 우리 작업장을 찾았다. 분명 이 풀빵을 대신해 그는 오늘 밤도 밤거리의 어둠에 몸을 숨기며 달려야 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집에 도착할 것이고, 보통은 통금에 걸려 유치장에서 아침을 맞을 것이다.

옴마야, 웬 풀빵이고, 내 이것 먹어도 돼요?”

물론이지.”

마산에서 올라온 열다섯 난 여자 시다공이 태일에게 물었다. 태일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자연스럽게 얼굴이 찌푸렸다. 이름도 모르는 여자 시다공은 배고파 죽은 귀신이라도 쓰인 듯 태일이 사온 풀빵을 입에 우겨넣기 시작한다. 태일은 그 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어린 여공은 알고 있을까? 그 풀빵을 먹는 순간, 그리고 태일이 그녀를 보는 순간, 그녀는 태일보다 못한 인간이 돼버린 것을, 태일에게 구제받는 불쌍한 난민이 되어버린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나는 그때 분명 태일이 사온 풀빵을 버렸다. 풀빵을 먹던 여공과 태일의 당황한 얼굴 앞에서 거리낌 없이 풀빵을 짓밟았다. 그 후로 태일과 사이가 어색해 진 것은 물론 그 여공은 나를 보면 도망치기 일쑤였다.

근로 기준법이 뭐야?”

뭐 우리 같은 일 하는 사람들도 사람대접 받고 살 수 있는 법이래. 사실은 우리 공장주가 우리가 받아야 할 돈이나 휴일을 빼돌리고 있는 거라는 거지.”

- 드르륵, 드르륵.

여공들의 말을 끊어버린 건 내 재봉틀 소리였다. 여공들은 급히 입을 다물며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재봉틀을 돌린 건 내 남은 작업량을 채워야 하기도 했지만 그녀들의 이야기가 불쾌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아주 간단한 이야기다. 공장주가 주는 돈이 자신의 노동가치보다 적다고 느껴진다면 일을 그만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 빛나는 자본주의의 원리 아니던가. 주는 돈이 적다고 느껴도 다른 곳에서 일할 상황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은 결국 능력이 모자란 자신의 탓이다. 나는 그 부당한 대우에서 벗어나려 재단사가 되었다. 지금의 환경도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기에 언젠가 돈을 모아 작은 공장을 차릴 계획이다. 현실이 그런 것이다. 현실 속에서 부당과 불합리는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수없이 많다. 그 부당함과 불합리함이 싫다면 그것을 바꿀 것이 아니라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른이고,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범답안이다.

-드르륵, 드르르르륵.

떠들던 여공들은 내 눈치를 살피며 재봉틀을 돌렸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저 전태일의 철부지 같은 소리에 휘말려 본인의 처지를 망각하다간 절망의 끝으로 떨어질 뿐이다. 나는 지금 저 가녀리고 어리석은 여공을 망상과 허상 속에서 건져내 현실로 끌어내 준 것이다. 나는 지금 저 두 여아를 구한 것이다.

들었어? 태일 오빠랑 친구들 다 해고됐대.”

정말, 그럼 우리는? 우리도 도왔잖아.”

아니, 바보회에 들었던 남자들만 자른 거라나 봐. 우리는 상관없데.”

안됐다. 좋은 사람이었는데.”

태일과 그의 친구들, 바보들의 절망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평화시장 각 업장의 사장들이 바보 회에 관련된 직원들을 해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태일은 직장을 잃은 대신 남겨진 자들의 연민과 안타까움을 얻었다. 그 잘난 태일이 늘 안타까워하던 여공들은 이제는 기꺼이 태일을 연민하고 있었다. 분명 여공들은 태일을 안쓰럽게 여길 권리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들은 태일과는 다르게 돈을 버는 중이니까.

앞으로 근로자 기준법인지 뭔지 하는 새끼들, 다시는 여기 발 못 붙일 생각 하고나서 떠드는 게 좋을 거야.”

태일의 해고소식으로 업장내의 여공들이 떠들어 대고 있을 즘, 문을 박차고 들어온 작업반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작업반장의 엄포에 그 전까지만 해도 태일을 걱정하던 여공들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재봉틀을 돌리기 시작했다.

-드르륵, 드르르르륵.

이제야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입을 꾹 다문 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로 재봉틀을 돌리고 있는 그녀들. 하지만 그녀들의 구겨진 얼굴은 이곳에서 쫓겨난 바보회 사람들의 얼굴에 비하면 관음과도 같은 편안함과 안도의 한숨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맞았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나는 삶의 터전은 앞으로 더욱 평안하고 안락하게, 별 다른 소란과 사건 없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나는 나의 작은 창밖으로 청계 거리를 바라보았다. 축 늘어진 어깨와 허망한 눈동자. 불안함과 후회가 가득 담긴 태일의 얼굴이 마치 저 언저리 도로 끝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바보회가 없는 평화시장은 이름 그대로 평화로웠다. 전태일이 떠난 후 며칠간 여공들은 눈물을 흘리곤 하였지만 그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쳇바퀴처럼, 기계처럼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이들에게 머리와 감정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법이다. 바쁘게 주어진 일을 해 나가다 보면 여공들은 전태일이 누군지, 심지어 자신이 누군지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이곳의 생활이었다.

정신 안차려? 어떤 년이 또 졸아! 졸거면 저기 약이라도 처먹고 정신 차리고 일을 하란 말이다, 이런 속도로 납품기일 맞출 수 있을 거 같아?”

철야작업이 있는 날, 각성제를 먹어가며 졸음을 쫓아 일을 하는 여공들의 머릿속에는 근로자의 권리 따위는 티끌만큼도 남지 못한다. 쏟아지는 잠과 각성제의 효력, 그리고 쉴 틈 없이 손가락 근처를 찔러대는 바늘 사이로 반복되는 재봉틀소리는 사람의 생각을 커다란 사치로 탈바꿈시킨다.

태일이 없는 평화시장은 계곡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그가 없이도 봄이 오고 여름이 오듯 별 다를 것 없이 정해진 일정에 맞추어 돌아갔다. 나에게는 너무나도 편안하고 익숙한 모습으로 그렇게 돌아갔다.

내가 태일을 다시 본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물론 시간이란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느끼는 법이기에 태일과 그 친구들에게는 나의 짧았던 평화가 길게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태일과 친구들은 돌아오자마자 바보회를 삼동회로 바꾸고 신문에 청계상가 사람들의 비인간적 대우를 알리는 기사를 냈다. 태일이 돌아온 후 나의 평화가 깨어지는 것과는 반대로 사람들의 죽어있던 눈은 다시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다시 어리석게 태일과 친구들에게 희망을 걸고 삼동회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사람에게 희망이란 마약과도 같은 것이다. 주위에서 아무리 탄압을 하고 고통스러움을 이야기 한다 해도, 심지어 스스로 그것을 느껴도 끊을 수가 없다. 태일은 마약과도 같은 존재였다. 각성제에 익숙한 여공들과 시다공들은 태일이라는 더 강한 각성제에 취한 것만 같았다. 그리고 태일에게 취한 사람들은 이내 마약에 취한 사람이 그렇듯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하나, , , 그리고 다섯. 이 작업장 안에도 마약에 취한 눈빛의 아이들이 다섯이 넘었다. 그리고 각 작업장 곳곳에 심어진 중독자들은 전체의 분위기를 뒤틀어 버렸다. 하얀 옷에 검은 잉크가 스며들듯, 오염은 점점 주위로 영역을 넓혀만 간다.

난 그런 분위기가 미치도록 싫었다. 사장의 기침소리에도 놀라던 아이들은 약에 취해 밖으로 뛰어나간다. 그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화를 내는 사장의 앞에서 본인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자신의 권리와 행복을 주장한다. 경찰이 들이닥치고 몽둥이를 휘둘러도 약에 취한 아이들에게 공포는 이미 잊혀졌다. 너무나도 광적인 광경은 정상적인 사람들조차 광분의 소굴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어린 시다공의 피맺힌 외침이 창문을 타고 들려온다. 제복을 걸친 경찰들은 마치 재봉틀 바늘이 천을 찌르듯 아무런 표정 없이 어린 시다공의 몸을 두들긴다.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비명과 호루라기 소리. 그 빌어먹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절규, 모든 소리는 이윽고 하나로 어우러져 괴물이 되어 나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나는 저 미지의 괴물이 두려우면서도 호기심을 품는다. 그 뱃속에는 이곳과는 다른 세상이 있을까?

-드르르륵. .

괴물의 아가리에서 나를 구해준 것은 나의 소중한 재봉틀이다. 정신을 차리고 돌아본 재봉틀 위로 엄지손가락 마디 근처를 뚫고 지나간 바늘이 실을 매단 채, 번뜩이고 있었다. 하얀 실은 오염되듯 붉게 물들어가고, 바늘은 경고하듯 빛난다.

괴물에게서 벗어난 대가로 손가락을 바친 것은 오히려 이득이다. 마치 도마뱀의 꼬리가 잘려나가 본체를 보호하듯, 내 손가락은 괴물로부터 날 구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자 내 주위 몇몇이 그 사이 괴물의 뱃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사람이 남지 않은 작업장. 괴물에 삼켜진 사람들과 괴물을 잡으러 떠난 사람들, 그 두 무리에 모두 섞이지 못한 나만이 남아있는 작업장은 고요하다. 창밖으로 들려오는 괴물 울음소리도 이 작은 창을 닫으면 멀어진다. 점점 멀어지는 괴물의 울음소리, 그것에서 나를 구해주는 손에 익은 존재. 나는 차분함을 찾아간다.

- 드르륵. 드르르르륵.

어릴 적 어머니와 산사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무슨 일로 그곳을 찾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늘 집안에서 무언가를 만들던 어머니의 모습이다. 거실의 커다란 커튼과 식탁위의 보자기. 어머니는 늘 집안을 꾸미는 것을 부지런히 하셨고, 그녀의 노력만큼 집안은 늘 아름다웠다. 그러던 어머니가 갑자기 나를 끌고 산사를 찾은 것은 내가 초등학교에 갓 들어갔을 무렵이다.

처음으로 온 산사, 그 입구를 지키며 쌍심지를 켜고 나를 내려 보는 사천왕상이 무서웠다. 사천왕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미소를 짓던 불상에 어머니는 그날 끊임없이 절을 했었다. 그리고 곁에 하릴없이 서 있는 내 머리를 불상과 닮은 스님이 쓰다듬어 주었다. 그날 산에서 내려오던 길,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밤, 뜨거운 열기와 매캐한 연기에 감싸인 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콜록거리며 밖으로 뛰쳐나온 나는 정원에 이르러서야 부모님의 침실을 바라보았다.

불이야! !”

그제야 나는 불이 난 것을 알 수 있었다. 창문 안으로 온몸에 불이 붙은 아버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어두운 밤중이었음에도 타오르는 불길에 비친 아버지의 얼굴은 내가 본 사천왕상과 같이 일그러지고 괴기스러웠다.

그 순간, 우습게도 나는 아버지 뒤의 불길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 안에서 타오르는 고통스런 내 아비의 모습은 불길의 아름다움을 해치는 물질에 불과했다. 저 불길 아래, 어딘가 쓰러져 있을 어머니처럼 그도 어서 저 불길의 모습을 가리지 않아 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 후로 수많은 일들이 내 주변에 벌어졌다. 아버지가 죽은 후, 빚쟁이라는 사람들이 찾아왔고 아버지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임을 듣게 되었다. 친척이 없던 아버지의 아들인 나는 당연하게 고아원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고아원 생활은 나에게 지옥과도 같았다. 그리고 난 그곳을 진정 지옥으로 만들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태운 그 아름다운 불길을 그곳에 놓아줌으로서…….

시다공, 말 그대로 재단사의 보조다. 밑에서 어떤 일이든 한다. 그리고 얼마 만큼이건, 언제까지이건 가리지 않고 일을 해야만 한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일이다. 나는 시다공 시절의 기억이 없다. 평화시장에 들어와서부터 재단사가 되기까지 어느 하루를 돌아봐도 다른 것은 없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똑같은 일을 계속한다. 하루의 반복이 아니라 분단위의 반복이다.

그렇게 참고 참아 일구어낸 것이 지금의 자리다. 나는 태일과는 전혀 다르다. 불행한 아이들은 그 고통을 견뎌내고 있는 중간일 뿐이다. 지옥 속에서도 덜 뜨거운 곳은 있는 법이다. 나는 그 시원한 자리를 찾았고, 아이들도 그 자리를 찾고 있는 시련 속에 있을 뿐이다.

나는 내 발을 내려다보았다. 불길의 아름다움을 가리던 아버지의 모습을 원망한 나에게 떨어진 아버지가 준 상처였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창을 깨고 산화하며 떨어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유성 같다 생각하던 내 다리 위로 떨어진 창틀. 그 창틀이 내 다리를 태움에도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살이 타는 통증 속에서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이 아닌 그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그 통증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이 불쾌한 뜨거움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다시 나의 작은 창을 연다.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나는 태일과는 달리 시원한 이곳을 남들에게 양보할 생각도 없거니와 나눠줄 마음 또한 없다. 아니, 그것이 가능하다면 생각이나마 해 볼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가하다. 한정된 것을 나눈다는 것은 질서를 어지럽힐 뿐이다.

혼돈,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그 혼돈 속에 내가 만들어낸 모든 것이 말려 불타 없어질까 봐 너무도 두렵다. 그렇기에 나는 그 혼돈을 만드는 사람들을 지지하지 못할뿐더러 그들을 저주하고 원망하는 것이 나의 선택이다.

이야기로 해결을 보세.”

태일의 시위에 대한 공장 사장들의 답이었다. 태일과 친구들은 승리한 듯 떠들었다. 아니 내가 보아도 그때는 삼동회의 승리가 분명했다. 삼동회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있었고, 노쇠한 사장들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와 죽음 꽃만이 가득했다.

환풍기를 설치해주시고, 근로시간을 줄여주십시오. 그리고 매 일요일마다 휴일을 보장해 주십시오.”

태일의 요구는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사장단의 구겨지는 표정 속에서도 태일의 요구는 멈추질 않았다. 내가 태일의 무리한 요구에 혼자 고개를 저을 때, 사장단은 내 기대와는 달리 태일의 요구를 수용한다고 했다. 정말 태일이 이긴 것일까? 계란들이 뭉쳐 바위를 밀어 낸 것인가? 나는 태일을 저주하던 내 모습도 잊은 채, 무너지는 사장들의 모습에서 또 다른 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평화시장을 포함한 청계천은 축제의 분위기였다. 모든 여공들과 재단사들은 자신의 승리를 자축하며 모이기만 하면 그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다. 태일과 친구들, 삼동회의 노력은 어느새 그들 모두의 노력이 되어있었다.

청계 상가 모든 노동자들은 누군갈 만날 때마다 서로를 축하했다. 그리고 그 말은 결국 전혀 상관없는 나에게도 돌아왔다. 일면식도 없는 어느 어린 여공이 나를 축하했다. 나는 환하게 웃는 그 여공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수고한 게 무어냐고, 나는 저주를 했었노라고, 그리고 너는 무엇을 했기에 수고했다는 말을 자랑스레 떠느냐고 한바탕 퍼붓고만 싶었다. 하지만 마음속의 울림은 오히려 내 모습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나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느라 고개를 푹 숙이고 여공에게서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했다.

내가 다시 얼굴을 든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사장들은 돌연 전태일과 삼동회에게 약속한 모든 것을 부정했다. 나를 자신의 심복같이 여기던 사장의 말에 의하면 나라에서 하는 어떤 검사를 피하기 위해 전태일과 삼동회를 조용히 하기 위한 연극이라 했다. 나는 틀린 것이 아니었다. 결국 계란은 바위를 깰 수 없으며, 바위는 그 계란으로 어떤 요리를 만들지 궁리만 하고 있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활기가 넘치던 청계 상가의 모습은 하루 만에 변했다. 마치 태일과 내가 처음 들어온 그 시절처럼 작업장은 편하게 앉은 공간도 없는 사람들이 꽉 메워진 닭장 속과 같았다. 그 속에서 닭처럼 모두 쉼 없이 옷과 돈을 낳고 있었다.

관리를 맡은 작업반장들의 감시와 욕설은 더 심해지고, 여공들의 노역은 더 무거워만 갔다. 이제는 더 이상 누구도 태일의 목소리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 목소리에 홀리지도 않았다. 나는 그제야 다시 내 작은 창을 열었다. 신선한 공기가 창을 타고 들어와 무거운 가슴을 쓸어내려주었다.

근로 기준법을 준수합시다.”

태일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내 귓가를 간질였다. 더 이상 그의 목소리는 나에게 어떤 불쾌감도 주지 못한다. 아무런 힘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 스스로도 포기해버린 외침. 그것은 아주 작은 절규였다. 마치 내 아버지와 같은 괴로움에 절은 절규.

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환한 얼굴로 다시 창밖을 내본다. 태일과 그 친구들 몇몇만이 소리를 지르고 있다. 외로움에 빠진 그에게 더 이상 사람을 홀릴 마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연민이란 감정을 확인했다. 태일에의 연민, 그 친구들에 대해서의 연민.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는 태일에게 나는 또 다시 알 수 없는 승리감을 느꼈다. 나는 이로써 아무 편에도 서지 않고 두 번째 우월감을 맛보고 있었다.

흙 밭을 구르는 사람은 알 수 없다. 멀리서 보는 자에게 그 모습이 얼마나 처량하고 우습게 느껴지는지. 그것은 그 곳에서 떨어진 여유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즐거움이다. 나는 그 곳에서 떨어져 있다. 비록 몸은 그 속에 뒤엉켜있을지 몰라도 나는 다르다, 나는 이곳의 어떤 누구와도 다르다.

그 승리감은 며칠을 반복해 태일을 보는 순간마다 나를 만족시켰다. 태일의 얼마 남지 않은 친구들조차 하나 둘 그를 떠나기 시작했다. 외로운 태일, 안쓰러운 태일. 나는 나의 자그만 창 안에도 채 다 차지 못하는 작은 괴물의 초라하고 메마른 몸을 몇 번이고 바라본다. 내가 승리감에 도취될수록, 태일의 고개와 어깨는 모두 점점 바닥으로 떨어져만 간다.

괴물에서 벗어난 마을은 평화롭다. 평화롭게 울려 퍼지는 재봉틀 소리가 나의 마음을 안정시킨다. 이제는 창밖으로 작은 울음소리조차 들려오지를 않는다. 모든 것은 바로 자리를 잡아간다. 괴물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외면 받으며 사라져 버리게 된다.

그 승리감이 깨진 것은 괴물의 마지막 발악이 있던 그 날이었다. 괴물은 잊히는 것 대신 산화를 택했다. 마지막 괴물의 절규, 타오르는 불꽃, 그 불꽃은 괴물의 울음소리보다 더욱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마치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사람들은 괴물의 아가리 속으로 다시 머리를 쳐 밀기 시작했다.

그 날, 나의 평화가 깨지어 산산이 조각나는 그날도 나는 작은 창속의 더 작은 태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일이 스스로의 몸 위로 기름을 뿌리는 모습을 꿈인 듯 바라보고 있었다. 태일의 손이 작은 불꽃을 만들어내고, 그 번뇌가 타오른다.

태일아!”

태일을 따르던 몇 남지 않은 친구의 절규소리가 들린다. 태일과 그 친구들을 방해하던 사람들조차 그 순간만은 멈춰서 괴물의 마지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달리기 시작하는 괴물, 더 이상 괴물을 막을 장애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이 타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타는 냄새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느낌일 것이다. 마치 내 옆처럼 타닥거리며 살을 먹는 화염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그리고 바로 앞처럼 타들어가듯 냄새는 내 코를 잡아 비틀어버린다. 한 생명의 급속한 산화는 그런 것이다. 천천히 산화되어가야 할 존재의 시간을 단 몇 분으로 압축시킨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으아악!”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 건물 안의 사람들도 하나 둘, 괴물의 산화를 알아간다, 아니 몸으로 느껴간다. 더 이상 어디서도 재봉틀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나의 평화는 그 지독한 고요와 괴물의 마지막 비명에 소멸되어 버린다.

어금니를 물었다. 이러다간 지고야 만다. 나는 다시 한 번 내 죽은 아비를 떠올린다. 그 동안 봉인된 기억, 잊으려 애쓰던 기억을 들추어낸다. 내 패배자 아버지. 사업에 실패하고 패배로 인해 세상에서 스스로 산화해간 불쌍한 내 아버지. 그 산화에 휩쓸려 소멸한 내 어머니. 그래, 괴물의 마지막 발악은 패배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나의 승리는 깨어진 것이 아니라 더 확고히 굳어진 것이라고 스스로를 타이른다. 태일은 패배했다. 그리고 초라하게 산화했다. 난 그의 마지막 몸부림을 더욱 자세히 보고자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굳어버린 뺨에 억지로 힘을 주어 들어올린다. 기괴하지만 내 얼굴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으리라, 그리고 태일의 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으리라.

그 때, 난 스님과 무슨 이야기를 했었을까? 분명 절을 하는 어머니 곁에서 나는 스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니 문답이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나의 무지에서 비롯한 원초적인 그 질문, 그 질문에도 스님은 웃으며 답을 해 주었다.

저기 저 불상은 왜 불에 타고 있어요?”

불에 타? 어디를 말하는 거냐?”

저기, 저 불상 뒤로 둥글게 타는 거…….”

내 눈에는 불상 뒤의 타원형의 무늬가 불꽃처럼 보였다. 왜 불상 뒤로 그런 불꽃이 타고 있는지가 순수하게 궁금했다. 내 질문에 커다랗고 맑은 스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는 너무나도 커서 어머니의 절을 본의 아니게 방해할 정도였다.

나는 내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광배. 그것은 신성한 불꽃이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성스러운 화염, 범인의 몸에서는 나오지 않는 고고한 오오라. 그 광배를 두른 불상의 자비로운 미소는 나의 마음에 무엇인가를 남겼다. 그 알수없는 무엇은 분명 내 가슴을 흔들어 놓을 만큼 강한 인상을 남겼다.

아버지가 불타던 밤. 나는 뜬금없이 그 광배를 생각했다. 불타는 아버지 뒤로 타오르는 불길은 그 광배와 모습이 같았다. 그 광배를 두른 아버지, 그의 입가에는 모든 것을 초월한 자비의 미소는 없었다. 고통과 슬픔, 번민과 절망, 세상의 악이 뒤섞여져 나찰과도 같은 얼굴로 허망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불길과 어울리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이 절로 내 인상을 찌푸리게 했었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아비의 죽음보다 그 광배의 아름다움에 어울리지 않는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태일의 얼굴에서도 아버지의 모습을 찾기를 바랐다. 아니 확신하고 있었다. 그 작아져 버린 괴물이 고통에 일그러진 나찰과도 같은 모습으로 거리를 달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창밖을 보던 나의 눈은 믿을 수 없는 장면에 부릅떠졌다.

모든 것을 초월한 은은하며 확고한 미소. 괴로움과 번민을 떨쳐버린 무한한 사랑. 그것이 태일의 얼굴에 있었다. 그 초열의 지옥 안에 모든 것을 포용하는 보리살타의 자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불꽃에 매료되듯 태일의 마지막을 바라보았다. 몸의 모든 세포와 상처의 통증은 다시금 나를 붙잡으려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나는 그 눈부신 광배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찰라 속 억겁과도 같은 시간, 영원히 멈춰 있을 순간의 연속은 나의 정신을 하얗게 불태워버렸다. 그 순간, 나의 패배감은 티끌이 되어 부질없이 날아가 버렸다. 태일은 그 마지막 미소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었던가? 이 지옥 속에서, 수많은 나찰들 틈에서 무엇을 구하려 하고 있던 것인가?

나는 아버지가 타던 그 밤 이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버지의 세상에 대한 원망은 자신의 아들의 목소리를 태우며 사라졌다. 그리고 태일의 화염은 이제 내 세상의 색을 가져가 버렸다. 내가 보는 세상은 태일의 죽음 후 다 타버린 잿빛으로 변질되었다.

태일의 죽음 이후, 한동안 떠들썩하던 세상이 전과 같아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직도 어린 여공들은 고통 받으며 폐병에 걸려 죽어가고 결국 버려지고 있다. 현실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일의 죽음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전과 다름없는 세상 속에 또 다른 태일이 하나 둘 나타나고 있었다.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 현실에서 무엇인가 결여된 패배자들이 다시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놀라운 점은 새로운 패배자들 사이에 바위들이 섞여 있다는 점이었다. 힘없고 약한 계란이 아니라 단단한 바위와 같은 사람들이 계란의 편에 서기 시작했다. 태일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한 계란의 희생은 바위들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계란은 죽어도 바위를 깰 수 없지만 바위가 몸을 돌리게 할 수는 있었다.

아직도 수많은 바위와 무쇠가 자리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이 태일이 보던 곳을 보기 위해 몸을 돌린다면 나의 잿빛 세상에도 다시 빛이 돌아올 수 있을까? 나는 빛을 잃어버린 세상의 창문을 닫고 천천히 재봉틀을 돌린다.

-드르륵. 드르르르륵.

 

 

<당선소감>


그 간 쌓아온 글자들이 놓아주질 않았다

 

당선 소식을 접한 지 다섯 시간, 아직도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습니다. 경제적인 사정으로 학업을 미루고 글을 쓰기 시작한지 6년이 흘러갑니다. 글에 대해 아무런 배움도 없이, 서로 교류하는 문우 하나 없이 무턱대고 글을 쓰는 것을 시작했습니다. 홀로 글을 쓴다는 것, 작가를 꿈꾼다는 것은 사막에 떨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멀리 보이는 오아시스가 신기루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그곳으로 가지 않으면 목숨을 잃는 법 밖에는 없듯 늘 절박한 심정으로 글을 써왔습니다.

불과 한 달 전만 하더라도 글을 쓴다는 것을 포기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간의 시간과 걸음들이 절 붙잡았습니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시간과 그 시간동안 쌓아온 글자들이 절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써 왔던 스스로의 글들을 보며 조금만 더 가보기로 결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상하게 되어 더욱 뜻 깊게 받아들입니다. 이번 당선을 통해 저는 제 눈에 보이는 오아시스가 신기루가 아님을 확인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직도 오아시스는 제게서 멀기만 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글에 묻어있는 절박함이 절실함으로, 절실함이 진실함으로 변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제가 주저앉지 않도록 힘과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역사를 이끈 보살로 전태일을 봤다

 

응모작품은 총 75편이다. 이 작품 중에서 1차로 21편을 뽑고, 2차로 8편을 뽑았다. 그리고 3차로 <광배> <안양에 들다> <모크샤> <깊은 잠> 4편을 뽑았다. 4편 모두 특색 있는 좋은 작품들이어서 떨어뜨리기가 아까웠다.

심사기준은 구성과 문장 내용을 근간으로 했고, 거기에 불교적인 색채를 어떻게 녹였는가에 촛점을 맞췄다.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선정한 작품이 <광배>.

광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전태일 얘기가 주제다. 화자는 전태일과 대비되는 자리에서 전태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1960년대 말 평화시장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고발하고 있다. 작품 소재는 진부하다 할 수 있으나 작품을 읽고 나면 작가의 시선이 어디에 맞춰져 있는가에 대해 이해하게 되고, 불교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 가능성마저 느끼게 된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계란은 죽어도 바위를 깰 수는 없지만 바위가 몸을 돌리게 할 수는 있었다.”개인 전태일은 한 개의 계란에 불과하다. 그러기 때문에 그 당시 바위와 같은 노동환경을 바꿀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바위를 깨려는 노력을 시도함으로써 계란보다 단단한 돌들이 모여들게 했고, 마침내 바위가 몸을 돌려 자신에게 날아오는 무수한 돌들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했다. 화자는 이 과정을 보살운동으로 보고, 전태일을 그 운동을 이끈 보살로 보고 있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가 경험했던 1960년대의 무대가 지금 북한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마저 유린하는 바위와 같은 힘의 실체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도 엄연히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 한 개의 계란이 되어 끝없이 바위를 향해 몸을 던지는 보살운동을 펼쳐야 하지 않을까? 1960년대 청계천 봉제공장의 직공들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신음하고 있는 북한 동포들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우리 자신이 보살이라면 말이다. <광배>는 이런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심사위원 : 남 지 심(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