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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열

정경륜

 

수인은 투명한 플라스틱 숟가락에 요리용 럼주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8ml를 최대로 하는 작은 약숟가락 안에서 럼주는 순식간에 불룩하게 차올랐다. 금방이라도 파괴될 듯이 럼주의 표면은 그녀의 맥박과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미세하게 떨렸다. 팔꿈치를 식탁 위에 괴고 수인은 오로지 럼주의 작은 흔들림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흔들림이 오히려 수인의 안녕을 조절해주는 듯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간이등의 좁은 빛 테두리 아래에, 이 광경은 누군가 단단히 오므려 매달아놓은 물주머니처럼 팽팽하고 묵직하게 집안을 잡아당겼다.

문득 수인은 입속에 럼주를 털어 넣었다. 짤막한 숟가락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숟가락을 혀로 천천히 핥아 만졌다. 어떤 상념들이 끊이지 않고 몰려들어 수인에게 기계적으로 이 동작을 하도록 만들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 외벽에 거의 짓눌리다시피 서 있던 개오동나무와 같은 것이 떠올랐다. 올 여름 태풍이 오는 징후로 조금 거세진 바람에 개오동나무는 성급하게 쓰러져버렸다. 꺾인 나무는, 낯설고 덩치 큰 어른처럼 확대되어 1층 가까이 내려와 있었다. 흉물스럽게 나부끼던 잎사귀의 뒷면들이 이상하게 보기 좋아서, 수인은 좀 더 오랫동안 사람들이 그 나무를 방치해두길 바랐다. 3개월 만에, 죽은 개오동나무는 적당한 길이로 잘리고 한 데 묶여, 서 있던 자리에 다시 놓였다. 잎사귀들은 저절로 사라져버렸다. 수인은 몇 번 더 숟가락에 럼주를 채웠다 비우는 일에 시간을 내맡겼다. 처음과는 달리 타액이 묻은 숟가락에서 럼주는 쉽게 쏟아져버렸다. 차가운 럼주 병의 목을 잡고 적당히 기울여 멈추는 일에도 집중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인은 개수대에서 약숟가락을 물로 헹궈냈다. 냅킨 한 장 위에 올린 약숟가락은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듯이 너무도 가벼웠다. 병원에서 처방을 받아온 지 이틀. 아기에게 5ml6시간마다 딸기 향으로 위장된 해열제를 먹이면서, 수시로 물수건으로 온몸을 닦아냈다. 특별히 나아진다는 느낌보다는 응급 상태의 고열을 간신히 면하고 있는 듯했다. 체온계를 아기의 귓속에 밀어 넣으면 열 번에 다섯 번은 경보음이 울렸다. 작은 디지털 화면에는 매번 확성기 모양을 기호화 한 경고 그림이 깜박거려 수인의 간호를 채찍질했다. 수인은 약숟가락을 냅킨으로 꾹꾹 닦아서 티셔츠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아침은 아무렇게나 지나가버렸다. 수인은 눈 뜨자마자 커튼 블라켓을 고정시키는 천정 부분을 올려다보았다. 이전에 살았던 사람, 그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못 박았던 자국이 뒤죽박죽 얽혀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에는 그것을 각각 가려내는 장난어린 숙제를 하곤 했는데 규칙성을 찾아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어그러진 생활 패턴 속에서 수인은 오히려 경쾌해져 있었다. 아기는 곧잘 받아먹던 연식조차 입에 대려 하지 않았다. 한밤중에는 오한으로 끙끙댔지만 날이 밝으면 죽은 듯이 잠만 잤다. 때문에 수인이 아침마다 해내던 일들에서 오히려 자유로워진 것이었다. 채 잠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 머리도 묶지 못하고서 개수대에 기대어 감자나 양파 껍질을 벗겨 내지 않아도 되었다. 얼린 고기 덩어리에서 비닐을 제거할 때 팔목에 튀는 얼음 알갱이들로 불쾌해지는 일도 없었다. 물을 미지근하게 데우고 컵홀더를 준비하는 일은 물론, 아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수납장을 조심스럽게 열고 닫고 할 필요도 없었다. 행복이란 뭔가요, 당신과 나 눈물짓게 하는 바로 그것. 수인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흥얼거렸다. 9시 전후에 눈을 떠, 신발장 앞에 서서히 파고드는 햇빛을 바라보는 일. 그 빛이 평행사변형으로 변해가며 조용히 소멸하는 과정을 온전히 지켜볼 수 있는 삶이라니. 그것은 원래 내 것이 아니었나, 수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밤새 아기를 간호하는 일로 고단해 있었지만 산뜻해진 하루하루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할 수 없었다. 완성된 평행사변형의 빛은 점점 바닥 쪽으로 기어 내려오다가 모서리를 만나 단번에 쪼개져버렸다. 그리고 어느 사이 더 길고 가늘게 반짝거리면서 우산꽂이 속으로 들어갔으나 다시 보면 여전히 우산꽂이 밖에서 서성거렸다. 쪼개진 작은 빛이 원래의 몸체를 따라 집안을 완전히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아기는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수인은 머리맡에서 해열제 먹이는 시간을 기록해둔 쪽지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소독해 두었던 젖병을 흘끔 확인하고는 좀 더 누워 있기로 했다. 아기가 깨 울기를 기다렸다.

수인은 젖병을 공중에 추켜세워 아기가 분유를 몇 ml나 남겼는지 확인했다. 아기는 정확히 180ml를 빨고 나서 곧장 다시 잠들어버렸다. 아기의 분신과도 같은 인형, '와와'는 며칠째 커튼 뒤에 가려져 입을 다물고 있었다. 수인은 와와를 창밖으로 내밀어 먼지를 털어내고 입속에 손가락을 넣어보았다. 와와는 오렌지색 부직포 혀로 수인의 손가락을 옥죄었다. 수인은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아 와와의 탁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잠시 서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기에게 목이 졸린 채 실종되기 일쑤였던 와와. 그런 와와가 같은 자리에 꼼짝 않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제 스스로 짖으면서 커튼 뒤로 걸어 들어간 것처럼 와와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던 것이다. 와와의 배 안쪽을 쓸어내리자 털로 감춰져 있던 건전지 덮개와 on, off 버튼이 드러났는데, 어딘가 부러져 달그락거렸다. 수인은 와와를 귀에 대고서 가볍게 흔들어보았다. 와와가 갑자기 멈췄을 때 아기가 했던 행동을 흉내 내 본 것이다. 수인은 중병 걸린 사람의 잠든 모습을 확인하고 걸어 나오는 사람처럼 와와를 커튼 속에 잘 가려두고서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탁자 위에는 아기 이름을 휘갈겨 적은 약 봉투와 1회분씩 점선으로 나뉜 가루약 일절, 네 번 접힌 처방전, 세 번 접힌 보험증이 병원 다녀온 날 그대로 놓여 있었다. 또한 작은 투입구가 있는 중간 마개와 그보다 더 작은 뚜껑이 빈 플라스틱 병과 분리되어 놓여 있었다. 수인은 새끼손톱만한 녹색 뚜껑을 손가락 끝으로 슬쩍 밀어 보았다. 뚜껑은 유리판 위에서 크게 반원을 그리더니 궤도 안에서 점점 짧은 동선으로 빨라지다가 멈췄다. 또 하나의 플라스틱 병에는 붉고 걸쭉한 액체가 4분의 1 정도 남아 있었는데 탁자유리 아래 끼워둔 사진을 가리고 눕혀져 있었다. 사진 속 아기와 전 남편은 플라스틱 병 속 해열제와 뒤섞여 흐릿하게 뭉개졌다. 그 옆으로 따로 오려낸 것처럼 수인이 떨어져 앉아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기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한 두 시간 간격으로 젖을 물리던 때였다. 수인은 사진 속 그날의 상한 머루포도를 떠올리며 의자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진열장 위에서 바구니 채로 상해갔던 머루포도의 냄새. 수인은 사진을 가리고 있는 플라스틱 병을 세웠다. 전 남편의 품속에 아기는 꼭 안겨 잠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수인은 왼쪽 다리를 들어 올려 의자 위로 끌어안으면서 식은 발가락들을 손으로 쥐었다. 엄지발톱 속이 꽤 오래전부터 멍들어 있었다. 수인은 별러 왔던 매니큐어를 바르기 위해 탁자 밑 서랍에서 살구색 매니큐어를 찾아 탁자 위에 올렸다.

몇 번씩 덧칠해나가자 감쪽같이 발톱의 멍든 부분이 가려졌다. 수인은 무릎에 턱을 괴고서 매니큐어가 칠해진 열 발가락을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수동적인 기분으로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허공의 손이, 힘을 주어 수인의 머리 방향을 돌려놓으려 했다. 그 손이 이전에 받쳐 들고 있던, 안락을 관장하던 공기주머니는 거실에 내팽개쳐져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곤 해왔다. 수인은 놀라지 않았다. 플라스틱 기린 의자에 아기가 와서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아기가 한 번 떨어진 뒤로, 미끄럼틀의 미끄러져 내려오는 부분을 분리해 버리고 의자로 써온 완구. 아기는 평소 이 의자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마음에 차는 곳에 앉아 있곤 했는데 지난 며칠 동안 의자는 인터폰 아래 붙박이처럼 놓여 있었다. 그 완구의 일부처럼 조그맣게 의자 속에 안겨 있는 아기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아기는 담담한 눈빛을 수인에게서 거두지 않으면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부어 오른 눈두덩과 좀 더 수척해진 몸체. 18개월 된 아기의 표정은 괴상할 정도로 어른스러웠다. 살짝 벌어진 입 속에는 막상, 인조 솜뭉치가 줄줄 딸려 나올 것처럼 천진한 어둠이 엿보였다. 아기의 호흡에 따라 들썩이는 앞섶이 과장되어 보였다. 수인은 앞섶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웃고 있는 원숭이 얼굴을 주시하며 조금 더 머뭇거렸다. 그러나 아기는 평소처럼 울면서 달려오지도 하품을 하면서 두리번거리지도 않았다. 수인은 두 팔을 작게 벌렸다. 아기는 바람에 나부끼는 물체와도 같이 걸어와 수인의 품에 안겼다. 수인은 아기의 머리카락들 사이에 턱을 대고서 열을 가늠해보았다. 아기의 머리통은 여전히 뜨끈뜨끈했다. 체온계를 귓속에 넣자 아기는 머리를 가로저어 싫은 티를 냈다. 그러나 곧 체념한 듯이 '' 소리가 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아기는 내내 작동기차를 가지고 놀았다. 그리고 수인이 흡족할 만큼 음식도 받아먹었다. 화물칸에 귤 두 개를 싣고서 기차는 8자 모양 레일을 몇 번이고 오갔다. 기차 밑면의 작은 스피커에서 기적 소리가 그럴싸하게 울려 퍼졌다. 어디서 따온 소리일까, 수인은 듣기 좋아서 아기 어깨를 매만졌다. 그리고 때로 선로 변경 막대를 제쳐, 기차가 터널을 지날 수 있도록 했다. 터널 앞에 서 있는 정사각형 블록에 실무자가 꽂혀 있었다. 기차를 향하여, 모든 일상을 생략하고 손을 흔드는 영원한 친구. 실무자의 앞과 뒤가 모두 앞모습이어서 아기는 매번 양쪽에 대고 손을 흔들었지만,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수인은 정면으로 실무자의 옆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복부 비만인 실무자의 파란 제복을 보며 잠시 몸서리쳤다. 실무자는 속이 텅 빈 플라스틱 두 조각을 꽉 끼어놓은 조립품에 불과했다. 그 이음새가 앞과 뒤를 미세하게 분리하면서 몸통 전체에 길고 긴 테두리를 이루고 있었다.

수인은 정리함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아기 독사진 한 장과 미니 굴착기를 귤 대신 화물칸에 실어주었다. 아기는 얌전하게도, 뭐랄 것 없이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수인은 가슴 위로 손을 얹어 주머니 속에 있는 약숟가락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탁자에서 플라스틱 병을 들고 개수대 앞으로 갔다. 먼저 꽉 잠긴 녹색 뚜껑을 열고 플라스틱 병을 누르자 해열제 약물이 약숟가락으로 빨려나왔다. 다음은 약 봉투에서 1회분 가루약을 한 봉 뜯어 약숟가락 위에 쏟았다. 마지막으로, 날이 두 개 뿐인 작은 포크로 약숟가락의 둥글넓적한 곳을 천천히 저었다. 탁한 약물이 약숟가락에 명시된 '7ml'라는 작은 글씨를 지웠다. 수인은 엉뚱한 방향으로 솟아 있는 개수대 수도꼭지의 그림자를 보면서 계속해서 약물을 저었다. 또한 타일 벽 밑으로 비스듬히 길어진 그릇 선반의 그림자를 보면서도. 그릇을 받치고 있는 선반의 그림자는 규칙적인 쇠의 구조가 끊어지고 휘어져 그릇들이 공중에 떠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선반이며 그릇들, 그것들을 매달아 놓은 그림자까지 모조리 쏟아져 박살이 날 것만 같아 보였다. 수인은 수도꼭지 막대를 조금 위로 올려 물이 조용히 흐르도록 했다. 약숟가락을 물줄기 아래 가져갔다. 탁한 물방울들이 튀어 오르면서 약숟가락에 담겨 있던 약물은 순식간에 개수대 하수구 아래로 흘러 들어갔다. 약숟가락은 곧 없어질 듯이 투명해져서 계속 물줄기를 흘려보냈다. 수인은 물을 잠갔다. 그림자들은 여전히 수인의 손동작을 흉내 내고 있었다. 수인은 손을 헹구고 약숟가락을 냅킨에 닦아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손바닥에 조금 남아 있는 물기를 바지에 문지르면서 아기 옆으로 걸어갔다. 자리를 비운 사이 화물 기차는 다시 귤 두 개를 싣고 레일 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수인은 갑자기 눈떴다.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밖은 어두워져갔다. 수인은 미동 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남아 있는 검푸른 낮의 기운은 허허롭게 거실 이곳저곳에 서 있었다. 부드럽고 주기적인, 수인의 날카로움을 포박해 오직 둥글게만 유지하려는 압박감에 수인은 좀 더 주의를 기울였다. 아기는 수인의 등 뒤에 달라붙어 잠들어 있었다. 해변은 얼마나 지겨운가. 수인은 다시 눈을 감았다. 벼랑 위 나무 한 그루가 불 타 없어진 해변. 해변을 더욱 지겹게 하는 것은 해변을 가득 매운 그 둥근 광물질들이었다. 수인은 조용히 화가 났다. 해변에서는 깨진 병조각조차도 날카로움을 유지하지 못했다. 수인은 해변을 북북 찢어버리고서, 그 둥글고 온순해진 돌들을 바닷물 속에 처박아버리고 나서야 다시 눈을 떴다. 돌들의 굉음과 함께 해변은 물속으로 한꺼번에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 밖의 육지, 또 그 밖의 육지가 해변을 대신하여 해변이 되어갔다. 아기의 복부는, 커다란 손처럼 섬세하고 뜨듯하게 수인의 등허리를 밀었다 놓았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쳤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수인은 자신의 옆구리에 놓인 아기의 가는 팔을 가만히 치우고 일어나 앉았다. 체온계는 아기의 귓속에서 종전과 다른 경보음을 자꾸 건져 올렸다. 그것은 측정 기준 이하의 온도를 측정할 때 나타나는, 고열과는 전혀 다른 경보였던 것이다. 거뭇거뭇해져가는 사위 속에서 잠든, 그녀의 아기를 어둠과 구별해내는 일은 이제 더는 어려워졌다.

창을 열자 쓰레기장에 내놓은 와와와 장난감 일절이 한눈에 들어왔다. 와와에게도 눈이 쌓였다. 와와는 덤프트럭의 노란 적재함 속 어딘가, 눈덩이에 파묻혀 의연하게 서 있을 것이었다. 골목 어딘가에서 헛돌고 있는 바퀴소리가 계속해서 뭔가를 파헤쳤다. 갑작스런 굵은 눈발은 커다란 분리수거 통의 지저분한 뚜껑을 모두 가렸다. 수인은 패딩 점퍼를 걸치고 투명창 마저 열었다. 과일 바구니 손잡이에 멋을 낸 오래된 리본이 눈발과 함께 휘날렸다. 출산 기념으로 전 남편이 사들고 왔던 과일 바구니. 수인은 그 바구니에 1년간 다른 계절의 옷들을 담았었고, 그만도 못하게 되었을 때 폐전선과 버리기 애매한 전자 소모품 등을 담아뒀었다. 그것마저도 다 버리고 난 뒤에, 수인은 빈 과일 바구니를 그냥 창고에 보관했다. 바구니에 담긴 잡동사니 위에 순서 없이 눈이 쌓였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제트기 여섯 대, 오감발달 딸랑이 6ps와 물오리를 함께 넣어 뚜껑을 덮은 둥근 통, 150mm 욕실화 한 켤레, 소꿉용 절굿공이, 말하는 덤프트럭과 굴착기 한 세트. 긴 막대 끝에 매달린 가위바위보용 노란 손바닥이 폭설을 저지하는 단호한 손짓으로 바구니 구석에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수인은 이삿짐센터에서 소개 받은 남자에게 다시 확인 전화를 걸었다. 남자는 고물상에 중고 물품을 되파는 일꾼이었다. 막 신호가 가는 와중에, 일꾼은 트럭을 몰고 골목에 들어서고 있었다. 수인은 방범창 사이로 손을 내밀어 초행인 일꾼에게 흔들어보였다. 그제야 운전석에서 일꾼이 고개를 운전대로 가까이 대고 밖을 올려다보았다. 일꾼은 집 앞 담벼락에 차를 돌려놓고 시동을 껐다. 수인은 계단을 텅텅 울리는 일꾼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조금 더 그대로 있었다. 트럭 뒤의 빈 화물칸에는 푸른 천막을 벽돌로 눌러 놓았고, 물건들을 동여매기 위한 고무밧줄 더미도 칭칭 감겨, 여기 저기 널려 있었다. 어느 곳에나 눈이 쌓였다. 수인은 창문을 닫았다.

무게 때문에 옮기지 못한 전동침대 외에는 모두 거실로 내온 참이었다. 수인은 미리 적어 놓은 물건 목록을 일꾼에게 보여 주면서 말을 꺼냈다. 일꾼이 목록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 동안 수인은 흘낏 일꾼의 얼굴 생김새를 훑어보았다. 잠깐 사이에 이 중년 남자의 야구모자에는 눈이 묻어 있었다. 일꾼은 가슴 주머니에서 단추를 열고 펜을 꺼냈다. 그리고는 목록을 짚어가며 물건 상태를 점검하고 매입 가격을 계산했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절차가 생겨났다. 수인은 이런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따분해져서, 몸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여유로워져서 팔짱을 낀 채로 일꾼의 동선을 지켜보았다.

"그건 조립만 다시 하면 돼요."

 

둘러보던 끝에, 일꾼의 눈이 미끄럼틀에 멈췄을 때 수인은 재빠르게 덧붙였다.

"이런 건 자리만 차지하고 단가가 낮아서 안 되겠네요."

일꾼은 수인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잘라 말했다. 게다가 목록 중에 대부분이 그런 이유로 탈락될 만한 것들이라고 지적했다. 수인은 일꾼의 발목을 단단히 여미고 있는 작업복 하의를 보고 있었다. 7만원. 그나마 서랍장, 식탁세트, 전동요람 정도의 목록 때문에 좋은 값을 쳐줄 수 있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또한 그것이 자신에게 그리 큰 이득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늘 하루가 조금은 허탕인 셈이라는 뉘앙스까지 던져줬다. 일꾼은 볼펜 끝을 손바닥에 톡톡 두들기며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전동요람은 일 년 전 가격으로 이십 만원 상당의 것이었고 나머지 물건들의 가격을 다 합쳐 어림잡아도 50만원은 훌쩍 넘기는 물건들이었다. 게다가 오늘같이 눈이 많이 오는 날 누가 고물을 내다 팔겠는가? 수인은 기린 의자의 팔걸이 부분을 만지면서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당장 이 버릇없는 일꾼을 쫓아내고서 현관문을 쾅 닫아버리고 싶었다.

"그냥 가져가세요."

수인은 일꾼이 쓸모없다고 폄하한, 수인에게 그동안 없어서는 안 됐던 물건들을 모두 이 집안에서 끌어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일꾼은 뜻밖의 제안에 잠시 시간을 끌었다. 수인은 일단 일꾼의 손에 들린 메모를 돌려받았다. 일꾼이 탈락시킨 물건들은 거실 한가운데 크고 작게 솟아 있었다. 수인은 갑자기 그 목록과 실재 물건이 일치한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여겨졌다. 도살되는 가축에게서 끝없이 쏟아져 나온 배창자처럼 믿기지 않는 규모였던 것이다.

눈은 그쳤다. 일꾼은 차례로 물건들을 날라 트럭에 실었다. 수인은 안방 창문 앞에 줄곧 서서 트럭에 실린 물건들이 하나 둘 늘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가장 값이 나가는 것 순서로, 트럭의 앞쪽을 채워나갔다. 수인이 한 번 씩 목록을 검토했다. 주방 옆 서랍장이 있던 자리가 비고 나면 덩치 큰 냉장고를 그리로 옮길 셈이었다. 그리고 주방을 차지하고 있는 4인용 식탁은 버릴 참이었다. 그러면 냉장고가 가리고 있던 베란다 창이 훤히 드러날 것이었다. 테이블을 하나 구입해야지, 수인은 그곳에 앉아 베란다 창으로 난 연통에서 콸콸 빠져나가는 연기가 어떻게 사라져가는 지를 종일 보고 싶어 했었다. 다음으로는, 창고가 텅텅 비어 있었다. 수인은 창고를 어떻게 활용할 지 생각해보았다. 물을 자주 안 줘도 잘 자라는 화분이나 몇 개 가져다 놓을까, 그러나 키우고 돌보는 일이라면 넌덜머리가 났다. 위층 사람들이 한 것처럼 테라스로 개조해도 좋을 것이었다. 창고의 작은 창문에는 위층에서 기르는 식물에서 가끔씩 길쭉한 잎사귀가 떨어져 놓여 있곤 했다. 수인은 다 쓴 티슈 통을 채우거나 기저귀를 가지러 창고로 갔다가 그 잎사귀를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안방 창으로도 볼 수 있지만, 창고 쪽에서 담 너머 감나무가 더 시원하게 보였다. 수인은 숨을 크게 뱉으면서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끌어올렸다. 담 너머 감나무는 겨울에도 건강한 모습이었다. 간혹 그 단층집 사람들이 부주의하게 오가는 모습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었다. 수인은 가벼운 기분에 젖어 앞으로는 소파에서 잠들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토크쇼를 연이어볼 수 있는 채널을 검색하는 일도 잊지 말아야 했다.

일꾼은 마지막으로 노끈에 묶인 책 한 질을 보조석에 실었다. 한 권이 빠진, 23권짜리 유아용 전집이었다. 전 남편이, 임신 중에 사왔던 것이다. 수인은 '달걀'에 관한 1권을 따로 꺼내 언제나 장난감 정리함에 함께 넣어두고는 했었다. 때문에 그 한 권은 모서리가 다 헤지고 몇 페이지는 떨어져 나가 홀쭉해진 채로 너덜거렸다. 모든 물건의 운명이 그렇듯이 어느 날 그 책은 없어져버렸다. 손전등을 아무리 비춰도 보이지 않는, 장롱 밑 어딘가 깊숙이 들어가 먼지와 뒹굴고 있을 것이었다. 장롱을 들어내지 않는 한 꺼낼 수 없었다.

 

트럭에 실린 물건들 위로 푸른 천막이 넓게 덮였다. 일꾼이 천막을 잡아당길 때마다 눈이 툭툭 떨어졌다. 일꾼은 굵은 고무밧줄을 천막 위로 이리저리 던졌다. 차체의 작은 갈고리들에 그것을 교차시키고, 때로 물건의 몸통을 천막 위로 동여매기도 했다. 일꾼은 고무밧줄을 잡아당기느라 눈길 위에 쪼그려 앉거나 다리를 비스듬히 구부리는 자세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트럭의 한쪽 귀퉁이에서 밧줄을 단단히 잡아당겨 옭아맸다. 일꾼은 창문 쪽에서 완전히 뒤돌아서서 매듭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은 누구도 봐서는 안 되는 신성하고 비밀스런 일처럼 여겨졌다. 꽁꽁 묶여 완성된 천막의 실루엣이 수인을 잠시 당황스럽게 했다. 일꾼이 운전석 손잡이를 꽉 잡고 발 받침대에 한 발을 디뎌 트럭에 가뿐히 올랐다. 트럭은 골목 끝까지 천천히 나가다가 커브를 돌기 위해 몇 번이나 전진과 후진을 반복했다. 전봇대에 걸린 원색의 모집 현판이 그때마다 천막에 닿아 흔들렸다. 트럭이 완전히 사라지려 할 때 수인의 입에서 단단한 고체와도 같은 입김이 창밖으로 뻗어나갔다.

쓰레기장의 장난감 바구니는 이제 눈에 뒤덮여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길게 구부러져 솟아 있는 손잡이만이 간신히 그것이 바구니라는 것을 알려 줄 뿐이었다. 수인은 창문을 닫아 버렸다. 남의 집에 온 것처럼 수인은 점퍼 주머니에 깊숙이 손을 넣고서 집안을 서성였다. 가구와 물건을 들어낸 자리마다 반듯한 모양으로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런데도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수인은 점퍼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베개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의 무게가 수인을 땅속으로 끌고 들어갈 것 같았다. 수인은 바로 누웠다. 천장의 못 자국이 불현듯 생각난 꿈 내용처럼, 단순하고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이었다. 수인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조금만 뒤척여도 패딩 점퍼에서 요란한 마찰음이 생겨났다. 수인은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았다. 오후 4.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가늠해보았다. 현관 바닥에 떨어진 나사못이 되어 보았다. 보일러의 다이얼식 버튼이 되어 '온수 전용' 쪽으로 돌아가 보았다. 두루마리 휴지가 되어 식탁 아래로 떨어진 다음 풀려나갔다가, 충전식 청소기 콘센트 속으로 쏙 들어가 보았다. 여름용 등받이쿠션 밑으로 종이처럼 납작해져서 숨어 있다가, 나사가 헐거워진 서랍장 손잡이가 되어 고정되어 보았다. 이름, 주변사람, 헤어스타일, 날짜 등등 자신에 관련된 것들이 떠오르지 못하도록 수인은 생각의 가동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결혼 전, 종종 이런 식의 장난을 치며 이부자리에서 게으름을 피우곤 했었다. 너무 오랜만에 해보는 것이라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수인의 머리 속에 자신의 신상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마치 새롭게 알게 된 사람인 양, 스스로에게 이질감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수인은 언제나, 이것이 오히려 순수한 자기 자신에 대한 침입이라고 생각됐었다.

허공의 손이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미지근하고 찐득거리는, 덩어리가 되어 가는 물질을 수인의 정수리에 조금씩 쏟아 부었다. 그 물질은 아무도 모르게 수인의 몸과 마음을 뒤덮으면서 거실 바닥으로 퍼져 나갔다. 수인을 장악하려는 손의 처분을 지켜보면서, 수인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손은 이번에는 다시 수인을 안았다. 수인은 더욱 차분해져서, 그 상한 냄새로 가득 찬 온기를 느꼈다. 몇 번이나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들고, 한눈을 팔다 보면 다시 어깨나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수인은 더 이상 자세를 고치려 하지 않고 탁자 쪽을 바라보았다. 똑바로 집어넣지 않은 의자 다리들이 탁자 밑 허공을 흩어 놓았다. 빈 의자 위에는 물방울 두세 개가 남아 사라져갔다. 꺼진 TV 화면에 먼지가 얇게 덮여 있었고, 손가락이 지나간 흔적이 먼지를 지우며 이리저리 뻗어 있었다. 수인은 깍지 끼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는 이불 속에서 나와 의자를 나란히 정리했다. 의자 등받이에 잘 걸쳐 올린 점퍼 소매가 바닥 쪽으로 길게 늘어졌다. 수인은 티슈로 의자 위의 물방울을 훔친 뒤에 천천히 TV 화면을 쭉 닦아냈다.

수인은 개수대에서 손을 씻었다. 그리고 물기를 바지에 문지르고는 삐딱하게 놓인 빈 의자로 가서 앉았다. 탁자 밑 서랍에서 손거울을 꺼냈다. 거울은 재빠르게 탁자 밑면과 천장, 욕실 스위치, 전자레인지의 디지털시계 등등을 불러들였다가 수인의 얼굴을 비췄다. 윗입술이 아랫입술보다 두꺼운 편이었다. 수인은 윗입술을 들어올렸다. 입술 안쪽 피부와 입술로 이어지는, 거의 알기 힘든 경계를 찾아내려 애썼다. 그런 뒤 코에 닿을 정도로 입술을 더 들어올렸다. 잇몸과 입술을 잇는 긴 살점과 굵고 얇은 핏줄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수인은 한동안 집요하게 입안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욱신거리는 두 개의 앞니 중에 한 개를 손가락으로 잡았다. 앞니는 아무런 저항 없이 수인의 손가락을 따라 쑥 빠져 나왔다. 수인은 티슈 한 장을 탁자 위에 펼쳐 놓고 빠져 나온 앞니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손거울을 엎어 놓고서, 이가 빠져나간 자리를 혀로 꽉 채워보았다. 피가 새어 나와 입안이 찝찔해졌다. 수인은 피를 삼켜가면서 다시 손거울을 비췄다. 앞니 하나가 없어진 입 속은 더는 웃기지도 않은 고전 개그 장면처럼 지리멸렬하게 보였다. 나머지 한 개의 앞니도 수인이 잡아당기자마자 쉽게 빠져 나왔다.

수인은 티슈 위에 나란히 앞니 두 개를 놓았다. 그리고 나머지 치아들이 뽑히는지 일일이 당겨보았다. 입속이 너무 건조해 침이 잘 고이지 않았다. 수인은 가끔씩 입에 침을 모으느라 동작을 멈추곤 했다. 빠진 이는 놀랄 정도로 입속에 있을 때보다 커 보였다. 뿐만 아니라 그 탁한 색과 울퉁불퉁한 모양새가 너무도 추하고 터무니없었다. 수인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도무지 이런 물체를 입 속에 지니고 다닌다니 무슨 조화인지 알 수 없었다. 수인은 처음에는 빠진 앞니 두 개를 멀찌감치 응시하고만 있었다. 물론 앞니가 빠진 자리를 혀로 꽉 채운 채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안에서 밖으로 또는 밖에서 안으로 자신도 모르는 것들이 드나들 것만 같았다. 놀라운 마음이 한결 가시고 난 뒤에는 한 개의 앞니를 집어 코 가까이로 가져왔다. 그리고 위조지폐를 가려내려는 사람처럼 신중하게 훑어보았다. 그러자 자신의 얼굴이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없어지면서 앞니 쪽으로 얼굴이 쏟아지는 듯이 현기증이 났다. 어디 치아뿐일까. 수인은 자신의 몸을 훑어보면서 더듬는 시늉을 해보았다. 그 생소한 느낌은 수인을 괴롭히는 동시에 자유로운 기분에 사로잡히게 했다. 수인은 예상치 못한 쾌감에서 쉽사리 빠져 나오지 못했다. 윗니, 아랫니를 다문 채로 입술을 최대한 크게 벌려서 치아가 전부 드러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손거울을 높이 치켜들었다. 수인은 거울 속 자신의 과장된 입모양과 그 때문에 더욱 과장되어 있는 자신의 표정을 언제까지나 지켜보고만 있었다. 누군가는 그때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두드렸다. 수인은 단단한 손가락 마디가 현관문에 부딪히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아직 떼어내지 않은 문 밖 메모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벨을 누르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수인은 티슈를 여러 번 접어 앞니 두 개가 빠져 나오지 않도록 잘 여미고서 그것을 다시 한 번 호일로 감쌌다. 몇 번 더 짧고 명료해진 두드림과 함께 계시냐는 질문이 현관문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인기척이 없자 결국에는 사라지고 말았다. 수인은 종이컵을 가져다 호일에 싸놓은 앞니를 담아두었다.

3층 복도는 사뭇 조용했다. 엘리베이터 바로 왼쪽으로 비상계단을 이용할 수 있는 문이 보였고, 3인용 대기 의자가 놓여 있었다. 복도 중간 즈음에 이르자 유리벽으로 되어 있는 치과의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수인은 치과 밖에서 잠시 두리번거렸다. 대기실에는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혼자 앉아 있었다. 여자 아이는 소파에 걸터앉아 팔로 몸을 지탱하려 하면서 다리를 쭉 폈다가 소파에 떨어지는 장난을 반복했다. 안내데스크는 비어 있었다. 유리벽 밖으로 여자 아이가 수인을 흘끔 쳐다보았다. 수인은 대기실로 들어갔다. 식수대 옆에 있는 컵 소독기에서 적외선 불빛이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밖에서와는 달리, 의료기의 모터 소리가 간헐적으로 대기실을 활기차게 만들고 있었다. 수인은 여자 아이와 멀찌감치 떨어진 반대편 소파에 앉아 빈 안내데스크를 바라보았다. 조화를 심어 놓은 작은 화분들이 벽을 삥 둘러가며 선반 위를 장식했다. 우리 아이 충치 예방 어떻게 하고 계세요? 데스크에 세워놓은 알록달록한 안내 포스터가 치과 로고를 가렸다. 당신의 하얀 치아 밝은 미소를 위해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 충치 예방은 어떻게 하고 계세요? 포스터 귀퉁이에서 지나치게 인위적인 치열로 웃고 있는 백인 미녀가 자꾸 물었다. 수인은 어두컴컴한 곳에 앞니가 잘 싸여 있는지 가방 속을 들추어 확인했다. 가방 속에는 집을 나설 때 벨 위에서 떼어낸 노란 쪽지가 들어 있었다. 수인은 쪽지를 꺼내 '아기가 자고 있어요.'라는 문장을 다시 이어붙이기 힘들 정도로 두세 번 찢었다. 그리고 식수대 아래 있는 작은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여자 아이가 수인의 행동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소파 팔걸이에 기대어, 여운이 남은 채 흔들리고 있는 쓰레기통 뚜껑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수인은 여자 아이를 보고 계면쩍게 웃어 보였다. 곧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여자 아이는 고개를 기울여 수인의 입속을 확인하려는 시늉을 했다. 수인은 식수대에서 종이컵에 찬물을 받았다.

"몇 살이에요?"

여자 아이가 어눌한 발음으로 물었다. 그리고는 소파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엉덩이를 뒤로 빼며 수줍게 웃었다. 여자 아이의 앞니가 빠지고 없었다. 유치가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수인은 새치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고서 앉아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때 간호사가 치료실 문을 열고 바쁜 걸음으로 나오며 인사를 했다. 실내용 샌들 뒤의 조절 끈이 뒤꿈치 아래로 벗겨져 움직일 때마다 덜그럭거렸다. 간호사는 재재바른 동작으로 수인의 접수를 도왔다. 수인은 인적사항을 작성하기 위해 데스크에 기대어 몸을 기울였다. 한 여자가 복도 맞은편 통증클리닉에서 유모차를 밀고 나와 복도를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수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수인은 펜을 든 채로 잠시 허둥댔다. 생각지도 못한 물건이 수인의 차 트렁크 안에 여전히 있었던 것이다.

수인은 계단을 통해, 차를 세워둔 곳에서 가까이 있는 비상문을 열고 나왔다. 지하주차장에는 육중한 기계 모터가 갑자기 돌아가기 시작해서 수인을 각성시켰다. 키홀더에서 차 키를 골라내는 동안 지하를 흔드는 출차 경보음이 수인의 잇몸을 더욱 욱신거리게 만들었다. 수인은 운전석에 올랐다. 그리고 키홀더를 손에 쥔 채로 운전석에 잠시 앉아 있었다. 룸미러를 얼굴 쪽으로 돌렸다. 비뚤게 고정 된 귀걸이를 바로잡았고,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귀고리에 딸려 들어가 뽑히는 일이 없도록 귀 뒤로 잘 쓸어내렸다. 입안을 비춰보았다. 마치 오랫동안 없었던 것처럼 앞니 두 개를 다시 끼워 넣은 치열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워져 있었다. 치과 의사는 앞니를 살릴 수 있을지에 대해 비관적으로 말했다. 빠진 치아가 건조한 상태로, 시간이 너무 경과해버렸다는 것이다. 수인은 트렁크 스위치를 누르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지하에 ''하고 울렸다. 수인은 안치실로 가는 그 길과 같이 차 뒤쪽으로 걸어갔다. 힘을 주어 트렁크 문을 들어 올리자 접힌 유모차가 옆으로 누워 있었다.

"그렇지, 이게 있었어."

혀의 어색한 움직임 때문에 수인의 되찾은 치열에서 우스꽝스러운 발음이 새어 나왔다. 유모차의 더러운 앞바퀴는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햇빛가리개 부분이 구겨져 한 쪽 고정 레버가 빠진 채 뒤틀려 있었다. 수인은 끔찍한 기분이 들어 잠시 멈칫했다. 접힌 유모차를 들어 올려 바닥에 내려놓고 양쪽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자 흉물스럽게 뻗어 있던 앞바퀴가 바닥 쪽으로 서서히 내려갔다. 다음은 사람의 허리부분에 해당하는 쇠의 연결부분에, 둥근 플라스틱 레버를 오른발로 강하게 밟아 눌렀다. 그러자 '' 소리와 함께 유모차가 네 발로 고정되어 균형을 잡았고 햇빛 가리개 부분이 팽팽하게 펼쳐졌다. 수인은 빠진 레버를 다시 끼워 햇빛 가리개의 모양을 바로잡았다. 유모차는 덩치가 큰데다 싣고 내리기가 부담스러워 트렁크에 그대로 둔 시간이 더 많았다. 게다가 처음 직면하게 됐을 때 펴고 접는 방식이 복잡해서,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오로지 수인의 몫이었던 것이다. 전 남편의 친구들은 으레 그 일을 도우려 나서곤 했었다. 그 때마다 수인은 순순히 그것을 맡겨두고 엉거주춤하게 허둥대는 뒷모습을 지켜보곤 했었다.

수인은 햇빛가리개의 고정 핀을 젖혀서 자신의 몸 쪽으로 당겼다. 그러자 빈 유모차의 넓고 푹신해 보이는 몸체가 드러났다. 지지대의 5단 안전벨트가 좌석에 느슨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타고 있으면 내리려 하고, 내렸다 하면 다시는 타지 않으려는 실랑이 속에서 안전벨트를 억지로 채우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던가. 사실 유모차를 트렁크에 처박아 둔 가장 큰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미친 여자처럼 윽박을 지르는 자신의 모습이 잊힐 리 없었다. 수인은 이제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것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안심이 됐다. 이제 다시는, 첩보원처럼 허리를 구부리고 누군가의 안위에 전전긍긍하며 돌아다니지 않아도 됐다. 운전 중에 카시트와 전방을 번갈아 보며 개그맨 같은 목소리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됐다. 일일이 꼽을 수도 없는 혜택이 수인 앞에 놓여 있었다. 정신없이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면 고질적인 무기력이 어느 정도 중화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무기력한 상태에 혼비백산이 된 상태가 가중되는 것, 그 뿐이었다. 일꾼이 후려쳐 깎았던 물건의 값어치만큼이나 이전의 삶이 우습게만 여겨졌다. 수인은 벅차오르는 감정으로 안전벨트를 차례로 끼워보았다. 이렇게나 쉽고 간단하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안전을 도모하는 장치가 또 있을까.

수인은 유모차 뒤에 쪼그리고 앉아 수납 칸에 들어 있던 몇 가지 휴대용품들을 모두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손 소독제, 기저귀 2, 물티슈, 손수건, 장바구니, 유모차 커버 정도였다. 수인은 비상용으로 넣어 뒀던 비닐 팩에 그것들을 쓸어 넣었다. 한 손에 비닐 팩을 들고, 한적하다 못해 적막해진 지하주차장을 유모차를 밀며 가로질렀다. 수인은 대형 쓰레기통에 비닐 팩을 통째로 집어넣었다. 지렛대의 원리로 열리고 닫히는 쓰레기통 뚜껑이 거대하게 열렸다 닫혔다.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거추장스럽게 들렸다. 유모차는 말할 수 없이 가벼워져 버려서 수인의 감각보다 좀 더 빨리 굴러갔다. 때문에 어느새 수인은 손잡이를 잡고서 유모차를 따라가고 있었다. 어쩌다 지나가는 사람이 의미 없이 수인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러나 수인은 여장을 한 범죄자처럼 감정의 기복을 느끼며 좀 더 빨리 유모차를 따라갔다. 수인은 오로지 직진했다. 눈을 자주 깜박이지 않아 눈동자가 쓰라리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맹인들을 위한 오돌토돌한 지면 쪽에 바퀴가 닿자 유모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더 속도를 냈다. 수인은 거의 달리다시피 하여 겨우 유모차를 따라 가는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유모차가 낭떠러지와 같은 곳에 맞닥뜨려 산산조각이 날 것만 같은 행진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주차장 끝이 보였다. 주차장 끝에는 건물 지상으로 통하는 또 다른 자동문이 있었다. 자동문 옆으로는 빵을 실어 나르는 빈 플라스틱 박스들이 수인의 키보다 더 높이 쌓여 있었다. 수인은 조금 가빠진 숨을 고르며 유모차에서 손을 뗐다. 손이 금세 어색해져 버렸다. 자동문이 뭔가 감지하고서 혼자 열렸다 닫혔다. 자동문 안에서는 유치한 모자를 눌러쓴 빵 상점 직원이 상점 안에서 플라스틱 상자를 내놓기 시작했다. 직원은 수인을 잠시 인식하고는 심드렁하게 하던 일을 계속 했다. 직원이 내려놓은 플라스틱 박스에는 똑같은 종류의 빵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 위에 또 그 위에, 같은 방식으로 빵이 담긴 박스는 몇 번이고 쌓여 올라갔다. 수인은 추운 사람처럼 옷깃을 만지작거리면서 자신의 차가 있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수인의 뒤에서 잠시 동안 열려 있던 자동문이 닫히고 지하주차장은 한결 더 괴괴해졌다. 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구두굽이 땅바닥을 후벼 파기라도 하는 듯이 그 소리가 수인의 귀를 파고들었다.

출구로 나가기 위해서는 차가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 나오는 방식이 되어야만 했다. 수인은 핸들을 잡은 두 손에 힘을 주고 화살표를 따라 통로로 천천히 진입했다. 차창 밖으로 멀찌감치 빈 플라스틱 박스 더미가 보이고, 그 뒤로 어정쩡하게 세워진 유모차가 보였다. 차가 직진해 나아가는 곳에 이르자 유모차의 어두운 형체는 룸미러를 따라오며, 불안정하게 흔들리다가 시야를 벗어났다. 출차지점에 거의 다다랐을 때, 수인은 갑자기 시동을 꺼트렸다. 그러나 곧 시동을 다시 켜고 미세하게 후진을 한 뒤에,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수인은 좌회전 신호를 받기 위해 사거리 한복판에 멈춰 있었다. 길가에는 쓸어낸 눈이 여기저기 높이 쌓여 구정물로 변해가고 있었다. 수인은 수시로 룸미러를 들여다보았다. 날이 흐려 벌써부터 네온사인이 한 두 개씩 켜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지긋지긋하기는 매 한 가지인 곳이었다. 길 건너편 산책로는 텅텅 비어 있었지만, 도로 정비 때문에 길이 꽤나 막혔다. 겹겹이 이어지는 건물들 너머로 타워크레인이 높이 솟구쳐 있었다. 뿌연 하늘 아래, 수평으로 길게 떠 있는 타워크레인의 철골구조는 지독할 정도로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수인은 방향지시등을 켠 채로 울고 있었다. 쇠약해진 앞니로 혀를 살짝 물고 있었기 때문에 수인의 얼굴은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당선소감>


즐겁다, 그리고 오랜만에 착해지려는 내가 놀랍다

 

당선 소식을 듣고 눈 오는 모습을 본다. 악한 사람이 찢어발긴 뒤 뿌리는 백지 쪼가리처럼 눈송이들이 얼굴로 날아든다. 눈이 이렇게 오다니, 즐겁다. 내가 못 견디는 백 만 가지 중에 1번은 뭐니 뭐니 해도, 착한 것(다음은 우산 뒤집히는 것, 다음은 닭벼슬의 감촉……). 눈을 맞으며 오랜만에 착해지려는 나를 들여다보며 좀 놀랍다. 열 살 때 생각이 난다. 백 원을 내고 스프링 목마의 좁은 허공을 오르내리며 '아 정말 지겨워서 못살겠다'라고 생각한 뒤로, 쭉 그렇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30분 보너스에 시달리고 나서야 목마에서 내린 나를 조용히 쓰레기 태우는 공터로 데려갔던 건달 오빠. 건달 오빠가 늘어진 추리닝 바지주머니에서 꺼내 보여줬던 휴대용 칼을 잊을 수 없다. 작은 검정 버튼을 눌렀을 때 튀어나오던 그 화려한 섬광. 아직까지 누구도 나에게 그런 희망을 선물해주진 못한다.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 드린다. 나의 엄마이자 아빠, 스승이자 애인, 그리고 친구. 모든 역할을 혼자 해내느라 고군분투하고 있는 한 남자 분께도 영광을 돌린다.

 

 

<심사평>


 

세밀한 묘사의 '고열' 패기 넘치는 '내기의 목적' 두 작품 다 당선작으로

 

올해는 작품들이 폭넓고 다양했다. 소재도 다양하고 서사기법도 정통적인 방식에서부터 실험적인 방식까지 안정과 패기가 함께 하는 모습이었다.

본심에서 눈여겨 본 작품은 '작고 예쁜 클리셰', '불평등의 기원에 관하여', '잠자리', '내기의 방식' '달걀전집' 다섯 편이었다.

'작고 예쁜 클리셰'는 이혼한 부모의 재결합을 원하지 않는 중학생의 이야기로 그쯤 되면 어른들의 세계를 자기식으로 판단하고 의뭉스럽게 들여다볼 줄도 안다. 그러나 그 시각과 표현이 중학생의 것이 아니라 작가의 말을 대신 읽는 듯해 재미를 반감시켰다.

'불평등의 기원에 관하여'는 재미있고 빠르게 읽히는 미덕을 가졌으나 작품 앞부분에 보다 과감한 생략과 압축이 필요하며 트위터에 올린 글 하나로 국민적 좌빨색녀가 되어가는 과정과 불평등의 연관성이 짐작되지 않는다.

'잠자리'는 치매를 앓는 아버지와 가족들의 갈등을 다룬 작품으로 문장이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이 무난하기는 하나 내용이 익숙하고도 지루하게 느껴져 별다른 매력을 주지 못한다.

남은 두 작품 중 '고열'은 아이를 잃은 여자가 아이의 용품을 하나하나 버리며 자기 안으로 숨어드는 이야기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땐 아이가 없어진 정황에 대한 이야기부터 나와야 할 것 같은데 그런 것은 모두 뒤로 감추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관찰의 대상으로 놓고 심리와 동선을 꽃그림의 접사 사진을 보여주듯 세밀하게 그려내는 솜씨가 여간 아니다. 세상 밖으로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달걀껍질 속으로 숨어들 듯 나는 뭐냐? 하는 질문만을 고집스럽게 하고 있는 묘사의 압박도 대단하다.

또 한 작품 '내기의 목적'은 패기 있는 작품이다. 작품의 발상도 좋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도 좋다. 회사 안에서 늘 생계형 내기를 걸며 살았던 S의 삶과 그의 뒤를 이어 또 다른 목적으로 비슷한 내기에 빠져들었다가 끝내 퇴사를 당하는 나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를 한편의 보고서처럼 고찰한다. 작품 속에 나오는 내기가 가지는 비유적 의미도 각별하다.

이 두 작품에 대해 심사위원은 오래 고민하고, 두 작품 다 어느 것도 다른 하나를 위해 쉽게 내려놓을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고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두 작품 다 당선작으로 내기로 했다. 두 배의 축하 속에 힘차게 정진하기 바란다.

심사위원 : 이제하(소설가) 이순원(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