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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의 목적

김솔

 

인도인 프로젝트 매니저 뿌따는 자신이 인종과 피부색, 종교 차이로 인해 부당한 차별을 받았다는 이유로 부하직원인 나를 월요일 아침 회사 감사팀에 고발하였고 수요일 오후에 나는 두 번째로 인사위원회에 참석하였다.

나는 유태인 드레퓌스 중위보다도 더 결백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를 변호해 줄 에밀 졸라는 주위에 없다.

이 사건은 인도와 한국의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영국이 인도와 해결하지 못한 역사적 부채로부터 유발되었다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다. - 실제로 인도 직원들이 격렬하게 항의한 대상은 한국인 동료들이 아니라 영국인 경영자들이었다. - 그래서 누구는 이 사건을 두고 "2의 스와라지 운동"이라고 명명하였다. 하지만 회사가 공식적인 조사를 벌이는 동안 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떠한 집단행동도 금지되었으므로 나는 더욱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뿌따의 터번과 미간 사이의 붉은 표지와 수염에 대해 호기심을 보인 적이 없고, 회식 자리에서 그에게 소고기나 술을 제안하지도 않았으며, 파키스탄과의 국경분쟁에 대한 의견을 피력한 적도 없다. 다만 인도식 영어가 아직도 익숙지 않아 "Pardon?" 이라는 대구를 연발하고 있으며 크리켓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말한 적은 있다.

안산 소재의 회사 건물에는 인도인뿐만 아니라 일본인과 벨로루시인과 체코인도 함께 일하고 있다. 사장은 미국 뉴저지 출신이고 연구개발센터를 총괄하는 부사장은 영국에서 왔다. 하지만 그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국적이나 지위와 상관없이 공정했다고 자부한다. - 물론, 미국식 영어가 영국식 영어보다 더 친근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것마저 내 잘못으로 간주하는 건 너무 부당하다.

뿌따는 그저 U3 프로젝트의 전자패널 개발을 담당하고 있는 매니저일 따름이고 영국식 민주주의자로 개종한 순간부터 숙명에 대한 패배감을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만이 사회적 계급을 설정하지만 쉽사리 대물림되지 않는 시스템을 이해했을 것이다.

지난 금요일 저녁 뿌따와 함께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텔레비전 퀴즈쇼를 보다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서 비극이 탄생하였다. 퀴즈의 정답은 "불가촉천민"이었는데 그게 힌두어로 어떻게 번역되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크샤트리아"라고 외쳤고, 한때 크샤트리아 출신이었던 뿌따가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고, 수요일이 되어서야 듣게 되었다.

뿌따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과 언행들까지 자세히 증언하면서 자신의 인내심과 포용력을 입증하였다. 기억할 수 없는 것들은 부정할 수 없었고 부정하지 않는 것들은 사실로 인정되어 판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의 가장 큰 실수라면, 토론과 합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인도인 매니저에게 업무 진행사항을 수시로 보고하면서 의견을 교환하지 않은 것이었다. 불필요한 말보다 침묵의 힘이 갈등을 줄이고 사고의 영역을 넓혀 줄 것이라는 기대는 크게 빗나갔다.

이로써 나에겐 두 가지의 선택이 남았다. 무죄를 증명하면서 명예롭게 퇴직하느냐 아니면 무례를 인정하고 불명예스럽게 전출을 수용하느냐. 어느 쪽을 선택하든 인사위원회는 사건의 전모를 공개하지 않겠지만 내 빈자리로 쏟아지는 소문들로 나는 매일 부관참시 당하게 될 것이다.

뿌따는 외국계 회사의 수평적 질서를 지켜낸 공로로, 일종의 노벨평화상처럼, 전 직원 앞에서 포상을 받게 될 것이고 몰디브나 하와이로 가족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며 국제적 정치 감각을 가지고 있는 직원들을 보강하여 U3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것이다.

내가 뿌따라면, 무역업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한 M과장보다는, 호주와 이스라엘에서 각각 1년씩 봉사활동에 참여한 C사원을 중용할 것이다.

여러 가지 과민성 질병을 앓고 있는 M과장과 더 이상 일하지 않게 되는 건 즉각 환영한다. 그는 단 한 번도 불평 없이 나의 지시를 수용한 적이 없으며 내 기대를 절반 이상 만족시킨 적도 없다. 하지만 미국 시민권과 영어에 무두질된 혀가 M과장에게 치외법권을 주었다. 설령 예상치 못한 기적이 설화(舌禍)에서 나를 지켜내더라도, 나는 더 이상 그를 제어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머지않아 임원이 될 그는 한때 내가 자신의 상사였다는 사실부터 까맣게 잊어버릴 게 분명하다.

C사원과 헤어지는 건 못내 아쉽다. 신입사원인 그는 사막을 건너온 카라반 같아서 세대를 뛰어넘어 벌어지는 문화 현상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게다가 그는 나의 귀와 혀의 자격으로 뿌따가 주관하는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나와 달리 C사원은 사소한 안건을 두고도 뿌따와 의논하였으며, "Pardon?" 이란 단어도 연발하지 않았다. 와인을 즐기는 M과장과는 달리 C사원은 삼겹살과 소주를 주문하여 나를 기쁘게 하였다.

만약 지난 금요일 저녁 내가 뿌따와 함께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텔레비전 퀴즈쇼를 보고 있을 때, C사원이 우연히 우리와 합석하였다면, 내가 "크샤트리아"라고 외치기 전에, 그는 스마트폰으로 정답을 검색하여, "하리잔, 또는 달리트"라는 단어를 찾아주었을 것이다. M과장만 있었어도, 나는 성급하게 말을 뱉는 대신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 테스트와 경멸의 목적으로 - 그의 대답을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인생이다. 수천만 가지 사건들이 각각 높은 개연성을 가지고 주위에 득실거리지만 정작 간절해졌을 땐, 결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가장 절망적인 사건 하나만이 허탈하게 벌어진다. 그리고 일단 벌어진 사건에 이끌려 얼마간의 생명이 소진되는 것이다.

소위 삼류 대학을 졸업하고 어학연수는커녕 영어 학원조차 다니지 않았던 내가 졸지에 외국계 회사의 과장으로 변신한 사연은, 창립자 2세들의 권력 싸움의 결과였다. 각각 미국과 영국의 유명 대학에서 MBA를 마치고 돌아와 조직의 주요자리를 차지한 그들은 현재의 사업을 지키는 일보단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일에만 열광한 나머지 캐시카우(Cash Cow)를 통째로 잡아먹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결국 그들은 아버지와 재산과 인생을 모두 탕진한 채 실직자가 되었다. 물론, 그들이 부자들의 습관을 즉시 버려야 할 만큼 곧바로 가난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기억은 늘 회한의 힘으로 불어난다. 아무 소용도 없는 것들이 자신을 더욱 소용없게 만든다. 상황은 늘 개인보다 앞서고 개인은 역사를 통시적으로 감지할 수 없다. 더욱이 외국계 회사에서의 상황논리는 전적으로 세계사에 기초하기 때문에 해독은 거의 불가능하다. 학살자들을 피해 많은 동료들이 유태인처럼 떠났고, 가구처럼 남은 자들은 넉 달의 채불 임금이 조만간 해결되길 기대하며 영어학원에 등록했다.

합리적인 경영철학과 엄격한 다원주의는 여가와 자유의 신대륙을 잠시 보여주는 듯 했지만, 시장 점유율이 급속히 떨어지고 설상가상으로 신제품 개발 일정까지 늦어지면서 회사의 존폐가 오직 패전국 직원들의 희생과 헌신에 달려 있다는 상황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자, 외국인 상사들에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야근과 주말근무를 자청하는 기이한 상황이 이어졌다.

매일 U3 프로젝트의 진도를 확인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매니저로서 뿌따가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나에게 아무런 경고나 격려의 말을 건네지 않은 것으로 짐작하건대, 우리의 희생으로 인해 자신이 얻게 되는 이익만큼은 계산하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나와 뿌따 중 어느 누구도 인사위원회에서 이 사실까진 증언하지 않았다.

모든 게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꽃은 늘 끝에서 핀다. 선택할 수 없는 순간이란 너무 많은 선택을 한 뒤에 더 이상 선택할 수 없게 된 순간이다. 십여 년을 헌신했건만 올해까지 삼 년째 차장 진급 대상자에서 탈락시키고 있는 회사에 더 이상 미련 따윈 없다. 영어 점수를 높이기 위해 가족들에게서 시간을 빼앗고 싶지도 않다. 외동딸을 유치원에 보내야 하고 이 년마다 전셋집을 떠도는 처지에서 벗어나야 하는 아내는 꽃 앞에서 깊게 체념한 다음에야 가장의 선택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번 달부터 병원비 송금이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장인의 혈당 수치가 치명적 수준까지 높아질까 두렵다.

그렇다고 퇴직금 몽땅 털어서 당장 치킨 가게라도 차릴 작정은 아니다. 내 깜냥으로는 치킨 한 마리 파는 게 어렵다는 걸 인정한다. 그저 내가 잘 알고 있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새로운 환경을 찾아보겠다는 뜻이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외국인 상사에게 인종과 피부색, 종교 차이로 인해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는 회사로 이직하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머뭇거리다가 술기운을 빌어 O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울산의 밤에 홀로 갇혀 일을 하다가 그는 잠시 스톱워치를 멈추었다.

그와의 인연은 19971121일 저녁 1015분 참담한 표정으로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경제부장관의 성명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어려움, 유동성, 요청, 지원, 하락, 사태, 노력, 대책, 환율, 전망, 자금, 조건, 불안, 해결, 합리, 국민, 협조, 합심, 정상, 이해, 당부 등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갑작스레 중단된 텔레비전 드라마가 끝내 속개되지 않아 국민들로부터 공분을 샀다.

성명서에 따라 가장 먼저 아버지들이 타격을 받았고 자식들의 꿈이 차례로 거세되었다. 수십 년씩 근무한 회사의 부당한 처우에 제대로 항의 한 번 하지 못한 채 불명예 퇴직을 받아들인 아버지들의 나약함을 자식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믿었던 자들에게 배신당하고 새로 시작한 사업마다 실패하면서도 아버지들은 근엄한 권위를 존중 받고 싶었다. 그래서 아내와 자식이 떠나는데도 그들은 그저 술을 마시고 어금니를 뽑을 뿐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아버지들의 순종적인 퇴장과 자기혐오가 나와 O에게 일자리를 주었다.

그때 나에게 필요한 것은 전 생애가 아니라 눈앞에서 신기루처럼 어른거리는 미래의 1분이었고 그것을 선점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둥거렸건만 단 한 순간도 차지할 수 없었다. 그러면 나는 선술집에서 취한 채 발견되곤 하였다. 당장 무엇이라도 시작하지 않는다면 혈관 속에 맹독처럼 흐르고 있는 젊음이 나를 화석으로 전락시킬 것 같아 초조했다.

입사지원서를 채우는 일에도 넌더리가 날 무렵 울산 소재의 직장에서 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곳엔 친구나 친척은커녕 추억조차 없었지만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2인용 텐트 같은 자취방을 구하고 이발을 하고 통근버스에 실려 처음 출근하는 날부터 나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4년 후 대리로 진급하자마자 그곳을 떠났다. 그 동안 살림살이는 거의 늘어나지 않았고 슬픈 로맨스도 없었다.

O는 최근 입사 동기들과 술을 마시면서 나처럼 자신들을 떠난 사람들에 대해 잠시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내 근황이 궁금해서 전화를 걸었으나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와 성급히 끊었다고. 나는 그곳을 떠나 결혼을 했고 딸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외국계 회사의 차장이라고 말했다. - 아직도 과장이라고 고백하기엔 난 너무 닳았다. - 한때 뒷골목의 룸살롱을 전전하며 음란한 유희를 일삼던 우리는 이제 너무 낯설어져서 작별 인사조차 제대로 끝마칠 수가 없었다.

전세 구하기도 어려운데 지방으로 내려갈까? 유치원 가면 은미 방을 넓혀주어야 하고 당신에게도 튼튼한 화장대가 필요하잖아? 물가도 쌀 테니까 지금보단 더 여유로워질 거야.

역한 술 냄새를 피해 낚아채 듯 양복을 받아 든 아내는 남편의 술추렴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박했다. 은미에겐 술 안 마시고 영어를 잘 하는 아빠가 더 필요하다는 것 몰라? 난 절대로 은미를 우리의 과거로 만들진 않을 거야.

M과장의 아버지처럼 나도 딸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미국이든 호주로 이민을 떠나 청소부부터 시작할 각오는 되어 있다. - 가족은 서로에게 시간을 나누어 주는 관계이다. - 하지만 나는 여전히 M과장이 성공한 미래를 보장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작 그는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외국계 회사의 임원이 될 수는 있겠지만 이웃의 존경을 받는 이름은 결코 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나의 딸이 인종과 성별과 국가와 언어에 구애받지 않고, 상식과 습관에도 굴복하지 않으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가치를 위해 도전하는 사람으로 자라나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하여 훗날 외국계 회사의 인사위원회에 참석하여 영국인 부사장과 뿌따 앞에서 나의 무죄를 변호해 줄 에밀 졸라[1]가 되어 주길.

월요일 세 번째 인사 위원회에 참석한 나는 퇴근하면서 이틀간의 연차 휴가를 냈다. 그리고 아내에게는 지방출장으로 둘러대고 다음날 울산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십여 년 만의 방문은 차창 위로 실재보다 더 많은 얼굴과 풍경들을 등장시켰으나 이름이나 사연을 거의 기억할 순 없었다. 버스 안에서 읽으려고 준비했던 에밀 졸라의 문고판 책은 잘 읽히지 않았다.

경제부 장관의 성명서 발표 이후 수도권 부근의 연구소가 폐쇄되면서 울산 공장으로 이동하게 된 직원들은 권토중래의 의지도 없이 오직 가족을 위해 따뜻한 굴욕을 참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나처럼 신입사원들에게는 현실이 될 열의나 애정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무기수들처럼 업무가 지겨웠고 일상이 따분했으며 상사의 꾸지람을 들어도 쉽게 좌절하거나 흥분하지 않았다. 퇴근 후 함께 술집으로 몰려가는 대신 기숙사에서 저녁식사를 챙겨먹고 혼자 운동을 하다가 텔레비전 앞에서 잠드는 편을 선호했다. 그리하여 입사한 지 두 달 만에 방파제 부근 횟집에서 열린 신입사원 환영회식은 6시에 시작하여 8시에 끝났고, 신입사원 4명과 S과장만이 소주를 세 잔 이상 마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4년 동안 나와 같은 젊은이들이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위험한 연애를 하거나, 쫓기 듯 결혼하거나, 폭음하거나, 이직하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떠날 무렵 O는 창원 소재의 대기업으로 이직하기 위해 면접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는 프랑스령 기이나의 감옥에서 유일하게 탈출한 빠삐용과 드가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여자 친구로부터 임신 사실을 통보받은 O는 탈주 계획을 폐기하였고 나는 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두 번째 직장의 상사에게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땐 격주 토요일마다 근무하던 시절이었고 부하직원의 월차는 반조직적 행동으로 간주되곤 하였다.

O는 자신의 둘째딸 사진을 보여 주었다. 정수리에서 머리카락이 많이 사라진 그는 아이들을 통해 생의 볼륨감을 겨우 감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새 상사의 꾸지람을 들어도 쉽게 좌절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내가 겪고 있는 불편함을 이해하는 것 같았으나 이직까지 고민할 만큼 부당한 사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는 내 딸의 나이와 아내의 직업과 전세 값을 묻고 혀를 차더니 묵직한 침묵에 앞서 막걸릿잔을 건넸다.

S 과장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건 핑크색 오두막 형상의 케이크를 O의 손에 쥐어 준 다음이었다. - 그것이 한국인에게 보편적인 행동강령(Code of Conduct)이다. - 우리는 뒷골목의 룸살롱 대신 일본식 선술집 앞에서 헤어졌고 나는 24시간 편의점에 들러 맥주 두 캔을 샀다.

마누라야, 여기가 거기보다 더 따뜻한 것 같긴 한데, 은미를 키우기엔 너무 우울할지도 모르겠어. 우리도 미국이나 호주로 이민 갈까? 하지만 우리가 떠나 있는 사이 또 누군가 우리 몰래 죽어갈까 봐 너무 두려워.

러브호텔의 물침대에서 깨어나 천장의 거울에 비친 나와 마주하고 누웠을 때, 수도원의 원장에게 속아서 다시 감옥으로 붙잡혀 온 빠삐용처럼, 나는 울고 싶었다. 추억은 이미 사라진 제국의 유물에 불과했고 내 인생을 의탁하기에 서사의 힘은 너무 미약했다. 두개골을 으깰 것 같은 두통과 노래기처럼 식도를 오르내리는 갈증은 나와 S과장이 각각 속해 있는 세상을 구분 짓고 있었다.

S과장은 울산으로 내려오기 전까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수상한 시절의 중요한 정보들이 옥외 재떨이 주위로 모여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부터 담배를 피우는 동료들 주위를 기웃거리기 시작하더니 끝내 담배를 입에 물었다. 물론 자신의 주머니보다 동료들 주머니 속의 담배를 더 선호했고, 불씨를 더 빨아올릴 수 있는 꽁초는 함부로 버리지 않았으며, 공짜 담배를 얻기 위한 내기를 즐기고, 해외 출장을 떠나는 동료들을 찾아가 담배 선물을 부탁했다. 그래서 옥외 재떨이 주위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한대만"과장으로 불렸다. 그는 몸집이 작고 민첩해서 옥상 출입구 앞에 세워둔 망꾼들을 허탈하게 만들곤 하였다.

나의 직속상사가 뿌따이듯이, 그때 S과장은 O의 직속상사였다. 나와 S과장은 같은 부서가 아닌데다가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기 때문에 회사에서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나의 가장 절친한 술벗인 OS과장과의 내기에서 가장 많이 졌기 때문에 술자리에서 자연스레 S과장과 친해졌다.

S과장에겐 친한 동료나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주로 우리와 같은 신입사원들과 어울렸다. 우리는 그에게 저녁의 술 약속을 들키지 않기 위해 비밀보안에 각별히 주의하였건만 번번이 그의 습격을 받았다. 그는 초대를 받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일단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특히 술자리 거절은 곧 손해를 의미했다. 공짜라면 그는 무엇이든 받아들였다. 심지어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고안된 고약한 제안일지라고 그는 모른 척했다. 그리고는 러시안 룰렛을 즐겼다.

그런 S과장이 2년 전 자살했다. 프로이트의 격언[2]에 따라 그는 목숨을 걸고 누군가와 마지막 내기를 걸었던 것이고, 나는 그가 이겼으리라 확신한다. 너무 기뻐서 술 한 잔 걸쳤겠지만 더 이상 내기를 걸 대상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우울해졌을 것이고 죽살이의 경계를 나눌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일요일 저녁 고속버스를 타고 울산으로 내려오다가, 휴게소에 내려 어묵 꼬치 두 개를 사먹었고, 바지 주머니 속에 각각 담배 한 갑씩 쑤셔 넣은 다음, 마치 길을 잃은 살쾡이처럼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속으로 뛰어들었다.

빈부의 격차 없이 누구나 원하는 만큼 얻고 쓸 수 있게 된 낙원에서도, 내기적 인간인 S과장은 복권을 만들어 팔고 있지 않을까. - 이건 나와 내기를 걸어도 좋다. - 몇 차례의 죽음으로 숙명론자가 된 유령들마저도 자신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착각 속에서 생의 무료함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독배를 돌려 마실 것이고, 낙첨의 불운에 크게 낙담할 것이다. 그리하여 진노한 신은 명계의 질서를 어지럽힌 그를 이승으로 다시 추방할 수도 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인종과 종교를 뛰어 넘어, 남녀의 차별 없이, 모든 인간은 서로에게 이웃이라는 사실만으로 존중 받아야 한다. 배려 때문에 희생을 감내하지는 않더라도 정당한 이유 없이 상대의 생각과 행동을 방해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 비록 당신이 S과장의 내기에서 여러 차례 패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소통 방법을 매도해서는 결코 안 된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첫 번째 직장을 그만두고 두 번째 직장으로 떠나기 전날 마지막 회식을 준비하면서 나는 빈객을 초대하지 않았다. 물론, 어떻게 알았는지 그는 늦게 운동복 차림으로 부둣가 횟집에 나타났고 내게 간단한 석별의 인사를 건넨 채 먼저 돌아갔다.

터미널부근의 식당에서 콩나물 해장국을 먹고 있는데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습관적으로 상사의 권위를 침해하여 조직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므로 감봉 3개월에 면직처분의 징계가 확정되었으며 내가 원한다면 다른 부서로의 전직을 추진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전혀 신원을 알 수 없는 목소리였으나 모국어로 설명해주는 것만큼은 고마웠다.

안산행 고속버스의 출발시간까지는 두어 시간 남아서 나는 가까운 지하 PC방으로 들어가 취업사이트에 등록하였다. 아내와 딸의 신상정보까지 기록하고 나자 노예상이라도 된 것 같아 서글퍼졌다. 태평양의 공해(空海) 같은 자기 소개서 속을 난삽하게 흘러 다니는 문자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멀미가 나서 난생 처음으로 담배까지 피워 물었다. 이로써 나는 돌연사할 조건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목적도 없이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나는 문득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알려졌는지 궁금해져서 검색엔진에 내 이름을 입력하였다. - 옥스퍼드 사전에 에고서핑(Egosurfing)이라는 단어가 등록된 것이 2003년도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 한글과 영어를 바꾸어 가면서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모든 정보들로 나의 과거를 추적하였다. 만약 헤드헌터 회사가 구직자들의 동의 없이 검색엔진으로 찾아낸 개인정보까지 제공하는 게 관례라면, 뿌따의 모함은 자칫 카인의 표시가 되어 평생 나를 따라다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나의 죄목은 수많은 동명이인들의 하이라이트 속에서 가장 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10년 전에는 인터넷 자연어 검색엔진의 기능이 초보적 수준이었고, 익명의 개인들이 제공하는 정보들도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매일 야근과 음주에 찌들려 있던 S과장이 어떻게 내기에서 그토록 높은 승률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이다. - 그의 기숙사 방에는 책과 신문은 거의 없고 이주일 분량의 옷가지와 낡은 카세트플레이어와 빈 소주병 몇 개가 전부였다. - 아무튼 내가 두 번째 직장에 안착할 무렵부터 인터넷 검색엔진으로 세상의 모든 도서관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고 사람들은 얄팍한 상식을 밑천 삼아 내기하는 걸 꺼리기 시작했다.

S과장이 내기적 인간으로 성공했던 이유를 누군가는, 그가 3년 동안 과장 승진에서 누락되었던 경험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처남의 사업 실패 이후 자신을 찾아오는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느라 제대로 업무에 집중할 수 없는 그가 높은 인사고과 점수를 얻지 못한 건 당연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다급한 금전적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S과장에겐 진급이 절실했고, 불리한 상황을 극복할 유일한 방법은 승진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 달 동안 기숙사 도서관에 틀어박혀 시험 준비를 했고 삼수 끝에 목적을 달성하였는데, 상식 과목에서 응시자 최고의 점수를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나는 들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원칙에 예민하며 과묵했던 S과장이 내기를 고안했던 원래의 목적은 진실을 판별하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언쟁의 피로감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이었다. 국가 파산 이후 계속된 건기(乾期) 동안 사람들은 하나같이 초조해져서 조그만 불씨에도 달아오르며 입속에 숨긴 칼로 검투와 자해를 시도하였으니,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들을 동원하여 오해와 갈등의 싹을 처음부터 잘라내는 것보다 영웅시대에 더 효과적인 처신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거창한 철학을 버리고 단지 공짜 술을 얻어 마시기 위해 내기를 제안하였다.

내기의 주제는 결코 거창하거나 진지하지 않았다. 그래서 설령 내기에서 졌다고 해서 수치스럽게 생각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우리나라 고속도로에서 가장 긴 터널[3]"따위를 모른다고 해서 수 만원의 술값을 혼자서 부담해야 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그래서 한 번은 내가 S과장에게 술잔을 건네면서, 부하직원의 얄팍한 지갑이나 털지 말고 차라리 텔레비전의 퀴즈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떳떳하게 상금을 타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한 적이 있었는데, 느리게 손사래를 치면서 그는, 나보다 내기의 승률이 낮은 인간들에게 양보하는 게 도리라고, 그리고 혹시 상금을 받게 된다면 채권자들은 더욱 악랄한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힐 것이라고 말했다.

S과장은 자신이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주제를 두고 내기를 거는 법이 절대 없었다. 대신 자신이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실들의 일부만을 자신 없게 말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호승심을 부추겼고 그들이 내기를 걸도록 유도하였다. 피해자는 몇 순배의 술을 마신 뒤에야 자신의 성급함과 우둔함을 후회하였으나 이미 너무 취해서 S과장을 다음 내기로 끌어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S과장은 탐욕스럽게 2차나 3차까지 따라 나섰다가 자신이 술값을 도맡게 되는 상황을 피해갈 만큼 주도면밀했다. 그는 승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상석을 피해자에게 양보했고 늘 조용하고 겸손하였으며 자신의 기호에 맞춰 주문을 하지 않았다.

퇴직을 결심한 이상 흉흉한 소문 때문에 명예마저 훼손되는 것을 막고 싶어서 나는 19971121일 저녁 1015분 참담한 표정의 경제부 장관처럼, 희생, 헌신, 부당함, 고마움, 영어, 동료, 명예, 양심, 가족, 시작, 내기, 행운 등과 같은 단어들이 포함된 메일을 작성하였다. 그걸 누구에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 한글로 작성되어 있으므로 뿌따는 수신인으로 적절하지 않았다. - 오래 전 S과장이 남긴 메일 주소로 보냈다. 유령들과의 내기에서 이기려면 저승에 잘 알려지지 않은 진실들이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곧이어 안산행 고속버스가 터미널 플랫폼으로 들어왔고 O에게 작별의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차창에 잠시 담겼다가 사라진 것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쓸쓸했다. 에밀 졸라를 조금 읽다가 잠이 들었다.

안산 터미널에 내릴 무렵 O에게 전화가 왔다. 전혀 어울리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자신의 딸이 핑크색 오두막 형상의 케이크를 아주 좋아했다는 사실과 함께 S과장이 묻혀 있는 납골당의 위치를 차례대로 말했다. 나는 은미를 위해 똑같은 케이크를 샀다.

S과장은 아내와 이혼하면 처남의 빚을 탕감 받을 수도 있었으나 업구렁이 같은 아내를 버리고 딸을 혼자 돌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빈 월급봉투에 가끔씩 자괴감이 치밀어 오를 때면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었다고 O는 증언하였다. 하지만 굴욕에 더 잘 적응한 쪽은 S과장이 아니라 그의 아내였고 S과장의 마지막 내기 이후에도 살아남아서 억대의 보험금을 받게 되었다고, 나는 또 들었다.

잠든 딸과 아내를 내려다보며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들을 연거푸 던졌다. 질문을 아는 한 답도 알 수 있다는 잠언은 결코 사실이 아니었다. 질문이 이어질수록 밤은 더욱 깊어지면서 출구는 더욱 희미해져갔다. 가능하다면 나는 오두막 케이크 속으로 숨어들어가 아침까지 쉬고 싶었다. - 은미는 케이크 반조각도 채 먹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샌 나는 샤워를 하고 왁스로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리한 다음 붉은 넥타이를 골라 메었다. 이유를 궁금해 하는 아내에게 부사장과의 회의가 있다고 둘러대었다. 그리고 회사 앞 구둣방에 들러 구두를 닦았다. 설령 출입문을 들어서다가 인사위원회의 징계 결과를 알리는 대자보를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주춤거리지 않고 당당하게 내 책상 앞까지 걸어갈 것이다. 동료들이 나를 유령처럼 대하더라도 냉정함을 유지한 채 육아휴직 신청서를 작성하리라. 그리고 부당한 징계 덕분에 나는 무자비한 경쟁자들 대신 따뜻한 가족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만방에 공표하리라.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사무실은 고요했고 인사발령의 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 뿌따는 U3 프로젝트의 중간보고를 준비하느라 아침부터 자리를 비웠고 M과장은 인도에서 방문한 엔지니어들과 점심까지 거르면서 회의를 진행하였다. C사원은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는 동안 해결했던 업무들에 대해 간단히 보고하더니 곧장 대전으로 출장을 갔다. 하지만 나는 언제 누가 나를 찾아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자리를 오래 비우지 않았고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마치 최후의 유언을 앞둔 사형수처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육아휴직 신청서는 반려되었다. 옥외 재떨이 주위에서 내게 라이터를 빌려준 동료들만이 나의 갑작스런 변화를 불길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울산의 터미널 부근에서 콩나물 해장국을 먹다가 전화로 들은 이야기는 사실 물침대 위에 누워서 꾼 꿈의 일부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또는 조직 내부에 숨어 있던 에밀 졸라가 역사적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인사위원회에 항소한 것은 아닐는지. 일탈의 충동에서 벗어난 지 수일이 지났는데도 파국의 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헤드헌터로부터 전화도 걸려오지도 않았는데, 불경기에다 고급 실업자들의 숫자를 감안하면 이해 못할 상황도 아니었다.

그때부터 나도 S과장처럼 옥외 재떨이 주위의 동료들에게 내기를 걸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해와 논쟁을 막기 위해 필요한 건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의심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였다. 동료들은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스마트폰의 도움 없이 선뜻 내기에 참여하는 것을 두려워했으나 돌아서서 곧장 결과를 확인하고는 사라진 행운을 아쉬워했다. 매번 내기는 성사되지 않았고 아무도 정답을 궁금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항상 내기에서 이겼다. 설령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도 나는 내기의 목적을 훼손하지 않았다. - 이것은 야바위꾼이 100% 승률을 가지고 행인의 주머니를 뒤지는 방법과 같다. , 행인은 세 개의 종지 중 하나 속에는 반드시 주사위가 들어 있다고 간주하고 돈을 걸지만 사실은 세 개의 종지 어디에도 주사위는 없다. 다만, 행인이 고르지 않은 두 개의 종지를 야바위꾼은 결코 들춰 보이지 않음으로써 내기의 공정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나도 S과장처럼 승자의 지위를 내세워서 패자의 슬픔을 조롱하지 않았다. 나는 허름한 음식 앞에서도 겸손하였고 동료들의 투정을 이해하였다. 그렇다고 허기가 사라질 때까지 침묵하거나 사무적인 화제들을 이어가지도 않았다. 합리적인 경영철학과 엄격한 다원주의가 권장되는 외국계 회사에서 퇴근 후 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벌이는 사적 내기는 적어도 한국인들의 애사심과 이타심을 자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그래서 나는 S과장과는 달리 2차나 3차 술자리까지 기꺼이 따라나섰고 내 차례가 되어 지갑을 꺼내는데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나는 어느 덧 문딜러로 불리기 시작했다. 문씨 성을 가진 딜러라는 뜻이겠으나, 틈만 나면 엄지와 검지를 문질러 대면서 내기를 제안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달 거래자(Moon dealer)로 이해하기로 했다. 미국인들에게 달은 가끔씩 몽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점점 나는 국제적 수준의 행동강령을 체득하고 있었다. 인도인 프로젝트 매니저인 뿌따는 인종과 피부색, 종교 때문에 부당한 차별을 받았다는 사실도 잊은 채 내가 이룩한 성과들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 눈에 보이지 않는 동료들이 일손을 돕고 있어서 우리의 프로젝트는 일정보다 더 빨리 진행되었다. - 하지만 언제나 파국은 번개처럼 왔다가 모든 걸 끝내고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 이제 나의 종말을 맘껏 즐기고 조롱하시라. 당신과 나 둘 중 누가 더 절망적인지 내기해도 좋다.

파국에 닿기 전에 S과장이 잠들어 있는 벽제의 납골당에 다녀오지 못한 걸 진심으로 후회한다. 그리고 O에게 전화로라도 고맙다고 말하지 못한 나의 졸렬함에 용서를 구한다.

어느 날 오후 옥외 재떨이 부근에서 사소한 내기가 벌어졌고 누군가 나를 이겼다. 가을비가 쏟아지려는 찰나였기 때문에 마음이 급해서 어떤 질문과 어떤 대답이 오갔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스마트폰을 꺼내 정답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나는 서둘러 패배를 시인하였다. 그래봤자 높은 승률의 명성에 흠집조차 남길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날 저녁 회사 앞 호프집에서 만나 치킨과 맥주를 접대하였다. - 그러고 보니 B과장이라는 것 이외에 어느 부서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 맥주 한 잔에서 시작된 한기가 몸을 비틀기 시작하자 서둘러 술자리를 파하고 귀가하려는데 헤드헌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여자 목소리였다. 서울에 위치한 전자회사가 나의 이력서에 관심을 보이며 부장의 직위와 천만 원 이상 높은 연봉 조건을 제시했다는 것이었다. 솔깃한 제안이었으나 즉답을 피한 채 나는 아내와 상의해서 연락하겠다고 말했는데 전화를 끊고 나서야 그 오만한 대답이 완곡한 거절로 이해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기의 습관 덕분에 나는 현재의 일상에서 평온을 완전히 되찾았기 때문에 이번 기회를 잃게 되어도 별로 아쉬울 건 없었다. 그보다 더 파격적인 제안이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집에 도착하자 아내와 은미가 없었다.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샤워를 끝내고 감기약을 삼켰을 때 아내로부터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자초지종도 없이 당분간 은미와 목포의 친정으로 내려가 있겠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아내는 휴대전화의 전원을 껐고 장모를 깨우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나는 내일이 만들어 낼 기적을 기대하며 잠이 들었다. 하지만 새벽에 다시 찾아온 한기가 나를 비몽사몽의 틈새에 밀어 넣고 누르는 바람에 잠을 설쳤고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규정보다 1시간이나 늦게 출근하였는데도 다행히 사무실에는 단 한 명의 목격자도 없었다. 가쁜 숨을 고르며 달콤한 행운을 만끽하고 있을 때 마치 수렵물이 덫 속에 들어가기를 기다린 사냥꾼처럼 인사팀장이 나타나서는 영문으로 작성된 징계명령서를 건넸다. 인사팀장의 해독에 따르면, 습관적으로 상사의 권위를 침해하여 업무를 지연시킴으로써 회사에 중대한 손해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동료들과 도박을 즐겨 위화감을 조성했으며 경쟁업체에 회사의 주요 기술 정보를 건네려 했기 때문에, 회사는 나를 즉시 해고하고 민사소송을 진행할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 온몸의 피가 정수리로 모여들었지만 나는 즉각 반박하지 않았다. 말은 오해만을 늘려갈 따름이다. 차라리 소송의 결과를 두고 내기를 제안하고 싶었지만 상대가 너무 많고 모호하여 일일이 대응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만을 달라고 부탁했다. 인사팀장이 사라지자 사무실은 안전한 무인도가 되었다. 십여 분을 서성거리면서 동료들을 찾다가 문득 아내와 은미가 사라진 집의 풍경이 겹쳐지면서 섬뜩해졌다. 잠시나마 고립감을 떨쳐버릴 작정으로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인류들과 교신을 시도해보았으나 바닷물을 마실 때처럼 갈증만 더욱 불어날 뿐이었다. 결국 나는 인터넷 검색엔진으로 에고서핑을 즐기다가 나와 관련하여 8년 전에 작성된 신문기사 한 편을 발견하였다. - 울산의 PC방에서는 발견하지 못한 자료였다. - 나의 첫 번째 직장이 경쟁사로 이직한 직원을 상대로 기술 유출의 소송을 제기했다는 내용이었는데, 실명만 거론되지 않았을 뿐 부서와 이직날짜는 나와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였다. 하지만 정작 나는 그런 송사에 휘말린 적이 없었던 데다가 그 소송을 준비하고 있는 실무자가 바로 S과장이었다니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분명 악몽이었다. 아니면 누군가 악의를 품고 나의 과거를 조작하였을지도 모른다.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 속에서는 미래가 과거보다 앞서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 - 그러니까 누군가 최근에 작성한 신문기사의 날짜를 바꾸어 옛 신문 파일 속에 끼어 넣은 것이다. - 그런데 더욱 기함할 사건은 2년 전 죽은 S과장이 내가 보낸 메일을 읽고 어제 퇴근 무렵에 답장을 보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S과장의 부인에게서 발송되었다고 생각했다. - 죽은 자들의 이메일 계정은 일정기간 동안 유가족들이 관리할 수 있도록 묵인해 준다고 들었다. - 내용은 내가 S과장을 협박해서 뜯어낸 이천만 원을 이번 달 말까지 돌려주지 않으면 가족에게 나의 비밀을 모두 폭로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어떤 여자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그런데 수신인으로 내 이름뿐만 아니라 아내의 이름까지 지정되어 있는 게 아닌가. 여전히 휴대전화의 전원을 꺼놓은 아내에게 에둘러서라도 닿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있을 때 뿌따가 M과장과 C사원을 대동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나는 많은 인도인들이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면서 세계의 정보기술 분야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뿌따는 U3 프로젝트의 전자패널 개발을 위해 미국의 경쟁업체에서 사장이 직접 영입한 베테랑 프로그래머 중 한 명이다.

 

[1] . 아직 이해관계나 인간관계 뒤얽힌 이전투구에 휩싸이지 않은 그대들, 아직 어떤 비열한 사건에도 연루되지 않은 그대들, 순수와 선의로 목청껏 외칠 수 있는 그대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정의의 완성을 위해 일어날 것인가?- <나는 고발한다>, 에밀 졸라 저, 유기환 번역, 책세상, 2005, p67

 

[2] "산다는 게임에서 가장 큰 판돈인 삶 자체가 걸려 있지 못할 때엔 삶의 흥미는 줄어든다."

 

 

<당선소감>


간절했던 소설운전면허 이제야 받고보니 흰 백지가 무섭다

 

살면서 더 필요한 것은 운전면허였다. 그렇다고 파리의 운전사가 되는 고단함을 선택하려는 것도 아니었고, 석유를 얻기 위해 강대국들이 벌이는 추악한 전쟁을 묵인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쓸 만한 이야기가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세상을 떠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라 아내를 조수석에 태울 것이다. 그리하여 지도도 없이 떠돌다가 아무 곳에서나 차를 세우고 작업실을 차릴 것이다. 그리고 총천연색의 꿈을 꾸는 아내의 이야기를 받아 적기 시작할 것이다. 여기까지의 계획은 1222일 전에 세워졌다. 하지만 이야기를 걸어둘 시공간을 얻는 게 문제였다. 대형포털 사이트의 한 귀퉁이에 세를 내어 블로그를 운영해 보았으나 방문객들이 너무 적어 최근 문을 닫고 말았다. 점점 나의 언어는 헐거워지고 비분절적이 되어 갔다. 더 늦기 전에 소설면허증이 간절했지만 10여 년째 신문사로부터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와 아내는 1226일부터 운전면허 학과교육부터 받을 작정이었다. 그러다가 1223일 오후 직장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지금 밤하늘에 도착한 별빛이 이미 수억 광년 전에 사라진 것처럼, 그것은 10여 년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가 곧 지나쳐버릴 메시지인지도 몰랐다. 서둘러야 한다. 하지만 의식 없이 흰 백지 속으로 뛰어드는 게 이젠 무섭다.

나의 문학계보는 간단하다. 김제복, 박지현, 윤성택, 안시아, 이해존, 최치언, 천서봉, 김미심. 윤형철, 김영진, 김기석. 하지만 나의 연애계보는 훨씬 복잡하다. 아내 박순용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족을 거쳐 친구들과 회사동료들까지 아우르고 나면 "6단계 법칙"은 수정되어야 한다.

 

 

<심사평>


 

세밀한 묘사의 '고열' 패기 넘치는 '내기의 목적' 두 작품 다 당선작으로

 

올해는 작품들이 폭넓고 다양했다. 소재도 다양하고 서사기법도 정통적인 방식에서부터 실험적인 방식까지 안정과 패기가 함께 하는 모습이었다.

본심에서 눈여겨 본 작품은 '작고 예쁜 클리셰', '불평등의 기원에 관하여', '잠자리', '내기의 방식' '달걀전집' 다섯 편이었다.

'작고 예쁜 클리셰'는 이혼한 부모의 재결합을 원하지 않는 중학생의 이야기로 그쯤 되면 어른들의 세계를 자기식으로 판단하고 의뭉스럽게 들여다볼 줄도 안다. 그러나 그 시각과 표현이 중학생의 것이 아니라 작가의 말을 대신 읽는 듯해 재미를 반감시켰다.

'불평등의 기원에 관하여'는 재미있고 빠르게 읽히는 미덕을 가졌으나 작품 앞부분에 보다 과감한 생략과 압축이 필요하며 트위터에 올린 글 하나로 국민적 좌빨색녀가 되어가는 과정과 불평등의 연관성이 짐작되지 않는다.

'잠자리'는 치매를 앓는 아버지와 가족들의 갈등을 다룬 작품으로 문장이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이 무난하기는 하나 내용이 익숙하고도 지루하게 느껴져 별다른 매력을 주지 못한다.

남은 두 작품 중 '고열'은 아이를 잃은 여자가 아이의 용품을 하나하나 버리며 자기 안으로 숨어드는 이야기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땐 아이가 없어진 정황에 대한 이야기부터 나와야 할 것 같은데 그런 것은 모두 뒤로 감추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관찰의 대상으로 놓고 심리와 동선을 꽃그림의 접사 사진을 보여주듯 세밀하게 그려내는 솜씨가 여간 아니다. 세상 밖으로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달걀껍질 속으로 숨어들 듯 나는 뭐냐? 하는 질문만을 고집스럽게 하고 있는 묘사의 압박도 대단하다.

또 한 작품 '내기의 목적'은 패기 있는 작품이다. 작품의 발상도 좋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도 좋다. 회사 안에서 늘 생계형 내기를 걸며 살았던 S의 삶과 그의 뒤를 이어 또 다른 목적으로 비슷한 내기에 빠져들었다가 끝내 퇴사를 당하는 나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를 한편의 보고서처럼 고찰한다. 작품 속에 나오는 내기가 가지는 비유적 의미도 각별하다.

이 두 작품에 대해 심사위원은 오래 고민하고, 두 작품 다 어느 것도 다른 하나를 위해 쉽게 내려놓을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고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두 작품 다 당선작으로 내기로 했다. 두 배의 축하 속에 힘차게 정진하기 바란다.

심사위원 : 이제하(소설가) 이순원(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