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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뚜오슬렝 학살박물관을 견학했습니다.


뚜오슬렝 학살박물관은?

수도 프놈펜에서 대표적인 학살이 자행된 곳이며 수많은 지식인과 무고한 시민들이 이 곳에서 학살됐다. 요 자그만 한교에 한때 3만이 수용돼 있었고, 단 7명만 살아남았다고 전한다. 지금은 대학살 기념 박물관이 돼어 프놈페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을 맞이한다.



하늘이 너무 맑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대학살의 현장을 가고 있는데 말이죠.


버스에 내려서 조금 걸어야 됩니다.


박물관 근처입니다. 팔이 잘린 사람 등 몸이 불편한 분들이 앞에서 구걸을 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썬그라스 등을 팔기도 합니다.


박물관 근처 풍경입니다.


박물관 간판(?) 입니다. 그 현장의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서 킬링필드에 대해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킬링필드란?

'죽음의 뜰'이란 의미의 킬링필드(Killing Field)는 캄보디아 크메르루즈 정권 때, 크메르군에 의해 수천명이 학살되어 매장된 곳이다.

1975년 4월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함에 따라 약화된 캄보디아의 친미 론놀정권을 몰아낸 크메르 루즈의 지도자 폴포트가 '농민천국'을 건설한다며 1979년 1월 베트남군이 프놈펜을 함락할 때까지 4년간 자국민을 대상으로 대량학살을 자행하였다.

당시 폴포트가 정권을 잡자 론놀정권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국민들은 환영하였다. 그러나 폴포트는 새로운 '농민천국'을 구현한다며 도시인들을 농촌으로 강제이주 시키고, 화폐와 사유재산, 종교를 폐지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 론놀정권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지식인, 정치인, 군인은 물론 국민을 개조한다는 명분아래 노동자, 농민, 부녀자, 어린이까지 무려 전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00여만명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크메르 루즈 정권은 1979년 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캄보디아 공산동맹군에 의해 전복되었다.

이는 캄보디아 뉴욕타임스 특파원 시드니 쉔버그의 글, '디스프란의 생과 사(한 캄보디아인의 이야기)'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 글은 1980.1.20 뉴욕타임스에 실렸고 쉔버그는 이것으로 퓰리쳐상을 수상하였다. 이 글은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킬링 필드'의 토대이기도 하다.

한편, 2003년 6월 캄보디아 정부와 유엔은 과거 크메르 루주 정권에 의해 자행된 집단학살에 대한 재판을 하기로 합의하고 집단학살 관련자 처벌을 목표로 국제사회가 지원하는 특별재판소를 설치키로 하는 내용의 문서에 서명했다.


박물관 입구입니다.

오른쪽이 매표소 입니다.



야외의 경치는 좋아보입니다.

하지만 수십 년 전만해도 이곳에서는 엄청난 고문이 행해진 곳이죠.



어떻게 고문을 했는지 그림과 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크메르어는 비록 해석 못하지만, 그림만 봐도 섬뜩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건물당 3층 입니다. 외국인 관광객이 특히나 많았습니다.


박물관을 둘러보는 단원들.


한 사람 당, 저 벽돌로 된 방안에서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철조망을 통해, 도망가는 사람들을 막고자 했습니다.


저희 단원이 한번 철조망에 갇혀 보았습니다.


저희가 쓰고 다니던 모자입니다.


한캄문화센터 직원분들과 찍은 사진입니다.


기념품 파는 곳 근처입니다.

모두 구경하며 쉬고 있습니다.





킬링필드 때 죽은 희생자들의 사진입니다.


지금도 캄보디아에서는 땅만 파도 해골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만큼 킬링필드 때, 목숨을 잃은 사람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고문 도구들입니다.

무시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고문했습니다.



이곳에 쌓여있는 해골이 전부가 아닙니다.

엄청난 해골이 쌓여있죠,


물은 항상 사먹었습니다.

박물관 앞 상점에서 물을 사고 있습니다.


다시 버스로 돌아가는 단원들.

정말 많은 걸 배우고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진 - 김기쁨, 변경재, 김재영, 심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