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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화되다 / 이승은


나무들의 연대가 적요롭다

몸 말아 등선이 고운 태아처럼

묵언수행을 선언한 지난 계절부터

딱 그만 크기의 추를 세우고

조그맣게 서 있다

저 추가 어떻게 뜨거움을 보여줄 것인가

작년 봄 2쪽 그즈음과 같은 모양새여서

땅이 열렸을 때부터 생긴 약속이라고

얼추 들은 터라

새로울 것도 없다고 생각이 넘나드는 순간

추가 넘어졌다

토해낸 숨결 안과 밖 경계선이 무너지고

추는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매화꽃 일생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도

화르르 소란스럽다

단 한 개의 귀를 지닌 추는 냉정을 잃고

물기에 젖어 파리한 소리는 적막을 뚫고

꽃 이파리 하나 열린다

열화되지 않은 꽃은 없으리

바닥 바닥으로만 음각했던

우리들의 희망이 달리 드러난 것이다

여러 번 꽁꽁 얼어 있던 약속이

심장 속 온도에 팔딱거리는

작은 기립을 지지한다

쉿! 다음 쪽 봄꽃도 뜨거워지려 한다

 

 

 

 

 

[신춘문예] 당선소감 - 시 부문 당선자 이승은씨

 

겨울임에도 다니고 있는 직장 본 건물 옆에 새로 건물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올라가는 건물 앞으로, 옆으로, 일층에서 이층으로 무수하게 설치해 놓은 철구조물이 보입니다. 비계(scaffolding)입니다. 비계는 건설, 보수공사, 건물이나 기계를 청소할 때 작업인부와 자재를 들어올리고 받쳐주기 위해 쓰며, 알맞은 크기·길이의 발판재를 하나 또는 여러 개를 모양과 쓰임새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설치됩니다. 건물이 완성되면 흔적없이 사라져야하는 비계가 유독 눈에 들어봅니다. 안쓰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볼품없는 나는 내 시를 위한 비계입니다. 세상을 보이게 하고 드러내는 뜨거운 노래를 부르면서 시를 남기고 비계처럼 사라지면 좋을 것이란 계획을 진즉에 세웠습니다. 나이 오십에 내 시를 세상에 나오게 해준 전북도민일보와 심사위원님께 깊이 감사를 드리며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데 게으름을 피우지 않겠다는 약속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평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생각의 재탄생’

 

신춘문예를 통해 이 땅의 시인으로 세상에 첫 선을 보이는 것은 눈부신 기쁨이다. 전국 각지에서 응모한 137명의 시 569편을 심사했다.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섬세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것은 누에가 고치를 만드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토해 나오는 비단실을 보는 것과 같다. 떨리는 가슴으로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어 시를 쓰고 응모한 예비 시인들의 문학을 향한 열정에 큰 박수를 보낸다.

당선작으로 이승은의 ‘열화되다’를 뽑았다. ‘나무들의 연대가 적요롭다/ 몸 말아 등선이 고운 태아처럼/묵언수행을 선언한 지난 계절부터’라는 첫머리부터 시선을 끌었다. ‘토해낸 숨결 안과 밖 경계선이 무너지고/추는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꽃이 열리는 순간의 경이로움을 호흡을 잠시 멈추고서 한 줄의 시로 완성한 모습이 시를 읽은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고 있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생각이 언어를 통해 재탄생하는 모습이 반갑다. 앞으로 좋은 시인으로 성장할 것으로 믿는다.

구민숙의 ‘뒤란’은 오래 들고 있었던 작품이다. 바람처럼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이야기들이 떠오르는 영상과도 같았다. 생각의 깊이를 더하여 시의 언어를 조율한다면 머지않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최윤정의 ‘풍화’, 김완수의 ‘독방일기’, 김종득의 ‘돌아온 만경들’ 역시 좋은 작품이었다. 아깝게 낙선한 분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조미애<국제펜클럽한국본부 및 한국문인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