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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을 아세요? / 윤석호

 

 

뱀이 왜 기어 다니는지 아세요

불안하기 때문이래요

손발 없이 귀머거리로 사는 동물은 또 없거든요

독이라도 품어야 살 수 있지 않겠어요

얼마나 불안했으면 혀가 다 갈라졌겠어요

남의 땅에 사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혹시 은인을 찔러 죽인 전갈 이야기 들어 보셨어요

본능을 장전하면 갈기고 싶어지죠

본능은 의지보다 늘 앞서니까요

하지만 본능보다 앞에 불안이란 게 있어요

그래서 가장 위험한 것들은 불안해하는 것들이래요


독을 품은 것들은 기억력이 없어요

어느 한구석 오목한 데가 없기도 하지만

사실은, 뒷걸음질 칠 수 있는 담력이 없어서래요

이방異邦의 밑바닥에 몸을 대고 살다 보면

굳이 시간을 되새기고 싶지는 않을 거예요


간혹, 숨 막히게 달 밝은 밤이 있잖아요

그런 날이면 통째 삼킨 먹이를 삭히며

똬리를 틀어요 철이 든 거지요

저도 한번 쭉 뻗고 살고 싶겠지요

하지만 마음 놓치면 독을 품긴 힘들어져요

무딘 칼은 피차 고통이거든요


번질거리던 각질의 모서리가 굵게 갈라져

살을 후비며 파고든 어느 밤

제 살갗을 찢어 벗겨 내며 뿌리치고,

쉼 없이 날름거리며 생을 지켜 냈어요

이런 아침은 늘 뻐근해요

눈꺼풀 없이 잔 눅눅한 잠을 말려야

또 하루를 살아갈 수 있거든요

하늘에서 가장 먼 쪽으로 붙어 다니지만

햇살의 따스함을 알고 있나 봐요

 

 

 

 

[2014 신춘문예-시 당선소감] "고립된 상황서 신기루 같은 가능성 확인"

고민하고 한 선택이라도 그 고민이 결과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선택은 그냥 입장권이었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삶의 맨 가장자리에 서면 무모함 외에 달리 길이 없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길 안에 아름다움이 있었다는 것을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나에게 이민이 그랬고, 시를 쓴다는 것이 그랬다.

총을 들고 훈련할 때보다 휴가를 나와 거리 한복판에 군복을 입고 섰을 때 나는 내가 군인인 줄 알았었다. 이민 오고 한참 만에 고국을 방문했을 때 비로소 나는 내가 이도 저도 아닌 이민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칼로 모래를 벨 수 없다. 저항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대적이지 않는, 때로는 친절하고 이해심까지 갖춘 상대를 무모함이라는 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한밤에 걸려온 낯선 전화에(한국과의 시차 때문에) 당황해서 생각되지도 않은 말들이 입을 나서 수화기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침묵의 며칠, 희망을 놓아야만 하는 경계쯤에서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글을 쓰겠다는 똥고집 하나밖에 없는 사람에게 신춘문예는 신기루다 못해 신앙이다. 낯선 땅에 고립된 상황에서 가능성을 따져 접근하려는 것은 어쩌면 불경스럽다.

지난 몇 년 동안, 새해 첫날 각 신문사의 당선된 시를 읽으며 '당선되지 못한 소감'을 안으로 삭히는 데 익숙한 나에게 '당선소감'은 참 어색하다. 아버지께, 나의 무모함을 함께한 가족에게,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준 분께 그리고 심사하신 분께 감사드린다.

윤석호 / 1964년 부산 출생. 부산대 기계공학과 졸 업. 현 미국 시애틀 거주. 미주 중앙 신인문학상 시 부문 당선(2011년)


 

[2014 신춘문예-시 심사평] "현대적 인간 존재의 외로움 참신하게 표현"

올해에는 유난히 투고작이 많았다. 심사위원들의 논의를 거쳐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시 부분에서 '귀' '물을 향해 걷는 나무 곁에서' '손을 부수다' '뱀을 아세요?', 시조 부문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 '눈 오는 밤, 프란츠 카프카' 등 모두 6편이다. 시·시조 두 장르에서 당선작 1편을 뽑아야 하는 만큼 심사위원들의 고뇌가 컸지만, 작품의 수준을 제1의 원칙으로 한다는 기준이 있었기에 당선작을 결정하는 데엔 큰 무리가 없었다.

시 '귀'는 실험적이면서도 언어의 미와 사유의 깊이가 잘 살아나고 있었지만, 너무 소품이라는 점이 한계로 지적됐다. '물을 향해 걷는 나무 곁에서'는 표현도 참신하고 주제도 서정적이라 가작이지만, 표현의 묘미에 너무 치중한 감이 있다. '손을 부수다'는 존재의 본질적 슬픔을 여러 기발한 표현을 통해 잘 살려 내고 있었지만, 시의 내용이 관념으로 흐르는 점이 지적됐다. 시조 부문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는 시조의 형식미와 서정의 깊이를 확보하고 있지만, 그 내용이 너무 전통적 정서라는 점이 한계로 지적됐다. 이에 비해 '눈 오는 밤, 프란츠 카프카'는 시조의 형식미를 현대적으로 살려 내고 있을 뿐 아니라 내용도 동시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소외의 문제를 연시조로 그려 내고 있어 주목을 끌었지만, 당선작과 최종 경합에서 아쉽게도 2위로 낙착됐다. 그리하여 당선작은 '뱀을 아세요?'로 결정했다.

'뱀을 아세요?'는 뱀이라는 존재의 특성을 통해 현대적 인간존재의 외로움과 그 지향을 참신한 표현과 깊은 사유로 살려 내고 있어 높은 수준을 보여 주었다. 일로매진하여 한국문단의 큰 별이 되기를 기원한다.

 

심사위원 강은교·이우걸·김경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