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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낡은 관념의 상징 '동시 상투어' 범람… 올 당선작 못내 아쉬움


'낡은 시 한 편은 절망 한 상자만큼이나 몸에 해롭다.' 새해 아침에 내놓을 만한 시 한 편을 찾느라 시 상자를 하염없이 뒤지고 난 심사위원 둘이 퀭한 눈으로 고개를 가로젓는 순간, 한 사람에게 떠오른 생각이다. 이어서 컬트 영화 장면에서인 듯 머리 뚜껑이 열리면서 이런 단어가 흘러 넘치는 장면도 떠올랐다.

소녀, 단풍잎, 은행나무, 봉숭아, 봉숭아 물, 아지랑이, 새싹, 봄 향기, 꽃잎, 두 발 자전거, 매미, 달팽이, 받아쓰기, 콩나물, 네 잎 클로버, 우산, 그네, 안경, 까치, 개미, 아기 나무, 아기 별, 아기 달님, 무지개, 주전자, 할머니, 주름살, 숙제, 나비, 짝꿍, 엄마 잔소리, 먹구름, 햇빛, 햇살, 마음, 할아버지, 채송화, 해바라기, 김장, 숨바꼭질, 풀꽃, 풀잎, 옹알이, 소풍, 시냇물, 은하수, 쪽빛 하늘, 놀이터, 미끄럼틀, 고무신, 개울, 토끼, 장독대.

340명이 적게는 세 편에서 많게는 열 편 넘게 투고한 1,200여 편의 시에, 거의 빠짐없이 거듭 등장하는 이런 단어들은, 여느 동시 공모 심사대에서도 익히 만나온 '동시 상투어'라고 할 만하다. 상투어는 낡은 관념의 상징이다. 시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것을 원한다. 동시는 더욱 그러하다. 아이라는 존재 자체가 인간의 새로운 상태가 아닌가. 그런 아이들과 함께 읽는 시에 증조할아버지, 할머니가 살던 시공간의 자연과 사물을 남발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간절히 권하니, 이런 상투어를 버리자! 올 한 해만이라도 동시를 쓸 때 이런 단어를 사용할 수 없는 법령이 내렸다고 생각하자.

권명은의 '감자 배꼽' '감나무 모빌' '마침표' 세 편은 위의 상투어를 어지간히 극복한 가작으로 손꼽혔으나,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는 힘이 달리는 점과 안이한 표현을 염려해 다시 한 번 분발을 기대하기로 한다. 김민영 또한 '뜨개질'의 경우, 상투어로 뜬 작품임에도 낡은 스웨터를 풀어 '새로 뜨고 있'는 구체적이고도 추상적인 노동의 감흥이 눈길을 끌었으나 함께 투고한 작품들이 이에 한참 못 미쳤다는 말씀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