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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사유상 / 최찬상 


면벽한 자세만
철로 남기고
그는 어디 가고 없다

 

어떤 것은 자세만으로도
생각이므로
그는 그 안에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겠다


한 자세로
녹이 슬었으므로
천 갈래 만 갈래로 흘러내린 생각이
이제, 어디 가닿는 데가 없어도
반짝이겠다


 

[당선소감] 詩語 함께하던 길 끝에서 설렘·두려움 만나

 

당선 전화를 받는 순간 잠시 휘청거렸습니다. 가슴속 한 장소에서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동안 나의 길잡이가 되어 준 수많은 시들이 까맣게 지워진 나의 정수리 위에서 반짝입니다. 짧은 길을 두고 먼 길을 돌아오는 길. 닳아버린 신발 밑창에서 해가 지고 어둠 속에서 말들이 바스락거립니다. 한밤, 피곤에 지친 말들을 보듬고 위로하며 또 신발 밑창에서 빨갛게 해가 뜨기를 기다립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솔길이 있음을 압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씩의 모퉁이입니다. 이제 저도 그 오솔길을 출발할 채비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빛나지 않는 모래 알갱이 같은 제 시를 앞자리에 놓아 주신 황동규, 정호승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김기택, 조은 예심위원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시의 첫 장을 펼쳐 준 문화일보에 감사드립니다. 저보다 더 외진 사각지대에, 겨울밤 아궁이에서 갓 구워낸 따뜻한 말들이, 가 닿을 수 있도록 정진하겠습니다.
‘시’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준 사랑하는 가족 인숙, 준영, 준하에게 용서를 빌며, 부모님의 부재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추운 겨울 제가 지피는 작은 불씨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습니다.
얼어붙은 하늘을 횡단하는, 강철의 날개들을 동경하며…….

▲ 1960년 경북 칠곡 출생 ▲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심사평] 상투성 과감하게 벗어나… 힘의 낭비없이 짜여져

 

신춘문예 당선시에 어떤 유형이 있다고 여겨져 가능한 한 그 유형에서 벗어난 작품을 선택하자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 김고유의 ‘마음론’, 박민서의 ‘구유’, 김미선의 ‘고요한 천둥’, 최찬상의 ‘반가사유상’ 등이 그런 관점에서 최종심에 올랐다. 
‘마음론’은 인간의 마음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짐승’에 비유한 점이 신선했으나 ‘순백의 언어가 차갑게 빛난다’ 등의 구태의연한 표현들이 그 신선함을 떨어뜨렸다.
‘구유’는 왜 굳이 산문 형식으로 써야 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 주었으며, 이는 한국현대시의 어떤 유형의 유행에 의존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고요한 천둥’은 일상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의 다양한 의미를 다각도로 추구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 역시 군더더기가 많았다. ‘이제 당신은 처음의 고요다’ 이후 마지막 두 연은 삭제하는 게 시의 완결성을 위해서는 오히려 더 나았다.
당선작 ‘반가사유상’은 신춘문예 시의 상투성을 과감하게 벗어난 작품이어서 눈에 띄었다. ‘반가사유’라는 관념과 추상을 ‘반가사유상’으로 구체화하는 데 성공했다.
전체적으로 잘 짜여 있음으로써 힘의 낭비가 없었다. 둘째 연 ‘어떤 것은 자세만으로도/ 생각이므로/ 그는 그 안에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겠다’는 이 시의 백미다. 외면의 형상을 통해 존재의 내면에 대한 구도적 성찰이 돋보인다.
<논어>에 나오는 ‘회사후소(繪事後素)’ ‘본질이 있은 연후에 꾸밈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깊게 생각하게 해주는 시다. 시는 인간을 이해하게 하는 부분이 있으므로 당선자는 더욱 인간을 이해하게 할 수 있는 시를 열심히 써주길 바란다. 

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