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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흰 콩떡 / 김지현

 

아버지의 가출은 쉰 떡 한 팩 때문이었다. 아니, 아직 연락이 되질 않으니 그렇다고 짐작할 뿐이다. 아닐지도 모른다. 라면을 끓여 먹은 흔적으로 보아, 밥이 없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설거지를 하다 만 흔적으로 보아, 더러운 집 꼬락서니에 불끈 울화가 치밀었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일주일 만에 집에 돌아왔는데 어두컴컴한 실내가 서글펐던 것일지도.

가출이라는 것이 아버지에겐 좀 맞지 않지만 어쨌거나 지금 이 상황은 가출과 비슷해 보였다. 단순히 집을 나간 게 걱정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집을 나가서 살고 있으므로. 엄마와 다툰 후 종종 그랬던 것처럼 사나흘 기다리면 곧 아무렇지 않게 연락을 해올지도 몰랐다. 문제는 집을 나간 것까진 좋은데,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전시라도 하듯 열쇠 꾸러미가 버젓이 밥상 위에 올려져 있었기 때문에 소동이 났다.

이 낯선 상황 때문에 나는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는 "계속 전화해봐라. 계속하면 받겠지." 했다. 그리고 익숙하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니 그러게 그걸 왜 안 먹고 쉬게 놔 두노, 하여튼 느그 아부지도 밸나고 느그도 똑같다. 보나마나 집 꼬라지 개판으로 해놨겠지." 나는 수화기를 귀에서 떼고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꿍짝, 꿍짝, 음악 소리가 요란했다. 엄마 목소리 사이사이로 왜 먼 일 있나, 와 그라노, 하는 목소리들이 불쑥불쑥 넘어왔다. 엄마는 한숨을 푹 쉬고 일단 끊으라, 하고 전화를 탁 끊었다.

지금쯤 엄마는 제주도 해상 위에 솟아있는 리조트에 있을 것이었다. 45일 일정을 내가 짜주었으니 오늘이라면 숙소가 거기가 맞았다. 태어나서 처음 가는 제주도였다. 엄마는 출발하는 날 아침 부리나케 공항으로 향하는 바람에 대리기사의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화장대 위에 두고 갔다. 나는 버스정류장까지 나왔다가 집으로 돌아가 전화번호를 불러주었다. 숙소며 렌트카며 식당까지 여행에 소요되는 모든 준비가 내 손에서 이루어졌다. 엄마는 "이럴라고 딸 자식 낳는 거지, 이모들이 선물 사다 준다드라" 했다. 여행 멤버는 마트 안에서 엄마와 함께 계를 하는 이모들이었다. 조리 코너에 영미 이모, 공산에 엄마와 은희 이모, 농산에 정숙 이모까지 총 네 명. 그중에서 딸 있는 집은 엄마뿐이라고 했다. 반강제적이긴 했지만 자처해서 여행플래너 역할을 한 것은 그 계원들 중에 엄마가 제일 내세울 게 없어 보여서였다. 영미 이모네 아들은 이번 분기에 대기업 연구원으로 입사했고, 은희 이모네 막내아들은 올해 서울에 있는 학교에 입학했다. 정숙 이모네 큰아들은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인데, 두 달 뒤에 어느 대학 무슨 과 교수 딸이랑 결혼식을 올린다. 나는 저번 달부터 거의 월급이라고 할 수 없는 봉급을 받고 사회적 기업 홍보팀에 들어갔다. 이쪽 계에선 꽤 알아주는 단체라고, 우리 딸은 돈 때문이 아니라 자기만의 신념이 있어서, 그쪽에서 스카웃하다시피 해서 들어갔다고 엄마는 강조했다. 엄마가 '자기만의 신념'이라는 말을 어떤 얼굴로 했을지는 상상되지 않았다. 첫 월급의 액수를 들은 엄마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으므로. 어쨌거나 그중에서 엄마들의 여행 일정을 짜는 건 내가 제일 적합해 보였다. 다들 많이 바빴고, 아무렴 그런 일을 할 군번들은 아닌 듯했다. 여행 경비를 찬조하는 것에 더 적합하달까. 그래서 나는 내 신념에 따라 제주도 구석구석을 파헤치다시피 인터넷을 뒤져 코스를 짰다. 여행을 보내주진 못하지만 그 누구보다 특별한 경험을 안내할 수 있도록.

다섯 번째 신호음까지 음성메시지 연결음으로 넘어갔다. 곧바로 다시 전화를 연결하는데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안내음성이 나왔다. 아버지의 열쇠 꾸러미를 쥐고 나는 소파에 앉았다. 꾸러미엔 용도를 알 수 없는 여러 개의 열쇠와 등산용 빨간 버클이 걸려 있었다. 화물차 한 대에 무슨 열쇠가 이렇게 많이 필요한 걸까. 어쨌거나 아버지의 화물차 열쇠들은 지금 내 손 안에 있다. 그건 곧 차에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혹은 차에 가지 않겠다는 것이거나. 아버지는 어딜 간 걸까. 열쇠 꾸러미를 밥상 위에, 마치 전시하듯이 그렇게 놓고, 어디로 가 버린 걸까.

확실히 차를 빼놓곤 아버지의 행적을 가늠할 길이 없었다. 그건 남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열쇠를 두고 갔다고? 그럼 차에 안 갔다는 거 아니가. 어디 갔노." "아 그니까 빨리 들어오라고, 어딘데 지금." "내 들어간다고 뭐 되나, 전화도 꺼져 있다매. 내도 전화해볼게." 동생은 내 대답이 이어지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보나 마나 기타를 둘러메고 광안리 해변가를 서성이고 있을 것이었다. 육 개월 뒤에 입대 날짜를 받아 놓은 남동생은 기타 동아리에 들어 토요일 밤이면 거리 공연 같은 것을 한답시고 밤새 돌아다녔다. 입대라는 말의 무게 때문에 엄마도 나도 동생을 크게 나무랄 수가 없었다. 동생은 생활이 몽땅 증발해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느지막이 일어나고 새벽에나 들어왔다. 거의 얼굴을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래도 일요일엔 꼬박 집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아버지가 집에 있기 때문이었다. 동생의 잦은 외박은 엄마와 내가 아버지 앞에서 쉬쉬하는 비밀이었다.

전화까지 끊기자 뭘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차에 없는 아버지의 모습은 상상이 되질 않았다. 집보다 차에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고, 얼마든지 차에서 오래 지낼 수 있도록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름용 이불을 겨울용으로 바꾸거나, 급하게 집에서 빠뜨리고 간 것을 가져다주기 위해 종종 아버지의 차에 가 볼 때면, 이 속에서 생활이란 것이 가능할까 싶도록 폐창고 같은 형상에 흠칫 놀라곤 했다. 여러 켤레의 때 묻은 낡은 신발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바닥에 놓여 있고, 걸레인지 수건인지 분간할 수 없는 천들이 뒹굴었다. 습기 찬 물병들이 여러 개, 전표 같은 종이서류들이 수북하고 각색의 공구들이 널려있었다. 문짝이며 의자 시트, 수납함은 검은 얼룩들로 찌들어 있었다. 누군가 지나가다가 휙휙 던져버리고 간 듯한 것들이 한 데 뒤엉켜 있었지만, 그 안은 아버지 나름의 질서가 있었다. 그 안에서 아버지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부산과 강원도를 오가며 먹고 자고 운전했다.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채로 휴지통에 처박혀 있는 쉰 떡 한 팩을 꺼냈다. 팩을 감싼 비닐을 벗기자 콩떡의 쉰내가 훅 끼쳐 올라왔다. 떡만 음식쓰레기통에 넣고 봉지와 스티로폼 용기를 분리해 각각 버렸다. 설거지통에 아버지가 쓰다만 듯한 거품이 말라붙은 수세미와 빨간 고무장갑이 내팽개쳐져 있었다. 고무장갑을 끼고 수세미에 세제를 더 묻혀 거품을 냈다. 밥그릇 한 개를 들어 올려 닦는데 한 귀퉁이에 이가 빠진 것이 보였다. 아마도 이걸 마지막으로 닦다가 설거지통으로 집어 던졌나보다. 이 빠진 그릇을 싱크대 위에 올려놓고 남은 그릇들을 하나하나 닦았다. 갑작스레 집안의 적막이 온몸으로 엄습해왔다. 아버지는 차에도 가지 않고, 어디를 배회하고 있을까. 라면 찌꺼기가 묻은 냄비를 닦다 문득 엄마가 떠나는 날 아침에 받은 문자가 떠올랐다. 불고기 볶아서 냉장고 넣어놨으니까 밥해서 렌지에 돌려 먹어라. 밥을 해 먹지 않았으니 불고기도 냉장고에 그대로 있을 터였다. 닦던 그릇을 내려놓고, 고무장갑을 벗고 전기밥솥 뚜껑을 열었다. 솥 벽에 밥알들이 말라붙어 있었다. 아버지도 밥솥을 열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뚜껑을 닫고, 냄비를 꺼내 물을 받아 라면을 끓였을 것이다. 잠깐 한숨을 쉬었을까. 아버지는 TV를 보면서 라면을 먹고, 다 비운 냄비를 싱크대로 가져왔을 것이다. 김치를 냉장고에 넣다가 문득, 식탁 위에 있는 검은 비닐봉지를 발견했을 것이다. 비닐봉지를 열어 쉰 떡을 확인하고 봉지째 쓰레기통에 처박았을 것이다. 짜증을 억누르고 고무장갑을 끼고 그릇들을 닦는다. 그러다가 불끈, 억눌러지지 않는 울화통이 아버지의 가슴을 찢고 튀어 올랐을 것이다. 닦던 밥그릇을 집어 던지고, 고무장갑을 반쯤 뒤집히도록 아무렇게 벗어놓고, 휴대폰이며 지갑이며 이것저것을 챙겼을 것이다. 열쇠 꾸러미를 무심코 주머니에 챙겨 넣다, 불현듯 어떤 감정이 스쳤을까. 아버지는 열쇠 꾸러미를 다시 밥상 위에 내려놓고 신발을 꿰어 신고 집을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어디론가 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밥솥을 꺼내 말라붙은 밥알들이 불어 떨어지도록 물을 가득 받았다.

떡이 쉰 것은 실은 처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기나긴 사냥에서 돌아오는 사람처럼 언제나 손에 무언가를 쥐고 귀가했다. 아버지가 가져오는 것 중 어릴 적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안흥찐빵이었다. 팥이 부드럽고 달콤한 안흥 찐빵은 강원도 안흥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종종 찐빵을 한 상자씩 가져왔고 엄마가 찜솥에 쪄주곤 했다. 당시 안흥찐빵은 비싼 것이었고 어떤 이유에선지 어느 순간부터는 볼 수 없었다. 찐빵 외에도 아버지가 가져오는 것은 다양했다. 센베이 과자 한 상자일 때도 있었고 먹을 것이 아닐 때도 있었다. 초등학교에 납품하던 나무 상판을 댄 철제 책걸상도 그중 하나였는데 동생과 내 몫 두 세트를 가져와 한동안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 것은 짐으로 실어 운반해주고 감사 인사 차원 정도로 받아온 것들이었다. 가끔 의외의 것들도 있었는데 휴게소 같은 데서 파는 이삼천 원짜리 손바닥 책이었다. 국문학과로 진로를 결정한 고등학생 시절 아버지가 불쑥 책상 위에 내려놓았던 조그마한 책들은 내겐 꽤 낯선 것이었다. 아버지는 가방끈이 짧은 시골 출신이었고 아버지와 책이란 어쩐지 잘 어울리지 않았다. 책들은 '대화의 기술', '만병통치 민간요법', '10분 투자 일본어 회화' 같은 실용서들이 대부분이었고 촌스러운 표지에 내용도 엉성해 보였다. 그래도 어쩐지 트럭이나 좌판에서 그런 것들을 훑어보고, 고심해서 골라 돈을 주고 샀을 아버지의 모습이 잘 상상되지 않아 웃으면서 받았다. 읽어볼 기회는 없었다. 전두엽 어디쯤에서 이미 그 책들은 읽을 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로 판명 나 기념품 정도로 분류되어 잊혔다.

쉰 떡들도 그런 종류의 한 가지였다. 아버지에게 떡은 밥보다 아내보다 더 아버지와 가까운 무엇이었다. 유독 떡을 좋아하는 것도 있었지만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시간에 맞춰 도착하기 위해 운전할 때나, 큰 공장 같은 데서 짐을 풀기 위해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시간들에 아버지의 시장기를 채워주는 것은 떡이었다. 잘 쉬거나 굳는 탓에 쌓아두고 먹을 수도 없는 떡들을 때마다 고심해서 고르는 아버지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아버지는 귀갓길에 부러 시장 어디 맛있는 떡집에 들러 떡 두어 팩씩을 사왔다. 아버지의 유별난 떡 사랑 때문에 여름이면 엄마와도 종종 말다툼이 일었다. 금세 쉬는 떡들은 사온 그 자리에서 다 먹어치우지 않으면 곧 냉동실 행이었고, 냉동실에 들어가고 나면 쉽게 방치되었다. 그렇게 냉동실엔 떡이 쌓여가고 아버지는 계속해서 새 떡을 사 날랐다. 동생과 나도 떡을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문제는 아버지가 사오는 떡의 종류였다. 우린 달짝지근하고 고소한 송편이나 꿀떡, 경단 같은 것을 좋아했는데 아버지 취향엔 콩떡이나 팥고물 떡, 감자떡 같은 것들이 더 맞았다. 그래서 여러 종류를 사오더라도 언제나 비슷한 것들이 남아 냉동실에 쌓였다. 때때로 냉동실로도 가지 못한 채 쉬어버린 떡들은 아버지가 돌아오는 주말이 되기 전에 엄마가 처리했다. 음식쓰레기통에 넣으면서 엄마는 짜증을 멈추지 않았다. "아휴, 너거도 아부지도 밸나다 밸나." 이번 건은 엄마가 제주도에 가 있는 탓에 미처 처리되지 못한 것이었다.



새벽이 깊도록 아버지에게서 전화는 오지 않았다. 동생도 들어오지 않았다. 언제나 반쯤은 비어있는 집이었지만 어쩐지 오늘은 이 집 안에 혼자 누워있다는 것이 시리게 쓸쓸했다. 이불을 가슴께로 끌어올리며 모로 누웠다. 한 손에 아버지의 열쇠 꾸러미를 쥐고 눈을 감았다. 기름 냄새와 쇠 냄새 같은 것들이 뒤섞여 꾸러미에서 풍겼다. 차를 두고 어딘가로 갔다면 차는 근처에 있을 것이다.

일요일 오전의 고요가 거실 전체에 내려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마트로 출근하는 엄마를 대신해 아버지가 유일하게 아침밥상을 차리는 날이다. "이런 걸 내가 해서야 되나, 다 큰 딸래미가 있는데." 아버지는 그렇게 투정했지만 언제나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밥상을 차렸다. 아버지의 기상시각은 새벽 다섯 시였고 나는 도저히 그보다 일찍 일어날 재간이 없었다. 거실은 텅 비어있었다. 우리를 깨우려는 듯 볼륨을 높인 텔레비전 소리도 없었고 엄마가 만들어 놓은 반찬들을 내놓는 것일 뿐이었지만 아버지가 차린 밥상도 없었다. 부서질 듯한 햇빛만 거실 한 가운데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동생 방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새벽녘 들어와 늦은 잠을 자고 있을 터였다.

쌀을 씻어 밥을 안쳤다. 반찬을 꺼내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냉장고 문을 닫지도 못한 채 서둘러 달려가 전화를 받았다. 엄마였다. "일났나, 아빠 전화 왔드나, 내 전화도 안 받네." 엄마가 좀 전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보니 휴대폰이 켜져 있다고 했다. 일정대로라면 지금쯤 엄마는 쇠소깍에 투명카약을 타러 가 있을 터였다. 엄마의 첫 제주도여행은 아무래도 틀어져 버린 것 같았다. 투명카약을 즐겨야 할 시간에 엄마는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갔다. 신호음은 음성안내를 하는 여자를 향해 쉼 없이 달려갔다. 막 전화가 끊어질 듯 신호음이 길어지는데 달칵 소리가 났다. 전화가 끊기지 않은 것이었고, 아버지가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아빠, 어디예요."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보세요, 아빠, 아빠. 곧 끊어질 것 같은 위태로움 속에서 나는 바삐 아버지를 불렀다. 침묵 너머에서 대답이 건너왔다. "와 전화했는데." 예상외로 순순히 불려 나온 목소리에 허탈한 미소가 번졌다. "어디예요, 집에 안 와요." 피하지 않기로 작정한 듯이 아버지는 쉽게 답했다. 안 간다. 그 한마디를 남기고 아버지는 전화를 끊었다. 뚜우 뚜우. 신호음을 들으며 멍해졌다. 전화를 받았고 대화도 했지만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잠든 동생을 부랴부랴 깨워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아버지는 받지 않았다. 동생은 인상을 쓰며 곧 들어오겠지, 저번에도 그랬잖아, 하고 소파 위에 풀썩 누웠다. 오년 전, 동생은 그때를 말하는 거였다. 그때 아버지는 일주일 꼬박 연락 두절 상태였다. 엄마는 꼭 뭐가 씐 것 같은 날, 이라고 말했었다. 콩나물국, 그땐 콩나물국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집을 떠나기 전 온 가족이 다 함께 식사하는 월요일 아침이었다. 동생은 냉장고에서 반찬들을 갖다 나르고, 나는 수저를 하나하나 놓았고, 엄마는 생선을 굽고 식사를 준비했다. 아버지는 천천히 안방에서 나와 식탁 앞에 앉았다. 으레 암묵적 규칙처럼 모두가 함께 아침을 먹어야만 하는 일주일 중 유일한 날이었다. 동생은 덜 깬 잠을 쫓듯 하품을 늘어지게 했고, 나는 생애 유일한 스무 살을 보내는 중이었으므로 그날의 코디를 맞추느라 여념이 없었다. 모두가 식탁 앞에 모였고, 밥이 날라 왔고, 그리고 콩나물국이 올랐다. 엄마와 동생이 국을 첫 술 떴고, 나는 생선을 찢고 있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들고 있던 숟가락을 식탁 위로 내팽개쳤다. 엄마의 놀란 눈이 아버지를 향했고, 동생이 튄 숟가락에 맞았다. 아버지는 이 뭣 같은 집구석, 하며 속옷 가방과 열쇠 꾸러미와 지갑과 휴대폰을 챙겨 현관문을 쾅 닫고 나갔다. 엄마는 소리 한 점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멍한 눈으로 가만히 앉아 있다가 눈을 훔쳤다. 숟가락에 맞은 동생의 이마가 금세 빨갛게 부어올랐다. 나는 하염없이 아버지 앞에 놓인 콩나물국 그릇을 바라봤다. 엄마는 겨우 쥐어 짜낸 목소리로 도대체 왜 저러는데, 했다. 동생은 부어오른 이마도 매만지지 못한 채로 떨고 있었다. "엄마 오늘 며칠이지." 불현듯 무언가가 머릿속에 스쳤다. "오늘 월요일 아니가. ……" 엄마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소리가 났다. 엄마는 뛰어가듯 거실로 내달려 벽걸이 달력을 올려다 봤다. 엄마는 소파 위에 걸터앉아 혼이 쏙 빠진 얼굴로 말했다. "아부지한테 전화해봐라."

그날은 콩나물국이 아니라 미역국이 올랐어야 했다. 엄마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혼잣말로, 또는 나를 향해 말했다. "이십 년 동안 한 번도 까묵은 적이 없는데, 오늘은 우째 그랬을까. 분명히 이틀 전에만 해도 알고 있었는데, 미역이랑 소고기도 사놨는데, 우째 그래 머가 씌인 거처럼 홀딱 까묵었을까. 느그는 다 머했노, 느그가 그러고도 자식새끼들이가. 내가 말을 안 했어도 느그는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이가." 엄마의 타박을 들으며 동생은 교복을 입고, 밥도 한 술 뜨지 못한 채 부어오른 이마를 달고 나갔다.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고, 신호음이 가다가 꺼졌다. 엄마는 출근 준비도 하지 않고 안방에 들어가 누웠다. 그러고는 곧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고 그렇게 화를 내고 나가나, 처음이다 이십 년 동안 처음. 요새 하도 몸이 힘들어서 나도 모르게 깜빡했는데, 그걸 그러고 화를 내나. 지는 이십 년 동안 내 미역국 한번 끓여준 적 있나, 어이고." 엄마의 곡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식은 콩나물국을 국솥에 붓고 식탁을 치웠다.

그때 아버지는 일주일 동안 가족들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모두 받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동해로, 춘천으로, 일을 했다. 온 가족이 매일같이 전화기와 씨름을 했지만 아버지에겐 열쇠 꾸러미가 있으니까, 아마도 모든 것이 완비된 차 안에서 잠을 자고, 휴게소에서 정식을 사 먹으며 지내고 있을 거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다음 주말 아무렇지 않게 아버지는 집에 들어왔다. 별말 없이 늦은 미역국을 먹고, 엄마가 준비한 잡채와 소불고기를, 동생과 내가 준비한 떡케이크와 싸구려 선물들을 받았다. 그렇게 일주일 만에 생일 사건은 지나갔다.

하지만 이번에 아버지는 열쇠 꾸러미를 놓고 갔다. 분명 그때완 다른 상황이었다. 그 일주일간의 불통된 수십 통의 전화와 졸였던 마음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도 어쩌면 아버지가 영영 집에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었다. 아버지는 주말이면 꼬박꼬박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쨌거나 잘 자리와 생활을 꾸려놓은 곳이 있었다. 동생과 나는 언제나 아버지의 그늘에 있었고 두려운 가장의 존재가 우리 생활에 녹아있었다. 그럼에도 우린 아버지가 없는 밤들을 엄마와 나, 동생 셋이서 보내며 살고 있었고 아버지가 벌어온 돈으로 학교에 다니고 연애를 했지만 지친 아버지의 얼굴과 어깨를 매일 보며 살진 않았다. 나와 남자친구의 여행이, 동생의 외박이 아버지의 귀에 닿지 않은 채 엄마와의 밀약으로 행해졌다. 아버지와는 토요일 저녁의 외식과 월요일 아침의 밥상에서 웃으며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당신만의 공간으로, 생활로 건너갔고 우리는 다시 엄마를 잘 구워삶으며 우리의 생활을 만들어갔다.

하지만 열쇠 꾸러미가 없는 지금, 아버지의 생활이 없다. 아버지는 그의 공간으로 건너가지 않았다. 그것은 곧 우리의 생활도 가능할 수 없음을 알리는 징표였다. 두 개의 기둥 중 하나가 속이 비어버린 것이다.

갓 지은 밥알들이 고슬고슬했다. 엄마가 해놓고 간 불고기를 데워 밥을 먹고 설거지를 했다. 침대에 드러누운 동생을 깨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동생의 전화를 한차례 받았다. "내는 내 알아서 살테니까, 느그는 느그 알아서 살아라." 동생이 아버지가 한 말을 흉내 냈다. 엄마를 뺐던 동생은 커가면서 아버지를 닮아갔다. 아버지와 판박이었던 나는 종종 엄마와 외출을 하면 분위기가 많이 닮았다는 소릴 들었다. 무엇보다 외꺼풀의 아버지와 짙은 쌍꺼풀을 가진 엄마는 이목구비가 전혀 대조적이었는데, 두 분이 빼닮았다는 소리를 친구들의 입에서 지겹도록 들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이목구비를 빼다 박고 엄마의 분위기를 닮은 나는 열쇠 꾸러미를 들고 집을 나섰다.

동생은 아버지가 짐을 받는 운수회사 사무실에 가보기로 했다. 언젠가 방학을 맞은 동생은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강원도까지 오가며 아버지의 차에서 일주일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때 들렀던 사무실의 위치를 동생은 대충 기억한다고 했다. 지하철역으로 함께 내려와 동생은 반대 방향 개찰구로 향하면서 "먼저 찾는 사람이 전화하기."하고 떠났다.

나는 차를 찾아보기로 했다. 어쩌면 아버지는 보조키 같은 것으로 차에서 생활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차 말고는 아버지의 행적을 좇아볼 만한 곳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주로 주차하는 곳이 어딘지 대충 알고 있었다.

우리 집은 시외와 접하는 부산 끝자락에 있는 아파트 단지였다. 화물차는 함부로 주차하기가 어려워 도심으로는 이사 갈 수가 없었다. 주차료를 받는 화물차 전용 주차공간은 한 달 주차 값만도 만만치 않았다. 시외로 넘어가는 변두리 쪽에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공터나 강변 주위로 주차 딱지를 끊으러 오지 않는 땅들이 꽤 있었다. 물론 땅 주인은 따로 있을 터였지만 밭으로 일구지도 않고 건물이 들어서지도 않은 땅들은 관리가 소홀한 곳들이어서 암암리에 화물차주들이 주차공간으로 이용했다. 아버지는 예의 그 거리낌 없고 화통한 성격으로 당신이 맡아둔 자리에 가끔 주차된 소형 트럭 차주들한테 큰소리를 쳤다. "여가 지금 내 땅인데 누구 허락받고 여기다 차 대능교? 빨리 차 빼소." 뭣 모르는 기사들은 죄송합니다, 하고 차를 타고 꽁무니를 뺐다. 종종 서글서글한 기사들에게는 한술 더 떴다. "사장님, 그라믄 어데 차 댈만한 자리 없을까예." "보자, 요기 옆이 내 아는 사람 땅이거든. 내가 말해둘 테니까 여따 대소." 물론 진짜 땅 주인을 만나 쫓겨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도 아버지는 당황하지 않았다. "아니 맨날 대도 한 번도 주인이 안 뵈길래 주인 없는 땅인가 했지요. 빼면 될 거 아인교." 그래도 곧잘 새로운 자리를 물색했고, 댈 곳이 없을 땐 시 외곽에 대고 한참을 걸어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기도 했다.

요즘 아버지의 자리는 고가도로 다리 밑이었다. 도로를 떠받치는 다리 두 개 사이에 딱 아버지의 차 한 대가 들어갈 만한 공터가 있었다. 아버지는 비가 와도 걱정 않아도 된다며 좋아했다. 혹 짐을 실어놓은 주말이면, 비가 오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수시로 베란다 창문을 들락거렸다. 비가 쏟아지기 전에 방수용 갑바를 여러 겹 쳐놔야 짐이 젖지 않기 때문이었다. 갑바를 치는 일은 몇 미터가 되는 짐 위로 올라가 꼼꼼히 덮고 끈을 조여 탱탱하게 묶고 하는 작업이었다. 갑바는 그 무게만도 대단해서 단순히 힘이 세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기술과 요령이 필요했다. 아버지가 갑바 치는 모습은 정교한 작업에 열중한 장인의 모습과 같았다. 언젠가 갑바를 치고 내려오던 아버지는 그대로 땅으로 처박혀 정신을 잃은 적도 있다고 했다. 잠에서 깨듯 어지러운 정신을 다잡아 보니 뒷바퀴 옆에 모로 누워있었다고. 한참을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 누워있었더라고. 그 시간들은 아버지만 아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차를 대놓은 다리와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에 내렸다. 부산의 북쪽 끝, 종착역이었다. 역에서 다리까지는 꽤 걸어야 했다. 얼마 전 아버지가 지갑을 두고 간 날, 택시를 타고 가본 적이 있었다. 6차선 도로를 육교로 건너갔다. IC로 이어지는 도로 초입에 있는 다리 밑이라 인도가 없는 찻길을 따라 조심스레 걸음을 빨리했다. 십여 분쯤 걸었을까 멀찍이 아버지의 차 머리가 보였다. 차 안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느낌만으로도 아버지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는 비어있었다. 적재함 위도 텅 비었고 차 안에도 적막이 돌고 있었다. 열쇠 꾸러미에서 열쇠를 하나 골라 운전석 구멍에 밀어 넣었다. 단번에 잠금쇠가 돌아갔다. 아버지가 왔다 간 흔적은 없었다. 운전석 뒤쪽 간이 침대도 텅 비었다. 그대로 문을 닫으려다, 발판을 딛고 운전석으로 올랐다. 엉덩이 모양으로 움푹 꺼진 가죽시트가 맨질맨질 했다. 운전석에 앉아 안을 살폈다. 쓰레기며 공구며 구분할 수 없는 잡다한 것들이 비슷하게 때가 타 있었다. 종이들을 정리하려다 그대로 두었다. 모든 것들은 아버지만의 규칙에 따라 제 자리에 있는 것일 터였고 내가 함부로 손대는 것이 정리일 순 없었다. 종이 뭉치 속에서 생소한 글자가 보였다. 세금계산서를 비스듬히 접은 뒷면에 ''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었다. 흰색, 도 아니고 흰, 이라니. 흰 면이라 낙서처럼 적어 넣은 흰, 인가 하다가 아차, 싶게 무언가가 뇌리를 강타했다. 아버지의 행방에 관련된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며칠 전의 낯선 전화통화가 불쑥 떠올랐다. 처음 듣는 아버지의 주저하는 듯한 목소리, 더듬더듬 확신 없는 말투.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의 안부를 묻고 전하는 통화였다. 장난스럽게 어디시오, 하면 아버지는 어데믄 와, 말하믄 니가 어덴지 아나, 하고 둘이서 킬킬 웃었다. 엄마는, 묻길래 씻는다, 했고 얼른 저녁 무라, 하는 말로 통화가 끝나나 싶었다. 그 머고, 하며 뜸을 들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어지자 귀를 기울였다. 뭔가 전할 말이 있는가 싶었다. 아버지는 대뜸 요새 그 책이 유명하다매, 했다. 흰이라든가 뭐라든가, 뭐 상도 받았다카든데 했다. 아버지의 말을 되짚으며 "한강 작가의 흰?" 하고 물었다. 아버지는 그래 맞다, 하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나는 전화기를 고쳐 들며 베란다를 서성였다. "아빠가 그걸 우째 아는데, 이번에 새로 나온 소설인데." "라디오에서 나오대. 빨리 밥 무라." 아버지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때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한참 서 있었다. 처음 말을 배운 사람처럼 흰, 이라고 발음하는 아버지의 음성이 맴돌았다. 흰이라니. 강 너머 멀리서 온갖 불빛들이 조글조글 빛났다. 화물차의 헤드라이트 같은 것들이.

세금명세서 뒷면에 적힌 ''은 분명히 아버지의 글씨가 맞았다. 라디오를 들으며 한강 소설가가 맨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을 수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테고 누군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그런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아버지에게 한 글자의 책 제목과 상을 받았다, 로 간추려져 내게 전해줄 메모가 되었던 것이다. , 이 적힌 세금명세서를 반으로 한 번 더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흰을 전해준 아버지에게 나는 어떤 메모를 전해야 할까.

문을 잠그고 차들이 없는 틈을 타 도로를 건넜다. 찻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 지하철역 쪽으로 향했다. 지하철역과 육교가 먼발치에서 나타나자 아까 건너올 땐 보지 못했던 요란한 트럭 한 대가 갓길에 세워져 있었다. 옆구리가 터진 흰 트럭에는 커피, 녹차, 가 적힌 메뉴판과 함께 요상한 간판이 붙어있었다. '길가다방'. 아버지에게서 귀가 닳도록 들었던 그 유명한 길가다방이었다. 길가에 있는 간이 카페를 기사들이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진짜 길가다방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조그만 트럭이었지만 종류는 알찼다. 커피, 녹차, 매실차, 팥빙수, 컵라면, 토스트, 구운 계란, 온갖 견과며 과자들도 있었다. 일반 손님들이 아니라 기사들만을 위한 길가다방이었다. 차가 없이는 쉬이 올 수 없는 길가에 멀거니 세워놓은 길가다방은 꽤 큰 공터를 끼고 있었고, 조촐하게 플라스틱 테이블 한 개와 의자도 몇 개 가져다 놓았다. 아버지는 종종 일요일 아침밥상 대신 길가다방표 토스트를 가족 수대로 사오기도 했다. 종종 썬 양배추에 계란물을 입혀 구운 프라이를 넣은 뻔한 토스트였는데 우린 그렇게 맛있을 수 없다는 아버지의 장단에 응했다. 길가다방에는 온 동네 기사들이 다 모였다. 화물 기사부터 택시기사, 모 국회의원의 운전기사까지 길가다방 앞으로 모여들었다. 마실 거라곤 커피, 녹차, 매실차가 전부인 길가다방은 마실 것들은 조촐해도 꽤나 고급 정보들이 오가는 기사들의 정보 공유지였다. 아버지는 귀갓길엔 정해진 일정처럼 길가다방에 들러 일주일치 시름을 쏟아내고, 운송경로나 아파트 시세 같은 것들에 대한 정보를 한아름 챙겨왔다.

나는 천천히 길가다방 앞에 섰다. 쉰은 족히 넘어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풍채 좋게 적재 칸에 올라 앉아 있었다. 아가씨 뭐 먹게? 하는 물음에 토스트 한 개를 주문했다. 아버지가 종종 사오던 길가다방 토스트를 현지에서 먹다니. 군침이 돌았다. 토스트는 순식간에 만들어져 나왔다. 종이에 싼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갓 구워진 계란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뜨거운 한 입을 입안에서 살살 굴리며 김을 식히고 천천히 씹었다. 따끈하고 달짝지근한 계란 입은 양배추가 아삭하게 씹히고, 바삭한 토스트 겉면이 식감을 보탰다. 아버지의 표현대로 죽여줬다. 모양도 재료도 일요일 아침 막 잠에서 깬 입안에 밀어 넣은 그 토스트와 같은 것임엔 분명한데, 어쩐지 전혀 다른 맛이었다. 뜨거운 김을 잇새로 불어내며 급하게 토스트를 씹어 삼켰다. 길가다방 주인이 천천히 무라, 하면서 차가운 매실차를 종이컵에 따라 건넸다. 매실차와 토스트의 조합은 그야말로 명물이었다. "쥑이 준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아무런 소득도 없는데 몸이 노곤했다. "아빠 여기 없다. 차에 있더나, 일단 집으로 갈게." 동생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답장하지 않고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두 정거장 만에 집 앞에 다다랐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오니 해가 꽤 기울었다. 아직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지만 어쩐지 한 김 식은 듯 느껴졌다. 상점가를 지나 아파트 단지 쪽으로 들어서는데, 익숙한 실루엣이 저만치 걷고 있었다. 실루엣뿐만이 아니었다. 넓적한 엉덩이, 한쪽을 저는 듯한 엉거주춤한 팔자걸음, 숱 없는 머리, 분명히 아버지였다. 아버지인 건 분명했는데 어쩌면 아버지가 아닐지도 몰랐다. 엉거주춤한 팔자걸음이 향한 곳이 생소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검은 봉지를 달랑달랑 흔들며 모텔로 들어갔다.

카운터에는 마흔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앞에 서서 머뭇거리는 나를 여자는 새초롬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좀 전에 들어온 아저씨요, 저희 아버진데몇 호실인지 알 수 있을까요." 여자의 눈빛이 더 날카로워졌다. "그런 거 가르쳐주면 안 되는데, 근데 많이 닮긴 했네. 원래 이런 거 함부로 갈챠 주면 안 되는데 하도 닮아가 가르쳐 주는 겁니다." ", 혹시 누구랑 같이 계신가요……."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 혼자 오셨든데. 아버지는 203호실에 있었다.

문 옆에는 초인종이 있었다. 벨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아버지와의 이런 만남은 꿈에서도 상상해볼 일이 없는 거였다.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아빠, 똑똑똑, 아빠, 똑똑문 안쪽에서 달카락 손잡이가 돌아가더니 아버지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아버지의 탁한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곧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뭐 할라고 왔는데."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빤히 아버지의 얼굴만 들여다 봤다. 눈가주름이 검게 패여 있었다. 아버지는 별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방 안에서는 텔레비전 소리가 요란했다. 일요일 저녁 시간에 하는 예능 프로가 틀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침대 위로 올라가 자연스럽게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스마트폰에 얼굴을 박고 바둑을 두고, 예능 프로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뜨문뜨문 웃었다. 테이블 위에는 아버지의 하룻밤 잔해가 널려있었다. 빈 보름달 빵 봉지와 설탕물이 묻은 페스츄리빵 한 개가 남아있고, 맥주 두 캔과 근처 마트에서 산 듯한 먹다 남은 양념치킨 조각들이 통에 담겨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멀거니 그것들을 바라봤다. 텔레비전에서 웃음소리가 울리고, 스마트폰에서 아버지의 손끝을 따라 바둑알이 탁탁 놓이는 소리와 대국이 상대편으로 넘어가는 딩동, 같은 소리가 방을 메웠다. 아버지는 바둑판에 눈을 두고 미간을 깊이 쪼이며 심각한 얼굴이었다가, 상대의 대국이 길어지면 텔레비전을 보며 낄낄 웃었다. 침대 위에 편안한 자세로 누운 아버지는 휴양을 온 것 같았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아빠, 집에 가요 했다. 아버지는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대답도 건너오지 않았다. "아빠, 집에 가서 밥 먹자." 아버지는 바둑알을 한 개 더 놓았다.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져 고개를 푹 숙였다. 하루 사만 원짜리인 그 누구의 방도 아닌 방에서 빵과 치킨 조각 같은 음식들을 먹다 말고, 아버지는 그 어느 곳에서보다 편안하게 누워있었다.

뜨거운 것이 눈가로 차오르는데 뭔가가 탁 날아왔다. 발치에 떨어진 것은 까만 비닐봉지였다. 아까 아버지가 달랑 달랑 들고 가던 그것인 듯했다. 비닐봉지를 열어보니 콩떡 두 팩이 들어있었다. 쉬어버린, 아버지가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린, 그것과 같은 콩떡이었다. "떡 무라." 아버지는 내 쪽을 쳐다도 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눈물을 소매로 훔치고 떡 비닐을 뜯었다. 아이 주먹만 한 콩떡을 한 입 베어 우적우적 씹었다. 텁텁한 콩 잔해가 쫀득한 떡에 비벼져 고소했다. 한 개를 모두 삼키고, 다시 한 쪽을 베어 물었다. 아무 생각도 차오르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가 떡 무라, 해서 떡을 먹었다. 아버지가 흘끔 이쪽을 건너다봤다. "그거 다 묵고 가라. 쫌만 쉬다 갈끼다." 상대편의 바둑알이 탁 놓였고 누군가가, 어쩌면 언제나 그렇듯 아버지의 패가 결정된 듯한 알림이 울렸다. 아버지는 예이 지미, 하고 새로운 대국을 시작했다. 나는 콩떡 한 팩을 천천히 먹었다. 텔레비전의 웃음소리와 아버지의 바둑알 소리와 떡살이 쪼각쪼각 씹히는 소리를 들으면서 천천히 떡 한 팩을 모두 먹었다. 쉬어버리기 전에 모두. --




  <당선소감>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계속 써나갈 것"

이야기를 지으며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은 건 2011년 창작 수업에서였다. 그때 수업을 함께 들었던 누군가가 내 소설을 읽고 화를 냈다. 그 이야기가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서. 작품으로서의 가치 평가가 아니라 이야기에 대한 감정적 표현이었다.

그이는 그 이야기와 비슷한 삶을 사는 어떤 이를 알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삶이 얼마나 안타까운지도. 그때 내게는 짧은 섬광이 스쳤다.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어떤 삶을 떠올리게 하고 감정적 동요를 일으켰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야기를 쓰며 살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내게 글은 누군가를 들여다보는 일이자 삶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계속 써나갈 것이다.

내 모든 글의 첫 번째 독자이자 든든한 지지자인 어머니께 가장 감사드린다. 어머니의 머리맡에 완성된 이야기 한 편을 올려두기 위해 숱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생김새며 성격까지 쏙 빼닮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의 겹을 가진 아버지, 제 삶을 돌보기에만 급급한 누나를 대신해 기꺼이 가족에 힘을 보태는 남동생에게 감사하다.

다음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는 시야를 확장시켜주신 박훈하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공부와 삶은 함께 하는 과정임을 알게 해준 선배님들, 나의 쓰는 삶을 응원해주는 친구들, 함께 걷고 있는 김민수 씨와 아직도 나를 '우리 이쁜이'라고 부르는 외삼촌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마지막으로 계속 쓸 수 있게 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드린다

  ● 1991년생.

  ● 경성대 국어국문학과 졸.

  ● 1인 출판사 '네시오십분' 운영.

 


  <심사평>


  "아버지 부재 쫓는 치밀함과 감정 앞선 딸 모습 돋보여"


본심에 오른 10편 중 '하늘 날다', '핸드북씨', '국경', '흰 콩떡'이 완성도가 높았다. '하늘 날다'는 화분을 고층아파트 아래로 던지고 친구를 괴롭히는 어린이의 폭력성이 잔인한 게임에 빠져 지내는 아버지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밝힌다. '핸드북씨'는 고용이 불안정한 오늘날 직장인들의 고단함을 풍자적으로 그린다. 좌천을 당하는 과정과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인물의 모습을 능청스럽게 그렸다.

'국경'은 이야기의 대부분을 이루는 밀입국을 위한 차량이동 장면이 매우 긴박하고 압축적이다. 그러면서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의 언제 이야기냐 라는 정보를 제공하지 않음으로 독자로 하여금 오직 주어진 상황에 빠져들어 어떤 의미를 찾도록 서사전략을 펼친다.

'흰 콩떡'은 힘들게 돈을 벌어오면서도 가족으로부터 점점 소외되어가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장거리 트럭 운전사인 아버지는 어느 날 폭발해서 집에 들어오지 않고 딸이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데 뜻밖에도 집 근처 모텔에서 농성중이다. 주전부리를 펼쳐놓고 텔레비전 예능프로에 웃음을 날리면서 스마트폰 바둑을 두는 아버지는 자식들보다 훨씬 단단하게 현실을 마주하는 이 시대 가장들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소도구를 제대로 배치하면서 아버지의 부재를 쫓는 치밀함과 감정이 앞서는 딸의 모습은 작품의 장단점이기도 한데 숙고 끝에 당선작으로 정했다. 모든 분들의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 김성종, 조갑상, 김경연, 정영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