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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사려니 숲의 휘파람새 / 장미영

 

하이힐 소리가 났다. 소리는 1층 코너를 돌아 2층 일곱 번째 계단에서 멈춘다. 잠깐 숨이라도 돌리나. 다시 코너를 돌아 3층 계단을 딛는다. 또각또각 리듬에 맞춘 듯 경쾌하다. 하이힐 소리는 스물한 개 계단을 밟고 나서야 3층 문 앞에 섰다. 여기 유성 빌라에서는 처음 듣는 소리다. 굽 높은 펌프스 구두다.

침대에 누워 자려는데 의자 끄는 소리가 난다. 301호다. 가구라도 옮기나 싶다. 이사 온 지 사흘이 지났는데도 아직 짐 정리가 덜 됐을까? 혼자 사는 집에 옮길 가구가 많지도 않을 텐데. 발 덮개를 하지 않은 식탁용 의자다. 질질 끄는 소리가 잠시 멈춘다. 조금 있다 의자가 퍽 하고 쓰러졌다. 누군가 항의하러 갈 것 같은 큰 소리다. 그런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어느 집 대문도 열리지 않았다. 이곳 빌라 사람들은 소음에 너그럽다.

다시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린다. 슬리퍼 소리와 의자 끄는 소리가 뒤섞였다. 바람 소리가 난다. 베란다 쪽이다. 귀가 자꾸 소리를 쫓는 통에 나는 결국 일어나 앉았다. 의자가 좀 전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분명히 발로 차는 소리다. 의도적으로 의자를 넘어뜨린 것 같다.

마지막 손님을 보내고 칼국수로 점심을 해결했다. 늦은 점심을 먹은 탓인지 잠이 쏟아진다. 301호 의자 끄는 소리 탓에 잠을 못 잔 까닭도 있었다. 나는 하품을 크게 하고 기지개를 켰다. 약재는 고온고압에서 5시간째 끓는 중이다. 약재가 끓는 동안 갈근, 마황, 맥문동, 폐모, 백합 등을 섞어 약첩을 쌌다. 요새 감기 환자가 부쩍 늘었다. 한편에 썰어놓은 감초가 수북하다. 한의원 원장은 중국산으로 눈속임을 한다. 국산 감초는 모양이 균일하지 않고 절단면 색이 얇다. 그에 비해 중국산은 크기도 일정하고 절단면 색이 진하다. 약재의 향을 맡아보면 국산과 중국산이 확연히 다르다. 말린 상태를 보면 한 번 말린 건지 몇 번 쪄서 말린 것인지도 알 수 있다. 우리만 중국산 사용하는 게 아니라니까. 백출은 가격 차이가 네 배나 돼. 효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벌레도 안 생겨. 중국산을 쓰는 한의원이 얼마나 많은데. 원장은 스스로 합리화라도 하려는 듯 약재를 맡길 때마다 내게 해명을 하곤 했다. 환자에게는 중국산을 써도 식구들에게는 국산 약재만 골라 보약을 짓고 아플 때마다 한의원으로 불러 직접 돌본다. 겉으로 보면 원장은 그지없이 착한 남편이자 좋은 아빠다. 하지만 딱 그만큼이다.

추출기 불을 껐다. 얼마나 달여야 하는지, 언제 불을 꺼야 하는지, 지켜보지 않아도 귀가 먼저 안다. 살림 고수가 밥 익는 냄새만으로도 밥이 가장 맛있는 때를 아는 것처럼. 가끔 소리를 잘 듣는 게 도움이 될 때도 있다.

한약 포장까지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진료실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물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환자가 없는 한가한 시간 원장은 간호조무사와 그렇고 그런 시간을 보낸다. 두 남녀의 거친 숨소리와 조무사의 유니폼을 벗기는 소리가 들렸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린다. 가끔 소리를 잘 듣는 게 난처할 때도 있다. 두 남녀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알바만 6년째다. 확실치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새 무뎌졌다. 언제부턴가 퇴근길이 그다지 우울하지도 않다. 알바를 계속하다 보면 정규직 같은 느낌이 든다. 일 자체로는 알바나 정규직이나 별 차이가 없으니까. 맨몸뚱이로 바람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나를 보호해 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억울할 일도 뭐도 아니다. 지금 알바를 하고 있지만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한 단계일 뿐이다. 언젠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나는 안다. 다 자기 최면일 뿐이란 걸.

빌라로 가려면 정류장에서 한참을 더 걸어야 한다. 빌라는 지은 지 20년이 넘었다. 교통이 불편한 건 물론이고 화재로 그을린 것처럼 건물은 우중충하다. 비가 오기라도 하면 매번 누수가 생기고 정전도 잦다. 유성빌라, 이름만 근사하다. 머지않아 언젠가 이 빌라도 유성처럼 사라져버릴지 모른다.

하이힐이 이 낡고 별 볼 일 없는 빌라로 이사를 들어오다니. 유성이 떨어질 만한 사건이다.

202호 윤 씨 아내가 문 앞에 서 있다. 윤 씨는 현관 비밀번호를 자주 바꾼다. 귀가가 늦은 아내를 엿 먹이기 위해서다. 며칠 전 비번 바꾸는 소리가 나더니 또 저러나 싶다. 나는 비번을 누르다 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윤 씨 아내를 쳐다보았다. 비번을 가르쳐 줄까 싶기도 하다. 남의 집 비번까지 알고 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번호를 알려주려면 구차한 변명을 해야 한다. 귀찮은 일이다.

핸드폰 번호나 도어락 비번을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다. 번호 키를 누르면 두 가지 톤의 혼성음이 난다. 두 가지 톤을 조합하면 특정한 음정이 잡힌다. 각각의 번호에는 각각의 구별되는 음정이 있다. 처음에는 내가 특별히 소리를 잘 듣는 사람인 줄 몰랐다. 다른 사람들도 세심하게 들으면 소리를 구별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남들보다 소리를 잘 듣는다는 걸 알게 됐다.

언젠가 401호 지수네 부부 싸움이 크게 났었다. 머리가 쿵 하고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잠잠해졌다. 지수 아버지 목소리도 더는 나지 않았다. 무슨 사달이 난 것 같아 심장이 서늘했다. 나도 모르게 지수네 비번을 누르고 들어갔다. 지수 아버지가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사람이 다친 건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비번을 누르고 왔느냐가 더 큰 문제가 됐다. 지수 아버지가 경찰에 신고를 했다. 경찰에게 이상한 놈 취급만 받았다. 지수 엄마와는 무슨 관계냐에서부터 그 집 비번은 어떻게 알았느냐 한 시간 내내 취조를 받고 나왔다.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까지 듣는다는 내 말은 도무지 먹히질 않았다. 도어락 비밀번호 푸는 걸 직접 보여주고 나서야 풀려났다. 잔 물건이 없어지거나 도둑이 들었다는 소문이 돌기만 하면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이웃 주민들도 그럴 것이다. 일상의 소리가 문 밖으로 나간다는 건 누구에게나 불편한 일일 터였다.

냉장고에서 어제 남은 밥과 김치를 꺼냈다. 물에 말아 몇 숟가락 뜨다 내려놓았다. 101호 장 씨 아줌마가 세탁기를 돌린다. 어김없이 헹굼 3, 탈수 7분이다. 포차를 하는 202호 윤 씨가 요즘 찾기도 힘든 뽕짝을 튼다. 윤 씨의 턴테이블은 1분에 일흔여섯 번 돈다. 401호 지수 엄마가 욕실에서 목욕을 한다. 물소리가 꽤나 길다. 물소리 사이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점점 울음소리가 최고조에 달하다 어느 순간 멈춘 듯 조용해진다. 의식과도 같은 목욕이 끝났다. 지수 엄마의 제의적 목욕과 눈물은 어쩌면 구질구질한 이 빌라에서 오래 살게 하는 끈은 아닐지. 그 느낌은 내가 잘 안다. 한바탕 울고 나면 인생 뭐 있나, 별것 아니라는 턱없는 배짱이 생기기도 한다. 혹은 원래 삶이란 무의미한 것이니 일상의 반복을 견뎌낼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는, 유치하나마 실존 인식 같은 것이 생기기도 한다. 샤워기 잠그는 소리와 함께 욕실문이 닫힌다. 수면제인지 비타민인지 알 수 없지만 약병을 흔든다. 그리고 뒤를 이어 지수 아빠가 화장실을 들어간다. 소변보는 소리가 시원하지 않다. 오늘 특히 오래 앉아 있다. 완전 변비다. 24시간 중 자고 먹고 출퇴근하는 시간 빼고 남은 시간 똥을 싼다. 아까운 시간을 화장실에서 다 보낸다. 지수 엄마의 샤워 소리와 지수 아빠의 변기 물소리는 들을 때마다 애잔하다.

빌라 사람들은 밤이 아침이고 아침이 밤이다. 남들 자는 밤에 세탁기를 돌리고 가구를 옮긴다. 뽕짝을 틀고 샤워를 한다. 밤에 나간 아버지는 아침에 라면을 끓이고 아침에 나간 아이들은 별을 보고 들어온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가족이 모여 밥 먹는 소리를 별로 들은 적이 없다. 된장국 끊이는 냄새보다 라면 봉지 뜯는 소리를 더 많이 듣는다.

비번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홍주였다. 일을 하고 온 탓인지 수척해 보인다. 홍주의 얼굴 표정은 그날의 근무표다. 이번 주는 아침 6시 반 출근, 오후 4시에 퇴근하는 데이 주간이다. 병원 창립 행사 때문에 신입 간호사들끼리 율동 연습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병원 일만 해도 죽을 지경인데 율동 연습이라니, 돌아버리겠다며 들고 있던 가방을 내던졌다. 빈말이라도 홍주 마음을 달래 줄 기분이 아니다. 301호가 조용하다. 301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내 신경 줄 하나가 더듬이가 되어 천장을 더듬는다.

나는 옷을 벗었다. 홍주도 옷을 벗기 시작한다. 일주일에 세 번 홍주와 나는 몸을 섞는다. 거르는 날은 거의 없다. 서로 모자란 부분을 채우면 그걸로 된다. 깊은 관계 따윈 필요 없다. 그건 홍주가 더 원하는 일이다. 홍주는 다른 여자들처럼 별것 아닌 관계를 별것인 것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든다. 홍주와 나의 관계가 지속되는 이유다. 병원 일도 특별히 좋아서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면 홍주와의 관계도 특별한 건 아무것도 없다.

홍주의 리플을 빨았다. 신음소리를 냈다. 매번 관계가 뭐 그리 만족스러울까만 오늘따라 홍주의 표현은 과도하다. 몸을 섞을 때면 홍주는 스스로 몰입하려는 듯 목소리를 높이거나 몸의 자세를 여러 번 바꿨다. 처음에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차츰 영화 속 남녀처럼 교성을 질렀다. 소리만 들어도 거짓이라는 걸 안다. 셀프 효과음이다.

홍주에게 말한 적은 없다. 홍주도 나도 자기기만에 능했다. 한참 몸을 섞다가도 문득 홍주는 꼭 내가 아니라도 괜찮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느 때부턴가 나 역시 꼭 홍주여야만 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지웅이 너 이상해.

-뭐가?

-평소와 달라.

-어떻게 다른데?

-너무 몸 사리는 거 아니야?

하긴, 아까부터 느낀 거다. 오늘은 할 맛이 안 난다. 입맛이 없는 것처럼. 홍주 때문만은 아니다. 홍주와 뒹굴고 있는 게 이상하게 불편하다.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홍주가 놀란 토끼눈을 하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 안 들려?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그래.

홍주도 몸을 일으켰다.

-의자 소리.

-또 소리 얘기야?

홍주가 옷을 입었다. 말은 안 했지만 화가 난 표정이다. 홍주가 나갔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 의자 끄는 소리가 귓가에 뱅뱅 돌았다.

오전 830, 여자의 출근 시간이다. 한 번도 늦거나 빠른 적이 없다. 또각또각 펌프스 구두다. 나는 재킷을 걸치고 현관문을 나섰다. 여자가 계단을 내려오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목소리가 시큰둥하다. 여자 얼굴을 직접 본 건 처음이다. 그럼에도 소리를 통해 여자의 일상을 나름으로 가늠하고 있었다. 여자를 알고 있기나 한 듯 익숙하게 느껴진다. 어떤 이미지를 그려본 건 아니지만 눈앞의 저 얼굴은 상상해 본 적이 없다. 흰 바지와 핑크빛 아우터. 갸름한 얼굴에 눈썹이 짙다. 얼굴에 비해 눈, , 입이 지나치게 크다. 어린 시절에 봤던 순정 만화 주인공처럼 얼굴이 꽉 차 보였다. 여자는 내가 계단에 서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아챈 모양이었다.

-며칠 전 이사 오셨죠?

-.

-천지웅입니다.

-성미래예요.

여자가 가볍게 인사를 한다.

-그럼.

더는 볼일이 없다는 이웃치레 말투다.

여자가 무슨 일을 할까. 약재를 썰다 말고 아침에 마주친 여자 생각을 했다. 의자를 끄는, 그런 이상한 행동 따위를 할 여자처럼 보이진 않았다. 아주 멀쩡했다. 여자에게 관심이 가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여자에 대한 궁금증이 하루 종일 따라다녔다. 조그마한 소리도 자꾸 귀에 걸린다.

가랑비가 내렸다. 아침나절만 해도 화장하던 날씨였다. 약재 정리가 끝났다. 빈둥빈둥 시간을 죽였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 손님이 많지 않았다. 진료실 문을 두드리는 촌스러운 짓 따윈 하지 않는다. 원장이 보든 보지 않든 나는 닫힌 문 앞에서 묵례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우산 없이 걸었다. 간판이 젖고 바지가 젖는다. 사람들 모두 젖은 길을 걸어간다. 이 글을 쓴 시인도 허접한 일을 마치고 별 볼일 없는 기분으로 이 길을 걸어본 적이 있었을까. 맥주 생각이 간절하다. 젖은 길 그리고 맥주.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천 원짜리 지폐 두 장과 동전 몇 개가 나왔다. 개뿔, 겨우 캔 맥주 하나 살 돈이다. 주머니 안에 도로 돈을 집어넣고 연습실로 갔다.

연습실에 도착하니 멤버들이 노래를 듣고 있다. 왼손잡이. 밴드 이름이다. 녀석들 모두 왼손잡이다. 오늘은 댄스 음악을 몇 곡 들어보고 연주할 곡을 고르기로 했다.

직장인에게 취미 활동이란 삶이 그런대로 굴러간다는 자기 확인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 같은 거다. 아니면 좌절된 꿈과의 타협일지도.

-더블베이스군.

펑키 댄스곡인데 더블베이스를 깔았다.

-더블베이스?

기타 치는 녀석이 나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들어도 베이스 기탄데?

녀석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베이스 기타로 착각하기 쉽지. 베이스는 픽업을 달아 음을 전기 신호로 바꾼 거잖아. 멜로디보다 리듬을 중요하게 여기지. 주로 코드의 근음을 튕겨 소리를 내. 더블베이스는 멜로디의 진행을 더 중요하게 여겨. 뭐 그렇다고 리듬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중후하고 웅장한 느낌이 마치 양탄자를 까는 듯 현란하게 뛰노는 소리를 잡아 주지.

-그런 소리도 들리냐? 짜식, 대단한데.

드러머였다.

-그럼, 연습 시작해 볼까?

댄스곡 몇 곡 안 들었는데 연습을 재촉하는 것도 드러머다. 녀석들 모두 각자 자리로 가서 연습을 시작했다



솔직히 우리 밴드는 소리에 대한 감각이 제로다. 그러면서도 연습에 빠지는 녀석이 없다. 연습 시간은 칼이다. 밥이 나오는 것도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다들 목을 맨다. 누군가와 함께 밥 먹고 누군가와 저녁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 그 시간만큼은 무력한 젊음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다. 곪은 상처를 꿰매는 시간이랄까. 혼자 삼각 김밥만 먹지 않으면 괜찮다. 열정, 야망, 도전 의식, 청년이라는 단어에 붙어 다니는 것들이다. 내가 아는 현실에서 그런 건 없다.

밴드도 그렇다. 들여다보면 별 볼 일 없는 집합소다. 좋아하는 장르도 없다. 어떤 녀석은 모던 록을, 어떤 녀석은 메탈을, 서로 추구하는 음악도 달랐다. 보컬 녀석은 소리는 좋은데 늘 반응이 높거나 낮다. 연습할 때면 서로 튀고 싶어 했다. 자신의 악기, 노래에만 집중하다 보니 다른 악기의 소리를 귀담아듣지 않는다. 결과는 뻔하다. 소리는 소음에 가깝다. 감각도, 화음도, 자세도 도대체가 맞는 게 없다. 조화를 이루어 음악에 빛을 입히는 것이 우리 밴드에겐 요원하다. 편의점 알바, 오토바이 배달원, 대기업에 다니는 녀석까지 마치 눌렸던 뭔가를 터뜨리려고 음악을 하는 놈들 같다.

대기업에 다니는 녀석은 입사 때부터 지금까지 상사에게 이유 없는 갈굼을 당하고 있다. 언제 회사를 그만둘지 알 수 없다. 배달하는 녀석 역시 언제 중국집을 뛰쳐나올지 모른다. 삼시 세끼를 자장면으로 때우는데 진저리가 난다고 했다. 알바만 6년이나 한 나는 알바와 연주로 시간을 때우고 그럭저럭 홍주와 몸을 섞는다.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녀석들은 밴드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음악도, 미래도 우리들만큼이나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왼손잡이들은 내심 서로를 한심해한다. 밴드도 얼마 가지 못할 거다. 몇 번 악기를 두드리다 연습이 끝났다. 밖으로 나왔다. 늦은 밤 도시는 온갖 오염된 소리를 토해냈다. 구역질이 났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연습을 종일 한 것도 아닌데. 점심에 먹은 음식을 쏟아냈다. 토사물 위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불어 있는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온기 없는 밤이다.

-이게 무슨 소린지 알겠냐?

-새소리잖아. 호오 호께꼬 케꼬 하고 우는데? 근데 다른 새소리하고 느낌이 달라.

-그래?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이처럼 들떴다.

-새소리가 다 같지, 다르긴 뭐가 달라! 그 소리가 그 소리지. 당신 때문에 얘까지 자꾸 헛소리를 하잖아.

엄마가 밥상을 들고 들어오며 지청구를 했다.

-어떻게 다른 것 같냐?

아버지는 대화가 끊길까 애달파 바짝 당겨 앉으며 더 깊은 질문 속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소리가 높고 청아해. 근데, 자세히 들으면 소리가 점점 낮아져서 슬퍼. 남자의 휘파람 소리 같아.

-넌 슬프게 듣는구나.

내가 아버지와 같은 느낌을 가졌다는 게 기쁜 건지, 아버지 귀에 들린 소리가 틀린 게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어서 기쁜 건지 아버지의 얼굴이 모처럼 환하다.

-사려니 숲의 휘파람새야.

-휘파람새?

-마치 길고 가느다란 머리카락 같은 이끼가 온 숲을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 듯했어. 그런 신비한 곳에 사는 새지. 녀석들은 저녁이나 새벽에 노래를 더 잘 부르거든. 운이 좋으면 새벽녘에 녀석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아버지는 밥도 먹지 않고 급하게 일어섰다. 텐트와 옷, 녹음 세트를 챙겼다.

-어디 가?

-사려니 숲.

아버지가 현관문을 나섰다. 등에 매단 백팩 크기로 봐서 좋이 한 달은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엄마는 남은 밥을 마저 먹었다. 나는 소리를 찾아 떠나는 아버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멀리서 휘파람 소리가 났다. 사려니 숲의 휘파람새와 닮았다.

아버지가 떠나고 사흘째 전국적으로 큰비가 왔다. 아버지가 발견된 건 천마천에서다. 아버지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퉁퉁 불어 있었다. 누군가 아버지 시신을 발견하고 신고한 모양이었다. 나는 아버지 물건이 담긴 텐트를 들고 돌아왔다.

전봇대 앞에 몸을 기댔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엄마나 아버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소리에 빠진 아버지를 이상한 사람처럼 여겼다. 어린 내 눈에조차도 아버지의 삶은 그다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돌이켜보면 아버지 때는 그래도 꿈이라도 꿀 수 있었던 괜찮은 시절이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꿈에 살고 꿈에 죽었다. 스물아홉, 꿈조차 꾸기 어려운 지금의 나. 오늘만큼은 아버지가 나보다는 행복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10. 계단 밟는 소리가 들린다. 여자가 퇴근을 했다. 발자국 소리가 하나 더 들린다. 남자의 구두 소리다. 바닥을 밟는 소리가 묵직하다. 여자가 남자를 달고 왔다. 여자에게 남자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 했다. 여자의 손이 빠르게 비번을 누른다. 123031. 남자 구두 소리가 먼저 났다. 하이힐이 뒤따랐다. 문이 닫혔다.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쿵 하는 소리가 났다. 급하다. 침대가 들썩인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간드러지는 소리와 헉헉거리는 소리가 뒤섞인다. 남자가 옷을 입는다. 바지 지퍼가 찍 하고 올라간다. 시간이 짧다. 시간이 짧다는 건 둘 관계가 좋지 않거나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뜻이다. 여자가 집으로 남자를 달고 온 까닭일까. 기분이 찜찜하다. 남자 구두 소리가 마음에 걸린다. 남자가 계단을 다 내려갈 때까지 나는 멍 때리고 있다. 담배가 고팠다. 문을 열고 나왔다. 계단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담배를 물었다. 복도가 뿌옇다.

침대에 누웠다. 몇 번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의자 끄는 소리에 잠이 깼다. 잠잠한가 싶더니 또 시작이다. 의자가 큰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보통 때보다 조금 다른 느낌이다. 여자가 움직이는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는다. 한자리에 꼼짝없이 그대로 서 있기에는 지나치게 긴 시간이었다. 적막이 길어도 너무 길다. 나도 모르게 무슨 소리라도 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게 기분이 이상했다. 현관문을 열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잠깐 걸음을 멈춘 채 계단 난간에 기댔다.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또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괜한 오지랖이지 싶다.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 벨을 눌렀다. 반응이 없다. 어느새 내 손이 비번을 누르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주변을 훑었다. 탁자 위에 몇 권의 책과 커피잔이 놓여 있을 뿐 TV는 없었다. 시크한 말투만큼 살림살이가 간결하다.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방문을 열었다. 침대가 비어 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다시 거실로 나와 베란다 문을 열어 보았다. 날 선 어둠이 빌라 주변에 웅크리고 있다. 베란다 한쪽 구석에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여자가 달팽이처럼 고개를 무릎 사이에 끼운 채 몸을 말고 있었다. 여자 옆에 의자가 넘어져 있고 커튼이 찢겨 있다. 여자가 고개를 든다.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의자를 세웠다.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안았다. 알지도 못하는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온 거나 아무렇지 않게 안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룸메이트처럼 어색하지 않다. 여자도 그런 모양이었다. 여자가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베란다 문 틈새로 찬 공기가 들어왔다. 여자가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연수나 엠티 정도는 참을 만해. 아니 참아야지. 취업 준비 삼 년 만에 들어간 회사니까. 그런데 교육 담당자들의 끊임없는 찝쩍거림은 속수무책이야. 같이 자야 교육 평가며 연수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다네. 자고나도 달라지는 건 없는데. 여자는 내 품에 파고들더니 한쪽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연습 많이 하면 결전의 날에 두려움 없이 갈 수 있을까? 놀이하듯 자꾸 의자를 넘어뜨리다 보면 그렇게 될까? 혼자 말하듯 말의 높낮이가 없다.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채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도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여자를 안고 침대로 왔다.

안개가 낀 미로숲이다. 홍주와 손을 맞잡고 걷고 있었다. 홍주가 걷다 말고 참꽃보다 헛꽃이 먼저 핀다는 산수국 향기를 맡았다. 내 귀에 대고 무슨 말인가 속삭였다. 그 소리에 눈을 떴다. 여자의 숨소리가 고르게 퍼진다. 나는 여자 팔을 풀고 일어서서 계단을 내려왔다. 홍주는 마음이 이러니저러니 말했던 것 같다.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라면을 샀다. 계단을 올라오는데, 여자가 계단 난간에 기댄 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여자가 나를 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캔맥주 하나를 내밀었다.

-한잔할래요?

-, 그러죠.

나는 엉겁결에 맥주를 받았다. 몇 모금 홀짝거리는 나와 달리 여자는 단번에 맥주를 들이켰다. 생기가 없던 얼굴이 술기운 탓인지 홍조를 띠었다. 맥주 한 모금을 목으로 넘기는 순간 여자가 다 마신 캔을 머리 위로 흔들더니 계단을 올라갔다.

여자의 행동이 생뚱맞다. 의자 사건도 있고 그래도 조금은 여자가 친한 척할 줄 알았다. 맥주도 한잔했다. 서로 이름도 아는 사이다. 게다가 그날 밤 일도 있는데 여자는 마치 나를 이웃주민 대하듯 굴었다. 나는 남은 맥주를 마저 마셨다. 여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홍주가 쉬는 날이다. 알바를 마치고 집으로 왔다. 거실에 펼쳐 놓은 텐트에서 한 시간 넘게 뒹굴었다. 가끔 텐트 안에서 한다. 홍주는 텐트에서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했다. 아니 오히려 재미있어했다. 그런데 오늘은 등이 아파서 못하겠다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우리 관계도 얼마 남지 않았군.

끝이라는 말이 이렇게 쉽게 나올 줄 몰랐다. 그것도 아주 담담하게.

-그런가? 이별 섹스네.

홍주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사실 식탁 위에서, 거실 바닥에서, 빌라 계단에서, 욕조 안에서 닥치는 대로 몸을 섞었다. 그런데도 섹스만으로는 뭔가 꽉 찬 느낌이 들지 않았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느낌. 밴드에서 연주하고 난 뒤의 기분과 비슷했다.

-이별 섹스?

-그래. 네 말대로 이제 우리 관계도 끝이잖아. 마지막으로 하는 거네.

-그런가.

나는 홍주가 한 말을 그대로 흉내 냈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거니까.

홍주와 나는 동호회 회원 같다. 애정과는 별개로, 진짜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될 수도 있을 듯했다.

-컵라면 정도는 함께 먹을 수 있겠지.

-삼 분쯤이야.

내 말에 홍주가 웃었다.

-텐트가 많이 낡았는걸.

홍주가 웃다 말고 텐트 이야기를 했다. 텐트가 군데군데 찢어져 있다. 낡은 데다 찢어져 보수가 안 될 정도다. 그동안 잘 버텼다.

-다시 쓰는 건 불가능하겠지?

-찢어졌으니까.

홍주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맞다. 찢어졌으니까.

텐트 안에 있던 녹음기를 홍주가 껐다.

-녹음기 말이야. 할 때마다 새소리를 틀어 놓는 거. 깊은 산속에서 둘이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했었어.

몸을 섞을 때 녹음기를 틀어놓는 나를 보고 홍주는 사이코라고 했다.

-, 동물, , 모든 것은 말이야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거짓이 없다는 거야.

-, 소리 이야기 말고는 할 말이 없지?

일주일이 지났다. 홍주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알바비를 받았다. 빌라 근처 치맥집으로 갔다. 시간이 이른 탓인지 가게 안이 한산했다. 창가 쪽으로 갔다. 301호 여자가 앉아 있다. 탁자에는 치킨과 빈 병 몇 개가 쌓여 있다. 여자는 벌써 꽤 마신 듯했다.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여자를 아는 체할 뻔했다. 여자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알바생이 컵과 물수건을 가져왔다. 맥주와 안주를 시키는 동안 여자는 계속 맥주를 마셨다. 나 역시 맥주에 목이 말라 있던 터라 단숨에 들이켰다. 내가 컵을 탁자에 내려놓는 순간 여자는 맥주를 더 주문하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나와 여자의 시선이 부딪쳤다. 여자는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시선을 피한다. 그러고는 알바생을 불렀다. 여자는 아무 표정이 없다. 별 의미가 없다는 반응이다.

-이건 사는 게 아니야.

여자가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나는 여자가 남은 맥주를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 여자는 몸 가누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여자를 업고 빌라로 왔다. 123031. 비번을 눌렀다. 여자가 곯아떨어졌다. 침대에 눕혀 둔 채 방을 나왔다.

재킷을 벗고 거실에 앉았다. 한쪽 구석에 주사기며 장갑, , 링거병, 구두 등 잡다한 것들이 널브러져 있다. 홍주가 병원에서 가져온 것도 있고 내가 주워온 것도 있다. 알바를 갔다 오면 나는 쓸데없이 두드리고 던지고 밟는다. 소음으로 들릴 것이다. 소리를 만드는 순간 꿈에 한 발 다가선 느낌이다. 가끔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위로를 받는다. 아버지도 같은 마음이었겠지. 그런 생각을 했다.

쓰레기더미 옆으로 아버지의 유품이 보였다. 그냥 버릴까 하다 내버려 둔 거였다.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다. 유품 상자 안에 있는 녹음기를 꺼냈다. 아버지가 녹음한 것들이 담겨 있다. 볼륨을 높였다. 빗물 떨어지는 소리를 5시간 가까이 녹음한 거였다. 반복적으로 녹음한 소리와는 비교도 안 된다. 강약이 다르고 리듬도 다르다. 마스터테이프 자체가 디지털로 녹음되는 시대다. 데이터를 한 자리씩 끊어 정밀도를 높일 수 있는 현대식 방법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잡음이 들리긴 해도 옛날 그대로의 방식을 고집했다.

나는 녹음기를 듣고 다시 또 들었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상하게 눈을 감자 소리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은 사라지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바람에 억새풀이 부대끼는 소리, 첼로 소리, 빗물 떨어지는 소리, 새의 날갯짓 소리, 돌멩이 구르는 소리까지 모든 소리가 내게 말을 건넨다. 기계음으로는 들을 수 없는, 날 것의 소리, 두께가 다른 소리다.

다른 날보다 일이 일찍 끝났다. 당귀, 작약, 청궁, 지황, 사물을 넣고 스무 첩만 포장하면 끝이다. 포장한 한약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샀다. 저녁으로 때웠다. 배속에서 면발이 퉁퉁 불었다. 마음 한구석이 퉁퉁 불었다. 인생 전부가 퉁퉁 분 것 같았다.

홍주가 찾아왔다. 일주일 만이다. 근무 전에 잠깐 들른 거라고 했다. 안부나 군더더기 같은 질문도 대답도 없었다. 홍주가 거세게 달려들었다. 내 꼴이 힘 빠진 수사자 신세다. , , 끊기는 듯한 단음을 내더니 격렬한 소리를 낸다. 귀를 속이는 교성은 여전했다. 절정의 순간에 막 다다르려는 순간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의자 소리다. 여자가 말하던 결전의 날이 떠올랐다. 어디 가? 홍주의 말에 나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대충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단숨에 뛰어 올라가 비번을 눌렀다. 여자가 머리를 풀어헤친 채 의자를 질질 끌며 거실 중앙을 어슬렁거렸다.

-괜찮아요?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여자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그날은 아니에요.

여자가 나를 보고 씩 웃었다. 딴 세상 사람처럼 보였다.

여자의 텅 빈 웃음을 보는 순간 의자 놀이 하는 여자의 기분이 어떤 건지 이해가 됐다. 그러면서도 그날이 언제일지 모른다는 사실에 불안했다. 불안하면서도 이해가 됐고 이해가 돼서 더 화가 났다.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할 만큼 복잡했다.

현관으로 돌아온 내 꼴을 본 홍주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가는 거야?

-.

긴 말이 필요 없다. 이제 홍주와 나는 긴 말을 주고받을 사이도 아니었다. 문 닫는 소리가 거칠다. 나는 침대에 드러누운 채 TV를 틀었다.

알바를 그만뒀다. 1년 하기로 한 계약이 끝났다. 원장은 아쉬워하는 표정 한 번 짓지 않고 봉투를 건넸다. 재계약하는 건 원장은 원장대로, 나는 나대로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마지막 알바비를 받고 집으로 왔다. 계단참에서 301호 여자와 마주쳤다. 여자가 나를 보고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그리고는 웬일로 환하게 웃었다. 여자가 환하게 웃는 모습은 이사 오고 처음 봤다. 여자가 웃을 수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나는 여자가 계단을 먼저 올라가도록 비켜주었다.

오랜만에 잠을 푹 잔 것 같다. 몸과 마음이 이상하리 만큼 가볍다. 거실 한구석에 세워 놓은 텐트가 보였다. 텐트를 접어 백팩 안에 넣었다. 아버지의 녹음기도 챙겨 넣었다. 백팩을 매는데 체중이 실린 둔탁한 소리가 쿵, 하고 울렸다. 나는 한달음에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비번을 누르는 손이 자꾸만 헛나갔다. 현관문이 열렸을 때엔 여자가 거실 옷걸이에 목을 맨 채 바동거리고 있었다. 길고 가느다랗게 흔들리는 여자의 머리카락 같은 이끼가 숲을 그윽이 감싸고 있었다. 물속에 어린, 남자의 그림자가 보인다. 나무들 사이로 휘파람새 소리가 들렸다. 호오 호께꼬 케꼬



  <당선소감>


   "세상 소리에 귀 기울이는 따뜻한 글쟁이 되고파"

한 달 전 즈음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니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교통사고 같은 건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리 불편한 건 문제가 아니었다. 몸무게가 7킬로그램이나 빠졌고 몸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다는 게 더 문제였다. 치료를 맡고 있던 한의사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난 그저 직장인이면 으레 받는 스트레스 탓이라고 대충 둘러댔다.

매년 이맘때면 겪는, 아니 내내 겪어오던 신춘앓이였던 것 같다. 몇 년에 걸친 투고와 거듭되는 낙방, 반복되는 좌절감에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쳤던 모양이다. 교통사고 같은 건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듯, 어쩌면 소설 당선도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 그렇게 생각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에 당선 전화를 받았다. 한참을 멍하니 그렇게 서 있었다. 그 어떤 것도 무관하지 않은 일로 내게 다가왔다.

내 속으로만 하던 이야기를 이제는 조근조근 세상 밖으로 풀어낼 수 있게 된 것 같아 기쁘다. 아직은 제대로 발아되지 않은 내 글들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조금은 늦었지만 늘 그랬듯 외롭지만은 않았던 이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럴듯하게 당선 소감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그 어떤 말보다 열심히 쓰겠다는 이 한마디가 가장 멋진 소감은 아닐까 싶다. 멋진 다짐 또한 당당하게 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님과 국제신문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오랜 시간 묵묵히 기다려 주고 응원해준 나의 가족, 친구, 문우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며 부족한 제자를 아낌없이 이끌어 주신 정형남 선생님과 박영숙 선생님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따뜻한 글쟁이가 되고 싶다.

열심히 쓰겠다. 하늘에 계신 엄마가 환하게 웃고 있는 것 같다. 참 좋다.



  ● 1975년 서울 출생.

  ● 동부산대학 유아교육과 졸업.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졸업. 현재 어린이집 교사. 

  ● 2012년 천강문학상 우수상.


 

  <심사평>


  "이웃과 단절된 우리 시대의 풍경화 잘 그려"


예심을 거쳐 본심으로 넘어온 여러 작품을 읽으면서 소설 쓰기란 결국은 세상과의 대화라는 평범한 결론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올해 국제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의 본심 진출작은 전통적인 사랑 이야기 외에도 동반 자살, 다문화 가정, 직장 왕따 등 다양한 소재와 다채로운 이야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선자들은 이 가운데서 다시 4편의 작품을 추려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잘 지내 뚜언은 요즘 한국 사회의 화두인 다문화 문제를 제기한 것에 호감이 갔다. 그렇지만 문제의식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하고 범속한 결론으로 그친 것이 아쉬웠다. ‘토분은 지하철에서 위험에 빠진 어린아이를 구하고 죽은 의인의 아내가 살아남은 아이에게 보이는 집착을 다룬 작품이다. 선명한 철학적 주제의식을 보인 것은 좋았지만, 이를 받치는 문장의 탄력성이 부족해 제외됐다.

필경사 j’는 한 남성을 사랑하는 젊은 여성의 내면 독백인데, 섬세한 심리묘사가 돋보였다. 그러나 단정한 소품이라는 느낌을 떨치기에는 시선의 폭이 좁은 것이 흠으로 지적되었다.

사려니 숲의 휘파람새는 일용직 젊은이의 시선으로 이웃과 단절된 우리 시대의 삭막한 풍경화를 잘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스스로를 소외시키면서도 타인과의 관계 회복을 열망하는 현대인의 모순된 심리를 소리라는 오브제와 연결시킨 대목은 자연스러웠다. 비교적 흔한 소재라는 것이 아쉬움으로 지적됐지만, 어렵지 않게 당선작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당선 작가의 정진을 당부하며, 아쉽게 선에서 밀린 분들도 문학을 향한 꿈을 잃지 말기를 부탁드린다.

 

심사위원 : 이순원, 강동수, 정광모, 정훈